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新고전50권>1~50<동아일보>논술(설.문)독서도서詩소설수필연설 2005. 8. 10. 08:07
<동아일보>21세기新고전50
21세기 신고전 50권 목록 도서(저자) 추천인 우연과 필연(자크 모노) 박이문(연세대 특별초빙교수·철학) 삐딱하게 보기(슬라보예 지젝) 전영백(홍익대 교수·서양미술사) 호모 루덴스(J 호이징가) 김명곤(국립극장장) 사회정의론(존 롤스) 박순성(동국대 교수·경제학) 말과 사물(미셸 푸코) 서현(한양대 교수·건축학) 노장사상(박이문) 표정훈(출판평론가) 에로티즘(조르주 바타유) 장일범(음악평론가) 여성주의 철학(앨리슨 재거) 장필화(이화여대 교수·여성학) 공론장의 구조변동(위르겐 하버마스) 조대엽(고려대 교수·사회학) 피상성 예찬(빌렘 플루서) 진중권(중앙대 겸임교수·미학) 성서 밖의 예수(일레인 페이젤) 장석만(옥랑문화연구소장·종교학)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최순우) 이원복(국립광주박물관장·한국회화사)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오주석) 김형국(서울대 교수·도시계획학) 천년 궁궐을 짓는다(신응수) 김정동(목원대 교수·한국건축사) 이중섭 평전(고은) 최병식(경희대 교수·예술철학) 청일전쟁(천순천·陳舜臣) 한명기(명지대 교수·한국사) 공간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 진형준(한국문학번역원장·불문학) 문학이란 무엇인가(유종호) 박철화(중앙대 교수·불문학) 씰크로드학(정수일) 박진호(문화재 디지털복원 전문가) 육식의 종말(제러미 리프킨) 김준목(안티꾸스 대표·고서 전문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조지프 슘페터) 박찬희(중앙대 교수·경영학) 숨겨진 힘(제프리 페퍼) 구본형(변화경영 전문가) 자기 조직의 경제(폴 크루그먼) 김균(고려대 교수·경제학)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짐 콜린스) 공병호(미래경영연구가) 변모하는 산업사회(피터 드러커) 이상만(고양문화재단 총감독) 노예의 길(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복거일(소설가) 이중나선(J D 왓슨) 권오길(강원대 교수·생물학) 숲의 서사시(존 펄린) 전영우(국민대 교수·산림학) 최초의 3분(스티븐 와인버그) 임경순(포항공대 교수·과학사) 지식의 원전(존 캐리) 이갑수(궁리출판사 대표) 코스모스(칼 세이건) 이은희(과학 칼럼니스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김형찬(고려대 교수·한국철학)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이어령) 한젬마(화가) 농담(밀란 쿤데라) 유종호(연세대 특임교수·영문학) 금각사(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김병종(서울대 교수·화가) 아르떼미오의 최후(카를로스 푸엔테스) 송병선(울산대 교수·중남미문학) 임꺽정(홍명희) 서하진(소설가) 플로베르의 앵무새(줄리안 반즈) 김연수(소설가) 대머리 여가수(외젠 이오네스코) 하일지(동덕여대 교수·소설가) 오만과 몽상(박완서) 방민호(서울대 교수·국문학) 신동엽 전집(신동엽)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이명옥(사비나미술관장) 드리나강의 다리(이보 안드리치) 한애규(조각가)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 서지문(고려대 교수·영문학) 상도(최인호) 조운호(웅진식품 대표) 고요한 돈강(미하일 숄로호프) 최원식(인하대 교수·국문학) 한밤의 아이들(살만 루시디) 황종연(동국대 교수·국문학) 레미제라블(빅토르 위고) 최종태(조각가) 도덕경(노자) 나희덕(조선대 교수·시인) 관촌수필(이문구) 박찬욱(영화감독) <33>임꺽정
임꺽정은 조선 명종조 사람이다.
이때는 윤원형과 이량 등 척족이 발호하고 흉년이 계속되며 관아의 수탈이 횡행한, 의적이 등장하기에 완벽한 시기였다.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는 1888년생.
1910년 당시 금산 군수였던 아버지 홍범식이 일제의 병탄에 항거하여 순국하자 이 땅을 떠나 중국, 남양 등지를 떠돌았고 귀국 후에는 3·1운동의 선봉에 선 선각자였다.
그가 ‘임꺽정’을 집필한 것은 1930년 전후 일제강점기의 한가운데였다.
총 1120여 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방대한 분량의 저작에서 홍명희는 서울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송도, 강서 구룡산, 영변 묘향산, 백두산, 금강산에 이르며 남으로 장흥, 보성, 순천, 지리산, 양주, 화개, 하동, 창녕, 문경새재 등을 아우르는 드넓은 지역을 오가며 임꺽정의 행로를 그려 낸다.
임꺽정과 일곱 의형제의 활약상을 따라가며 읽노라면 소설은 한국판 삼국지나 수호전처럼 흥미진진하며 홍길동, 전우치의 후예인 듯 기이한 임꺽정의 행적, 걸출한 무술은 무협지처럼 우리를 빠져들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임꺽정’은 전투와 싸움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 속에 생생하게 재현된 임금과 왕비, 옹주와 후궁, 세자와 왕자들이 빚어내는 궁중의 사연들, 고관대작들이 벌이는 사화는 우리의 역사 공부를 돕는 한편 오롯이 살아 있는 당대 민중 한사람 한사람의 삶은 우리의 가슴을 애잔하게 적신다.
그 속에는 사랑이, 치정이 있고 배반과 음모가 있으며 방랑과 좌절과 암투가 있다.
힘센 자와 약한 자, 가진 자와 가난한 이들이 죽일 듯 미워하며 영위해 나가는 한 생은 엄숙하고 진지하다.
여인과 남정네가 등장하는 그림은 선 곱고 화려한 채색화 같고 어린아이와 나이든 이가 어우러져 그리는 그림은 투박하나 선명한 민화처럼 다가온다.
“민족 자료의 집대성이요, 조선 어휘의 일대 어해(語海)”라 평했던 이효석의 말처럼 ‘임꺽정’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과 잊고 있던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넘친다.
소설을 읽으며 꺽정과 곽오주, 천왕동이와 함께 산을 타며 호랑이와 숨 막히는 일전을 벌이고 토끼와 여우, 노루를 쫓으면서 우리는 500년 전 조선의 벽화 속으로 들어간 듯, 꿈속의 한 장면을 만난 듯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알려진 대로 홍명희는 광복 이후 조선문학가동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가 1948년 분단을 막고자 월북한 후 남하하지 못하였다.
그는 격동기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고 그 중심에서 온몸으로 시대를 앓던 작가였으며 소설 ‘임꺽정’은 그의 그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보여 주는 대작이다.
‘임꺽정’을 두번 세번 거듭 읽으면 역사란 무엇인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 모습인지, 나는 대체 누구인지, 고민하고 고민하는 작가의 맨얼굴이 다가오고 우리 시대와 우리 자신에 대해 통렬한 반성이 인다.
짧고 빠르고 간결한 표현이 미덕인 이 시대. ‘임꺽정’은 1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과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여전히 재미있게 읽힌다.
홍명희의 천재성일까, 임꺽정의 힘일까.
서하진 작가
<34>플로베르의 앵무새
영국인 의사 제프리 브레이스웨이트는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루앙 병원 전시관에서 박제된 앵무새를 본다.
횃대 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플로베르가 루앙 박물관에서 빌려온 새. 소설 ‘순박한 마음’을 쓰는 동안 책상에 놓았던 새. 이름은 룰루, 소설 속에 나오는 펠리시테의 앵무새이며,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
아마추어 플로베르 연구가인 브레이스웨이트는 이 박제에 흥미를 느낀다.
