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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권장도서100권>51~100
    논술(설.문)독서도서詩소설수필연설 2005. 7. 24. 21:55


    동아일보-서울대 공동 ‘권장도서 100권’ 매일 소개


    (51) 인간문제-강경애

     

    인간문제-강경애




    강경애의 ‘인간문제’는 동아일보에 1934년 8월 1일부터 12월 22일까지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이다.

     

    강경애는 광복 이전에 여성 작가로는 리얼리즘 문학정신을 가장 치열하게 또 실천적으로 구현했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간도 이주 후에 쓰인 것으로 일면 창작활동을 통해, 일면 사회활동을 통해 저항적이며 투쟁적인 한국인을 적극 도와주기도 하였다.



    ‘인간문제’는 1930년대에 원소마을을 배경으로 선비라는 처녀가 지주에게 짓밟힌 후 마을을 떠나 인천의 방직공장에 가서 감독에게 농락당하고 억압받다가 결국 폐병에 걸려 죽고 만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농민의 딸의 수난사로 요약되긴 하지만, 농민이 공장 노동자로 전화(轉化)되는 농촌 분해의 한 값진 사례를 제시한 것으로 확대 해석되기도 한다.



    강경애는 이 소설의 서두를 ‘원소전설(怨沼傳說)’로 장식함으로써 자신의 창작 의도를 적극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갖는다.

     

    원소는 구두쇠 장자(長者)의 착취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농민들의 원한의 눈물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전설을 갖고 있다.

     

    강경애가 작가적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못 가진 자, 짓밟히는 자, 약한 자의 원한은 이데올로기의 가장 중요한 씨앗이 된다.

     

    소설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갑남을녀가 빼앗기고, 짓밟히고, 뿌리 뽑히게 된 그 내력을 감지하게 된다.

     

    작품 ‘인간문제’는 빼앗고 짓밟고 뿌리 뽑는 존재를 크게 지주와 공장 감독으로 나누었지만, 작가 강경애는 이들 존재의 배후인 식민통치세력을 쏘아 보고 있는 것이다.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쓰기 전에 인간의 근본 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또 문제를 해결할 힘을 구비한 인간이 누구인가를 지적하려고 애써 왔다.

     

    이러한 노력의 한 증거는 민족단일당인 신간회(新幹會)의 자매단체인 근우회(槿友會)에 강경애가 가입한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강경애는 근우회 활동을 통해서 짓밟히는 자라든가 빼앗기는 자로서의 여성의 현실적 위치를 인간문제의 한 갈래로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근우회에서 여성은 억압, 착취, 투쟁 등의 개념에 눈뜨게끔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문제’는 선비의 시련 과정과 이로 인해 빚어진 연민의 플롯, 지식인인 신철이 보여주는 모험과 타락의 플롯, 첫째가 주역이 되어 나오게 된 계몽의 플롯 등이 포개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의 프로문학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인간문제’의 선비라든가 첫째와 같은 주요 인물은 의지도 박약하고 전망도 결여된 소극적 인물로 비치기 쉽다.


    이 작품은 어려서부터 선비를 사모해 왔고 신철을 사상의 스승으로 섬겨 왔던 첫째가 선비의 죽음과 신철의 배반을 맞으면서 선비의 시체로 상징되는 인간문제를 해결하는 데 뛰어들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그만큼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관념이 아닌 경험논리로, 또 이상론이 아닌 현실논리로 접근하였다.



    ‘강경애 전집’(이상경 편)에 수록된 ‘인간문제’가 현재 출간된 단행본 중에서는 가장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인간문제’ 정본의 참 맛은 당시 일제 치하의 검열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동아일보’ 연재본을 그대로 옮겨 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조남현 서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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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황무지-TS 엘리엇


    황무지-TS 엘리엇  




    1922년에 발표된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20세기 현대 문명에 갇혀 생명의 기운을 잃은 서구인의 자화상이다.

     

    20세기의 기술혁명을 바탕으로 치러진 1차 세계대전은 양측 군인 사상자만 3500만 명에 이르는 형언하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죽음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더 참혹하고 처절했던가?



    작가는 시를 통해 스스로 만든 재앙의 굴레를 자신의 머리 위에 쓴 사람들의 죽은 영혼을 해부하고 있다.

     

    누구일까? 그리고 무엇일까?

     

    북러시아의 들쥐처럼 집단자살의 충동에 시달리며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문명으로의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은?

     

    인간에게 내린 신의 축복, 문명을 생명이 깃들 수 없는 황무지로 만든 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20세기 최대의 시인 엘리엇은 섬뜩한 이미지와 푸가풍의 반복적이고 다음성적인 리듬으로 끊임없이 이 물음을 곱씹고 있다.



    황무지란 원래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불모의 땅이지만, 이 시에서 황무지는 생명이 깃들 수 없는 문명을 뜻한다.

     

    그렇다면 20세기 문명은 왜 생명을 잉태할 수도, 생명을 길러 낼 수도 없게 되었나?

     

    ‘세티리콘’에서 따온 이 시의 서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 열쇠다. 늙어 쪼그라들어 작은 병 속에 갇혀 추녀 끝에 매달려 살게 된 무녀 시빌에게 한 아이가 묻는다.

     

    “시빌, 너 무얼 원하니?” 시빌이 대답한다. “나는 죽고 싶어!”



    아폴로 신은 무녀 시빌을 총애해 어느 날 소원을 하나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시빌은 먼지 한 줌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먼지알만큼 많은 삶을 내게 주십시오.”

     

    그녀는 젊음은 단 한 번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먼지알만큼 많은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무한히 오래 살고 싶었을 뿐, 젊음을 재창조하며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 시빌의 모습과, 그저 많은 문명의 이기는 원하지만 그곳에서 행복과 희열을 얻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현대 서구인들의 모습은 너무나 똑같지 않은가?

     



    20세기를 넘어서면서 맞닥뜨린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엘리엇은 서구인의 삶에 서린 ‘무한한 늙음’과 ‘죽음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린 깊은 절망을 보았다.

     

    그러나 그를 더욱 절망하게 한 것은 그 절망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함이었다.



    시빌의 절망에는 아직 희망은 있다.

     

    그녀는 죽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재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절망에는 희망이 없다.

     

    그 황폐한 정신을 가지고 죽음을 피해 다닐 뿐, 재생의 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황무지에 등장하는 겨울에 따스함을 쫓아 남쪽으로 가는 유한계급의 사람, 종교적 신념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 문명의 값진 유산을 허식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류계층 속물, 생명력의 원천으로서 성(性)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는 방탕한 여인, 상업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장사치, 구원의 기사를 유혹해 위험에 빠뜨리는 거리의 여인 등 수많은 인물은 모두 황폐한 정신을 지녔으면서도 그것으로 절망하지 않는, 정신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제목은 생명이 깃들 수 없는 황폐한 문명에 붙여진 것임과 동시에 젊음의 재창조가 없는 영겁의 삶에도 두려움을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황폐한 정신에 붙여진 것이다.


    신정현 서울대 교수 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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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신기관-프랜시스 베이컨


    신기관-프랜시스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거의 잘못된 과학을 비판하고 이러한 비판 위에 새로운 근대 과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던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였다.



    베이컨은 1620년부터 자신의 새로운 학문체계를 집대성한 ‘대혁신’을 총 6부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1605년 발표한 ‘학문의 진보’를 개작해서 ‘대혁신’의 1부로 편입시켰고, 제2부로 ‘신기관’을 저술했다.

     

    ‘신기관’은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 쓴 야심작이었다.



    베이컨이 근대 과학의 정신을 대표할 만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유는 그가 실험이라는 새로운 과학 방법론을 강조했으며, 결국 이러한 방법론이 정착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과학 방법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저작이 바로 ‘신기관’이다.



    ‘신기관’의 제1권은 삼단논법이 자연의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부적절함을 강조하면서, 진정한 ‘자연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참된 귀납법’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베이컨은 인간 지식의 오류의 원천을 인간의 본성에서 유래한 종족의 우상, 편견에서 유래한 동굴의 우상, 언어와 의사소통에서 유래한 시장의 우상, 학파의 오류에서 유래한 극장의 우상이라는 4가지 우상으로 분류한 뒤에 이를 비판했다.



    결국 베이컨에게 과학의 방법론의 핵심은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정적(靜的) 원리를 사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무엇에 의해 일어나고 있나라는 동적(動的)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별 사실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해야 하며, 이러한 광범위한 탐구는 실험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데, 실험에 대한 강조는 베이컨이 생각했던 새로운 논리학의 정수였다.



    베이컨 이전에는 실험이 자연을 교란시키기 때문에 진정한 과학의 방법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본심이나 지적 능력, 품고 있는 감정 등은 평상시보다는 교란되었을 때 훨씬 더 잘 드러난다”고 비유하면서, “마찬가지로 자연의 비밀도 제 스스로 진행되도록 방임했을 때보다는 인간이 기술로 조작을 가했을 때 그 정체가 훨씬 더 잘 드러난다”고 자연에 대한 조작을 정당화했다.



    베이컨의 ‘신기관’은 근대 과학의 방법론은 물론 과학의 진보와 효용에 대한 믿음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책이다.



    이 책은 17세기 과학혁명을 주도했던 과학자들에게 널리 읽혔고, 결국 영국의 ‘왕립협회’나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와 같은 새로운 과학단체들을 설립하고, 실험과학을 추동했던 동인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서 자연에 조작을 가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법칙을 알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이러한 실험을 위해서 공동연구를 해야 하며 더 나아가서 국가와 사회가 이러한 과학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참된 과학적 방법에 대한 확신, 과학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 진보에 대한 희망은 서구의 ‘근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며, 이는 베이컨의 ‘신기관’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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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선사시대부터 영화의 시대까지 서구 문학과 예술의 역사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서술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문학 미술 음악 건축 영화 등 거의 모든 예술 장르를 망라하고 있다.

     

    저자는 문학예술 작품이 한 시대의 생생한 산물이라는 것을 폭넓은 역사적 안목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탁월한 심미안으로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공 분야와 관계없이 문학예술을 공부하려는 학생은 물론 소박한 감상자를 위해서도 이 책은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논할 때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풍부한 해명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나의 예술작품 또는 한 시대의 주도적 양식은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탄생하는가.

     

    어떤 사회적 요인에 의해 양식의 변화와 교체가 이루어지는가.

     

    서로 다른 예술 장르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예술작품과 수용자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 모든 변수가 어떻게 작품의 미적 특성으로 구현되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저자는 다양한 시대와 장르를 가로지르며 독자의 사고를 자극한다.



    이 책은 수천 년에 걸친 서구 문학예술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책의 바탕에 깔려 있는 방법론을 간단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저자의 기본 입장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짚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구석기 시대부터 중세까지로, 이 시기 예술의 기본 성격을 저자는 “실용적 목적과 미적 관심의 직접적 일치”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술이 추구하는 미적 가치는 자연의 지배나 종교적 제의 같은 예술 외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는 동물 사냥 장면을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수렵에 의존하던 원시 경제생활을 촉진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기능했다.

     

    중세 기독교 예술 역시 예술을 실용적 목적에 종속시킨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그 반면 르네상스 이래의 근대 예술은 차츰 그러한 실용적 목적에서 벗어나 나름의 자율성을 추구한다.

     

    근대 예술의 자율성은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동시에 인간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과 인간 보편적 가치의 추구가 이제는 예술의 몫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근대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이 그 본연의 휴머니즘적 지향성을 회복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 시민사회의 ‘합리화’(막스 베버) 과정과 더불어 사회가 다양한 영역으로 분화되고 자본과 권력의 전일적 지배가 강화되면서 다시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의 부정적 힘에 저항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근대 예술의 탄생 조건이었던 시민사회의 내적 모순에 대한 응전이 곧 현대 예술의 본령이 되는데, 저자는 인간 소외의 문제를 최초로 민감하게 포착한 낭만주의가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의 기점이라 보고 있다.



