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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권장도서100권>1~50논술(설.문)독서도서詩소설수필연설 2005. 7. 23. 15:19
동아일보-서울대 공동 ‘권장도서 100권’ 매일 소개
이태수 서울대 대학원장이 ‘대학생을 위한 권장도서 100선’을 선정하게 된 배경과 의미 그리고 올바른 독서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종승 기자 《동아일보는 창간 85주년을 맞아 서울대와 공동으로 최근 이 대학이 선정한 ‘대학생을 위한 권장도서 100권’을 소개하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서울대가 2월 권장도서 100권을 선정, 발표한 것은 1993년 ‘동서고전 200권’을 발표한 지 12년 만의 일이다.
기존의 선정 도서들이 너무 어렵고 국내 번역서가 취약해 교양 수준의 도서로는 적절치 않다는 판단에서다.
서울대는 지난해 10월 이태수(李泰秀) 대학원장을 위원장으로 한 18명의 도서선정위원회를 구성해 동서양 고전과 문학, 과학 등 5개 분야를 중심으로 5개월간의 작업 끝에 최종 목록을 선정했다.
정운찬(鄭雲燦) 총장은 “이번 선정도서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다양한 분야의 기초교양을 쌓아 종합적인 판단력과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 데 역점을 뒀다”고 밝혔다.
급변하는 시대흐름 속에서 학생들이 현명하게 대처해 나가려면 스스로 탐구하며 학습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게 정 총장의 설명이다.
위원회는 도서 선정 시 현대 교양인이면 꼭 알아야 하고, 현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국내 서적이 있고, 그 책에 대해 질의응답할 수 있는 국내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는 등 4가지 원칙을 적용했다.
여정성(余禎星·교무부처장) 상임위원은 “일반인이 보다 쉽게 책을 대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동시에 보다 폭넓은 교양을 갖추도록 하는 데 이 같은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원칙을 적용하다 보니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나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단테의 ‘신곡’처럼 필요하지만 읽기 어려운 책들은 최종목록에서 제외시켰다.
선정위원들은 이번 권장도서 선정에 대해 시대적,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태수 도서선정위원장은 “한 나라 또는 한 문명이 제시하는 권장도서는 그들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라며 “우리가 동서양의 다양한 책들을 목록에 포함시킨 것은 현재 우리 문화가 그만큼 다양성을 포용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서양 고전들이 뿌리를 내린 몇몇 일부 유럽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권장도서를 쉽게 내놓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라며 “이번 도서선정을 계기로 일제강점 등으로 단절된 우리 문화의 현주소와 정체성 등에 대해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 위원장은 또 “고전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고전이 동서 문명권을 넘나들며 읽힐 수 있는 것은 인류보편적인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이라며 “고전은 한 문명을 대변하며 역사와 함께 한다는 대표성이 있으면서도 시대에 따라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 여러 번 읽을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본보에 게재되는 독서기행은 독자들이 이 책들에 가장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선정위원들은 말했다.
이 위원장은 “독자들이 선정도서의 원전을 씨름하며 읽을 때 도서 선정 작업의 진정한 의미가 발현될 것”이라며 “일주일에 몇 페이지씩 읽겠다는 식의 독서계획을 세우지 말고 저자와 대화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인생의 친구로 삼는 자세를 가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목록▼
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권장도서] 서울대 선정 권장도서 100권 2005/04/11 11:01 서울대는 4일 기초교육 강화, 종합적 판단력과 비판적 사고력 함양을 위해 대학생이 읽어야 할 인문.사회.자연과학 분야 권장도서 100선을 선정, 발표했다.
'권장도서 100선'은 1993년 서울대가 발표한 '동서고전 200선'을 바탕으로 각 전공분야를 대표하는 교수 20여 명이 1년여 동안 선정작업을 벌인 끝에 작성됐으며 분야별로는 한국문학 17권, 외국문학 31권, 동양사상 14권 서양사상 27권, 과학기술 11권 등이다.
서울대는 권장도서마다 해당 분야 교수의 해설을 곁들인 가이드북을 3월말 간행하는 한편 해당 서적을 분야별로 다루는 핵심교양과목을 개발해 이르면 오는 2학기 학부과정에 개설할 방침이다.
서울대는 또 과학고전을 시작으로 비전공자들도 고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선집(Anthology)을 발간하는 한편 기초교육원에 인터넷 사이트를 구축, 해당 권장도서에 관해 토론하고 질문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할 계획이다.
다음은 권장도서 목록.
◇ 한국문학(17권)
▲ 고전시가선집 ▲ 연암산문선 ▲ 구운몽(김만중) ▲ 춘향전 ▲ 한중록 ▲ 청구야담 ▲ 무정(이광수) ▲ 삼대(염상섭) ▲ 천변풍경(박태원) ▲ 고향(이기영) ▲ 탁류(채만식) ▲ 인간문제(강경애) ▲ 정지용전집 ▲ 백석시전집 ▲ 카인의 후예(황순원) ▲ 토지(박경리) ▲ 광장(최인훈)
◇ 외국문학(31권)
▲ 당시선(이백시선.두보시선 포함) ▲ 홍루몽(조설근) ▲ 노신선집 ▲ 변신인형(왕몽) ▲ 마음(나쓰메 소세키) ▲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 ▲ 일리아스.오딧세이아(호메로스) ▲ 변신(오비디우스) ▲ 그리스비극선집(소포클레스 등 포함) ▲ 신곡(단테) ▲ 그리스로마신화 ▲ 셰익스피어(Hamlet, Macbeth, The Tempest, As You Like it 등 포함) ▲ 위대한 유산(디킨스) ▲ 주홍글씨(호손) ▲ 젊은 예술가의 초상(조이스) ▲ 헉클베리핀의 모험(트웨인) ▲ 황무지(엘리엇) ▲ 보바리 부인(플로베르) ▲ 스완네 집 쪽으로(프루스트) ▲ 인간조건(말로) ▲ 파우스트(괴테) ▲ 마의 산(토마스 만) ▲ 변신(카프카) ▲ 양철북(그라스) ▲ 돈키호테(세르반테스) ▲ 백년동안의 고독(마르께스) ▲ 픽션들(보르헤스) ▲ 고도를 기다리며(베케트) ▲ 카라마조프 형제들(도스토예프스키) ▲ 안나 카레니나(톨스토이) ▲ 체호프 희곡선
◇ 동양사상(14권)
▲ 삼국유사 ▲ 금강삼매경론(원효) ▲ 퇴계문선(이황) ▲ 율곡문선(이이) ▲ 다산문선(정약용) ▲ 주역 ▲ 논어 ▲ 맹자 ▲ 대학-중용 ▲ 제자백가선도 ▲ 장자 ▲ 아함경 ▲ 사기열전 ▲ 우파니샤드
◇ 서양사상(27권)
▲ 역사(헤로도토스)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투키디데스) ▲ 국가(플라톤) ▲ 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 ▲ 고백록(아우구스티누스) ▲ 군주론(마키아벨리) ▲ 방법서설(데카르트) ▲ 리바이어던(홉스) ▲ 정부론(로크) ▲ 법의 정신(몽테스큐) ▲ 에밀(루소) ▲ 국부론(아담 스미스) ▲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칸트) ▲ 페더랄리스트 페이퍼(해밀턴 외) ▲ 미국의 민주주의(토크빌) ▲ 자유론(밀) ▲ 자본론 1권(마르크스) ▲ 도덕계보학(니체) ▲ 꿈의 해석(프로이트) ▲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베버) ▲ 감시와 처벌(푸코) ▲ 간디 자서전(간디)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브로델) ▲ 홉스봄 4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홉스봄) ▲ 슬픈 열대(레비스트로스)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하우저) ▲ 미디어의 이해(맥루한)
◇ 과학기술(11권)
▲ 과학고전 Anthology(On the Revolutions of Heavenly Spheres (Copernicus), 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 (Galileo Galilei), The Principia (Newton) 등 포함) ▲ 신논리학(베이컨) ▲ 종의 기원(다윈) ▲ 과학혁명의 구조(토마스 쿤) ▲ 괴델,에셔,바흐(호프스태터) ▲ 부분과 전체(하이젠베르크) ▲ 엔트로피(리프킨) ▲ 이기적 유전자(도킨스) ▲ 수확의 확실성(클라인) ▲ 객관성의 칼날(길리스피) ▲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호프만) (서울=연합뉴스)--------------------------------------------------
(1) 최인훈- 광장
- 주인공 이명준의 내면적 갈등 통해 이념의 폭력성과 참된 행복 그려-
최인훈은 전후 한국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하나로서, 작품들을 통하여 한국인의 삶의 궤적을 20세기 세계사의 진폭 속에 위치시키면서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 규명에 주력해온 폭넓은 사유를 보여준 바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광장’은 1960년에 발표된 이래로 지금까지 여러 세대를 거쳐 읽혀온 작품으로서,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도 새로운 경험과 지적 모험을 자극하는 ‘현재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 작품은 분단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넓게는 한국문학사, 좁게는 한국 소설사에서 큰 의미와 중요성을 지닌다. 물론 ‘광장’ 이전이나 이후에도 남북의 분단 상황과 좌우 이데올로기를 다룬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편향된 시각으로 분단문제에 접근한 이 작품들을 엄밀한 의미에서 분단문학이라고 평가하기 힘들다.
최인훈은 이 작품에서 북한의 공산주의 이념과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해서 냉철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깊이 있는 비판과 성찰을 보여준다. 분단 현실에 대한 이러한 냉철하고도 균형 있는 성찰은 이념의 본질과 진정한 삶의 행복과 관련해 오늘날까지도 소중한 통찰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항(二項)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제3의 이데올로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지만, 기실 이러한 절망감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히 인간성을 말살하는 이념의 횡포에 대한 성찰에 지나지 않는다면, 명시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쓴 대부분의 이념소설이 그렇듯이 한국소설사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삶의 일회성에 대한 첨예한 인식이나 개인과 사회의 긴장과 갈등, 인간 자유의 문제 등과 같은 실존주의적 주제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또한 ‘광장’은 ‘이명준’이라는, 한국소설사에 보기 드문 관념적 주인공을 창조하였으면서도 인간의 내면심리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통하여 4·19 혁명 이후의 한국 소설이 전후(戰後)소설의 관념적 경향에서 벗어나 내면 공간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전기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의 중요한 주제로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사랑’이 언급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광장’은 ‘광장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이라는 비평서가 출간될 정도로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는 작품인데, 이러한 소설의 열린 구조는 이 작품을 비롯하여 최인훈 소설의 ‘현재성’을 담보해주는 중요한 원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처음 발표된 이래로 무려 여섯 번의 개작과정을 거쳐 다듬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언어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개작과정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작가의 수정 및 첨삭 작업이 작품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작품 감상의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 대한 독서를 출발점으로 이른바 ‘분단문학’ 전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거나 또는 작가가 1994년에 발표한 ‘화두’를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독서체험이 될 것이다.
박성창 서울대 인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 돈키호테-세르반테스 돈키호테 - 세르반테스
문학이 창조해 낸 으뜸가는 인물 전형 중의 하나는 돈키호테일 것이다.
그것은 어릿광대 같은 희극적 주인공 돈키호테에게서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 상황에 실존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의 비극적 한 단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돈키호테의 희비극은 그의 시대착오적 기사(騎士) 편력에서 비롯된다. 몰락한 하급 귀족 출신으로 쉰을 넘긴 나이에 기사소설 읽기에 미쳐 있던 주인공이 마침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녹슨 투구와 갑옷, 낡은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몸소 편력 기사로 나서는 것이다.
출정은 세 번에 걸쳐 이어진다. 첫 출정은 혼자 떠나지만 두 번째 출정에는 우직한 농부 산초를 설득해 종자(從者)로 동반하고 나선다. 여기서 주인과 종자 사이에는 복고적 기사세계의 이상주의와 그것을 거부하는 현실주의가 간단없이 충돌하며 긴장과 유머를 빚어낸다.
대립하는 두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의와 우정을 다하는 두 인물의 인간적 조화는 세르반테스가 엮어낸 휴머니즘의 정수라고 할 것이다. 마지막 출정에 나선 돈키호테는 마침내 백기사와의 결투에서 지고 귀향길에 올라 기사 편력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결말이 비극적인 것은 돈키호테에게 존재 이유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요 실존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의 의미는 세 가지 관점에서 얘기할 수 있다. 우선 문학사적 관점에서 소설의 효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17세기 전후 스페인 사회의 구체적 현실을 배경으로 연극을 비롯한 다양한 서사 장르의 주제와 형식을 실험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서사 시점을 다양화시켜 여러 일화와 인물과 행위를 일관된 구조와 플롯으로 교직(交織)해 내는 것, 대화를 통해 캐릭터를 창조해 내는 것, 인물들의 중층적 관점을 대비시켜 리얼리티를 증대시키는 것 등 세르반테스의 서사 형식에 대한 문제의식은 소설의 원형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키호테를 소설 중의 소설로 꼽게 되는 것이다.
또한 돈키호테는 이성적 사유 능력을 근간으로 하는 서구 근대사회의 인문주의적 인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돈키호테의 맹목적 기사 편력은 산초의 합리적 이성에 대해 비이성적이지만, 윤리적 관점에서 정의를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산초보다 이성적이다.
햄릿이 극단적으로 계산적인 개인주의 이성으로 번민하고 있다면 돈키호테는 개인주의적 합리성을 떠나 도덕적 이성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진리와 허위,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햄릿과 견줄 때 돈키호테의 미덕은 무엇보다 도덕적 선의 의지를 투명하게 그려낸 데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돈키호테는 서구의 종교개혁과 아메리카 진출, 그리고 과학의 발전과 인쇄술의 혁명 등 제반 사회변동 가운데 도래한 근대사회의 문화적 결실이라는 데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의미를 넘어 돈키호테의 고전적 가치는 무엇보다 시공을 초월해 되새겨지는 휴머니즘 정신에 있다. 그래서 웃음과 풍자로 17세기 스페인인들에게 유쾌한 지적 훈련의 동기를 제공했다면,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변함없는 유머와 해학으로 정보화 시대에 요구되는 자기반성과 성찰의 동기를 부여해 주고 있는 것이다.
김춘진 서울대 서어서문학과(3)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 호프만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 호프만
우리 몸은 140억 년 전 빅뱅우주에서 만들어진 가벼운 원소인 수소와 그보다 수십 억 년 후 어느 별에서 만들어진 무거운 원소들이 만나 이루어진 화학원소들의 집단이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화학물질’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하는 것은 얼마나 자기 비하적인 일인지 모른다.
문제는 현대를 사는 교양인에게 화학의 전모를 제대로 전달하는 책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198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고 나서 세 편의 시집과 시화집을 출간했고, 심미적 혜안으로 과학을 해석하는 많은 글을 남긴 호프만의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The Same and Not the Same)’는 참으로 권장할 만한 책이다.
호프만은 다음 두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화학이 어떻게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할 뿐 아니라 과학의 오용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보여준다.
“나는 과학의 전체적인 영향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민주화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옛날에는 특권 엘리트에게만 허용되었던 필수품과 안락함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창조물이 어떻게 이용되고 오용되는가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화학은 비료를 통한 영양의 증진, 소독을 통한 위생의 향상, 의약품을 통한 질병의 퇴치 등에 기여함으로써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인간 수명이 두 배로 연장되는 데 중요한 몫을 했다.
반면 이처럼 우리 삶에 안락함을 가져다준 화합물들이 환경오염을 가져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화학의 발전에는 대립적인 요소들이 긴장을 조성한다. 서로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한 화합물의 미묘한 차이 때문에 어떤 물질은 뛰어난 약효를 나타내고, 유사한 다른 물질은 부작용을 가져오는 긴장감이다.
화학에서 대립적 요소는 결합-분해, 정적-동적, 평형-섭동(攝動·주요한 힘의 작용에 의한 운동이 부차적인 힘의 영향으로 인하여 교란되어 일어나는 운동), 천연물-합성물, 순수-불순, 유익-유해, 순수-응용 등 여러 면에서 드러난다. 호프만은 이런 다양한 화학의 대립적 요소에 대해 적절한 사례를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한편 대부분의 화학자가 화학의 실용성만을 내세우고 화학에 대한 일반인의 무지와 부당한 공격에 대해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데 비해 호프만은 환경론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는 열린 자세를 보여준다.
호프만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물질세계에 대해서, 특히 인간이 세상에 더해 놓은 합성화합물에 대해 기본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문을 닫아버리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확대를 배척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21세기의 민주 시민에게 어느 정도의 과학 지식은 필수적이고, 일반인에게 과학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이 긴요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화학의 인간적이고 예술적인 면을 보여주는 이 책은 진정한 교양과학도서라 할 만하다.
김희준 서울대 교수·화학부(4) 루쉰 소설전집-루쉰 루쉰 소설전집 - 루쉰
고전과 만나는 계기는 다양하다.
우연하게 눈에 띄었는데 알지 못할 힘에 끌리기도 하고, 대학입시를 준비하다 만나기도 한다. 글자로만 만나는 것도 아니다. 만화로도 만나고 영화로도 만나며, 요즈음은 컴퓨터 게임을 통해서도 만난다.
고전과 독자의 관계도 일방통행만은 아니다. 첨단의 멀티미디어 환경과 초국적 자본주의 체계는 고전을 더 이상 ‘순수의 영역’에 가둬두지 않는다. 읽고 마음에 담고 실천하는 방식에서, 인터넷 게시판 소설이나 온라인 게임에서와 같이 읽고 다시 쓰고 변형하는 방식으로 고전이 소비된다. 고전이 안 읽힌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전의 두루누리(유비쿼터스·어디서나 존재함)화가 진척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
고전과 만나는 계기와 방식이 다변화된 시대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전을 대할 것을 주장하는 일은 고전을 죽이는 행위와 진배없게 된다. 실제로 많은 고전이 그렇게 죽어갔다.
고전의 장점은 그 자체에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리를 내장하고 있음에 있지 않다. 고전은 ‘카오스’일 따름이다. 모든 가능성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로 담겨 있다. 독자는 저마다의 관심사와 필요를 갖고 고전에 들어가, 각자의 필요대로 답을 얻고 길을 찾는다.
고전이 안겨주는 삶과 사회, 인간에 대한 본원적인 통찰과 해석은 이렇듯 고전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고전은 일종의 미디어(매체)다. 혼자 있어도 빛을 발하고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의 만남 속에서 그 가치가 확인되고 그 쓸모가 확산되는 존재이다.
루쉰(魯迅·1881∼1936)은 이런 면에서 꼭 짚고 넘어갈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중국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던 그는 중국에서뿐 아니라 중국 바깥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현대 중국작가이다. 이는 그의 소설이 지닌 미디어로서의 뛰어난 성능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국인은 그를 통해 자신의 전통과 근대를 성찰했고, 일본인은 그를 통해 자신의 근대와 근대 너머를 사유했다. 저마다 자신의 문제를 갖고 들어와 그의 소설에 비추어보고 뭔가 답을 얻어갔다. ‘지금-여기’의 고민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 루쉰의 소설은 그래서 고전이 될 수 있었다.
‘루쉰소설전집’에는 그가 평생 출간한 3권의 소설집이 모두 담겨 있다.
첫 번째 소설집은 ‘함성((눌,열)喊)’이다. 여기에는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인 ‘광인일기’와 중국인의 본성을 날카롭게 해부한 ‘아Q정전’ 등 15편의 중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두 번째 소설집은 ‘방황’으로 여기에는 ‘축복’ 등 11편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세 번째 소설집은 ‘고사신편’이다. ‘옛 이야기를 다시 쓴다’는 제목의 이 소설집은 일반 민중에게도 친숙한 신화나 전설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 일색이다. 이 방식은 루쉰이 ‘고대와 현대에서 제재를 취하여 그들을 함께 얘기하는 방식’이라고 밝혔듯이 오늘날 우리가 고전을 대하는 태도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고전은 늘 새롭게 쓰이고 만들어진다. 그건 콘크리트가 아니라 찰흙이다. 따라서 빚는 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형상으로 빚어진다. 찰흙으로 작품을 빚어내는 마음. 고전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김월회 서울대 교수 중어중문학과(5) 백년 동안의 고독 백년 동안의 고독
‘백년 동안의 고독’(1967)은 서구의 문학계가 지나친 실험정신으로 ‘소설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을 때 ‘소설의 소생’을 증명했다. 문단을 짓누르던 엄숙주의와 실험정신의 족쇄로부터 소설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프랑수아 라블레식 유머문학으로 분류될 정도로 재미있으면서도 철학적 의미가 풍부하고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인정받는 이 소설은 1982년 작가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주었고 전 세계 대부분의 언어로 번역됐다.
소설은 ‘마꼰도’라는 가상 마을에 사는 부엔디아 집안의 7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서구의 식민지배와 왜곡된 근대화를 겪어온 콜롬비아의 역사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들을 사랑과 미움, 만남과 이별, 환희와 고독, 탄생과 죽음 등 삶의 파노라마 속에 녹여 펼치면서 소재의 지역적·정치적 경계를 넘어 보편적 인간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동시에 인물들의 반복적 행태와 순환적 서사 구조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의미와 한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유도하기도 한다.
작가의 표현처럼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 가족의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적인 갈등은 없지만, 대부분의 인물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련지을 수 있는 욕망과 사회적 금기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철저하게 진지함이 결여된 이 작품에는 구약성서와 중세 서사시부터 라틴아메리카의 전설과 풍속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패러디와 아이러니, 유머와 함께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현실과 환상의 결합을 암시하는 ‘마술적 사실주의’는 라틴아메리카인의 존재론적 인식이 반영된 표현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자연환경과 역사, 존재양식과 사고방식에서 서구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식적, 미학적 종속관계를 단절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는 서구의 이성중심적, 리얼리즘적 전통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지어 언급되기도 한다. 중심부 담론에 의해 재단된 현실을 교정하는 대안적 세계를 창조하고, 중심부 담론의 오류를 바로잡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는 식민 지배를 받으며 왜곡된 자아에서 탈피하면서 진정한 주체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종의 ‘탈식민주의 글쓰기’이다. 그래서 ‘모든 것의 해체’를 지향하는 제1세계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마술적 사실주의는 루이스 보르헤스 식의 환상문학과 구별된다. 마르케스의 마술성이 현실에 발을 굳건히 디딘 채 이야기의 현실 비판적 기능을 강화한다면, 보르헤스의 환상성은 구체적 현실과 유리된 관념의 세계를 형성할 뿐이다. 자연히 정치·사회적 기능면에서 엄연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 소설의 경우 황석영의 ‘손님’, 임철우의 ‘백년 여관’ 등의 작품에서 마술적 사실주의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환영과 혼령, 초자연적 현상 등 비현실적 요소가 현실세계의 일부를 구성하면서 우리 근대사의 비극적 경험과 민족 특유의 의식세계를 보다 심층적으로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창민 서울대 교수 서어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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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간디 자서전-마하트마 K 간디
간디 자서전-마하트마 K 간디 간디 자서전은 부제인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가 말해 주는 바와 같이 비폭력을 통해 이룩한 순수 영혼의 투쟁사이다.
이 자서전이 선정된 것은 그의 사상이 제3세계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간디 스스로 그 사상의 가능성을 실천적 삶을 통해 온몸으로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간디는 가히 서양사상 일변도의 사상사에 실천으로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운동으로 인도의 독립을 이룬 것으로 유명한데, 이 자서전은 제1차 불복종운동이 한창이던 1920년까지의 간디의 전반부 인생을 기록한 것으로 독립운동 이전의 기록이다.
그럼에도 이 자서전이 널리 읽히는 까닭은 그의 기본사상과 실천방법이 이 시기에 이미 확립되었고 이 자서전이 그 과정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디자서전에서 연약하지만 너무나 순수해서 그 어떤 폭력에도 맞설 수 있는 위대한 영혼을 보게 된다. 간디의 사상은 비폭력(Ahimsa)을 통한 진리파지(眞理把持·Shata Graha)라고 요약할 수 있다.
‘Ahimsa’는 모든 생물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는 간디의 말은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간디가 아무도 실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확신도 가질 수 없었던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생을 일관되게 사랑과 용서, 포용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기실 비폭력을 외친 것은 간디가 처음이 아니다.
모든 종교는 폭력을 배제하지만 이들 종교는 이런 가르침을 개인의 삶에서만 다룬다.
간디가 위대한 것은 비폭력을 공공(公共)의 삶 속으로 끌어들였고, 이를 통해 정의롭지 못한 상태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였기 때문이다.
