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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新고전50권>1~50<동아일보>
    논술(설.문)독서도서詩소설수필연설 2005. 8. 10. 08:07


    <동아일보>21세기新고전50







    21세기 신고전 50권 목록
    도서(저자) 추천인
    우연과 필연(자크 모노) 박이문(연세대 특별초빙교수·철학)
    삐딱하게 보기(슬라보예 지젝) 전영백(홍익대 교수·서양미술사)
    호모 루덴스(J 호이징가) 김명곤(국립극장장)
    사회정의론(존 롤스) 박순성(동국대 교수·경제학)
    말과 사물(미셸 푸코) 서현(한양대 교수·건축학)
    노장사상(박이문) 표정훈(출판평론가)
    에로티즘(조르주 바타유) 장일범(음악평론가)
    여성주의 철학(앨리슨 재거) 장필화(이화여대 교수·여성학)
    공론장의 구조변동(위르겐 하버마스) 조대엽(고려대 교수·사회학)
    피상성 예찬(빌렘 플루서) 진중권(중앙대 겸임교수·미학)
    성서 밖의 예수(일레인 페이젤) 장석만(옥랑문화연구소장·종교학)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최순우) 이원복(국립광주박물관장·한국회화사)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오주석) 김형국(서울대 교수·도시계획학)
    천년 궁궐을 짓는다(신응수) 김정동(목원대 교수·한국건축사)
    이중섭 평전(고은) 최병식(경희대 교수·예술철학)
    청일전쟁(천순천·陳舜臣) 한명기(명지대 교수·한국사)
    공간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 진형준(한국문학번역원장·불문학)
    문학이란 무엇인가(유종호) 박철화(중앙대 교수·불문학)
    씰크로드학(정수일) 박진호(문화재 디지털복원 전문가)
    육식의 종말(제러미 리프킨) 김준목(안티꾸스 대표·고서 전문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조지프 슘페터) 박찬희(중앙대 교수·경영학)
    숨겨진 힘(제프리 페퍼) 구본형(변화경영 전문가)
    자기 조직의 경제(폴 크루그먼) 김균(고려대 교수·경제학)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짐 콜린스) 공병호(미래경영연구가)
    변모하는 산업사회(피터 드러커) 이상만(고양문화재단 총감독)
    노예의 길(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복거일(소설가)
    이중나선(J D 왓슨) 권오길(강원대 교수·생물학)
    숲의 서사시(존 펄린) 전영우(국민대 교수·산림학)
    최초의 3분(스티븐 와인버그) 임경순(포항공대 교수·과학사)
    지식의 원전(존 캐리) 이갑수(궁리출판사 대표)
    코스모스(칼 세이건) 이은희(과학 칼럼니스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김형찬(고려대 교수·한국철학)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이어령) 한젬마(화가)
    농담(밀란 쿤데라) 유종호(연세대 특임교수·영문학)
    금각사(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김병종(서울대 교수·화가)
    아르떼미오의 최후(카를로스 푸엔테스) 송병선(울산대 교수·중남미문학)
    임꺽정(홍명희) 서하진(소설가)
    플로베르의 앵무새(줄리안 반즈) 김연수(소설가)
    대머리 여가수(외젠 이오네스코) 하일지(동덕여대 교수·소설가)
    오만과 몽상(박완서) 방민호(서울대 교수·국문학)
    신동엽 전집(신동엽)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이명옥(사비나미술관장)
    드리나강의 다리(이보 안드리치) 한애규(조각가)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 서지문(고려대 교수·영문학)
    상도(최인호) 조운호(웅진식품 대표)
    고요한 돈강(미하일 숄로호프) 최원식(인하대 교수·국문학)
    한밤의 아이들(살만 루시디) 황종연(동국대 교수·국문학)
    레미제라블(빅토르 위고) 최종태(조각가)
    도덕경(노자) 나희덕(조선대 교수·시인)
    관촌수필(이문구) 박찬욱(영화감독)
     

     

     

     

    '21C 신고전 50권’ 소개 /흥미롭고 참신한 현대고전의 바다로…‘
     
       

    좀 더 흥미롭고 좀 더 참신한 고전을 찾아서…21세기 고전의 개념을 바꾼다.’




    동아일보가 창간 85주년을 맞아 펼치고 있는 ‘책 읽는 대한민국’ 기획의 하나로 8일부터 ‘21세기 신(新)고전 50선’ 시리즈를 시작한다.



    4월부터 7월 말까지 연재했던 ‘서울대 권장 도서 100권’에 이어 두 번째 기획으로 마련한 것이다.



    선정된 책들은 50회에 걸쳐 매일 한 권씩 본보 지면을 통해 소개된다.




    이번 시리즈는 급변하는 21세기 시대 상황에 걸맞게 참신하고 도전적인 시각을 갖춘 책을 선정한다는 대전제 아래 기획됐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청소년과 성인 독자들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 동시에 세월이 흘러도 유행에 좌우되지 않고 여전히 고전의 반열에 머무를 수 있는 명작들을 선정하고자 했다.



    50권의 새로운 고전은 각 분야 전문가 50인에게서 추천받은 것이다. 본보는 ‘21세기 신 고전 50선’ 기획팀을 구성한 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알려진 각계 인사 50인을 선정해 각각 두세 권의 후보작을 추천받았다.


    이어 기획팀은 추천인들과의 협의를 거쳐 1인당 한 권으로 추천서를 압축했다.





    선정 과정에서 무게를 둔 기준은 △가능한 한 20세기 후반에 출간된 책을 대상으로 하고 △21세기에 시사점을 주어야 하며 △내용이 흥미롭고 신선해 젊은 층에도 호소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선정된 50권은 대부분 1950년대 이후 출간된 것으로 인문 사회 자연과학과 문학 교양 예술 등 다양한 장르를 망라하고 있다.


    학자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화가, 기업가, 작가 등 여러 분야 전문가들에게서 추천을 받아 선택 범위를 확장했으며 현실 적합성도 높였다.


    선정도서 중 노자의 ‘도덕경’,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등은 출간 시기는 이르지만 21세기에도 주목해야 할 책으로 꼽혀 ‘신고전’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이번에 소개되는 50권이 이 시대 새로운 고전 목록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50권을 통해 20세기부터 21세기 현 시점까지를 관류해 온 변화의 커다란 물줄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일보>21세기新고전50권시리즈를 마치

    입력 2005-10-12



         

    동아일보가 ‘책 읽는 대한민국’ 캠페인의 2부로 8월 8일부터 시작한 기획시리즈 ‘21세기 신고전 50권’이 11일 막을 내렸다.



    이번 기획의 취지는 ‘젊은 고전’을 발굴 소개함으로써 ‘즐거운 책 읽기’의 분위기를 높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리타분한 고전이 아니라 1950년대 이후에 출간된 참신하고 흥미로운 내용의 명저(名著)를 주로 선정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50인에게서 추천받고 서평을 받은 것이나 인문 사회 자연과학 교양 문학 예술 등 장르를 망라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독자와 독서 전문가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최순우 지음)의 추천자 겸 서평 필자였던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은 “다방면의 근작들로 구성돼 도움이 많이 되고 즐거웠다”면서 “매일 아침 이 코너를 찾아 읽는 독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서평에는 추천자 및 필자의 개인적 체험이 녹아 있어 독자들의 글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필자들이 감동을 받았거나 삶의 지표가 되었던 책들이었기에 그 감동과 체험이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될 수 있었다.  




    ‘신동엽 전집’(신동엽 지음)을 추천하고 서평을 쓴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신동엽은 내 젊음 그 자체였다”면서 “고전에 대한 엄숙함을 벗어버리고 한 개인의 체험과 연결된 흥미로운 책들을 통해 독자들과 그 체험을 공유함으로써 책 읽는 재미와 의미를 배가시켜 주었다”고 말했다. 




    논술 공부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청소년과 학부모들의 e메일도 많이 왔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의 책이 많이 소개돼 청소년들의 탐구욕을 자극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출판시장 활성화에 도움이 됐다는 반응도 있었다. ‘성서 밖의 예수’를 출간한 정신세계사는 본보에 e메일을 보내 “신고전에 선정되자 책을 찾는 독자가 부쩍 늘어 책을 다시 찍어내느라 바빴다”고 전했다.



     

    21세기 新고전 50권 목록(게재순)
    도서저자
    우연과 필연자크 모노
    농담밀란 쿤데라
    노예의 길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조지프 슘페터
    금각사미시마 유키오
    공론장의 구조변동 위르겐 하버마스
    피상성 예찬-매체현상학을 위하여빌렘 플루서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오주석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노장사상박이문
    공간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아르떼미오의 최후카를로스 푸엔테스
    최초의 3분스티븐 와인버그
    문학이란 무엇인가 유종호
    고요한 돈강미하일 숄로호프
    이중나선구조 프랜시스 크릭
    드리나강의 다리이보 안드리치
    육식의 종말제러미 리프킨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이중섭 평전고은
    삐딱하게 보기슬라보예 지젝
    숲의 서사시존 펄린
    청일전쟁천순천(陳舜臣)
    성서 밖의 예수 일레인 페이젤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1>우연과 필연-자크 모노


    세계관은 우주의 인식 양식인 동시에 우주의 지도이다. 선장이 바다 지도 없이 항해할 수 없고, 군인이 일선지역의 군사지도를 갖추지 않고서는 전투를 제대로 해낼 수 없듯이 인간은 우주의 지도에 해당되는 세계관을 갖추지 않고서는 제대로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어떤 시대의 어떤 문명, 어떤 인간이고 나름대로의 다양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 그런데 바로 세계관의 다양성이 문제가 된다.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된 사이버 시대의 오늘날에도 인류의 모든 공동체 및 개개인이 공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보편적 세계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의 의인적 세계관은 과학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충돌하고, 과학에 전제된 유물론적 세계관은 철학적 관념론에 전제된 인간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세계관과 공존할 수 없으며, 생명과 인간의 근원에 관련하여 창조론과 진화론이 정면충돌한다. 우주 전체의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실체의 다양한 양상으로 보는 일원론적 세계관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 간의 단절을 인정하는 이원론적 세계관과 공존할 수 없고,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은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의 인과적 세계관과 대립한다.

    196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자크 모노의 저서 ‘우연과 필연’은 바로 위와 같은 세계관들 간의 갈등의 맥락에서 철학적 주목을 끈다. 그의 저서의 내용은 특정한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대한 철학적 세계관이다. 그는 기존의 세계관들에 대한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검토를 통해 과거의 신화, 종교 및 철학적인 세계관들을 몽땅 비판한다. 또 그것들을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 자신의 첨단과학 지식에 근거한 자신의 세계관을 제안한다.

    그는 헤겔류의 관념철학에는 물론 마르크스류의 유물철학에도 잠재해 있는 물활론적, 의인적 그리고 목적론적인 이원론적 우주관과 창조론적 인간관을 맹렬히 비판하고 그것을 물리적, 탈의인적, 그리고 탈목적론적 일원론적 우주관과 진화론으로 대치한다. 그는 우주 안의 모든 현상이 인과법칙에 의해 설명된다 해도 그러한 인과법칙은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언뜻 보기에 ‘반과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과율에 지배되지 않은 우주철학’을 주장한다.

    그의 세계관에서는 물질로부터의 생명의 탄생, 동물과 인간의 관계, 진리의 본질, 인간의 자유의지와 진선미에 대한 의식은 한결같이 우연의 산물로 나타나고, 그것들의 가치는 생물학적 뿌리와 그것들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된다. 내가 알 수 있는 한 모노의 세계관보다 더 종합적이고 더 설득력을 갖춘 세계관을 나는 아직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것이 내가 ‘우연과 필연’이 철학적 고전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 근본적 이유이다.

    모노의 저서의 가치는 그의 이론적 성취에 끝나지 않는다. 그가 영원한 침묵을 지키는 방대한 우주와 그 한복판에서 인간과 지구의 운명이 걸려 있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신의 지혜에 비추어 어떤 행동을 혼자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고독한 인간의 조건을 언급할 때, 그는 이론적 과학자도 사념적 철학자도 묵시록적 종교인도 아닌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실존주의적 시인이다.


    박이문 연세대 특별초빙교수 철학


    <2>농담-밀란 쿤데라

     

    ‘농담’은 밀란 쿤데라의 첫 장편이다. 1967년에 체코에서 발간된 것으로 알려진 이 장편이 실제로 탈고된 것은 1965년 12월의 일이다.

    공산주의 체제 이후 20년간의 사회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실주의 소설이란 비평적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7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네 사람의 화자가 등장해 작품이 진행되며 넓은 의미의 모더니즘 소설이라 하는 편이 적절하다.


    나치 수용소에서 죽은 벽돌공의 아들인 루드빅은 혁명에 동참한 첫 세대이다.

    스무 살 대학생인 그는 한 살 아래인 마르케타와 친구 사이면서 그녀를 좋아한다.

    그런데 마르케타는 방학 때 당의 교육 연수에 참여하게 된다. 단둘이 프라하에 남아서 그녀와의 관계를 진척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던 루드빅에게는 실망이었다.

    농담을 이해 못하고 매사에 진지한 마르케타는 연수에 열심이었고 건전한 분위기가 연수장을 지배하고 있으며 서양에서 혁명은 이제 지척에 와 있다고 적어 보낸다. 농담을 즐기는 루드빅은 그녀에게 농담조의 엽서를 보낸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분위기는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빅.”


    이 엽서가 빌미가 되어 루드빅은 당에서 제명되고 학업도 계속할 수 없게 된다. 죄과를 시인하면 끝까지 곁에 있어 주겠다는 마르케타의 제의를 거절한 루드빅은 그녀마저도 잃게 된다. 군에 소집되어 정치범임을 알리는 표지를 달고 광산 작업에 동원된다. 군복무 중 그는 루치에란 여성을 열렬히 탐하지만 성적 접근을 거부당한다. 루치에와의 만남의 모티브는 작품에서 숨 막히는 박진감으로 처리돼 있다.


    15년 후 루드빅은 자기를 제명한 회의의 의장이었던 제마넥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내 헬레나를 유혹한다. 그러나 유혹에 성공한 후 그녀가 남편과 사실상 결별 상태라는 것을 알고 다시 고배를 마시게 된다. 결별을 선고받은 헬레나는 시위성 자살 소동을 벌이는데 변비약을 먹고 변기 위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라블레적인 웃음을 촉발한다. 모라비아 지방의 민속음악 연주 장면으로 소설은 끝나고, 루드빅은 ‘증오의 대상 제마넥을 쓰러뜨리려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 귀향이 결국은 땅에 쓰러진 내 친구를 두 팔에 안고 있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전율하였다’.

     

    첫 번째 프랑스어판이 나왔을 때 루이 아라공은 이 책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라고 격찬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규탄이라는 반응에 대해서 쿤데라는 ‘농담’은 사랑의 얘기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묘지에서 꽃을 훔쳐 애인에게 선물로 준 소녀를 체포한 실제 사건에 영향을 받아 작품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전체주의에 대한 신랄한 규탄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현상학이라고 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은 본시 아이러니의 예술이어서 진실이 은폐되어 있다는 쿤데라의 소설관을 잊어서는 안 된다.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빈번해지는 짤막한 ‘소설적 사고’도 이 책의 중요한 매력이다. 쿤데라의 또 다른 대표작들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불멸’의 매력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특히 주제나 기법 면에서 ‘농담’은 20세기만이 생산할 수 있는 20세기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유종호 연세대 특임교수 영문학


    <3> 노예의 길-프리드리히 하이에크

     

     

    20세기 전반은 전체주의가 득세한 시대였다.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고 이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민족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 정당들이 집권했다.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은 전체주의의 성격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럴듯한 외양에 매료됐다.

    공산주의는 ‘인류의 미래’로 일컬어졌고, 민족사회주의는 퇴폐한 자유주의 문명의 대안으로 여겨졌다. 소수의 자유주의 지식인들만이 전체주의가 문명사회에 제기하는 심각한 위협을 지적했다.

    특히 전체주의의 본질을 규명해 자유주의를 지키는 데 두드러진 공헌을 한 이가 오스트리아의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다. 1944년에 발간된 그의 저작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은 전체주의의 성격과 위협을 유창하게 설명한 고전이다.

    그는 먼저 전체주의가 내세우는 ‘계획경제’가 개인의 자유를 앗아가고 모든 권력을 소수의 ‘계획자들’에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무릇 사람들의 관심과 지식은 그들의 삶에 직접 관련된 일들에 국한되므로, 어떤 사회적 논점에 대해 상당한 지식과 뚜렷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아주 드물다. 따라서 쉬지 않고 나오는 논점에 대해서 시민의 합의를 구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계획에 참여한 소수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결정을 계획에 반영하게 된다.

    권력을 쥔 소수의 이런 일방적 결정은 당연히 다른 시민의 의견이나 이익과 부닥친다. 그러나 ‘계획자들’은 그런 시민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 사회의 운영에 필요한 계획은 방대한데 이익과 생각이 다른 시민의 뜻을 받아들이면 일관성 있는 계획을 세울 수가 없다. 그래서 뜻이 다른 시민도 계획자들의 결정을 따르도록 강요된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가 처음부터 드러내 놓고 권위주의적이었음을 일깨워 준다. 현대 사회주의의 바탕을 놓은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자신의 이념과 정책이 전제적 정부에 의해서만 실행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역사는 그런 공언이 정확했음을 보여 주었다.

    이어 하이에크는 파시즘, 나치즘과 같은 민족사회주의의 뿌리가 사회주의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당시엔 많은 사람이 민족사회주의를 ‘우파’로 여겼다(불행하게도 이런 오류는 아직도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심각한 오류는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는 보루라고 선전한 데서 비롯했고, 제2차 세계대전 뒤 소련의 선전기구에 의해 조장되었다.

    그러나 민족사회주의는 사회주의에서 나왔고 공산주의와 민족사회주의 사이엔 이념과 정책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 둘 다 자유주의 이념과 자본주의 체제를 전체주의 이념과 계획경제 체제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민족사회주의 지도자와 추종자들은 원래 극렬한 사회주의자였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선 전체주의의 조류가 부쩍 높아졌다. 그러나 전체주의적 요소들을 실제로 판별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 지식을 얻는 데 반세기 전에 씌어진 ‘노예의 길’보다 나은 책은 드물다.


    복거일 작가




    <4>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치수가 작은 옷을 입은 것처럼 삶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 단 한 벌뿐인 인생이 싸구려 기성품처럼 여겨질 때, 마음의 지퍼를 열어 꽉 졸라맨 감정을 해방시키고 싶을 때, 독자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걸작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라.

    빼어난 고전들을 단숨에 제쳐 두고 이 책을 강력 추천하는 까닭이 있다. 바로 주인공 조르바가 현대인들의 신흥 종교인 참살이(웰빙)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영혼을 지녔으며, 천연의 감정을 들판에 방목해 인생을 살찌운 건강형의 표본이다.



    이른바 조르바형 인간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킬 만큼 파격적인 인생관을 제시한 그!

    그렇다면 조르바식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책장을 펼쳐 보자.

    ‘확대경으로 물속을 들여다보면 벌레가 우글거려요. 자, 흉측한 벌레 때문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을 확 부숴버리고 물을 마시겠소?’

    혹은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쪽 손가락이 자꾸 거치적거리지 않겠어요? 그래서 도끼를 내리쳐 잘라버렸어요.’



    자신의 욕망에 걸림돌이 된다면, 설령 소중한 손가락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인간! 즉 본능에 채워진 족쇄를 자유롭게 풀어버린 사람이 곧 조르바형 인간인 것이다.

    책에는 조르바와 대조되는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조르바가 ‘두목’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그는 정신을 육체보다 우위에 두는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는 이성으로 재단한 인생만이 진실한 삶이라고 여긴 나머지 퇴화된 본능과 감각을 복원시킬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러나 진화된 그의 육신에도 원시형 인간이 둥지를 틀고 있었던가.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다. ‘나는 조르바가 부러웠다. 내가 펜과 잉크를 통해 배우려 했던 것을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살아오지 않았는가.’ 주인공의 뼈아픈 탄식은 책을 읽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염된다.

    대체 왜 우리는 조르바처럼 삶에 다걸기(올인)하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자신이 무엇을 갈망하는지조차 모르는 인생 맹(盲)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서 혹은 너무 쉽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을 전혀 공부하지 않는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가 바라는 삶이 진짜 인생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허깨비 삶을 살아간다. 여기 조르바식 삶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또 하나의 삶이 있어 독자에게 소개한다.

    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에 나오는 주인공의 삶이다.



    부유한 미남에 아름다운 애인까지 생긴 청년에게 끔찍한 불행이 닥친다. 청년은 처참한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흉측한 몰골로 변했건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실을 거부한 채, 자신의 실체를 직시하는 용기 대신 허구의 인생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조르바식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

    너무나 친숙해서 오히려 낯선 내면의 자아와 친해지기, 병든 혈관에 자연의 생명력을 수혈하기, 간절히 원한다면 뜸들이지 않고 즉각 행동하기.