    독자는 저자의 생각을 미리 파악하려고 덤비기보다는, 관심이 끌리는 시대나 사조 또는 작품에 관한 서술을 읽어가는 동시에 실제로 해당 작품을 감상하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고 저자의 생각을 음미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하다.


    임홍배 서울대 교수 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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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고도를 기다리며-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사뮈엘 베케트  





    한없이 지루한데 결코 자리를 뜰 수 없는 연극,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저 깊은 인간의 심연을 곧바로 느끼게 하는 연극, 근원적인 비애와 경련적인 웃음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연극….


    1953년 거의 폐관 직전 상태에 있던 파리의 한 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초연되었을 때 관객들의 첫 반응은 그렇게 막연하고 야릇했다.



    그럼에도 조만간 이 낯선 체험에 대한 조용한 열광이 세계로 번져 나갈 것이고, 차후 베케트는 ‘반(反)연극’ ‘신(新)연극’ ‘부조리 연극’ 등으로 명명될 20세기 연극의 새로운 조류를 대표하는 극작가로 손꼽히게 된다.

     

    그 명칭이 암시하듯 그때 사람들은 전통의 거부와 혁신, 그리고 ‘부조리’의 인식에서 이 연극을 이해하는 단서를 구했다.



    ‘부조리’의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서구의 총체적 위기상황 속에서 ‘실존적 인간’을 응시하려는 철학적 성찰과 함께 싹텄다.

     

    무엇보다도 이성(理性)과의 부조화를 뜻하는 그것은, 근대사회의 기반이 되어 왔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 위에서,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척도가 아니며 이 세계도 합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의미체가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런 철학적 주제를 제기한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 이후, 철학자이기보다는 철저한 예술가였던 부조리 ‘작가’들을 사로잡은 문제는 어떻게 부조리를 진정 부조리답게 보여 주느냐는 것이었다.

     

    부조리를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논하고 보여 준다면 그건 이미 부조리가 아니지 않을까?

     

    이런 물음에서 촉발된 베케트의 도전은 ‘혼돈에 적합한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부조리 그 자체로 빚어진 이 형식은 당연히 전통적 형식을 파괴한다.

     

    즉, 이성의 명령으로 짜인 모든 ‘고전적’ 규범과 기법들을 거부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과론적 서사구조의 해체일 것이다.

     

    기승전결식으로 정형화된 ‘이야기’의 선적 구조야말로 인간과 세계를 ‘의도된’ 의미에 맞춰 ‘조리 있게’ 구성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그런 서사적 연결을 유도하는 모든 요소가 극단적으로 파편화된다.

     

    이 작품 속에는 시간의 흐름도 없고 공간의 이동도 없다. 의미를 생성하는 어떤 지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단지 ‘지금-여기’라는 텅 빈 상황으로 제시되는 그 시공은 요컨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는 ‘끔찍한’ 세계이다.



    거기서 등장인물은 마치 아무 역할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무대 위로 내던져져 뭔가를 연기해야 하는 배우와도 같다.

     

    이 할 일 없는 세계 속에서는 할 일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할 일, 즉 ‘역할’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고도는 올 것인가?

     

    과연 그럴 희망은 있는가?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순환구조를 통해 끝없이 유예되는 기다림 속에서 끝없이 피폐해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다.

     

    전례를 찾기 힘든 이 도저한 절망의 상상은 우리를 어떤 역설적인 악몽 속으로 이끌어 가는 듯하다.

     

    ‘희망’과 ‘의미’의 기치를 걸고 인간을 오히려 병들게 만드는 거짓 진리들에 강력히 저항하는 악몽!


    이인성 서울대교수·불어불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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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장자(莊子)-장주(莊周)


    장자(莊子)-장주(莊周)  




    장자(본명 장주·莊周)가 살았던 시대에는 개인 상호 간의 무한한 생존경쟁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처참한 전쟁이 만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공동체에 앞서는 개개인의 사람다운 삶의 추구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적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장자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 유지를 위하여 생겨난 사회제도, 이념, 권력, 재물 등등은 결국 생명 밖의 존재, 즉 외물(外物)에 불과하다.

     

    장자는 바로 이런 ‘외물’의 추구 때문에 도리어 살아있는 개개의 인간(생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적 모순을 지적한다.



    또한 장자가 보기에 현실세계에서는 자기만의 특수한 ‘하나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집착하여 오로지 자기 인식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보고―자기와 다른 타자의―입장과 기준들을 부정하고 무차별적으로 규제하고 억압하는 독단적 이념이 넘쳐나고 있다.

     

    이와 같이 다른 생명체에게도 자기 방식대로 행동하기를 강요하는 독단론자들의 이념적 폭력을 장자는 기발한 우화와 비유를 통하여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장자에 의하면 인간의 기준은 결코 만물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척도가 될 수 없다.

     

    인간 이기주의, 인간 독점주의를 병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장자의 사유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는 일종의 생명철학이다.

     

    하나의 생명체 안에서 심장이나 간 등등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기관들은, 장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위(有爲)’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 ‘유위’하는 존재만으로는 생명성이 보장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죽은 시체와는 달리 그 생명체를 구성하는 각 기관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정한 ‘아니마’처럼 ‘보이지 않는 총체적인 생명원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총체적 생명원리가 바로 장자가 강조하는 ‘무위(無爲)하는 도(道)’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만물에게 각각의 ‘유위’라는 고유한 활동이 가능하려면, 바로 그 ‘유위’의 지평을 넘어서는 총체적인 생명원리인 ‘도’의 ‘무위’ 속에 포섭되어야 한다.

     

    그 ‘도의 무위’ 속에서 각각의 ‘유위’는 자기의 개별성 또는 차별성을 최대한으로 보장받으며 서로 평등하게 보완하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장자철학의 의의는 우선 오직 ‘하나의 척도’에 의거하여 무차별적으로 인간 본연의 생명성을 왜곡하고 압박하고 있는 모든 사회적 규제나 간섭을 이념적 폭력으로 고발하고 그것을 지양하고자 하는 혁명적인 부정에 있으며, 이와 동시에 자기 삶의 본연적 차별성을 찾아내려는 해방의 목소리에 있다.



    사회 속에 살면서 사회적 제약을 넘어서려는 장자의 이상은 영원한 유토피아인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삶의 ‘진정성’의 추구를 포기한 채, 가상세계가 이끄는 기계놀이에 매몰되어서 도구종속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장자의 환상적인 유토피아 이야기가 주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장자’의 한글번역서로는 안동림이 역주한 ‘장자’(현암사)가 있고,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번역서로 오강남이 풀이한 ‘장자’(현암사)와 이강수와 이권이 옮긴 ‘장자Ⅰ’(길)이 있다.


    송영배 서울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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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물질문명과 자본주의-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페르낭 브로델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현대 역사학의 고전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 세계의 내부 구조와 그 역사적 기원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은 한번 진지하게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사전 준비 없이 쉽게 접근할 만한 책은 분명 아니다.

     

    이 책을 처음 읽노라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역사 사실과 아리송한 개념 때문에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실 그 모든 것은 아무렇게나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그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저자의 독특한 사관에 따라 교묘하게 배치된 것이다.

     

    이런 점을 잘 모른 채 무작정 이 책을 읽는 것은 약간 무모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권하는 이유는, 세계를 읽어내는 저자의 거대한 틀을 좇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지적인 체계를 세워보는 데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브로델이 제시한 가장 흥미로운 개념은 제1권에서 소개하는 ‘장기지속’이다.

     

    이것은 다른 역사학자와 브로델을 구분 짓는 가장 독특한 개념이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인간의 삶과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밝히려고 한다.



    그러나 브로델이 볼 때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는 대부분 아주 오랜 시간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일상생활에서 변함없이 반복되는 가운데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이 전개되는 방식과 한계를 규정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브로델이 이처럼 구조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의 성과를 장기적으로 ‘보존’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브로델이 그리는 세계가 완전한 무변화의 시공간은 아니다.

     

    변화를 모르는 관성의 세계만이 아니라 그 위에서 활기차게 움직이는 ‘경제’와 ‘자본주의’를 함께 이해해야 그의 사관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상층의 층위를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제2권이고, 다시 여기에 시간의 요소를 집어넣어, 우리에게 익숙한 대로 세계경제가 어떻게 구조적 변화를 해 왔는가를 그린 것이 제3권이다.



    브로델의 거대한 체계를 간략하게 요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그려낸 구조는 뼈만 앙상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길어온 여러 이야기들로 흥미진진하게 짜여 있다.



    브로델이 이야기하듯 우리의 삶은 여러 층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단기적으로도 살고 장기적으로도 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세대만이 경험하는 독특한 사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되어 온 문명의 성과를 그대로 반복하며 살아가는 측면도 있다.

     

    이것들을 함께 이해하려는 브로델의 구조는 그토록 거대하고 복잡한, 그리고 여러 차원에 걸친 서술들로 짜일 수밖에 없다.



    유장한 긴 호흡과 급격하게 변화하는 짧은 호흡이 함께 존재하고, 또 그런 층위들이 서로 교차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이런 여러 차원을 염두에 두고 인간과 사회를 거시적으로, 총체성 속에서 이해해 보자는 것이 그의 중요한 메시지이다.


    주경철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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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객관성의 칼날-찰스 C 길리스피


    객관성의 칼날-찰스 C 길리스피  




    갈릴레이에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서양 과학의 흐름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과학적 사상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지니고 있다.

     

    ‘칼날’이라고 번역된 ‘에지(edge)’라는 단어는 칼날의 의미 외에 ‘경계’ ‘가장자리’라는 뜻도 지니는데 저자는 아마도 이 모든 의미를 함께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갈릴레이에서 근대과학이 태동한 이래 서양 과학의 발전 과정 전체를 ‘객관성’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연세계가 설명, 이해되고 그 경계가 규정되어 가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갈릴레이의 천문학과 역학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 책은 하비의 피 순환이론, 베이컨과 실험과학, 데카르트와 기계적 철학, 뉴턴에 의한 종합, 계몽사조와 과학, 라부아지에의 연소이론과 근대화학, 자연사, 진화이론, 열역학, 전자기학, 상대성이론을 다루면서 이어진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과학자, 사상가가 등장하고 수많은 과학 텍스트가 분석된다.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서양 과학의 역사상 수많은 과학자와 그들 저서의 내용 및 핵심 구절을 직접 대할 수 있다.



    이 책은 학부 과정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 내용을 정리한 책으로서는 놀랍게도 아주 높은 수준에서 깊이 있는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갈릴레이의 낙하법칙이 얻어지는 과정을 갈릴레이가 남긴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첫 부분에서부터, 저자는 직접 텍스트의 분석을 바탕으로 갈릴레이의 사고과정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같은 과정이 천재적 영리함과 성공만이 아니라 오해와 좌절, 실패가 포함되는 긴 우회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결국은 운동에 대한 이해가 갈릴레이 같은 사람이 빼어든 ‘객관성의 칼날’을 통해 근대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것이 객관성이 승리하는 단순하고 논리적인 ‘당연한 과정’이 아니라 갈릴레이 개인의 상황이나 당시 과학자와 그들이 살던 사회의 여러 여건이 결합되어 진행된 복잡한 과정이었음을 보인 것이다.



    그 이후의 장에서도 근대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했던 변화가 진행된 실제 과정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길리스피의 논의가 이어진다.