하지만 그가 크루아세 기념관에 가면서 이 박제의 가치는 모호해진다.
그곳에서도 플로베르가 키웠다는 또 다른 앵무새의 박제를 만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진위를 가리기 위해 그는 학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장편소설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두 개의 박제를 둘러싼 모험담이다.
표면적으로는 어느 게 진짜 플로베르의 책상에 놓였던 건지 밝히는 과정처럼 보인다.
심층적으로는 역사(혹은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게 가능한지 문제 삼는다.
최근 아내와 사별한 브레이스웨이트는 아내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절망감에서 ‘플로베르 순례’를 떠났던 것이다.
브레이스웨이트는 플로베르에 관한 온갖 지식들을 갖고 있다.
그 지식들은 때로 통념을 배반하고, 때로는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다면체와 같은 플로베르의 삶을 두고 브레이스웨이트는 배에 달린 망원경을 빗대 얘기한다.
이런 식이다.
‘과거란 멀리 사라져 가는 해안선과 같다. 우리는 변치 않는 진리를 바라보듯이 망원경으로 해안을 본다.
하지만 망원경에 시시각각 비치는 해안은 환상일 뿐이다.’
언어 감각이 뛰어난 반스가 장마다 다르게 구사한 문체가 객관적인 사실을 비춰 보이는 이 망원경의 역할을 한다.
그의 소설 형식은 내용을 포함한다.
플로베르의 말에 따르면 “형식은 사고(思考)의 육체”다. “예술에 있어 모든 건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달려 있다.”
소설에는 브레이스웨이트가 작성한 플로베르의 세 가지 연보가 나온다.
일반적인 연보, 죽음 질병 개인적 비극 등이 나열된 부정적 연보, 편지에서 인용한 글귀로 재구성한 연보 등이다.
플로베르 작품 속의 동물들 이야기를 다룬 ‘플로베르의 동물 열전’도 인상적이다.
플로베르는 자신이 ‘곰’이라고 생각했다.
‘곰’과 ‘플로베르’를 둘러싼 반스의 지식은 논문 한 편을 쓸 정도로 해박하다.
이 밖에도 이 소설에서는 플로베르 소설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눈동자 색깔을 둘러싼 ‘에마 보바리의 눈’, ‘철도와 플로베르’ 등이 소논문, 시험 문제, 혹은 단편소설 등의 형식으로 나온다.
다양한 만화경의 세계는 결국 어느 쪽이 진짜 플로베르의 앵무새인가라는 물음으로 집약된다.
브레이스웨이트의 아내 엘렌은 에마 보바리처럼 간통을 저질렀다. 이 부부는 ‘행복했고 불행했고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자살을 시도한 엘렌의 호흡 보조장치의 스위치를 누르면서 브레이스웨이트는 이렇게 생각한다.
“엘렌. 나의 아내. 죽은 지 100년 되는 어느 외국작가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도 더 알지 못한 사람.” ‘플로베르의 앵무새’에 나온 모든 다채로운 글들은 바로 브레이스웨이트의 이 독백에 대한 주석이다.
김연수 작가
<35>대머리 여가수
1950년대는 세계 문학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특이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천재 작가가 나타나 기존의 문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들을 동시 다발적으로 발표한다.
소설에서는 반소설이라고 하는 누보로망이, 희곡에서는 반연극이라고 하는 부조리극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1950년대 10년 동안 세계 문학이 이룩한 성과는 과거 100년 동안 이룩한 성과와 맞먹는다고 할 수도 있을 만큼 다양하고 풍성하다.
부조리극의 대가 이오네스코도 이 시기에 나타난 대표적 천재 중 한 사람이다.
이오네스코의 희곡들은 재미있다. 무대에 올려진 연극을 보지 않고 희곡만 읽어도 소설을 읽는 것 못지않은 재미가 있다.
‘대머리 여가수’ ‘수업’ ‘의자’ 등 수많은 그의 희곡을 읽다 보면 무대 위의 장면들이 훤히 보이는 듯하면서 그 황당하고도 기발한 이야기에 금방 매료된다.
이오네스코와 쌍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들이 희곡만 읽어서는 그다지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대머리 여가수’는 스미스 부부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던 그들의 대화는 점차 황당무계하게 변해 가기 시작한다.
가령 환자의 간을 수술하기에 앞서 멀쩡한 자신의 간을 먼저 수술해 본 의사의 이야기라든가, 2년 전에 죽고 3년 전에 신문에 부고가 나서 1년 반 전에 장례식에 갔던 “대영제국에서도 가장 멋진 시체”였던 잡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그런 것이다.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그때 마틴 부부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방문하는데, 마틴 부부는 자신들이 부부 사이라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린 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여기에 하녀와 소방대장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처음에 그저 황당한 코미디처럼 보이던 이 연극은 점차 인간의 근본적 비극, 즉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우스꽝스러운가 하는 걸 여실히 드러낸다.
이런 것을 두고 희비극이라 하는데, 대부분의 이오네스코의 작품은 희비극이다.
가령 ‘의자’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무대 가득히 빈 의자들을 갖다 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폐하를 맞아 감격에 겨워하는 노인과 노파의 행동을 보노라면 충격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돌이켜 보면 이오네스코 이전의 연극은 구체적인 어떤 문제를 다루었다.
헨리크 입센은 ‘인형의 집’에서 여성의 인권 문제를, 안톤 체호프는 ‘벚꽃 동산’에서 몰락해 가는 귀족을 통해 인간의 페이소스를 다뤘다.
그러나 이오네스코와 베케트에 이르면 이런 개별적인 문제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여 준다.
이오네스코 자신은 “내 눈에 우스꽝스러운 것은 특정한 사회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통찰력이 50년대 작가들의 천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오네스코의 그 빛나는 연극들을 우리나라 대학로에서는 무대에 올릴 수가 없다고 한다. 관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일지 작가
<36>신동엽전집
흔히 1980년대를 ‘시의 시대’라 부른다.
당시에는 시인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박해하는 ‘80년대적’ 정치 현실을 풍자하며 민중의 고통을 절절히 노래하는 민중시와 노동시가 크게 유행했다.
‘광주’도 그들이 노래하는 한 코드였다.
오죽하면 시인이라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광주여, 무등산아 하고 외치며 무등산의 흙을 한 삽씩 퍼가는 통에 무등산이 사라졌다고 노래한 시인이 있었을까?
이렇게 그들은 민족적 현실과 역사성에 주목했다.
그러나 1960년대적 현실만 해도 동족상잔의 깊은 상처로 말미암아 민족의 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인은 예술지상주의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신동엽은 대학의 연구실이나 찻집 속으로 도사려 들어가 단자(單字)미학이나 어구 나열법에 하염없이 신경을 쓰고 있는 그들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정치는 정치가에게, 문명 비판은 비평가에게, 사상은 철학 교수에게, 대중과의 회화는 산문 전문가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철저히 언어 세공만을 전업으로 삼아 외래 사조에 휩쓸려 제정신을 못 차리는 비주체성을 통렬하게 공박했다.
그러면서 그는 성서나 불경이나 오천언(五千言·노자 도덕경) 같은 인류 유산 가운데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수준의 절절한 시편, 즉 ‘전경인(全耕人)’ 정신이 투영된 거대한 시편들을 쓰고자 했다.
그에게 시란 바로 ‘생명의 발현’이었다.
시란 ‘우리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이기도 했다.
그의 시에서 우리는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력과 민중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읽을 수 있다.