    이것이 바로 조르바형 인간으로 변신하는 비결이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국민대 겸임교수



             

    <5>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조지프 슘페터

     

     

    흔히 ‘혁신’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조지프 슘페터(1883∼1950)는 자본주의와 기업가를 찬미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오해가 ‘혁신’을 우아하게 꾸미는 데 쓰일 뿐이다. 그는 기업가의 혁신을 경제의 성장과 변화의 원동력으로 생각했지만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서는 냉정한 입장이었다. 자본주의는 몰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나름의 장단점을 가진 제도적 대안이며 객관적 분석의 대상이다. 1942년 발간된 이 책의 도입부에서 그는 마르크스의 경제관과 사회관이 갖는 호소력을 (논리적 오류에 대한 검토와 함께) ‘못 가진 이들에겐 희망과 자기만족을, 지식인에겐 세상을 한 손에 쥔 뿌듯함’을 준다고 정리하고 있다. 이 말처럼 이 책엔 대중과 지식사회에 대한 그의 냉소적 태도가 담겨 있다.

    슘페터는 이 책에서 일련의 저작에서 제시해 온 논점들을 쉽게 정리해 준다. 자본주의 체제는 늘 변화하며 이는 기업가의 창의적 혁신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진정한 경쟁은 새로운 제품과 기술, 조직의 형태 등 경쟁 우위를 위한 것이며, 독점구조나 이익은 혁신의 결과이자 유인인 면도 있다.

    그러면 자본주의는 왜 몰락하는가? 체제를 타도하려는 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맞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체제의 핵심인 혁신적 기업가는 무력해진다. 관료화한 경영진은 피고용인에 불과하고, 각종 기구가 기업가적 결정을 대신 한다. 주주가 기업의 주인인지도 애매하다. 부르주아는 직접 무력과 통치권을 갖지 못한 전례 없이 취약한 지배층이다.

    이에 반해 체제를 타도해서 행복할 사람은 많다. 가난을 세상 탓으로 돌리고 싶은 사람은 많으니 대중적 조작과 선전이 먹힐 수 있다. 자신의 지위가 기존 권위에 대한 비판에서 온다는 것을 아는 지식층은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데, 대중매체의 등장은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놀랍게도 이런 정서는 정부 관리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막상 부르주아는 태생적으로 내 일이 아니면 눈을 감는 ‘합리적인’ 사람들이고, ‘자유’는 부르주아 스스로가 주장했던 가치이기도 하니 자승자박이다. 결국 자본주의의 성취가 낳은 사회적 상부구조로 인해 몰락하는 것이다. 슘페터는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 모습을 정의하고 몇몇 전환과정의 과제들이 해결된다면 이것이 실제 운영될 수 있으며 민주적 정치제도의 주요 요소와도 결합할 수 있음을 보였다. 다만 그에게 있어 러시아 혁명은 제반 조건이 결여된 상태의 폭압적 과정일 뿐이다.

    과학적 결정론의 시대에 ‘인간의 동기와 행위’를 경제의 동태적 변화 주체로 인식하고 이를 제도적 분석과 연결한 슘페터의 연구는 미시적 기반을 강조한 최근의 거시나 발전론의 연구로 계승되고 있으며, 진화론적 접근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과연 슘페터가 틀렸는가? 뻔한 말도 포장만 바꾸면 ‘첨단의 혁신’이 되는 곳에 창조적 파괴는 없다. ‘블루오션’은 슘페터의 혁신과 무엇이 다른가? 세상을 바꾸는 노력보다 말과 글이 앞서고, 이것이 세상에 대한 분노와 만나는 그런 사회체제는 무력한 것이다. 2005년 한국이야말로 슘페터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원제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1942년).

    박찬희 중앙대 교수 경영학



    <6>금각사-미시마 유키오

     

     

    어느새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충격적이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 하얀 천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군살 한 점 없이 탄탄한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낸 채 발코니 아래 운집한 군중을 향해 무어라 부르짖던 모습. 그리고 무릎을 꿇고 짤막한 칼로 자신의 배를 가르던 미시마와 그의 등 뒤에 서있던 한 청년이 긴 일본도로 그의 목을 내리치던 순간.

     

    우리나라의 신문과 방송은 연일 그에 관한 뉴스를 토해내며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났다고 우려했지만 감수성 예민한 문학소년이었던 내게는 도쿄(東京)대 출신인 이 소설가의 엽기적인 죽음이 황홀경으로 다가왔다.

    혼자 방에 누워있을 때면, 함박눈처럼 분분히 날리는 벚꽃 사이로 금빛 사원이 장엄하게 불타오르는 풍경이 그의 마지막 얼굴과 겹쳐지곤 했다. 한창 일본 문학에 빠져있던 나는 그때 막 다사이 오사무,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거쳐 미시마의 ‘금각사’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금각사’를 읽은 것이 할복사건 이전이었는지 직후였는지는 분명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나가 눈에 뜨이는 일본문학을 통째 사들이고 있었다. 그때가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문학 자체보다는 요즘 아이들이 연예인에 몰두하듯 일본문학의 아우라를 쫓아다녔던 것 같다.

    그 후 노벨상을 받은 가와바타마저 자살하면서 나는 어렴풋이나마 일본문학 속에 흐르는 죽음과 소멸의 미학 같은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들의 죽음은 어떤 행위예술처럼 다가왔고 자신의 문학과 생명을 한순간 혼연일체로 이루어내는 듯한 퍼포먼스에 어린 나는 매료되었던 것이다. ‘금각사’에서도 미(美)와 추(醜), 그 대척점에 있는 의미들이 소멸을 통해 마침내 하나의 점으로 겹쳐진다.

    ‘…달은 후도야마 밖에서 떠올랐다. 금각은 뒤쪽에서 달빛을 받아 어둡고 복잡한 그림자를 첩첩이 접은 채 차분히 도사리고 있고 구쿄초 화두창(華頭窓)만이 달의 미끄러운 그림자를 받아 넘기고 있었다….’

    이 몽환적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금각사에 방화를 하는 말더듬이 청년 승려인 ‘나’는 금각을 불태워버림으로써 그 아름다움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소설을 읽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금각사를 실제로 볼 수 있었다. 그 인공미의 극치인 금박 입힌 사원을 보는 순간 어릴 적 ‘금각사’를 읽은 후 품고 있었던 환상이 통째 무너져 내렸다. 현실 속의 금각은 내 마음속에 각인된 금각사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금각사 뜰을 거닐며 문학의 어제와 오늘, 그 무게와 깊이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보았다. 교토의 금각사와 미시마의 ‘금각사’. 문학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삶의 비의를 이윽고 드러내는 것.

    이 글을 쓰려고 서재에서 책을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노랗게 삭아 내릴 듯한 종이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묵은 세월의 냄새가 물씬 풍겼지만 그의 탐미적인 문장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요즈음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일본문학과는 확연히 다른 강렬함이 있었다. 미시마는 아름다움의 정점에서 아른거리는 소멸의 유혹을 작품과 자신의 몸을 통해 완성한 독특한 작가였다.

    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


    <7>공론장의 구조변동-위르겐 하버마스


    지난 세기말 세계적으로 나타난 정치사회 변동의 진원은 각국의 ‘시민사회’였다.

     

    서구 중심부에서의 복지국가 위기와 동유럽에서의 사회주의 국가 실패, 나아가 주변부에서의 권위주의 국가에 대한 저항 등은 국가주의에 대한 시민사회의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거대 전환의 사회 변동을 알리는 이러한 변화는 ‘시민사회론’을 사회과학의 핵심적 화두로 부활시켰다.

    이즈음 오래 잊혀졌던 한 권의 저술이 새롭게 주목받았다. 물론 학술적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62년에 출간됐던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이 1980년대 이후 세계적인 사회 변동과 함께 재발견되는 데는 약 3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공론장(公論場)’은 여론이 형성되는 사회적 영역으로 사적 영역에 속하지만 공권력의 영역으로서의 ‘국가’와 사적 영역으로서의 ‘사회’를 매개하는 범주로 설정된다.

    따라서 공론장은 시민사회의 본질이자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후기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은 초역사적 선험적 비판주의의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초기 저술인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이처럼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현실적 내용에 주목함으로써 ‘공론장’을 시대 유형적 범주로 분석하기 때문에 다분히 경험적이고 역사적이다.

    이 책은 중세의 봉건적 권력을 구성하는 귀족들의 궁정문화에 주목해서 이를 인격적, 과시적인 공공성으로 보고 이와 차별적인 부르주아 공론장의 등장을 포착한다.

    모두 7개의 장으로 구성된 내용의 전반부는 공론장을 구성하는 제도적 요소와 정치적 기능, 이념 및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분석함으로써 공론장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보여 주고 있다.

    후반부에는 이러한 부르주아 공론장의 붕괴 혹은 왜곡의 과정을 사회적 구조 변동과 정치적 기능 변화라는 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부르주아 공론장의 발생과 구성에 대한 논의를 기초로 공론장의 쇠퇴에 대한 비판이론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왜 부르주아 공론장의 쇠퇴인가? 18세기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인 사회 영역의 형성 과정에서 부르주아 공론장은 살롱과 클럽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토론문화와 인쇄물의 보급에 따라 ‘문예적 공론장’이 확산되고 이는 ‘정치적 공론장’으로 발전했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은 권력에 구속되지 않고 비판적 이성과 합리적 토론으로 형성되는 해방적 공간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공론장의 순수성은 무엇보다도 ‘사회의 국가화’에 따른 국가 권력에 의해 훼손된다.

    다른 한편 공중은 문화를 토론하는 주체가 아니라 문화를 소비하는 대중으로 전락함으로써 대중 매체에 다시 침탈된다. 후기의 저작에서 이른바 ‘생활세계의 식민화론’으로 세련되게 다듬어지는 이 대목은 루카치의 ‘물화론’이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의 잔영을 보게 한다.

    우리 시대에 소통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반면에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은 더욱더 정교하게 공론장을 위협하고 있다. 오늘 토의민주주의가 절실하고 합의의 정치가 긴요한 한국의 현실에서도 이 책은 우리 정치문화의 ‘주관주의적 함정’을 성찰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8>피상성 예찬-빌렘 플루서

     

     

    “왜 우리는 ‘가상’을 불신하는가? 가상이 기만을 한다면, 이 세상에 기만하지 않는 것도 있단 말인가?”

     

     

     

    ‘피상성 예찬’에서 빌렘 플루서가 던지는 물음이다. 플라톤 이래로 철학자들은 참된 현실을 가상이라는 거짓의 침입으로부터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디지털 문명은 이 전통적 패러다임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 가상은 현실이 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의 아바타를 꾸미는 데에 현실의 돈을 지급하고, 거금으로 사이버 섬을 구입하여 사업을 구상하고, 만화 영화 속의 건축물을 지어주는 건설회사도 있다. 아니, 이전에 우리의 일상을 채워 온 모든 제품들을 보라. 그 역시 언젠가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던 상상이 밖으로 나와 현실이 된 것이 아닌가.

     

     

     

    반면 현실은 가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플라톤 자신도 현실은 가상이며, 참된 현실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했다. 데모크리토스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현실이 가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허깨비에 불과하고, 진정한 실재는 ‘원자’라고 했다. 세계란 원자의 배열이 우리의 감각에 만들어낸 가상이라는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 위의 영상들은 점멸하는 픽셀(pixel·picture element·화소)이 만들어낸 가상이다. 그럼 모니터는 어떤가? 키보드는? 아니, 그것을 두드리는 내 손은? 현대과학은 세계의 모든 게 미립자의 배열이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가상과 현실을 구별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리하여 플루서는 가상과 현실의 차이란 그저 ‘해상도의 차이’라고 말한다.

     

     

     

    구석기의 원시인들은 풍만한 여인의 조각을 만들고, 동굴의 벽에 그림을 그렸다. 현실의 바람을 가상으로써 이루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술이 소용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인간들은 그림이 아니라 문자로 세계를 기술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역사’가 시작된다. 이제 인간은 주술적 상상력을 버리고 대신 철학이나 과학의 추론적 사유를 발전시키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그런 문자문화의 끝에 와 있다. 문자의 시대는 가고, 다시 영상의 시대. 하지만 이 영상은 과거의 것과 달리 점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다. 조각(3차원)→벽화(2차원)→문자(1차원)→픽셀(0차원). 똑같이 이미지를 사용해도, 새로운 전자영상은 과거의 조각이나 벽화보다 추상의 수준이 높은 것이다.

     

     

     

    원시인들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다시 찾아온 이미지의 시대도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시인들의 것이 ‘주술적 상상력’이라면, 현대인의 것은 ‘기술적 상상력’이다. 원시인들은 자신들의 꿈이 현실이 될 것을 단지 바랐다면, 기술로 무장한 현대인은 실제로 그 꿈을 현실로 이루어 나가고 있다.

     

     

     

    컴퓨터는 세계를 0과 1의 픽셀이라는 미립자로 분석(analyse)할 뿐 아니라, 그렇게 분석된 입자들을 종합(synthesize)할 수 있다. 컴퓨터로 무장한 인간은 이미 있는 세계를 그대로 인식하는 주체(subject)가 아니라, 제 꿈을 앞으로(pro) 던져(ject) 아직 없는 세계를 창조하는 기획(project)이다. 플루서의 ‘피상성 예찬’은 이러한 디지털 시대에 요청되는 새로운 인간의 존재론이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미학


              <9>옛그림 읽기의 즐거움-오주석

     

    사람이 짓는 일 치고 사람됨의 화신(化身) 아님이 없다. ‘그 사람에 그 그림(其人其畵)’이란 말도 그래서 생겼다

     

     

    .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은 조선시대 화원(畵員)의 사람됨에 견주면서 그들 그림 11점의 아름다움을 파헤친 미술역사서다. 단원 김홍도와 공재 윤두서의 그림은 2점을 다룬 까닭에 살펴본 화가는 모두 아홉 분이 된다.

    화가의 사람됨에는 그가 꾸었던 달콤한 꿈도, 그가 처했던 아픈 현실도 녹아있기 마련이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는 ‘진단타려도(陳단墮驢圖)’를 통해 절대군주에게 치세를 고대하는 백성의 꿈을 대변하고 있다.

    그림의 정경은 난세에 시달리던 중국 선비 진단이 좋은 군주가 나타났다는 깜짝 소식에 환호작약하다가 그만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졌음에도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이다. 선비 얼굴은 공재 ‘자화상’에 나오는 바로 그 모습인지라 선비는 화가 자신을 말함이고, 치세를 갈망하는 선비의 소망에 화답하는 화제(畵題)는 숙종 임금이 직접 적었다. 이런 내력 규명이야말로 요절한 오주석(1956∼2005)의 집념이 일군 업적 하나다.

    민주화 시대보다 만남에 금기가 더 많았을 왕조시대에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지기가 있었다면 그 한평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겠다. 조선시대 선비문화가 그렇게 갈구해 마지않던 ‘시서화 삼절’의 진정한 표본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그림붓을 든 심경을 적은 글 덕분에 유명세가 높아진 그림이다. 잘나갈 때는 주위가 북적대지만 벼슬길이 떨어지면 세상인심은 멀어지는 법인데도 어쩌다 변치 않는 우정을 만난 비감(悲感)이 내용이다.

    시서화 삼절은 선비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중인 처지였던 단원 또한 진정한 시서화 삼절, 아니 그 이상이었다.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에 적은 화제가 두보(杜甫) 최만년의 율시에서 따왔음을 밝혀내어 단원의 시재(詩才)를 증명했다. 게다가 지음(知音)이었음도 마저 밝혀 그를 시서화악(詩書畵樂) 사절(四絶)이라 부름이 옳다고 저자는 열변한다.

    ‘그 사람에 그 그림’이란 말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사람에 그 글’임도 실감한다. 치열한 머리의 소산인 글인데도 따듯한 마음의 사랑이 가세해서 읽기가 여간 푸근하지 않다.

    오주석의 옛 그림 사랑은 “만약 하늘이 꿈속에서나마 소원하는 옛 그림 한 점을 가질 수 있는 복을 준다고 하면 나는 주상관매도를 고르고 싶다”는 독백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 지경에서 그림 그리기의 기쁨이 ‘왕조 최상위 벼슬 삼공과도 바꿀 수 없다(三公不換圖)’ 했던 단원의 자부심은 이 책 저자에게 더욱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 되었다.



    세한도 그림 속의 집은 유배지 제주의 초가가 아니라 중국집인 것도 아쉽고, 그림 자체보다 뜻을 적은 글로 유명하게 됐음도 흠이라는 날카로운 비판을 나는 기억한다.


    하지만 그림과 글은 같은 뿌리인 까닭에 뜻과 내력을 모르면 무의미하기 십상인 우리 옛 그림을 전인미답의 경지에서 그 문예적 위상을 밝혀냈음은 사계가 오래 기억할 이 책의 미덕이다.

    마침내 총론서로 일관하던 우리 전통회화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린 각론 수작(秀作)이 되었다.


    김형국 서울대 교수 도시계획학



    <10>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




    “당신의 청혼 방법이 나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햅니다. 그저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청혼했더라면 거절하면서 느꼈을 나의 미안함을 면제해 주었을 뿐이지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난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대지주인 다아 씨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하며 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양가의 규수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오빠나 남동생의 집에 군식구로 얹혀살거나 남의 집에서 지독한 저임금에 무수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가정교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댈 남자 형제도 없고 기대할 유산도 전혀 없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은 그러니까 조건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예리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생기발랄한 엘리자베스는 그런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 사회의 비굴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군상들을 취미삼아 관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대지주 다아 씨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아 씨도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과 재기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리해서 그녀의 주책망나니 어머니,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누르고 내키지 않는 청혼을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기 같은 ‘일등 신랑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아 씨는 호된 질책과 함께 여지없이 ‘퇴짜’를 맞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곧이어 분개하지만 다아 씨는 좋은 ‘조건’만으로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기가 다아 씨에게 가졌던 반감이 많은 부분 편견에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판단력 과신을 깊이 반성하며 다아 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게 된다.

     

     

     

    다아 씨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달라진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몇 건의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째 청혼에서 다아 씨는 성공한다. 이 과정을 제인 오스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모든 인물이 그의 자격에 꼭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만 오스틴의 진수는 그의 엄격한 도덕관,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문명사회의 유지, 발전과 가치 있고 품위 있는 삶에 대한 비전에 있다.

     

     

     

    영국 남부 농경사회의 조그만 읍을 무대로 조용한 일상사와 함께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오로지 당돌하면서 재기발랄한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넘치는 남주인공, 그리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고 허술한 구절도 전혀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오스틴은 이성과 분별력과 절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영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것은 상류층이 경직되고 배타적이지 않고 겸허함과 열린 마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찾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11>노장사상



    필자는 이 책과 1988년에 처음 만났다. ‘중국사상이나 고전학 전문가도 아닌 분이 노장사상을 논하다니.’ 처음 품었던 이런 생각은 첫 장을 읽기도 전에 무너졌다.

     

    저자의 뜻은 문헌학적 연구나 사상사적 연구에 있지 않고, 철학의 언어와 논리를 바탕 삼아 노장사상의 보편적 현대적 의미까지 찾는 데 있다.

     

    요컨대 저자는 동서고금의 언어와 생각을 소통시키려 한다. 이런 시도는 저자가 철학을 ‘이성을 가진 어느 인간에게나 가능한 하나의 사고의 차원과 방법’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저자는 노장사상의 보편적 현대적 가치를 이렇게 말한다.

    ‘인류가 걸어오고 추구해 온 문화와 역사를 맹목적으로 밟아가지 않고 그 의미를 재검토케 함으로써 우리들이 무의식중에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고쳐 나갈 수 있는 정신적 제동장치.’

    그런 제동장치로서의 노장사상은 ‘인간의 궁극적 가치를 이 삶에서 딴 곳으로의 탈출이나 자연의 정복에서 찾지 않고 자연과의 완전한 조화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우주와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새로운 인간관과 인생관을 세워 나갈 수 있게’ 해 준다.

    저자는 노장사상을 놀이와 소요(逍遙)를 강조하는 조화와 행복의 이념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을 웃음에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니체의 인생에는 웃음이 없다. 디오니소스가 웃음을 갖는다 해도, 그것은 뒷맛이 허전한 폭소, 거친 웃음이다. 이에 비해 노장의 인생은 부드럽고 수동적이며, 긴장이 풀린 누그러진 유희이다.

    노장의 웃음은 폭소도 아니며, 비꼬인 웃음도 아니며, 자연스러운 허탈의 웃음이다. 착함이 넘치는 웃음이다. 목적도, 긴장도, 조바심도 필요치 않은 놀이가 노장의 소요이다.’ 

     

    노장이 말하는 무위(無爲)란 무엇인가?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과 대립되는 존재로 정립할수록 인간과 자연의 거리는 커지고, 자연은 심각하게 파괴된다.