     

    당연히 직접 그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과학자가 남긴 텍스트가 분석되는데 그들이 단순히 책이나 사람의 이름으로 거론되는 것이 아니라 서양 근대과학의 핵심적 이론이나 변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그 주역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당시의 사회적, 사상적 배경이 설명된다.

     

    서양 근대과학의 역사상 중요한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던 것일까에 대한, 그리고 그 과정에 참여했던 과학자가 어떤 개인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사색이 개진되고, 독자는 저자와 함께 그 같은 사색을 해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딱딱한 과학 텍스트에 담긴 과학자의 생각의 흐름과 그것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지니는 의미를 저자 특유의 섬세하고 유려한 필치로 조망하는 이 책을 통해 독자는 근대과학 역사상의 중요한 변화가 그 어느 하나도 단순한 요인에 의해 한 가지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해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영식 서울대 교수·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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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당시선-이백(李白) 외


    당시선-이백(李白) 외  




    중국을 흔히 ‘시의 나라’라고 한다.

     

    중국은 오랜 역사를 통해 방대하고 다양한 문화를 이루었는데, 그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것이 시라는 뜻이다.

     

    현전하는 중국의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시경(詩經)’이다.

     

    중국 문화의 남상(濫觴·모든 사물의 시발점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2500∼3000여 년 전 시가 수록되어 있으니, 중국의 역사는 시로써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또한 시를 짓는 능력이 관리 선발의 기준이었던 당대(唐代) 이후 청대(淸代)까지 거의 모든 지식인이 시를 창작했다는 점에서도 중국은 시의 나라라고 불릴 만하다.



    수천 년 중국 시사(詩史)에 있어서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평가 받는 것이 당대에 창작된 시, 즉 당시(唐詩)다.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백거이(白居易) 등 여러 대가가 수많은 시를 지었는데, 이 중 명편들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중국의 시가 중국 문화의 정화(精華·뛰어난 부분)이고, 당시가 중국 시를 대표하기 때문에 중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당연히 당시를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당시는 그 양이 너무 많다.



    청대에 편찬된 ‘전당시(全唐詩)’만 보더라도 시인의 수가 2000명이 넘고 수록된 시가 거의 5만 수가 되니 일반인이 이를 모두 통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여러 사람이 명편을 골라서 편찬하는 작업을 해 그중 대표성을 갖는 선집(選集)이 널리 보급됐다.



    당시에는 여러 시인의 갖가지 정감이 표출되어 있다.

     

    몇 편을 예로 들어 보자.

     

    이백이 봄날 달 아래서 혼자 술을 마시며 지은 시 ‘달 아래 혼자 술을 마시며’(月下獨酌)에는 절대 자유를 추구하다가 이루지 못한 천재의 고독감이 진하게 배어 있다.

     

    두보가 전란의 참상을 보고 지은 시 ‘석호의 관리(石壕吏)’에는 위정자의 잘못으로 고통 받는 인민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지식인의 분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왕유가 대나무 숲에서 유유히 혼자 놀다가 밝게 비치는 달빛을 보고 지은 시 ‘죽리관(竹里館)’에는 담담한 마음으로 세계를 관조하려는 지향이 응축된 필치로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도 인간의 다양한 서정과 사상이 녹아 있어서, 이런저런 시를 읽다 보면 절로 한시의 세계 속에 빠져들게 된다.

     

    따라서 당시의 명편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선인이 삶 속에서 추구한 풍류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새삼 음미하게 해준다.

     

    또한 기계문명과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정신세계의 가치를 잊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당시의 선집은 당대 이후 100종 이상이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선정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종류의 선집이 나와 있으니, 당시를 읽으려는 독자들은 이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서울대출판부에서 출간한 ‘당시선(唐詩選)’은 당대의 대표적 시인 50명의 작품 약 270수를 시기순으로 수록했다.

     

    선정한 작품에 대한 번역과 주해(註解)를 달고 해설을 곁들여 초보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이영주 서울대 교수·중어중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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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무정-이광수


    무정-이광수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無情)’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간행됐다.

     

    이 소설은 식민지시대에 신소설이 빠져들었던 통속화 경향을 극복하고 근대소설의 서사적 속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 무정의 시대는 무엇보다도 개인에 대한 발견과 자아에 대한 각성이 요청된 시기이다.

     

    민족적 자기인식과 그 주체적 확립이 가능하지 않은 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문학이 자아에 대한 각성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자각과 각성에서 출발할 때에 민족 전체의 주체적인 자기 확립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소설 무정에서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개인적 운명의 양상이다.

     

    이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이형식과 박영채라는 두 인물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형식은 경성학교 영어 교사로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해 나아가는 선각자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고아의 신분이었지만 자신의 처지에 굴하지 않고 신교육을 통해 문명개화의 길을 열어간다.

     

    박영채는 가계의 몰락과 함께 기생 신분으로 전락하지만, 이형식을 다시 만나기를 오랫동안 기다린다.

     

    그러나 이형식이 이미 다른 여성과 혼약의 단계에 이른 데다 자신의 순결마저 잃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자 한다.

     

    이 작품의 후반부에서 박영채가 자살을 포기하게 된 것은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동경 유학생 김병욱 때문이다.

     

    박영채는 김병욱의 충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알아차린 후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 소설에서 서사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박영채의 변모과정은 가족의 붕괴와 신분적 몰락이라는 개화 공간의 사회적 격변과 맞물려 있다.

     

    그녀는 사회적 변화와 가치의 혼란 속에서 빚어지는 개인의 운명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구시대의 질서가 붕괴되는 과정 속에서 운명적으로 강요된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게 된다.

     

    그러나 문명개화의 이상을 따라 새로운 교육의 길을 택함으로써 재생의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소설 무정에서 볼 수 있는 자아의 각성과 개인의 발견은 현실에 근거하고 있는 개인의 존재와 그 인식을 중시하는 근대소설의 요건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근대소설은 사회에 대한 개인의 관계를 개인의 운명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보여준다.

     

    근대소설은 경험적인 세계 속에서 개인의 삶의 양상을 총체적으로 포착해 내는 것이므로, 자아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통해 개인의 삶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서 성립된다.

     

    개인의 행동과 그 행동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조건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모습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때에 진정한 근대소설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소설 무정에서 그려내고 있는 개인의 자기 발견 과정이 반성적인 자기 각성의 단계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정이 개인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권영민 서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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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아함경-사캬무니 붓다

    아함경-사캬무니 붓다  




    아함경은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 살았던 인물인 사캬무니 붓다가 45년간 그 제자들과 나눈 대화와 가르침을 모은 것이다.

     

    비유나 우화가 많이 등장하고 대화체로 써 있어 읽기 쉬워 보이지만, 내용은 삶의 조건과 질곡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해결책 등을 말하고 있어 무겁다.

     

    그러나 붓다가 제자의 특성에 맞춰 난이도를 달리해 묻고 답한 것이므로 그 입장이 되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색해 가는 방식으로 읽으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책은 생로병사로 특징지어지는 삶을 고통이라고 본다.

     

    그 고통에는 원인이 있고 또 그것의 소멸, 즉 열반이라는 상태가 있다.

     

    또 거기로 가는 방법이 있다.

     

    이것을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라고 한다.

     

    고통으로서의 삶이 열반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존재는 원인을 가지고 상관하는 관계, 즉 연기(緣起)의 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저것’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저것이 사라지면 ‘이것’도 소멸한다는 것을 알면 번뇌와 괴로움의 제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의 상관성에 대한 인식은 붓다가 새로 창안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존재하던 사실로서, 그는 지혜나 눈이 있는 자는 다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진리는 경험으로 증험할 수 있어야 하고 특별한 신앙이나 능력을 가진 자만 알 수 있다면 이미 보편성을 상실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함경에는 붓다의 사상과 삶의 이야기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초기 교단의 모습, 즉 수행자의 공동체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불교는 남성과 여성 출가자 모두의 독립 교단을 인정하는 유일한 종교다.

     

    배경이 다른 사람이 모여 더불어 수행하며 살기 시작했을 때 계율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들 교단의 성원은 보름에 한 번씩 모여 참회하는 모임을 갖고 자진해서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 달라고 동료에게 청한다.

     

    정해진 원칙에 따라 일방적으로 계율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문제를 실용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요즘 불교가 근대 문명에 대해 대안적 사고를 제공하는 것으로 관심이 증폭되면서 불교와 현대사회에 대한 관련성이 많이 논의되고 있다.

     

    네트워크의 시대가 오면서 연기사상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널리 확산되고, 거기에 드러나는 평화사상과 공생의 윤리 등이 마음의 행복, 전쟁과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지구, 환경과 생명에 대한 자비와 애정 등의 메시지로서 적극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인간, 세계, 우주를 잇는 유기적 세계관과 자연에 대한 존경이 문명의 위기를 걱정하는 지식인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아함경’에 대한 연구도 이른바 대승불교의 전통을 따르는 한국에서는 이것을 소승불교라 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일찍이 19세기부터 서양 불교학계에서는 팔리어 ‘니카야’를 번역하고 연구했다.

     

    현재 구미의 웬만한 대학에는 불교 강의가 개설되고 수백 명의 학생이 수강을 하고 있다. 아함경 한글 번역본은 완역본에서 축약본까지 수십 종이 시중에 나와 있다.

     

    그중 ‘한글 아함경’(고익진 교수 편역·동국대 출판부)이 학술적이고 내용이 충실하며 ‘부처님 말씀’(성열 스님·현암사)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조은수 서울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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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신곡-단테


    신곡-단테  




    2004년 11월 4일은 유럽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모인 유럽연합(EU) 가입 28개국 국가원수들은 이날 대통령궁에서 EU헌법 초안에 서명했다.

     

    이 헌법은 각국 국회나 국민투표를 거쳐 2006년 11월 1일에 발효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 화려한 행사가 교황청에는 참으로 씁쓸한 날이기도 하였으니, 유럽이 그리스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문구가 헌법 서문에 들어가야 한다는 교황의 끈질긴 주장을 유럽 정상들이 묵살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헌법 서문에 “유럽의 문화적 종교적 인문적 유산”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쳤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의 패권 다툼이 유럽 전체를 황폐하게 하던 중세에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정립한 인물이 다름 아닌 시인 단테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더불어 시성(詩聖)이라는 월계관을 쓴 이탈리아 시인 알리기에리 단테는 겔프당과 기벨린당의 정쟁으로 내란이 끊이지 않던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권위를 확립함으로써 유럽에 궁극적 평화의 기틀을 마련하려던 정치적 노력이 실패하자 역사의 지평을 넘어 세계사 전체를 종교철학의 시각으로 재정리하여 3부 100곡으로 이루어진 ‘신곡(神曲)’을 남겼다.



    신곡은 단테라는 한 영웅이 육신을 입은 채로 지옥, 연옥(煉獄), 천국을 여행하는 종교적 서사시이다.



    그가 탐험하는 명계의 처음 두 곳은 이성(理性)의 상징인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고 세 번째는 신앙(信仰)의 상징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는다.



    단테가 아홉 살에 처음 보았고 18세에 다시 해후하였으나 딴 남자에게 시집가 불과 24세의 나이로 죽은 한 여인이 구원의 여성이 되어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



    서사시는 “여기 한숨과 눈물과 드높은 통곡이 별 없는 하늘에 메아리치는” 지옥에서 시작하여 “나는 보았노라. 조각조각 우주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 한 권에 엮여 있는 것을. 그리고 만사를 한결같이 움직이는 바퀴와 같이 해와 별을 움직이시는 사랑이 돌리고 있더니라”는 천국으로 끝난다.

     

    인류사가 인간의 의지와 신의 사랑이 엮어내는 승리의 기쁨 속에 완성된다는 낙관적 역사관을 보여준다.