간디에게 있어 비폭력은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강한 사람만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간디가 진리파지 운동을 벌일 당시의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착취로 민중의 활력이 메말라버린 빈곤과 패배주의의 시대였다.
인도는 150만의 인원과 3억 파운드의 군사비를 제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수행에 적극 협력하였지만, 이에 대한 영국의 보답은 민족운동에 대한 강화된 탄압이었고 인도인들은 절망과 무기력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열악한 상황에서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은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무모함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성공시킨 원동력은 간디의 높은 도덕성이었다.
간디가 가진 도덕적 우위는 그 어떤 것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영국의 총칼을 극복함으로써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이 자서전은 특히 청소년들에게 좋다.
간디의 이상은 고원하고 그 실천은 따라하기 어렵지만, 이 자서전은 너무나 진솔한 자기 고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자서전을 읽으면서 간디가 위대한 넋으로, 성자로 추앙받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도덕성의 힘을 증명하는 간디자서전은 물질 위주의 세상을 살아가게 될 우리 청소년들에게 더없이 유익한 인생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흥식 서울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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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루스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별과 재회 또는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이다. ‘스완네 집 쪽으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편으로, 그러한 모색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작품세계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부단히 죽어 가고 있다는 세네카 식의 인식이다. 특히 망각현상이 그 극명한 예이다. 까마득히 먼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들은 물론, 불과 며칠 전의 일들도 쉽게 잊거나 잊혀진다. 그것이 프루스트가 인식한 우리의 정서적 모습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의 뚜렷한 징표인 우리의 정서적 퇴적물은 그렇게 덧없이 지워진다.
그러나 영영 지워지는 것일까? 그렇게 죽어 소멸되는 것일까?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의 중심적인 의문이다.
물론 지난 세월의 일들을 기록에 의지하여, 또는 다른 수단의 도움을 얻어 인위적으로 기억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우리 개체 고유의 실존적 체험과는 무관한 사건들이다. 그러한 사건들의 특징은 온갖 유행이념이나 잡다한 교조(敎條), 주입되거나 들쑤셔진 억지감정 등에 의해 빚어진 그 무엇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속성상 다소간의 거짓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과거의 부활도 있다. 아직 봄바람 차가운 어느 날 오후 양지쪽 밭두렁을 무심히 걷던 중 문득 엄습하는 황홀감에 넋을 잃고 걸음을 멈추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때로는 눈물이 왈칵 치솟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참냉이 잎이 눈에 띄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 다음 순간이다. 그리고 나물 캐던 누나를 따라다니던 시절이, 냉이죽조차 먹지 못해 누렇게 부황에 떠서 죽어 가던 이들을 대동하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다시 한순간이 더 지나서이다. 또한 어떤 때는 어느 묏부리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설레지만, 아무 추억도 되살아나지 않는다. 부활된 것의 정체가 영영 밝혀지지 않는 경우이다.
‘잃어버린 시간’은 그토록 하찮은 사물에 의해 촉발된 황홀감이나 격정의 비밀을 깨달아 가는 역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터득한 ‘진정한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은 ‘잃어버린 줄로 믿었던 시간’을 가리키는 반어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적 체험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프루스트가 ‘되찾은 시간’이라고 명명한 그 시절 또한 단순한 과거의 어느 순간만이 아니다. 지극히 하찮은 사물과의 우연한 접촉에 의해 부활된 그 상태, 비등(沸騰)성 황홀감을 수반하는 그 찰나적 상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설의 주인공은 일체의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한 자신의 초월적 본질을, 다시 말해 불멸의 가능성을 감지하기도 한다.
삶의 허망한 실상을 절감한 이들에게는 작은 위안이 될 수도 있고, 존재의 새 국면을 보여 줄 수도 있는 작품이다. 문학 및 예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로서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는 세월의 여과작용을 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스완네 집 쪽으로’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경우가 많은데 ‘스완 씨 댁 쪽으로’가 정확한 번역이다.
이형식 서울대 교수·불어교육과(8) 국가-플라톤
[국가-플라톤]정치공동체의 목적은 무엇이며 가장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정의란 무엇이며 과연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더 행복한가? 서양세계 첫 정치철학서로 평가되는 플라톤의 ‘국가’는 이 같은 물음을 제기하며 정치공동체 내에서 인간의 삶을 전체 모습에서 검토한다.
이 책은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한 저자의 조국 아테네가 50여 년의 융성기를 보낸 후 스파르타와의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몰락해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이 책에는 그가 사랑하던 아테네 식 정치공동체의 회생에 대한 저자의 깊은 소망이 담겨 있다.
그는 또 자신의 이상국가 소망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것임을 예견하고는 그런 국가가 지상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라고 책의 말미에 밝히기도 했다. 유토피아를 통해 그가 그린 것은 허황한 꿈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진 능력이 최상의 수준에서 발휘되는 공동체의 모습과 그 성립을 위한 조건이다.
이 책에 담긴 그의 성찰은 그 시대와 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상황이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삶의 문제를 얘기할 때도 언제든지 대입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 특히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오늘의 시각에서도 대담하다고 할 수 있을 많은 주장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철인통치론이나 시인추방론, 사유재산을 갖지 않는 통치자들의 이상적 공산공동체 구상, 여성통치자가 등장할 기회 부여, 그리고 교육의 공공성에 대한 주장 등이 그렇다. 이런 주장 중에서 지금까지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온 것은 ‘국가는 정의를 토대로 할 때에만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앎에 기초한 통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모든 이에게 각자의 것’이라는 정의 아래 △개개인이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하고 △그에 합당한 것을 배분받으며 △각자 타고난 능력이 최대한 발휘되는 공동체가 가장 좋은 나라라고 규정했다. 그는 또 구성원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공동체를 통치하면 그 나라가 가장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며 이를 ‘철인(哲人)통치’라고 정의했다. 이는 서양문명 초창기의 ‘지식국가’ 모습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어제 나눈 긴 대화를 다시 전하는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대화가, 누구와, 어떻게 이어질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이런 설정을 통해 대화자가 누구이며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향후 논의내용과 전개방향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열린 구조’를 갖게 된다. 독자들은 어느 단계에서나 전혀 다른 논의 전개를 시도하며 대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을 통해 플라톤은 철학이 특정한 교설(敎說·가르치고 설명함)의 ‘굳은 체계’가 아니라 주어진 문제에 관해 진리를 추구하며 이것이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생동하는 현장’임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플라톤은 제기되는 물음과 비판에 대해 방어하며 근거를 제시하는 탐구의 작업만이 학문이며 철학일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박종현 교수의 공들인 번역 덕분에 2500년 전의 고전을 한국의 독자들도 정확하고도 유려한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김남두 서울대 교수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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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중록-혜경궁 홍씨
[한중록-혜경궁 홍씨]
1762년 음력 윤달 5월 13일 영조대왕이 큰아들 사도세자의 처소를 찾아갔다.
양력으로 치면 8월 초쯤, 무더위로 푹푹 찔 때다.
왕은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세자는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하고 목이 메도록 빌었다. 섬돌에 머리를 부딪기도 했다.11세의 어린 손자(후에 정조)까지 할아버지께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영조의 결심은 반석 같았다.세자를 죽이고자 하는 뜻을 쉬 이루지 못하자, 급기야 뒤주를 가져오라 했다. 재촉과 만류가 되풀이되면서 시간은 어느덧 밤이 되었다.
세자는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주에 들어갔다.
거구의 세자는 왕이 직접 꽁꽁 봉한 좁은 뒤주 속에서 어둠, 무더위,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아흐레 만에 숨졌다.
이 과정을 지척에서 겪은 이가 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다. 혜경궁은 이 참혹한 광경 앞에서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시아버지가 남편을 죽였건만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시아버지가 지존이니 어디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혜경궁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도 20년 동안 한을 가슴에만 품고 지내다가 환갑을 맞을 때쯤에야 옛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을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총 5차례에 걸친 회고록을 총칭한 것이다.‘한중록’은 일관되게 기획된 글이 아니어서 구성이 체계적이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도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중록’은 좋은 문학 텍스트는 아니다.
게다가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 아들 정조에게 사사(賜死) 당한 작은아버지, 유배지에서 죽은 동생 등 대개 친정 식구들을 변호하기 위해 쓴 글이어서 절제되지 못한 감정의 분출을 보인다. ‘증오의 서’라 불릴 만큼 직설적이다.
하지만 정제되지 못한 표현과 감정이 ‘한중록’의 매력이기도 하다.꾸미지 않고, 멋 부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러 이본(異本) 중에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소장본처럼 자기 부모의 부부싸움까지 시시콜콜 다 얘기하는 이본을 더 가치 있게 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중록’의 가치는 전대미문의 끔찍한 사건을 다루었다는 점이나 혜경궁의 글 솜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지켜보는 필자의 시선이다.
혜경궁은 가해자 영조의 며느리이자 피해자 사도세자의 아내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한때 외가를 공격한 적도 있는 정조의 어머니다.
이 복잡한 상황을 당사자의 필치를 따라 읽어가면서 정치, 인간관계, 인간 심리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에 이를 수 있다.
영문 번역본 ‘한중록’을 펴낸 미 컬럼비아대 김자현 교수는 수업시간에 미국 학생들에게 ‘한중록’을 읽혔더니 아주 반응이 좋더라고 했다.무릇 고전은 국적을 뛰어넘는 법이다.
현재 출간된 ‘한중록’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김동욱 선생이 교열하고 주석한 ‘한듕록’(민중서관·1961)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여타의 ‘한중록’은 대부분 이 책을 쉽게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김용숙 선생의 역저 ‘한중록 연구’를 참조하며 ‘한듕록’에 도전해 보자.
정병설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10) 도덕계보학-프리드리히 니체 [도덕계보학-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1887년에 출간한 것은 이미 8권의 저서를 낸 후였다.
이 책은 니체가 1886년 그의 사상을 종합해 출간한 ‘선악의 피안’의 속편으로 그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술된 약 160쪽의 비교적 얇은 책이다.
니체는 사상에서 가장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며 어떻게 생성됐는지를 이 책을 통해 탐구하고 있다.
그는 도덕적 가치의 기준이라는 것들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행위들을 통해 오랫동안 강요되면서 뿌리내려오게 됐다는 것을 분석적으로 보여주려 하고 있다.
이 책은 도덕적 가치 기준 중 공존하지만 구별되는 두 가지 기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좋다’와 ‘나쁘다’, 그리고 이와는 구별되는 ‘선하다’와 ‘악하다’라는 두 쌍의 기준이다.
그는 이 두 기준이 명확하게 다른 연원을 갖고 있으며, 또 서로 다른 역사를 거쳐 발달해왔다고 강조한다.
니체는 ‘좋다’와 ‘나쁘다’의 가치 기준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확립된 것이라기보다는 권력을 독점하던 종족 집단이 스스로를 ‘좋다’고 일방적으로 정의하고 이를 강요한 결과로 생긴 기준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가치 기준은 ‘금발의 야수’로 불리던 게르만 전사(戰士) 귀족들의 것이었고, 게르만의 관습이 그들이 지배하던 유럽 대륙 전체로 전파돼 유럽 사회의 일반적 속성으로 뿌리내리면서 굳어진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선하다’와 ‘악하다’의 기준은 다수의 피지배 계층이 갖고 있던 지배자들에 대한 원한과 증오의 표현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당시 전사 귀족들과 갈등 관계에 있던 성직자들이나 유대인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그는 성직자들이 대중의 원한을 활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고 주장한다.
즉, ‘선’과 ‘악’이라는 기준은 피지배층이 갖고 있던 원한을 분출해 지배자들에게 복수하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복수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우회적인 형태로 지난 2000년 동안 서서히 서구인들에게 정착돼 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러한 가치 기준이 만들어낸 결정체가 바로 ‘금욕적 이상’이라고 결론짓는다.
니체는 이 책에서 ‘선과 악’이라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분출하는 본능에 따라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강력한 동물로 인간을 회복시키려 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이 ‘차라투스트라’처럼 자신을 극복하는 위대한 모습으로 삶을 긍정하고 운명을 사랑하는 존재로 진화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초인’이란 독재적 영웅이 아니라 자신을 극복하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인간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또 사회적 약자들의 원한이 만들어내는 독소는 특히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결국 사회적, 개인적인 원한이 쌓이면 그 사회 또는 개인에게 독이 되어 돌아오므로 이들이 핍박받지 않도록 자유주의의 확산, 창의력의 독려가 사회 구성의 중요한 요소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을 되새겨 봐야 한다.
최정운 서울대 교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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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여러 작품 중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일반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책이자 현대 성장소설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소설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가 유년기와 대학시절을 보낸 뒤 예술가의 꿈을 안고 피폐한 가정과 조국을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매우 자전적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른 성장소설과 달리 연대기적으로 구성돼 있지 않다.대신 주인공의 ‘의식의 형성’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과정에 개입하는 갖가지 심리적 생리적 사회적 자극을 어떻게 수용하고 저항하며 또는 소화해 내는지가 리드미컬하게 이어진다.
여기에 매 상황에 가장 적합한 언어선택을 통해 이를 설명, 묘사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 과정에 개입해 독특한 시적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작가는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찬사에 걸맞게 이런 정교하고 치밀한 언어체험을 감수성이 예민한 식민지 청년인 주인공의 비장한 성장과정에 절묘하게 조화시킨다.
여기에 재미있는 뒷얘기도 있다.
‘스티븐 디달러스’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작가 자신이 잠시 사용한 적 있는 필명이었다.‘스티븐’은 신약에 나오는 최초의 순교자 이름이고 ‘디달러스’는 손수 날개를 만들어 달고 하늘로 날아올라 역경을 탈출한 그리스 신화 속의 예인이다.
이처럼 목숨을 거는 비장함과 비상하는 경쾌함은 실제로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적 스타일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옛날 옛적 아주 좋았던 시절에…”로 시작하는 이 책의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의 신화는 이렇게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제임스 조이스의 글을 읽으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소양가치는 무엇인가.
첫째는 그가 여러모로 20세기 서구문학의 정점이었으며 21세기에도 각광받는 현대고전작가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그의 위상이다.
둘째는 그의 책이 그가 성취한 인간탐구가 유례없이 풍부하고 진솔하며 철저하면서도 문제의식이 강해 매우 각별한 독서체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특히 작가가 오랜 유랑생활을 하며 단련시킨 자전적 상상력이 도시와 시민, 언어와 의식, 역사-신화-정치 등을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 그의 고향인 아일랜드와 도시 더블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인문학적 체험을 제공한다.
셋째는 그 체험내용이 우리나라 독자에게 다분히 친숙한 주제와 정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아일랜드도 한국처럼 한때 이웃나라에 종속되는 비슷한 처지의 식민지 약소국의 갈등을 겪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자신을 남처럼 바라보는 것처럼 남의 사정을 내 일인 것처럼 몰입해 볼 수 있다.
사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조이스 문학의 가장 핵심인 ‘율리시스’를 읽기 위한 입문서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의 국내 번역본은 지금까지 무려 10여 종이 넘게 나와 있다.작가에 관한 전기로는 리처드 엘먼의 책 ‘제임스 조이스’가 탁월하다.
이 역시 최근 국내 번역본이 나와 있다.
김길중 서울대 교수·영어교육과=============================
(12) 변신인형-왕멍 변신인형-왕멍
1987년에 발표된 장편소설 ‘변신인형’은 왕멍(王蒙)의 대표작이다.
왕멍은 20세기 후반의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최근 들어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오르고 있는 그의 소설은 1940년대부터 문화대혁명까지 사회주의 중국의 분투와 영광, 실패와 상처를 짊어지면서 개혁 개방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이르는 새로운 시대와 삶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 소설에는 여러 개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첫째는 1942∼1943년 일본에 점령당한 베이징의 한 가정 이야기다.
이 가정은 아버지, 어머니, 이모, 외할머니, 누나, 남동생(주인공 니자오)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는 유럽 유학까지 다녀온 신지식인이지만 속물적이고 방탕한 인물로 그려져 봉건적인 삶에 매몰되어 있는 어머니, 이모, 외할머니 등과 끊임없이 싸운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언어학자가 되어 있는 성인 니자오가 1980년 독일을 방문해 겪는 이야기다.
니자오는 아버지의 옛 친구인 한 독일인 학자의 집에서 ‘난득호도(難得糊塗·어리석어지기가 어렵다는 뜻)’라는 정판교(鄭板橋)의 글씨를 보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셋째는 니자오가 귀국한 뒤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죽고 1942∼1943년 당시 가족 구성원들의 훗날의 삶과 죽음에 대한 회상이 전개된다.
넷째는 작가가 직접 등장하여 자신의 삶의 주요 장면과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개개인의 황폐한 삶이다.
그 황폐함은 너무도 끔찍하고 고통스러워서 거의 인간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온통 불화와 적의만으로 이루어진 듯이 보이는 그 부정적인 삶들은 차라리 폐기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실제로 그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 니자오의 젊은 시절을 통해 그러한 삶들의 폐기를 주장하며 이모와 외할머니를 반동분자로 고발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난득호도’라는 글씨를 계기로 시작된 회상 속에서 그 삶들은 부정적인 동시에 진정성을 지닌 모순된 모습으로 재현된다.
이 모순의 발견은 이미 니자오 자신이 1957년 우파분자로 몰려 핍박받았을 때부터 잠재되어 있던 것이고, 그 잠재태가 1980년의 회상을 통해 현재태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왜곡된 삶 속에 숨어 있는 진정성과 의미, 그 모순을 보지 못하거나 부인하는 이상(理想)은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해 억압적일 수밖에 없으며 거짓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강력한 전언이다.
이는 작중 인물 니자오와 작가 왕멍의 자기반성이며 나아가서는 중국의 사회주의혁명 전반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고 개혁 개방이라는 새로운 현실과 미래에 대한 비판의식의 점검이다.
20세기 중국이라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제기된 이 메시지는 그 맥락에만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호소력을 지녔다.
이 작품에서 문학적으로 특히 주목할 것은 시점과 화법의 복합이라는 특유의 서술 방식을 통해 왜곡된 삶 속에 숨어 있는 진정성과 의미가 설득력 있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 서술 방식을 깊이 음미할 때 한층 풍부한 독서가 가능해질 것이다.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어중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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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카오스-제임스 글리크
카오스-제임스 글리크
인류의 정신을 이끌고 있는 다수의 지성인 사이에 요즈음 유행하는 것 중 하나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복잡한 것은 조각으로 분해하여 각 조각을 이해하면 전체를 알 수 있다’는 사상이 빛을 잃어가고 있고,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의 것’이라는 오래된 사상이 다시 유행하면서 공동체에서 새로이 나타나는 창발현상(創發現象)을 이해하려고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다.
인터넷의 홍수, 수십억 개의 염기 등 방대한 정보를 다루기 위해서는 복잡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며, 과거의 정량적인 방법보다는 정성적인 방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학자들은 잘 알고 있다.
과거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던 현상들을 카오스나 프랙털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류의 생각과 정신은 한층 더 커가고 있다.
거울을 바라보면 눈동자 속에 자신의 얼굴이 보이고, 그 속의 눈동자에는 다시 내가 들어 있고, 그 속에는 또다시 내가 있는데, 이같이 ‘나 안에 나 있다’라는 현상은 자연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수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복잡계론, 비선형 동역학계론, 네트워크나 링크 등 다양한 이름으로 위와 같은 현상을 연구하고 있고, 그중 대중적 인기를 타고 있는 것이 카오스와 프랙털 기하학이다.
여기에서 카오스란 ‘질서 속의 무질서’를 뜻하기도 하고, ‘결정적인 미래 속의 예측불가능성’을 말하기도 하며, ‘신문에 난 조그만 칼럼’이 ‘인류의 의식 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나비효과’를 이르기도 한다.
카오스는 날씨에 대한 장기간 예측이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고 주식시장의 비주기적 변동, 전염병 확산이나 생태계의 변화, 심장의 박동, 밀가루 반죽하기라든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주기 등 많은 것을 설명한다.
프랙털 또한 자연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식물의 잎이나 해안선의 모양, 산이나 구름의 모습, 허파꽈리의 생김새, 핏줄의 분포 등 프랙털이 아닌 것이 없다.프랙털은 디지털 자료의 압축 등 여러 곳에 응용되고 있다.
복잡계를 연구하는 이들은 ‘무질서 속의 질서’를 본다.
이들은 무작위성을 설명하기도 하고, 지휘자 없이도 한 무리 반딧불이가 다같이 불을 깜빡이는 것이라든지, 철새가 줄지어 나는 것 등을 연구하기도 한다.
제임스 글리크 씨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고 뉴욕타임스에서 오랫동안 저널리스트로 근무한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그는 비록 과학자는 아니지만 1980년대에 유행하던 과학적 사고의 변화를 방대하게 수집하여 아름다운 이야기인 ‘카오스’를 만들어냈다.
이 책을 통하여 많은 수학자와 과학자가 위대한 자연을 이해하기 위하여 바치는 열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악보 읽기, 시 읽기, 그림 읽기 등 다양한 읽기가 있듯이 ‘카오스’를 읽을 때에도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과학적 생각을 맛본다는 자세로 대한다면 더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홍종 서울대 교수·수리과학부(14) 역사-헤로도토스
역사-헤로도토스기원전 484년에 헤로도토스는 에게 해 소아시아 연안의 항구도시인 할리카르나소스(지금의 터키 보드룸)에서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치적 이유로 사모스 섬에서 잠시 망명 생활을 거친 뒤 오랫동안 아테네에서 지냈는데 그때 그는 정치가 페리클레스 및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와 친교를 맺게 됐다.
그는 ‘이야기꾼’으로 청중에게 주로 아테네 여러 명문 가문 이야기, 전쟁 이야기, 그 밖의 역사적 사건들, 미지의 땅에 대한 경이로움을 들려주었다.
그는 여러 그리스 도시를 방문하고 주요 종교축제나 경기가 열릴 때마다 그곳에 가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기원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져 그리스 세계가 양분되자 페르시아의 제국주의 팽창정책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양국이 동맹국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해 싸웠던 것에 초점을 맞춰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체로 꾸민 것이 ‘역사’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다.
역사란 시대의 증인이고, 진리의 빛이며, 기억의 되살림이고, 삶의 스승이며, 옛 세계의 소식 전달자라고 정의를 내린 키케로가 처음 그렇게 불렀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인과 이방인의 위대한 업적들을 기록해 둠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특히 왜 양대 세력이 서로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는지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진실을 묻고 찾아 추적하는 탐구자’로서 ‘탐구’라는 뜻의 ‘역사(Historiai)’를 썼다.
그는 들은 그대로 기록하고 전해지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을 서술 원칙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세상이라고 알고 있는 모든 곳을 찾아다녔다.
아프리카인, 아랍인, 카르타고인, 키프로스인, 이집트인, 이탈리아인, 팔레스타인인, 스키타이인 등을 직접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이 ‘역사’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역사’는 전부 9권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헤로도토스 본인이 구분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편의적으로 나눈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 자신이 9개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된 ‘역사’를 청중 앞에서 직접 낭독했다는 카그나치의 주장이 있다.
그에 의하면 ‘역사’ 9권은 각기 3개(제5권은 4개)의 낭독 단위로 나뉘어 전부 28개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각각은 대략 4시간에 걸쳐 청중에게 낭독되었다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1권에서 6권까지는 페르시아 제국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
최초의 아시아 군주인 리디아의 크로이소스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하는 것에서 시작해 마라톤 전투(19강·講)에서 페르시아인들이 패퇴하는 것으로 끝난다.
다음 7∼9권은 10년 후 마라톤 패배를 복수하고 그리스를 페르시아 제국에 흡수하려는 크세르크세스 왕의 기도를 묘사한다.
‘역사’는 테르모필레 전투(22강), 살라미스 해전(24강)을 거쳐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패퇴(26강), 아테네 제국이 수립되는 제28강으로 끝난다.
이 책은 최초의 ‘동서대전(東西大戰)’을 다룬 것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동서 문명의 충돌을 살펴보게 한다.
허승일 서울대 교수·역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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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탁류-채만식 탁류-채만식
소설은 감성 혹은 느낌으로 파악한 당대의 역사이다.한국의 근대사를 감성 차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내 인식 영역에 수용하기 위해서는 한국 근대소설사에 우뚝한 몇몇 작품을 읽어둘 필요가 있다.
