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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소세양과 황진이, 가람 이병기
    <칼럼사설수필> 2015. 3. 23. 10:57

     

     

     

     

     

     

    <칼럼> 소세양과 황진이, 가람 이병기

     

     

     

     

     

    양곡 소세양陽谷 蘇世讓(1486~1562) 생가 및 말년 거주지를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특히 미륵산과 용화산을 흐르다 금마저수지로 모아지는 도천道川 곳곳에는 양곡 글씨라는 암각서 등이 남아 생가와 퇴휴당退休堂 복원과 함께 황진이와의 한 달간 애틋한 사랑을 주제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 좋을 듯싶다.

     

     

     

     

     

     

    송도 기생인 황진이는 빼어난 미모와 총명함으로 시서화詩 삼절三에 가무歌는 물론 거문고 등을 다루는 솜씨와 역사. 문학에도 해박해 한국최고 반열의 기생이다.

     

     

     

     

    15세 진이의 뇌쇄적 아름다움에 홀린 이웃 총각이 상사병으로 죽자 기생이 되었을 정도로 출발부터 예사롭지 않다.

     

     

     

     

    뭇 사내를 후리고 성인군자인 양 하는 사대부 선비를 조롱하거나 사모의 정을 나타낸 시를 탁월한 비유와 은유로 읊어 명성을 날렸다.

     

     

     

     

    결코 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던 종실 벽계수는 빼어난 자태로 희롱하는 듯 구애하는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중략)”라는 몇 구절에 말에서 떨어지고 만다.

     

     

     

    살아있는 부처, 生佛로 통하던 지족선사도 한 방에 파계시켰다.

     

     

     

     

    뭇 남성이 무릎을 꿇었지만 화담 서경덕만은 노골적인 구애와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아 진이는 화담과 자신(진이), 박연폭포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칭했다.

     

     

     

     

     

     

    당대 소리꾼, ‘이사종과 황진이의 사랑은 지금도 훈훈하다.

     

     

     

     

    두 사람의 팔도유람은 소리와 시조, 창과 춤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이사종과 사랑을 읊은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중략)”라는 시조는 빼어난 수작이다.

     

     

     

     

    진이는 죽은 후에도 당대의 호걸, ‘백호 임제白湖 林悌’(1549~1587)의 옷을 벗긴다.

     

     

     

    평안도사로 부임하던 백호가 황진이 무덤에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을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는 추모시조를 읊었다가 벼슬이 떨어졌다.

     

     

     

     

     

     

     

    양곡 소세양도 남다르다.

     

     

     

    당시 익산 미륵산 용화산 부근은 노씨들이 대부분 토지를 소유했더란다.

     

     

     

    가난한 집안의 양곡과 노씨 딸의 혼담이 오갔으나 당사자는 좋아하는데 딸의 부친이 가난한 남자에 시집보낼 수 없다고 반대해 혼사가 깨진다.

     

     

     

     

    훗날 장원급제해 어사화를 꼽고 내려오는 양곡을 노씨 딸은 지붕 위에서 구경하다가 자살했단다.

     

     

     

    형조. 호조. 병조. 이조판서뿐 아니라 우찬성. 좌찬성 등을 역임했던 양곡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목전에 두고 낙향한다.

     

     

     

    기묘. 을사사화에도 목숨을 보전했던 그는 모친을 돌본다며 죽기 17년 전에 익산 도내골道川에 내려온다.

     

     

     

    사화에 죽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이는 중종 35(1540)이나 양곡이 사망했던 명종 17(1562) 조선왕조실록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양곡은 송강 정철과 쌍벽을 이루어 1480편 시문이 문집인 양곡집에 수록됐을 뿐 아니라 그의 둘째 형으로 역시 장원급제 후 대사간을 역임했던 곤암 소세량困菴 蘇世良(1476~1528)과 함께 화암서원에 배향됐다.

     

     

     

     

    양곡 형제가 살았던 도천물이 흐르는() 바위가 한양까지 길()로도 활용됐다며 지어졌다.

     

     

     

    일설에는 곤암과 양곡 형제를 중국의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형제에 비유해 도천이라 했다는 말도 전한다.

     

     

     

    미륵사지와 왕궁탑도 지척이다.

     

     

     

     

     

    도천에는 물에 잔을 띄워 잔이 앞에 오기 전에 시를 짓는 유상곡수流觴曲水와 호미를 걸어 놓고 쉬는 평평한 곳이나 정자인 하서대荷鋤臺등 양곡 필체라는 암각서가 있다.

     

     

     

     

    양곡은 서계마을 퇴휴당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 용화산 동쪽에 묻혔다.

     

     

     

     

    양곡과 생애 마지막 한 달을 지낸 황진이달빛 아래 오동잎 지고. 들국화는 찬 서리에 누렇게 시들었는데(중략)”라는 극구 헤어지기 싫어하는 로맨스를 담은 시조를 남겼을 정도로 양곡은 풍류에도 유명했다.

     

     

     

     

    더욱 양곡 생가와 묘지 지척이 시조작가이자 국문학자로 유명한 가람 이병기’(18911968) 생가다.

     

     

     

     

    잘 활용하면 용화산 양쪽을 한시와 고시조, 그리고 현대시조의 대표지역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

     

     

     

     

    양곡 생가와 퇴휴당 복원, 황진이와의 애틋한 사랑 등을 가람 생가와 연계해 관광자원으로 활용을 모색할 때가 아닌가 싶다./편집위원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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