     

    전의 중세인이 대자연(大自然)과 성서(聖書)라는 두 편의 책에서 인생과 신을 읽었다면 단테는 신과 인간이 함께 엮는 역사(歷史)라는 책으로 인생을 읽었다.


    그래서 지옥의 멸망된 족속으로 드는 길은 인생과 자기 사회에 대한 역사적 태만과 해악이며, 실상 지옥은 인간 자유의지의 개별적 집단적 행사를 신이 영원히 존중함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정의는 내 지존하신 창조주를 움직이어 그 극한 지혜와 본연의 사랑이 나를 만들었으며 나는 영겁까지 남아 있으리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 온갖 희망을 버릴진저.” 그리고 “세계에서 세계로 이렇듯 내 길잡이의 자취를 따라 두루 찾게 해 주신 그 평화의 이름으로 나는 일을 하리라”는 시인의 동경대로 한반도에 평화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의 시집을 펴든다.




    성염 주교황청 대사·전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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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방법서설-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중세 사상사가 끝나고 근대적 사유의 공간이 열리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을 상징한다.

     

    이런 대표성은 근대 유럽에서 모국어로 철학을 펼친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한다.



    오래도록 상식화되고 자연화된 통념, 하지만 이제 그 역사적 타당성을 잃어버린 통념을 어떻게 부술 것인가?

     

    숱한 세월 속에서 그 무게를 더해온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지워버릴 것인가? 데카르트 철학의 일차적 의미는 이런 전환기의 물음에 부응하여 모범적인 해체론의 사례를 남겼다는 데 있다.

     

    이 해체론은 어떤 길, 여정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그 이후의 어떠한 해체론과도 쉽게 구별된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나 ‘우화’의 형식에 실려 표현되는 개인적인 ‘나’의 여정이고, ‘아낙네’도 읽을 수 있는 평이한 문체의 일상어로 그려지는 내면적 발견의 여정이다.

     

    이 여정 속에서 저자는 자신을 ‘어둠 속을 홀로 걷는’ 단독자로 의식하고 있으며, 정신적 홀로서기에 이르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역사적 과거를 파괴하고 있다.

     

    자신의 개인사를 자유롭게 재구성하고 멀리 이어가면서 중세의 기억에서 해방되는 원심력을 얻고, 마침내 근대성을 잉태하는 탈주의 궤적을 그려내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여정은 6단계로 이어진다.

     

    이 책의 1부에서 저자는 자신의 학문적 성장과정 속에서 체화된 과거의 학문을 비판하고 선별한다.

     

    여기서는 과거의 주류 사상에 대한 환멸과 수학에 대한 감동이 좋은 대조를 이룬다.

     

    2부는 모든 학문과 진리탐구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데, 여기서는 근대 과학의 창시자로서 저자가 지녔던 자부심이 드러나고 있다.

     

    3부는 도덕인데, 이는 과학의 마지막 발전단계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완전한 실천학이 아니라 그런 국면을 기다리는 동안 좇아야 하는 ‘임시 도덕’이다.



    4부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학문체계의 첫 번째 진리로 선언하는 간략한 형이상학적 성찰이다.

     

    이 성찰도 진리를 열망하던 정신이 회의주의자로 탈바꿈되고, 회의주의자였던 정신이 다시 진리의 존재론적 기원인 신과 세계를 재발견하는 개인적 회상의 길을 따른다.

     

    5부는 저자가 자신의 방법을 통해 성취한 여러 과학적 발견의 대강을 서술한다.

     

    끝으로 6부는 새로운 과학이 가속화할 역사적 진보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 이런 진보에 필수 불가결한 실험과 관찰에 지식인들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방법서설’의 첫 문장은 ‘이 세상에서 양식(良識)보다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은 없다’이다.

     

    데카르트는 이 문장을 통해 자신의 사유의 여정을 열면서 동시에 철학적 의미의 근대를 열어 제치고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정의되는 것처럼, 근대성은 이성의 자율적 사용 속에서 싹트고 열매 맺는다.



    이 작품은 이성의 자율적 사용에 요구되는 조건과 방법에 대해, 또 그런 자율적 이성 사용이 약속하는 미래에 대해 처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사상사의 고전이다.

     

    나아가 이 작품은 모국어의 시대를 앞당겼을 뿐 아니라 일인칭 관점의 서사가 발휘하는 파괴력을 통해 철학사 해체론을 실천한 보기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인류 사상사의 기념비로 남을 것이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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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연암집(연암산문선)-박지원


    연암집(연암산문선)-박지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은 조선 후기의 문호이자 실학자다.

     

    우리나라의 한문학은 연암에 이르러 최고의 높이에 도달했다.

     

    연암은 특히 ‘산문’을 잘 쓴 것으로 유명하다.

     

    연암은 한유나 소동파 등 중국의 위대한 산문작가와 견주어 봐도 전연 손색이 없다.



    연암은 10대 후반에 이미 작가로서의 천재성을 드러냈다.

     

    ‘마장전’ ‘민옹전’ ‘광문자전’ 등 이른바 ‘9전(九傳)’에 해당하는 작품 대부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 사이의 시기에 창작되었다.

     

     ‘9전’이 청년 연암의 뜨거운 파토스와 예리한 비판의식, 풋풋한 감수성을 보여준다면, 30대에 쓰여진 산문은 삶과 세계에 대한 더욱 깊은 성찰과 응시를 보여준다.



    연암은 이 시기에 지독한 가난과 함께 가까운 가족과의 사별을 경험했으며, 커다란 경륜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판적 자세로 인해 당대의 지배질서 밖에서 소외된 지식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바, 이러한 체험과 역정이 그의 산문에 놀라운 깊이를 가져다 준 것으로 보인다.

     

    ‘큰누이 묘지명’이라든가 ‘술에 취하여 운종교를 밟은 일을 기록한 글’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글이다.



    한편 연암은 이 시기에 실학적 사고를 발전시켜 갔으며, 춘추대의의 명분에 사로잡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깔보면서 ‘자고자대(自高自大·스스로를 최고이며 위대하다고 여기는 태도)’의 미망에 빠져 있었던 당대의 조선 사대부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중국의 선진문명을 배워 조선 백성의 삶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그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이다.



    30대에 이룩된 연암의 이런 생각은 40대에 창작된 ‘열하일기’에 아주 잘 구현되어 있다. 연암은 이 ‘열하일기’를 통해 조선 사대부의 허위의식과 편견 및 고루함을 조소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흔히 오해되고 있듯이 연암이 이 책에서 선진 중국문명 따라 배우기만 역설한 것은 아니다.

     

    연암은 동시에 ‘나’가 아닌 ‘타자’로서의 중국을 정당하게 관찰하고 인식하려는 노력을 이 책의 도처에서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연암은 조선의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주체적 입장에서 중국을 인식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연암의 산문은 마치 입신의 경지에 든 도공이 빚어 놓은 도자기처럼 물샐틈없이 삼엄한 완정미를 보여준다.

     

    그의 글은 대단히 창의적이며, 풍부한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반성력과 자기응시를 보여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창조적인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 더 나아가 나라와 백성에 대한 선비로서의 경세적 책임감을 견결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연암은 우리나라 고전문학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언어의 마술사였다고 이를 만하다.

     

    연암만큼 언어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 집요하게 물으면서 상투성과 진부함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해방시켜 사물 자체에 다가가게 만들려고 노력한 작가도 아마 없을 터이다.

     

    이 점에서 그는 ‘대문호’라고 불릴 만하다.



    연암의 산문은 고도의 미학적 정련을 보이고 있어 한글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번역이나 해석에는 틀린 것이 퍽 많다.

     

    하지만 최근 간행된 신호열 김명호 두 분이 공역한 ‘연암집’만큼은 전적으로 신뢰할 만하다.


    박희병 서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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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퇴계선집(퇴계문선)-이황

    퇴계선집(퇴계문선)-이황  

    유교 전도사로 자처하는 하버드대의 두웨이밍(杜維明) 교수는 항상 한국 지폐를 지니고 다닌다.

     

    1000원권과 5000원권에 있는 퇴계와 율곡의 초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유학자가 화폐에 등장하는 예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하면서 조선이야말로 유학의 이념을 구현한 유일한 나라이며 그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은 유교가 아직 살아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라고 치켜세운다.



    이러한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지극한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작 우리가 퇴계와 퇴계사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퇴계가 한국 성리학의 주춧돌을 놓은 훌륭한 유학자이고 중국의 성리학자보다 더욱 정밀하게 주자를 연구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흔히 퇴계사상의 핵심은 이기론(理氣論)보다 도덕적 마음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데 있다고 한다.

     

    퇴계는 욕망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된 순수한 영혼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덕적 직관이 가능하며, 성인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일반적인 마음은 기의 드러남이지만 도덕적 정신은 원리 그 자체가 드러난 것’이라는 독창적인 주장이었다.



    이러한 퇴계의 주장에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소위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라는 조선시대 최대의 성리학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퇴계는 자신의 학설을 약간 수정하여 ‘행위를 유발하는 일반적인 감성은 기의 드러남이나 양심의 규제를 받고, 도덕적 감성은 이가 드러난 것인데 기에 의해 현실화된다(七情氣發而理乘之 四端理發而氣隨之)’고 한다.

     

    아마도 퇴계는 도덕을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퇴계는 도덕적 감성을 일반적인 감성과 분리하고 이를 기에서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하게 되고 지적인 훈련보다는 감성적 수양(敬)을 중시하게 된다고 한다.



    거칠지만 쉽게 요약한다고 해 보았는데 현대의 한국인이 이해하기는 역시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퇴계선생문집’을 단지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적어도 한국의 지성인이라면, 그리고 참된 선비정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학문적 고집은 있지만 제자뻘인 후배와 격의 없이 토론을 벌이고, 고고한 선비이면서 매화가 피었다고 술에 취할 수 있는 인간 퇴계는 그의 글을 읽어야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퇴계 선생의 글을 직접 접할 필요가 있다.



    ‘퇴계선생문집’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다 읽기 힘들다. 퇴계의 성리설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학문적 태도를 아울러 접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고봉과 주고받은 서신을 묶은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를, 퇴계의 사상을 두루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퇴계문집’(민족문화추진회)을 권하고 싶다.


    허남진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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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혁명의 시대-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에릭 홉스봄  




    에릭 홉스봄은 야심만만한 역사학자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떻게 형성되어 발전해 왔을까를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에서 추적하고자 했다.

     

    그는 역량 있고 부지런하기도 하다.

     

    ‘우리 시대의 토대를 놓은’ 출발점에서 현대까지 2세기에 걸친 역사적 변화를 훑되,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시공에 따라 달라지는 세계의 모습을 다양성 속에서 살피는 작업을 자기 나름대로 해냈다.

     

     



    4부작(혁명·자본·제국·극단의 시대)은 그 같은 탐색의 결실이다.

     

    완성된 그림은 단선의 역사가 아니라 횡단면의 역사를 보여 준다.

     

    유럽사에 대한 고찰이 주축을 이루되, 다른 지역도 유럽사와 관련을 가지는 한, 저자의 넓은 오지랖 안으로 들어온다.

     

     



    저자는 18세기 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정치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을 이중혁명이라 칭하면서, 이를 통해 형성된 사회 체제가 그 후 근대 서양 사회의 기본 모델을 제공하였다고 파악한다.

     

    이중혁명 이후 서양의 여러 사회가 반드시 혁명의 길을 거친 것은 아니었으되, 적어도 이 사회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립한 새 체제는 이중혁명으로 수립된 것과 유사했으며, 또 그러한 모델을 따른 체제만이 근대 세계에서 생존력을 가지는 것이었다고 저자는 넌지시 말한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체제를 의미한다.