특히 민족사의 시원(始原)에서부터 동학혁명, 3·1운동, 4·19혁명을 관통하면서 ‘연민이 아는 민중의 고통, 분노가 보는 사회의 혼란과 불의, 그리고 하늘의 이상’(김우창)을 절절하게 노래한 장시 ‘금강’에서는 역사에 대한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그의 강렬한 신념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시에서 돌아가고자 하는 세계는 땅에 누워 있는 씨앗의 마음이었다.
그 세계는 ‘모오든 쇠붙이’는 사라지고 오로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아 있는 세계여야 했다.
곧 분단이 해소되어 인간의 가능성을 한없이 열어 가는 통일된 조국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시에서 구호적인 냄새는 맡을 수 없다.
동시대의 또 다른 탁월한 시인 김수영이 “강인한 참여의식이 깔려 있고, 시적 경제를 할 줄 아는 기술이 숨어 있고, 세계적 발언을 할 줄 아는 지성이 숨쉬고 있고, 죽음의 음악이 울리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1950년대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면서 보편적 인간 정신을 수준 높은 경지로 노래할 수 있는 매우 드문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한 권의 전집으로 정리되었는데 한때 이 책은 금서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은 그의 시를 남몰래 읽으며 시정신의 맥을 이어 갔다.
1980년대의 시인들은 공통적으로 그의 시정신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정신은 지금까지도 큰 강이 되어 우리 가슴속을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한기호 출판평론가 출판마케팅연구소장
<37>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일본 역사책 파문이 말해 주듯 교과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결코 가벼운 저술은 아니다.
학계의 누적된 연구 성과가 객관적 보편적 시각으로 빠뜨림 없이 망라돼 소화, 정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崔淳雨·1916∼1984)는 65세 때인 1980년 틈틈이 발표한 짧은 에세이를 모아 장르별로 나눠 ‘한국미 한국의 마음’을 펴냈다.
이를 교과서로 지칭함은 결코 폄훼가 아닌, 우리 모두의 필독서란 의미이다.
전문적인 논문이나 체계적인 논술은 아니나 때론 그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전문학자들에게도 여러 측면에서 두루 시사함이 크다.
미술에 대한 일반인의 접근이 쉽도록 상태가 양호한 도판을 한쪽에 과감하게 한 점씩 실은 이 아름다운 책은 조기에 절판된 후 더는 나오지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1992년 ‘최순우 전집’을 간행한 출판사 학고재에서 1994년 저자의 10주기를 맞아 순서에 변화를 주고 내용을 세분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비록 흑백이지만 삼국시대 토기부터 조선 말 회화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 전반에 대한 친절한 입문서이며 안내서이다.
‘한국미의 산책’에서 ‘흔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20개의 주제(보급판은 17개 주제)로 나누어 회화 조각 건축 공예 등 우리 전통미술 전반에 관한 이야기의 타래를 풀어 나갔다.
그러나 무미(無味)한 인문학의 개설서나 그야말로 딱딱한 교과서와는 다르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표현대로 ‘이슬보다 영롱하고 산바람보다 신선한’ 미문(美文)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과 추구, 아름다움을 보고 깊이 느끼고 사랑했던 저자. 미술사학자로서의 그의 생활은 한국미의 추구와 실천 그 자체였다.
이 책을 들고 첫 쪽을 펴면 그냥 빨려 들어가 좀처럼 놓기 힘들다.
그리고 우리는 뿌듯하고 행복하다.
이 책은 겨레와 전통문화에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미술사가나 미학자 내지 평론가의 존재는 그들이 느끼고 깨달은 아름다움의 내용과 핵심 그리고 본질을 일반인에게 이해시키고 인식시킴에 있다.
즉 조형 언어에 낯설어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문자로 통역해 주는 역할이 그들의 임무이다.
‘한국 미술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유섭(高裕燮·1905∼1944)이 1934년 서른의 나이로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해 타계하기 전해인 1943년 최순우는 박물관에 입사한다.
이는 박물관의 법통(法統)을 전수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박물관 한곳에서 41년 동안 한 우물을 판 박물관인은 전무하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천부적인 안목과 혜안을 지닌 저자는 수많은 문화유산을 실제 보고 만지며 아름다움의 본질을 온몸으로 체득(體得)했다.
그러고 나서 터져 나온 사자후(獅子吼)이기에 독자의 가슴에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
<38>오만과 몽상박완서는 사람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문제들에 부닥치게 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이야기해 주는 훌륭한 작가다.
그녀의 작품 ‘오만과 몽상’은 욕망과 이상의 변주곡 속에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교양적 측면이 강렬한 작품이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스탕달의 ‘적과 흑’,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읽어 보면 주인공과 그 밖의 인물들이 빚어내는 잡다한 세류와 세풍을 냉정하게 묘사해 나가면서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 묻는 차가운 이성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는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들이 빚어내는 비속한 장면들, 알게 모르게 박두해 오는 파국,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찾아오는 참담한 깨달음을 용서 없이 전개해 나간다.
그가 바로 작가인 발자크요, 스탕달이요, 플로베르다. 그리고 박완서가 바로 그러하다.
‘오만과 몽상’은 역설적이고 상징적인 한국적 상황을 배경 삼아 두 사람의 인생을 그려 나간다. 두 남자가 있다. 현은 부잣집 막내아들, 남상은 가난한 집 장손이다. 현은 친일파의 후예, 남상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그들의 꿈은 몽상적이다.
처음에 현은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한 반면 남상은 의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린 그들의 꿈은 세상의 거센 풍랑에 휩쓸려 난파당한다.
그들은 그들이 타고난 운명의 힘에 사로잡혀 버린다. 깨어져 나간 몽상의 잔해 위로 잔인한 현실의 법칙이 모습을 드러낸다. 현실은 부조리하다.
몰인정하고 인색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
이상을 포기한 순간, 세상에 적응하기로 결심한 순간 두 사람은 아름다운 젊음을 잃어버린다.
추악한 현실의 동조자로 귀착되고 만다.
그들의 운명은 현실적이다.
현은 물질로부터 자유롭지만 정신적으로 파멸한 존재가 된다. 남상은 물질적인 부를 얻고자 몸부림치지만 끝내 파멸에 봉착하고 만다.
‘오만과 몽상’은 두 사람을 통해 인간의 굴레를 드러내 보이고 인간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심문해 보여 준 소설이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의 고전적인 작가들이 보여 준 인간에 대한 질문과 탐구를 한국적인 바탕 위에서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자라는 여인이 있다.
현에게 버림받고 남상의 아내가 되어 아이를 낳다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여인의 존재는 독자들에게 삼각관계라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의 구성적 흥미를 선사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겉으로 드러나는 뺏고 뺏기는 치정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다른 꿈을 꾸면서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을 이어 주는 감춰진 끈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치 이창동의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순임이라는 여자처럼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남자들의 타락한 영혼을 대속(代贖)하는 희생제의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여인은 채만식의 ‘탁류’에 나오는 비극적인 여인 초봉이나, 죽음으로써 아비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는 ‘심청전’의 심청으로 통한다.
‘오만과 몽상’은 우리의 고전적인 작품들에 나타나는 희생제의의 의미를 새롭게 상기할 수 있게 해 주는 새로운 고전이라고 할 것이다.
방민호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39>지식의 원전
어느 과학자의 다음과 같은 상상을 듣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지금 저 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은 나무를 건드린 빛을 눈이 포착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 나무를 비추었다가 저 아득한 우주로 뿔뿔이 흩어져 나간 빛이 우주 어느 구석에는 차곡차곡 쌓여 있다고 한다.