채만식의 ‘탁류’는 한국 근대사를 파악하는 데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근대 한국의 초상을 한마디 느낌으로 포착한다면 ‘탁류’라는 말에 앞설 어휘가 없을 듯하다.‘청류(淸流)’보다는 ‘탁류(濁流)’에 주목한 까닭은 탁한 역사의 흐름, 무뢰배(無賴輩)들이 횡행하는 현실의 실감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첫 줄은 ‘금강(錦江)…’이다. 줄을 바꾸어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게 째져 가지고는 …(중략)…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로 이어진다. 이렇게 서술자는 느긋하게 금강이 주는 느낌에서 글 읽기를 시작하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요 무대는 식민지 수출항 군산과 서울이다.군산은 왜곡된 식민지적 근대화의 핵심이 되는 지역성을 지닌 곳이다.
지리적으로는 ‘탁류’가 흘러나가는 항구도시고, 근대화의 산물인 통신시설이 정비된 곳이며, 식민지 경제의 상징인 ‘미두장’이 운영되는 공간이다.
군산은 통신과 돈과 무질서와 혼란이 뒤엉킨 크로노토프(시공간)로서 이 소설의 주제를 상징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펼쳐지는 인간사를 훑어보고 나서 그 느낌을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주제는 느낌을 되새김질하면서 주입하는 이성의 타액(唾液)에 실려 나온다. 수은 위에 금이 뜨듯이.
우리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탕개가 풀려 흐느적거리며 탁류에 휩쓸리는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단작스러운 인간 정주사, 몰염치한 인간 고태수, 가증스러운 인간 장형보, 음흉한 인간 박제호, 그리고 자기를 지킬 만한 깨달음도 선한 싸움을 위한 의지도 결핍되어 있는 초봉이 등 속된 세계를 살아가는 속물 군상이다.
그런데 이런 속물들은 따져보면 식민지 체제에서 속물로 살기를 강요당하는 인물들이다.
이런 판단은 탁류라는 ‘느낌’ 뒤에 진통을 수반하는 자성에서 비롯된다.
깨우침이 있는 독자는 이런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스스로를 닦달한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란 무엇인가’ ‘식민주의란 무엇인가’ ‘역사 전망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식민주의의 노예적 속성에 희생된 것이 초봉이의 삶이다.
식민지 경제구조 안에서 운영되는 가족을 앞세워 자기를 희생하는 초봉이의 태도는 그 체제가 주입한 노예근성의 다른 얼굴이다.
여기서 우리는 군사적, 경제적 수탈을 거쳐 정신의 노예근성을 심어 놓은 식민주의가 빚어내는 절망감의 원인을 알아낸 셈이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왔다고 그 깨달음을 따라 실천할 시간 여유가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서 비극은 비롯된다.이 비극을 극복해 내는 데는 허구적 상상력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역사의 질곡에서 살인죄인이 된 초봉이의 앞길, 그것이 민족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보듬어 안고 살 길을 찾아 나서는 데는 작가와 독자의 상상적 전망이 유일한 길이다.
이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나서는 지적 모색이 소설을 읽는 이의 의무인 까닭은 그것이 역사에 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한용 서울대 교수·국어교육과==================================================================
(16) 허클베리 핀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자주적이고 자족적으로 살아가는 미국인의 원형을 그려낸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통해서 19세기 미국인들은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또 이 소설은 미국문학의 전통을 만드는 데 중요한 밑바탕을 제공했다.
이 작품은 독자들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유발시키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미국인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유해 보게 하기 때문에 미국문학 전통을 논의할 때도 빼놓을 수 없다.
강을 따라 또는 숲 속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헉(허클베리)의 삶은 문명사회가 부여하는 구속의 틀에서 벗어나 참다운 자유를 향유하고자 하는 현재의 미국인들이 시도해보고 싶은 꿈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런 미국인들의 바람을 충족시켜줄 뿐 아니라 인종, 종교문제 등 당대의 사회문제를 천진난만한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제목처럼 소년 헉이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며 겪는 모험을 그리고 있다.
과부 더글러스가 강요하는 경직된 ‘문명화교육’에 불만을 품은 헉은 자신처럼 문화적 적응에서 도태된 아버지 팹과 외딴 오두막에서 자연과 더불어 원초적인 삶을 산다.
비록 숨 막히는 문명교육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폭력 역시 견디기가 힘들었던 헉은 근처 잭슨 섬으로 도망치게 된다.
그곳에서 헉은 노처녀 잡슨 에게서 도망친 흑인노예 짐을 만나게 된다.
이후 헉과 짐이 강을 따라 내려가며 벌이는 모험과 그 속에서 형성되는 돈독한 우정은 당시로서는 꿈도 꾸기 힘들었던 ‘흑과 백의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헉은 짐과의 생활을 통해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를 만끽하면서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되고, 심지어 짐에게서 그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부성애까지 느끼게 된다.
소설 중간엔 어린아이의 순진한 눈으로 당대사회의 왜곡된 모습을 비판한다.
뗏목이 부서져 헉은 그랜저포드 집안에 피신하게 되는데 이 가문은 근처 셰퍼드슨가(家)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총기를 난사하는 등 험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두 집안의 싸움을 통해 작가는 우매한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계속된 모험 중에 만난 사기꾼, 자칭 왕과 공작을 통해 인간이 돈 때문에 얼마나 비열할 수 있는지도 그리고 있다.
소설 후반부에는 지금까지 온전히 형성된 헉의 정신적 성장과 짐과의 흑백갈등을 넘어선 형제애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들에게서 이전의 당당한 모험가의 모습은 간데없고 어린아이 톰의 황당한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다.
인종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나 미래에 대한 비전도 사그라지면서 작가가 현실의 복잡한 문제에서 도피하는 것처럼 해석돼 ‘도피부’라고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톰이 상징하는 백인에 의해 흑인과 약자는 종국에는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당시 미국사회의 현실을 고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더불어 흑백문제에 관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극소수의 백인이 톰이 상징하는 그 사회의 주류를 지배하는 문명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다는, ‘시대의 배타성’을 풍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조철원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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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군주론-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이라는 작은 책자의 저자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 충격적 주장을 제기한다.필요한 경우 정치가들은 도덕적 구속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때로는 위선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 때문에 그의 이름 ‘마키아벨리’는 권모술수적인 정치책략가의 대명사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평가가 나온 데에는 마키아벨리 자신의 책임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그러나 이런 평가에만 매달린다면 마키아벨리의 역사적 공헌을 정당하게 볼 수 없으며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가 정치가들이 필요에 따라 일체의 도덕적 구속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이렇게 강조한 이면에는 당시 유럽의 지배적인 정치사회철학이던 기독교와 인문주의적 공화제 사상과 같은 ‘지적 전통’을 전복하겠다는 그의 야심 찬 지적 작업이 깔려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당시의 지적 전통 위에 수립된 정치이론은 실제로 존재하는 정치라기보다는 ‘있어야 할’ 이상적 정치공동체의 문제만을 다뤄 항상 사태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정치학의 핵심은 ‘권력의 조직체를 어떻게 획득하고 유지할 것인가’였던 것이다.
당시까지 모든 정치이론의 중심이었던 ‘바람직한 정치 공동체의 구성과 조직의 문제’는 그에 의해 ‘효과적인 권력 조직의 획득과 유지의 방안에 관한 문제’로 바뀌게 된다.이 권력 조직을 그는 ‘스타토(stato·국가)’로 정의하였는데 이는 그의 정치학의 핵심 개념이다.
이렇게 해서 권력 조직으로서의 국가의 문제가 마키아벨리에 의해 사상 처음으로 정치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이것은 정치이론에서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릴 만한 큰 사건이다.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이 대결을 통해 전혀 새로운 유형의 정치 조직으로서의 근대적 영토국가가 출현했던 당시에 이 같은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도시국가 피렌체의 관리이던 마키아벨리는 군사 외교 업무를 접하게 된다.이때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군사 대결장으로서 유린되던 이탈리아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 조직을 통해 이들과 같은 영토국가의 조직을 확보하고 또 뛰어난 군사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에게는 공동체 안전을 위한 결정적 수단인 힘, 즉 권력과 능력의 문제는 정치학의 중심 문제였다.그가 ‘비르투(virt`u)’라고 표현한 이 힘이 하나의 그릇에 담겼을 때, 또 하나의 조직체가 되었을 때 국가가 된다고 정의했다.
마키아벨리의 공헌은 당대에 출현하기 시작한 근대적 정치질서의 역사적 의의를 그 누구보다도 빨리 국가라는 개념을 통해 포착한 데 있다.이러한 점에서 그는 근대 정치이론의 비조로 평가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맥 속에서 ‘군주론’을 이해할 때 그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평가될 수 있다.기존의 도덕률에 대한 거부는 충격적이었겠지만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사(修辭)적 필요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박상섭 서울대 교수·외교학과
============================================================(18) 논어-공자 논어-공자
“배우고 그것을 틈틈이 익히면 즐겁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이렇게 시작하는 ‘논어’가 공자의 말씀을 모아 놓은 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공자가 성인이고 논어가 불멸의 고전이라는 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 또한 거의 없었다. 20년 전에는 확실히 그랬다.
지만 요즘도 그런지 필자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어떤 때는 학생들에게 ‘논어’하면 제일 먼저 연상되는 단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고리타분’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거름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질 때 참된 농군이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듯이 논어가 지닌 그 고리타분한 냄새에서 옛 선인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때에야 우리 속에 스며있는 전통의 향기를 논할 자격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겠다.
논어는 2000년 이상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고전 중의 고전이었다.
동아시아의 모든 지식인은, 심지어 불교 승려들까지도, 논어를 반드시 읽어야 했다.
특히 유학자들은 논어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공자 말씀을 재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갔다.
논어는 조선의 유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의 재해석 과정을 통해 그 시대의 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논어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논어는 그 자체로도 읽고 음미해 볼 만한 책이지만 우리의 전통사상과 문화가 논어의 해석이라는 모습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도 논어를 꼭 읽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런 역사적 이유 외에 논어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또 있다.
논어는 소위 ‘수레 축 시대’라고 불리는 2500여 년 전의 책이다.
다른 고전도 마찬가지지만 논어에는 문명이 열리면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논어는 간결한 대화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그 내용도 너무 평범하다 싶을 정도로 쉽다.
그렇지만 찬찬히 읽다 보면 공자의 짧고 함축적인 대답은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로 해답을 주는 게 아니라 읽고 나서 한참 있다가 다시 생각해 보면 ‘아 그런 뜻이었구나’하고 감탄하게 하는 책, 이런 책이 정말 고전이라 할 만한데 논어가 그중의 하나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논어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는 소위 성인 혹은 현인이라고 칭해지는 공자와 제자들이 보여주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들을 가감 없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양념 같은 부분 때문에 공자를 성인으로 모신 후대의 유학자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논어에 실린 공자 말씀들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더불어 성인도 약점이 있음을 알게 되니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다.
논어는 대화록이므로 가까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어도 좋은 책이다.
한문 실력도 늘릴 겸 원문과 대조해서 읽으면 더 좋겠다.
한문으로는 못 읽더라도 주석을 참조하면서 꼼꼼히 읽으면 우리 조상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주희(주자·朱子)의 사상도 아울러 알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될 것이다.
자꾸 읽다가 보면 공자가 나와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니며 이래서 ‘공자 말씀’이라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허남진 서울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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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셰익스피어 4대비극
셰익스피어 4대비극
23일은 셰익스피어가 5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지 389주기가 되는 날이다.셰익스피어는 시대, 문화, 지리적으로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의 어휘와 구절들은 일상생활에서 그리 낯설지 않게 인용된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연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 “세상에 좋거나 나쁜 것은 꼭 없어. 모든 게 생각 나름이야”, “이 세상은 무대요, 우리는 한낱 배우에 불과해” 등등.
셰익스피어의 인물과 작품들은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혀주고 삶의 깊이를 더해 준다.이들은 극작품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감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작가의 문학작품, 음악, 오페라, 그림, 영화 등 모든 예술 영역에서 지금도 살아 움직인다.
셰익스피어에겐 40편에 이르는 작품이 있지만 우선 그의 세계를 이해하는 지름길로 ‘햄릿’, ‘맥베스’, ‘좋으실 대로’, ‘폭풍’ 등 네 작품을 추천한다.그러나 아쉽게도 이 4개의 이야기가 한 권에 담겨 있는 번역서는 없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과 해설이 담긴 ‘셰익스피어 4대 비극’에서 비극의 대표 격인 ‘햄릿’과 ‘맥베스’를 먼저 접해보자.
그러면 셰익스피어에 어떻게 접근해야 좀더 잘 감상할 수 있을까?셰익스피어는 심리학자나 사상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세계는 마음을 열고 즐길 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햄릿’은 복수비극 또는 사색과 우유부단의 비극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그러나 이는 작품을 너무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작품 ‘햄릿’에는 살인과 간통을 범한 클로디어스가 있으며, 왕의 명령을 따르다 애매한 죽음을 맞이하는 햄릿의 친구인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이 있다.
생각에 잠기게 하는 여러 독백이 있는가 하면, 잔인한 복수 행위가 있고, 무덤 파는 광대의 인생철학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복수의 과정에서 온갖 우여곡절과 번민을 거듭한 뒤 햄릿은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신의 섭리가 있음”을 깨닫게 되며 인간의 운명은 한치 앞도 알 수 없으니 우리는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함을 일깨워 준다.
‘맥베스’는 왕을 시해하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주인공 맥베스가 가증스러운 살인마로 타락해 가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참담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결국 이 극은 모든 일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역만을 수행하는 ‘한낱 배우’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여유가 되면 그의 희극 중 대표 격인 ‘좋으실 대로’와 ‘폭풍’도 접해보자.‘좋으실 대로’는 권력욕과 질투 등으로 얼룩진 궁정에서 벗어나 관용과 용서, 자비가 가능한 자연 속으로 젊은이들이 도피해 낭만적 사랑을 이루는 목가적 환경 속에서의 연애희극이다.
반면 ‘폭풍’은 폭풍으로 인해 난파가 발생하자 원수지간인 형제의 아들과 딸이 사랑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하여 서로 모든 과거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로망스이다.
비극이 권력욕과 연관되어 살인과 암투, 복수가 난무하는 어두운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희극은 우리가 동경하는 이상향을 무대로 사랑과 용서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이루고 싶어 하는 꿈을 보여준다.
변창구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과================================================================
(20) 자유론-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존 스튜어트 밀
흔히 현대는 자유와 개성의 시대로 일컬어진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몰개성과 획일성의 풍조 또한 확산되고 있다.
통설과 대세에 동조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현상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한 징후이기도 하다.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갈망하면서 동시에 자유를 부담으로 여기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순적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자.‘자유론’의 목적은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그 한계를 살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정치권력을 제한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고 정치권력의 행사가 제도화된 상황에서는 사회적 다수가 행사하는 권력이 개인의 자유에 더 큰 위협이다.
개인의 자율성과 개성을 살리기 위해선 이제 ‘국가권력’이 아닌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민주사회에서 ‘다수의 횡포’는 공권력을 통해 행사되기도 하며 관습이나 여론의 압력이라는 형태로 개인의 영역에 침투하기도 한다.
다수의 횡포는 어떤 형태의 정치적 탄압보다 훨씬 더 가공할 만한 힘을 발휘한다.
밀은 “이는 다수의 횡포가 개인의 사사로운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마침내 개인의 영혼까지 통제하면서 도저히 빠져 나갈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행복의 조건인 개별성과 자아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상의 자유가 필요하다.그리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다른 의견에 대한 관용이 요구된다. 토론과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진리는 독단에 지나지 않는다.
‘오류 가능성’과 ‘부분적 진리’를 인정할 때 사회 진보가 가능하다.
이 책은 “전체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이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밀은 또 “무엇이 유럽 민족들로 하여금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진보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유럽을 유럽답게 만든 요인, 그것은 바로 성격과 문화의 놀라운 다양성이다”고 말한다.‘자유와 다양성’은 지적 진보의 조건이다.
사회 내 다수의 의견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면 정체 또는 쇠퇴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자유론’은 이러한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한다.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위험은 자유의 과잉이 아니라 순응적 태도의 확산이다.
그러나 자유를 최대한 향유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질서와 안정이 요구된다.밀은 “질서란 진보와 함께 이루어져야 할 추가적인 목표가 아니라 진보 그 자체를 위한 수단이며 그 일부분이다”고 정의했다.
즉, 사상의 자유가 신장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며 그 합의는 건전한 교육과 공론에 의해 유지된다.
밀의 ‘자유론’은 진보적 역사관과 경험적 인간관을 기초로 한다.
그의 전체 저작의 맥락에서 볼 때 ‘자유론’은 원칙적 자유주의의 천명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상황과 조건에 국한된 교훈으로서의 성격을 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론’은 분명 자유주의의 고전이며 자유에 관한 현재의 논의에서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유홍림 서울대 교수·정치학과============================================================
(21) 양철북-귄터 그라스
양철북-귄터 그라스
역사를 소설에 담아낼 수 있을까?그것도 퀴퀴하고 끔찍하고 묵직한 야만적인 역사를?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은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세 살 생일날에 성장하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양철북을 목에 매달고 다니며 두드리는 어린 아이 오스카가 몸으로 체현한 이야기 ‘양철북’은 바로 독일과 폴란드 국경의 자유도시 단치히(폴란드명 그단스크)의 역사이자 제2차 세계대전 전후사의 축소판이다.
본 것을 쓰는 데 가차 없는 어린이의 눈과 출생부터 정신 성장이 완결되어 세상사를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머리를 가진 주인공 오스카는 공식적 역사가 보여줄 수 없는 무대 뒤편의 삶, 탁자 밑의 부정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조그만 양철북을 두드려 세상과 사회에 경종을 울릴 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괴성으로 허울의 문명을 상징하는 유리와 창에 금이 가게 만들고 깨뜨려 부순다.
한 방화범이 밭을 매던 카슈바이 할머니의 네 겹 치마 속에 도망쳐 들어가면서 시작된, 정신병원에 수용된 오스카의 과거 회상은 당대 소시민들의 성(性), 부패, 나약함, 속물근성, 어이없는 끔찍한 죽음, 전쟁의 진행 등을 일상 속에서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다.
전후 독일사회의 주요 화두가 ‘과거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면 그라스의 ‘양철북’은 무기력하고 비굴하며 현실에 안주했던 당시의 소시민 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이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
소시민들은 더 이상 피해자도 아니고 수동적 가담자도 아닌, 자발적인 동참자로, 파시즘의 지지층으로 비판된다.나치의 군악대 연주나, 무대 밑 오스카의 양철북 리듬이나 모두 아무 생각 없이 쫓아가는 군중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철북’의 이야기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역사와 치밀하게 얽히면서―독일어로는 모두 ‘게쉬히테’라 표현되는―이야기와 역사가 서로 의미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서술된다.독일의 패배로 갑작스레 러시아 군인들이 밀려들어올 때 오스카가 내민 나치 당원 배지를 감출 데가 없어 마체라트가 결국 “당을 삼키고” 목을 찔린 채 러시아군이 쏘아댄 총탄을 맞고 죽는 장면은 그라스식 그로테스크와 반어, 풍자를 여실하게 대변하고 있다.
이 소설은 1959년 발표 당시에 극심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과거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전후 최대의 문제작이자 최고 작품이며 독일 소설의 한 절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 20세기 마지막 노벨문학상을 받은 귄터 그라스는 현대 독일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로서 항상 시대의 문제(전후사, 68운동, 시민사회 문제, 통일문제, 여성문제 등)에 정면으로 맞서되 우리에게 익숙한 리얼리즘 기법이 아닌, 작가 특유의 양식(반어, 풍자, 환상, 알레고리 등)으로 밀도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양철북’은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에 의하여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다시 한번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이 영화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오스카상을 수상한 전후 독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다.
최윤영 서울대 교수·독어독문학과=====================================================================
(22) 정지용 전집-정지용
정지용 전집-정지용
한국 현대 시문학사를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정지용(鄭芝溶·1902∼1950)을 들 수 있다.그는 1926년 ‘학조’에 ‘카페 프란스’와 같은 다다이즘 경향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해 1930년대 초반에는 ‘시문학’파에 참여하여 순수 서정시의 세계를 보여주었고 이후 종교시와 산수(山水)시라는 시적 편력을 거쳐 해방 정국에는 좌익 문단에서 활동하였다.
많은 시인들 가운데 하필 정지용의 시집을 추천하는 것은 그가 문학적 완성도를 갖추면서도 시기에 따라 다양한 경향의 작품을 쓰면서 한국시의 변화상과 우리 문단의 고뇌를 집약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용의 초기 시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였지만 이미지를 중시하는 순수 서정시를 보여줌으로써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순수 서정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특히 그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섬세한 언어의 조탁(彫琢)과 감각적인 이미지는 후대문인들, 특히 1940, 50년대에 활동한 문인들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를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근거는 1920년대 후반 ‘조선지광’에 발표한 시에서부터 찾을 수 있으며 이 같은 특성을 잘 보여주는 시로는 그의 대표작인 ‘향수’나 ‘유리창 1’ 등이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베개를 고이시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이 시는 ‘향수’의 첫 부분으로 감각적 이미지를 구사하여 인간의 원초적 마음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고향에 대한 심상(心象)을 제시하고 있다.이를 통하여 지금은 훼손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1930년대 중반엔 일제 파시즘의 가혹한 탄압 앞에서 그는 절대적인 신에 눈을 돌려서, 식민지 지식인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정신적인 허기와 갈증을 신앙을 통하여 메우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정지용의 이와 같은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양의 고전과 산수의 풍경을 그리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즉 ‘바다’의 시편을 거쳐 ‘옥류동’ ‘비로봉’ ‘장수산’ ‘백록담’으로 시선(視線)을 옮기고 있다.
이후 새벽안개처럼 찾아온 광복은 이 땅의 지식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해방 정국을 맞아 정지용은 좌익 문학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이 일제 강점기에 보여주었던 ‘자기 지키기’ 행위였던 우리말로의 글쓰기에 만족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서 시를 쓰기보다는 나라를 만들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언론인으로서의 글쓰기와 학교 선생으로서의 가르치기를 선택하게 된다.
우리 근대 문인들의 글쓰기는 지식인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삶 그 자체였다.그리고 한국 문학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정지용의 시적 편력과 글쓰기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윤여탁 서울대 교수·국어교육과=============================================================
(23) 그리스 로마 신화
그리스 로마 신화
서양문학과 서양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인 것이다.아니 동서양의 구분을 떠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독자를 인간의 이상과 욕망, 동경과 좌절, 사랑과 증오, 환상과 현실이 원색으로 교차하는 매혹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무엇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세월의 흐름에 빛바래지 않는 이야기의 재미가 있다.
아버지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세상을 삼분한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 숱한 모험담의 주인공이 된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 황금 양털을 찾아 떠난 아르고 원정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 바람보다 빠른 발로 구혼자들을 물리친 처녀 아탈란테, 선조 탄탈로스의 죗값으로 대를 이어 신들의 저주를 받은 아가멤논의 가문, 이름 없이 오래 살기보다 영웅으로 요절해 영원히 기억되기를 택한 아킬레우스, 트로이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채 분투하는 헥토르, 아내 페넬로페의 품에 안기기 위해 10년을 헤맨 오디세우스, 함락된 트로이를 등지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로마의 시조가 된 아이네이아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는 이 모든 인간들의 절박한 사연이 불멸하는 신들의 오만한 여유와 맞물려 살아 숨쉰다.그 속에는 어려서 읽고 들은 모든 것과 그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고, 어려서는 의식하지 못한 철학적인 사유와 사회문화적인 의미가 켜켜이 숨어 있다.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그리스 로마 신화도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모습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천년 넘는 세월 동안 구전 시가와 문자화된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야기의 틀이 바뀌고, 모양새가 다듬어지고, 전에 없던 이야기가 보태지고, 이미 있던 이야기에 새 의미와 맥락이 부여되고, 워낙에 무관하던 이야기들 간에 전후 관계와 연관성이 확보되면서 느슨한 계보와 비교적 일관된 세계관을 지닌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군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공부하는 것은 그리스 로마 문학사 전체를 조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아이스킬로스, 핀다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같은 대시인들의 작품을 포함해 그리스 문명 태동기에서 로마 제국 쇠망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를 아우르며 서양 고전을 두루 섭렵해야 비로소 그리스 로마 신화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신화의 요람이 된 그리스 로마 사회의 문화적 지평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 시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 읽을 여유를 갖기 힘든 대다수 독자들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는 한 권의 책으로 존재하고, 읽히고, 이해될 수밖에 없다.