     

    저자가 보기에 ‘혁명의 시대’에 역사의 총아로 등장하기 시작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자본의 시대’에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 시대, 이 세계의 주인은 부르주아였다.

     

    그러나 득의양양한 부르주아의 낙관적 세계는 ‘제국의 시대’에 들어와 파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긴 19세기’의 주인공이었던 ‘패권적 부르주아’와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이상한 죽음’을 의미하는 세계사적 재앙이었다.

     

    그것은 진보가 내포한 자체 모순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 다음 시대, 곧 대부분의 독자에게 익숙한 20세기(‘짧은 20세기’)는 ‘극단의 시대’로 요약된다.

     

    저자에게도 20세기의 성격은 하나의 세력을 주인공으로 해서 규정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엄청난 기술 발전과 대량 살육 및 환경 파괴, 대중의 정치적 등장과 국가 폭력,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극단적 부와 빈곤이 공존했던 시기다.

     

    인류가 이 시기를 살아 넘길 수 있게 해 주었던 원동력이 더 이상 부르주아적 세계관이나 단선적 진보에 대한 순진한 믿음이 아님은 상식일 터! 20세기에 이르면 스케일 큰 홉스봄도 숨 가쁜 고찰 끝에 눈을 잠시 내리깔고 호흡을 고를 뿐, 하나의 굵은 줄기로 세계사를 묶으려는 시도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영국 출신의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적 국제주의자이되, (서)유럽중심주의적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평가한다.

     

    적어도 19세기에는 유럽인만이 세계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고 믿는 듯하다.

     

    서유럽적 기원의 문물 사상이라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아 근대 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하고자 했던 사람의 노력과 그들의 삶의 궤적을 가벼이 취급하는 그의 서술에서는 오만함조차 묻어난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20세기 말에 이르러 두리번거리며 방향을 살피게 되었다는 것은, (서)유럽중심주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4부작 중 혁명·자본·제국의 시대는 한길사 번역본이, 극단의 시대는 까치글방 번역본이 잘 되어 있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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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한 권의 책 때문에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내게는 ‘이기적 유전자’가 바로 그런 책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생겨났나?

     

    언뜻 보면 내가 생명의 주체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내가 바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또 죽어갈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버드대의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만들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체에 불과하다.” 닭이 알을 낳는 것 같지만 사실 알이 닭을 낳는 것이다.



    도킨스는 우리에게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살아 숨쉬는 우리는 사실 태초에서 지금까지 여러 다른 생명체의 몸을 통해 끊임없이 그 명맥을 이어온 DNA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DNA를 ‘불멸의 나선’이라 부르고 그의 지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모든 생명체를 ‘생존 기계’라 부른다.



    신하들을 풀어 불로초를 찾게 했던 진시황제도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그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100조 개의 세포 속에 들어 있던 DNA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정자 속에 담겨 그의 자식의 몸으로 전달된 DNA의 일부는 아마 지금도 누군가의 몸속에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생명은 영속성을 지닌다.

     

    태초에는 보잘것없는 한낱 화학물질에 지나지 않았던 DNA는 단세포생물을 거쳐 오늘날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몸속에 살아남아 면면히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생명의 역사는 한마디로 DNA의 일대기 내지는 성공담에 지나지 않는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우리 속담을 이기적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다시 보면 ‘호랑이도 죽어서 유전자를 남기고 사람도 죽어서 유전자를 남긴다’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생명은 사뭇 허무해 보인다.



    하지만 그 약간의 허무함을 극복하면 무한한 겸허함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면 내 생명은 물론 이 세상에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에 머리가 숙여질 것이다.

     

    삶에 대한 회의로 밤을 지새우는 젊음에게, 그리고 평생 삶에 대한 회의를 품고 살면서도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한 지성에게 ‘이기적 유전자’를 권한다.

     

    일단 붙들면 밤을 지새울 것이다.

     

    그리곤 세상을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눈으로 다음 날 아침을 맞을 것이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모든 과목에서 이 책을 권한다.

     

    적어도 이 책만큼은 읽어야 내게 강의를 들었노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이기적 유전자’로 인해 거듭난 이들에게 도킨스의 또 다른 명저 ‘확장된 표현형’을 함께 권한다.

     

    유전자의 표현형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도구이며 그 효과는 생명체의 몸 밖으로 확장되어 심지어 다른 생명체의 신경계 속으로까지 파고든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도킨스는 현재 옥스퍼드대의 ‘과학대중화 석좌교수’로서 현대적인 진화의 개념을 알리는 데 전념하고 있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 생명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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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춘향전-작가미상


    춘향전-작가미상  




    ‘춘향전’은 춘향과 이 도령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사랑을 다룬 하고많은 소설 중에 이 작품이 유독 인기를 끈 요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 춘향에게 있다.

     

    이 도령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자기를 끝까지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헤어질 때는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 엄연한 현실에 한없이 절망하면서도 이 도령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또 변학도가 수청을 강요할 때는 기생도 인격을 가진 인간이며,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며 항거했다.

     

    급기야 거지의 모습으로 옥사를 찾은 이 도령을 보고는 원망도 하지 않고 오히려 월매더러 잘 대접하도록 부탁하는 춘향의 모습은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작품 속에서 남원의 민중이 전폭적으로 춘향을 지지하듯이 독자도 춘향의 고난에 함께 울고 행복한 결말에 함께 즐거워했던 것이다.

     

    춘향은 사랑이란 상호 간의 한없는 헌신이자 믿음임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이 사랑을 위한 헌신과 믿음은 강고했던 중세적 통념과 제도도 막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춘향의 사랑은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착하고 능력 있는 여성이 온갖 악조건 속에 핍박과 고난을 겪다가 끝내 사랑을 이룬다는 이 통속한 이야기가 우리 민족의 고전이 된 까닭은 춘향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우리 역사의 방향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춘향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인격적으로 동등하며,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체험하고 확인해 왔던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근대 세계의 이념은 이미 ‘춘향전’ 속에서 싹트고 있었으며, 이 점에서 우리는 모두 춘향의 후예인 것이다.

     

    원래 ‘춘향전’은 판소리 ‘춘향가’에서 나왔는데, 그 역사는 400여 년이나 된다. 그동안 ‘춘향전’은 최초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창조되어 왔다.



    그래서 ‘춘향전’은 단일 작품이 아니라 거대한 군집(群集)으로 존재한다.

     

    성춘향도 있고 김춘향도 있으며, 기생 춘향도 있고 여염 처녀 춘향도 있으며, 봉고파직되는 변학도도 있고 그냥 용서받는 변학도도 있다.

     

    20세기 이후로는 창극 연극 오페라 영화 드라마 등으로 계속 재창작되고 있다.

     

    이처럼 당대의 현실을 호흡하며 계속 업데이트되어 왔다는 점에서 ‘춘향전’은 우리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다른 고전 읽기와 달리 ‘춘향전’ 읽기는 우리의 선조들이 춘향과 함께 살아오며, 그녀를 재창조한 그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춘향을 재창조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수많은 ‘춘향전’ 모두 가치 있지만 우선 세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열녀춘향수절가’(84장본)는 ‘춘향전’ 역사의 한 정점이라 할 수 있으며, ‘남원고사’는 내용이 가장 풍부하며 골계미가 뛰어나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춘향전’(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 들어 있다.

     

    민중적 체취에 흠뻑 빠지고 싶으면 ‘옛 그림과 함께 읽는 이고본 춘향전’(열림원·2001)이 있다.

     

    판소리 ‘춘향가’를 함께 음미하면 즐거움이 배가되는데, 김소희(서울음반)와 조상현(한국브리태니커)의 완창 음반이 정평이 나 있다.




    김종철 서울대교수 국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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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자본론-카를 마르크스


    자본론-카를 마르크스  




    19세기 이후 발간된 경제학 저서 중에서 현실 경제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책을 선택하라는 질문을 한다면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케인스의 ‘일반이론’ 중 하나를 답하는 경제학자가 많을 것이다.

     

    케인스의 ‘일반이론’은 자본주의를 개선하려는 시도이므로 자본주의의 근본적 멸망을 예견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비한다면 변화의 방향 면에서 충격의 정도는 더 적다.

     

    또한 질문을 바꾸어 현실 세계에 가장 나쁜 영향을 준 경제학 책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가장 많은 경제학자가 ‘자본론’을 선택할 것이다.

    이렇듯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가장 논란이 심한 경제학의 고전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자본론’의 내용은 자본주의 구조에 관한 체계적 설명을 담고 있어서 지극히 무미건조하게 보인다.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집필한 ‘공산당선언’이 선동적인 주장으로 되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실 마르크스는 현실 사회주의 운동에서 한 걸음 물러나 런던에서 십수 년간 경제학 공부에 몰두하여 ‘자본론’의 원고를 완성하였고 1867년에 독일어판으로 1권을 발간하였으며, 나머지 2, 3권은 엥겔스가 편집하여 마르크스의 사후에 발간되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모두에서 자본주의의 이해를 위해 가장 단순한 단위인 상품의 속성을 분석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단순히 상품을 판매할 때 차익이 발생한다는 통속적 견해를 비판하고 경제 전체적으로는 생산과정에서 잉여가 발생하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을 알기 위해서는 생산과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그 가치대로 교환되어 투입되지만, 실제로 생산과정에서 지불된 것 이상으로 기여하게 되므로 잉여가 발생한다고 본다.

     

    사실상 마르크스의 모든 경제학적 논의는 잉여가 노동착취에 기인한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고 있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 잉여를 증대시키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계화를 도모하는데, 이렇게 되면 결국 잉여의 원천인 노동사용이 상대적으로 줄게 되므로 이윤이 저하되는 내부적 모순이 나타나게 된다.

     

    즉 자본주의는 노동착취를 통해서 어느 정도 성장하지만 결국 이윤이 저하되어 공황이 빈번히 발생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어 사회주의 체제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이렇듯 노동착취설이라는 기본전제하에서 일관된 설명논리를 갖고 있어서 일단 기본전제를 받아들이면 다른 설명들은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단순한 체계를 갖고 있다.

     

    사실 이러한 단순성이 마르크스 경제학의 최대의 매력이자 최대의 약점이다.

     

     즉 실제로 생산과정에서 잉여가 발생하는 과정은 조직 내의 인간관계의 산물이므로 복잡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두 노동착취로 환원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실제 경제와의 괴리가 발생해도 좀처럼 자신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경직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경직성에 빠질 위험만 피한다면 경제학의 문외한도 큰 어려움 없이 ‘자본론’을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번역본으로는 1991년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것이 가장 잘 되어 있다.


    홍기현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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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대학-중용


    대학-중용  




    ‘대학(大學)’ ‘중용(中庸)’은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사서(四書)’로 불리며 유학의 주요 경전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 두 책은 전통시대 특히 성리학 성립 이후 사대부가 유학을 배울 때 읽던 기본 교재였으며 오늘날에도 유학에 접근할 때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텍스트로 남아 있다.



    ‘대학’의 저자는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자(曾子)와 그 문인으로 알려져 있고, ‘중용’의 저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대학’과 ‘중용’은 원래 ‘예기(禮記)’ 49편 중 42번째, 31번째 편이었다. 전통적으로 유학자들은 이 두 편을 각별하게 여겼는데, 특히 송나라 시대 주희(朱熹)가 ‘논어집주(論語集註)’ 및 ‘맹자집주(孟子集註)’와 함께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저술하면서 흔히 말하는 ‘사서’ 체계가 확립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대학’과 ‘중용’을 함께 거론한다는 것은 주희가 확립한 ‘사서’ 체계에 따라 두 문헌을 다룬다는 말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사서’의 체계에서 ‘대학’과 ‘중용’은 유학을 배우기 위한 첫 번째 관문과 마지막 관문으로 간주된다.