    문화와 지식에 대한 노장의 비판은 존재의 파괴에 대한, 자연과 인간의 거리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 파괴와 거리는 자연을 언어로 표상화하여 왜곡시키는 인위(人爲)의 소산이다.

    이에 따라 노장의 무위(無爲)는 인간과 자연, 문화와 자연의 거리를 제거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학술적 에세이로 규정하는데, 학문적 글쓰기에 관한 새로운 모색과 실천이 분분한 요즘에 비춰볼 때 하나의 선구적인 모범이라 할 만하다.

    전문성의 성채에 스스로를 가둬놓고 바깥을 내다볼 줄 모르는 태도, 대중화의 미명 아래 격을 허물고 수준을 낮추는 데만 급급한 태도. 저자는 그런 지적 암호주의와 지적 포퓰리즘에 빠지는 일 없이, 견고한 전문성에 바탕을 두고 바깥과 격조 있게 소통한다. 

     

    이 책은 1980년 첫 출간 이후 18쇄를 거듭해 나왔고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출간 즉시 10쇄 돌입’이니 하는 자극적 광고 문구와 함께 선보였다가 이내 사라지는 반짝 베스트셀러가 많은 현실에서, 25년에 걸쳐 꾸준히 쇄를 거듭한 이 책의 운명은 저자와 책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좋은 책을 찾는 독자와 그런 의미 있는 수요에 부응할 줄 아는 출판사가 함께 만들어 낸 것이라 하겠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12>공간의 시학


    상상력이라는 단어는 이제 너무나 익숙하다.

     

    심지어 담배회사 광고에서도 우리는 상상 예찬이라는 표현을 만난다.

     

    이성적 또는 합리적이라는 단어의 위력 앞에 기를 못 쓰던 상상력이 홀연 위광을 찾은 듯하다.

     

    어떤 이는 이제 상상력의 시대가 왔다고 단언한다.

     

    중요한 변화이고 중요한 지적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과연 뭔지, 상상력을 중시하게 되었다는 게 인식론의 차원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그 변화와 함께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자기 업적에 대해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 표현은 자기 과시적인 게 아니다. 자기 내부에서 일어난 인식 전환의 중요성에 대해 스스로 얼마나 놀랐는지 보여 주는 말이다.

     

     

    바슐라르는 애당초 과학철학자였고 데카르트 이상의 합리주의자였다.

     

    그의 합리주의는 너무 단호하고 철저해서 데카르트의 합리주의가 획득했다고 믿은 객관성이라는 것도 결국 주관적인 오류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바슐라르 사후 푸코가 “바슐라르는 서구의 인식론 전체를 덫에 걸리게 만들었다”라고 말한 것은 그의 철저한 합리적 인식에 의해 그동안 서구를 지탱해 온 합리주의 전체가 부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말을 달리 하면 과학철학자로서의 그의 인식은 서구 합리주의의 절정에서 온 인식이다.

     

    그리고 세상만사가 그러하듯이 절정은 곧 전환점을 뜻한다.

     

     

    그 전환점에서 그가 만난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바슐라르에 의해 상상력은 객관적 진리를 획득하려는 노력을 방해하는 기능이나 비현실적인 기능을 갖는 게 아니라 놀라운 창조성을 갖는 중요한 인식의 하나로 격상된다.

     

    인간에게는 객관화를 지향하는 의식과 몽상을 지향하는 의식이 공존하며 몽상은 객관화하는 의식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그와는 다른 현실적이고 창조적인 기능을 갖는 것이다.

     

    상상력의 놀라운 창조성에 홀린 바슐라르는 시(詩)라는 마음의 양식을 섭취하면서 상상력에 관한 기념비적인 책을 여러 권 쓴다.

     

     ‘공간의 시학’은 ‘몽상의 시학’ ‘초의 불꽃’과 함께 그 결정판이다.

     

     

    바슐라르의 공적은 상상력의 중요성을 알게 해 주었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업적에서 우리는 “인간은 ‘상상하다’라는 동사의 주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한다.

     

    상상력에 관한 저술뿐 아니라 과학철학에 관한 저술들에서도 그는 합리화를 지향하는 의식도 인간의 주관성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과학의 축과 시학의 축은 인간의 각기 다른 두 영혼인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객관화를 지향하는 의식을 주관성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된다.

     

    즉 상상력이 인간 정신 활동의 근간으로서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객관성을 담보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주관성 쪽에 존재한다는 것, 거기에 진정한 인식론적 혁명이 존재한다.

     

     

    상상력을 인간 이해의 근원으로 삼으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정한 다원적 이해의 길이 열린다. 상상력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 존재의 다원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20세기 초엽에 쓰인 바슐라르의 저술들이 미래의 고전으로 오래 남아야 하고 남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진형준 한국문학번역원장·홍익대 교수


    <13>아르떼미오의 최후



    노벨문학상이 발표되는 10월마다 유력한 수상후보자로 10여 년째 언론에 끊임없이 이름이 오르내리는 작가가 있다. 바로 멕시코의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다.

     

     

    그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더불어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국제화한 주역이다.

     

     

    푸엔테스의 ‘아르떼미오의 최후’(원제를 직역하면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는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부상한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또한 현대 문학 이론가들은 이 작품을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소설이자 탈식민주의 작품이라고 일컫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962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일흔한 살의 아르테미오 크루스라는 사람의 생애를 통해 1910년 혁명 이후의 멕시코 근대 역사를 다룬다.

    그러나 이 소설이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이런 주제와 더불어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구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부패한 멕시코의 백만장자 크루스는 생애의 마지막 시간에 자기의 인생을 재생한다.

    여기서 작가 푸엔테스는 1인칭, 2인칭, 3인칭을 이용하여 크루스의 생애를 총체적으로 그리면서 그가 살아왔던 복잡한 시대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사용되는 1인칭 ‘나’는 침대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늙은 주인공의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2인칭 ‘너’는 죽음이라는 불확실한 미래에 관한 크루스의 생각과 그의 무의식을 보여준다.

    한편 3인칭 ‘그’는 크루스의 과거를 서술한다.

    이런 세 개의 목소리들은 서로 교차되어 나타나며, 그것들이 들려주는 사건들 역시 비시간적 순서로 배열되다가 마지막 순간에 하나가 된다.

    그래서 언뜻 보면 뒤죽박죽인 작품처럼 보이지만, 목소리와 사건들은 서로 연결되면서 모순 덩어리인 크루스의 상이한 성격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다.

    이것은 한 인간의 삶이나 국가의 정체성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게 형성된 것임을 시사한다.

    이런 방식으로 푸엔테스는 조국 멕시코의 문화와 역사를 단일한 시각이 아닌 다양한 관점에서 탐구한다.

    푸엔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정치는 파편적이고 우리의 역사는 실패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적 전통은 풍요롭다.

    나는 우리가 우리의 얼굴 즉, 우리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볼 때가 되어야 비로소 그런 풍요의 시간이 온다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전통이란 아스텍 문화, 스페인 정복자들이 전해 준 기독교 신앙, 멕시코 혁명의 좌절된 희망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자랑스러운 역사뿐만 아니라 수치와 불명예로 점철된 역사도 모두 포함한다.

    푸엔테스는 ‘아르떼미오의 최후’에서 멕시코 혁명과 그 이후의 혁명 사회를 소설 주제로 사용하지만, 그 과거를 통해 상징적으로 현대의 관심사를 말하고 조국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투영한다.

     

     

    그러면서 현대의 이상적인 소설이란 모험소설의 모순적인 융합과 실험적인 소설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험적 구조, 과거를 통한 현재와 미래의 예언, 다양한 시각의 조화가 바로 ‘아르떼미오의 최후’를 40년 넘게 장수하게 만들면서, 멕시코라는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어 세계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21세기 문학의 지평까지 제공하게 만든 것이다.


    송병선 울산대 교수·스페인-중남미학



    <14>최초의 3분

     

     

    우주의 창조에 대한 궁금증은 신화가 지배하던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지난 1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현대 우주론의 정설로 자리 잡은 팽창 우주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전개해 왔다.

     

     

    대폭발 이론, 정상상태 우주론, 인플레이션 시나리오로 대변되는 팽창 우주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기본 입자와 상호 작용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려는 표준 모형, 대통일 이론, 초대칭 이론, 초끈 이론, 막우주론 등과 결합되면서 우주와 물질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인간 상상력의 최전선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최초의 3분’은 전자기력과 약력을 통일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1979년)을 수상한 스티븐 와인버그가 1960년대 중반 이후에 발전한 우주 창조 및 기본입자의 생성, 그리고 자연에 존재하는 여러 힘을 통일하려는 통일 이론을 대중에게 알기 쉽게 소개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소위 ‘표준 모델’에 도달하게 됐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1948년 러시아 출신의 미국 과학자 조지 가모와 그의 제자 랠프 알퍼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원자핵은 특정한 온도와 밀도의 평형 상태에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태초에 우주가 한 점에서 폭발한 뒤 팽창·냉각돼 단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대폭발 이론을 제기했다.

     

     

    같은 해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천문학자들인 허먼 본디, 토머스 골드, 프레드 호일 등은 대폭발 이론과는 전혀 다른 정상상태 팽창 우주론을 제안했다.

     

     

    그들은 우주가 팽창하되 지속적으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 항상 일정한 평균 밀도를 유지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천문학계에서는 대폭발 이론과 정상상태 우주론이라는 두 팽창 우주론이 서로 대립하면서 경쟁적으로 발전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폭발 이론은 정상상태 우주론을 누르고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표준 우주 모형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1965년 미국 뉴저지 주 벨 전화연구소에 있는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은 극히 예민한 잡음을 제거하기 위해서 마이크로파 탐지 실험을 하던 중 우주의 모든 방향에서 밤낮과 계절에 상관없이 관측되는 복사선을 발견했다.

     

     

    이 연구팀이 발견한 복사선은 초기의 우주 팽창 과정에서 생겨나서 우주의 팽창과 함께 변화돼 현재의 마이크로파로 지구에서 관찰된 것으로 판명됐다.

     

     

    이 우주 배경 복사선의 발견으로 대폭발 이론과 정상상태 우주론 사이의 경쟁은 마침내 대폭발 이론의 승리로 결판나게 됐다.

     

     

     

    대폭발 이론의 창시자인 가모 역시 대중 과학저술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과학자였으나, 아쉽게도 대폭발 이론이 받아들여진 직후인 1968년 8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결국 대폭발 이론을 소개하는 글은 와인버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와인버그는 1972년 ‘중력과 우주론’이라는 전문적인 책을 집필했는데, 이 내용을 대중을 상대로 알기 쉽게 소개한 책이 1977년 출판된 ‘최초의 3분’이다.

     

     

    빛이 지배하던 처음 100분의 1초에서 물질이 지배하게 되는 처음 3분 45초 동안에 우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흥미 있게 다룬 이 책은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와 함께 우주론과 통일 이론을 다룬 대표적인 대중 과학서로 남게

     

    임경순 포항공대 교수·과학사



    <15>문학이란 무엇인가



    학문으로서 문학을 배운 지 스무 해가 넘었다. 또 짧은 지식으로 그것을 가르쳐 온 것도 벌써 수년째다.

     

     

    하지만 나에겐 부끄럽게도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설명할 재주가 없다.

     

     

    단지 한 가지 깨친 바가 있다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즐기는 것만은 못하다는 말이다.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으나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진리다.

     

     

    즐거운 것이기에 나는 문학과 함께라면 지금도 호기심에 들뜬 청년이 된다.

     

     

    햇살 아래 과일이 익어가듯 문학 속에서 정신이 향기를 더하는 시간을 적지 않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런 즐김의 진리를 학문적으로 깨우쳐 준 책 가운데 하나가 유종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다.

     

     

     

    누구나 문학을 즐긴 경험을 갖고 있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들듯 동화를 읽거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저도 모르게 동시를 외던 유년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 문학이야말로 아이들의 틀에 박히지 않은 정신에 가장 어울리는 말이어서 그 말이 어디로 뛰건, 그 자체가 천진한 기쁨이며 즐거움이다.

     그 속에서 자신의 어떤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현대시의 기원인 보들레르가 말하지 않았던가. 진정한 문학예술이란 다시 되찾은 유년이라고. 문학은 이처럼 꽉 짜인 일상 속의 특별한 축제와도 같은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른이 되어 가며 그 문학에서 멀어진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 그래도 가장 큰 이유는 정신의 자유로움을 쫓아가지 못하는 경직된 제도가 아닐까.


    자기와 세계를 발견하는 따뜻한 지혜의 시간 대신 이미 알려진 지식만이 전부라며 물음 이전에 주워 담을 것을 강요하는 차가운 제도. 그래서인지 문학을 배우는 나이가 되면 지식은 잔뜩 늘었으되 정작 말을 즐기는 기술은 잃어버린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문학의 기쁨을 알려 주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진다. 문학을 잘 알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요?

    그때 내가 주저 없이 뽑아드는 게 바로 이 ‘문학이란 무엇인가’다.


    그 이유는 첫째, 즐기지 못하고서는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문학관을 너무나 잘 보여 준다.

    삶에서 말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가 생생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 문학으로부터 길어 낸 값진 인용문이 다채롭게 들어 있다. 영문학자로서 펼쳐 보인 서양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씨줄이라면 그것과 엮이며 멋진 무늬를 지어 낸 우리말의 보고(寶庫)는 날줄이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우리의 문학 이해는 서양의 그것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셋째, 무엇보다도 쉽다. 이 책 안에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할 만큼 어려운 말은 없다.

    독자의 선(先)지식이 모자라 모르는 개념은 있을지언정. 모자라는 지식이야 찾아서 메우면 된다.

    이렇게 깊이 있는 지식을 담고도 쉬운 책을 발견하기란 정말 드문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각 장의 뒤를 갈무리하고 있는 적절한 참고문헌에 이르기까지, 문학 입문서로서의 이 책은 안타까운 데를 찾아보기 어렵다.

    문학인으로서 나는 1989년을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온 해로 기억한다. 16년 전 9월, 나는 우리가 이만 한 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박철화 중앙대 교수 문학평론가



     < 16>고요한 돈강

     

    올해는 옛 소련의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1905∼1984)가 탄생한 지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그럼에도 그의 걸작 대하소설인 ‘고요한 돈강’(1928∼1940)을 구해 보기가 쉽지 않다.

     

     

    사실 그동안 이 작품은 한국의 독자들과 격리되어 왔다.

     

     

    소련 문학에 대해서 비판적인 서구도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여함으로써 이 작품을 뒤늦게 추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반공 체제를 견지한 한국에서는 단지 풍문으로만 떠돌 뿐이었다.

     

     

    출판의 자유가 그래도 너그러웠던 1949년 현덕(玄德) 선생에 의해 제1부가 번역돼 대학출판사에서 나왔지만 6·25전쟁 이후 망각됐다.

     

     

    7권짜리의 완역본은 1985년에야 일월서각에서 빛을 보게 된다.

     

     

    이 작품은 출판 운동의 열매로 비로소 한국 독자들에게 온전히 공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유럽 혁명의 물결 속에서 소련이 붕괴되면서 이 작품은 다시 빛을 잃게 되는 반어적 상황을 맞이했던 터이다.

     

     

    과연 이 작품은 ‘소비에트연방’의 부침(浮沈)에 의해 좌우되는 그런 이데올로기 소설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이 작품은 우크라이나 카자흐 마을 타타르스크에서 시작하여 그곳에서 마감될 만큼 돈 카자흐의 집합적 생태를 생동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카자흐의 야생적 자태를 처음으로 호명한 니콜라이 고골리(1809∼1852)의 ‘타라스 불리바’를 잇고 있다는 점에서 카자흐 최고의 종족지(種族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숄로호프는 돈 카자흐의 역사적 운명을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러시아혁명(1917), 그리고 내전(1918∼1920)이라는 세계사적 격동의 터널을 통해서 조명함으로써 종족지적 풍요에 서사시적 위엄을 부여하는 데 성공한다.

     

     

     

    러시아혁명을 돈 카자흐의 눈으로 보듯이 작가는 돈 카자흐의 운명을 주인공 그리고리 멜레호프를 통해서 본다.

     

     

    그리고리는 부단히 요동한다.

     

     

    혁명 직후 적위군에 가담한 그는 부상을 하고 귀향한 뒤에는 백군에 가담한다.

     

     

    그러다가 적위군에 붙잡힌 뒤에는 다시 적위군에 복무한다.

     

     

    제대 후에 귀향한 그는 다시 탈출하여 이제는 비적으로 전락한 카자흐 백군의 잔당에 몸을 부치다가 운명의 여인 악시냐와 만난다.

     

     

    그는 악시냐와 먼 탈출을 꾀하다가 그녀가 적위군의 총에 맞아 죽자 모든 희망을 잃고 마침내 은신처에서 나와 황폐한 모습으로 귀가한다.

     

     

     

    이 허망한 결말도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반혁명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 소설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알다시피 카자흐는 종족이 아니라 옛 영지에서 러시아 남부의 광대한 스텝지대로 탈출한 농노들의 집단이다.

     

     

    그런데 농민 전쟁의 영웅 스텐카 라진과 에멜랸 푸가초프의 후예인 그들이 내전에서는 대거 반혁명에 가담하였다.

     

     

     

    여기에 러시아혁명의 한계가 노출된다.

     

     

    혁명에 대오를 함께했던 농민들이 혁명 이후에 실망하여 반혁명으로 돌아서는 한 경향을 상징한 사건이 혁명에 열광한 최후의 농민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자살이다.

     

     

     

    이 점에서 그리고리의 운명의 변전은 그 반영일 터이다.

     

     

    작가는 카자흐에서 농민적 저항의 표상을 발견함으로써 불굴의 자유를 구가한 돈 카자흐, 이 고상한 야만인들의 멸망에 대한 충심의 만가를 헌정한다.

     

     

    숄로호프는 이미 러시아혁명의 파국을 내다본 것인가?


    최원식 인하대 교수 문학평론가





     <17>이중나선

     

     

    뱀은 절대로 뒷걸음질을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돌담불 틈새에 기어든 뱀의 꼬리를 잡았다 치자.

     

     

    아무리 잡아당겨 봐라. 몸뚱어리가 잘려 나갔으면 나갔지 끌려 나오지 않는다.

     

     

    바짝 선 배 바닥의 비늘(복린·腹鱗)들이 돌에 걸려서 뒤로 밀려나지 못한다.

     

     

    과학이라는 괴물도 똑 그렇다.

     

     

    뒤로 가는 법이 없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놈은 진화가 빠르고 침투력이 무척 강하다.

     

     

     

    생물이 아닌 분야에서도 DNA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일이나 사건이 매우 중요하거나 정수(精髓), 핵, 중심, 기질(基質)이 된다는 의미로 DNA를 비유하여 쓴다.

     

     

    ‘대한민국의 DNA가 거기에 녹아 있다’, ‘그것은 오늘 토론의 DNA다’, ‘DNA가 서로 다른 탓이다’, ‘DNA를 탓하지 말 것이다’, ‘영혼의 DNA, 민족의 원형질인 DNA를 계발할 것이다’ 등등.

     

     

     

    1963년, 필자가 대학 4학년 때 처음으로 ‘DNA는 꽈배기처럼 두 줄로 되어 있고 그 둘을 잇는 것은 염기(鹽基)다.

     

     

    염기에는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 넷이 있다’는 정도를 배웠다.

     

     

     

    그리고 1962년에 이미 ‘DNA 이중나선구조’를 밝힌 공으로 제임스 듀이 잡슨과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가 공동으로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고 1967년에 여기 소개하는 책을 잡슨이 썼다.

     

     

     

    그 정도의 기초적인 일로 시작한 핵산 연구가 이제는 우리의 생활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어느새 ‘DNA 검사’를 해서 지진해일로 실종된 사람을 구분해내는가 하면 친자 감별이나 범죄자를 찾아내는 데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DNA는 A, T, G, C라는 단지 4개의 문자(文字)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의 배열이 유전은 물론 진화에다 생명(세포)의 생사까지 책임지고 있다니,

     

     

    어찌 보면 참 간단하고 어떻게 보면 한없이 복잡한 것이 생명(DNA)의 세계다.

     

     

     

    잡슨의 ‘이중나선’에서 세계적인 몇몇 생화학자가 서로 먼저 ‘DNA 구조’를 밝히려고 죽살이치는 것을 본다.

     

     

     “감기에는 비타민C가 좋다”고 주장한 생화학자인 라이너스 폴링이 DNA구조를 논문을 통해 발표하지만 폴링의 발표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미친 듯이 좋아하는 두 사람! “그럼 그렇지,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잡슨과 크릭. 하여,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절감하게 된다.

     

     

    선취특권 말이다.

     

     

     

    “이중나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폴링도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감동된 모양이다.