요즘 우리 주위에는 유행이다 싶을 정도로 신화에 관한 책들이 넘쳐난다.하지만 원전에 충실하고 읽기 편하면서도 이야기의 재미가 살아있는 책을 두 권만 추천하라면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에디스 해밀턴의 ‘신화’와 토머스 불핀치의 ‘설화의 시대’를 꼽고 싶다.
두 책 다 ‘그리스 로마 신화’란 제목으로 우리말로 옮겨졌다. 최근 인기를 누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또한 신화의 바다를 향해 처음 닻을 올린 모험가들에게 색다른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현진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과=====================================================================
(24) 실천이성비판-이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이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1788년)은 ‘순수이성비판’(1781년), ‘판단력비판’(1790년)과 더불어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이른바 3대 비판서 가운데 하나다.
칸트는 ‘이성의 전 관심’을 좇아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를 물었는데, 이 가운데서 둘째 물음과 셋째 물음 일부에 대한 칸트의 답변을 우리는 그의 제2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여기서 칸트는 우리에게 이상(理想)에 비추어 보면 미천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그럼에도 ‘왜 존엄한가’, ‘어떻게 하면 그 존엄성을 지켜갈 수 있는가’를 일러 준다.
칸트는 진정으로 인간 자신은 물론이며 인간이 그 안에서 삶을 영유하고 있는 자연법칙의 경이로움과 도덕 법칙의 숭고함을 깨우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의 것이 있다.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이다.”
이 절제된 구절은 후세 사람들이 그의 묘비명으로 삼기도 했다.
이 구절을 맺음말의 첫 대목으로 하고 있는 ‘실천이성비판’은 “경험적으로 조건지어진 이성이 자기만이 전적으로 의지의 규정 근거를 제공하려고 하는 월권”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이 비판을 통해 밝혀지는 것은 순수한 도덕적 이념을 가진 이성은―그리고 그러한 이성만이―무조건적으로 실천적일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순수한 이성은 그 자신만으로 의지를 규정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곧, 이에 따라 형이상학으로서 윤리학이 정초된다.
이 ‘실천이성비판’은 3부작으로 볼 수 있는 칸트의 도덕 철학 3대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 책은 출판 순서에서나 내용 면에서 그 중간적 위치를 차지한다.
‘윤리형이상학 정초’(1785년)가 칸트 도덕 철학의 포괄적 서설이라면 ‘실천이성비판’은 그 체계의 골간이고 ‘윤리형이상학’(1797년)은 이에서 구축된 원리로부터 실천 세칙을 연역해 놓은 이를테면 응용 윤리학이다.
이성적 존재자의 자율의 표상인 ‘도덕 법칙’이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제공한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목적 그 자체’라는 뜻이다.
인간은 이런저런 용도에 따라 그 가치가 인정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물건’ 즉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는 ‘인격’ 즉 ‘목적’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
이 같은 이념의 체계인 윤리학은 선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자가 행복도 누리는 상태, 곧 최고선을 이상으로 말하지만 그러나 결코 행복론은 아니고 이를테면 희망의 철학이다.
‘실천이성비판’은 인간에게 존엄성과 더불어 희망을 주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 문화 고전 중의 고전이다.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25) 부분과 전체-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올해는 ‘물리의 해’로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 등 주요 물리 업적을 발표한 지 10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고 있다.20세기 초반 물리학에서는 또 다른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는데 아주 작은 원자의 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의 태동은 그 과정 자체가 극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 무대의 중심에 섰던 하이젠베르크가 새로운 과학의 발전에 참여한 자신의 경험을 대화와 토론의 형식으로 풀어 쓴 자전적 글이 ‘부분과 전체’이다.
이 책은 하이젠베르크가 열아홉 살 때 친구들과 도보여행에서 나누었던 대화에서 시작하여 그의 과학사상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많은 인물들과의 교류를 20편에 걸친 대화로 구성하고 있다.창조적인 과학개념의 형성 과정에 따르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고민과 사색들을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보어와 아인슈타인 등 동시대를 살았던 과학자들의 진지하면서도 때로는 치열한 토론들은 현대물리학 형성의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진정한 과학탐구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자칫 어렵게만 느껴질 수 있는 과학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는가를 이 책은 보여 준다.하이젠베르크가 그리고 있는 것은 복잡한 이론이나 공식과 씨름하는 물리학자가 아닌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뇌하는 인간 그 자체이다.
숲 속으로의 도보여행이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의 일화들은 각박하고 여유 없는 도시적 환경에서 의미 없는 만남만을 이어가는 우리들에게는 한없이 부럽기만 한 광경이기도 하다.
‘부분과 전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세세한 부분까지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전체가 가지는 총체적인 연관성과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신념은 그의 학문과 삶의 전반에 대한 태도에 잘 나타나 있다.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가 단순한 과학이론에 그치지 않고 기계론적인 자연관을 대체할 새로운 인식의 출발을 가져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젊어서 청년운동에 참가하는 등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부터도 자신을 멀리하지 않았으며 전쟁의 소용돌이와 그 부산물인 핵개발과 관련하여 ‘연구자의 책임’에 대해 우려하고 고뇌하게 된다.미국으로 옮겨간 이탈리아 과학자인 페르미와의 토론에서 망명을 권유하는 페르미를 뿌리치고 독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번민하는 과학자를 발견하게 된다.
양자역학의 수학적 법칙을 발견했을 때 “모든 원자현상의 표면 밑에 깊숙이 간직되어 있는 내적인 미의 근거를 바라보는 그러한 느낌이었다.나는 이제 자연이 내 눈앞에 펼쳐 보여준 수학적 구조의 풍요함을 추적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이르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고 외치던 그의 환호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요즘처럼 모든 분야에서 세분화와 전문화가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학자가 철학 역사 종교 언어 윤리 등을 논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불가능한 사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하지만 핵개발과 폐기물, 환경문제, 그리고 생명윤리 논란 등 과학기술의 사회적 의미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비치는 이때 하이젠베르크의 메시지는 참된 지성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석민 서울대 교수·화학부
(26) 파우스트-괴테 파우스트-괴테
‘파우스트’는 독일의 문호 괴테가 평생에 걸쳐 집필한 대작으로 전설의 인물 파우스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원래 전설상의 파우스트는 중세 말의 마법사다.
그는 자연과 세계의 비밀을 알고 싶어 악마와 계약을 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파멸하고 단죄를 받는다.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세계의 운행이치를 인간 이성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는 신성에 대한 도전이다.
그렇게 보면 전설의 파우스트는 근대의 여명기에 기독교의 권위와 금기에 맞서 인간중심주의를 추구한 인간형의 표본인 셈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서구 근대세계를 탄생시키고 지탱해 온 그러한 인간중심주의와 맹목적 발전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담고 있다.
사적 영역에서 전개되는 1부에서는 근대적 자아의 탄생, 인간의 본성과 욕망이 중심주제를 이룬다.
공적 영역에서 펼쳐지는 2부에서는 근대화 과정의 역동성과 내적 모순이 전면에 부각된다.
기독교 신앙의 마법에서 깨어난 현대의 문턱에서 파우스트는 스스로의 주인이 되기 위해 끝없이 갈망하며, 자신의 뜻대로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현대세계의 기획자로 등장한다.
그는 또한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여 삶을 남김없이 맛보려는 무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만 준다면 영혼도 바치겠다는 파우스트의 내기는 욕망의 충족에 모든 것을 거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신의 섭리를 대체하는 파우스트의 절대정신은 끝없는 자아 확장을 꿈꾸면서 시공간을 가로질러 쉴새없이 방황한다.
파우스트의 이러한 모험을 러시아의 문호 푸슈킨은 ‘현대세계의 일리아드’에 비유한 바 있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행동과 실천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결과를 낳는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요 푸르른 것은 삶의 황금나무’라는 충동에 이끌려 파우스트는 새로운 삶의 체험을 추구한다.
그러나 충족을 모르는 파우스트의 욕망은 결국 그레트헨 일가족을 죽음의 파멸로 몰아넣는다.
파우스트의 자아 확장 욕구는 극단적인 자아 분열과 황폐화로 귀결되고 ‘푸르른 삶’의 원천인 여성성과 모성의 파괴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욕구와 신념에 충실할수록 파괴적 혼란을 초래하는 비극적 양상은 2부에서 역사의 세계로 확장되어 더욱 극적으로 전개된다.
정치가로 변신한 파우스트는 이상적 공동체의 터전을 개척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간척사업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그 과정에서 무자비한 인명 살상과 착취를 일삼는다.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도구적 합리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과업을 완수하는 순간 파우스트는 눈이 멀지만, 그럼에도 지상낙원이 눈앞에 펼쳐졌다는 환각에 빠진 파우스트를 가리켜 메피스토펠레스는 완공된 간척지가 다름 아닌 파우스트의 무덤이라고 비꼰다.
파우스트 프로젝트의 이 비극적 아이러니는 국민 동원 체제 위에 구축된 근현대 국가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나아가서 인류문명이 자기성찰을 결여할 때는 파국적 재앙을 잉태하는 눈먼 질주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19세기의 ‘파우스트’는 문학사의 정전(正典)으로 모셔 둘 책이 아니라 21세기 독자들이 읽어야 할 ‘인류사의 드라마’인 것이다.
임홍배 서울대 교수·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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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실천이성비판-이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이마누엘 칸트
선행은 이타(利他)나 대의(大義) 혹은 공존공영을 ‘위해서’ 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어떤 행위를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하는 행위이다.
윤리 도덕은 우리 모두에게 혹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이로움이나 유용함은 한갓 감성적인 욕구 충족에 대응하는 것이다.
감성적 욕구 충족에 상응하는 명령은, 모든 경험으로부터의 교훈이 그러하듯이, 능란한 처세의 요령은 될지 모르나 보편적 도덕 법칙이 되지는 못한다.
도덕은 처세의 기술이 아니라 인격의 표현이다. 선은 감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좋은 것이다.
이 ‘선’의 관념으로부터 비로소 ‘좋음’ ‘가치’ 등의 개념이 유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 법칙은 정언적, 즉 단정적 명령으로 이성적 존재자에게 다가온다. 가언적인 즉, 어떤 전제 하에서 말해지는 명령은 필연성이 없다.명령을 받은 자가 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명령은 명령으로서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웃에 도움을 청하게 될 때를 생각해서 항상 이웃에 친절하라” 따위의 가언적 처세훈들은 도덕적 선의 표현이 될 수 없다.
선은 인격적 주체의 가치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목적이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또한 사람으로서 사람은 인격적 주체이고, 주체란 문자 그대로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될 수 없는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인격적 행위만이 도덕적 즉 당위적이므로 그것은 인간이 도달해야만 할 이성의 필연적 요구이다.
어떤 사람이 행위를 할 때 ‘마음 내키는 바대로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를 우리는 성인(聖人)이라 부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천적인 행위의지가 (정언적인) 도덕법칙과 완전하게 일치함은 신성성(神聖性)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이다.
감성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이런 신성성에 ‘현실적으로’ 도달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 ‘완전한 일치를 향한 무한한 전진’ 가운데에서 우리는 인격성을 본다.
이 같은 가르침을 담은 ‘실천이성비판’(1788)은 ‘순수이성비판’(1781), ‘판단력비판’(1790)과 더불어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이른바 3대 비판서 가운데 하나다.
이 ‘실천이성비판’은 또한 3부작으로 볼 수 있는 칸트의 도덕철학 3대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 책은 출판 순서에서나 내용 면에서 그 중간적 위치를 차지한다.
‘윤리형이상학 정초’(1785)가 칸트 도덕철학의 포괄적 서설이라면 ‘실천이성비판’은 그 체계의 골간이고 ‘윤리형이상학’(1797)은 이에서 구축된 원리로부터 실천 세칙을 연역해 놓은, 이를테면 응용 윤리학이다.
이를 한 벌로 읽고 공부한다면 고전의 ‘참맛’을 느낌과 더불어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깨치게 될 것이다.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28) 주홍글자-너대니얼 호손 주홍글자-너대니얼 호손
너대니얼 호손(1804∼1864)의 ‘주홍글자’(1850)는 미국 소설문학의 전통을 확립하고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걸작으로 평가되어 왔다.그래서 헨리 제임스와 같은 후세의 소설가는 ‘주홍글자’의 출판을 미국 문학사의 으뜸가는 이정표적 사건으로 간주한 바 있다.
‘주홍글자’가 살아 있는 고전으로서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읽혀 온 것은 미국적 이념과 그것에 입각한 바람직한 삶의 길을 탐구한 지극히 ‘미국적’인 소설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 관심사인 삶의 진실과 그 인식 문제를 깊이 성찰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주홍글자’는 1640년대의 보스턴 청교도 사회를 무대로 하고 있는 역사소설이다.호손은 시원(始原)기의 미국 사회, 곧 종교적 계율이 법으로 통했던 청교도 사회에서 열정에 이끌려 계율을 범한 한 청교도 목사와 그의 사생아를 낳은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의 이야기를 독특한 로맨스 양식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처럼 태동기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역사의 무게 때문에 ‘주홍글자’를 읽으면서 독자는 미국의 기원과 그 이념을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다.
호손의 시대에 청교도주의는 특히 예표(豫表·예언 따위를 미리 보여 주는 조짐)론적 시각에서 독립혁명 정신의 이념적 씨앗으로 상찬되었다.
그러나 호손은 이렇게 미국정신의 원류로 간주된 청교도주의가 실상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억압한 이데올로기임을 드러냄으로써 이념의 맹목적 추수와 그 위험성을 경고한다.이념의 도그마화에 대한 비판이 여주인공 헤스터를 단죄하는 청교도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도 행해진다는 점이 이 소설의 묘미 중의 하나이다.
헤스터가 죄의 표지인 ‘A’자를 가슴에 달고 청교도 사회가 요구하는 참회의 삶을 사는 듯이 보이면서 내면적으로는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수용하여 과격한 여권론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낼 때 작가는 공감 어린 시선을 거두어들인다.
‘주홍글자’는 이처럼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근대적 주제의 천착을 통해 미국 사회의 지배이념과 역사인식의 문제를 제기하는 소설이다.
이와 더불어 인간의 삶의 현실은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단선적 시각으로는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성찰 또한 포스트모던한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현대적 호소력 때문에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면서도 그 범주를 벗어나 있다.헤스터와 더불어 내적 열정에 이끌려 잠시 청교도 질서 밖으로 일탈했던 딤스데일의 극심한 죄의식과 내적 고뇌에 대한 치밀한 심리 묘사는 동시대의 소설가 허먼 멜빌의 찬탄을 자아낸 바 있지만, 인간의 내면 심리를 파헤치고자 한 헨리 제임스를 비롯한 후세의 모더니스트들에게 무엇보다도 훌륭한 참고가 되었다 할 것이다.
이 소설은 흔히 ‘주홍글씨’로 번역되었고 동명의 영화도 만들어졌지만, 우리말 어법상 ‘주홍글자’로 번역해야 옳다.우리말 번역본 중에서는 양병탁 선생이 번역한 ‘주홍글자’(동화출판공사, 1973)와 김종운 선생이 번역한 ‘주홍글자’(삼중당, 1975)가 추천할 만하다.
신문수 서울대 교수·영어교육과============================================================
(29) 카인의 후예-황순원
카인의 후예-황순원
모두 9장으로 짜여 있는 장편소설 ‘카인의 후예’는 원래 ‘문예’라는 잡지에 1953년 9월호부터 1954년 3월호까지 5회 연재되다 중단되었던 것이다.황순원은 ‘문예’ 연재본을 두 배 가까이 늘려 작품을 완성시켜 1954년 말 중앙문화사에서 단행본으로 펴냈다.
‘카인의 후예’는 1946년 3월 북한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을 배경적, 원인적 사건으로 설정하고 있다.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인 토지개혁이 작게는 비석골 양지터의 한 젊은 지주의 집안에, 크게는 마을 전체에 가져다 준 엄청난 변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젊은 지주와 늙은 마름 사이의 생사를 건 갈등과 대립이 변화의 중심에 있다.
1953년에 1946년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카인의 후예’는 기본적으로 당대소설이 되겠다.
하지만 그 중간에 6·25전쟁이 가로놓여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역사소설적인 발상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연재본과 최근 나온 전집본(황순원전집·문학과지성사판)을 비교해 보면 작게는 문장부호에서 크게는 단락에 이르기까지 수정 작업을 해 구체성, 정확성, 개연성, 과감성 등을 좀 더 분명하게 한 것으로 드러난다.연재본을 계속 고치고 빼고 덧붙임으로써 인물의 감정과 심리가 좀 더 명료한 색깔을 입을 수 있었고, 플롯이 좀 더 튼튼한 인과성 위에 얹힐 수 있게 되었으며, 또 표현상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전집본은 연재본보다 안타고니스트(적대적 인물)인 도섭 영감의 부정적인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부각시키고 있으며 박훈을 향한 오작녀의 사랑과 보호본능을 더욱 적극적으로 그려냈다.
20여 년 동안 마름으로 살며 지주에게 충성을 다한 것이 당에 의해 과오로 포착되면서 도섭 영감은 살기 위해 지주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당을 위해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약속하게 된다.도섭 영감을 무자비한 행동대원으로 내몰아 버린 힘은 지주에 대한 불만보다는 공산당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에서 찾아야 한다.
토지개혁이라는 극한상황에 직면하면서 젊은 지주 박훈과 늙은 마름 도섭 영감이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로 치닫는 과정과 박훈이 여성성을 모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오작녀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과정이 중첩되면서 이 작품은 단순한 시대소설이나 역사소설로부터 빠져 나오게 된다.
전자의 과정이 어둠, 죽음, 지상 등의 이미지를 매개하고 있다면 후자의 과정은 밝음, 생명, 천상 등을 매개하고 있다.
작품 내내 견인주의(堅忍主義·욕정이나 욕망 따위를 의지의 힘으로 굳게 참고 견디어 억제하려는 도덕적 종교적 태도), 소극성, 나약함 등으로 묘사되던 박훈이 소설의 결말 부분에 가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섭을 칼로 찌르는 용기를 내보인 것은 반전의 묘를 살려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도섭 영감에게 당의 숙청과 젊은 지주 박훈의 복수극은 거의 동시에 펼쳐진다. “내가 대신해서 도섭 영감의 일을 처리한다. 어서 이곳을 떠나라.
이 이상 더 피를 보고 싶지 않다”는 박훈이 혁이에게 보낸 쪽지의 내용으로 끝나고 있는 이 소설은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카인의 후예의 정본은 연재본을 적극적으로 개작한 끝에 완성도를 높인 전집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조남현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30) 감시와 처벌-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미셸 푸코
‘감옥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붙은 푸코의 ‘감시와 처벌’(1975)은 좁은 의미에서는 형벌의 이론과 제도에 대한 저자의 역사적 성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이 책은 근대적 감옥의 출현과 함께 도입된 규율, 훈련, 교정, 관찰 등의 방법이 감옥 밖의 사회에서 어떻게 권력의 기술로 작용해 왔는지를 치밀하게 규명한 책이다.
푸코는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는 다르게 ‘근대세계와 인간 착취의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였다.이전에 그의 작업은 광기에 대한 이성 중심 사회의 탄압(‘광기의 역사’), 에피스테메 혹은 인식구조의 시대적 변화(‘말과 사물’), 병원과 의학의 사회사(‘진료소의 탄생’) 등을 주제로 한 것이었는데 ‘감시와 처벌’에 이르러서는 권력의 정체와 구조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푸코는 권력을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일방적인 관계로 보지 않았고, 권력자가 독점할 수 있는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도 않았다.그는 권력을 한 사회 안에서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작동하는 인간 지배의 기술과 전략으로 인식했으며, 권력의 전략적 목표를 인간의 신체로 파악했다.
가령 왕권시대의 권력이 신체에 대한 잔인한 폭력이나 고문과 같은 공포의 행위로 권력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었다면, 근대의 권력은 감옥의 제도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감추면서 신체를 부드럽게 통제하고 지배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이러한 처벌 방식의 변화는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 말에 개혁자들이 죄수에게 가혹한 형벌을 부과하는 것보다 감금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죄수를 처벌하고 교화시키는 방법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푸코는 처벌의 이러한 개선이 ‘죄수에 대한 인간적 처우를 개선해야겠다’는 인식의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기술이 근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권력의 ‘부드러운’ 지배의 방법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산출하는 경제적 통제 방법이기도 하다.대혁명 직후인 18세기 말에 감금이라는 형벌제도가 도입되면서 근대적 감옥이 탄생한 것은 그런 논리에서 해석된다.
근대적 감옥의 대표적 형태는 판옵티콘(일망 감시장치로 만들어진 원형감옥)인데, 이것은 중앙의 감시자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모든 죄수를 감시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감옥 안에서 이러한 감시자와 죄수들 사이의 관계는 감옥 밖의 사회에서 권력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가령 학교에서 학생들의 동작과 활동이 온갖 시험의 장치 속에서 세밀히 규제되고 기록되는 과정을 통해 학생은 규율에 길들여지고 순응한다.
군대나 공장의 엄격한 규율과 통제의 장치 속에서 군인과 노동자들이 예속화되는 현상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규율을 내면화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러므로 오늘날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표면적으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우리의 신체가 규율과 훈련에 길들여져 있을 뿐 아니라 미세한 정보의 그물 속에서 일상의 모든 것이 낱낱이 기록되는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저항의 가능성이 과연 어디까지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생근 서울대 교수·불어불문과====================================================================
(31) 안나 카레니나-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레프 톨스토이
러시아 문학사의 큰 봉우리이고 우리에게는 아주 친숙한 작가이자 사상가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러시아문학사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긴 거장이다.생전에 이미 성자(聖者)로서 추앙받았던 그는 한국 근대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친 바 있다.
흔히 ‘전쟁과 평화’와 함께 소설가 톨스토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안나 카레니나’(1877년)는 구성과 세부 묘사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거둔 작품으로 평가된다.그런 만큼 널리 읽히는 작품이고 러시아와 구미(歐美)에서 이미 여러 차례 영화화됐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의 러시아를 다룬 ‘전쟁과 평화’가 전쟁과 평화, 가족사와 역사의 문제를 이전 세대의 모습을 통해서 통일적으로 보여주는 과거로의 회귀 소설이라면, ‘안나 카레니나’는 1870년대의 러시아, 즉 톨스토이가 자신의 시대로 돌아온 이른바 동시대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농노 해방(1861년) 이후 빚어진 새로운 사회상황, 즉 결혼과 가족의 문제를 포함한 당대의 여러 사회적 문제와 풍속을 무려 150여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기본적인 구성은 안나와 브론스키, 그리고 레빈과 키치라는 두 쌍의 남녀 이야기로 돼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주인공 안나는 상류사회의 매우 정숙한 귀부인으로 등장하지만, 청년장교 브론스키를 만나면서 불륜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당시 상류사회의 전반적인 관행과는 달리 자신의 불륜을 숨기지 못하며, 그녀 내면의 본능적 삶의 열정에 대한 요구와 그녀가 속해 있는 사회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올바른 것은 아니더라도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브론스키와의 사랑에 더욱 매달리면서 소위 ‘사회적 자아’를 포기한다.그러나 그녀는 브론스키마저 자신을 떠나기를 원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길을 선택한다.
반면에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레빈은 안나와는 정반대의 과정을 겪는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그는 지인들로부터 소위 ‘국외자’로 인정되는 처지에 있지만, 점차 소설이 진행되면서 가족과 사회의 관계망 속으로 들어간다.
안나와 마찬가지로 레빈 역시 자신의 개인적 이상과 완고한 사회적 현실 사이의 장벽을 느끼게 된다.그러나 그는 안나와 달리 중도적인 길을 선택하면서 파국을 피해간다.
그 길이란 삶의 의미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 것이었고, 그로써 그는 안나와는 달리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두 주인공이 폐쇄되고 경직된 사회적 현실 속에서 개인의 개성과 삶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해 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이 작품은 그 완결적인 형식미에도 불구하고 ‘열려 있는’ 작품으로 남는다.
사실 그러한 ‘열려 있음’은 모든 고전의 자격조건인데, 이 작품 이후에 정작 톨스토이 자신이 그러한 ‘열려 있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문학을 포기하게 되는 사실은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박종소 서울대 교수·노어노문학과=================================================================
(32) 픽션들-호르헤 L 보르헤스
픽션들-호르헤 L 보르헤스
세르반테스 이후 스페인어권 최고의 문제작가로 일컬어지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단 한 편의 장편소설도 쓰지 않았다.대신 ‘픽션’으로 명명한 단편에서 작가로서 희구하는 모든 것을 치밀하게 요약해 냈다.