그 빛을 다시 불러오면 아득한 옛날, 나무 씨앗이 꼼지락꼼지락 땅을 뚫고 나오는 모습, 나무 밑을 지나가는 옛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즉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전의 옛날 일도 손에 보듯 훤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지상에서 빛의 속도는 뛰어넘을 수 없는 절대 속도이기에 이 공상이 현실에서 실현되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그 참신한 상상력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태양이 이 세계를 먹여 살리는 에너지의 근원이라지만 제 아무리 강렬해도 인간의 두뇌 속은 점령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머리에서 생산된 생각은 빛의 도움 없이도 시간을 거스를 수가 있는 것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뉴턴이 홀로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그가 한 생각이 고스란히 남아 오늘의 우리가 공유할 수 있음은 그 덕분일 것이다.
여기 소개하는 책은, 소리를 내자마자 없어지는 말을 영원히 보존하는 기술인 활자의 덕을 특히 톡톡히 보는 책이다.
이런 활자, 이런 책이 아니었다면 대체 세상을 뒤흔든 과학 천재들의 머리 속을 뚫고 나온 창조적 생각을 어떻게 우리가 전달받을 수 있었겠는가.
‘지식의 원전’은 ‘발견’과 ‘앎’의 순간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지식 발견의 순간을 골라 정리한 사람은 과학자가 아닌 옥스퍼드대의 한 영문학 교수다.
그는 다음의 세 가지, 즉 대중이 꼭 알아야 할 근대적 지식인지, 얼마만큼 흥미로운지, 교육을 그리 많이 받지 않은 독자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인지를 기준으로 삼아 수많은 문헌 중에서 102편의 글을 뽑아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긴 기록에서부터 갈릴레이가 하늘을 관찰하고 쓴 글, 발명가이자 시인이었던 이래즈머스 다윈이 쓴 시, 한 알의 소금에서 우주를 들여다본 칼 세이건의 글, 원소배열표인 주기율표와 아우슈비츠에서의 인생 역정을 견딘 프리모 레비의 글까지 에세이, 시, 노트 등 다양한 형식의 과학적 지식을 담은 글들이 실려 있다.
과학 기자재를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갈릴레이는 망원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를 이용하여 하늘을 관찰하려고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망원경을 육상이나 해상에서 관측하는 데 필요한 물건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는 망원경으로 지상의 물체를 관찰하기보다는 천체를 관찰하고 싶다며 하늘로 망원경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그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는 관찰 사실들을 적어 내려간다.
과학이라면 먼저 손사래부터 치던 이들도 책 곳곳에서 그 시대에 통용되던 기존 사실들을 뒤집어 생각하며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았던 과학자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가졌던 호기심과 발견에 대한 기쁨을 그 어깨 너머로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은 덤으로 얻는 셈이다.
독자들에게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이 책은 과학부터 우선 가볍게 자기 소개를 하면서 이웃 분야로 다리 하나를 놓아준다.
그 다리 위가 많은 사람들로 무척 붐비기를 기대해 본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40>사회정의론
현대의 정치철학 분야에서 존 롤스의 ‘사회정의론’만큼 격찬을 받은 책은 없었다.
1971년에 출간되자마자 세계의 지성계는 오랜만에 활기찬 지성 담론을 펼쳤다.
담론의 장에는 서로 질시만 하던 좌우익의 지성인들이 지적 위선을 벗어던지고 모여들었고, 자신의 영역 안에만 웅크리고 앉아 있던 다양한 지성인도 전공 영역의 담장을 헐어 버렸다.
그러자 정치철학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는 환호성이 터졌다. 사실상 1950, 60년대에 정치철학은 사망했었다.
당시 정치철학자들 스스로 “정치철학은 죽었다”고 고백할 정도였고, 어느 정치철학자는 절망하여 아예 연구 분야를 바꿀 정도였다.
돌이켜 보면, 정치철학은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사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때 영미의 지성계에서는 논리실증주의가 휩쓸었고, 유럽 대륙의 지성계는 현상학이 지배했다.
방법은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진리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라는 가치판단 문제는 철학이 다룰 수 없다고 도외시하였다.
그러기에 반문명적인 세계대전이 두 번씩이나 일어나도, 그들은 지성인의 임무인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전후에 시민권 운동, 학생 운동, 반핵반전 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나도 속수무책이었다.
가치판단 문제를 회피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규범 허무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서구 사회운동의 비판적 상상력은 한국의 1980년대처럼 좌파 지성들이 주로 제공했다. 좌파 지성은 사회 비판의 준거점에 대한 철학적인 검토를 소홀히 한다.
그렇게 하면 사회 비판은 그저 개인 또는 집단의 신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주관적인 신념에 의존했으므로 좌파 지성 또한 규범 허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계대전이나 세계 냉전은 규범 허무주의가 육화된 모습이다.
규범 허무주의는 실천적인 사회문제를 힘의 논리로 환원시켜 버린다.
사회 갈등은 이제 잠정적인 타협 이외에는 평화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다.
‘사회정의론’은 규범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철학적인 몸부림이었다.
여기에서 사회 실천 원리로 주장된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평등한 자유의 원칙, 둘째 기회 균등의 원칙, 셋째 차등의 원칙이다.
사회를 공정하게 운영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평등한 자유를 보장해야 하고,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충족되면 그 다음에 기회 균등을 보장해야 한다.
기회 균등의 원칙이 충족되면 그 다음에 차등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등의 원칙은 사회 불평등을 규제하는 것이다.
사회 불평등은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당연하고 간단해 보이는 롤스의 주장을 사회주의자들은 매우 불평등주의적이라고 비판했고 자유주의자들은 너무 평등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회당은 롤스의 ‘차등 원칙’에 입각한 분배 정책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하기도 했고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비판하면서도 절대로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펼쳐진 롤스의 주장은 이렇게 현대 실천이성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더더욱 매혹적인 것은 그의 철학 작업이 여러 분야의 학문 성과를 총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인이 실천이성을 넉넉하게 닦아 나가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정치철학서임에 틀림없다.
김주성 한국교원대 교수 정치철학
<41>노자이야기-장일순
진리를 말하는 책은 많지만 진리를 어떤 틀에 가두거나 왜곡하지 않는 책은 드물다.
후자의 미덕을 갖춘 예로 나는 먼저 노자의 ‘도덕경’을 떠올린다.
도덕경에 대한 다양한 주해와 대화가 오늘까지 이어져 오는 것도 그 현묘(玄妙)한 품 덕분이다.
노자 자신의 비유를 빌리자면, 그것은 가장 낮아 만물이 모여드는 골짜기(谷神)이자 텅 비어 있는 그릇과도 같다.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고, 담긴 내용물에 따라 스스로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한편 ‘도덕경’에 관해서 말한 책은 많지만, 그 열려 있는 정신을 깊이 체화한 책은 드물다.
그런 점에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는 ‘도덕경’의 아름다운 번역본이자 그것을 원텍스트로 한 풍부한 대화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원주에서 40여 년 동안 가톨릭농민회와 한살림운동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의 정신적 스승이 되었던 장일순 선생과, 개신교 목사로서 좁은 종교적 틀을 벗어나 다양한 집필활동을 해 온 이현주 목사가 그 대화의 주인공들이다.
따라서 이 책은 신교와 구교 간의 대화이자, 성서적 진리가 도교와 불교 등과 어떻게 통하는가를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동서 간의 대화이기도 하다.
원래 1990년대 중반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던 것을 합본하고 다시 손보아 나온 이 책은 700쪽이 넘는 분량과 함께 거기에 흘러드는 사상의 지류 또한 방대하다.