     

     

    다른 때 같으면 폴링은 그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구조를 옹호했을 것이지만 우리가 만든 상보적(相補的) DNA분자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생물학적 의의 앞에 그도 미련 없이 깨끗이 물러난 것이다….”

     

     

     

    몇몇 학자가 벌이는 DNA 구조 밝히기 경쟁이 너무도 치열했음을 읽는다.

     

     

    한마디로 경마장의 말들이 경주하는 듯 스릴까지 느낀다.

     

     

     

    이 책은 결코 까다로운 핵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노벨상을 눈앞에 놓고 과학자들이 펼친 경쟁과 집념의 면면들을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드라마틱한 수필이다

    권오길 강원대 교수·생물학



    <18>드리나 강의 다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유고슬라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구유고연방이 해체되어 형성된 오늘날의 국가 명칭들이다.

     

     

    이 구유고연방 출신 작가 이보 안드리치(1892∼1975)는 자신의 고향 발칸의 생생한 역사를 담고 있는 보스니아 이야기를 3부작에 걸쳐 완성하였는데, 바로 ‘드리나 강의 다리’, ‘트라브니크 연대기’, ‘아가씨’가 그것들이다.

     

     

    이 중 1961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드리나 강의 다리’는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비셰그라드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현실에 바탕을 둔 서사적 연대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책 제목처럼 사람이 아니라 11개의 아치를 가진 다리다.

     

     

    그 다리는 드리나 강가 비셰그라드라는 마을에 있다. 이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하고 견고한 다리이다.

     

     

    이 다리를 세운 주인공은 보스니아 지역이 터키제국의 지배하에 있을 때 세금의 일환으로 끌려간 아이들 중 하나인 열 살짜리 소년이다.

     

    소년은 비록 이국인 터키제국으로 끌려갔지만 술탄의 황실에서 젊고 용감한 장군이 되었고 뒤에 명성을 지닌 정치가가 되었다.

     

     

    그가 나이 먹어 고향 마을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세운 것이 바로 드리나 강의 다리이다.

     

    다리 공사는 5년간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주변에서는 물론 대도시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돌다리가 작은 마을 비셰그라드에 생긴 것이다.

     

     

    비셰그라드가 자리하고 있는 보스니아는 지리적으로 가깝게는 다뉴브 강 주변 국가들과 멀리는 이스탄불에 이르는 동방 지역, 아드리아 해변, 그 너머 유럽문화를 연결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제 다리는 두 지역을 오고가는 여행자들과 정복자들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동시에 마을은 다리를 중심으로 확장되어 간다. 다리 중앙에는 테라스와 카피야(터키어로 ‘문’을 뜻함)가 있는데, 카피야가 곧 이 소설의 중앙무대이다.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에는 이렇다 할 만한 주인공이 없다. 그러나 다리는 그 자체로 역사의 무대이자 목격자이며, 관찰자로 400여 년에 걸친 인간사의 산증인이다.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카피야와 그 주위에서는 첫사랑의 환상과 오고가며 마주치는 첫 눈길들, 이성의 유혹과 속삭임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또한 최초의 거래들과 장사, 분쟁과 협약, 약속과 기다림도 있었다.”

     

     

    사람들은 공공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그곳에 모였고, 젊은이들은 노래와 농담을 위해 모여들었다.

     

     

    큰 사건과 역사적 변화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성명서와 공고들이 나붙었으며 처형당한 사람들의 머리를 말뚝에 꽂아 여기저기 매달기도 했다.

     

     

    비극적 냄새가 축축한 이 소설은 무슬림, 정교도, 가톨릭교도와 유대교도들 간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과 더불어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전전긍긍하거나 의연한 주인공들의 내면세계를 서술하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각 문화집단 간의 융화와 갈등이 만들어낸 발칸 특유의 문화를 느낄 수 있다.

    한애규 조각가


    <19>육식의 종말




    “곡물로 키운 소의 고기는 불에 탄 산림, 침식된 방목지, 황폐해진 경작지, 말라붙은 강이나 개울을 희생시키고 수백만 t의 이산화탄소, 아산화질소, 메탄을 허공에 배출한 결과물이다.”

    충격 그 자체다.

    이 책은 대다수의 사람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육식 문화’의 이면에 얼마나 잔인하고 냉혹한 사건들이 숨어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인류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어 곡식을 자라게 하고, 죽어서는 자신의 몸을 바쳐 인간을 공양하던 충직한 가축, 소. 이러한 소가 지구 전체 토지의 24%를 차지하고 지구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3분의 1을 먹어 치운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대규모 사육을 위하여 지구의 허파로 불리던 열대우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들이 배출하는 분뇨에서 발생하는 메탄, 이산화탄소, 아산화질소 등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되고 있다고 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소를 먹이기 위한 곡물 사료의 재배로 인하여 10억 명 이상의 인구가 기아로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 반면 한편에서는 육식 문화의 결과인 콜레스테롤 과다 섭취로 많은 사람이 심장병, 당뇨병, 암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실정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인류사에 널리 퍼져 있는 육식 문화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생태계가 얼마나 파괴되는지, 축산업의 성장 배후에 얼마나 많은 권력과 자본의 악행이 숨어 있는지를 고발한다.

    단지 현대의 병리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라스코 동굴 벽화,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수메르 궁전의 도축장과 같은 방대한 고고학적 자료, 그리고 축산업의 역사 등 풍성한 사료를 추적해 육식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다룬 점이 돋보인다.

    오늘도 아이들은 햄버거를 맛있게 먹고, 어른들은 밤거리에서 고기를 구우며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인다. 리프킨은 이러한 일상의 단면 뒤에 숨어 있는 진실들에 주목한다. 신생아 10명 중 1명은 첫 번째 생일을 맞지 못하는 제3세계의 현실, 환경오염으로 인한 면역체계의 파괴로 서서히 죽어 가는 아이들. 리프킨은 이러한 현상을 ‘차가운 악(cold evil)’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는 강도 살인 폭력 등의 범죄에 대해서는 분노하며 비난한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인정되고 합법화된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발생되는 범죄는 어찌해야 하는지?

    이러한 차가운 악은 기술과 제도의 허울 속에 몸을 숨기고 서서히 우리를 질식하게 한다. 계몽주의 철학을 근간으로 온 세계를 뒤흔들었던 산업혁명의 기계 소리 이면에는 소외받은 수많은 노동자의 눈물이 있었고, 지금도 지구를 뒤덮고 있는 공해로 물 한 모금, 심호흡 한 번조차도 걱정해야 하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저자는 육식의 종말을 통하여 행복한 지구가 만들어질 것을 확신한다. 동시에 ‘인공적인 단백질 피라미드’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 준다.

    지구 환경과 인류 공존에 대한 그의 생각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직접 생활 속에서 그것을 실천한다면, 언젠가는 모든 대륙의 자연을 대대적으로 회복시키는 생태계적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김준목 안띠꾸스 이사·서양고서 전문가




    <20>레 미제라블


    ‘세상에 이와 같은 일이 끊이지 않는 한 나의 소설은 영원히 읽힐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서론이다. 오래도록 영 잊혀지지가 않는다.

     

    서론 다음에 짤막한 서시(序詩)가 실려 있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싸우는 것이다.

     

    다음의 문제는 무엇이냐. 이기는 것이다.

     

    그 다음의 문제는 무엇이냐. 죽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 찍혀 있는 레미제라블의 이미지는 아마도 내가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장발장 이야기.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지고 텔레비전에서 수도 없이 방영된 일이라서 전 세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유명한 소설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내내 일본말로 학교생활을 하다가 6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당시 내 숙부님 방에는 꽤 많은 책이 있었는데 모두가 일본책이었다.

     

    우선 소설책부터 빼들었는데 첫 번째 잡힌 책이 레미제라블이었다.

     

     

    나한테는 실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우리말로 번역을 하자면 수십 권이 될 만큼 장문의 소설이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겨울방학에 대충 한 번 읽었다.

     

    일본어 실력이 모자라 첫해에는 스토리 중심으로 읽었고 다음 해에는 조금 구체적으로 읽었고 세 번째, 즉 3학년 때는 글자 한 자 건너뛰지 않고 그야말로 완독을 했다.

     

     

    몇 해 전 뉴욕에 들렀을 때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감상했는데 저건 누구이고 지금은 무슨 장면이고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불편 없이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내가 지금 일흔을 넘겼고 레미제라블을 접한 지 60년이 되었지만 빅토르 위고의 정신은 나의 가슴 밑바닥에서 지금도 끊이지 않는 물결이 되어 잔잔히 흐르고 있다.

     

     

    정의 평화를 위한 인간정신의 영원한 기념비….

     

    레미제라블은 그렇게 기념비적으로 흔들림 없이 내 마음속에 지금도 큰 기둥으로 서 있다.

     

    듣건대 그 소설 속에는 프랑스말 사전이라 할 만큼 온갖 단어가 다 들어 있다 한다.

     

    속어와 사투리에서 고급 언어에 이르기까지 죄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사상이라는 말이 있다. 언어가 다듬어져야 우리들 삶이 다듬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뒤로 수많은 명작소설들을 읽었다. 그리하여 문학은 내게 아주 친근한 반려자가 되었다.

     

     내가 그림의 길에 들어서고 훗날 금동미륵반가상과 석굴암 불상을 만나게 되었다.

     

    서양의 그리스도 정신을 레미제라블에서 배우고 동양의 불교정신을 한국 불교미술에서 배운 결과가 된 것이었다.

     

     

    한 권의 소설, 한 점의 조각 작품이 한 인간의 삶을 운명지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그렇게 살아온 나로서는 인생은 짧되 예술은 길다는 격언을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술과 종교는 서로 많이 닮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그 안에는 궁극의 가치, 세상의 평화, 그런 끝날 수 없는 영원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을 나는 의심 없이 믿는 것이다.

     

    나쁜 사람, 착한 사람, 전쟁과 기아, 사랑과 연민, 잔혹함과 비정함 등이 있는 한, 세상에서 이와 같은 부조리한 일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장발장은 죽지 않고 레미제라블은 영원토록 읽힐 것이다.


    최종태 조각가


     <21>이중섭 평전

     

    시뮐라크르(simulacre·그림자, 환영), 가상현실의 시대를 영위하면서 어느새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근대의 유산마저도 기억으로부터 아득해지고 있다. 더욱이 한 작가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전제된 작가론이나 평전이 희귀한 상황에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드라마틱한 낭만이 흘러넘쳤던 소설 같은 작가들의 비망록들이 잊혀져 가고 있다.

     

     

    ‘이중섭 평전’은 가장 비신화적인 비극으로 근대의 예술적 신화를 창조해 간 대표적인 작가의 평전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한 작가의 몽상적 삶을 통하여 진정한 예술가의 체온과 함께 근대의 아픔과 낭만을 경험토록 해준다.

     

     

    더욱이 이 책이 ‘시를 쓰지 않으면 폐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고은에 의하여 쓰였다는 점에서 이중섭의 드라마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야말로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는 위대한 승리자’로서 숙명적인 허구의 삶을 영위한 이중섭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들을 동시대 지인들에게서 도움을 얻어, 예술적 생애와 인간적인 면면을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일부의 픽션이 가미되었지만 그 대다수가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무의미의 의미를 의미의 의미’보다 더 숭상했던 시절의 무용담들을 유려한 문학적 표현들로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을 사로잡는 또 하나의 묘미는 필자의 역동적 허무주의와 현실주의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필체인데 그 자체만으로도 책의 가치를 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오산 시대와 일본 유학, 그리고 부인 마사코와의 극적인 만남, 일본 문화학원 시절의 스케치로부터 열정과 광기, 기행으로 이어지는 그의 예술가적인 초상들과 원산 시대, 제주 피란과 부산, 진주, 대구, 폐허 명동을 비롯한 서울 시절과 함께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운명한 뒤 3일간이나 무연고자로 처리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기까지 전반적인 면모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나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구상, 한묵, 박생광, 박인환 등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언급과 시대적 배경들은 근대의 문화사로서 이중섭과 함께 오버랩되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대학 시절 처음 읽었을 때, ‘아! 예술가의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후 예술과 학문의 길을 가면서 나락에 빠질 때 그의 비극과 예술을 향한 운명적인 열정은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이제 시대의 변화만큼 작가들의 의식이나 환경도 변화하였고, 고은이 말한 ‘무의미의 의미’를 찾아보기도 힘들게 되었지만, 이 책의 존재는 어떠한 철학과 각오로 예술적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웅변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한인 작가들이 외롭고 지칠 때면 오베르의 반 고흐 묘지를 찾아 마음의 안식을 찾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에게는 왜 영웅으로 되새길 화가가 희소한가 아쉬워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41세의 젊은 나이로 근대사의 아픔과 함께 살았던 한 예술가의 진실과, 몽상을 먹고 살았던 시대의 신화들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국민화가’라는 이름으로 작품의 가치와 삶 모두에서 열광할 만한 위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최병식 경희대 교수 미술평론가



    <22>삐딱하게 보기-슬라보예 지젝


     

     

    어려운 이론과 복잡한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주 특별하다. 슬라보예 지젝은 영화와 소설을 통해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개념을 잘 드러내 준다.

     

     ‘대중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이를 ‘라캉을 통한 대중문화의 이해’라 불러도 무방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 자신의 정신세계나 심리적 자화상을 분석하고픈 독자에게 중요한 지침을 주는 책이다.

     

     

    지젝은 슬로베니아 출신이다.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 중 한 사람인 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헤겔의 관념철학, 대중문화론, 미학, 정치이론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

     

    그가 독자적인 형이상학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굵직한 철학 전통을 대중문화와 접목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책은 ‘삐딱하게 보기(Look-ing Awry)’라는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사물을 보는 여러 방법 가운데 지젝은 삐딱한 방식을 주목한다.

     

    예컨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하자.

     

    이때 눈물 때문에 흐릿하고 찌그러져 보이는 상태가 모든 것이 또렷하고 정확하게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옳다’는 것과 ‘진실하다’는 것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옳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진실할 수 있는 것이다.

     

    폴 세잔을 비롯한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들이 추구한 것도 시각의 진실성이었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의 대표주자인 라캉은 소위 욕망 전문가다.

     

    욕망의 대상이자 원인인 ‘오브제 아(objet a)’는 욕망으로 ‘왜곡된’ 응시에 의해서만 인지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객관적 시선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라캉이 생각하고 지젝이 인용한 그림이 바로 한스 홀바인의 ‘대사(大使)들’이다.

     

    이 그림에서 두 인물 앞에 엉뚱하게 놓여 있는 하나의 일그러진 형상을 주목해야 한다.

     

    이 수수께끼 같은 형상은 그림의 다른 내용과 전혀 연관성이 없어 하나의 오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를 일정한 시각으로 보면 해골 형상이 또렷이 드러난다. 라캉은 이 그림을 예로 들어 욕망이 홀바인의 해골과 같이 엉뚱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현실세계와 사회적 상징세계에서는 오점이지만, 비스듬히 보아 해골처럼 명확한 모습으로 도사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욕망과 그 대상이 현실(reality)과 실재계(the real)의 갈등 관계 속에 작용한다는 것을 대중문화의 프리즘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실재가 현실세계에 침입하는 구조를 공포소설, 탐정소설, 대중 로맨스, 그리고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를 들어 분석한다.

     

     

    이렇듯 다양한 분석에서 현실과 실재 사이의 경계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젝이 정의하는 광기(정신병)가 이에 직결된다.

     

    지젝은 광기는 이 경계선이 무너져 내릴 때, 즉 “실재계가 현실 속으로 넘쳐 올 때, 혹은 실재계가 그 자체로 현실 속에 포함될 때 시작된다”고 말한다.

     

    정신이 멀쩡하려면 광기를 알아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라캉의 공리를 기억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광기를 길들이며 욕망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관건이다.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


    <23>숲의 서사시


    ‘문명 앞에는 숲이 있고, 문명 뒤에는 사막이 남는다.’

     

    19세기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낭만파 문필가였던 샤토브리앙이 남긴 이 말은 숲과 문명 간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환경과 관련해서 곧잘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곤 하는 이 경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붕괴에 대입하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역사는 이들 문명이 산림 파괴로 인한 토양 유실로 농업 생산성의 저하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파생된 사회 혼란은 국가의 몰락과 문명의 붕괴로까지 이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하찮은 자연자원으로 치부되던 숲이 문명의 성쇠를 좌우하고, 숲을 지키는 일이 결국 문명의 붕괴를 막는다니 산림학 전공자로선 그야말로 호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온 격이다.

    그러나 의문도 없지 않다.

    한때 숲으로 덮여 있던 영국이 엄청난 산림 파괴에도 망하지 않고, 오늘날도 여전히 건재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있을 때, 존 펄린의 ‘숲의 서사시’(원제 ‘A Forest Journey’)를 미국의 오리건주립대 구내서점에서 발견했다. 책장을 넘겨 보니, 내가 찾던 그 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게 아닌가.
     

    영국의 경우, 서인도나 신대륙에 눈을 돌려 부족한 목재를 식민지에서 충당하는 한편, 연료를 석탄으로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미국의 독립전쟁이 야기된 배경도 미국 이주민들과 영국 사이에 목재에 대한 권리를 두고 일어난 갈등에서 기인했다는 해석은, 로마제국이 시민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무료 목욕탕을 운용하는 데 필요한 숲을 파괴해서 망했다는 해석처럼, 신선했다.

    펄린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길가메시’부터 1880년대 미국의 통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중동, 유럽, 서인도, 미국에 대한 이용 가능한 수많은 자료를 활용하여 지난 5000년 동안의 산림의 이용과 파괴 사례를 집대성하였다.

    ‘문명 발달에 있어 목재의 역할’이란 원저의 부제처럼, 이 책은 목재가 각 사회의 문화, 인구학적 특성, 경제, 정치, 외교, 기술 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통찰하고 있다.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샤토브리앙이 150년 전에 외친 ‘숲과 문명’ 간의 선언적 경구를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여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잡다한 나열식 서술방법이나 서양사 중심의 시각이 아쉽지만,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인간 중심의 역사 서술과는 다른 시각, 즉 숲(목재) 중심의 서술을 통하여 ‘세계 문명은 숲이 풍부한 지역에서 번성해 숲의 소멸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지구온난화, 사막화, 토양 유실, 생물다양성 감소 등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전 지구적 환경 문제의 배경에 숲의 파괴가 있고, 지구 환경을 지키는 일은 결국 숲을 지키는 일임을 주지시키는 데에 말할 수 없이 효과적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오늘날 환경 관련 필독서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


    <24>청일전쟁


    얼마 전 해군의 대형 상륙함인 독도함이 진수되었다.

     

    배수량이 1만4000t이고 700여 명의 병력과 헬기 15대, 전차 70대를 실을 수 있는 한국 해군 사상 최대의 군함이라고 한다.

     

    독도함 진수 직후 나라 안팎의 반응은 뜨거웠다.

     

    한국 네티즌들은 독도함을 타고 일본과 중국 연안에 상륙하는 해병대의 모습을 상상하며 열광했다.

     

    일본 언론은 ‘독도’라는 이름에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 한국의 해군력 증강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독도함 뉴스를 접하면서 천순천(陳舜臣)의 소설 ‘청일전쟁’(원제 ‘강은 흐르지 않고’)에서 묘사된 서해 해전을 떠올렸다.

    1894년 9월, 서해에서 벌어진 청나라와 일본의 해전은 조선과 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한 분수령이었다. 당시 청의 북양함대는 만만치 않았다.

    7000t이 넘는 순양함인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은 크기와 화력에서 일본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덩치만 컸던 북양함대는 일본 함대를 당할 수 없었다.

    청의 서태후가 해군 예산을 몽땅 빼돌려 이허위안(이和園)을 짓는 바람에 해전 당시 정원과 진원에는 주포 포탄이 세 발밖에 없었다.

    일찍이 해군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거국적으로 준비해 온 일본의 승리는 필연적이었다.

    정원은 침몰했고 진원은 좌초되었다가 일본군에게 나포되었다.

    진원은 일본 함대의 일원이 되어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이후에는 사격 연습의 표적으로 매각되었다.

    정원과 진원의 몰락과 함께 일본은 청을 대신하여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었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갔다.


    천순천의 ‘청일전쟁’은 흥미진진한 역사평설이다.

    설렁설렁 배웠던 우리의 근대사 실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충격적인 사실들로 가득하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호시탐탐 조선과 만주를 노리던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일본의 위협을 잠재우고 조선을 계속 장악하려 했던 청의 이홍장(李鴻章)과 위안스카이(袁世凱), 나라 안팎에서 밀어닥친 위기에 맞서 악전고투했던 조선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김옥균(金玉均), 전봉준(全琫準)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특히 천순천은 청과 일본의 협공에 맞서 조선의 운명을 부여잡으려 했던 김옥균과 전봉준에게 연민을 보인다.
     