‘픽션들’(1944)은 보르헤스 문학의 본령으로 간주되는 두 번째 단편집으로 그의 주된 관심사인 자아와 시간의 문제를 천착한 열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문고판으로 200쪽밖에 안 되는 적은 분량이지만 그의 철학적 문학적 사유가 온축된 이 작품집은 예기치 못한 폭발력으로 들뢰즈, 푸코, 데리다 등의 후기구조주의 사상가들과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롯한 20세기 후반의 서구 지성계를 흔들었다.
이 책이 불러일으킨 지적 충격은 이성주의의 한계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소설을 무한한 사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새로운 소설 문법의 창안에서 비롯됐다.
보르헤스는 새로운 세계 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도발적 사유를 통해 탈근대 담론의 지적 경향을 선취했다.많은 사람들은 그를 21세기 인문학 패러다임의 출발점에 위치시킨다.
철학과 문학의 경계적 글쓰기를 보여 주는 그의 픽션은 흔히 경험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관념적인 허구의 세계를 다룬 ‘지적인 가설’로 여겨진다.실제로 ‘픽션들’에 실린 많은 단편은 가상의 텍스트에 대한 주석으로서의 글쓰기라는 메타픽션적 성격을 지닌다.
‘픽션들’은 지배적 가치체계의 전복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재정의하고 글쓰기와 언어 자체에 대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환상문학의 형이상학적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초월과 무의미의 순수한 유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질서로 파악해 온 상투화된 현실 개념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자기반성을 통해 경험 세계 너머로 인식의 지평을 넓힘으로써 더욱 심오하게 현실에 관여한다.
그러나 복잡한 추상과 심오한 형이상학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에게 관념 자체는 심미적 상상적 가능성만큼 중요하지 않다.왜냐하면 형이상학 역시 ‘환상문학의 한 분파’이며 그것이 내세우는 객관진리라는 것도 실상 상상력의 산물로서 ‘우주에 대한 그럴싸한 묘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픽션들’에서 보르헤스는 이념적 테제가 아니라 철학의 존재 의미 자체를 회의케 하는 급진적인 유희성을 통해 글을 쓰고 있다.
따라서 미로, 도서관, 복권, 도플갱어, 꿈, 거울 같은 상징들은 우주의 본질적 무질서와 그에 대한 작가의 회의주의를 드러내는 존재론적 유희의 도구들로 아르헨티나 작가를 동반한 강박관념을 엿보게 한다.
‘픽션들’은 독자들에게 경이로운 문학 체험을 선사한다.그러나 다양한 영역을 경쾌하게 넘나드는 보르헤스 특유의 현학성과 단 몇 줄의 글귀에 우주를 탁월하게 담아 내는 엄밀한 내적 논리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픽션들’은 독자의 기대지평을 무너뜨리는 기발한 상상력의 유희와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웅숭깊은 철학적 사유 그리고 텍스트에 구현된 복잡한 미로 구조를 음미하며 한 구절 한 구절 천천히 읽어야 한다.
김현균 서울대 교수·서어서문학과
================================================================(33) 리바이어던-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토머스 홉스
‘시장의 계약’에 익숙한 우리에게 정치권력을 계약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생뚱맞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토머스 홉스(1588∼1679) 덕분이다.
사회계약론의 기원을 이루는 ‘리바이어던’은 1651년에 출간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계약론적 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리바이어던’의 특징은 통치자와 백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계약의 개념을 포기하고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계약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리바이어던’에는 절대 권력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배어난다.하지만 그 안에 풍부한 민주적 함의를 ‘가능태’로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력을 계약의 범주로 파악하는 한, 또 신민들의 안녕이라는 목표에 부합하지 못할 경우 그 정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핵심은 평화론에 있다.그는 인간이 공동의 주권자를 구축하지 못한 상태를 ‘자연 상태’라고 불렀다.
이 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로서 ‘그 안에서의 삶은 고독하고 가련하며 야만스러우며 단명하다.’
이 자연 상태에 ‘리얼리즘’이 있는가.홉스의 자연 상태에서 묻어나는 불안정성을 현대의 우리도 가끔씩 절감하고 있음을 실토하게 된다.
어두운 밤거리에 홀로 남았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른 사람의 발소리를 두려워하는 실존적 체험이나 혹은 밤에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잔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가 되는’ 자연 상태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법으로 자신들을 통치할 권력체인 ‘리바이어던’을 만들어 전쟁의 문제를 해결한다.이처럼 생명의 보존과 평화의 구축에 유달리 집착하는 홉스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을까. 혹시 ‘평화’보다 ‘정의’가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정의’를 목표로 하는 정치적 이상은 홉스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된다. 정의를 둘러싼 쟁점은 파국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홉스는 영국의 내전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진단한다.
오늘날 홉스의 평화론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우리사회는 삶의 의미를 매우 다르게 이해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는 다원주의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바람직한 사회는 어떤 것인가’하는 문제에 자신 있게 답변할 사람은 없다.또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그들의 기본적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설득할 수 있는 지적 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처럼 삶의 방식이 달라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경우, 어느 하나를 헐뜯기보다 평화가 유지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만일 이 의견에 동의한다면 ‘정의의 실현’보다 ‘평화의 유지’가 정치적 이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전쟁과 내전의 여파 속에서 펜을 든 홉스는 ‘격렬한 분쟁 없이 평화가 달성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홉스가 21세기의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는 메시지는 분명하다.‘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비전은 사람마다 달라도, 상호이해를 통해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관용을 실천함으로써 평화를 구축하라는 점일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국민윤리교육과--------------------------------------------------------------------
(34) 다산시선-정약용
다산시선-정약용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당시 유교사상의 공허한 관념과 현실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추구했던 조선 후기 실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저술은 50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으로, 그 내용은 유교 경전을 해석한 ‘경학’과 국가 경영의 방법을 제시한 ‘경세학’을 두 축으로 문학 역사 지리 의례 음악 풍속 의학 등 다양한 영역을 포함한다.
1930년대에 신조선사에서 한문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간행된 이후 그동안 많은 번역서와 선집 및 연구서가 나왔다.
먼저 번역서로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그의 시와 문집을 번역한 ‘국역 다산시문집’(9권)이 있고, 경학 저술로는 전주대학 호남학연구소에서 ‘대학’ ‘중용’ ‘논어’에 관한 주석이 번역되었다.이지형의 ‘맹자’ ‘서경’에 관한 주석 번역도 믿을 만하다.
경세학의 저술로는 다산연구회의 ‘목민심서’ 번역이 가장 충실하고, 민족문화추진회의 ‘경세유표’ 번역과 박석무 정해렴의 ‘흠흠신서’ 번역이 있다.
정약용의 저술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좀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의 저술에서 가려 뽑아 번역한 선집을 읽는 게 도움이 된다.
그의 시를 선집한 것으로 송재소의 ‘다산시선’이 있다.또 편지나 산문과 논설을 선집한 것으로 박석무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산문선’ ‘다산 논설선집’, 이익성의 ‘다산논총’이 있다.
그러나 정약용의 학문세계를 균형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적 체계에 맞는 ‘다산문선’의 새로운 편찬이 필요하다.
송재소의 ‘다산시선’은 정약용의 문학적 세계만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 고뇌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고, 그의 실학 정신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좋은 선집으로 꼽을 수 있다.정약용의 시에서는 서정적 감흥이나 자연적 정취도 다양하고 풍부하게 제시된다.
그러나 그의 실학 정신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대목은 당시 우리 서민 생활의 풍속과 노동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른바 ‘조선시(朝鮮詩)’의 세계와, 당시 빈곤한 백성의 참혹한 생활 모습과 착취 속에 고통받는 비참한 현실을 처절하게 고발하는 ‘사회시(社會詩)’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다산시선’은 정약용의 많은 시 가운데서 그의 인간과 사회의식과 시대정신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시를 잘 골라서 주석과 해설을 붙여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정약용 자신이 선언한 ‘조선시’는 농촌과 어촌의 서민 생활을 묘사하면서 특히 토속언어를 그대로 살려 우리의 정서와 현장을 생동감 있게 전달해 준다.
이러한 ‘조선시’는 바로 그가 우리의 역사 지리 언어 풍속에 관해 폭넓은 관심으로 조사하고 발굴함으로써 국학(國學)을 일으키고 이를 통해 민족의식을 각성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갔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그의 ‘사회시’는 고통받는 백성의 현실을 고발하면서 백성에게는 인간다운 삶의 권리가 있고, 관리에게는 백성의 삶을 지켜 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절실하게 확인시켜 준다.
그것은 ‘목민심서’를 비롯한 그의 경세학 저술에서 백성에 대한 사랑과 공직에 대한 봉사의무를 강조하고, 합리적이며 평등한 사회적 이상을 추구하는 사회 개혁의 이론과 통하는 사회사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금장태 서울대 교수·종교학과
========================================================(35) 마의 산-토마스 만
마의 산-토마스 만
중세 유럽의 연금술사는 황금을 얻고자 증류기 비슷한 밀폐 공간에다 각종 금속을 섞어 넣은 다음 높은 온도의 열을 가하는 실험을 시도했다.이런 ‘연금술적’ 발상이 뜻밖에도 20세기 독일 소설문학에서 언뜻 엿보이는데 토마스 만의 대표작 ‘마의 산’(1924)이 그러하다.
‘마의 산’이라니, 대체 무슨 산인가? 스위스 고산지대의 소읍 다보스에 있는 고급 호텔식 폐결핵요양소 ‘베르크호프’이다.
이제 막 조선기사 시험에 합격하여 곧 함부르크의 조선소에 취직할 23세의 청년 한스 카스토로프가 여기에 도착한다.환자로 입원하러 가는 길이 아니라 이미 입원해 있는 사촌형을 문병하기 위해 3주 예정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입원해 있던 이탈리아 출신의 인문주의자 세템브리니는 카스토르프에게 ‘죽음’의 세계에 흘러 들어와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당장 ‘저 아래’의 시민 세계로 복귀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러시아 여인 쇼샤 부인에게 마음이 끌린 청년은 우물쭈물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그만 병에 걸리고 만다.
함부르크의 시민이 ‘죽음’의 공간(마의 산)의 구성원이 된 것이며 토마스 만의 ‘죽음’의 연금술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에 다섯 끼씩 중후한 식사를 하면서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취생몽사 상태에 빠져 7년 세월을 허송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하산하여 곧 참전한다.포탄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보리수’ 노래를 부르며 진흙탕 속을 행군하는 주인공의 장래 전망은 매우 어두울 수밖에 없다.
1차 대전 이전의 답답한 분위기를 감안하면 시대소설이지만 베르크호프라는 ‘폐쇄 공간’이 ‘죽음’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시간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축약판이라 할 수 있는 ‘눈(雪)의 장’에서 스키를 타고 설원을 헤매다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진 주인공은 몽환 상태에서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서 자기 사고(思考)의 지배권을 죽음에다 내맡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깥 세계와 차단된 ‘죽음’의 공간에서 역설적이게도 ‘삶’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은 독일 교양소설의 변종의 하나인 ‘성년식(成年式) 소설’로도 읽힌다.그가 7년 동안의 취생몽사 끝에 마침내 얻게 된 깨달음이 전사 직전에 처한 그의 상황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그의 ‘마의 산에서의 체험’을 추체험(追體驗)해 가면서 정신적 고양(高揚)을 얻게 된다.
토마스 만이 자신의 독자에게 이 책을 두 번 읽기를 권한 까닭도 이 간접 체험의 보편적 진실성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을 찬찬히 읽는 독자는 서구 정신사를, 그 감성적 구체성 속에서, 축약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주인공은 그의 두 스승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격렬한 논쟁을 거의 중립적인 태도로 경청하지만 독자는 그들의 온갖 논거를 두루 거침으로써 자신이 한 단계 더 높은 교양인으로 거듭난 것을 깨닫게 된다.그리하여 마침내 20세기의 ‘연금술사’ 토마스 만을 만난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안삼환 서울대 교수·독어독문학과================================================================
(36) 페더랄리스트 페이퍼-알렉산더 해밀턴 外
페더랄리스트 페이퍼-알렉산더 해밀턴 外
1776년 탄생한 미국은 로마 공화정 이후 인류사에 나타난 최초의 공화국이다.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것이 기원후 14년이니까 거의 1800년 만에 거대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기본권이나 민주주의는 미국 독립 당시만 해도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이념이었다.당시로서는 검증되지 않은 이념을 국가구조에 구체화시키면서 미국인들이 느낀 의심과 우려는 매우 컸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미국 헌법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초석이 된 점보다도 그 내용이 현재까지 거의 원형 그대로라는 것이다.미국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 중에 하나라면 미국 헌법은 이를 가능케 한 초석이다.
‘페더랄리스트 페이퍼’는 이런 헌법을 만들 때 제기될 수 있는 모든 쟁점에 관한 독창적이고 숙고된 생각을 담은 책이다.
독립전쟁 후에 소집된 연방헌법제정회의에 참석했던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 등 3인의 연방주의자는 1787년 10월∼1788년 8월 뉴욕 주 시민에게 새 헌법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총 85편의 글을 뉴욕 시의 신문에 기고했다.
기고문은 헌법의 의미와 필요성, 연방정부가 어떻게 운영될 수 있는지에 관해 역설한 것이었는데, 이 책은 이 기고문의 모음집이다.
이 책이 실제로 미국 헌법 채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당시 분열로 치닫던 여론을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그런 까닭에 이 책은 미국독립선언문, 미국헌법과 더불어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신성한 글로 여겨지고 있다.
이 책은 강한 연방정부의 구성과 그 속에서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소수자의 보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고자들은 미국의 독립전쟁을 체험하면서 주(州) 사이의 파당적인 경쟁과 대륙회의의 약체성, 전쟁을 효과 있게 뒷받침해줄 국민적 일체감의 결여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오로지 강력한 중앙정부의 수립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이 강력한 중앙정부의 구성을 주장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다수 대중의 횡포로부터 소수를 보호하는 문제였다.
그들은 대중의 다양한 이익 간의 충돌을 조정하고, 다수의 횡포에 의한 소수이익의 침해를 방지하는 데는 대의제와 연방제, 권력분립제가 가장 합당한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또 이러한 제도 속에서 소수에 의해 초래되는 문제는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이 책은 미국인들이 뽑은 가장 위대한 법서이며 오히려 출간 당시보다 현재 더욱 큰 비중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미국 대법원은 다수의 판결문에서 이 책을 인용하며 심지어는 한 사건에서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이 모두 이 책을 그 전거로 인용하기도 한다.
이 책 속에 나타난 비전, 즉 큰 국가를 구성해 파당을 없애고 보다 큰 의미의 국익을 도모할 수 있다는 사상은 세월이 갈수록 미국사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미국의 정치사상과 제도, 특히 대의민주주의를 파악하고 미국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이겠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헌법이 가지는 의미와 헌법재판소의 자리매김을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필독서라 하겠다.
조홍식 서울대 교수·법학과===================================================
(37) 종의 기원-찰스 다윈
종의 기원-찰스 다윈
1999년 미국에서는 학자 및 예술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1000년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1000명을 묶은 ‘1000년, 1000인’이란 책이 출간됐다.
다윈은 갈릴레이, 뉴턴과 함께 10위 안에 선정되었다.다윈의 진화론, 즉 자연선택론은 그간 많은 논쟁을 거쳐 이제 생물학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와 예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향을 미치는 확고한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또 알게 모르게 현대인의 사고체계에 기본 틀을 제공하고 있다.다윈의 이론이 학문은 물론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라 평가되어 과학사학자들은 이를 ‘다윈혁명’이라 일컫는다.
다윈의 자연선택론이 등장하기 전 2000년 동안 서양의 자연과학을 지배해 온 사상적 토대는 플라톤의 본질주의였다.플라톤에 의하면 이 세상은 영원불변의 완벽한 전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전형으로부터의 변이는 진리의 불완전한 투영에 불과하다.
이 같은 절대주의 관념은 훗날 기독교 신학에 의해 더욱 굳건히 서양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게 된다.
‘종의 기원’의 출간은 이 같은 서양의 사상체계를 근본부터 뒤흔든 엄청난 사건이었다.다윈은 변이가 바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임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진화론만큼 오해를 많이 받은 이론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윈의 이론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지금까지 줄곧 오해와 오용의 역사를 거듭해 왔다.근본적으로 결코 과학일 수 없는 창조과학의 어처구니없는 공격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대부분의 인문사회학자와 심지어 상당수의 생물학자마저 상당히 그릇된 이해를 하고 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것이 1859년이니 이제 거의 한 세기 반의 시간이 흐른 셈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 자체가 나름대로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쳤다.
자연선택론은 1930, 40년대에 이른바 ‘진화적 종합’을 겪고 1960, 70년대에는 또다시 유전자의 관점으로 재무장하여 지금은 상당히 ‘진화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1세기 생물학은 지금 엄청난 변혁기를 맞고 있다.분자생물학 만능시대를 벗어나 바야흐로 통합생물학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동안 환원주의 일변도로 치닫던 생물학이 드디어 또 다른 종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가능하면 모든 걸 단순한 시스템으로 만들어 분석하는 물리화학과 달리 기본적으로 위계구조의 복잡계를 다루는 생물학은 그 접근 방법이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2009년이면 다윈이 탄생한 지 200년, 그리고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50년이 된다.
미국 하버드대의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하여 드디어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사회과학과 예술을 한데 아우르는 ‘지식의 통섭(統攝)’이 가능해졌다고 주장한다.다윈의 이론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공부할 때가 온 것이다.
‘종의 기원’을 읽으며 다윈의 또 다른 명저 ‘인간의 유래’(1871년)를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그래야 다윈의 이론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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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정부론(통치론)-존 로크
정부론(통치론)-존 로크
청교도혁명과 왕정복고 및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절대왕정이 의회정으로 대체된 영국의 시민혁명기에 활동한 존 로크가 명예혁명이 있은 지 2년 후인 1690년에 출판한 이 책은 명예혁명을 옹호한 가장 중요한 저술이다.
사실 책 내용의 대부분이 명예혁명 이전에 쓰인 것이긴 하지만 근대자유주의 정치이론을 정초한 최초의 본격적인 저술로서 평가받는다.
이 책은 두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로버트 필머경과 그 일파의 잘못된 원리와 논거를 밝히고 논박한다’는 제하의 첫 번째 논문은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나지 않았다’는 명제에 입각하여 절대왕정을 옹호한 필머와 그 일파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논박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 논문인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과 범위 및 목적에 관한 소론’에서 로크는 자신의 정치권력론을 체계적으로 개진한다.
국내에서 두 논문이 모두 번역된 책은 찾기 힘들고 ‘통치론’이란 제목으로 두 번째 논문이 번역되어 있다.
로크에 의하면 통치권력은 어디까지나 자연상태로부터 ‘모든 개인의 동의에 의거하여’ 성립되어야 한다.그런데 사람은 자연상태에서 누구나 자신의 소유물과 신체를 처리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누구나 똑같은 권리를 누리는 평등한 존재이다.
그러나 자연상태는 ‘방종의 상태’가 아니다.자연법은 ‘모두 평등하고 자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누구도 타인의 생명, 건강, 자유 및 재산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한다.
이성적 존재로서 사람은 자연법에 따라 생활한다.때문에 자연상태는 애초에 평화적이고 목가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화폐의 발생과 더불어 사태는 달라진다.
즉, 화폐는 썩지 않고 얼마든지 축적할 수 있다.
게다가 사람들 간에 근면의 정도 등에 차이가 있다.
이로 인해 사람들 간에 소유물의 차이가 생기게 되고, 다른 사람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사태 역시 발생하게 된다.
이런 사태를 종식시키고 사람들이 ‘생명’ ‘자유’ ‘자산’이라는 자연권을 보다 안전하게 향유하기 위하여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 처분권을 정부에 위임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연상태 대신 정치사회에서 살기에 이른다.
그런데 ‘정치사회 결성의 목적이 재산 보호에 있다’는 그의 주장은 정치적 자유주의이론의 핵심적인 요소에 속한다.이와 더불어 그가 제시한 제한정부론, 권력분립론,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우위론, 법치국가론 역시 정치적 자유주의의 중요한 구성요소들에 속한다.
한편 그는 인민의 동의가 권력행사의 기초이고, 인민이 저항권을 지님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런 점들은 그의 정치이론이 지닌 민주적 요소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정치사회를 결성하는 주체를 실질적으로는 유산자층으로 제한하고 있고, ‘치자와 피치자의 일치’를 적극 사고한 장 자크 루소와는 달리 권력의 ‘양도’를 정치사회 결성의 전제로 삼고 있는 것과 같은 한계점을 가진다.
그런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로크의 이론은 미합중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이후 ‘자유주의의 민주화’를 추구한 ‘진보적 자유주의’의 출발이론으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김세균 서울대 교수·정치학과
-------------------------------------------------------(39) 마담 보바리-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귀스타브 플로베르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1857)는 불륜에 빠진 한 여인의 파멸에 관한 이야기다.사실주의 문학의 완성, 자연주의 소설의 시작, 현대 소설의 선구 등 이 소설이 누리는 화려한 평가와 명성에 비해 작품의 소재는 지극히 평범하다.
그런데 바로 이 보잘것없는 소재로부터 아름답고 완벽한 세계의 ‘마담 보바리’를 만들어 냈다는 데 플로베르의 천재성과 예술성이 있다.
주인공 에마 보바리는 소녀 시절 무분별하게 읽은 낭만적 경향의 소설로 인해 소설 속 허구의 세계를 현실로 간주한 나머지 자신의 삶도 소설처럼 모든 것이 아름답고 멋진 세계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현실은 끊임없이 그녀의 꿈을 배반했다.결혼과 출산, 그리고 두 번의 불륜을 차례로 거치지만 그 어느 것도 그녀의 열망에 답해 주지 않았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마지막 출구였던 불륜마저 진부해져 가면서 에마는 심각한 낭비벽에 빠져들고 결국 경제적 파산으로 음독자살한다.
플로베르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 어떤 매개도 놓지 않는 여주인공을 통해 동시대의 정신적 질병, 낭만주의가 초래한 질병을 폭로하고자 했다.그런데 에마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단순하지 않다.
환상을 현실로 살고자 하는 에마는 단지 어리석기만 할 뿐인가?에마가 대변하는 ‘환상’의 세계와 상극을 이루며 ‘현실’을 대변하는 오메(Homais)의 세계는 더욱 괴기하고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작가는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다만 인물이 놓인 객관적 주관적 정황을 정확한 비율로 보여줄 뿐이다.
독자는 여주인공의 삶을 통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라는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담 보바리’는 19세기 전반기 프랑스 지방 사회의 모습을 사실주의적 필치로 그려 낸다.이 소설은 여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을 통해 소부르주아의 순응주의와 천박한 현실주의를 드러낸다.
특히 ‘마을의 볼테르’ 오메를 통해 맹신과 배타의 논리로 변한 과학과 진보 이데올로기를 풍자한다.
작가가 동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도 신랄해 사회의 어느 구석에도 희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소설에는 미래를 약속하는 어떤 인물도, 어떤 계급도 없다.
플로베르의 이러한 사회적 역사적 비관주의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독자는 환상이나 위로가 없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사회적 낙관론을 펼친 어떤 진보적 작가보다도 예리하고 심각하게 19세기 부르주아 사회의 문제와 공허함을 드러냈는지 살펴볼 수 있다.이를 통해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심리를 분석하고 현실을 재현해 왔다.‘마담 보바리’가 문학사에 가져온 새로움은 그것을 보여 주는 언어와 기법에 있다.
기다림과 환멸이 반복되던 주인공의 삶을 재현하는 소설의 구조, 도덕적이고 교화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시대의 어리석음과 문제점을 드러내는 방식, 특히 소설의 ‘시점’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독서의 즐거움은 배가될 것이다.
‘마담 보바리’가 ‘현대 소설의 수많은 가능성이 교차하는 지점’인 것은 바로 이 소설이 새로운 시대, ‘현대’의 패러다임을 표현해 낼 수 있는 형식을 최초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동렬 서울대 교수·불어불문학과==================================================================
(40) 홍루몽-조설근
최근 중국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면서 중국사회와 문화에 관한 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담론의 상당 부분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단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일 뿐, 중국인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수준의 안내는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중국인의 정신세계는 현재의 중국사회 모습을 기준으로 바라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가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됐다고 말하듯이 중국도 오랜 사유전통을 축적해 왔다.