     

    ‘대학’은 대인(大人), 즉 군주 또는 위정자를 위한 학문으로 삼강령(三綱領·세 가지 강령)과 이를 실현하는 팔조목(八條目·여덟 가지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가지 강령은 밝은 덕을 밝히는 것(명명덕·明明德), 백성을 친애하는 것(친민·親民),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지어지선·止於至善)이다.

     

    이는 군주 또는 위정자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밝히는 것이다.

     

    여덟 가지 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이다.

     

    이는 앞에서 보았던 세 가지 강령에 제시된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대학’은 개인의 자기 수양과 전체 사회의 문제를 연속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바로 이런 특징이 유학자들이 ‘대학’을 유학의 입문서로 간주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




    ‘대학’을 통해 유학에 입문하면 ‘논어’ ‘맹자’를 읽고 끝으로 ‘중용’을 읽는다.

     

     ‘대학’이 유학이 지향하는 바와 그 과정 전체의 윤곽을 잡는 책이라고 한다면 ‘중용’은 이론적인 핵심을 확인하면서 정리해 나가는 책인 것이다.

     

    주희는 ‘중용’이라는 책 제목의 ‘중(中)’에 대해 치우침이나 과불급이 없는 것이라 설명하고 ‘용(庸)’에 대해서는 일상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곧, 치우침이나 과불급이 없는 인간의 본성을 일상에 구현하는 일로써 ‘중용’을 이해한 것이다.

     

    나아가 ‘중용’은 한 개인의 심성과 일상생활의 수많은 문제가 하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대학’이 유학의 지향점과 실천 과정을 제시함에 개인과 전체 사회를 연결시킨다면, ‘중용’은 한 개인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진행되는 일상생활과 삶의 도덕적 근원인 하늘을 중첩시키는 것이다.



    ‘대학’ ‘중용’에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이 두 편의 본문과 주희의 주석을 완역한 것에 역주를 첨부한 성백효 선생의 ‘대학·중용집주’(전통문화연구회·1991)를 먼저 읽는 것이 좋다.


    정원재 서울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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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마음-나쓰메 소세키


    마음-나쓰메 소세키  




    ‘마음(心)’은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쓴 일본 근대문학의 최대 정전(正典)이다.

     

    소세키는 도쿄데이코쿠(東京帝國)대를 졸업하고 국비 유학생으로 2년간 영국 유학을 떠난다.

     

    유럽권의 선진문명은 후진국 청년인 그에게 열등감과 고독감을 가져다주었고 이러한 고뇌가 ‘자기 본위’라는 문학사상을 형성하는 토대를 이룬다.

     

    도쿄데이코쿠대 교수직을 버리고 전문 작가가 된 것이나, 일본정부가 주는 박사학위를 거부했다는 ‘나쓰메 신화’는 그의 약력을 말할 때마다 따라다닌다.

     

    게다가 그는 1970년대까지 맥을 이은 다이쇼 교양주의라는 지식인 문화의 산파역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외국 독자인 우리는 왜 그가 일본의 국민작가가 되었고 어떻게 이 작품이 그들의 정전이 되었는가 하는 점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즉, 소세키의 신화화와 ‘마음’의 정전화가 일본의 근대화와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이 소설은 메이지 시대 말인 1910년대를 배경으로 하여, 도쿄데이코쿠대 학생인 ‘내’가 서술하는 ‘선생님과 나’ ‘양친과 나’, 그리고 ‘나’에게 보내는 ‘선생님’의 서간체 서술인 ‘선생님과 유서’의 상중하로 구성된다.

     

    재산가의 외아들로 태어난 ‘선생님’은 청년기에 부모를 잃고 숙부에게 유산마저 사기당하면서 인간에 대한 불신감을 지니게 된다.

     

    자신은 그런 무리와 다르다고 생각하던 ‘선생님’은 그러나 뜻밖에도 자신 속에 내재된 추악한 이기심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하숙집 아가씨에 대한 사랑 때문에 친구 K와 경쟁한 끝에 결국 그를 자살로 내몰고만 것이다.

     

    그러한 ‘선생님’의 그늘을 접하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사상에 감화된 ‘나’는 ‘선생님’의 내면세계를 더 알고 싶어 하지만 ‘선생님’의 수수께끼와 같은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고백의 모티브로 이루어진 ‘선생님과 유서’에서 그 전모가 드러나는 서술 장치가 이 소설을 읽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데, 금전관계에 얽힌 인간 불신이 봉건적 가부장제를 해체하고 어떤 사유 체계를 부여하는가, 질투와 이기심으로 점철된 연애가 초래한 죄의식이 과연 근대적 주체의 성립을 보증하는가 하는 점이 눈여겨볼 대목이다.

     

    또한 ‘천황제’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가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처럼 작가가 ‘사모님’에게 내면세계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음’의 정전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발표 후 90여 년이 지나도록 일본 독자와 더불어 작가 평론가 연구자에게 지지를 받았기 때문인데, 이는 이 작품이 근대소설의 ‘규범’이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갈등구조를 표출하는 장치로서 삼각관계의 연애에 담긴 남성중심주의적 근대, 당시 지식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도쿄데이코쿠대 출신끼리의 지적인 교류, 거기에 개입되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회복의 이야기가 일본의 근대상을 읽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한편 ‘메이지 정신을 위해 순사(殉死)’한다는 ‘선생님’의 유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메이지 일왕의 죽음과 그에 따른 노기 대장이라는 군인의 순사를 기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메이지 시대의 윤리와 가치로 근대 일본을 규정하였다는 비판을 피해 가기 어렵다.


    신인섭 건국대교수 일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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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일리아스-오디세이…호메로스


    일리아스-오디세이…호메로스  




    서양의 고전 목록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일리아스)와 ‘오디세이’는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두 서사시는 서양 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서양의 고대사가 막을 여는 기원전 8세기 중·후반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의 내용은 그때까지 전승되어 온 구전시가(口傳詩歌)를 바탕자료로 구성된 것인데, 그 자료의 주된 소재인 신화나 전설이 형성된 시기까지 염두에 두자면 다시 수세기를 뒤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 이전의 아득한 옛날에서 작품의 연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들이 유명한 작품이지만 의외로 제대로 된 원전 번역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 번안이 아닌 원전의 완역을 구해 읽기 시작하면 우선은 꽤 생소하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느낌은 무엇보다도 우리와 작품 세계 간의 시간적인 거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는 선사와 역사의 접경지대로 이동하여 문명 발생의 초기 모습과 아울러 그 이전 시대의 흔적까지도 직접 만나게 된다.



    호메로스가 구성한 이야기의 주제는 매우 고전적인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죽음으로 끝이 날 고난의 길로 나서는 적극적인 결단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유지하려 든다.

     

    ‘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는 적장과 싸워 이기는 것이 운명적으로 스스로의 죽음을 재촉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아킬레우스답고자 그 싸움에 임한다.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는 거저 주어진 불사의 행운을 거절하고 인간 오디세우스로 남기 위해 험난한 귀향길로 떠난다.



    작가는 인간의 삶이 고난으로 가득하고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에 불과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영웅이 영웅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 보여 줌으로써 인간의 삶에 대한 철저한 긍정을 선언한다.

     

    그 철저함은 인간의 존재가 아무런 노력 없이 보장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신의 존재보다 더 값진 것이라는 명백한 시사에서 더없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작품의 주인공들이 비장한 영웅의 면모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단호하고 때로 비정·잔혹하기까지 하나, 자신과 적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결국은 신들의 장난에 동원된 꼭두각시와 같은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겪는 비참함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듯 단순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여주면서 작가는 후대에 그 자신도 답을 확정해 갖지 못한 인간 탐구를 계속적인 과제로 던져 주고 있다.

     

    문명의 초기에서부터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이 그처럼 큰 과제였던 것이다.



    그의 작품이 후대의 문학사에 끼친 지대한 영향도 그가 던진 과제의 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는 것은 그 과제와 씨름을 해온 역사의 발단을 반추(反芻)하면서 서양의 문학사 전반을, 그리고 또 앞으로 전개될 인간의 문학적 노력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소양을 갖추는 일이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천병희 역(단국대출판부)이 유일한 그리스어 원문 번역이다.


    이태수 서울대 대학원장·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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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제자백가-공자,묵자,노자등


    제자백가-공자,묵자,노자 등  




    중국에서는 기원전 9세기를 전후로 철기가 농업에 도입됨에 따라 생산력이 현격하게 증대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새로운 사회체제의 태동을 맞게 된다.

     

    바로 종법적(宗法的) 봉건체제에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관료체제의 등장과 함께 자신의 지적 능력과 소질에 따라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되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란 이 같은 배경 하에서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천하통일이 이루어지는 기원전 3세기까지 활동한 수많은 철학자와 학파를 가리킨다.

     

    이들의 다양한 철학적 문제의식은 크게 유가(儒家) 묵가(墨家) 도가(道家) 법가(法家)의 네 가지 유파로 개괄될 수 있다.



    공자(孔子)를 필두로 하는 유가는 새롭게 등장한 관료집단에 특권을 허락하는 한편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 즉 상하의 사회적 갈등을 화합으로 이끌 수 있는 높은 자기절제와 도덕수양을 요구한다.

     

    유가의 사상은 지식인의 능동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긍정적 평가를 받지만 차등적인 인간관계를 이념적으로 합법화했다는 비판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유가의 차등적 인간관에 반기를 들며 묵적(墨翟)의 묵가가 등장한다.

     

    묵가는 통치하는 지식인과 통치 받는 백성 간의 사회적 차별 속에서 특히 생산에 종사하는 백성의 민생문제 해결에 주목한다.

     

    이들은 차별적 인간관계를 지양하고 평등한 사랑과 상호연대의 구호 아래 만민의 실천적 단결과 협동을 강조한다.



    유가와 묵가는 각각 상이한 입장에서 서로 다른 정치이념을 가지고 극렬하게 대립하는데, 도가는 자신의 주장만이 옳고 타자의 그것은 그르다는 이념적 독단을 거부한다.

     

    도가에서는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 관습, 이념은 개개 생명 밖의 산물, 즉 외물(外物)에 불과하다.

     

    외물에 의해 인간의 생명과 자유가 억압을 받는다면, 그것은 결국 생명 억압과 파괴의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적 규제가 최소화된 소규모의 자급자족적인 공동체를 이상적 사회로 제시하면서 당대의 군주들이 추구하는 대국주의(大國主義) 이념에 맞선다.



    유가, 묵가, 도가는 모두 당대의 현실 변화를 위기로 파악하고 그들이 파악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여 좀 더 나은 사회를 이루어 내려는 이상주의 철학의 서로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법가는 당시의 혼란을 위기가 아닌 발전으로 파악하였다.

     

    그들은 절대군주에게 위탁된 공권력을 통하여 국력을 ‘농업생산’과 ‘전투력’에 결집시킴으로써 강력한 전투국가를 출현시키고자 하였다.

     

    그 목표는 처참한 전쟁의 종식과 천하의 안정이었다.

     

    이렇게 다양하게 전개된 제자백가시대의 사상은 시대를 뛰어넘어서 오늘날 개방된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의미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강력한 정치체제가 결여돼 있던 이 시기에 등장했던 다양한 인문주의의 목소리는 오히려 개인의 권리와 자주적 주권을 기초로 생활하는 현대인에게 더욱더 절실하게 들려올 수 있다.