    정변으로 잠시 정권을 잡았으나 청과 일본의 침략적 속성을 깨닫지 못한 김옥균, 일본의 침략성을 인지했으나 그것을 극복할 물리적 수단이 미약했던 전봉준. 천순천은 두 사람이 일찍이 서로 만나야 했다고 충고한다.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외세에 의해 각개 격파된 ‘개화파 엘리트’와 ‘농민군 지도자’의 운명은 작가가 보기에도 안쓰러웠던 것이다.

    청과 일본이 서해 해전을 벌일 당시 조선은 그저 관객이었다.

    그것도 승자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불안한 표정으로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슬픈 관객’이었다.

    그로부터 111년, 대한민국은 독도함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격랑 속에서 더 이상 관객일 수는 없다는 처절한 비원의 상징이다.

    여전히 이 나라에서는 수많은 ‘김옥균’과 ‘전봉준’이 나라의 진로를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애국심을 갖고 나라를 걱정할 것이다. 하지만 나라 안팎의 변화를 종합적으로 읽어낼 혜안을 지녔는지는 의문이다.

     

    바로 그 혜안을 기르려 할 때 ‘청일전쟁’은 참으로 소중한 거울이 될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대외관계사학



     <25>성서 밖의 예수


    내가 ‘성서 밖의 예수’(원제 ‘The Gnostic Gospels’)를 읽은 것은 10년도 훨씬 전이다. 학위 논문을 끝낸 후, 그동안 미뤄두었던 책들을 읽다가 이 책을 만났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글쓰기, 그리고 마치 추리소설을 보는 것 같은 내용 때문에 단숨에 읽은 기억이 난다.

     

    이 책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전통을 보는 관점뿐만 아니라, 텍스트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는 크다.

     

     

    1945년 12월, 나일 강 상류지역의 나그함마디(Nag Hammadi) 마을 근처의 산에서 어느 이집트 농부가 흙을 파던 중 높이가 1m나 되는 붉은색 토기를 발견했다.

     

    항아리 속에 있던 것은 13권짜리 오래된 파피루스였다.

     

     

    이 발견물의 정체가 밝혀지자, 학계는 엄청난 놀라움에 휩싸였다.

     

    이것은 4세기경의 콥트어(2∼3세기에 성립된 이집트 토착 기독교인의 언어)로 기록된 52종의 텍스트로서, 정통 기독교에서 ‘끔찍한 이단’이라고 정죄한 영지주의(靈知主義·Gnosticism)의 관점에서 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콥트어 판본은 1∼2세기에 그리스어로 기록된 원본을 번역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동안 영지주의는 정통파의 ‘저주’ 안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으나, 이제 이 발견으로 영지주의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이블’에 수록된 정통 복음서와 이른바 ‘영지주의 복음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다른 기독교 이해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영지주의자들이 예수의 부활, 창조주의 성격, 하느님의 남성성, 기독교인의 순교, 교회의 위계적 권위에 대해 정통파와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그 차이점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영지주의적 기독교인은 모든 인간에게 신성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보고, 이를 깨닫기 위한 ‘영적 지혜(gnosis)’를 추구하는 반면, 정통파 기독교인은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며, 예수를 통한 구원만이 유일한 구원방법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기독교사 연구에 혁명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이 텍스트는 1970년대에 ‘나그함마디 문고’로 일반에 공개되어 모두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페이젤스의 이 책은 나그함마디 문고의 전체적인 성격과 그 의미를 일목요연하고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초기 기독교는 한 가지가 아니었으며 저마다 다른 다양한 신앙노선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될 때까지 이 다양성은 유지되었으나, 점차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쪽이 이단(異端)으로 정죄되면서 이른바 정통 기독교로 단일화되어 오늘의 기독교 모습이 마련된 것이다.

     

     

    이 책은 1979년에 출간된 후 전미도서비평가상과 미국도서상을 수상했고 20세기의 100대 도서로 선정됐다.

     

    이 책의 매력은 정통 기독교의 ‘분신(alter-ego)’이라고 할 수 있는 영지주의 기독교의 모습을 단숨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정통 기독교는 영지주의와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세워 나가기 시작했으므로, 이 측면을 살피는 것은 오늘의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도저히 빼놓을 수 없는 점이다.

    장석만 종교문화硏 연구위원 종교학





    <26>말과 사물


    도서관에 가면 ‘말과 사물’은 철학 서가에 꽂혀 있다. 이 분류는 옳지 않아 보인다.

     

    이 책에서 파고드는 분야는 미술, 생물학, 경제학, 언어학 등을 망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 분류는 또 옳다.

     

    이 책은 이를 통해 우리 사고 형성의 근본을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분류와 질서 자체에 대해 묻는다.

     

     

    책은 서문부터 도발적이다. 중국의 어느 백과사전에 등장하는 동물 분류방식을 인용한다.

     

    황제에게 속한 것, 미라화한 것, 길들인 것, 젖 빠는 돼지, 주인 없는 개, 광폭한 것, 셀 수 없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포유류, 조류, 파충류 등의 체계를 단 하나의 진리로 가르치고 배워 온 우리를 잠시 포복절도하게 할 내용이다.

     

    이 분류의 인용을 시작으로 저자는 우리가 만들어 온 인식체계의 근원을 흔든다.

     

    말로 구축한 세계의 실상과 허상을 허물어 나간다.

     

     

    여러 분야를 섭렵하며 저술된 책은 의외로 많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에 전문가적 지식을 쌓고 이들을 통섭의 수준으로 서술한 책은 많지 않다.

     

    그리고 각 분야의 근간을 이처럼 자신 있게 들춰내며 지식의 배치와 질서를 파헤쳐 던져 놓은 책은 거의 없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독보적인 가치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는 것처럼 고난스럽다.

     

    저자는 독자의 이해를 요청하지 않는다.

     

    뻔뻔스러울 만큼 마음대로 자신이 필요한 개념과 단어를 풀어놓는다.

     

    번역문은 그런 만큼 더 뻑뻑하고 버겁다.



    그러나 쉽게 읽히지 않는 문장 너머 곳곳에 드러나는 저자의 지적 통찰력은 가히 압도적이다.
     
    그가 바라보는 화폐의 유통은 보통명사가 다양한 사물을 표상하고, 여러 개체가 종과 속으로 분류되기 시작하는 사실과 다른 맥락이 아니다.
     
    18세기 이전 모든 품사는 명사의 지배하에 있었고 모든 동사는 존재한다는 의미로 환원될 수 있었다.
     
    그에게 시간과 공간은 서로 다른 사건이 아니고 병치되어야 하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지식의 고고학을 통해 그가 발굴해내는 것은 인간이다.

     

    그의 발굴에 의하면 인간이라는 개념은 유럽에서 겨우 200여 년 전에 창조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과학은 그 인간의 개념을 인식하는 방법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인식의 종말이 지금 다가오고 있다.

     

     

    ‘말과 사물’을 포함해 푸코의 저작은 지적인 폭탄들이었다.

     

    이성에 대한 우리의 절대신뢰가 의심받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도 푸코는 유행병처럼 번졌다.

     

    푸코를 아느냐고 물었다.

     

    지금도 번역되어 서점의 서가에 새로 꽂히는 철학 서적은 대개 카를 마르크스와 푸코의 교집합이거나 합집합 어딘가에 있다.

     

    감옥이 중요한 건물형식으로 주목받고 분석되기 시작한 건축계의 움직임도 모두 그의 영향을 보여 주는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푸코를 아는 것이 아니다.

     

    푸코를 통해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금을 긋는 인문계 자연계의 분류는 젖 빠는 돼지, 주인 없는 개의 분류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강요된 텍스트의 허무맹랑한 억압이 유령처럼 우리 사회에 떠돌아다니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서현 한양대 교수·건축학



    <27>좋은 기업을 넘어…


    비즈니스 서적들은 유행을 심하게 타기 때문에 세월을 넘어서 두고두고 읽힐 만한 책을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야말로 비즈니스 서적들 가운데 고전이라 이름 붙여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정독하면서 꼼꼼히 읽어 가다 보면 이 책은 기업과 같은 조직을 위한 제언뿐만 아니라 성공을 위해서 직업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풍부한 조언을 담고 있다.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란 예사롭지 않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위대해지는 것이 드물고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이런 질문에 답을 찾는 데 고심하는 독자라면 짐 콜린스와 함께 유쾌한 지적 여행을 떠나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좋은 조직을 위대한 조직으로 전환시키는 게 도대체 뭔지를 찾는 것이다.

     

    저자는 5년간의 탐구를 통해서 얻은 결과로 상당수가 전통적인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개념 체계를 찾아 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조직이라도 그런 개념 체계를 적용할 수 있다면, 그 규모와 실적을 충분히 키울 수 있고, 위대한 조직으로 발돋움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발견한 개념 체계는 무엇인가?

     

    규율 있는 사람들이 규율 있는 사고로 규율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규율 있는 사람들은 2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우선은 영웅적인 행동과 도도한 개성을 가진 리더들이 위대함을 낳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위대한 조직을 만들어 낸 리더들 가운데 상당수가 나서지 않고 조심스러워하는 겸양과 직업적 의지의 역설적인 융합이란 특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비전과 전략을 떠들썩하게 앞세우기보다는 적임자를 적합한 자리에 앉히는 일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들 머릿속에는 항상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는 믿음이 들어 있다.

     

     

    두 번째로 규율 있는 사고 역시 두 가지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기업이 직면한 냉혹한 사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어려움이 있어도 결국 우리가 성공할 수 있고 또 성공하리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유지해야 하며, 그와 동시에 눈앞의 현실 속에 있는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할 수 있는 규율을 가져야만 한다”는 이른바 스톡데일 패러독스를 조직원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것저것 사업을 벌이지 않고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일, 경제 엔진을 움직이는 일, 그리고 당신이 깊은 열정을 가진 일이란 세 가지 요소를 모두 만족하는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규율 있는 행동은 내부에 규율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이를 바탕으로 순수한 탁월성을 향해서 기술적인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인 혁신을 만들어 낸다.

     

     

    이 같은 원칙들을 이벤트성 행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일관되게 한 방향으로 추진하는 기업들은 날로 가속도가 붙기 때문에 좋은 기업을 넘어서 위대한 기업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28>상도-최인호


    한평생을 살면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자 기쁨이다. 의주 상인 임상옥의 일대기를 담은 최인호의 장편소설 ‘상도’와의 만남은 기업을 경영하는 나에게는 바로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거상 임상옥은 죽기 직전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였고,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오늘을 사는 기업인들에게 사심(私心)보다는 공심(公心)을 가지고 경영에 임하라는 중요한 사표(師表)를 던져 줌과 동시에 끊임없는 결단의 순간을 맞게 되는 현대의 기업 경영자에게 리더십에 대한 몇 가지 덕목도 제시해 준다.

     

    임상옥이 석숭 큰스님을 만나서 받은 ‘죽을 사(死)’와 ‘솥 정(鼎)’과 ‘계영배(戒盈杯)’의 세 가지 활구(活句)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 베이징 인삼 상인들의 불매동맹에 맞서 ‘죽을 사’의 가르침에 따라 인삼을 불태움으로써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낸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즉 ‘반드시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기를 꾀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교훈을 지킨다.

     

    경영자는 ‘소명의식(召命意識)’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두 번째, 홍경래가 임상옥의 상가에 점원으로 들어와 혁명에 끌어들이려 할 때, ‘솥 정’자의 의미를 새겨 권세의 꿈을 접음으로써 상인인 자신의 분수를 지킨다.

     

    도가(道家)에서는 지위, 명예, 재물 등을 삼욕(三慾)으로 보고 솥의 세 발과 같은 것이라 했는데, 이것을 다 소유하려 하면 솥이 쓰러지거나 뒤집힌다고 하여 제 분수를 알아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경영자가 공심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옛 친구 이희저의 홍경래의 난 가담과 관련해서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위기에 처한 임상옥은 ‘계영배’가 지닌 화두로 위기를 모면한다.

     

     ‘계영배’는 춘추오패의 한 사람인 제나라 환공이 생전에 자리 오른쪽에 두고 항상 넘치는 것을 경계했다고 하여 좌우명(座右銘)이라고 일컬은 술잔처럼 잔의 70% 이상 술을 채우면 술잔이 비워지는 것으로 ‘가진 것을 가득 채우려 함은 그만 그치는 것만 못하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는 경영자는 중용(中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필자는 얼마 전에 조선 백자와 분청사기 부문의 명장인 항산 임항택(恒山 林恒澤)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항산 선생은 필자에게 ‘구름을 경작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으로 운경(雲耕)이라는 호(號)를 지어 주었다.

     

    구름이란 세상, 회사, 그리고 자신일 수도 있으며, 서두르지 않고 좋은 씨를 골라 정성껏 심고 가꾸는 농부의 마음으로 세상을, 회사를, 자신을 경작하라는 의미로 필자는 받아들였다.

     

     

    거상 임상옥이 보여 주었던 ‘상인의 길’은 곧 오늘날의 경영자에게 소명의식과 공심과 중용을 지키는 것이 참다운 경영의 길이라는 준엄한 교훈을 던져 준다.

     

     

    200여 년 전 상인으로 일가를 이룬 임상옥이 지녔을 정신으로 여겨지는 3가지 덕목도 결국은 ‘자신을 경작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최인호의 ‘상도’가 이 시대 경영자에게 소중하게 읽히는 것도 그런 까닭

    조운호 웅진식품 대표이사





    <29>한밤의 아이들


    1947년 8월 15일 자정,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을 성취한 순간 뭄바이의 한 병원에서 살렘 시나이라고 불리게 되는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신생국 최초의 신생아에게 주는 상금을 노린 살렘의 부모가 때맞춰 연락한 덕분에 그의 출생을 축하하는 네루 총리의 공식 편지가 그의 사진과 함께 세상에 알려진다.

     

    이렇게 자유로운 인도라는 신화에 둘러싸여 삶을 시작한 살렘은 그 신화가 초래하게 되는 혼란과 재난을 두루 거친다.

     

    그래서 인도-파키스탄전쟁을 비롯한 갖가지 풍상을 겪은 이후 그는 과거를 회고하며 “나를 이해하려면 당신은 한 세계를 삼켜야 한다”고 말한다.

    ‘한밤의 아이들’은 작중 화자 살렘이 그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자기 운명이 인도의 운명과 불가분으로 맺어져 있다고 믿는 인물답게 그는 자신의 체험을 기록하는 동시에 독립 이후 인도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통상적인 자전적 서술에서와 달리 역사의 추세에 따라 조리 있게 펼쳐지는 개인적 정체성을 낳지 못한다.

     

     

     

    수많은 세계를 삼켜 온 그의 기억은 잡다한 파편들로 흩어지곤 한다. 후식민지 인도의 특징을 이루는 모순과 분열을 그는 파편적이고 다형적인 서사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는 셈이다.

     

     

     

    ‘한밤의 아이들’은 여담 많은 메타픽션적 자서전이라는 면에서는 ‘트리스트럼 샌디’를, 역사의 악몽을 다루는 교양소설이라는 면에서는 ‘양철북’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유럽 소설의 어떤 선례도 이 소설의 특징을 설명하진 못한다. 인도 대중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화자 살렘, 저자 루시디가 고안한 것은 경이로운 인물과 사건을 포용하는 서술 방법이다.

     

     

    리얼리즘의 구속에서 벗어나 경이로운 것을 회생시키려는 시도는 살렘의 초자연적 감응력을 전달하는 데서부터 빈민굴 마술사들이 일으킨 기적을 서술하는 데 이르기까지 소설 전편에 걸쳐 있다.

     

     

     

    ‘한밤의 아이들’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작품에서 그렇듯이 진실을 구제하는 방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실적인 것과 진실한 것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라고 믿고 있는 살렘은 인도인의 삶을 환상과 현실, 마술과 이성이 뒤섞인 상태 속에 놓고 이야기한다.

     

     

    그 스토리텔링은 승리자들이 만들어 낸 인도의 역사와 다른 방식으로 인도인의 경험을 지각하게 한다.

     

     

    그것은 인도의 공식 역사에 감추어진 허위와 모순에 대한 인식을 고조시키는 한편, 기억과 서사의 예술이 가지고 있는, 그 나름의 현실을 창조하는 권능을 부각시킨다.

     

     

    루시디가 세계 문단의 총아로 부상한 1980년대는 소설이 한창 부흥 중이던 시기이다.

     

     

    그 부흥은 보통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주요 원천은 라틴아메리카를 시작으로 유럽의 옛 식민지 국가에서 일어난 소설의 혁신에 있다.

     

     

    ‘한밤의 아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후식민주의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작품에 해당된다.

     

     

     

    한국의 작가나 독자들은 소설 또는 문학의 위기를 즐겨 말하지만 그것이 소설이라는 전 지구적 문학 형식의 힘을 깊이 이해한 발언인가는 의문이다.

     

    아쉬운 점은 1989년에 출간된 한국어판의 번역이 조악한데다 이미 절판됐으며, 새로운 한국어판 번역본은 아직 출간 준비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다.

     

     

    황종연 문학평론가 둥국대 국문과 교수


    <30>씰크로드학


    한국인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정신문명의 총아인 학문 세계에서 우리 것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이 책 ‘씰크로드학’을 보면 바야흐로 우리에게도 세계적인 학문이 잉태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바로 ‘씰크로드학(The Silkroadology)’이다.

     

     

    이는 인류 문명 교류의 과거부터 미래까지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동서문명사 연구자인 정수일 교수가 제창한 학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중세 중앙아시아의 동서를 잇는 통로로만 알려졌던 실크로드를 구석기시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를 새롭게 관통하는 키워드로 제시한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따라 전개된 인류 문명의 교류상을 새롭게 정립했다. ‘씰크로드학’의 개념과 내용 및 의의, 실크로드의 전개 과정, 이 길을 통해 진행된 각종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교류상, 그리고 이 길을 통한 교류의 문헌적 및 유물적 전거 등을 810쪽에 담아 논리정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수천 년 동안 실크로드를 통해 진행되어 온 문명교류의 역사와 제반 현상을 학문적으로 집대성한 역저다.

     

    물론 실크로드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초반부터 세계적으로 상당히 축적돼 왔다. 그러나 대부분 중앙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교통사나 지역학 또는 몽환적 이미지의 이색 취향에 그쳤었다.

     

     

    이 책은 종래 학계에서 제시한 실크로드 개념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환(環)지구적 문명교류 통로의 개념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각별한 독창성이다.

     

     

    그래서 중앙아시아 일대의 오아시스를 연결한 ‘오아시스로’와 북방의 ‘초원로’, 실크로드를 대체한 것으로 간주되던 바닷길인 이른바 ‘향료길’까지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고, 17세기 스페인이 이용했던 ‘태평양 비단길’까지 그 범위를 확장시켰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17세기까지, 오랜 세월 실크로드를 따라 전개된 동서문명 교류를 다루면서 종래의 제한적 실크로드의 관점을 타파한 점, 15세기 이래 신구 대륙 간에 교류가 이뤄졌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실크로드의 범위를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까지 확대한 점은 신선하다.

     

     

     

    세계 문명 교류의 중심이었던 실크로드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고대 한국이 이와 동떨어진 곳이 아니었다는 시각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유럽에서 출발한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역이 중국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이로써 고대 한국이 세계사의 변방이 아닌 세계사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이 책에서 정 교수의 주장은 아주 분명하다.

     

     

    문명은 서구인들만의 창조물이 아니라 인류공동의 소유물이라는 대목에서는 독자들 역시 크게 공감할 것이다.

     

     

    이런 진일보한 역작이 탄생한 곳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감옥이었다.

     

     

    정 교수는 ‘외국인 위장 간첩’으로 활동하다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 기소돼 1996년 7월부터 2000년 8월까지 복역했으며 2003년 5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옥중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은 그는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을 생각하며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해 출옥 후인 2001년 이 책을 출간했다.

     

     

    동서문명교류사의 역저는 그렇게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박진호 문화재복원 전문가 전주대 강사


    <31>숨겨진 힘, 사람


    사우스웨스트항공사 직원들은 더 많이 일하고 조금 덜 받는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 중의 하나로 꼽힌다. 직원들은 활기차고, 자율적이고, 일을 즐기고, 충성심이 강하다.

     

     

    사람들은 이 회사가 훌륭한 기업이라고 말한다. 비결이 무엇일까?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간단하다.

     

     

    치밀한 전략도, 첨단 기술도 없다. 크고 작은 많은 항공사가 사우스웨스트의 성공을 부러워하며 경영전략을 모방하려 했다.

     

     

     

    뱅가드, 리노, 키위에어 등 신생 항공사는 사우스웨스트를 벤치마킹하여 따라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컨티넨털, 유나이티드 등 일부 메이저 항공사들 역시 사우스웨스트의 비즈니스 모델을 차용했지만 실패했다.

     

     

    사우스웨스트는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경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인 허브 켈러허는 이 비결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이다.