따라서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중국인이 어떤 내면세계를 지녀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홍루몽’은 그 세계의 다양한 단면을 보여주는 소설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근대 이전에 출현한 중국의 소설작품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4대기서’(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에 대한 평가를 훨씬 뛰어넘는다.
이 작품에 관한 연구가 ‘홍학(紅學)’이라는 독립적이고도 전문적인 분야를 형성할 만큼 그 위상이 대단해 현재 전 세계적으로 수천 명에 달하는 홍학가(紅學家)가 활동 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특정 작품에 대한 연구가 독립적 연구 분야를 이룬 예는 서구문학에서도 셰익스피어에 관한 연구 정도다.
이 작품의 성격에 대해선 다양한 견해가 제시됐는데, 바로 이런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 나타난 중국인의 숙명론은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것처럼 유가(儒家)사상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 의해 지배된다.
주인공 소년 가보옥이 입에 옥을 문 채 태어났다는 얘기는 그의 삶이 숙명적 윤회와 허무를 표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성장기에 접어든 소년이 자신을 둘러싼 여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보여주는 섬세한 감성의 굴곡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아무리 윤리적인 사고와 행동이 강조되던 중국사회에서도 이런 감성이 발현되고 표현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대관원으로 대표되는 가씨(賈氏) 가문의 영화와 몰락과정을 통해 인간의 삶이 지니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달은 언제까지나 보름달로 남아있을 수 없다는 진리가 여기에 함축돼 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하나만이 이 작품의 성격을 대변하지는 못한다.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요소가 모두 섞여서 커다란 그림을 그려내며, 독자에겐 총체적인 관찰과 사고를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이 글의 머리에서 언급한 바 있는 전통시기의 중국인이 지녀 온 내면세계의 다양한 면모라고 하겠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내면세계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전개되는 중국사회의 매우 서구화되고 근대화된 듯한 모습 뒤에는 ‘홍루몽’과 같은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면세계의 사고와 감성이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루몽’을 읽는 것은 한때 있었던 과거의 중국을 읽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중국을 깊이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이며, 동시에 시대를 초월하여 중국과 중국인의 사고방식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서경호 서울대 교수·중어중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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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국부론-애덤 스미스
국부론-애덤 스미스
과학적 경제학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간한 1776년이라고 답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아울러 경제학 분야를 대표하는 한 권의 고전을 선택하라고 할 때도 스미스의 ‘국부론’을 선택하는 사람이 가장 많을 것이다.
이와 같이 스미스의 ‘국부론’이 가장 대표적인 경제학 저작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적인 모습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저작이라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우선 스미스는 수요자와 공급자가 만나서 가격을 통해 재화가 자유롭게 거래되면서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자원이 적절히 배분되는 방식을 잘 설명해 놓고 있다.이러한 시장 과정은 스미스가 신학적인 비유를 통해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때문에 ‘국부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 또는 시장 방식을 기억하게 된다.
그렇지만 ‘국부론’의 내용은 경제학 교과서에서 소개되는 가격이론 이상으로 풍부하다.사실 ‘국부론’은 가격이론이 아니라 생산 과정의 분업이론에서 시작하고 있다.
분업을 통해 생산성이 증가한다는 사실, 이러한 생산성 향상의 이익을 통해 국부가 증진한다는 사실, 그리고 분업을 활발하게 하려면 시장의 크기가 커져야 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체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선구적인 관찰은 단지 가격기구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인류사회의 조직원리를 진화적으로 설명하는 데 유용하며, 경제학 분야를 넘어선 적용력을 갖는다.이러한 점에서 사상가로서 스미스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사실 스미스가 연구를 시작하던 1750년대는 시장경제 체제가 확립된 환경이 아니라 중상주의 시대로서 자유로운 영업 활동을 막는 규제가 많은 시대였다.스미스는 이러한 규제를 철폐해야만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므로, ‘국부론’의 시대적 의미는 중상주의 비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단지 스미스가 가격기구만을 분석했다면 시장경제가 확립된 이후에 ‘국부론’의 현대적 기여가 과연 더 있을까 하는 점은 의문시될 수도 있다.그렇지만 ‘국부론’의 분업이론과 가격이론, 나아가 스미스가 윤리학, 법학, 신학 분야에서 남긴 다른 저작을 통합적으로 이해한다면, 스미스의 기여는 현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국부론’의 저자인 스미스는 1723년 스코틀랜드의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나 글래스고대를 다니다가 주위의 권유로 옥스퍼드대로 갔으며 졸업 후 다시 글래스고대로 돌아가서 도덕철학 교수가 되었다.그러다가 한 귀족의 개인교수를 통해 소득을 올린 후에는 집필 활동에만 전념하여 완성한 책이 바로 ‘국부론’이다.
이 책 1판이 1000부 발간된 이래 1790년 스미스가 사망할 때까지 5판이 발간된 바 있으며, 당시 서양 선진국에서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영향을 주었다.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권의 번역본이 있는데 1992년 서울대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판본이 현대적 국어로 쓰인 좋은 번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기현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42) 고백록-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아우구스티누스
4월 인류의 시선은 바티칸이라는 지구상의 가장 작은 나라와 그곳에서 한 노인이 운명하여 장례를 치르는 광경, 또 265대 교황이 뽑혀 취임하는 장면에 쏠렸다.새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의 문장(紋章) 아래편에 조가비 한 개를 그려 넣었다.
이 조가비는 그가 각별히 경애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유래한다. 사도 바울로 다음가는 사상가인 그에게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하루는 그가 바닷가를 거니는데 어린아이 한 명이 모래밭에 구멍을 파고는 조가비로 바닷물을 퍼다 붓고 있었다.
그가 뭐하느냐고 묻자 아이는 바닷물을 퍼서 구멍에 채울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그 조그만 조가비로 무슨 수로 바닷물을 다 채우느냐”고 면박하자 아이는 “당신의 그 작은 머리에 무슨 수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다 집어넣으려고 하세요?”라고 당돌히 대꾸하고는 사라졌다는 것.새 교황도 이 지성적 겸허함을 배우고 싶어하는 듯하다.
서구 문화의 두 기둥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두 문화가 합류하는 지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라고들 한다.그리고 고중세를 통틀어 가장 많은 저작을 낸 그는 ‘고백록’을 자기 대표작으로 간주했다.
이 책이 불후의 명작인 이유는 진리에 대한 그의 열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을 형광등의 밝고도 차가운 빛을 내는 지성이라고 한다면 그의 책에서는 시뻘건 불꽃으로 넘실거리면서 삶을 송두리째 삼키는 ‘마음의 논리’를 접할 수 있다.
그는 책을 통해 인간 천성이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고 단정하고 그 진리를 ‘님’이라 불렀다.그리고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편하지 않소이다”고 실토한다.
당시 유행하던 온갖 철학과 종교를 방랑한 끝에 나사렛 사람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인격신에게서 그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는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소이다”라고 선언한 뒤 44년간 성직자, 영성가, 사상가 및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남김없이 이 언약을 실천한다.
여생을 두고 끊임없이 되뇌던 그의 후회,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라던 그의 유언에서 진리에 대한 열정을 독자는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적으로 유일신 사상에 이르기도 힘겨운 인류에게 유일신 하느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한다는 놀라운 가르침을 새로 내렸다.그리스도인들은 스무 세기를 궁리했지만 아직도 그 교리가 무슨 뜻인지 속 시원히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 문명이 시들어 가던 구역질나는 냄새를 맡았다.그 제국의 붕괴와 몰락은 서구 문명의 몰락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위기감을 대변해 주고 있기도 하다.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혼자 남은 초강대국이 그 군사 횡포로 세계 평화를 파괴하지나 않을까,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두 세계에서 파생한 광신적 근본주의가 인류의 폭력적 종말을 부채질하지 않을까 안타까워하는 지성인들에게 ‘고백록’은 그의 ‘신국론’과 더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벗이다.
성염 주교황청 대사·前서강대 교수=================================
(43) 위대한 유산-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찰스 디킨스
대중성도 있고 예술성도 뛰어나다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861년)은 핍이라는 어린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그린다.국내에는 ‘위대한 유산’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제의 뜻은 ‘유산’ 자체가 아니라 ‘유산에 대한 큰 기대’이며, 동시에 당시 사회에 만연한 물질적 기대감을 가리킨다. 따라서 훌륭한 유산이라고 이해되기 쉬운 ‘위대한 유산’보다는 ‘막대한 유산’이 더 옳은 표현이라고 하겠다.
사회적 상승욕은 숱한 근대 서구 문학작품의 주제였는 바 이 작품 또한 ‘신사(紳士)되기’라는 차원에서 같은 주제를 다룬 성장소설이라 할 만하다.디킨스 당대의 이상적 인간상인 신사는 구시대의 귀족적인 이상과 부르주아적 이상이 결합된 사람으로, 일정한 재산과 교양에다 ‘신사다운’ 덕목을 두루 갖춰야 했다.
이는 서유럽에서도 가장 먼저 시민혁명을 일으켰지만 귀족계급과 근대 시민계급의 부단한 타협을 통해 진행된 영국 근대사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신사는 일정한 재산과 사회적 신분에 따라 정해지는 지배집단으로서 계급사회 특유의 배타성과 가부장적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주인공인 핍은 대장장이인 자형(자兄) 조 가저리의 도제로 몇 년을 보내다 런던으로 가서 신사 수업을 받게 된다.이런 행운은 그가 어린 시절 우연히 도와주었던 탈옥수 매그위치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유형지(流刑地) 호주에서 크게 성공해 번 돈을 그에게 몰래 보내 주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핍은 자신의 후원자는 그가 짝사랑하는 에스텔라를 양녀로 기르는 미스 해비셤일 거라고 근거 없이 추정하며 자기기만의 길로 빠진다.
핍의 신사 수업은 진정으로 덕목과 실력을 갖추는 과정과 무관하다.오히려 신사의 속물적 세계에 동화되어 가던 핍 앞에 어느 날 매그위치가 갑자기 나타난다.
핍은 그동안 자신을 후원해 준 사람이 매그위치라는 것을 알게 돼 큰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은인을 저버리지 않는 인간다움을 발휘한다.
회한 속에 큰 병에 걸려 누운 핍을 조가 멀리 찾아와 극진히 간호하고 심지어 빚까지 갚아 준다.
자신의 속물성을 뼈저리게 깨달은 핍은 외국에서 사업가로서 노력하여 성공하게 된다.
또 자신이 짝사랑하던 에스텔라가 첫 결혼에 실패한 뒤 과거와 달라진 모습을 보고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룬다.
핍은 런던 사교계의 화려함 뒤에 숨은 차별과 착취의 현실을 통해 단련됨으로써 조의 세계가 가진 현실적인 무력함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계의 인간다움을 간직한 원숙한 인물로 남는 것이다.
어린 핍을 그리는 초반부를 제외하면 작품은 전체적으로 당대 사회의 낙관적 분위기와 판이한 환멸의 정조가 지배하며, 신사의 이상이 어떻게 탐욕이나 범죄와 직결되는지를 가차없이 해부한다.물론 결말의 주인공이 오늘의 눈으로 볼 때 흡족하느냐는 점은 논란거리이다. 작가가 당대의 신사 개념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틀림없으나, 신사 이외의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는 없다.
이런 탐색에 대한 주문은 디킨스에게는 너무 무리한 것이지만, 21세기의 한국 독자라면 거기까지 나아가는 성찰을 통해 고전을 읽는 의의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 몇 가지 역본이 있으나 고전에 참맛을 제대로 옮긴 것은 없어 아쉬운 상황이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 영어영문학과===============================
(44) ‘프로테스탄티즘의…’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 막스 베버
이른바 통섭(統攝)의 학문을 한 학자로 막스 베버를 꼽을 수 있다.그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섭렵하면서 사회, 문화, 정치, 경제 현상 사이에서 인과관계의 고리를 발견하려 하였다.
실제로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가 종교윤리, 기업조직, 임노동, 기술, 시장, 법 등 여러 요인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하고 있음을 서구의 경험을 통해 밝혀주고 있다.
왜 근대의 합리적인 자본주의가 유독 유럽에서만 출현하였는가?그는 근대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기원을 비교문명의 시각에서 분석함으로써 해답을 찾으려 하였다.
이윤추구 동기에 의해 작동하는 모험가적 자본주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존재했다.서부 유럽이 매우 독특했던 점은 모험가적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합리적’ 자본주의의 출현에 있다.
베버는 서구의 합리적 자본주의의 특징적 현상으로 ‘형식적이고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와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의 존재’를 들고 있다.그는 이러한 합리적 자본주의가 가능하기 위해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서구에서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다.자본주의 정신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소명의식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으로 인해 비로소 노동과 이윤추구 행위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이것이 금욕적 생활과 저축 관념을 매개로 근대적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로 16, 17세기의 종교개혁과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를 베버는 지적한다.칼뱅주의는 인간의 운명은 태초로부터 정해진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직업노동과 부의 추구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일 때 구원이 가능하다는 예정설을 중시하였다.
세계의 탈주술화(脫呪術化)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결국 동양과 서양 사이의 차이도 직업과 노동에 대한 의식, 삶에 대한 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종교적 측면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베버의 논의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인 자본주의 분석과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두 사상가의 입장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근대 자본주의의 역학과 모순에 대한 이해는 보다 충실해질 수 있다.
그들은 각각 자본주의의 정신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을 강조하면서도 이념적 기초와 물질적 조건을 서로 경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과 관련하여 베버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베버의 생각과는 달리 동아시아 나라에서 유교윤리가 후발 자본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이 대표적 보기다.
미국 하버드대의 두웨이밍(杜維明) 교수가 대표적인 논자이다.이러한 주장은 종교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사이의 선택적 친화력에 관한 베버의 문제의식을 동양사회에 접목시키는 시도로서 베버사회과학의 새로운 연구주제라고 할 수 있다.
임현진 서울대교수 기초교육원장==========================
(45) 괴델, 에셔, 바흐-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인간이 예로부터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지적 호기심 중 하나는 우리 인간 자신에 관한 것이다.자아란 무엇일까?
인간의 마음은 물질일까 아니면 물질이 아닌 어떤 것일까?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지능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근자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질문은 형이상학이란 이름 하에서 사변적으로 고찰되어 왔으나 과학기술의 발달과 컴퓨터의 출현은 이런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궁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명저 ‘괴델, 에셔, 바흐’는 바로 이러한 마음의 문제와 인공지능의 가능성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인지과학자인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에 대한 답을 괴델의 수리논리학적 정리와 에셔와 바흐의 예술 작품에서 찾아낸다.
괴델의 정리, 에셔의 그림, 바흐의 음악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가 다층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 층들은 일종의 ‘이상한 고리’처럼 서로 엉켜 있다는 것이다.즉, 최상 층위는 최하 층위에 의하여 규정되고 다시금 최상 층위가 최하 층위로 소급되어 영향을 미치면서, 층위 사이에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엉킨 고리는 본래적으로 그 자체 속에 역설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이상한 고리이다.
저자는 역설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다층구조의 엉킴 자체가 바로 자아의 진정한 모습이며, 이 다층구조 속에 엉켜 있는 이상한 고리가 물질인 뉴런들의 밀림으로부터 어떻게 의식을 지닌 마음이 출현하는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제시한다.또 이러한 엉킨 고리를 구성하고 있는 다층구조의 모습을 토대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옹호한다.
에셔와 바흐의 작품은 이 ‘이상한 고리’에 대한 매우 특출한 예시이다.‘손을 그리는 손’을 비롯하여 시작과 끝이 사라진 상태로 끝없이 반복되는 에셔의 그림들이 그렇고, 반복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바흐의 ‘무한히 상승하는 캐넌’이 그렇다.
바흐의 캐넌 ‘음악의 헌정’은 무한히 상승하는 순환 고리를 가지고 있어, 마치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종지부는 다시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도입부로 연결된다.
저자는 이 이상한 고리의 역설적인 모습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서 더욱 또렷하게 인지하고, 이 책의 상당 분량을 할애하여 괴델의 정리를 천착해 들어간다.괴델의 정리에는 ‘자기 지시’의 개념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자기 지시가 바로 다층구조의 엉킴의 출발점이자 역설의 원천인 것이다.
층위 사이의 엉킴으로 인해 역설을 일으키는 자기 지시의 간단한 예는 다음과 같다.“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문장이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역설적 문장인 이유는 “이 문장이 참이라면,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문장이 실제로는 참이므로 거짓이 되고, 이 문장이 거짓이라면,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문장이 실제로도 거짓이므로 참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 호프스태터는 1945년 미국 뉴욕 출생으로, 196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아버지 로버트 호프스태터의 학문적 자질을 이어받아 일찍이 과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미국 스탠퍼드대를 거쳐 오리건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디애나대 인지과학 및 컴퓨터과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책은 1979년 출간 직후 화제가 돼 이듬해 논픽션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김영정 서울대 교수 철학과=========================
(46)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과 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자 19세기 러시아 장편소설의 위대한 시대를 장엄하게 끝맺는 걸작이다.이 소설은 신에 의해 세상에 허용된 악에도 불구하고 신을 변호하고 창조의 목적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구상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영원한 주제(믿음 자유 악 구원 인류의 운명에 관한 문제들)를 범죄소설의 틀을 빌려 탐구하며 그 속에서 친부 살해를 카라마조프 집안의 사건을 넘어선, 아버지―신의 살해라는 이념적 차원과 연관시킨다.그는 각각 정념과 이성과 신앙을 대변하는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형제의 삶과 의식을 좇아가면서, 무신론적 합리주의나 공리주의가 아닌 영혼의 자유와 진정한 인간애, 속죄, 수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 신앙을 소설에서 실천하는 인물은 알료샤와 그의 영적 아버지인 조시마 장로다.그러나 작가의 창작 계획상 미완으로 머문 이 소설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진리를 자신의 내면에 지닌 ‘신의 인간’ 알료샤가 아닌 ‘마돈나의 이상’을 동경하면서도 끊임없이 ‘소돔의 이상’에 이끌리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죄’의 의식과 인간성의 부활로 나아가는 드미트리다.
그 못지않게 흥미로운 인물은 합리주의자 니힐리스트를 자처하며 “이 세계의 입장권을 신에게 돌려주겠다”는 ‘반역자’ 이반이다.그의 창조물인 대심문관에 따르면 내적 자유를 감당하기에 너무 약한 존재인 인간에게 자유는 곧 저주다.
그런즉 자유를 인간에게 부여했던 그리스도는 기적, 신비, 권위에 의거하여 자유 대신 빵과 지상낙원을 보장하는 공식적 기독교에 의해 수정되어야 한다.
‘대심문관의 전설’은 로마가톨릭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으로서, 신적 원칙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한 분석으로서 강력한 의미를 지닌다.그러나 스스로를 ‘불신과 회의의 자식’이라 불렀던 본래 성향과는 모순되게 작가가 자신에게 부과한 과도한 종교적 역할은 소설에 의도치 않은 파열을 가져온다.
과도하게 열렬한 믿음은 오히려 긍정을 부정과 동행케 한다.
그는 반역자 이반과 대심문관의 반대편에서 영혼 불멸과 진정한 신앙을 열렬히 전도하지만, 이반의 말 속에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울린다.대심문관에 대한 그리스도의 입맞춤 역시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그들의 지상적 행복을 위해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희생하는 자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누설한다.
이반도 파열을 보인다.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의심하며, 믿음을 갈구하나 오만함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작가에게 나타나는 파열, 타락의 심연과 천상의 심연을 마음속에 함께 지닌 인물들, 찬반 사이에서의 흔들림 때문에 이 작품은 변신론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실패한 명제소설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소설의 ‘예술적’ 성공을 의미한다.미의 본성에 대해 드미트리가 한 말 ‘소돔의 이상과 마돈나의 이상을 동시에 찬미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 소설 전체에도 적용된다.
영혼의 불멸과 구원의 문제에 천착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소돔에서 마돈나에 이르는 모든 길에 뻗쳐 있는 이율배반으로 가득찬 삶, 살아 있는 삶에 바치는 송가다.
김희숙 서울대 교수 노어노문학과============================
(47) 맹자-맹자
맹자-맹자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우리는 애초에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더 자라서는 누군가의 형제 또는 자매로, 누군가의 벗으로, 누군가의 학생으로, 누군가의 연인으로, 누군가의 아내 또는 남편으로, 누군가의 동료로, 누군가의 윗사람 또는 아랫사람으로.
이런 점에서 우리 자신의 몸은 수많은 관계들이 지나가고 중첩되는 교차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관계에 진입하게 된다는 것은, 삶이란 수동성을 숙명처럼 안고 있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왜냐하면 이는 개개인이란 그런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전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거나, 개개인은 자신이 진입하게 된 관계에서 관행처럼 지켜지고 있는 규칙을 그냥 따르기만 해야 한다거나, 그렇게 규칙을 따랐을 때에만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거부하고 싶은 공허함이 있다.그러나 그런 삶이란 허깨비 같은 삶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바로 해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관계 맺기를 부정한다는 것 역시 허무주의에 쉽게 노출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맹자의 철학적 출발점이었다.
맹자가 보기에 극심한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던 중국에는 두 가지 극단이 존재했다.하나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타인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는 부르짖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긍정해야 한다는 부르짖음이었다.
맹자는 이런 양 극단을 거부하고 자신은 양자의 중도를 걷겠다고 말했다.
그는 타인과의 관계 맺음, 그리고 그 관계를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일은 여러 관계가 구성하는 전체에 헌신하는 것이나 여러 관계에 관행적으로 내려오는 규칙을 맹종하는 수동적인 일이 아니며,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함을 통해 능동적으로 접근해 나가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현대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진실한 사람만이 타인에 대해 진실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표출되었다.첫 번째로는 성선설이다.
맹자는 성선설을 통해 인간이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본래부터 갖고 있음을 그리고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길은 철저히 자신의 힘으로 가능한 것임을 주장하고, 각 개인이 스스로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것을 촉구했다.
두 번째로는 왕도 정치론이다.
이는 맹자의 성선설과 표리를 이루는 것으로 보다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지식인과 지배층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맹자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지배층과 지식인이 솔선수범해야 하며 그들이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거나 냉소할 때 타락한 세상을 가져오게 된다고 보았다.
맹자는 이런 문제의식을 정치, 인간의 본성 등에 대한 문답과 논쟁을 통해 전개해 나갔고 그 내용들은 ‘맹자’에 대화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 전해지는 ‘맹자’는 한(漢)나라 시대 조기(趙기)가 당대 전해지던 맹자의 저술을 정리한 ‘맹자장구(孟子章句)’를 토대로 한 것이다. 현재 대학생 수준에서 읽을 만한 ‘맹자’ 번역으로는 성백효 선생의 ‘맹자집주’가 있다.이 책은 원문에 매우 충실하며, 전통시대 가장 많이 읽힌 주희(朱熹)의 주석이 완역되어 있다.
정원재 서울대교수 철학과=========================
(48) 고향-이기영
고향-이기영
일제강점기 한국의 지식층 청년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였다.이들은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사상을 수용해 이를 적극적으로 문학 활동에 접맥하기 시작했다.
이 사상은 초기에는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민족적 저항 의식의 표출로 문학에 수용되었으나 차츰 마르크스주의와 결부되면서 계급적 투쟁 의식을 강조하는 조직적인 활동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실천의 구심점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카프)이 자리한다. 계급문학운동은 이 단체를 중심으로 문학운동의 집단적 실천과 그 공동체적인 연대 의식을 강조했다.
이러한 문학운동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농민문학론이며 그 대표적 작가가 민촌 이기영(民村 李箕永)이다.
1896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이기영은 1924년 ‘개벽’지 현상모집에 단편 ‘오빠의 비밀편지’로 당선된 후 1925년 카프에 가담했다.단편소설 ‘민촌’(1926) ‘농부 정도룡’(1926) ‘서화’(1933), 장편소설 ‘고향’(1933) ‘신개지’(1938) ‘인간수업’(1941)을 발표하였다.
그는 광복 직후 월북하여 장편소설 ‘두만강’을 발표하였으며 북한에서 요직을 거치다가 1984년 사망했다.
이기영은 장편소설 ‘고향’에서 농민의 경제적 몰락 과정과 삶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했다.작품의 배경인 원터 마을은 일제강점기 농촌의 현실을 전형적으로 드러낸다.