노자가 깊은 종교적 본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굳이 의식하거나 도그마화하지 않았듯이, 노자를 가운데 두고 이루어지는 사제 간의 대화 또한 그러하다.
현학적인 취미나 자구적 해석에 매달리지 않고, 삼라만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읽는 사람을 적신다.
그래서 ‘도덕경’ 81장에 각각 붙여진 대화를 읽다 보면 볕이 잘 드는 방에 두 분이 고요하게 마주 앉아 있는 풍경이 떠오르고, 어느새 나도 그 옆에 숨죽이고 동석해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마치 불이 타오르는 등잔에서 꺼져 있는 등잔으로 불꽃이 튀는 것처럼 두 분의 대화는 읽는 이에게도 서늘한 불꽃을 옮겨 준다.
이때 전달되는 것은 어떤 메시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정신의 에너지이다.
또한 문자로 이루어진 책의 형태를 입고 있되, 언어를 넘어선 생명의 훈기 같은 걸 이 책은 거느리고 있다.
김지하 시인은 장일순 선생을 두고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사실 이 책이 완결된 것은 장일순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의 일이다. 57장까지는 선생이 생전에 계실 때 녹음된 것을 정리한 것이지만,
그 이후는 이현주 목사가 “내 속에 계신 선생님과 대담하면서 받아 적는 심정으로” 써 내려간 것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넘어선 영적 대화인 셈이다.
장일순 선생이 가신 지도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이 책 속에,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정신 속에 여전히 살아 계신 그분의 흔적을 보며 ‘살아 있는 고전’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노자라는 강을 건너기에 이만한 ‘말씀의 뗏목’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희덕 시인
<42>호모 루덴스
2000년 초 국립극장장이 되었을 때, 공직생활 30년이 되는 한 선배가 “하루에 5분만이라도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 보라”는 충고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살아 온 예술가의 생활이란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지라 실업 상태일 때는 하고 싶은 일들을 내 맘대로 계획 세우고 내 마음대로 시간을 활용하며 하루 종일 ‘멍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극장장으로서 빈틈없이 꽉 짜여진 생활을 하다 보니 정말 하루에 5분도 멍할 새가 없었다.
1년쯤 지난 후 나는 내 영혼이 고갈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는데, 그 무렵에 읽은 책이 ‘호모 루덴스’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멍하게 지낸다는 것, 즉 창조적 놀이 정신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되었고, 그 후로 가끔씩 ‘멍한’ 상태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인 요한 호이징가는 모든 문화 현상의 기원을 놀이에서 찾는다.
그는 자신이 탐구해 온 예술사와 종교사 등 인류 문명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동원하여 인류의 고대 문화를 놀이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놀이는 문화보다 오래되었다.
놀이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며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언제나 함께해 왔고 다양하게 발전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인 동시에 유희의 인간인 호모 루덴스(Homo Ludens)였다”고 주장하는 호이징가가 해석하는 놀이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일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공정한 규칙에 따라 경쟁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 문화와 놀이가 분리되고 단순히 놀기 위한 놀이는 퇴폐적인 것으로 죄악시되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놀이마저도 삶과 유리된 채 상업성으로 점철되고, 놀이가 가졌던 본래의 건강성을 상실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은 고대의 신성하고 삶이 충만한 놀이 정신의 회복이다.
놀이에 따르고 놀이에 승복하며 놀이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문명을 빛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 책을 쓴 1938년 무렵은 세계적으로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이 책에서 정치적인 주제는 극히 필요한 경우에만 조금씩 다루고 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네덜란드를 침략한 독일군의 점령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에 석방되어 가족과의 면회도 금지된 채 겔더란트의 시골집에서 1945년에 사망했다.
인류의 건강한 문화적 삶을 위해 혼신을 다해 탐구한 학자가 정작 자신의 삶은 반문화적이며 억압적인 전쟁의 희생물로 바쳐야 했던 현실이 참으로 역설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의 존재와 행위 양식의 본질 규명에 새로이 도전한 ‘호모 루덴스’는 진정한 문명을 건설하려는 저자의 소명의식 속에서 탄생된 기념비적인 저서로서 21세기 문화의 세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김명곤 국립극장장
<43>자기 조직의 경제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리타가 미국 남부 해안을 강타하면서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남겼다.
작년 말에는 인도양의 해저 지진 때문에 발생한 지진해일(쓰나미)로 남아시아 국가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화제를 국내로 돌리면 서울 강남과 강북,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정부는 지역 균형개발과 부동산 안정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경기 침체는 허리케인과 비슷한가, 아니면 지진과 더 비슷한가?
도시는 배아세포와 비슷한가, 아니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운석과 더 비슷한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이런 질문은 경제를 잘 아는 사람에게도 뚱딴지같은 질문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뛰어난 통찰력과 정곡을 찌르는 분석으로 널리 알려진 폴 크루그먼 교수는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며 책을 시작하고 있다.
그는 이런 질문이 결코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아니라 얼마나 합리적인 질문인지를 인식시키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경제학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것들을 외생 변수로 처리하고 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경기 순환이 외부에서의 충격으로 발생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으며, 외부 충격의 원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즉 경기 변동의 원인을 찾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경기는 변동할 이유가 있으므로 변동한다는 식의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아무 관계도 없는 듯한 현상들 간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복잡계’ 개념을 사회과학에도 도입하여 설명할 것을 권고한다.
복잡계란 복잡한 피드백 시스템이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며, 개별적인 행동들의 상호 조화가 완전히 새로운 집단적인 행동을 낳는 ‘출현의 과학’이다.
또한 복잡계란 동질적이거나 무작위적인 상태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거대한 패턴을 형성해 가는 ‘자기 조직화하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복잡계의 피드백 원리와 출현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으나 자기 조직의 원리를 모르고 있다.
저자는 자기 조직의 원리를 ‘불안정으로부터의 질서’와 ‘불규칙한 성장으로부터의 질서’로 구분한다.
첫 번째 질서의 예를 들어 보자.
열대 상공의 무더운 수증기 때문에 대기의 순환이 불안정해짐에 따라 자연적으로 기상 패턴을 스스로 조직하며 허리케인이 발생한다.
허리케인과 마찬가지로 경기 불황은 하늘에 벼락 치듯이 닥쳐오며, 대도시는 ‘특별히 선호되는 파장’에 따라 여러 중심 지구를 가진 형태로 진화한다.
두 번째 질서의 예를 들면 이렇다.
언뜻 보기에 무질서하고 복잡해 보이는 지진이나 운석의 분포가 ‘제곱의 법칙’을 따르고 있듯이 도시의 분포도 ‘제곱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2위 도시의 인구 규모는 1위 도시의 2분의 1이고, 3위 도시는 3분의 1, 10위 도시는 10분의 1이다.
지역 균형개발에서는 인구 규모가 같은 도시를 여러 개 상정하고 있으나 이는 두 번째 질서에 역행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 세계가 자기 조직화하는 시스템들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토로한다.
아울러 독자들도 경제가 자기 조직화한다는 개념을 자기처럼 ‘흥분과 즐거움으로’ 발견하기를 촉구하며 책을 마치고 있다.
박원암 홍익대 교수 경제학
<4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차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시지요.”
신영복(경제학) 성공회대 교수는 무작정 강의실로 찾아간 나에게 자판기 커피를 뽑아 권하며 빈 강의실로 안내했다. 2년 전 당시 신문기자였던 나는 ‘지성의 나무’라는 기획 기사
를 취재 중이었다.
“번거롭게 먼 길을 오셨군요.”
그날은 햇살이 따사로웠다. 창밖에 봄볕을 화사하게 받고 서 있는 꽃나무가 보였다.