     

     

    그것은 다른 경쟁사들이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경쟁력이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애사심, 즉 기업문화나 정신을 잃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 정신을 잃으면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경쟁력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신과 문화, 즉 사람이 사우스웨스트의 모방할 수 없는 경쟁력이다.

     

     

     

    이 책은 사우스웨스트항공사를 비롯하여 가장 성공적인 기업 8개의 사례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독자들은 마이크로소프트조차 20년이 걸렸던 시가총액 1000억 달러의 기록을 12년 만에 달성한 첨단 정보기술(IT) 산업의 시스코시스템스를 밀착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사양 산업에서 성공을 건져 낸 미국 최대의 남성 맞춤복 회사인 맨스웨어의 내부로 잠입할 수 있으며, 노사 갈등 때문에 문을 닫았다가 가장 모범적인 노사 화합을 이뤄 낸 NUMMI의 감동적 반전을 흠뻑 맛볼 수 있다.

     

     

     

    구체적인 기업들의 사례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단순한 사례집이 아니다.

     

     

    지나치게 전략과 효율성에만 몰두하는 경영이론의 허구성을 강하게 비판하고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기업’의 효과와 성공의 요소를 체계화한 좋은 이론서라 할 수 있다.

     

     

     

    저자들의 결론은 분명하다.

     

     

    일맛을 아는 직원들, 공정한 대우와 성취감을 주는 업무 및 현장을 제공하는 경영, 공동체 의식과 가족적 분위기 속의 직원 존중 문화가 최고 기업들의 성공 비결임을 역설한다.

     

     

     

    특히 인재전쟁의 강박감 속에서 일반화되어 가는 5∼10%의 유능한 직원들에 대한 특별관리가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 다수를 소외’시키는 독소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100% 능력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현장에서 그 평범한 위대함이 발현되게 하는 것이 바로 경영의 묘책임을 설파하고 있다.

     

     

    제프리 페퍼의 내공이 돋보이는 쉽고 재미있고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좋은 책이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장




    <32>코스모스



    어린아이가 자아(自我)를 가지는 순간은 어느 때일까,

     

    아마도 아이가 엄마와 눈을 맞추며 심각하게 ‘엄마, 난 어디서 왔어?’를 묻는 순간이 아닐까.

     

     

    매일 매일 세상이 즐겁고 신기하기만 하던 아이는 어느 순간, 자신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어느 날인가, 아이는 엄마가 동생이라고 말하는 갓난아기와 마주친다.

     

    시간이 지나면서 갓난아기는 조금씩 자라나고, 아이는 자신 역시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자신도 동생처럼 어린 아기에서 조금씩 변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물은 자라고 있으며 그 변화되는 과정을 거꾸로 되짚어 가다 보면 원래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논리적 공식을 깨달은 아이는 엄마에게 묻는다,

     

     

    나는 어디서 왔느냐고.

     

     

    그리고 그 순간 아이의 사고 폭은 빅뱅을 거쳐 독립된 인격체로 성큼 자라날 것이다.

     

     

     

    인류 문명과 지혜의 깨달음도 바로 이 시점에서 생각되지 않았을까.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인류탄생설화는 존재한다. 때로는 진흙에서, 때로는 나무에서, 때로는 돌멩이에서 생겨나는 등의 차이는 있지만, 아무리 작은 부족이나 촌락에도 저마다 기원이 되는 뿌리가 있다.

     

     

    이는 인류에게 먹고 자고 섹스하는 수준의 생물학적 본능을 넘어서, 자신의 유래를 거슬러 조상의 시원(始原)을 찾기 위한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짐으로써 인간의 정신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면서 말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인류의 기원, 생물의 기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구와 우주의 최초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오래전, 우리의 조상들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들은 전지전능한 존재인 신의 말씀으로 과거를 믿었으며, 밤하늘의 별을 읽고 점성술로 미래를 예언하며 복잡한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찾으려 했다.

     

     

    아직도 하늘을 읽고 인간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 방법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현대인들은 ‘과학’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통해 우주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과학책은 사실에 치우쳐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기 쉽다.

     

     

    그렇다고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와 은유를 지나치게 사용하다 보면 과학의 본질에서 멀어지기 십상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면서도 내용이 알찬 책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영문판으로만 600만 부가 넘게 팔리는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21세기 신고전으로 꼽히게 된 이유일 것이다.

     

     

    세이건은 복잡하고 골치 아플 것 같기만 했던 우주의 시작과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그 옛날 모닥불 곁에 둘러앉아 현명한 노인이 어린 소년들에게 신과 거인과 요정이 지배하던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으로 이야기한다.

     

     

    인터넷과 TV가 쏟아내는 정크푸드에 질린 현대인의 뇌를, ‘코스모스’의 나직한 어조와 사진들은 정성들여 끓인 진한 죽처럼 풍부하게 감싸준다.

     

     

    그리고 덤으로 ‘코스모스’는 당신이 ‘창백한 푸른 별’에 홀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마음의 위안까지 안겨 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33>임꺽정



    임꺽정은 조선 명종조 사람이다.

     

     

    이때는 윤원형과 이량 등 척족이 발호하고 흉년이 계속되며 관아의 수탈이 횡행한, 의적이 등장하기에 완벽한 시기였다.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는 1888년생.

    1910년 당시 금산 군수였던 아버지 홍범식이 일제의 병탄에 항거하여 순국하자 이 땅을 떠나 중국, 남양 등지를 떠돌았고 귀국 후에는 3·1운동의 선봉에 선 선각자였다.

    그가 ‘임꺽정’을 집필한 것은 1930년 전후 일제강점기의 한가운데였다.

    총 1120여 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방대한 분량의 저작에서 홍명희는 서울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송도, 강서 구룡산, 영변 묘향산, 백두산, 금강산에 이르며 남으로 장흥, 보성, 순천, 지리산, 양주, 화개, 하동, 창녕, 문경새재 등을 아우르는 드넓은 지역을 오가며 임꺽정의 행로를 그려 낸다.

    임꺽정과 일곱 의형제의 활약상을 따라가며 읽노라면 소설은 한국판 삼국지나 수호전처럼 흥미진진하며 홍길동, 전우치의 후예인 듯 기이한 임꺽정의 행적, 걸출한 무술은 무협지처럼 우리를 빠져들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임꺽정’은 전투와 싸움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 속에 생생하게 재현된 임금과 왕비, 옹주와 후궁, 세자와 왕자들이 빚어내는 궁중의 사연들, 고관대작들이 벌이는 사화는 우리의 역사 공부를 돕는 한편 오롯이 살아 있는 당대 민중 한사람 한사람의 삶은 우리의 가슴을 애잔하게 적신다.

    그 속에는 사랑이, 치정이 있고 배반과 음모가 있으며 방랑과 좌절과 암투가 있다.

    힘센 자와 약한 자, 가진 자와 가난한 이들이 죽일 듯 미워하며 영위해 나가는 한 생은 엄숙하고 진지하다.

    여인과 남정네가 등장하는 그림은 선 곱고 화려한 채색화 같고 어린아이와 나이든 이가 어우러져 그리는 그림은 투박하나 선명한 민화처럼 다가온다.

    “민족 자료의 집대성이요, 조선 어휘의 일대 어해(語海)”라 평했던 이효석의 말처럼 ‘임꺽정’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과 잊고 있던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넘친다.

    소설을 읽으며 꺽정과 곽오주, 천왕동이와 함께 산을 타며 호랑이와 숨 막히는 일전을 벌이고 토끼와 여우, 노루를 쫓으면서 우리는 500년 전 조선의 벽화 속으로 들어간 듯, 꿈속의 한 장면을 만난 듯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알려진 대로 홍명희는 광복 이후 조선문학가동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가 1948년 분단을 막고자 월북한 후 남하하지 못하였다.

    그는 격동기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고 그 중심에서 온몸으로 시대를 앓던 작가였으며 소설 ‘임꺽정’은 그의 그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보여 주는 대작이다.

    ‘임꺽정’을 두번 세번 거듭 읽으면 역사란 무엇인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 모습인지, 나는 대체 누구인지, 고민하고 고민하는 작가의 맨얼굴이 다가오고 우리 시대와 우리 자신에 대해 통렬한 반성이 인다.

    짧고 빠르고 간결한 표현이 미덕인 이 시대. ‘임꺽정’은 1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과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여전히 재미있게 읽힌다.

    홍명희의 천재성일까, 임꺽정의 힘일까.

    서하진 작가





    <34>플로베르의 앵무새


     

     

     

    영국인 의사 제프리 브레이스웨이트는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루앙 병원 전시관에서 박제된 앵무새를 본다.

     

     

    횃대 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플로베르가 루앙 박물관에서 빌려온 새. 소설 ‘순박한 마음’을 쓰는 동안 책상에 놓았던 새. 이름은 룰루, 소설 속에 나오는 펠리시테의 앵무새이며,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

     

     

     

    아마추어 플로베르 연구가인 브레이스웨이트는 이 박제에 흥미를 느낀다.

     

    하지만 그가 크루아세 기념관에 가면서 이 박제의 가치는 모호해진다.

     

    그곳에서도 플로베르가 키웠다는 또 다른 앵무새의 박제를 만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진위를 가리기 위해 그는 학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장편소설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두 개의 박제를 둘러싼 모험담이다.

     

    표면적으로는 어느 게 진짜 플로베르의 책상에 놓였던 건지 밝히는 과정처럼 보인다.

     

    심층적으로는 역사(혹은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게 가능한지 문제 삼는다.

     

    최근 아내와 사별한 브레이스웨이트는 아내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절망감에서 ‘플로베르 순례’를 떠났던 것이다.

     

     

    브레이스웨이트는 플로베르에 관한 온갖 지식들을 갖고 있다.

     

    그 지식들은 때로 통념을 배반하고, 때로는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다면체와 같은 플로베르의 삶을 두고 브레이스웨이트는 배에 달린 망원경을 빗대 얘기한다.

     

    이런 식이다.

     

    ‘과거란 멀리 사라져 가는 해안선과 같다. 우리는 변치 않는 진리를 바라보듯이 망원경으로 해안을 본다.

     

    하지만 망원경에 시시각각 비치는 해안은 환상일 뿐이다.’

     

     

    언어 감각이 뛰어난 반스가 장마다 다르게 구사한 문체가 객관적인 사실을 비춰 보이는 이 망원경의 역할을 한다.

     

    그의 소설 형식은 내용을 포함한다.

     

    플로베르의 말에 따르면 “형식은 사고(思考)의 육체”다. “예술에 있어 모든 건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달려 있다.”

     

     

    소설에는 브레이스웨이트가 작성한 플로베르의 세 가지 연보가 나온다.

     

    일반적인 연보, 죽음 질병 개인적 비극 등이 나열된 부정적 연보, 편지에서 인용한 글귀로 재구성한 연보 등이다.

     

    플로베르 작품 속의 동물들 이야기를 다룬 ‘플로베르의 동물 열전’도 인상적이다.

     

    플로베르는 자신이 ‘곰’이라고 생각했다.

     

     

     ‘곰’과 ‘플로베르’를 둘러싼 반스의 지식은 논문 한 편을 쓸 정도로 해박하다.

     

     

    이 밖에도 이 소설에서는 플로베르 소설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눈동자 색깔을 둘러싼 ‘에마 보바리의 눈’, ‘철도와 플로베르’ 등이 소논문, 시험 문제, 혹은 단편소설 등의 형식으로 나온다.

     

     

    다양한 만화경의 세계는 결국 어느 쪽이 진짜 플로베르의 앵무새인가라는 물음으로 집약된다.

     

     

    브레이스웨이트의 아내 엘렌은 에마 보바리처럼 간통을 저질렀다. 이 부부는 ‘행복했고 불행했고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자살을 시도한 엘렌의 호흡 보조장치의 스위치를 누르면서 브레이스웨이트는 이렇게 생각한다.

     

     

    “엘렌. 나의 아내. 죽은 지 100년 되는 어느 외국작가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도 더 알지 못한 사람.” ‘플로베르의 앵무새’에 나온 모든 다채로운 글들은 바로 브레이스웨이트의 이 독백에 대한 주석이다.

     

     

     

    김연수 작가




    <35>대머리 여가수


    1950년대는 세계 문학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특이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천재 작가가 나타나 기존의 문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들을 동시 다발적으로 발표한다.

     

    소설에서는 반소설이라고 하는 누보로망이, 희곡에서는 반연극이라고 하는 부조리극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1950년대 10년 동안 세계 문학이 이룩한 성과는 과거 100년 동안 이룩한 성과와 맞먹는다고 할 수도 있을 만큼 다양하고 풍성하다.

     

    부조리극의 대가 이오네스코도 이 시기에 나타난 대표적 천재 중 한 사람이다.

     

     

    이오네스코의 희곡들은 재미있다. 무대에 올려진 연극을 보지 않고 희곡만 읽어도 소설을 읽는 것 못지않은 재미가 있다.

     ‘대머리 여가수’ ‘수업’ ‘의자’ 등 수많은 그의 희곡을 읽다 보면 무대 위의 장면들이 훤히 보이는 듯하면서 그 황당하고도 기발한 이야기에 금방 매료된다.

     이오네스코와 쌍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들이 희곡만 읽어서는 그다지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대머리 여가수’는 스미스 부부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던 그들의 대화는 점차 황당무계하게 변해 가기 시작한다.

    가령 환자의 간을 수술하기에 앞서 멀쩡한 자신의 간을 먼저 수술해 본 의사의 이야기라든가, 2년 전에 죽고 3년 전에 신문에 부고가 나서 1년 반 전에 장례식에 갔던 “대영제국에서도 가장 멋진 시체”였던 잡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그런 것이다.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그때 마틴 부부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방문하는데, 마틴 부부는 자신들이 부부 사이라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린 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여기에 하녀와 소방대장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처음에 그저 황당한 코미디처럼 보이던 이 연극은 점차 인간의 근본적 비극, 즉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우스꽝스러운가 하는 걸 여실히 드러낸다.

    이런 것을 두고 희비극이라 하는데, 대부분의 이오네스코의 작품은 희비극이다.

    가령 ‘의자’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무대 가득히 빈 의자들을 갖다 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폐하를 맞아 감격에 겨워하는 노인과 노파의 행동을 보노라면 충격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돌이켜 보면 이오네스코 이전의 연극은 구체적인 어떤 문제를 다루었다.

    헨리크 입센은 ‘인형의 집’에서 여성의 인권 문제를, 안톤 체호프는 ‘벚꽃 동산’에서 몰락해 가는 귀족을 통해 인간의 페이소스를 다뤘다.

    그러나 이오네스코와 베케트에 이르면 이런 개별적인 문제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여 준다.

    이오네스코 자신은 “내 눈에 우스꽝스러운 것은 특정한 사회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통찰력이 50년대 작가들의 천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오네스코의 그 빛나는 연극들을 우리나라 대학로에서는 무대에 올릴 수가 없다고 한다. 관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일지 작가






    <36>신동엽전집



    흔히 1980년대를 ‘시의 시대’라 부른다.

     

    당시에는 시인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박해하는 ‘80년대적’ 정치 현실을 풍자하며 민중의 고통을 절절히 노래하는 민중시와 노동시가 크게 유행했다.

     

     

    ‘광주’도 그들이 노래하는 한 코드였다.

     

    오죽하면 시인이라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광주여, 무등산아 하고 외치며 무등산의 흙을 한 삽씩 퍼가는 통에 무등산이 사라졌다고 노래한 시인이 있었을까?

     

    이렇게 그들은 민족적 현실과 역사성에 주목했다.

     

     

    그러나 1960년대적 현실만 해도 동족상잔의 깊은 상처로 말미암아 민족의 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인은 예술지상주의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신동엽은 대학의 연구실이나 찻집 속으로 도사려 들어가 단자(單字)미학이나 어구 나열법에 하염없이 신경을 쓰고 있는 그들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정치는 정치가에게, 문명 비판은 비평가에게, 사상은 철학 교수에게, 대중과의 회화는 산문 전문가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철저히 언어 세공만을 전업으로 삼아 외래 사조에 휩쓸려 제정신을 못 차리는 비주체성을 통렬하게 공박했다.


    그러면서 그는 성서나 불경이나 오천언(五千言·노자 도덕경) 같은 인류 유산 가운데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수준의 절절한 시편, 즉 ‘전경인(全耕人)’ 정신이 투영된 거대한 시편들을 쓰고자 했다.

     

    그에게 시란 바로 ‘생명의 발현’이었다.

     

    시란 ‘우리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이기도 했다.

     

     

    그의 시에서 우리는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력과 민중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읽을 수 있다.

     

    특히 민족사의 시원(始原)에서부터 동학혁명, 3·1운동, 4·19혁명을 관통하면서 ‘연민이 아는 민중의 고통, 분노가 보는 사회의 혼란과 불의, 그리고 하늘의 이상’(김우창)을 절절하게 노래한 장시 ‘금강’에서는 역사에 대한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그의 강렬한 신념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시에서 돌아가고자 하는 세계는 땅에 누워 있는 씨앗의 마음이었다.

     

    그 세계는 ‘모오든 쇠붙이’는 사라지고 오로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아 있는 세계여야 했다.

     

    곧 분단이 해소되어 인간의 가능성을 한없이 열어 가는 통일된 조국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시에서 구호적인 냄새는 맡을 수 없다.

     

    동시대의 또 다른 탁월한 시인 김수영이 “강인한 참여의식이 깔려 있고, 시적 경제를 할 줄 아는 기술이 숨어 있고, 세계적 발언을 할 줄 아는 지성이 숨쉬고 있고, 죽음의 음악이 울리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1950년대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면서 보편적 인간 정신을 수준 높은 경지로 노래할 수 있는 매우 드문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한 권의 전집으로 정리되었는데 한때 이 책은 금서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은 그의 시를 남몰래 읽으며 시정신의 맥을 이어 갔다.

     

    1980년대의 시인들은 공통적으로 그의 시정신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정신은 지금까지도 큰 강이 되어 우리 가슴속을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한기호 출판평론가 출판마케팅연구소장



    <37>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일본 역사책 파문이 말해 주듯 교과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결코 가벼운 저술은 아니다.

     

     

    학계의 누적된 연구 성과가 객관적 보편적 시각으로 빠뜨림 없이 망라돼 소화, 정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崔淳雨·1916∼1984)는 65세 때인 1980년 틈틈이 발표한 짧은 에세이를 모아 장르별로 나눠 ‘한국미 한국의 마음’을 펴냈다.

     

     

    이를 교과서로 지칭함은 결코 폄훼가 아닌, 우리 모두의 필독서란 의미이다.

     

    전문적인 논문이나 체계적인 논술은 아니나 때론 그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전문학자들에게도 여러 측면에서 두루 시사함이 크다.

     

    미술에 대한 일반인의 접근이 쉽도록 상태가 양호한 도판을 한쪽에 과감하게 한 점씩 실은 이 아름다운 책은 조기에 절판된 후 더는 나오지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1992년 ‘최순우 전집’을 간행한 출판사 학고재에서 1994년 저자의 10주기를 맞아 순서에 변화를 주고 내용을 세분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비록 흑백이지만 삼국시대 토기부터 조선 말 회화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 전반에 대한 친절한 입문서이며 안내서이다.

     

    ‘한국미의 산책’에서 ‘흔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20개의 주제(보급판은 17개 주제)로 나누어 회화 조각 건축 공예 등 우리 전통미술 전반에 관한 이야기의 타래를 풀어 나갔다.

     

     

    그러나 무미(無味)한 인문학의 개설서나 그야말로 딱딱한 교과서와는 다르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표현대로 ‘이슬보다 영롱하고 산바람보다 신선한’ 미문(美文)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과 추구, 아름다움을 보고 깊이 느끼고 사랑했던 저자. 미술사학자로서의 그의 생활은 한국미의 추구와 실천 그 자체였다.

     

     

    이 책을 들고 첫 쪽을 펴면 그냥 빨려 들어가 좀처럼 놓기 힘들다.

     

    그리고 우리는 뿌듯하고 행복하다.

     

    이 책은 겨레와 전통문화에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미술사가나 미학자 내지 평론가의 존재는 그들이 느끼고 깨달은 아름다움의 내용과 핵심 그리고 본질을 일반인에게 이해시키고 인식시킴에 있다.

     

    즉 조형 언어에 낯설어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문자로 통역해 주는 역할이 그들의 임무이다.

     

     

    ‘한국 미술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유섭(高裕燮·1905∼1944)이 1934년 서른의 나이로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해 타계하기 전해인 1943년 최순우는 박물관에 입사한다.

     

     

    이는 박물관의 법통(法統)을 전수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박물관 한곳에서 41년 동안 한 우물을 판 박물관인은 전무하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천부적인 안목과 혜안을 지닌 저자는 수많은 문화유산을 실제 보고 만지며 아름다움의 본질을 온몸으로 체득(體得)했다.

     

     

    그러고 나서 터져 나온 사자후(獅子吼)이기에 독자의 가슴에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




             

    <38>오만과 몽상
     



    박완서는 사람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문제들에 부닥치게 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이야기해 주는 훌륭한 작가다.