읍내에 철도가 놓이고 공장이 들어서자 농촌 공동체의 구심점이 흔들리고 농민은 대부분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물가의 급격한 상승에도 불구하고 미곡의 가격은 제자리를 맴돌아 농촌 경제는 파탄을 맞는다.
이러한 농촌의 현실 속에 새로 성장하는 농민의 계급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김희준이라는 매개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의 각성을 의도한다.주인공은 추상적 관념적 인물이 아니라 방황과 갈등을 겪는 살아있는 인물이다.
그는 농촌 생활의 고통을 겪으면서 무능력에 좌절하기도 하고, 아내와의 애정 없는 생활에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마을 사람의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가 야학을 열고 두레를 조직하고 농민을 계몽한다.
이에 따라 자신의 삶의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원터 마을 사람들이 김희준의 지도에 의해 힘을 합치게 되고, 소작료 인하 투쟁에도 적극 동참하게 된다.
이처럼 ‘고향’은 근대화의 와중에서 전통적 사회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하여, 그 속에서 삶의 고통을 참아내며 살아가는 농민의 생활과 의식의 성장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작가는 지주를 등에 업고 농민을 착취하는 마름 안승학과 그에 의해 고통 받으면서도 저항하는 마을 사람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 하여 다양한 삽화를 제시하면서 농촌의 현실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 결과 ‘고향’은 일제강점기 농민들의 삶과 그 풍속의 재현을 가능하게 해 주었으며 농촌의 현실을 전형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고향’은 계급문학운동의 대표적 성과이면서 동시에 일제강점기 리얼리즘 문학의 최고봉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양승국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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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인간의 조건-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앙드레 말로
이 시대가 비극적인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 스스로 구원의 가능성을 거부하고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태도로 이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일까?‘인간’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따로 있는 것일까?
앙드레 말로는 ‘인간의 조건’에서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것이 체제적이고 전체적인 것과 맺고 있는 관계를 조망하고, 한 인간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행위’임을, 그리고 그 행위는 역사 속에서 정당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삶의 역사성’을 강조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조건’은 1927년, 중국 상하이에서 공산주의자의 주도 아래 총파업이 일어나고 군벌에 대항하기 위해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하고 분열하는 과정과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도 코민테른의 지도 노선에 충실한 인물과 공산당의 지령을 거부하는 소수파 사이의 갈등을 서술하고 있다.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등장인물은 순간순간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고뇌에 빠져드는데, 말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인물을 형상화하고 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우세한 세력에 밀착하여 자본을 축적하고자 하는 은행가 페랄, 자신의 삶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무책임한 클라피크, 공산주의자에게서 받았던 고문 때문에 증오에 차 있는 쾨니히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에는 자신의 출신 계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물질이나 환상 또 복수에 집착하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이들은 모두 자신의 이해관계와 생명을 구하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말로는 한 인물의 가치는 사유나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 특히 죽음 앞에서의 마지막 선택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이 관점은 혁명가에겐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이들은 신분과 국적을 넘어 동지애로 묶여 있고 상황을 인내하고 숙명을 거부하기 위해 행동하는 인물이다.
상하이 폭동을 주도했던 기요는 새로운 폭동을 꾀하다가 잡힌 후 독약을 먹고 자살하며, 첸은 장제스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안고 승용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첸이나 기요는 행동하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실패’의 신화를 보여 준다.
그러나 카토우는 체포된 후 다른 죄수에게 자기 몫의 독약을 건네주고 산 채로 열차 화통에 던져지는 영웅적 죽음을 선택한다.
그의 죽음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증오의 고리를 깨뜨리고 인간성을 재천명하는 순간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죽음을 넘어선 죽음, 공동체 의식에 뿌리박은 ‘인간’의 죽음이다.
이처럼 말로는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 인간은 희생자일 수밖에 없지만 절망적인 순간에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연대의식을 드러내는 진정한 영웅이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의 조건’은 가벼움과 차이를 중시하고 개인을 우선시하며,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한 현대 문학과는 다른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이 작품의 문학적 의미는 선택과 행위의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문학을 통해 역사 속의 개인들을 형상화하고 역사를 통해 새로운 문학의 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유호식 서울대 교수·불어불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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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의무론-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의무론-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서양 고대에 우리가 바라는 이상 국가가 실제로 있었다. 그곳에는 경찰이 없었다.시민은 단도를 지니고 다닐 수 없었고, 장군이건 병사건 도시로 들어오려면 성문에서부터 무장을 해제해야 했다.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코린토스를 정복한 장군들은 하나같이 전리품을 국고에 넣거나 도시 장식에 사용했다.
사기, 수뢰란 말도 없었다.
기원전 2세기 중엽의 로마 공화국이 그러한 이상 국가였다.이는 전적으로 로마인이 농민 출신으로서 검소 질박한 생활을 해온 데다 정의, 지혜, 용기, 인내의 4추덕(樞德)을 갖춰 행복한 생활을 추구하라는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 윤리 사상을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살던 당시 로마는 고통이 최고악이요 쾌락이 최고선이라는 에피쿠로스의 윤리 사상에 물들어 타락해 가고 있었다.
이를 안타까워한 그가 기원전 44년에 아테네에 유학하고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으로 쓴 최후의 저술이 ‘의무론’이다.
비스마르크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꼭 읽으라고 권유했듯이, 이 책은 그의 이상 정치가론이기도 하였다.
세계 역사상 윤리 면에서 키케로의 ‘의무론’만큼 후세에 줄곧 영향을 끼친 책은 일찍이 없었다.서양 고대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중심의 중세 시대에도 이 책은 계속 도덕규범 도서였다.
15세기 중엽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 ‘의무론’의 필사본이 700개나 세계 여러 도서관에 산재되어 있었다 하며,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에도 ‘의무론’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1501년 에라스무스는 늘 지니고 읽어야 한다며 포켓용 번역판을 내놓았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의무론’은 도덕 철학의 결정체였다.18세기 볼테르는 누구도 이보다 더 현명한 책은 쓰지 못할 것이라고 설파했고, 프레데리크 대왕은 이 책을 도덕에 관한 최상의 책이라고 극찬하였다.
키케로의 ‘의무론’은 3권으로 되어 있다.제1권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명예·名譽), 제2권은 유익하거나 편의적인 것(공리·功利), 제3권은 명예와 공리의 상충을 다루고 있다.
1, 2권의 내용은 중기 스토아학파의 파나이티우스에게서 따온 것이지만, 3권은 키케로의 독창적인 것이다.
그는 오리엔트, 그리스, 로마의 온갖 신화와 인간의 일화를 총동원하여 공리보다는 최고선인 명예를 택할 것을 주창했다.포에니전쟁 때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음의 자리를 찾아간 레굴루스 장군, 비겁자라는 온갖 비방에도 지연작전을 써서 로마를 구한 파비우스 장군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 물건의 하자를 숨기거나 남을 속여 실리만을 챙기는 사람은 혹독하게 질타 당한다.
건강에 좋지 않은 살기 나쁜 집인데도 건강에 좋은 집으로 상대에게 파는 자는 “결코 정직하지도 않고, 순박하지도 않으며, 명예롭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은 사람이다.오히려 그런 자는 교활하고 간교하며, 남을 잘 속이고, 사악하고 난폭하며, 사기와 음흉의 세계에서 자란 사람이다”고 말한다.
라틴어 원전을 대본으로 한 키케로의 의무론(서광사·1989)이 번역본으로 나와 있다.
허승일 서울대 교수·역사교육과=========================
(51) 인간문제-강경애
인간문제-강경애
강경애의 ‘인간문제’는 동아일보에 1934년 8월 1일부터 12월 22일까지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이다.강경애는 광복 이전에 여성 작가로는 리얼리즘 문학정신을 가장 치열하게 또 실천적으로 구현했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간도 이주 후에 쓰인 것으로 일면 창작활동을 통해, 일면 사회활동을 통해 저항적이며 투쟁적인 한국인을 적극 도와주기도 하였다.
‘인간문제’는 1930년대에 원소마을을 배경으로 선비라는 처녀가 지주에게 짓밟힌 후 마을을 떠나 인천의 방직공장에 가서 감독에게 농락당하고 억압받다가 결국 폐병에 걸려 죽고 만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이런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농민의 딸의 수난사로 요약되긴 하지만, 농민이 공장 노동자로 전화(轉化)되는 농촌 분해의 한 값진 사례를 제시한 것으로 확대 해석되기도 한다.
강경애는 이 소설의 서두를 ‘원소전설(怨沼傳說)’로 장식함으로써 자신의 창작 의도를 적극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갖는다.원소는 구두쇠 장자(長者)의 착취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농민들의 원한의 눈물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전설을 갖고 있다.
강경애가 작가적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못 가진 자, 짓밟히는 자, 약한 자의 원한은 이데올로기의 가장 중요한 씨앗이 된다.
소설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갑남을녀가 빼앗기고, 짓밟히고, 뿌리 뽑히게 된 그 내력을 감지하게 된다.
작품 ‘인간문제’는 빼앗고 짓밟고 뿌리 뽑는 존재를 크게 지주와 공장 감독으로 나누었지만, 작가 강경애는 이들 존재의 배후인 식민통치세력을 쏘아 보고 있는 것이다.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쓰기 전에 인간의 근본 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또 문제를 해결할 힘을 구비한 인간이 누구인가를 지적하려고 애써 왔다.이러한 노력의 한 증거는 민족단일당인 신간회(新幹會)의 자매단체인 근우회(槿友會)에 강경애가 가입한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강경애는 근우회 활동을 통해서 짓밟히는 자라든가 빼앗기는 자로서의 여성의 현실적 위치를 인간문제의 한 갈래로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근우회에서 여성은 억압, 착취, 투쟁 등의 개념에 눈뜨게끔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문제’는 선비의 시련 과정과 이로 인해 빚어진 연민의 플롯, 지식인인 신철이 보여주는 모험과 타락의 플롯, 첫째가 주역이 되어 나오게 된 계몽의 플롯 등이 포개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1920년대의 프로문학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인간문제’의 선비라든가 첫째와 같은 주요 인물은 의지도 박약하고 전망도 결여된 소극적 인물로 비치기 쉽다.
이 작품은 어려서부터 선비를 사모해 왔고 신철을 사상의 스승으로 섬겨 왔던 첫째가 선비의 죽음과 신철의 배반을 맞으면서 선비의 시체로 상징되는 인간문제를 해결하는 데 뛰어들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그만큼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관념이 아닌 경험논리로, 또 이상론이 아닌 현실논리로 접근하였다.
‘강경애 전집’(이상경 편)에 수록된 ‘인간문제’가 현재 출간된 단행본 중에서는 가장 주목할 만하다.그러나 ‘인간문제’ 정본의 참 맛은 당시 일제 치하의 검열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동아일보’ 연재본을 그대로 옮겨 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조남현 서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52) 황무지-TS 엘리엇
황무지-TS 엘리엇
1922년에 발표된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20세기 현대 문명에 갇혀 생명의 기운을 잃은 서구인의 자화상이다.20세기의 기술혁명을 바탕으로 치러진 1차 세계대전은 양측 군인 사상자만 3500만 명에 이르는 형언하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죽음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더 참혹하고 처절했던가?
작가는 시를 통해 스스로 만든 재앙의 굴레를 자신의 머리 위에 쓴 사람들의 죽은 영혼을 해부하고 있다.누구일까? 그리고 무엇일까?
북러시아의 들쥐처럼 집단자살의 충동에 시달리며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문명으로의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은?
인간에게 내린 신의 축복, 문명을 생명이 깃들 수 없는 황무지로 만든 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20세기 최대의 시인 엘리엇은 섬뜩한 이미지와 푸가풍의 반복적이고 다음성적인 리듬으로 끊임없이 이 물음을 곱씹고 있다.
황무지란 원래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불모의 땅이지만, 이 시에서 황무지는 생명이 깃들 수 없는 문명을 뜻한다.그렇다면 20세기 문명은 왜 생명을 잉태할 수도, 생명을 길러 낼 수도 없게 되었나?
‘세티리콘’에서 따온 이 시의 서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 열쇠다. 늙어 쪼그라들어 작은 병 속에 갇혀 추녀 끝에 매달려 살게 된 무녀 시빌에게 한 아이가 묻는다.
“시빌, 너 무얼 원하니?” 시빌이 대답한다. “나는 죽고 싶어!”
아폴로 신은 무녀 시빌을 총애해 어느 날 소원을 하나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시빌은 먼지 한 줌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먼지알만큼 많은 삶을 내게 주십시오.”
그녀는 젊음은 단 한 번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먼지알만큼 많은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무한히 오래 살고 싶었을 뿐, 젊음을 재창조하며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 시빌의 모습과, 그저 많은 문명의 이기는 원하지만 그곳에서 행복과 희열을 얻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현대 서구인들의 모습은 너무나 똑같지 않은가?
20세기를 넘어서면서 맞닥뜨린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엘리엇은 서구인의 삶에 서린 ‘무한한 늙음’과 ‘죽음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린 깊은 절망을 보았다.그러나 그를 더욱 절망하게 한 것은 그 절망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함이었다.
시빌의 절망에는 아직 희망은 있다.그녀는 죽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재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절망에는 희망이 없다.
그 황폐한 정신을 가지고 죽음을 피해 다닐 뿐, 재생의 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황무지에 등장하는 겨울에 따스함을 쫓아 남쪽으로 가는 유한계급의 사람, 종교적 신념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 문명의 값진 유산을 허식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류계층 속물, 생명력의 원천으로서 성(性)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는 방탕한 여인, 상업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장사치, 구원의 기사를 유혹해 위험에 빠뜨리는 거리의 여인 등 수많은 인물은 모두 황폐한 정신을 지녔으면서도 그것으로 절망하지 않는, 정신적으로 죽은 자들이다.그러므로 이 시의 제목은 생명이 깃들 수 없는 황폐한 문명에 붙여진 것임과 동시에 젊음의 재창조가 없는 영겁의 삶에도 두려움을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황폐한 정신에 붙여진 것이다.
신정현 서울대 교수 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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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신기관-프랜시스 베이컨
신기관-프랜시스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거의 잘못된 과학을 비판하고 이러한 비판 위에 새로운 근대 과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던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였다.
베이컨은 1620년부터 자신의 새로운 학문체계를 집대성한 ‘대혁신’을 총 6부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1605년 발표한 ‘학문의 진보’를 개작해서 ‘대혁신’의 1부로 편입시켰고, 제2부로 ‘신기관’을 저술했다.‘신기관’은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 쓴 야심작이었다.
베이컨이 근대 과학의 정신을 대표할 만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유는 그가 실험이라는 새로운 과학 방법론을 강조했으며, 결국 이러한 방법론이 정착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그의 과학 방법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저작이 바로 ‘신기관’이다.
‘신기관’의 제1권은 삼단논법이 자연의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부적절함을 강조하면서, 진정한 ‘자연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참된 귀납법’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베이컨은 인간 지식의 오류의 원천을 인간의 본성에서 유래한 종족의 우상, 편견에서 유래한 동굴의 우상, 언어와 의사소통에서 유래한 시장의 우상, 학파의 오류에서 유래한 극장의 우상이라는 4가지 우상으로 분류한 뒤에 이를 비판했다.
결국 베이컨에게 과학의 방법론의 핵심은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정적(靜的) 원리를 사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무엇에 의해 일어나고 있나라는 동적(動的)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다.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별 사실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해야 하며, 이러한 광범위한 탐구는 실험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데, 실험에 대한 강조는 베이컨이 생각했던 새로운 논리학의 정수였다.
베이컨 이전에는 실험이 자연을 교란시키기 때문에 진정한 과학의 방법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그러나 그는 “사람의 본심이나 지적 능력, 품고 있는 감정 등은 평상시보다는 교란되었을 때 훨씬 더 잘 드러난다”고 비유하면서, “마찬가지로 자연의 비밀도 제 스스로 진행되도록 방임했을 때보다는 인간이 기술로 조작을 가했을 때 그 정체가 훨씬 더 잘 드러난다”고 자연에 대한 조작을 정당화했다.
베이컨의 ‘신기관’은 근대 과학의 방법론은 물론 과학의 진보와 효용에 대한 믿음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책이다.
이 책은 17세기 과학혁명을 주도했던 과학자들에게 널리 읽혔고, 결국 영국의 ‘왕립협회’나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와 같은 새로운 과학단체들을 설립하고, 실험과학을 추동했던 동인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서 자연에 조작을 가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법칙을 알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이러한 실험을 위해서 공동연구를 해야 하며 더 나아가서 국가와 사회가 이러한 과학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참된 과학적 방법에 대한 확신, 과학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 진보에 대한 희망은 서구의 ‘근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며, 이는 베이컨의 ‘신기관’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
(54)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선사시대부터 영화의 시대까지 서구 문학과 예술의 역사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서술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문학 미술 음악 건축 영화 등 거의 모든 예술 장르를 망라하고 있다.저자는 문학예술 작품이 한 시대의 생생한 산물이라는 것을 폭넓은 역사적 안목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탁월한 심미안으로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공 분야와 관계없이 문학예술을 공부하려는 학생은 물론 소박한 감상자를 위해서도 이 책은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논할 때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풍부한 해명의 실마리를 제공한다.하나의 예술작품 또는 한 시대의 주도적 양식은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탄생하는가.
어떤 사회적 요인에 의해 양식의 변화와 교체가 이루어지는가.
서로 다른 예술 장르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예술작품과 수용자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 모든 변수가 어떻게 작품의 미적 특성으로 구현되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저자는 다양한 시대와 장르를 가로지르며 독자의 사고를 자극한다.
이 책은 수천 년에 걸친 서구 문학예술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책의 바탕에 깔려 있는 방법론을 간단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저자의 기본 입장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짚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구석기 시대부터 중세까지로, 이 시기 예술의 기본 성격을 저자는 “실용적 목적과 미적 관심의 직접적 일치”로 설명하고 있다.다시 말해 예술이 추구하는 미적 가치는 자연의 지배나 종교적 제의 같은 예술 외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는 동물 사냥 장면을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수렵에 의존하던 원시 경제생활을 촉진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기능했다.
중세 기독교 예술 역시 예술을 실용적 목적에 종속시킨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그 반면 르네상스 이래의 근대 예술은 차츰 그러한 실용적 목적에서 벗어나 나름의 자율성을 추구한다.근대 예술의 자율성은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동시에 인간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과 인간 보편적 가치의 추구가 이제는 예술의 몫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근대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이 그 본연의 휴머니즘적 지향성을 회복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 시민사회의 ‘합리화’(막스 베버) 과정과 더불어 사회가 다양한 영역으로 분화되고 자본과 권력의 전일적 지배가 강화되면서 다시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의 부정적 힘에 저항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근대 예술의 탄생 조건이었던 시민사회의 내적 모순에 대한 응전이 곧 현대 예술의 본령이 되는데, 저자는 인간 소외의 문제를 최초로 민감하게 포착한 낭만주의가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의 기점이라 보고 있다.
독자는 저자의 생각을 미리 파악하려고 덤비기보다는, 관심이 끌리는 시대나 사조 또는 작품에 관한 서술을 읽어가는 동시에 실제로 해당 작품을 감상하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고 저자의 생각을 음미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하다.
임홍배 서울대 교수 독어독문학과===========================
(55) 고도를 기다리며-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사뮈엘 베케트
한없이 지루한데 결코 자리를 뜰 수 없는 연극,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저 깊은 인간의 심연을 곧바로 느끼게 하는 연극, 근원적인 비애와 경련적인 웃음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연극….
1953년 거의 폐관 직전 상태에 있던 파리의 한 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초연되었을 때 관객들의 첫 반응은 그렇게 막연하고 야릇했다.
그럼에도 조만간 이 낯선 체험에 대한 조용한 열광이 세계로 번져 나갈 것이고, 차후 베케트는 ‘반(反)연극’ ‘신(新)연극’ ‘부조리 연극’ 등으로 명명될 20세기 연극의 새로운 조류를 대표하는 극작가로 손꼽히게 된다.그 명칭이 암시하듯 그때 사람들은 전통의 거부와 혁신, 그리고 ‘부조리’의 인식에서 이 연극을 이해하는 단서를 구했다.
‘부조리’의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서구의 총체적 위기상황 속에서 ‘실존적 인간’을 응시하려는 철학적 성찰과 함께 싹텄다.무엇보다도 이성(理性)과의 부조화를 뜻하는 그것은, 근대사회의 기반이 되어 왔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 위에서,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척도가 아니며 이 세계도 합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의미체가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런 철학적 주제를 제기한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 이후, 철학자이기보다는 철저한 예술가였던 부조리 ‘작가’들을 사로잡은 문제는 어떻게 부조리를 진정 부조리답게 보여 주느냐는 것이었다.부조리를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논하고 보여 준다면 그건 이미 부조리가 아니지 않을까?
이런 물음에서 촉발된 베케트의 도전은 ‘혼돈에 적합한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부조리 그 자체로 빚어진 이 형식은 당연히 전통적 형식을 파괴한다.즉, 이성의 명령으로 짜인 모든 ‘고전적’ 규범과 기법들을 거부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과론적 서사구조의 해체일 것이다.
기승전결식으로 정형화된 ‘이야기’의 선적 구조야말로 인간과 세계를 ‘의도된’ 의미에 맞춰 ‘조리 있게’ 구성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그런 서사적 연결을 유도하는 모든 요소가 극단적으로 파편화된다.이 작품 속에는 시간의 흐름도 없고 공간의 이동도 없다. 의미를 생성하는 어떤 지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단지 ‘지금-여기’라는 텅 빈 상황으로 제시되는 그 시공은 요컨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는 ‘끔찍한’ 세계이다.
거기서 등장인물은 마치 아무 역할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무대 위로 내던져져 뭔가를 연기해야 하는 배우와도 같다.이 할 일 없는 세계 속에서는 할 일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할 일, 즉 ‘역할’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고도는 올 것인가?
과연 그럴 희망은 있는가?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순환구조를 통해 끝없이 유예되는 기다림 속에서 끝없이 피폐해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다.전례를 찾기 힘든 이 도저한 절망의 상상은 우리를 어떤 역설적인 악몽 속으로 이끌어 가는 듯하다.
‘희망’과 ‘의미’의 기치를 걸고 인간을 오히려 병들게 만드는 거짓 진리들에 강력히 저항하는 악몽!
이인성 서울대교수·불어불문학과============================
(56) 장자(莊子)-장주(莊周)
장자(莊子)-장주(莊周)
장자(본명 장주·莊周)가 살았던 시대에는 개인 상호 간의 무한한 생존경쟁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처참한 전쟁이 만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공동체에 앞서는 개개인의 사람다운 삶의 추구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적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장자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 유지를 위하여 생겨난 사회제도, 이념, 권력, 재물 등등은 결국 생명 밖의 존재, 즉 외물(外物)에 불과하다.장자는 바로 이런 ‘외물’의 추구 때문에 도리어 살아있는 개개의 인간(생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적 모순을 지적한다.
또한 장자가 보기에 현실세계에서는 자기만의 특수한 ‘하나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집착하여 오로지 자기 인식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보고―자기와 다른 타자의―입장과 기준들을 부정하고 무차별적으로 규제하고 억압하는 독단적 이념이 넘쳐나고 있다.이와 같이 다른 생명체에게도 자기 방식대로 행동하기를 강요하는 독단론자들의 이념적 폭력을 장자는 기발한 우화와 비유를 통하여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장자에 의하면 인간의 기준은 결코 만물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척도가 될 수 없다.인간 이기주의, 인간 독점주의를 병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장자의 사유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는 일종의 생명철학이다.
하나의 생명체 안에서 심장이나 간 등등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기관들은, 장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위(有爲)’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 ‘유위’하는 존재만으로는 생명성이 보장될 수 없다.왜냐하면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죽은 시체와는 달리 그 생명체를 구성하는 각 기관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정한 ‘아니마’처럼 ‘보이지 않는 총체적인 생명원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총체적 생명원리가 바로 장자가 강조하는 ‘무위(無爲)하는 도(道)’이다.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만물에게 각각의 ‘유위’라는 고유한 활동이 가능하려면, 바로 그 ‘유위’의 지평을 넘어서는 총체적인 생명원리인 ‘도’의 ‘무위’ 속에 포섭되어야 한다.
그 ‘도의 무위’ 속에서 각각의 ‘유위’는 자기의 개별성 또는 차별성을 최대한으로 보장받으며 서로 평등하게 보완하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장자철학의 의의는 우선 오직 ‘하나의 척도’에 의거하여 무차별적으로 인간 본연의 생명성을 왜곡하고 압박하고 있는 모든 사회적 규제나 간섭을 이념적 폭력으로 고발하고 그것을 지양하고자 하는 혁명적인 부정에 있으며, 이와 동시에 자기 삶의 본연적 차별성을 찾아내려는 해방의 목소리에 있다.