무슨 꽃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 문득 풍겨 오던 은은한 향기는 지금도 또렷이 느낄 수 있다.
처음엔 그 향기가 창밖의 ‘꽃내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에 묻어날 정도로 짙게 퍼져 오는 그 향기는 신 교수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간에게서 그런 깊은 ‘인품’의 향기가 물결처럼 번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과학적 사고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대상과 필자의 ‘관계’라 생각합니다.
대상과 필자가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깊이 있는 인식이, 또 어떠한 측면이 파악되는가가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 없음’입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옥중 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그는 ‘관계’를 이야기했다.
이 책은 그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 복역한 뒤 1988년 출소한 직후에 발간됐다.
민주적 정권 교체에 실패해 허탈해하던 그 시절에 그 책은 한국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편지는 계수, 형수, 부모님에게 보내진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심 어린 성찰이 담겨 있었다.
“멀리 두고 경원하던 사람도 일단 같은 방, 같은 공장에서 베 속의 실오리처럼 이런저런 관계를 맺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이 열립니다. … ‘관계’는 ‘관점’을 결정합니다. …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靜的)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같은 책)
그의 옥중 20년은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였다.
가족과 동료 재소자 그리고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곳곳에 배어 있는 그의 글은 사람들이 치열한 실천에 몰두하다가 때때로 잊곤 하는 사실, 즉 ‘나는 왜 이 길을 가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문제의식을 다시 일깨워줬다.
민주화에 성공했든 실패했든, 지역구도를 타파하든 못 하든, 세계화를 하든 안 하든,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은 직간접적으로 인연 맺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돼 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사회와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 어려운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같은 책)
돌이켜 보면, 그에게서 번져 오던 향기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이미 느꼈던 것인 듯하다.
김형찬 고려대 교수·한국철학
<45>천년 궁궐을 짓는다…
신응수
올해 여름까지 1년간 프랑스 파리에서 생활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은 나 같은 건축보존주의자에게는 참으로 부러운 곳이었다.
발 가는 곳마다 거의 100년 된 건물들이 즐비했다.
시내 한복판에 이르면 1850년대의 것들도 수두룩했다.
시내가 모두 건축박물관이라 해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프랑스 현대 건축가는 물론이고 시민들도 그 집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오래된 건축물이 좀 불편하더라도 때로는 값지게 여기며 때로는 체념하며(?)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방에 비가 들이쳐도 계단이 삐걱거려도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간판은 가능한 한 작게, 건축물이 가리지 않게 붙이는 정도이다.
다만 쇼윈도만큼은 정성을 다해 치장한다.
거리는 그래서 더욱더 아름다워진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에 푹 빠져 들어간다.
오래됐지만 살아있는 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거리에 역사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거리는 역사를 거의 다 밀어붙여 남은 것이 없다.
어느 도시나 매한가지로 도토리 키재기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우리 목수가 다 사라져 버린 탓이다.
조선조 말, 소위 전통 목수는 전부 생업 목수로 길바꿈을 했다.
집 장사로 나선 것이다.
어설픈 사회 풍조는 건축물을 두부 자르듯 짓기 시작했다.
싸게 빨리 짓는 데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전통 목수는 천대받고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사회 대접이 그런데도 그나마 몇 사람이 전통 건축의 맥을 이어 오고 있다.
긴 얘기 할 필요도 없이 그들 스스로 그 어려운 명맥을 이어 온 것이다.
깊은 산속에서 토종 소나무를 고르고, 과거 역사의 현장에서 켜고 짜서 틀을 잡아 온 것이다.
거기에 기와를 이고 단청을 해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이다.
나는 목수를 존경한다.
그중 상징적으로 신응수(申鷹秀·63)를 먼저 꼽는다.
이 책은 그가 직접 말하는 전통 건축 이야기, 목수 이야기다.
그 힘든 목수의 길로 들어서 숭례문, 수원 화성, 경복궁, 창덕궁 등 우리의 대표적 건축 문화재를 복원해 온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감동적으로 펼쳐져 있다.
그는 거친 손으로 그 엄청난 나무 기둥을 땅에 꽂고 그 기둥에 날개를 단다.
하늘로 차고 날 듯 뜨는 처마를 만든다.
그 위에 아름다운 용마루를 앉히는 것이다.
그것, 즉 수직 수평선만이 아닌 그 오묘한 허공선을 만드는 일은 어떤 예술가,
과학자의 작업보다 어려운 일이다.
컴퓨터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의 눈과 손이 아름다운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서양건축물도 우리 고건축과 아름다움에 견줄 수 없다.
중국의 과장선, 일본의 억제선보다 더 자유로운 우리 한옥의 자연선(自然線)을….
파리 루브르 궁전의 기둥에 몸을 대고 하늘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진회색 하늘뿐이다.
서울의 경복궁 근정전 기둥에 몸을 대고 하늘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처마가 푸른 하늘을 날고 있다.
그것은 신응수가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모른다.
궁궐 도편수를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답이 이 책에 있다.
한국의 건축을 사랑한다면 다시 한번 뽑아 보길 권한다.
김정동 목원대 교수 한국건축사
신용수 신응수, 정확한 이름 확인 중 <46>여성주의 철학
“여자들이 무슨 철학?”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자들에게 교육 기회를 차단했던 시절에나 걸맞은 사람이다.
많은 여자가 훌륭한 교육을 받고 모든 학문 분야에서 지식 생산자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혹은 고통스럽게 여성학, 여성주의 시각을 생성해 내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분과 학문의 바탕에 깔려 있는 남성 중심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여성 철학자들은 수많은 현인과 철인의 목록에서 ‘왜’ ‘어떻게’ 여성 철학자들이 누락되었는지를 문제시하고, 주류 철학의 고전적 텍스트에서 강고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여성 폄훼 주장들을 반박하는 한편, 역사에서 누락된 선배들의 흔적을 찾아내고 발굴하였다.
이렇게 공유된 문제의식으로 당대 여성주의 철학은 철학 안의 성차별 구조에 대한 비판적 작업과 함께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철학함’의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성주의의 관점으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등 제 영역의 문제를 새롭게 규명하고 재구조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앨리슨 재거와 아이리스 영의 ‘여성주의 철학’은 지구적인 영향력을 지닌 여성주의 철학자들의 집단적 역량과 수준을 보여 준다.
편자들은 철학 논문을 모아서 소개하는 쉬운 편집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주제별로 선정된 그 분야의 전문가들과 공통의 틀을 갖춘 집필 방식을 공유하는 정성을 들였다.
자신이 담당한 주제 안에서 최근 진행 중인 다양한 논의를 균형 있게 소개하는 식으로 맞춤 집필한 열정과 노력이 책 갈피갈피에서 묻어난다.
이 책의 기본 역할은 여성주의 철학의 길라잡이다.
이 지도를 따라 철학 여행을 하다 보면 문제의 대륙들이 나타나고 최근 여성주의 철학의 쟁점들이 산봉우리처럼 우뚝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 각 지역에서 전개하고 있는 철학적 논의들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의 여성주의를 성찰하는 하나의 창을 확보하게 된다.
예술, 종교뿐만 아니라 윤리학, 정치학, 사회 이론, 자연과학 전반을 여성주의 관점에서 탐구하는 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함께 상상되고 창출됨을 목도한다.
6월에 열린 세계여성학대회에서 만난 아시아권 참가자들은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이 벌써 나와 있음을 부러워했다.
한국 여성철학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여성 철학자들이 없었다면 이만한 결실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성학 전공자들은 이 번역서를 기본으로 삼아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소개되어 있는 인용 서적과 참고 문헌에 도전해 볼 일이다.