     

    그녀의 작품 ‘오만과 몽상’은 욕망과 이상의 변주곡 속에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교양적 측면이 강렬한 작품이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스탕달의 ‘적과 흑’,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읽어 보면 주인공과 그 밖의 인물들이 빚어내는 잡다한 세류와 세풍을 냉정하게 묘사해 나가면서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 묻는 차가운 이성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는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들이 빚어내는 비속한 장면들, 알게 모르게 박두해 오는 파국,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찾아오는 참담한 깨달음을 용서 없이 전개해 나간다.

    그가 바로 작가인 발자크요, 스탕달이요, 플로베르다. 그리고 박완서가 바로 그러하다.

    ‘오만과 몽상’은 역설적이고 상징적인 한국적 상황을 배경 삼아 두 사람의 인생을 그려 나간다. 두 남자가 있다. 현은 부잣집 막내아들, 남상은 가난한 집 장손이다. 현은 친일파의 후예, 남상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그들의 꿈은 몽상적이다.

     

    처음에 현은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한 반면 남상은 의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린 그들의 꿈은 세상의 거센 풍랑에 휩쓸려 난파당한다.

     

    그들은 그들이 타고난 운명의 힘에 사로잡혀 버린다. 깨어져 나간 몽상의 잔해 위로 잔인한 현실의 법칙이 모습을 드러낸다. 현실은 부조리하다.

     

    몰인정하고 인색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

     

    이상을 포기한 순간, 세상에 적응하기로 결심한 순간 두 사람은 아름다운 젊음을 잃어버린다.

     

    추악한 현실의 동조자로 귀착되고 만다.

     

    그들의 운명은 현실적이다.

     

    현은 물질로부터 자유롭지만 정신적으로 파멸한 존재가 된다. 남상은 물질적인 부를 얻고자 몸부림치지만 끝내 파멸에 봉착하고 만다.

     

     

    ‘오만과 몽상’은 두 사람을 통해 인간의 굴레를 드러내 보이고 인간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심문해 보여 준 소설이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의 고전적인 작가들이 보여 준 인간에 대한 질문과 탐구를 한국적인 바탕 위에서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자라는 여인이 있다.

    현에게 버림받고 남상의 아내가 되어 아이를 낳다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여인의 존재는 독자들에게 삼각관계라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의 구성적 흥미를 선사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겉으로 드러나는 뺏고 뺏기는 치정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다른 꿈을 꾸면서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을 이어 주는 감춰진 끈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치 이창동의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순임이라는 여자처럼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남자들의 타락한 영혼을 대속(代贖)하는 희생제의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여인은 채만식의 ‘탁류’에 나오는 비극적인 여인 초봉이나, 죽음으로써 아비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는 ‘심청전’의 심청으로 통한다.

    ‘오만과 몽상’은 우리의 고전적인 작품들에 나타나는 희생제의의 의미를 새롭게 상기할 수 있게 해 주는 새로운 고전이라고 할 것이다.

    방민호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39>지식의 원전


    어느 과학자의 다음과 같은 상상을 듣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지금 저 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은 나무를 건드린 빛을 눈이 포착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 나무를 비추었다가 저 아득한 우주로 뿔뿔이 흩어져 나간 빛이 우주 어느 구석에는 차곡차곡 쌓여 있다고 한다.

     

    그 빛을 다시 불러오면 아득한 옛날, 나무 씨앗이 꼼지락꼼지락 땅을 뚫고 나오는 모습, 나무 밑을 지나가는 옛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즉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전의 옛날 일도 손에 보듯 훤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지상에서 빛의 속도는 뛰어넘을 수 없는 절대 속도이기에 이 공상이 현실에서 실현되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그 참신한 상상력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태양이 이 세계를 먹여 살리는 에너지의 근원이라지만 제 아무리 강렬해도 인간의 두뇌 속은 점령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머리에서 생산된 생각은 빛의 도움 없이도 시간을 거스를 수가 있는 것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뉴턴이 홀로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그가 한 생각이 고스란히 남아 오늘의 우리가 공유할 수 있음은 그 덕분일 것이다.

     

     

    여기 소개하는 책은, 소리를 내자마자 없어지는 말을 영원히 보존하는 기술인 활자의 덕을 특히 톡톡히 보는 책이다.

     

    이런 활자, 이런 책이 아니었다면 대체 세상을 뒤흔든 과학 천재들의 머리 속을 뚫고 나온 창조적 생각을 어떻게 우리가 전달받을 수 있었겠는가.

     

    ‘지식의 원전’은 ‘발견’과 ‘앎’의 순간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지식 발견의 순간을 골라 정리한 사람은 과학자가 아닌 옥스퍼드대의 한 영문학 교수다.

     

    그는 다음의 세 가지, 즉 대중이 꼭 알아야 할 근대적 지식인지, 얼마만큼 흥미로운지, 교육을 그리 많이 받지 않은 독자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인지를 기준으로 삼아 수많은 문헌 중에서 102편의 글을 뽑아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긴 기록에서부터 갈릴레이가 하늘을 관찰하고 쓴 글, 발명가이자 시인이었던 이래즈머스 다윈이 쓴 시, 한 알의 소금에서 우주를 들여다본 칼 세이건의 글, 원소배열표인 주기율표와 아우슈비츠에서의 인생 역정을 견딘 프리모 레비의 글까지 에세이, 시, 노트 등 다양한 형식의 과학적 지식을 담은 글들이 실려 있다.

     

     

    과학 기자재를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갈릴레이는 망원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를 이용하여 하늘을 관찰하려고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망원경을 육상이나 해상에서 관측하는 데 필요한 물건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는 망원경으로 지상의 물체를 관찰하기보다는 천체를 관찰하고 싶다며 하늘로 망원경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그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는 관찰 사실들을 적어 내려간다.

     

     

    과학이라면 먼저 손사래부터 치던 이들도 책 곳곳에서 그 시대에 통용되던 기존 사실들을 뒤집어 생각하며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았던 과학자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가졌던 호기심과 발견에 대한 기쁨을 그 어깨 너머로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은 덤으로 얻는 셈이다.

     

     

    독자들에게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이 책은 과학부터 우선 가볍게 자기 소개를 하면서 이웃 분야로 다리 하나를 놓아준다.

     

    그 다리 위가 많은 사람들로 무척 붐비기를 기대해 본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40>사회정의론


    현대의 정치철학 분야에서 존 롤스의 ‘사회정의론’만큼 격찬을 받은 책은 없었다.

     

    1971년에 출간되자마자 세계의 지성계는 오랜만에 활기찬 지성 담론을 펼쳤다.

     

    담론의 장에는 서로 질시만 하던 좌우익의 지성인들이 지적 위선을 벗어던지고 모여들었고, 자신의 영역 안에만 웅크리고 앉아 있던 다양한 지성인도 전공 영역의 담장을 헐어 버렸다.

     

     

    그러자 정치철학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는 환호성이 터졌다. 사실상 1950, 60년대에 정치철학은 사망했었다.

    당시 정치철학자들 스스로 “정치철학은 죽었다”고 고백할 정도였고, 어느 정치철학자는 절망하여 아예 연구 분야를 바꿀 정도였다.

    돌이켜 보면, 정치철학은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사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때 영미의 지성계에서는 논리실증주의가 휩쓸었고, 유럽 대륙의 지성계는 현상학이 지배했다.

    방법은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진리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라는 가치판단 문제는 철학이 다룰 수 없다고 도외시하였다.

    그러기에 반문명적인 세계대전이 두 번씩이나 일어나도, 그들은 지성인의 임무인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전후에 시민권 운동, 학생 운동, 반핵반전 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나도 속수무책이었다.

    가치판단 문제를 회피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규범 허무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서구 사회운동의 비판적 상상력은 한국의 1980년대처럼 좌파 지성들이 주로 제공했다. 좌파 지성은 사회 비판의 준거점에 대한 철학적인 검토를 소홀히 한다.

    그렇게 하면 사회 비판은 그저 개인 또는 집단의 신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주관적인 신념에 의존했으므로 좌파 지성 또한 규범 허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계대전이나 세계 냉전은 규범 허무주의가 육화된 모습이다.

    규범 허무주의는 실천적인 사회문제를 힘의 논리로 환원시켜 버린다.

    사회 갈등은 이제 잠정적인 타협 이외에는 평화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다.

    ‘사회정의론’은 규범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철학적인 몸부림이었다.

    여기에서 사회 실천 원리로 주장된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평등한 자유의 원칙, 둘째 기회 균등의 원칙, 셋째 차등의 원칙이다.

    사회를 공정하게 운영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평등한 자유를 보장해야 하고,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충족되면 그 다음에 기회 균등을 보장해야 한다.

    기회 균등의 원칙이 충족되면 그 다음에 차등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등의 원칙은 사회 불평등을 규제하는 것이다.

    사회 불평등은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당연하고 간단해 보이는 롤스의 주장을 사회주의자들은 매우 불평등주의적이라고 비판했고 자유주의자들은 너무 평등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회당은 롤스의 ‘차등 원칙’에 입각한 분배 정책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하기도 했고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비판하면서도 절대로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펼쳐진 롤스의 주장은 이렇게 현대 실천이성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더더욱 매혹적인 것은 그의 철학 작업이 여러 분야의 학문 성과를 총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인이 실천이성을 넉넉하게 닦아 나가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정치철학서임에 틀림없다.

    김주성 한국교원대 교수 정치철학






    <41>노자이야기-장일순



    진리를 말하는 책은 많지만 진리를 어떤 틀에 가두거나 왜곡하지 않는 책은 드물다.

     

    후자의 미덕을 갖춘 예로 나는 먼저 노자의 ‘도덕경’을 떠올린다.

     

    도덕경에 대한 다양한 주해와 대화가 오늘까지 이어져 오는 것도 그 현묘(玄妙)한 품 덕분이다.

     

     

    노자 자신의 비유를 빌리자면, 그것은 가장 낮아 만물이 모여드는 골짜기(谷神)이자 텅 비어 있는 그릇과도 같다.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고, 담긴 내용물에 따라 스스로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한편 ‘도덕경’에 관해서 말한 책은 많지만, 그 열려 있는 정신을 깊이 체화한 책은 드물다.

     

     

    그런 점에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는 ‘도덕경’의 아름다운 번역본이자 그것을 원텍스트로 한 풍부한 대화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원주에서 40여 년 동안 가톨릭농민회와 한살림운동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의 정신적 스승이 되었던 장일순 선생과, 개신교 목사로서 좁은 종교적 틀을 벗어나 다양한 집필활동을 해 온 이현주 목사가 그 대화의 주인공들이다.

     

    따라서 이 책은 신교와 구교 간의 대화이자, 성서적 진리가 도교와 불교 등과 어떻게 통하는가를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동서 간의 대화이기도 하다.


    원래 1990년대 중반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던 것을 합본하고 다시 손보아 나온 이 책은 700쪽이 넘는 분량과 함께 거기에 흘러드는 사상의 지류 또한 방대하다.

     

    노자가 깊은 종교적 본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굳이 의식하거나 도그마화하지 않았듯이, 노자를 가운데 두고 이루어지는 사제 간의 대화 또한 그러하다.

     

    현학적인 취미나 자구적 해석에 매달리지 않고, 삼라만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읽는 사람을 적신다.

     

     

    그래서 ‘도덕경’ 81장에 각각 붙여진 대화를 읽다 보면 볕이 잘 드는 방에 두 분이 고요하게 마주 앉아 있는 풍경이 떠오르고, 어느새 나도 그 옆에 숨죽이고 동석해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마치 불이 타오르는 등잔에서 꺼져 있는 등잔으로 불꽃이 튀는 것처럼 두 분의 대화는 읽는 이에게도 서늘한 불꽃을 옮겨 준다.

     

    이때 전달되는 것은 어떤 메시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정신의 에너지이다.

     

    또한 문자로 이루어진 책의 형태를 입고 있되, 언어를 넘어선 생명의 훈기 같은 걸 이 책은 거느리고 있다.

     

     

    김지하 시인은 장일순 선생을 두고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사실 이 책이 완결된 것은 장일순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의 일이다. 57장까지는 선생이 생전에 계실 때 녹음된 것을 정리한 것이지만,

     

    그 이후는 이현주 목사가 “내 속에 계신 선생님과 대담하면서 받아 적는 심정으로” 써 내려간 것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넘어선 영적 대화인 셈이다.

     

    장일순 선생이 가신 지도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이 책 속에,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정신 속에 여전히 살아 계신 그분의 흔적을 보며 ‘살아 있는 고전’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노자라는 강을 건너기에 이만한 ‘말씀의 뗏목’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희덕 시인



    <42>호모 루덴스


    2000년 초 국립극장장이 되었을 때, 공직생활 30년이 되는 한 선배가 “하루에 5분만이라도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 보라”는 충고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살아 온 예술가의 생활이란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지라 실업 상태일 때는 하고 싶은 일들을 내 맘대로 계획 세우고 내 마음대로 시간을 활용하며 하루 종일 ‘멍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극장장으로서 빈틈없이 꽉 짜여진 생활을 하다 보니 정말 하루에 5분도 멍할 새가 없었다.

     

    1년쯤 지난 후 나는 내 영혼이 고갈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는데, 그 무렵에 읽은 책이 ‘호모 루덴스’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멍하게 지낸다는 것, 즉 창조적 놀이 정신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되었고, 그 후로 가끔씩 ‘멍한’ 상태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인 요한 호이징가는 모든 문화 현상의 기원을 놀이에서 찾는다.

     

    그는 자신이 탐구해 온 예술사와 종교사 등 인류 문명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동원하여 인류의 고대 문화를 놀이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놀이는 문화보다 오래되었다.

     

    놀이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며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언제나 함께해 왔고 다양하게 발전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인 동시에 유희의 인간인 호모 루덴스(Homo Ludens)였다”고 주장하는 호이징가가 해석하는 놀이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일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공정한 규칙에 따라 경쟁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 문화와 놀이가 분리되고 단순히 놀기 위한 놀이는 퇴폐적인 것으로 죄악시되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놀이마저도 삶과 유리된 채 상업성으로 점철되고, 놀이가 가졌던 본래의 건강성을 상실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은 고대의 신성하고 삶이 충만한 놀이 정신의 회복이다.

     

    놀이에 따르고 놀이에 승복하며 놀이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문명을 빛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 책을 쓴 1938년 무렵은 세계적으로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이 책에서 정치적인 주제는 극히 필요한 경우에만 조금씩 다루고 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네덜란드를 침략한 독일군의 점령 치하에서 독일을 비판함으로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에 석방되어 가족과의 면회도 금지된 채 겔더란트의 시골집에서 1945년에 사망했다.

     

     

    인류의 건강한 문화적 삶을 위해 혼신을 다해 탐구한 학자가 정작 자신의 삶은 반문화적이며 억압적인 전쟁의 희생물로 바쳐야 했던 현실이 참으로 역설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의 존재와 행위 양식의 본질 규명에 새로이 도전한 ‘호모 루덴스’는 진정한 문명을 건설하려는 저자의 소명의식 속에서 탄생된 기념비적인 저서로서 21세기 문화의 세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김명곤 국립극장장


             

    <43>자기 조직의 경제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리타가 미국 남부 해안을 강타하면서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남겼다.

     

    작년 말에는 인도양의 해저 지진 때문에 발생한 지진해일(쓰나미)로 남아시아 국가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화제를 국내로 돌리면 서울 강남과 강북,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정부는 지역 균형개발과 부동산 안정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경기 침체는 허리케인과 비슷한가, 아니면 지진과 더 비슷한가?

     

    도시는 배아세포와 비슷한가, 아니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운석과 더 비슷한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이런 질문은 경제를 잘 아는 사람에게도 뚱딴지같은 질문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뛰어난 통찰력과 정곡을 찌르는 분석으로 널리 알려진 폴 크루그먼 교수는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며 책을 시작하고 있다.

     

    그는 이런 질문이 결코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아니라 얼마나 합리적인 질문인지를 인식시키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경제학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것들을 외생 변수로 처리하고 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경기 순환이 외부에서의 충격으로 발생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으며, 외부 충격의 원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즉 경기 변동의 원인을 찾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경기는 변동할 이유가 있으므로 변동한다는 식의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아무 관계도 없는 듯한 현상들 간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복잡계’ 개념을 사회과학에도 도입하여 설명할 것을 권고한다.

     

     

    복잡계란 복잡한 피드백 시스템이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며, 개별적인 행동들의 상호 조화가 완전히 새로운 집단적인 행동을 낳는 ‘출현의 과학’이다.

     

    또한 복잡계란 동질적이거나 무작위적인 상태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거대한 패턴을 형성해 가는 ‘자기 조직화하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복잡계의 피드백 원리와 출현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으나 자기 조직의 원리를 모르고 있다.

     

     

    저자는 자기 조직의 원리를 ‘불안정으로부터의 질서’와 ‘불규칙한 성장으로부터의 질서’로 구분한다.

     

    첫 번째 질서의 예를 들어 보자.

     

    열대 상공의 무더운 수증기 때문에 대기의 순환이 불안정해짐에 따라 자연적으로 기상 패턴을 스스로 조직하며 허리케인이 발생한다.

     

    허리케인과 마찬가지로 경기 불황은 하늘에 벼락 치듯이 닥쳐오며, 대도시는 ‘특별히 선호되는 파장’에 따라 여러 중심 지구를 가진 형태로 진화한다.

     

     

    두 번째 질서의 예를 들면 이렇다.

     

    언뜻 보기에 무질서하고 복잡해 보이는 지진이나 운석의 분포가 ‘제곱의 법칙’을 따르고 있듯이 도시의 분포도 ‘제곱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2위 도시의 인구 규모는 1위 도시의 2분의 1이고, 3위 도시는 3분의 1, 10위 도시는 10분의 1이다.

     

     

    지역 균형개발에서는 인구 규모가 같은 도시를 여러 개 상정하고 있으나 이는 두 번째 질서에 역행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 세계가 자기 조직화하는 시스템들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토로한다.

     

    아울러 독자들도 경제가 자기 조직화한다는 개념을 자기처럼 ‘흥분과 즐거움으로’ 발견하기를 촉구하며 책을 마치고 있다.

     

     

    박원암 홍익대 교수 경제학





    <4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차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시지요.”

     

     

    신영복(경제학) 성공회대 교수는 무작정 강의실로 찾아간 나에게 자판기 커피를 뽑아 권하며 빈 강의실로 안내했다. 2년 전 당시 신문기자였던 나는 ‘지성의 나무’라는 기획 기사

     

    를 취재 중이었다.

     

     

    “번거롭게 먼 길을 오셨군요.”

     

     

    그날은 햇살이 따사로웠다. 창밖에 봄볕을 화사하게 받고 서 있는 꽃나무가 보였다.

     

    무슨 꽃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 문득 풍겨 오던 은은한 향기는 지금도 또렷이 느낄 수 있다.

     

    처음엔 그 향기가 창밖의 ‘꽃내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에 묻어날 정도로 짙게 퍼져 오는 그 향기는 신 교수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간에게서 그런 깊은 ‘인품’의 향기가 물결처럼 번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과학적 사고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대상과 필자의 ‘관계’라 생각합니다.

     

    대상과 필자가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깊이 있는 인식이, 또 어떠한 측면이 파악되는가가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 없음’입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옥중 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그는 ‘관계’를 이야기했다.

     

    이 책은 그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 복역한 뒤 1988년 출소한 직후에 발간됐다.

     

    민주적 정권 교체에 실패해 허탈해하던 그 시절에 그 책은 한국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편지는 계수, 형수, 부모님에게 보내진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심 어린 성찰이 담겨 있었다.

     

     

    “멀리 두고 경원하던 사람도 일단 같은 방, 같은 공장에서 베 속의 실오리처럼 이런저런 관계를 맺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이 열립니다. … ‘관계’는 ‘관점’을 결정합니다. …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靜的)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같은 책)

     

     

    그의 옥중 20년은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였다.

     

    가족과 동료 재소자 그리고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곳곳에 배어 있는 그의 글은 사람들이 치열한 실천에 몰두하다가 때때로 잊곤 하는 사실, 즉 ‘나는 왜 이 길을 가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문제의식을 다시 일깨워줬다.

     

    민주화에 성공했든 실패했든, 지역구도를 타파하든 못 하든, 세계화를 하든 안 하든,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은 직간접적으로 인연 맺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돼 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사회와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 어려운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같은 책)

     

     

    돌이켜 보면, 그에게서 번져 오던 향기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이미 느꼈던 것인 듯하다.

     

     

    김형찬 고려대 교수·한국철학

             






    <45>천년 궁궐을 짓는다…


    신응수 




     






    올해 여름까지 1년간 프랑스 파리에서 생활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은 나 같은 건축보존주의자에게는 참으로 부러운 곳이었다.

     

    발 가는 곳마다 거의 100년 된 건물들이 즐비했다.

