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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사 미스터리](18) 금마면 왕궁리 유적<인물산하기관> 2006. 4. 27. 17:10
한국사 미스터리](18) 금마면 왕궁리 유적 [경향신문 2003-09-22 16:09] 포토
한복입은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벌써 잊었나?
짜릿한 노출의 기억'받지 않을 자유',
삐삐라면 가능해!바자 3월호
◇쌍릉은 무왕부부의 무덤=반경 5㎞ 이내에 그걸 뒷받침할 만한 유적들이 집중돼 있다. 무왕 때 조성된 미륵사(彌勒寺)는 비록 그 터만 남아 있지만 삼국 최대의 가람을 갖추었던 곳. 또한 주변의 익산토성과 제석사지는 물론 무왕과 선화공주의 부부묘라고 전해지는 익산쌍릉(益山雙陵)
등 많은 백제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지명이 왕궁리(王宮里)라는 점도 심상치 않은 대목.
우선 익산쌍릉이 무왕부부의 묘일 가능성은 1915년 도굴된 이 무덤이 일본인이 의해 조사됨으로써 제기됐다. 즉 무덤내부의 구조가 부여 능산리에 있는 백제왕들의 무덤구조와 같고, 따라서 무덤은 왕릉급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즉 판석을 다듬어 만든 널길까지 갖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내부에는 목제 관을 안치했다. 무령왕릉의 벽돌무덤 내에 있던 목관과 유사한 형태의 관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훗날 무령왕릉의 목관은 일본산 금송으로 밝혀졌는데, 익산 쌍릉의 목관 역시 일본산 고야마키(일본에서만 사는 침엽수)이다. 이렇게 쌍릉의 목관이 백제의 왕실에서 행해진 장례전통(일본산 목재를 쓴 것)을 따랐다고 볼 때 왕릉급일 수밖에 없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5층 석탑을 두고 벌어진 논쟁=무왕의 천도·별도설과 관련, 또하나 주목을 끈 건 왕궁리 5층 석탑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탑은 백제시대의 탑인 익산 미륵사탑과 부여 정림사 5층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한국미술사학의 태두 고유섭이 “이 탑은 백제양식을 고려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석탑”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고려의 탑’으로 비정되고 있었다.
1965년. 이 왕궁리 5층 석탑(보물 44호)의 해체 복원을 위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2월5일 기대하지 않았던 탑의 사리장치(舍利藏置)와 그에 따른 장엄구(莊嚴具)들이 발견됐다. 5일 뒤인 10일에는 건축물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심초석(心礎石)에서도 사리장엄구가 확인됐다. 더구나 심초석에 마련된 사리공은 ‘품(品)자’형으로 3개의 사리공을 갖췄으며, 그 중 하나의 사리공에서 광배(光背)와 대좌를 갖춘 금동여래입상 1점과 금동방울 1점이 확인됐다.
이 사리장엄구가 어느 시대의 것이며, 과연 석탑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느냐는 것이 새삼스럽게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탑을 해체보수했던 발굴단은 사리장엄구 가운데 금동여래입상의 양식이나 사리병 등의 유물은 고려시대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해석했다. 물론 탑 자체는 고려시대보다 앞서는 시기에 있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한 것으로 정리했다.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서기 639년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그러던 1970년. 일본 교토대 마키타 다이료 교수가 10세기쯤에 편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를 발견했다. 무왕의 익산천도 기사가 적힌 자료였다.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次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 즉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사찰을 경영했는데 그때가 정관 13년(639년)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치는 비가 내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어~”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지모밀지’는 백제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9주의 하나인 노산주에 속한 지모현(枳牟縣)의 지모와 연결되고, 또 지마마지(支馬馬只)라고 했는데 그곳이 금마(金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 황수영 박사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부산에서 열린 제1회 역사학 대회에서 이 설을 처음 제기했다. 그는 도쿄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어느 저명한 역사학자가 “문헌적인 근거없이 무슨 소리냐”는 요지로 일축당했다. 그렇게 수모를 당한 황박사였기에 ‘관세음응험기’ 발견을 반겼고, 이를 학술지(백제연구)에 소개한 것이다.
◇왕성임을 알리는 고고학적 조짐들=사실 여부를 증명하기 위한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굴조사도 1989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진행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무왕의 익산 천도설, 혹은 행궁설, 행정수도 경영설을 뒷받침할 만한 실마리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우
선 왕궁리 유적은 백제 말기에서 통일 말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적에서 수습된 목탄에 대한 탄소측정연대(서울대 AMS 연구실) 측정 결과 서기 535~630년이었다.
무엇보다도 백제 말기에서 통일 초기에 해당되는 유구는 석탑이 있는 지역의 성벽 유구와 부속된 많은 건물터가 해당된다. 출토된 백제토기와 기와류의 질은 공주 공산성이나 부여 부소산성 등 백제 도성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같다. 또한 중국에서도 사례가 많지 않고, 한반도에서는 한번도 확인되지 않은 연화판문청자병(蓮花瓣紋靑瓷甁) 조각과 중국 북조(北朝)시대에 제작이 유행했던 청자편의 발견은 왕궁리 유적의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다. 또 ‘5부명’ 인장와(백제는 都下에 5부를 두었다)와 ‘수부(首府·수도를 뜻함) 명문 인장와’는 이곳이 도성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
왕궁리에서는 또 부소산성에서나 귀달린 토기(耳杯)가 출토됐다. 이런 토기들은 국가가 관장하는 가마에서 구워 부여 및 왕궁으로 공급되지는 않았을까. 특히 서북쪽 성벽 안쪽에서는 공방지로 추정되는 유적이 조사됐고, 여기에서 다량의 도가니와 도가니에 부착된 금(金) 슬랙이 확인돼 이 유적의 격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시사해주고 있다.
◇익산은 백제말의 행정수도=그리고 관심의 초점인 5층 석탑은 이 석탑이 통일후기에 마련되었음이 확인되고 있으며, 이에 앞서 석탑 이전에 목탑이 존재한 것도 밝혀지게 되었다. 목탑이 마련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백제 말기에 성벽과 같이 마련되었던 건물들이 없어지고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이곳이 사찰구역으로 바뀌면서 먼저 목탑이 마련되었던 것을 통일신라기 후대에 들어와 석탑으로 바뀐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인 토층조사 결과 통일기층에서 목탑의 제일 중심 기둥을 받치는 심초석에 품(品)자형의 사리공이 발견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심초석은 목탑에서만 쓰이는 초석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같은 발굴 성과는 이곳 익산 금마 일대에 존재하고 있는 미륵사지나 왕궁리 유적이 무왕의 천도설(遷都說)이나 별도설(別都說)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로 충분히 평가되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백제가 공주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긴 후(538년) 서기 600년 무왕이 집권하면서 자기의 출생과 관련있는 익산 금마에 미륵사를 바로 창건했고, 비슷한 시기에 왕궁리 유적에서 보이는 당시의 성벽과 건물터들에 궁궐이나 부속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당시 금마 일대는 수도인 부여에서 별도의 수도, 즉 요즘 말하는 일종의 행정수도로서 기능을 하지 않았을까.
〈조유전/고고학자〉
기사제공 : 출처 : 나라사랑글쓴이 : 나라사랑 원글보기메모 :'<인물산하기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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