성별(젠더), 성(섹슈얼리티), 의미론, 언어와 권력, 행위성, 보살핌 등 여성학의 핵심 개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성숙시킴으로써 여성주의자로서 철학적 기반을 단단히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아직 깊숙이 깔려 있는 가부장제 문화가 양성 평등의 사회로 변화되기를 소망하는 여성학이 여성주의 철학과 소통하는 것은 서로를 북돋우는 일이다.
실천과 이론이 만나고 서로에게 배움으로써 우리 사회의 변혁이 앞당겨지기를, 그리고 그 폭이 더욱 넓어지고 깊이가 더 철저해지기를 소망한다.
장필화 이화여대 교수 여성학
<47>관촌수필
늘 곁에 두고 무심코 손 뻗어 아무데고 읽기 시작해도 곧바로 빠져드는, 드물어 더욱 소중한 책 중의 하나가 명천(鳴川) 이문구(1941∼2003) 선생의 소설 ‘관촌수필(冠村隨筆)’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본 게 막 습작을 시작하던 20대 후반이었다.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어디에서 어디만큼 울타리를 치고 어떤 괭이로 땅을 갈고 거름은 무엇으로 쓰고 무슨 씨를 뿌리고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지 한 가지도 알 수 없었을 때였다.
그때 관촌수필의 이런 대목이 눈에 쑥 들어왔다.
“그래 너는 몇 살이나 되었다더냐. 그러자 그녀는 아무 어렴성 없이 아는 대로 대꾸했다. 지 에미가 그러는디 제년이 작년까장은 제우 여섯 살이었대유. 그런디 시방은 잘 몰르겄유. 늬가 늬 나이를 모른다 허느냐. 예, 어떤 이는 하나 늘어서 일곱 살이라구 허던디 또 누구는 하나 먹었응께 다섯살이라구 허거던유. 페엥- 그래 늬 에민가 작것인가는 요새두 더러 보이더냐. 접때 달밭 대감댁(외가)에 왔는디 봉께, 유똥치마를 입구, 머리는 힛사시까미를 허구, 근사헌 우데마끼두 차구……여간 하이카라가 아니던디유.
그래 그것은 시방두 장(늘) 술고래라더냐? 그리기 접때두 취해서 7 애비허구 다투다가 고쟁이 바람으루 8겨났었유. 페엥- 숭헌…….”
일곱 살짜리 옹점이가 주인공의 할아버지와 말 나누는 장면이다.
나는 웃다가 멍해졌고 급기야 무릎을 치게 됐다. 소설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소설 속의 인물이 이런 것이구나.
어디 이 대목뿐이겠는가.
전쟁의 비극, 공동체의 따뜻한 인간애와 몰락,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아서 소설가가 되었다’고 밝힌 대로, 가족의 독한 비극, 산업화의 과정과 파괴의 현실 등이 ‘관촌수필’ 연작 첫 편인 ‘일락서산’에서 끝 편인 ‘월곡후야’까지 빼어나게 형상화되어 있다.
공동체나 토속, 농촌, 이런 수식이 붙으면 들었던 책도 슬그머니 놓아버리는 게 요즘 독자들인 데다가 이미 이 책에 대하여 숱한 평론가들의 찬사가 있었고 문학사적 의의 또한 검증 정리되었기에 자꾸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다.
선생이 구사했던 아름다운 우리말 또한 이문구 소설어 사전(민충환 엮음·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2001)이 이미 나와 있어 일일이 늘여놓지 않아도 될 듯하다.
흔히 능청, 해학으로 이름 붙여진 선생의 문체는 독보적이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구불구불 다음 호흡으로 이어지고 출렁출렁 흘러 마침내 삶을 보듬어 내는,
그러면서도 과함이 전혀 없는 만연체에서 나는 매정하게 돌아서지 못하는 작가의 따스한 심성을 읽는다. 때문에 무릇 살아 있다면 어떤 마음을 지녀야 되는가를 배웠다.
도처에 풍부한 비유와 익살의 말(言語)도 백미다.
언젠가 술집에서 안주 시키라는 주인에게 ‘몸속에 허파 있고 간도 있고 곱창도 있는데 뭐 하러 안주를 먹어요. 술만 넣어주면 되지’ 해서 웃었는데 모두 선생의 소설에서 읽은 것이다.
함부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 예의와 독재정권의 탄압에 한 번도 등 돌리지 않았던 의식, 기승전결 운운의 수입 이론을 ‘장마철 물걸레 보듯’ 하고 소설이 진정 뭔가를 보여준 작가정신이 이 책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다. 이런 책이 또 나올까.
한창훈 소설가
<48>내일의 이정표
최근 피터 드러커의 자서전이 번역 출간됐다.
그의 저서는 경영학, 미래학, 기업인,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는 영향력 있는 책들이다.
‘21세기 지식경영’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지식 경영자’ ‘미래의 결단’ ‘미래기업’ ‘비영리 단체의 경영’ ‘변모하는 경영자 세계’ ‘차세대 기업 리더의 양성’ 등 한국의 신지식인들에게 회자되는 책 이름이다.
그런데 막상 그의 중요한 저서인 ‘내일의 이정표’는 우리나라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는 이 책을 1960년대 중반에 읽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1964년에 ‘변모하는 산업사회’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초판 25만 부가 팔렸다.
일본에서 당시 비소설 부문에서 최고 판매부수를 기록하였다.
1966년 일본 정부는 드러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 책의 영향이다.
이 책은 ‘산업인의 미래’(1942), ‘새로운 사회’(1950), ‘미국의 다음 20년’(1957) 등 깊고 넓은 그의 지식과 의지를 바탕으로 미래사회를 계획하고 예견한 걸출한 저서 가운데 하나이다.
저자가 40대 초반의 왕성한 나이에 쓴 이 책은 인문학적 학문의 깊이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강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 작품이다.
특히 인접 분야 학문 즉, 문학 역사학 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생태학 문화인류학에 대한 섭렵과 심지어 예술적 심미안에 이르기까지 총화를 이루어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혀를 찰 만큼 찬탄을 보내는 저서이다.
드러커는 이 책에서 미래 산업사회에 대한 그림을 간명하게 그려 독자들에게 보여 준다.
굴뚝산업이 무너지고, 지식과 기술이 집약된 새로운 형태의 산업사회가 온다는 점을 1959년 발간된 이 책에서 일찍이 예견한 것이다.
드러커는 인간 생활에 닥쳐올 변화를 세 가지 영역에서 전망한다.
첫째, 기계적 인과관계로 이뤄진 데카르트적 우주에서 패턴과 목적, 과정이라는 새로운 우주로의 철학적 변화다.
둘째, 자유세계 사람들에게 닥쳐 올 네 가지 도전 즉, 교육된 사회의 도래, 경제발달, 정부의 쇠퇴, 동양문화의 쇠퇴를 예견한다.
이어 드러커는 인간존재의 정신적 실체에 닥칠 변화에 대해 얘기한다.
드러커는 유대계지만 합스부르크 정권의 재무장관을 지냈던 아버지와 의사 어머니 사이에서 1909년 빈에서 태어났다.
20대 젊은 시절 영국에서 일하면서 경제학자 케인스를 만났다.
케인스는 한때 미국의 경제정책 수립(뉴딜)에 기여했고 돈도 벌어 그 당시 피카소 등 신진 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해 그의 모교인 케임브리지대의 피츠윌리엄 박물관에 기증했다.
드러커는 케인스의 이런 모습을 배웠다.
