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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용감한 시민상...))<칼럼사설수필> 2004. 2. 17. 08:58
수필 ((용감한 시민상...))
"바스락. 차아악! 바스락. 차아악!"
멀리 꿈결같이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아직 깊은 잠의 나락에서 빠져 나오기에는 역부족이다. 비몽사몽간에 들려오는 소리는 잠시 조용해졌고 다시 무의식의 세계, 아니 죽음과 같은 침묵의 아편 속에 다시 빠져들었다. 며칠 간 남해안 여행에서 돌아오자 잠에 떨어졌다. 직접 운전하며 가족과 함께 찌는 듯한 더위에 남해안을 돌았으니 온몸이 말이 아니었다. 전신이 아파 왔고 피곤이 엄습했다. 초저녁부터 흐드러지게 잤다. 업어가도 모를 만큼 곤한 잠을 자고 있는데 어렴풋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허리와 다리는 천근만근 추를 단 듯 무거웠다. 사실 깨어났다기 보다 꿈속에서 도둑이 들어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온몸을 밧줄로 엮어놓은 듯 전혀 움직일 수 없다. 아직은 잠에 취해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잠에 빠지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다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무엇이 지나가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섬뜩함이 느껴졌을 무렵에는 어느 정도 완전 무의식 세계를 벗어날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몸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여기가 어디일까?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선 그것이 궁금했다. 눈조차 제대로 떠지지 않으니 어디인 줄 알 까닭이 없다. 이내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집에 도둑, 아니 졸지에 강도로 돌변할 수 있는 흉악범이 들어 온 것이다. 사방은 그가 오가며 바스락거리는 소리 외에는 너무 조용했다. 손을 더듬어 봤다. 안 사람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나와 아내는 큰 방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아이들도 각자 방에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잘못하면 가족들이 위험했다. 몇 놈이 들어 왔을까?. 놈들의 규모를 알 수 없었다. 아파트 8층에 어떻게 들어왔을까?. 옥상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을까, 현관문을 통해 들어 왔을까?. 현관문을 잠그지 않아서인지, 자물쇠를 뜯고 왔는지 모든 것이 궁금했다. 어쨌든 좀도둑은 아니었다. 한 밤중에 아파트에 침입할 정도면 언제든 강도로 돌변할 잔인하기 짝이 없는 놈일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염려됐다. 신문에서 보면 사람 죽이기를 밥먹듯 하는데 어떻게 대처할까?. 아직 눈을 뜰 수가 없다. 어느 놈이 나를 감시하고 있을 줄 아는가?. 어둠 속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일당이 있다고 생각하니 식은 땀이 흐른다. 요놈들에게 섣불리 반항해서는 안 된다. 물건이야 가져가면 어떤가?. 절대 가족이 다치면 안 된다. 아무리 흉악해도 잠자는 사람(?)을 찌르지는 않을 것이다. 원한이 있을 사람도 없는데.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전체 상황을 정확히 알 때까지는 잠든 채 하는 것이 상책이다. 눈을 뜰 수 있었으나 자는 체 하기로 했다. 우리 집에 값나가는 물건이 있을 턱이 없고 귀중품을 내놓으라고 잠을 깨면 어떻게 하지? 잠이 달아났고 몸도 움직일 수 있었다. 이불 속에서 발을 뒤척여 봤다. 그런대로 움직였다.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저 놈들을 잡을 수는 없을까? 침대 옆에 야구방망이가 있으니 한두 명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저 놈들을 그냥 내보내느니 화끈하게 붙잡아 버릴까 생각됐다. 강도를 붙잡아 경찰청장에게 '용감한 시민상'을 타던 기사가 생각났다. 나라고 '용감한 시민상'을 타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박수를 치는 가운데 상을 받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도둑과 마주친 상황에서 겁에 질려 눈을 뜨지 못하다 엉뚱한 생각을 했다. 서서히 눈을 떠보기로 했다. 여전히 "바스락. 차아악!"하는 소리는 계속된다. 그런데 웬 도둑놈 움직이는 소리가 몇 초 간격으로 똑같이 나지? 베란다 쪽이 분명했다. 야구방망이를 살며시 들었다.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며칠 후면 타게 될 '용감한 시민상'을 기대하면서... 살며시 거실로 나가 베란다로 향했다. 여름밤이라 거실과 창문 할 것 없이 모두 열어 놓았고 어둠에 익숙해져 걷는데 어려움이 없다. 겁에 질린 고양이가 호랑이를 잡으려 기습공격을 하듯 극히 낮은 자세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베란다로 나가는 거실 벽면에 기대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바스락. 차아악! 바스락. 차아악!" 여전히 일정 간격으로 소리가 났다. 뭔가 이상했다. 도둑이 아닐지도 몰랐다. 베란다로 향했다. 방망이를 단단히 쥐고 말이다. 웬걸! 베란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베란다에서 외부로 통하는 곳에 걸쳐 있던 차양막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였다니... 엄청난 안도감과 함께 '용감한 시민상'이 졸지에 날라가는 순간이었다. "도둑이 그렇게 멍청하데? 가져 갈 것도 없는 집에 들어오게"라고 뒤늦게 잠이 깬 안 사람이 나를 놀린다. "바스락. 차아악! 바스락. 차아악!" 여전히 소리는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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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수필
(제목) 용감한 시민상
제2사회부장,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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