     

    시내 한복판에 이르면 1850년대의 것들도 수두룩했다.

     

    시내가 모두 건축박물관이라 해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프랑스 현대 건축가는 물론이고 시민들도 그 집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오래된 건축물이 좀 불편하더라도 때로는 값지게 여기며 때로는 체념하며(?)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방에 비가 들이쳐도 계단이 삐걱거려도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간판은 가능한 한 작게, 건축물이 가리지 않게 붙이는 정도이다.

    다만 쇼윈도만큼은 정성을 다해 치장한다.

    거리는 그래서 더욱더 아름다워진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에 푹 빠져 들어간다.

    오래됐지만 살아있는 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거리에 역사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거리는 역사를 거의 다 밀어붙여 남은 것이 없다.

    어느 도시나 매한가지로 도토리 키재기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우리 목수가 다 사라져 버린 탓이다.

     

    조선조 말, 소위 전통 목수는 전부 생업 목수로 길바꿈을 했다.

     

    집 장사로 나선 것이다.

     

    어설픈 사회 풍조는 건축물을 두부 자르듯 짓기 시작했다.

     

    싸게 빨리 짓는 데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전통 목수는 천대받고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사회 대접이 그런데도 그나마 몇 사람이 전통 건축의 맥을 이어 오고 있다.

    긴 얘기 할 필요도 없이 그들 스스로 그 어려운 명맥을 이어 온 것이다.

    깊은 산속에서 토종 소나무를 고르고, 과거 역사의 현장에서 켜고 짜서 틀을 잡아 온 것이다.

    거기에 기와를 이고 단청을 해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이다.

    나는 목수를 존경한다.

    그중 상징적으로 신응수(申鷹秀·63)를 먼저 꼽는다.

    이 책은 그가 직접 말하는 전통 건축 이야기, 목수 이야기다.

    그 힘든 목수의 길로 들어서 숭례문, 수원 화성, 경복궁, 창덕궁 등 우리의 대표적 건축 문화재를 복원해 온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감동적으로 펼쳐져 있다.

    그는 거친 손으로 그 엄청난 나무 기둥을 땅에 꽂고 그 기둥에 날개를 단다.

    하늘로 차고 날 듯 뜨는 처마를 만든다.

    그 위에 아름다운 용마루를 앉히는 것이다.

    그것, 즉 수직 수평선만이 아닌 그 오묘한 허공선을 만드는 일은 어떤 예술가,

    과학자의 작업보다 어려운 일이다.

    컴퓨터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의 눈과 손이 아름다운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서양건축물도 우리 고건축과 아름다움에 견줄 수 없다.

    중국의 과장선, 일본의 억제선보다 더 자유로운 우리 한옥의 자연선(自然線)을….

    파리 루브르 궁전의 기둥에 몸을 대고 하늘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진회색 하늘뿐이다.

    서울의 경복궁 근정전 기둥에 몸을 대고 하늘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처마가 푸른 하늘을 날고 있다.

    그것은 신응수가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모른다.

    궁궐 도편수를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답이 이 책에 있다.

    한국의 건축을 사랑한다면 다시 한번 뽑아 보길 권한다.

    김정동 목원대 교수 한국건축사


    신용수 신응수, 정확한 이름 확인 중








    <46>여성주의 철학


    “여자들이 무슨 철학?”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자들에게 교육 기회를 차단했던 시절에나 걸맞은 사람이다.

     

     많은 여자가 훌륭한 교육을 받고 모든 학문 분야에서 지식 생산자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혹은 고통스럽게 여성학, 여성주의 시각을 생성해 내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분과 학문의 바탕에 깔려 있는 남성 중심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여성 철학자들은 수많은 현인과 철인의 목록에서 ‘왜’ ‘어떻게’ 여성 철학자들이 누락되었는지를 문제시하고, 주류 철학의 고전적 텍스트에서 강고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여성 폄훼 주장들을 반박하는 한편, 역사에서 누락된 선배들의 흔적을 찾아내고 발굴하였다.

     

     

    이렇게 공유된 문제의식으로 당대 여성주의 철학은 철학 안의 성차별 구조에 대한 비판적 작업과 함께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철학함’의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성주의의 관점으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등 제 영역의 문제를 새롭게 규명하고 재구조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앨리슨 재거와 아이리스 영의 ‘여성주의 철학’은 지구적인 영향력을 지닌 여성주의 철학자들의 집단적 역량과 수준을 보여 준다.

     

    편자들은 철학 논문을 모아서 소개하는 쉬운 편집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주제별로 선정된 그 분야의 전문가들과 공통의 틀을 갖춘 집필 방식을 공유하는 정성을 들였다.

     

    자신이 담당한 주제 안에서 최근 진행 중인 다양한 논의를 균형 있게 소개하는 식으로 맞춤 집필한 열정과 노력이 책 갈피갈피에서 묻어난다.

     

     


    이 책의 기본 역할은 여성주의 철학의 길라잡이다.

     

     

    이 지도를 따라 철학 여행을 하다 보면 문제의 대륙들이 나타나고 최근 여성주의 철학의 쟁점들이 산봉우리처럼 우뚝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 각 지역에서 전개하고 있는 철학적 논의들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의 여성주의를 성찰하는 하나의 창을 확보하게 된다.

     

    예술, 종교뿐만 아니라 윤리학, 정치학, 사회 이론, 자연과학 전반을 여성주의 관점에서 탐구하는 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함께 상상되고 창출됨을 목도한다.

     

     

    6월에 열린 세계여성학대회에서 만난 아시아권 참가자들은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이 벌써 나와 있음을 부러워했다.

     

    한국 여성철학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여성 철학자들이 없었다면 이만한 결실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성학 전공자들은 이 번역서를 기본으로 삼아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소개되어 있는 인용 서적과 참고 문헌에 도전해 볼 일이다.

     

    성별(젠더), 성(섹슈얼리티), 의미론, 언어와 권력, 행위성, 보살핌 등 여성학의 핵심 개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성숙시킴으로써 여성주의자로서 철학적 기반을 단단히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아직 깊숙이 깔려 있는 가부장제 문화가 양성 평등의 사회로 변화되기를 소망하는 여성학이 여성주의 철학과 소통하는 것은 서로를 북돋우는 일이다.

     

    실천과 이론이 만나고 서로에게 배움으로써 우리 사회의 변혁이 앞당겨지기를, 그리고 그 폭이 더욱 넓어지고 깊이가 더 철저해지기를 소망한다.

     

    장필화 이화여대 교수 여성학 



     <47>관촌수필


    늘 곁에 두고 무심코 손 뻗어 아무데고 읽기 시작해도 곧바로 빠져드는, 드물어 더욱 소중한 책 중의 하나가 명천(鳴川) 이문구(1941∼2003) 선생의 소설 ‘관촌수필(冠村隨筆)’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본 게 막 습작을 시작하던 20대 후반이었다.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어디에서 어디만큼 울타리를 치고 어떤 괭이로 땅을 갈고 거름은 무엇으로 쓰고 무슨 씨를 뿌리고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지 한 가지도 알 수 없었을 때였다.

     

    그때 관촌수필의 이런 대목이 눈에 쑥 들어왔다.

     

     

    “그래 너는 몇 살이나 되었다더냐. 그러자 그녀는 아무 어렴성 없이 아는 대로 대꾸했다. 지 에미가 그러는디 제년이 작년까장은 제우 여섯 살이었대유. 그런디 시방은 잘 몰르겄유. 늬가 늬 나이를 모른다 허느냐. 예, 어떤 이는 하나 늘어서 일곱 살이라구 허던디 또 누구는 하나 먹었응께 다섯살이라구 허거던유. 페엥- 그래 늬 에민가 작것인가는 요새두 더러 보이더냐. 접때 달밭 대감댁(외가)에 왔는디 봉께, 유똥치마를 입구, 머리는 힛사시까미를 허구, 근사헌 우데마끼두 차구……여간 하이카라가 아니던디유.

    그래 그것은 시방두 장(늘) 술고래라더냐? 그리기 접때두 취해서 7 애비허구 다투다가 고쟁이 바람으루 8겨났었유. 페엥- 숭헌…….”

     

     

    일곱 살짜리 옹점이가 주인공의 할아버지와 말 나누는 장면이다.

     

    나는 웃다가 멍해졌고 급기야 무릎을 치게 됐다. 소설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소설 속의 인물이 이런 것이구나.

     

    어디 이 대목뿐이겠는가.

     

    전쟁의 비극, 공동체의 따뜻한 인간애와 몰락,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아서 소설가가 되었다’고 밝힌 대로, 가족의 독한 비극, 산업화의 과정과 파괴의 현실 등이 ‘관촌수필’ 연작 첫 편인 ‘일락서산’에서 끝 편인 ‘월곡후야’까지 빼어나게 형상화되어 있다.

     

     

    공동체나 토속, 농촌, 이런 수식이 붙으면 들었던 책도 슬그머니 놓아버리는 게 요즘 독자들인 데다가 이미 이 책에 대하여 숱한 평론가들의 찬사가 있었고 문학사적 의의 또한 검증 정리되었기에 자꾸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다.

     

    선생이 구사했던 아름다운 우리말 또한 이문구 소설어 사전(민충환 엮음·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2001)이 이미 나와 있어 일일이 늘여놓지 않아도 될 듯하다.

     

     

    흔히 능청, 해학으로 이름 붙여진 선생의 문체는 독보적이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구불구불 다음 호흡으로 이어지고 출렁출렁 흘러 마침내 삶을 보듬어 내는,

     

    그러면서도 과함이 전혀 없는 만연체에서 나는 매정하게 돌아서지 못하는 작가의 따스한 심성을 읽는다. 때문에 무릇 살아 있다면 어떤 마음을 지녀야 되는가를 배웠다.

     

     

    도처에 풍부한 비유와 익살의 말(言語)도 백미다.

     

    언젠가 술집에서 안주 시키라는 주인에게 ‘몸속에 허파 있고 간도 있고 곱창도 있는데 뭐 하러 안주를 먹어요. 술만 넣어주면 되지’ 해서 웃었는데 모두 선생의 소설에서 읽은 것이다.

     

     

    함부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 예의와 독재정권의 탄압에 한 번도 등 돌리지 않았던 의식, 기승전결 운운의 수입 이론을 ‘장마철 물걸레 보듯’ 하고 소설이 진정 뭔가를 보여준 작가정신이 이 책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다. 이런 책이 또 나올까.

     

     

    한창훈 소설가



     <48>내일의 이정표


    최근 피터 드러커의 자서전이 번역 출간됐다.

     

    그의 저서는 경영학, 미래학, 기업인,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는 영향력 있는 책들이다.

     

     

    ‘21세기 지식경영’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지식 경영자’ ‘미래의 결단’ ‘미래기업’ ‘비영리 단체의 경영’ ‘변모하는 경영자 세계’ ‘차세대 기업 리더의 양성’ 등 한국의 신지식인들에게 회자되는 책 이름이다.

     

     

    그런데 막상 그의 중요한 저서인 ‘내일의 이정표’는 우리나라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는 이 책을 1960년대 중반에 읽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1964년에 ‘변모하는 산업사회’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초판 25만 부가 팔렸다.

     

    일본에서 당시 비소설 부문에서 최고 판매부수를 기록하였다.

     

     

    1966년 일본 정부는 드러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 책의 영향이다.

     

    이 책은 ‘산업인의 미래’(1942), ‘새로운 사회’(1950), ‘미국의 다음 20년’(1957) 등 깊고 넓은 그의 지식과 의지를 바탕으로 미래사회를 계획하고 예견한 걸출한 저서 가운데 하나이다.

     

     

     

    저자가 40대 초반의 왕성한 나이에 쓴 이 책은 인문학적 학문의 깊이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강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 작품이다.

     

    특히 인접 분야 학문 즉, 문학 역사학 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생태학 문화인류학에 대한 섭렵과 심지어 예술적 심미안에 이르기까지 총화를 이루어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혀를 찰 만큼 찬탄을 보내는 저서이다.

     

     

    드러커는 이 책에서 미래 산업사회에 대한 그림을 간명하게 그려 독자들에게 보여 준다.

     

    굴뚝산업이 무너지고, 지식과 기술이 집약된 새로운 형태의 산업사회가 온다는 점을 1959년 발간된 이 책에서 일찍이 예견한 것이다.

     

    드러커는 인간 생활에 닥쳐올 변화를 세 가지 영역에서 전망한다.

     

    첫째, 기계적 인과관계로 이뤄진 데카르트적 우주에서 패턴과 목적, 과정이라는 새로운 우주로의 철학적 변화다.

     

    둘째, 자유세계 사람들에게 닥쳐 올 네 가지 도전 즉, 교육된 사회의 도래, 경제발달, 정부의 쇠퇴, 동양문화의 쇠퇴를 예견한다.

     

    이어 드러커는 인간존재의 정신적 실체에 닥칠 변화에 대해 얘기한다.

     

     

    드러커는 유대계지만 합스부르크 정권의 재무장관을 지냈던 아버지와 의사 어머니 사이에서 1909년 빈에서 태어났다.

     

    20대 젊은 시절 영국에서 일하면서 경제학자 케인스를 만났다.

     

    케인스는 한때 미국의 경제정책 수립(뉴딜)에 기여했고 돈도 벌어 그 당시 피카소 등 신진 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해 그의 모교인 케임브리지대의 피츠윌리엄 박물관에 기증했다.

     

    드러커는 케인스의 이런 모습을 배웠다.

     

     

    22세에 프랑크푸르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천재였고 신동이었던 드러커는 첼로로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를 완벽하게 연주하는 대가이다.

     

    또한 그는 일본과 잉카 미술품의 이름난 수집가이고 탁월한 감식가이다.

     

    현재 97세의 고령으로 여전히 저술 활동과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한국통이기도 하다.

     

    1952년 6·25전쟁 때 한국교육부흥계획을 세우기 위해 미국 정부 요원으로 한국에 온 적도 있다.

     

    이상만 고양문화재단 총감독




    <49>흙속에 저 바람 속에


    저자를 직접 만난다는 것은 단지 책으로 만나는 것 이상의 또 하나의 이벤트다.

     

     

    나의 경우 책으로 접하기 전 저자를 먼저 알게 되는 경우가 몇 차례인가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이어령 선생이다.

     

     

    형식의 극치를 달리는 박물관 개관 행사에서. 각오를 하고 축하하는 마음을 가득 모아 자리를 지키는 터에 축사를 하는 명사로 바로 그가 자리했던 것이다.

     

    적절한 예를 들면서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우렁차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축사. 개관 행사에서 형식에 그치기 마련인 축사를 들으면서 감동하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부터 나는 팬이 되어 버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씌어진, 그가 30대에 썼다는 책까지 더듬게 된 것은 그렇게 시작된 관심 때문이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미 제목이 정해질 때 세월을 넘어설 각오를 했던 것만 같다. 뭔가 본질을 건드리는 냄새가 가득 느껴진다.

     

     

    1962년 약 두 달에 걸쳐 일간지에 연재했던 글들에 주해를 달아 실은 것이라 한다. 신문사의 마감시간을 앞두고 즉흥적으로 써내려간 글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의 뛰어난 구사력 때문인지 글의 흐름은 마치 마주앉아 나누는 대화 같다.

     

    내가 경험한 축사와 같이 여유로우면서 예리하고 우렁찬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다. 그의 목소리가 문장마다 들리는 것, 문어체와 구어체의 경계를 깨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힘이기도 하다.

     

     

    근대를 넘어서는 세대들에게 관통하는 한국문화의 풍토를 집어내, 너무나 친숙하여 무감각한 한국 문화의 얼굴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씌어졌던 글이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조.

     

     

    저자는 또 벽이 없는, 소유하지 않는, 비어 있는 그리고 사방으로 내다볼 수 있는, 그리고 상대에게도 볼거리를 주는 쌍방향의 시점 교환으로서 정자를 바라본다. 당시 우리 정자에서 인터넷이니 인터랙티브니 인터페이스니 하며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인터(inter)의 의미를 찾아내 개념화시킨 관점은 참으로 놀랍다.

     

     

    옛것에서 탈피하여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주관심사였던 시대에, 그래서 어쩌면 내가 가진 것은 당연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시대에, 매우 익숙한 한국의 지리적 조건과 우리의 언어와 풍습, 의식주문화, 생활용품 속에서 일상이 아닌 한국성을 읽어내는 예리한 족집게 안목이 가득 나열되고 있는 창고다.

     

     

    세상에 처음 이 글들이 나왔을 때 이러쿵저러쿵 충돌도 있었던가 보다. 40년 만에 재발간된 저서 뒤쪽의 Q&A가 그야말로 쌍방향 소통을 통한 논리전개의 일환이 되어주어 더욱 흥미진진하다.

     

    유행이 아닌 맥을 짚고 있으니 시간 속에 더욱 증명되고 소중해진다.

     

    저자의 관점이 길을 찾아가는 나그네에게 희망과 방향을 제시하는 절실한 표지판이 되어준다.

     

    재발견과 공감 속에서 해답을 쥔 듯하면서, 그러나 바람같이 잡히지 않는 이 책과 틈틈이 씨름 중이다.

     

    앞으로 40년 더 곁에 두고두고 읽다 보면 아련히 느껴지는 희망과 가능성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련다.

     

     

    한젬마 화가







    <50·끝>에로티즘



    내가 처음 에로티시즘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대학 1학년 때 극장에서 본 영화 ‘나인 하프 위크’를 통해서였다.

     

    킴 베이신저가 미키 루크 앞에서 섹시한 춤을 추고 비 오는 뒷골목에서 벌이는 정사 장면 등 이 영화는 아름다운 색채와 영상미로 가득했으며 화면에 펼쳐지는 인체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영화를 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흐른 뒤 내게 다시 ‘나인 하프 위크’를 떠올리게 하는 책이 등장했다.

     

    오페라의 여주인공 ‘카르멘’의 색이기도 한 강렬한 블랙과 레드의 이미지가 책 표지에 선명하게 드러난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이 그것이다.

     

    레드와 블랙은 ‘피와 죽음’이다.

     

    이 피와 죽음은 바로 파리 국립도서관 사서 겸 중세전문가로 일하면서 프로이트를 접하고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어울리며 저술활동을 펼쳐 나간 바타유가 평생에 걸쳐서 연구하고 글로 남긴 에로티시즘을 상징하는 색이다.

     

    에로티시즘의 절대적 순간에는 침묵이 있고, 사정은 ‘작은 죽음’이며 에로티시즘의 최고 경지를 죽음 또는 살해로 파악한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다.

     

     

    마치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마지막 ‘이졸데의 죽음’이 무한 선율을 타고 강렬한 판타지를 안겨 주고, 가부키에 자주 등장하는 정사(情死)가 ‘사의 찬미’를 보여 주듯. 평생 에로티시즘을 연구해 온 바타유는 에로티시즘보다 노동 문제가 더욱 중요하고 절박하지만 노동 문제는 통제할 수 있고 에로티시즘은 통제권 밖에 있는 문제이며 모든 문제 중에서 에로티시즘은 가장 신비하고,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엉뚱하며 나머지 삶과 분리해 이야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

     

     

    1부 금기와 위반에서는 금기와 위반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것이며 인간은 이 둘 사이에서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준다.

     

    노동의 삶은 에로스의 삶을 제어하기 위해서 금기를 만들지만, 그 금기는 위반을 막을 수 없다.

     

    불안한 존재인 인간은 노동을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변하면서 에로스의 바다로 빠져들게 되며, 그렇게 해서 범하게 되는 위반에서 오는 쾌락이야말로 에로티시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노동만을 하고 있는 인간들의 내면에는 이 에로티시즘이 강렬하게 숨어 있고 이 단순한 생식과는 구별되는 풍요롭고 꽉 찬 삶인 에로티시즘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중요한 차이점이며 동시에 에로티시즘의 순간보다 강렬한 것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 정신의 정상에 위치한다고 바타유는 주장한다.

     

     

    2부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각론이다.

     

    존재의 연속에 대한 향수는 육체, 심정, 신성의 에로티시즘으로 나타난다고 본 바타유는 결혼과 반복적 성행위, 에로티시즘과 신성의 관계, 천박한 매음과 에로티시즘의 관계를 비교했다.

     

     


    이 책은 1957년 발간된 이후 동시대의 지성들에게 금기시되던 논의를 시원스럽게 활짝 열어 놓는 역할을 했다.

     

     ‘루바이야트에서처럼’ 밤새워 술 마시고,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노름에 빠지고, 매음굴과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경험적인 글쓰기를 계속하던 보헤미안적인 삶의 에로티시즘은 1962년 65세의 나이로 그를 운명하게 했다.

     

    이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과학 저서 ‘이기적 유전자’와 서로 보완이 되는 책이다. 연속해서 함께 읽으면 대단히 흥미진진한 독서를 할 수 있다.

     

     

    장일범 음악평론가 안양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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