22세에 프랑크푸르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천재였고 신동이었던 드러커는 첼로로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를 완벽하게 연주하는 대가이다.
또한 그는 일본과 잉카 미술품의 이름난 수집가이고 탁월한 감식가이다.
현재 97세의 고령으로 여전히 저술 활동과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한국통이기도 하다.
1952년 6·25전쟁 때 한국교육부흥계획을 세우기 위해 미국 정부 요원으로 한국에 온 적도 있다.
이상만 고양문화재단 총감독
<49>흙속에 저 바람 속에
저자를 직접 만난다는 것은 단지 책으로 만나는 것 이상의 또 하나의 이벤트다.
나의 경우 책으로 접하기 전 저자를 먼저 알게 되는 경우가 몇 차례인가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이어령 선생이다.
형식의 극치를 달리는 박물관 개관 행사에서. 각오를 하고 축하하는 마음을 가득 모아 자리를 지키는 터에 축사를 하는 명사로 바로 그가 자리했던 것이다.
적절한 예를 들면서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우렁차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축사. 개관 행사에서 형식에 그치기 마련인 축사를 들으면서 감동하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부터 나는 팬이 되어 버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씌어진, 그가 30대에 썼다는 책까지 더듬게 된 것은 그렇게 시작된 관심 때문이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미 제목이 정해질 때 세월을 넘어설 각오를 했던 것만 같다. 뭔가 본질을 건드리는 냄새가 가득 느껴진다.
1962년 약 두 달에 걸쳐 일간지에 연재했던 글들에 주해를 달아 실은 것이라 한다. 신문사의 마감시간을 앞두고 즉흥적으로 써내려간 글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의 뛰어난 구사력 때문인지 글의 흐름은 마치 마주앉아 나누는 대화 같다.
내가 경험한 축사와 같이 여유로우면서 예리하고 우렁찬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다. 그의 목소리가 문장마다 들리는 것, 문어체와 구어체의 경계를 깨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힘이기도 하다.
근대를 넘어서는 세대들에게 관통하는 한국문화의 풍토를 집어내, 너무나 친숙하여 무감각한 한국 문화의 얼굴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씌어졌던 글이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조.
저자는 또 벽이 없는, 소유하지 않는, 비어 있는 그리고 사방으로 내다볼 수 있는, 그리고 상대에게도 볼거리를 주는 쌍방향의 시점 교환으로서 정자를 바라본다. 당시 우리 정자에서 인터넷이니 인터랙티브니 인터페이스니 하며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인터(inter)의 의미를 찾아내 개념화시킨 관점은 참으로 놀랍다.
옛것에서 탈피하여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주관심사였던 시대에, 그래서 어쩌면 내가 가진 것은 당연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시대에, 매우 익숙한 한국의 지리적 조건과 우리의 언어와 풍습, 의식주문화, 생활용품 속에서 일상이 아닌 한국성을 읽어내는 예리한 족집게 안목이 가득 나열되고 있는 창고다.
세상에 처음 이 글들이 나왔을 때 이러쿵저러쿵 충돌도 있었던가 보다. 40년 만에 재발간된 저서 뒤쪽의 Q&A가 그야말로 쌍방향 소통을 통한 논리전개의 일환이 되어주어 더욱 흥미진진하다.
유행이 아닌 맥을 짚고 있으니 시간 속에 더욱 증명되고 소중해진다.
저자의 관점이 길을 찾아가는 나그네에게 희망과 방향을 제시하는 절실한 표지판이 되어준다.
재발견과 공감 속에서 해답을 쥔 듯하면서, 그러나 바람같이 잡히지 않는 이 책과 틈틈이 씨름 중이다.
앞으로 40년 더 곁에 두고두고 읽다 보면 아련히 느껴지는 희망과 가능성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련다.
한젬마 화가
<50·끝>에로티즘
내가 처음 에로티시즘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대학 1학년 때 극장에서 본 영화 ‘나인 하프 위크’를 통해서였다.
킴 베이신저가 미키 루크 앞에서 섹시한 춤을 추고 비 오는 뒷골목에서 벌이는 정사 장면 등 이 영화는 아름다운 색채와 영상미로 가득했으며 화면에 펼쳐지는 인체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영화를 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흐른 뒤 내게 다시 ‘나인 하프 위크’를 떠올리게 하는 책이 등장했다.
오페라의 여주인공 ‘카르멘’의 색이기도 한 강렬한 블랙과 레드의 이미지가 책 표지에 선명하게 드러난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이 그것이다.
레드와 블랙은 ‘피와 죽음’이다.
이 피와 죽음은 바로 파리 국립도서관 사서 겸 중세전문가로 일하면서 프로이트를 접하고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어울리며 저술활동을 펼쳐 나간 바타유가 평생에 걸쳐서 연구하고 글로 남긴 에로티시즘을 상징하는 색이다.
에로티시즘의 절대적 순간에는 침묵이 있고, 사정은 ‘작은 죽음’이며 에로티시즘의 최고 경지를 죽음 또는 살해로 파악한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다.
마치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마지막 ‘이졸데의 죽음’이 무한 선율을 타고 강렬한 판타지를 안겨 주고, 가부키에 자주 등장하는 정사(情死)가 ‘사의 찬미’를 보여 주듯. 평생 에로티시즘을 연구해 온 바타유는 에로티시즘보다 노동 문제가 더욱 중요하고 절박하지만 노동 문제는 통제할 수 있고 에로티시즘은 통제권 밖에 있는 문제이며 모든 문제 중에서 에로티시즘은 가장 신비하고,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엉뚱하며 나머지 삶과 분리해 이야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
1부 금기와 위반에서는 금기와 위반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것이며 인간은 이 둘 사이에서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준다.
노동의 삶은 에로스의 삶을 제어하기 위해서 금기를 만들지만, 그 금기는 위반을 막을 수 없다.
불안한 존재인 인간은 노동을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변하면서 에로스의 바다로 빠져들게 되며, 그렇게 해서 범하게 되는 위반에서 오는 쾌락이야말로 에로티시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노동만을 하고 있는 인간들의 내면에는 이 에로티시즘이 강렬하게 숨어 있고 이 단순한 생식과는 구별되는 풍요롭고 꽉 찬 삶인 에로티시즘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중요한 차이점이며 동시에 에로티시즘의 순간보다 강렬한 것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 정신의 정상에 위치한다고 바타유는 주장한다.
2부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각론이다.
존재의 연속에 대한 향수는 육체, 심정, 신성의 에로티시즘으로 나타난다고 본 바타유는 결혼과 반복적 성행위, 에로티시즘과 신성의 관계, 천박한 매음과 에로티시즘의 관계를 비교했다.
이 책은 1957년 발간된 이후 동시대의 지성들에게 금기시되던 논의를 시원스럽게 활짝 열어 놓는 역할을 했다.
‘루바이야트에서처럼’ 밤새워 술 마시고,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노름에 빠지고, 매음굴과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경험적인 글쓰기를 계속하던 보헤미안적인 삶의 에로티시즘은 1962년 65세의 나이로 그를 운명하게 했다.
이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과학 저서 ‘이기적 유전자’와 서로 보완이 되는 책이다. 연속해서 함께 읽으면 대단히 흥미진진한 독서를 할 수 있다.
장일범 음악평론가 안양대 겸임교수
'논술(설.문)독서도서詩소설수필연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화 이해하기 20선] (0) 2006.08.18 열아홉 살의 필독서 50권 (0) 2005.10.22 교사들이 조언하는 논술대비 자세(세계일보) (0) 2005.08.24 <서울대권장도서100권>51~100 (0) 2005.07.24 <서울대권장도서100권>1~50 (0) 2005.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