    필자가 쓴 ‘제자백가의 사상’(현음사)은 15장에 걸쳐서 각 사상의 개요와 발췌된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실어 놓았다. 이 책은 독자가 다양한 제자백가 사상의 진수를 쉽게 맛볼 수 있도록 각각의 사상적 요점을 발췌하여 정리해 놓았다.


    송영배 서울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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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꿈의 해석-지크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지크문트 프로이트  




    지크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창시된 정신분석은 우리의 인간 이해를 돌이킬 수 없이 바꾸어 놓았다.

     

    의식되지 않은 나의 과거가 나를 지배하며, 나의 정체는 내 의식에 비친 모습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 등, 이미 일반화된 이런 생각은 정신분석의 도래 이후 정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의식, 억압, 리비도 등의 중심개념이 우리의 인간 이해의 전제가 된 것도 정신분석 이후의 일이다.



    정신분석이 인문학, 사회과학의 제이론에 미친 영향은 실로 심대하며, 좋든 싫든 프로이트 이후의 인간 이해는 정신분석이 설정하는 인간관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몇 해 전 타임지는 20세기의 지적 지형을 바꾼 인물 중 첫 번째로 프로이트를 꼽고 그를 표지인물로 삼은 바 있다.



    ‘꿈의 해석’의 출간은 정신분석이 독립적인 분과학문으로 자리 잡게 해 준 분기점이 된다.

     

    이 저술은 꿈 현상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갖는 것임을 역설하면서, 그 의미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 가능한 것이냐를 대담한 가설과 치밀한 논증을 통해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꿈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대수롭지 않은 일상 체험이 무의식적 욕망과 결합하여 표출되면서 한 대상이 다른 대상으로 치환되고 서로 다른 대상이 언어적 유사성을 통해 응축되는가, 꿈 작용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욕망을 판독불가능의 모습으로 왜곡하는가, 우리의 의식이 인지하지 못하는 감정이 어떻게 꿈을 통해 표출되는가, 한마디로 ‘꿈의 논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우리는 기억되고 언표(言表)된 꿈을 통해 잠재된 욕망의 내용에 다가갈 수 있느냐를 설파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꿈의 해석’은 프로이트 자신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다분히 자전적 기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우선 꿈 해석의 많은 예시가 프로이트 자신의 꿈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제시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이 그 이유이다.



    이 저술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프로이트가 빠진 우울증과 그 기간에 이루어진 긴 자기분석 과정의 산물이다.

     

    이 자기분석을 통해 그는 두 살 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을 되살리면서 자신에게도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과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즉, 프로이트는 죽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자신을 놓음에 있어 죄의식을 가진 ‘아들’이기를 즉, 자신이 곧 이론화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소유자이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이 이론을 모든 사회에 보편적인 것으로 일반화한다. 이것이 바로 20세기를 떠들썩하게 만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은 프로이트의 콤플렉스가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의 여지는 여전히 남는다 하겠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 심리학과 생물학에 뿌리를 둔 과학임을 신봉했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과학으로 성립될 수 있느냐에 대하여는 그의 사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프로이트에 의존하지 않고도 수행될지 모른다.

     

    그러나 예컨대 문학, 나아가서 문화현상, 사회현상에 대한 탐구에서 프로이트의 사상은 필수불가결이 아닐까 한다.


    이성원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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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천변풍경-박태원


    천변풍경-박태원




    청계천이 복원되는 오늘에 다시 읽어 보는 ‘천변풍경’은 한국이 낳은 대작가인 박태원의 높은 산문 정신과 깊은 예술 혼을 재삼 음미해 볼 수 있는 문제작이다.



    ‘천변풍경’을 발표하기 몇 년 전 박태원은 그의 출세작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통해서 식민지의 서울인 경성이라는 폐쇄회로 속을 살아가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을 빼어난 문장으로 조각해 냈다.

     

    물론 구보는 박태원의 호이기도 하다.

    그 몇 년 후 ‘조광’이라는 잡지에 ‘천변풍경’을 연재하면서 작가가 묘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바로 그 구보 씨의 거처이기도 한, 청계천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상이다.



    이 점에서 ‘천변풍경’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함께 박태원의 작가적 자기 인식과 현실 인식을 가장 밀도 있게 표현해 보여 준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박태원은 일찍이 월탄(月灘) 박종화가 ‘순수한 경아리 문학’의 수립이라고 한껏 치켜올린 바 그대로 1930년대 후반경의 서울의 생활 습속과 인정세태를 풍부한 서울말과 화려하고도 유려한 문장미로 재생시켜 낸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천변에서 나와 천변으로 돌아가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냈다면, ‘천변풍경’은 정월에서 시작되어 정월로 끝나는, 청계천변이라는 폐쇄회로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러나 이 폐쇄회로 속의 사람들은 음울하거나 절망적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작가는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에 대한 동정을 표현하는 애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슬픔에 주저앉지 않도록 하는 웃음의 기법으로 암울한 현실을 초극하는 미학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모두 쉰 개에 달하는 천변 세태에 대한 풍경적인 묘사로 섬세하게 축조되어 나간 이야기를 통해서 박태원이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 박태원을 이상과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로 파악하고자 한 사람들은 일본에서 창안된, 고현학(考現學)이라는 현대고찰 방법의 한국적 적용 양상을 찾아내곤 한다.

     

    또 이 작품을 임화가 말한 바 세태소설의 범주로 이해하고자 한 사람들은 ‘천변풍경’에서 박태원이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이행해 나간 계기를 발견하고는 한다. 이것은 모두 중요한 고찰들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최근에 필자는 우리 학과의 대학원생들과 함께 박태원을 새로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서 박태원이 처음부터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의 여러 고전과 이야기에 대한 풍부한 교양적 지식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박태원은 이처럼 동서양을 아우르는 풍부한 텍스트 경험에 기초하여 아일랜드 출신의 대작가인 제임스 조이스가 이루어낸 것과 같은 예술적 성취에 도전해 나갔으며, 이것은 역설적으로 서구적이거나 일본적인 모더니즘의 모방에 머물지 않는 예술적 도전을 의미했다.



    ‘천변풍경’은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제작이다.

     

    여기서 그는 식민지적 근대의 정치문화적인 여러 양상을 섬세하게 포착해 나가면서도 이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특유의 ‘위장된 명랑성’으로 이러한 현실을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세계를 창출해 내고자 했다. 이 독특한 ‘전략’이 여기 등장하는 많은 인물을 관통하고 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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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엔트로피-제러미 리프킨

    엔트로피-제러미 리프킨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어수선해지며, 그 변화를 다시 되돌리기는 너무도 힘들게 느껴진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엔트로피 법칙’이 자주 인용된다.

    엔트로피 법칙은 자연현상에는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는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였으며,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것이다.



    흔히 ‘무질서도’로 해석되는 엔트로피는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클로드 섀넌은 ‘정보 엔트로피’의 개념을 만들어 냈으며, 그 외에도 생물학,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그리고 예술에 이르기까지 엔트로피의 개념과 법칙이 다양한 모습으로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엔트로피가 원래의 엄격한 과학적 정의에서 벗어나 좀 더 폭넓게 적용될 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유용함과 함께 부적절한 해석을 통한 개념의 혼란과 부작용의 위험도 커지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엔트로피’는 사회비평가인 제러미 리프킨이 엔트로피 법칙의 개념을 원용하여 현대 물질문명을 비판한 저서이다.

    리프킨은 엔트로피 법칙을 유용한 에너지가 감소하고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가 증가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변화를 위하여 에너지와 물질을 계속 사용하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에너지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열 종말’과 사용할 물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물질 혼돈’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천명한다.

    기계론적인 세계관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물질만능주의와 과학만능주의는 더 이상 설 땅이 없다고 역설한다.

    현재 우리는 산업 시대를 통하여 고에너지 사회를 지속해 온 결과로 화석연료의 고갈과 환경오염으로 인한 고엔트로피의 거대한 분수령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제 막다른 기로에 서서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엔트로피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리프킨은 다양한 분석과 논리전개의 근거로 엔트로피 법칙을 내세우고 있으나, 때로는 지나치게 자의적인 확대 해석으로 흐른 점이 아쉽다고 하겠다.

     

    엔트로피 법칙이 제시하는 자연변화의 궁극적인 종착점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는 있다. 모든 유용한 에너지와 물질이 고갈된 무질서한 종말에 이르게 될 것인가, 아니면 일리야 프리고진 등의 주장처럼 혼돈으로부터 새로운 질서가 저절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
    연일 급등하는 원유가를 걱정하며 급속한 자원의 고갈, 폭발적인 인구의 증가와 식량의 부족,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 우리를 둘러싼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산업화 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이행되는 변화의 시대에 무언가 혼란스럽고 방향을 잡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리프킨의 경고와 그 의미를 나름대로 음미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엔트로피’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며 생각해보아야 할 여러 가지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인류발전을 위한 세계관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인간성의 과학’,

     

    그리고 ‘생태주의적’ 또는 ‘유기론적’ 패러다임을 강조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엔트로피 사회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신석민 서울대 교수·화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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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변신-프란츠 카프카


    변신-프란츠 카프카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사람이 해충이 되어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변신’은 이런 이상한 사건을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건조한 문체로 보고하듯 시작된다.

    변신과 그 이후의 과정이 매우 사실적이고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감이 몸에 밴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얼른 일어나 출근해야겠다는 생각만 다급한데, 가족은 오히려 그가 변신한 상황에 차츰 적응하며 자구책을 마련해 간다.

     

    시간이 가면서 주인공은 가족의 짐이 되고 그러다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썩어 주인공은 어느 새벽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들이 가는 가족의 모습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사람이 동물로 변하는 모티브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카프카 글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자연적 차원의 해석이다.

     

    그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었을 때 자신이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쓰고 있다.

     

    엄청난 사실이 너무나도 간명하게 서술된 그의 대조법에 독자는 혼란을 느낀다.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어떠한 해명이나 재전환도 작품의 끝까지 언급되지 않는다. 이런 부정적인 긴장감이 독자의 주목을 고조시킨다.



    그러나 독자는 작품의 전개를 따라가는 동안 주인공이 한 마리 해충이 될 수밖에 없던 참담한 상황을 스스로 읽어내게 된다.

    그의 생활은 가족의 부양을 위해 철저히 일로 짜여 있었다.

    결국 그는 변신을 통해 그 억압으로부터 도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를 다시 인간으로 변신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모티브는 아마도 가족의 관심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그를 철저히 외면한다.



    여기서부터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사회학 관점에선 시민 가족 이데올로기가 허상이라는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개인은 결국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산업사회에서 극한의 소외란 상황에 놓인다.

     

    기계 속의 한 부품처럼 되어버린 개인이 버러지같이 느껴지는 감정을 이 글은 아예 한 마리의 버러지로 변해버린 인간을 덤덤하게 서술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특히 부각된 부자(父子) 문제는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억압의 경험과 위계질서, 익명의 힘에 근거한 사회 전체에 대한 통찰이 교차된다.

     

    이 문제는 심리학적인 초자아와 자아의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

    선택의 여지도 없는 인간의 실존을 조명하며 실존주의적 해석을 가능케 한다.

     

    조용히 숨을 거두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사회적 조건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자유’의 의미로 죽음을 읽을 수 있다.

     

    누이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에 “이렇게 음악이 마음을 울리는데도 내가 한 마리 벌레란 말인가”라는 절실한 물음, 또 ‘미지의 양식’에 대한 주인공의 강한 이끌림은 근원적인 존재론적 추구와 맞닿아 있어 신학적, 해석학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는 아무런 해석이 담겨 있지 않다.

    이야기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접합점도 없이, 결코 사실이 아닌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지극히 담담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놓기만 했다.