사회 속에 살면서 사회적 제약을 넘어서려는 장자의 이상은 영원한 유토피아인지 모른다.그러나 자기 삶의 ‘진정성’의 추구를 포기한 채, 가상세계가 이끄는 기계놀이에 매몰되어서 도구종속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장자의 환상적인 유토피아 이야기가 주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장자’의 한글번역서로는 안동림이 역주한 ‘장자’(현암사)가 있고,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번역서로 오강남이 풀이한 ‘장자’(현암사)와 이강수와 이권이 옮긴 ‘장자Ⅰ’(길)이 있다.
송영배 서울대 교수·철학과==============================
(57) 물질문명과 자본주의-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페르낭 브로델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현대 역사학의 고전이다.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 세계의 내부 구조와 그 역사적 기원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은 한번 진지하게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사전 준비 없이 쉽게 접근할 만한 책은 분명 아니다.이 책을 처음 읽노라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역사 사실과 아리송한 개념 때문에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실 그 모든 것은 아무렇게나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그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저자의 독특한 사관에 따라 교묘하게 배치된 것이다.이런 점을 잘 모른 채 무작정 이 책을 읽는 것은 약간 무모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권하는 이유는, 세계를 읽어내는 저자의 거대한 틀을 좇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지적인 체계를 세워보는 데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브로델이 제시한 가장 흥미로운 개념은 제1권에서 소개하는 ‘장기지속’이다.이것은 다른 역사학자와 브로델을 구분 짓는 가장 독특한 개념이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인간의 삶과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밝히려고 한다.
그러나 브로델이 볼 때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는 대부분 아주 오랜 시간 ‘지속’되는 것이다.그런 것들이 일상생활에서 변함없이 반복되는 가운데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이 전개되는 방식과 한계를 규정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브로델이 이처럼 구조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의 성과를 장기적으로 ‘보존’한다는 데에 있다.그러나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브로델이 그리는 세계가 완전한 무변화의 시공간은 아니다.
변화를 모르는 관성의 세계만이 아니라 그 위에서 활기차게 움직이는 ‘경제’와 ‘자본주의’를 함께 이해해야 그의 사관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상층의 층위를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제2권이고, 다시 여기에 시간의 요소를 집어넣어, 우리에게 익숙한 대로 세계경제가 어떻게 구조적 변화를 해 왔는가를 그린 것이 제3권이다.
브로델의 거대한 체계를 간략하게 요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그가 그려낸 구조는 뼈만 앙상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길어온 여러 이야기들로 흥미진진하게 짜여 있다.
브로델이 이야기하듯 우리의 삶은 여러 층위 속에서 이루어진다.그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단기적으로도 살고 장기적으로도 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세대만이 경험하는 독특한 사건이 있다.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되어 온 문명의 성과를 그대로 반복하며 살아가는 측면도 있다.
이것들을 함께 이해하려는 브로델의 구조는 그토록 거대하고 복잡한, 그리고 여러 차원에 걸친 서술들로 짜일 수밖에 없다.
유장한 긴 호흡과 급격하게 변화하는 짧은 호흡이 함께 존재하고, 또 그런 층위들이 서로 교차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이런 여러 차원을 염두에 두고 인간과 사회를 거시적으로, 총체성 속에서 이해해 보자는 것이 그의 중요한 메시지이다.
주경철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58) 객관성의 칼날-찰스 C 길리스피
객관성의 칼날-찰스 C 길리스피
갈릴레이에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서양 과학의 흐름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과학적 사상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지니고 있다.‘칼날’이라고 번역된 ‘에지(edge)’라는 단어는 칼날의 의미 외에 ‘경계’ ‘가장자리’라는 뜻도 지니는데 저자는 아마도 이 모든 의미를 함께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갈릴레이에서 근대과학이 태동한 이래 서양 과학의 발전 과정 전체를 ‘객관성’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연세계가 설명, 이해되고 그 경계가 규정되어 가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갈릴레이의 천문학과 역학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 책은 하비의 피 순환이론, 베이컨과 실험과학, 데카르트와 기계적 철학, 뉴턴에 의한 종합, 계몽사조와 과학, 라부아지에의 연소이론과 근대화학, 자연사, 진화이론, 열역학, 전자기학, 상대성이론을 다루면서 이어진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과학자, 사상가가 등장하고 수많은 과학 텍스트가 분석된다.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서양 과학의 역사상 수많은 과학자와 그들 저서의 내용 및 핵심 구절을 직접 대할 수 있다.
이 책은 학부 과정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 내용을 정리한 책으로서는 놀랍게도 아주 높은 수준에서 깊이 있는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갈릴레이의 낙하법칙이 얻어지는 과정을 갈릴레이가 남긴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첫 부분에서부터, 저자는 직접 텍스트의 분석을 바탕으로 갈릴레이의 사고과정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같은 과정이 천재적 영리함과 성공만이 아니라 오해와 좌절, 실패가 포함되는 긴 우회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결국은 운동에 대한 이해가 갈릴레이 같은 사람이 빼어든 ‘객관성의 칼날’을 통해 근대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것이 객관성이 승리하는 단순하고 논리적인 ‘당연한 과정’이 아니라 갈릴레이 개인의 상황이나 당시 과학자와 그들이 살던 사회의 여러 여건이 결합되어 진행된 복잡한 과정이었음을 보인 것이다.
그 이후의 장에서도 근대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했던 변화가 진행된 실제 과정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길리스피의 논의가 이어진다.당연히 직접 그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과학자가 남긴 텍스트가 분석되는데 그들이 단순히 책이나 사람의 이름으로 거론되는 것이 아니라 서양 근대과학의 핵심적 이론이나 변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그 주역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당시의 사회적, 사상적 배경이 설명된다.서양 근대과학의 역사상 중요한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던 것일까에 대한, 그리고 그 과정에 참여했던 과학자가 어떤 개인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사색이 개진되고, 독자는 저자와 함께 그 같은 사색을 해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딱딱한 과학 텍스트에 담긴 과학자의 생각의 흐름과 그것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지니는 의미를 저자 특유의 섬세하고 유려한 필치로 조망하는 이 책을 통해 독자는 근대과학 역사상의 중요한 변화가 그 어느 하나도 단순한 요인에 의해 한 가지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해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영식 서울대 교수·동양사학과=========================
(59) 당시선-이백(李白) 외
당시선-이백(李白) 외
중국을 흔히 ‘시의 나라’라고 한다.중국은 오랜 역사를 통해 방대하고 다양한 문화를 이루었는데, 그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것이 시라는 뜻이다.
현전하는 중국의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시경(詩經)’이다.
중국 문화의 남상(濫觴·모든 사물의 시발점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2500∼3000여 년 전 시가 수록되어 있으니, 중국의 역사는 시로써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또한 시를 짓는 능력이 관리 선발의 기준이었던 당대(唐代) 이후 청대(淸代)까지 거의 모든 지식인이 시를 창작했다는 점에서도 중국은 시의 나라라고 불릴 만하다.
수천 년 중국 시사(詩史)에 있어서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평가 받는 것이 당대에 창작된 시, 즉 당시(唐詩)다.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백거이(白居易) 등 여러 대가가 수많은 시를 지었는데, 이 중 명편들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중국의 시가 중국 문화의 정화(精華·뛰어난 부분)이고, 당시가 중국 시를 대표하기 때문에 중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당연히 당시를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당시는 그 양이 너무 많다.
청대에 편찬된 ‘전당시(全唐詩)’만 보더라도 시인의 수가 2000명이 넘고 수록된 시가 거의 5만 수가 되니 일반인이 이를 모두 통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여러 사람이 명편을 골라서 편찬하는 작업을 해 그중 대표성을 갖는 선집(選集)이 널리 보급됐다.
당시에는 여러 시인의 갖가지 정감이 표출되어 있다.몇 편을 예로 들어 보자.
이백이 봄날 달 아래서 혼자 술을 마시며 지은 시 ‘달 아래 혼자 술을 마시며’(月下獨酌)에는 절대 자유를 추구하다가 이루지 못한 천재의 고독감이 진하게 배어 있다.
두보가 전란의 참상을 보고 지은 시 ‘석호의 관리(石壕吏)’에는 위정자의 잘못으로 고통 받는 인민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지식인의 분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왕유가 대나무 숲에서 유유히 혼자 놀다가 밝게 비치는 달빛을 보고 지은 시 ‘죽리관(竹里館)’에는 담담한 마음으로 세계를 관조하려는 지향이 응축된 필치로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도 인간의 다양한 서정과 사상이 녹아 있어서, 이런저런 시를 읽다 보면 절로 한시의 세계 속에 빠져들게 된다.따라서 당시의 명편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선인이 삶 속에서 추구한 풍류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새삼 음미하게 해준다.
또한 기계문명과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정신세계의 가치를 잊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당시의 선집은 당대 이후 100종 이상이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선정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종류의 선집이 나와 있으니, 당시를 읽으려는 독자들은 이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서울대출판부에서 출간한 ‘당시선(唐詩選)’은 당대의 대표적 시인 50명의 작품 약 270수를 시기순으로 수록했다.선정한 작품에 대한 번역과 주해(註解)를 달고 해설을 곁들여 초보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이영주 서울대 교수·중어중문학과==========================
(60) 무정-이광수
무정-이광수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無情)’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간행됐다.이 소설은 식민지시대에 신소설이 빠져들었던 통속화 경향을 극복하고 근대소설의 서사적 속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 무정의 시대는 무엇보다도 개인에 대한 발견과 자아에 대한 각성이 요청된 시기이다.민족적 자기인식과 그 주체적 확립이 가능하지 않은 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문학이 자아에 대한 각성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자각과 각성에서 출발할 때에 민족 전체의 주체적인 자기 확립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소설 무정에서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개인적 운명의 양상이다.이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이형식과 박영채라는 두 인물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형식은 경성학교 영어 교사로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해 나아가는 선각자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고아의 신분이었지만 자신의 처지에 굴하지 않고 신교육을 통해 문명개화의 길을 열어간다.
박영채는 가계의 몰락과 함께 기생 신분으로 전락하지만, 이형식을 다시 만나기를 오랫동안 기다린다.
그러나 이형식이 이미 다른 여성과 혼약의 단계에 이른 데다 자신의 순결마저 잃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자 한다.
이 작품의 후반부에서 박영채가 자살을 포기하게 된 것은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동경 유학생 김병욱 때문이다.
박영채는 김병욱의 충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알아차린 후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 소설에서 서사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박영채의 변모과정은 가족의 붕괴와 신분적 몰락이라는 개화 공간의 사회적 격변과 맞물려 있다.
그녀는 사회적 변화와 가치의 혼란 속에서 빚어지는 개인의 운명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구시대의 질서가 붕괴되는 과정 속에서 운명적으로 강요된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게 된다.
그러나 문명개화의 이상을 따라 새로운 교육의 길을 택함으로써 재생의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소설 무정에서 볼 수 있는 자아의 각성과 개인의 발견은 현실에 근거하고 있는 개인의 존재와 그 인식을 중시하는 근대소설의 요건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하겠다.근대소설은 사회에 대한 개인의 관계를 개인의 운명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보여준다.
근대소설은 경험적인 세계 속에서 개인의 삶의 양상을 총체적으로 포착해 내는 것이므로, 자아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통해 개인의 삶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서 성립된다.
개인의 행동과 그 행동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조건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모습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때에 진정한 근대소설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소설 무정에서 그려내고 있는 개인의 자기 발견 과정이 반성적인 자기 각성의 단계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무정이 개인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권영민 서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61) 아함경-사캬무니 붓다 아함경-사캬무니 붓다
아함경은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 살았던 인물인 사캬무니 붓다가 45년간 그 제자들과 나눈 대화와 가르침을 모은 것이다.비유나 우화가 많이 등장하고 대화체로 써 있어 읽기 쉬워 보이지만, 내용은 삶의 조건과 질곡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해결책 등을 말하고 있어 무겁다.
그러나 붓다가 제자의 특성에 맞춰 난이도를 달리해 묻고 답한 것이므로 그 입장이 되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색해 가는 방식으로 읽으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책은 생로병사로 특징지어지는 삶을 고통이라고 본다.그 고통에는 원인이 있고 또 그것의 소멸, 즉 열반이라는 상태가 있다.
또 거기로 가는 방법이 있다.
이것을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라고 한다.
고통으로서의 삶이 열반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존재는 원인을 가지고 상관하는 관계, 즉 연기(緣起)의 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저것’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저것이 사라지면 ‘이것’도 소멸한다는 것을 알면 번뇌와 괴로움의 제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의 상관성에 대한 인식은 붓다가 새로 창안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존재하던 사실로서, 그는 지혜나 눈이 있는 자는 다 볼 수 있다고 말한다.진리는 경험으로 증험할 수 있어야 하고 특별한 신앙이나 능력을 가진 자만 알 수 있다면 이미 보편성을 상실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함경에는 붓다의 사상과 삶의 이야기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초기 교단의 모습, 즉 수행자의 공동체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불교는 남성과 여성 출가자 모두의 독립 교단을 인정하는 유일한 종교다.배경이 다른 사람이 모여 더불어 수행하며 살기 시작했을 때 계율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들 교단의 성원은 보름에 한 번씩 모여 참회하는 모임을 갖고 자진해서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 달라고 동료에게 청한다.
정해진 원칙에 따라 일방적으로 계율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문제를 실용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요즘 불교가 근대 문명에 대해 대안적 사고를 제공하는 것으로 관심이 증폭되면서 불교와 현대사회에 대한 관련성이 많이 논의되고 있다.네트워크의 시대가 오면서 연기사상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널리 확산되고, 거기에 드러나는 평화사상과 공생의 윤리 등이 마음의 행복, 전쟁과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지구, 환경과 생명에 대한 자비와 애정 등의 메시지로서 적극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인간, 세계, 우주를 잇는 유기적 세계관과 자연에 대한 존경이 문명의 위기를 걱정하는 지식인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아함경’에 대한 연구도 이른바 대승불교의 전통을 따르는 한국에서는 이것을 소승불교라 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일찍이 19세기부터 서양 불교학계에서는 팔리어 ‘니카야’를 번역하고 연구했다.현재 구미의 웬만한 대학에는 불교 강의가 개설되고 수백 명의 학생이 수강을 하고 있다. 아함경 한글 번역본은 완역본에서 축약본까지 수십 종이 시중에 나와 있다.
그중 ‘한글 아함경’(고익진 교수 편역·동국대 출판부)이 학술적이고 내용이 충실하며 ‘부처님 말씀’(성열 스님·현암사)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조은수 서울대 교수·철학과======================
(62) 신곡-단테
신곡-단테
2004년 11월 4일은 유럽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었다.이탈리아 로마에 모인 유럽연합(EU) 가입 28개국 국가원수들은 이날 대통령궁에서 EU헌법 초안에 서명했다.
이 헌법은 각국 국회나 국민투표를 거쳐 2006년 11월 1일에 발효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 화려한 행사가 교황청에는 참으로 씁쓸한 날이기도 하였으니, 유럽이 그리스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문구가 헌법 서문에 들어가야 한다는 교황의 끈질긴 주장을 유럽 정상들이 묵살하였기 때문이다.그들은 헌법 서문에 “유럽의 문화적 종교적 인문적 유산”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쳤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의 패권 다툼이 유럽 전체를 황폐하게 하던 중세에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정립한 인물이 다름 아닌 시인 단테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더불어 시성(詩聖)이라는 월계관을 쓴 이탈리아 시인 알리기에리 단테는 겔프당과 기벨린당의 정쟁으로 내란이 끊이지 않던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권위를 확립함으로써 유럽에 궁극적 평화의 기틀을 마련하려던 정치적 노력이 실패하자 역사의 지평을 넘어 세계사 전체를 종교철학의 시각으로 재정리하여 3부 100곡으로 이루어진 ‘신곡(神曲)’을 남겼다.
신곡은 단테라는 한 영웅이 육신을 입은 채로 지옥, 연옥(煉獄), 천국을 여행하는 종교적 서사시이다.
그가 탐험하는 명계의 처음 두 곳은 이성(理性)의 상징인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고 세 번째는 신앙(信仰)의 상징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는다.
단테가 아홉 살에 처음 보았고 18세에 다시 해후하였으나 딴 남자에게 시집가 불과 24세의 나이로 죽은 한 여인이 구원의 여성이 되어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
서사시는 “여기 한숨과 눈물과 드높은 통곡이 별 없는 하늘에 메아리치는” 지옥에서 시작하여 “나는 보았노라. 조각조각 우주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 한 권에 엮여 있는 것을. 그리고 만사를 한결같이 움직이는 바퀴와 같이 해와 별을 움직이시는 사랑이 돌리고 있더니라”는 천국으로 끝난다.
인류사가 인간의 의지와 신의 사랑이 엮어내는 승리의 기쁨 속에 완성된다는 낙관적 역사관을 보여준다.전의 중세인이 대자연(大自然)과 성서(聖書)라는 두 편의 책에서 인생과 신을 읽었다면 단테는 신과 인간이 함께 엮는 역사(歷史)라는 책으로 인생을 읽었다.
그래서 지옥의 멸망된 족속으로 드는 길은 인생과 자기 사회에 대한 역사적 태만과 해악이며, 실상 지옥은 인간 자유의지의 개별적 집단적 행사를 신이 영원히 존중함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정의는 내 지존하신 창조주를 움직이어 그 극한 지혜와 본연의 사랑이 나를 만들었으며 나는 영겁까지 남아 있으리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 온갖 희망을 버릴진저.” 그리고 “세계에서 세계로 이렇듯 내 길잡이의 자취를 따라 두루 찾게 해 주신 그 평화의 이름으로 나는 일을 하리라”는 시인의 동경대로 한반도에 평화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의 시집을 펴든다.
성염 주교황청 대사·전 서강대 교수==============================
(63) 방법서설-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중세 사상사가 끝나고 근대적 사유의 공간이 열리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을 상징한다.이런 대표성은 근대 유럽에서 모국어로 철학을 펼친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한다.
오래도록 상식화되고 자연화된 통념, 하지만 이제 그 역사적 타당성을 잃어버린 통념을 어떻게 부술 것인가?숱한 세월 속에서 그 무게를 더해온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지워버릴 것인가? 데카르트 철학의 일차적 의미는 이런 전환기의 물음에 부응하여 모범적인 해체론의 사례를 남겼다는 데 있다.
이 해체론은 어떤 길, 여정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그 이후의 어떠한 해체론과도 쉽게 구별된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나 ‘우화’의 형식에 실려 표현되는 개인적인 ‘나’의 여정이고, ‘아낙네’도 읽을 수 있는 평이한 문체의 일상어로 그려지는 내면적 발견의 여정이다.이 여정 속에서 저자는 자신을 ‘어둠 속을 홀로 걷는’ 단독자로 의식하고 있으며, 정신적 홀로서기에 이르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역사적 과거를 파괴하고 있다.
자신의 개인사를 자유롭게 재구성하고 멀리 이어가면서 중세의 기억에서 해방되는 원심력을 얻고, 마침내 근대성을 잉태하는 탈주의 궤적을 그려내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여정은 6단계로 이어진다.이 책의 1부에서 저자는 자신의 학문적 성장과정 속에서 체화된 과거의 학문을 비판하고 선별한다.
여기서는 과거의 주류 사상에 대한 환멸과 수학에 대한 감동이 좋은 대조를 이룬다.
2부는 모든 학문과 진리탐구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데, 여기서는 근대 과학의 창시자로서 저자가 지녔던 자부심이 드러나고 있다.
3부는 도덕인데, 이는 과학의 마지막 발전단계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완전한 실천학이 아니라 그런 국면을 기다리는 동안 좇아야 하는 ‘임시 도덕’이다.
4부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학문체계의 첫 번째 진리로 선언하는 간략한 형이상학적 성찰이다.이 성찰도 진리를 열망하던 정신이 회의주의자로 탈바꿈되고, 회의주의자였던 정신이 다시 진리의 존재론적 기원인 신과 세계를 재발견하는 개인적 회상의 길을 따른다.
5부는 저자가 자신의 방법을 통해 성취한 여러 과학적 발견의 대강을 서술한다.
끝으로 6부는 새로운 과학이 가속화할 역사적 진보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 이런 진보에 필수 불가결한 실험과 관찰에 지식인들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방법서설’의 첫 문장은 ‘이 세상에서 양식(良識)보다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은 없다’이다.데카르트는 이 문장을 통해 자신의 사유의 여정을 열면서 동시에 철학적 의미의 근대를 열어 제치고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정의되는 것처럼, 근대성은 이성의 자율적 사용 속에서 싹트고 열매 맺는다.
이 작품은 이성의 자율적 사용에 요구되는 조건과 방법에 대해, 또 그런 자율적 이성 사용이 약속하는 미래에 대해 처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사상사의 고전이다.나아가 이 작품은 모국어의 시대를 앞당겼을 뿐 아니라 일인칭 관점의 서사가 발휘하는 파괴력을 통해 철학사 해체론을 실천한 보기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인류 사상사의 기념비로 남을 것이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
(64) 연암집(연암산문선)-박지원
연암집(연암산문선)-박지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은 조선 후기의 문호이자 실학자다.우리나라의 한문학은 연암에 이르러 최고의 높이에 도달했다.
연암은 특히 ‘산문’을 잘 쓴 것으로 유명하다.
연암은 한유나 소동파 등 중국의 위대한 산문작가와 견주어 봐도 전연 손색이 없다.
연암은 10대 후반에 이미 작가로서의 천재성을 드러냈다.‘마장전’ ‘민옹전’ ‘광문자전’ 등 이른바 ‘9전(九傳)’에 해당하는 작품 대부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 사이의 시기에 창작되었다.
‘9전’이 청년 연암의 뜨거운 파토스와 예리한 비판의식, 풋풋한 감수성을 보여준다면, 30대에 쓰여진 산문은 삶과 세계에 대한 더욱 깊은 성찰과 응시를 보여준다.
연암은 이 시기에 지독한 가난과 함께 가까운 가족과의 사별을 경험했으며, 커다란 경륜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판적 자세로 인해 당대의 지배질서 밖에서 소외된 지식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바, 이러한 체험과 역정이 그의 산문에 놀라운 깊이를 가져다 준 것으로 보인다.‘큰누이 묘지명’이라든가 ‘술에 취하여 운종교를 밟은 일을 기록한 글’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글이다.
한편 연암은 이 시기에 실학적 사고를 발전시켜 갔으며, 춘추대의의 명분에 사로잡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깔보면서 ‘자고자대(自高自大·스스로를 최고이며 위대하다고 여기는 태도)’의 미망에 빠져 있었던 당대의 조선 사대부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중국의 선진문명을 배워 조선 백성의 삶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그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이다.
30대에 이룩된 연암의 이런 생각은 40대에 창작된 ‘열하일기’에 아주 잘 구현되어 있다. 연암은 이 ‘열하일기’를 통해 조선 사대부의 허위의식과 편견 및 고루함을 조소하였다.그렇기는 하나 흔히 오해되고 있듯이 연암이 이 책에서 선진 중국문명 따라 배우기만 역설한 것은 아니다.
연암은 동시에 ‘나’가 아닌 ‘타자’로서의 중국을 정당하게 관찰하고 인식하려는 노력을 이 책의 도처에서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연암은 조선의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주체적 입장에서 중국을 인식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연암의 산문은 마치 입신의 경지에 든 도공이 빚어 놓은 도자기처럼 물샐틈없이 삼엄한 완정미를 보여준다.그의 글은 대단히 창의적이며, 풍부한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반성력과 자기응시를 보여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창조적인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 더 나아가 나라와 백성에 대한 선비로서의 경세적 책임감을 견결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연암은 우리나라 고전문학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언어의 마술사였다고 이를 만하다.연암만큼 언어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 집요하게 물으면서 상투성과 진부함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해방시켜 사물 자체에 다가가게 만들려고 노력한 작가도 아마 없을 터이다.
이 점에서 그는 ‘대문호’라고 불릴 만하다.
연암의 산문은 고도의 미학적 정련을 보이고 있어 한글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번역이나 해석에는 틀린 것이 퍽 많다.하지만 최근 간행된 신호열 김명호 두 분이 공역한 ‘연암집’만큼은 전적으로 신뢰할 만하다.
박희병 서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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