     

    본문에서는 어떤 미약한 희망조차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독자는 이 막막한 이야기에서 존재론적 인식을 얻게 되고, 결코 이러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을 모색하게 되는 기이한 힘을 얻는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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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미국의 민주주의-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알렉시스 드 토크빌   




    토크빌은 예리한 관찰자요 심오한 예언자다.

    미국을 불과 7개월 여행하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장점과 한계를 면밀히 파헤쳤으며, 장래 미국과 러시아가 두 세계 강국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미국 사회가 프랑스 사회보다 민주적인 이유를 토크빌은 미국의 활성화된 지방자치, 자발적인 결사체, 배심원제도 등에서 찾았다.

    이것들이 국가권력의 집중과 전제화 경향을 억제하고 다수의 횡포에 대항하여 소수의 권익을 보호하며 시민들의 공공의식을 함양시켜 준다.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제도뿐 아니라 관습도 중요하다.

    프랑스가 대혁명 이후 다양한 헌정질서와 정치제도를 고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달리 민주주의를 성취하지 못한 이유는 두 나라 사이의 상이한 관습에 있다.

    흥미롭게도 토크빌은 당시의 급진자유주의자들 및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자유와 평등을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았다.

    민주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지만 자유보다는 평등을 선호하기 때문에 평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유를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자유를 물질적 복지를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호하기 때문에 자유가 번영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물질적 복지와 조건의 평등을 위해 기꺼이 자유를 희생할 것이라는 견해다.

    특히 자유는 획득하기도 어렵고 그 이점도 잘 보이지 않는 반면 평등은 그 이점이 매우 즉각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평등을 더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토크빌은 평등화의 경향으로부터 오는 민주적 전제주의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개인주의로부터 오는 민주적 전제주의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민주사회에서 개인주의가 만연하게 됨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서로 고립되고 서로를 연결시켜 주던 전통적인 유대는 거의 모두 해체된다. 게다가 조건의 평등과 물질적 복지에 대한 애착으로 중앙정부의 기능은 강화되고, 이로 인해 국가와 개인 사이에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교회, 가족, 길드, 지역공동체 등 거의 모든 중간집단은 약화된다.

    대중의 여론도 전제주의를 부추긴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게 됨에 따라 개인들의 다양한 의견보다는 다수가 형성한 여론이 오히려 더 강한 지적·도덕적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개인들은 다수의 의견에 복종하고 거기에 안주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한다. 정치적 무관심 또한 문제다.

    정치가 시민들의 관심으로부터 떨어져나갈 때 사적인 이해관계가 공적영역을 침범하게 된다.

    현대사회의 병폐라 할 로비문화와 정경유착이 나타나는 맥락이다.


    파리의 유서 깊은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다양한 행정경험을 쌓은 토크빌의 사상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넘나들 정도로 독특하고 뛰어나서 당대의 정치사상가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미래 민주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다.

    그가 우려했던 대로 자유의 자발적 포기, 평등에 대한 열망, 다수의 횡포, 그리고 로비문화와 정경유착 등은 오늘날 미국을 위시한 여러 민주주의 나라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선후진국들이 겪고 있는 자유와 평등 사이의 갈등 또한 풀어가야 할 중대한 과제다.


    임현진 서울대 기초교육원장·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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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 삼대-염상섭


    삼대-염상섭  




    염상섭의 장편소설 ‘삼대(三代)’는 한 가족의 3세대에 걸친 가족사적(家族史的)인 이야기를 토대로 대한제국 말에서부터 식민지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의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이 식민지시대 문학의 사실주의적 성과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한 가족 내의 세대 변화를 주축으로 그들이 가지는 계층적인 유대를 통해 한국 사회의 변화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삼대’의 중심축에 해당하는 조씨 일가에서 맨 앞자리에는 조부 조의관이 서 있다. 그는 주자학의 명분론에 집착하고 있는 봉건주의자로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많은 재산을 이용하여 벼슬을 사고 집안의 족보를 거짓으로 다시 꾸미고 보잘것없는 가계를 명문거족의 후예로 가장한다. 그리고 조선 사회의 붕괴나 일제의 침략과 같은 역사의 격변에 대해 별다른 의식을 가지지 못한 채, 개인의 입신양명과 가문의 영예를 최대의 가치로 내세운다.

    조의관의 아들인 조상훈은 국가 상실의 시대에 사회에 나오게 된 새로운 계층에 속하는 인물로서 외국 유학을 통해 근대적 문명에 대한 이해와 서구적 교양을 갖추게 되었지만, 자기 이상을 실현해 나아갈 수 있는 사회적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다. 그의 이상주의적 태도는 그 지향성 자체가 지니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민족과 사회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결여됨으로써 실천적인 구체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는 부친이 만들어 놓은 재산을 기반으로 하여 개인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 안일만을 추구하는 위선적인 인격 파탄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조의관과 조상훈 사이에 일어나고 부자간의 대립과 갈등의 끝자리에 손자 조덕기가 위치하고 있다. 일본 유학생의 신분으로 그려지고 있는 조덕기는 할아버지인 조의관으로부터 상당한 기대를 얻고 있다. 조덕기는 조부의 강권으로 학생 신분이지만 일찍 결혼했고, 전통적인 규범에도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그는 시대상의 변화에도 눈을 떠서 지식인 청년들이 벌이는 좌익운동에도 동정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조부에 대한 경외감과 부친에 대한 동정을 지니고 있으며, 자기 가문을 지키면서 명분 있는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자 한다. 그의 사회적인 위상은 그가 조부 조의관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허세에도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부친인 조상훈의 현실과 괴리된 이상주의적인 태도에도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소설 ‘삼대’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 가족주의의 완고성과 식민지 현실의 폐쇄성은 조씨 일가의 마지막 세대에 해당하는 조덕기라는 인물의 형상을 통해 그 극복 방향이 어느 정도 암시된다. 조덕기는 조부와 부친이 각각 추구하고 있는 서로 다른 가치를 통합하고 세대 간의 갈등을 화해시킬 수 있는 합리적 현실주의자로서 식민지 상황의 비극성에 대한 인식에도 철저한 면모를 자랑한다.

    그가 온건한 이념주의자로서 식민지 현실 문제에 대한 개량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의 지향점이 어디에 맞닿아 있는가를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권영민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80) 우파니샤드-작자 미상


    우파니샤드 -작자 미상  




    탈학교 학생을 위한 센터를 운영하는 어느 교수님이 인도 철학 강의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오셨다. 청소년에게 인도 철학이 무슨 흥미가 있겠느냐고 했더니, 학생의 인생의 지평이 넓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인도 철학을 강단에서만 이루어지는 고담준론으로만 여기고, 살아있는 삶의 지침이 될 수 있음을 필자 자신이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인도 철학은 고원한 진리를 추구하고 인생과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끝없는 철학적 토론과 깊은 명상을 실천했던 인도의 무수한 현자의 가르침의 총체이다. 우파니샤드는 이런 인도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이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눈에 보이는 다양한 경험 세계의 근저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실재를 탐구하려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시작했다. 그것을 앎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우주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실재 자체를 아는 지식을 추구한 것이다. 우파니샤드란 ‘가까이 앉는다’는 뜻으로, 우주와 인생의 비밀을 아는 이 신비한 지식은 스승과 제자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조심스럽게 전수되기 때문이다.

    카타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젊은 주인공 나치케타는 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가, 그리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를 찾아 죽음의 신을 찾아간다. 이에 죽음의 신은 소리도 없고, 촉감도 없으며, 형태, 맛, 냄새,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초월적인 그것을 아트만이라고 하고, 이 아트만을 알게 되면 그 순간 죽음의 어귀에서 풀려난다고 대답한다. 아트만이란 자아라는 뜻이다. 자신의 참모습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태어나서 늙고 죽는 과정을 반복하며, 이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해탈이며 죽음을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다.

    아트만은 나아가 세계의 근원이며 진리의 참모습인 브라만의 개별적인 표현이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서 웃달라카는 그의 아들 슈베타케투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한줌의 흙덩이를 알면 그 흙으로 만든 모든 것을 안다. 그것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중 흙만이 참 존재이다.” 자기가 곧 브라만이라는 진리가 우파니샤드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지식이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욕망과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업에서 자유로워져 환생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적 훈련이 필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마음의 고삐를 제어하고, 감각기관의 말을 잘 몰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여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이끌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에서는 요가를 행하는 장소, 자세, 호흡 등의 문제도 다루고 있다. 명상 수행의 전통은 세계의 여타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바이지만, 명상을 통하여 자아를 발견하고, 종교의 목표를 참 자아를 깨닫는 것에 두는 것은 인도에서 발현된 여러 종교가 공유하는 특별한 점이다.

    요가와 명상 수행법은 걷잡을 수 없게 휘몰아 오는 물질주의 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현대인에게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번역본 중 원문에 가장 충실한 것으로 ‘우파니샤드 I·II’(한길사)가 있다. 최근엔 같은 역자가 청소년을 위해 풀어쓴 ‘우파니샤드: 귓속말로 전하는 지혜’(풀빛)가 출판됐다.


    조은수 서울대 교수·철학과



    (81) 에밀-장 자크 루소



    에밀-장 자크 루소  




    서양의 교육고전으로서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그것은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론’과 루소의 교육론적 소설 ‘에밀’ 두 권이다. 두 책은 모두 인간과 그 사회(즉 ‘국가’)는 교육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이 없다면 인간도 그 사회도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책에서 교육은 적극적으로 묘사된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을 최종적으로 종합하여 마음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에 ‘지식’이 어떤 공헌을 하는지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논리와 문체로 제시했던 사람이다. 이 점에서 ‘국가론’만큼 교육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고, 그것이 현실 국가 속에서 어떤 제도를 통해 실현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은 없다.

    그러나 루소의 ‘에밀’에서 교육은 그 반대로 묘사된다.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 교육을 가장 잘 하는 것’, 교육이란 그런 것이다. 루소가 보기에 교육을 통해서 인간은 그 진실된 자아(이를 루소는 ‘자기사랑’으로서의 자아라고 부른다)를 점차 상실하고 타락된 모습, 가면을 쓴 위선을 인간의 참모습이라고 믿게 된다. 그것이 바로 ‘부르주아 인간상’으로 가득 찬 사회를 만들고, 이 사회 속에서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노예로 부리며 살아간다.

    인간의 이러한 타락을 구원으로 돌리려면 교육이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일체의 속박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첫 구절은 자연의 찬미로 시작된다. ‘조물주의 손이 닿은 것이면 무엇이든 선하다.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으면 무엇이든 타락한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 루소는 자연 속에서의 교육, ‘자연을 따르는 교육’을 역설하지만 이것은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곧 루소가 말하는 교육은 문자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일’이라는 오해가 그것이다. 인간은 이미 오래전에 문명이라는 다리를 건넜고, 이 다리는 한 번 건넌 이상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루소 자신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명 파괴를 외치면서 우리의 아이들을 원시자연 속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고(그런 ‘원시자연’은 이미 없다), 위선으로 가득 찬 사회문명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비열한 ‘부르주아의 삶’을 계속하도록, 그것을 ‘더 잘 살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에밀을 읽는 독자가 관심을 집중해야 할 부분이다. 이 책에서 루소는 나름대로 그 해법을 제시하고 있고, 그 해법이 옳든 그르든, 그 속에 나타난 루소의 사상은 이후 서구 시민사회의 형성과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책은 내용과 문체 모두가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철학자 칸트는 이 책을 읽느라고 매일 시계처럼 정확한 시간에 산책 나가던 일을 잊어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그의 저술을 통하여 루소의 작품이 자신의 사상에 미친 영향을 솔직히 기술했다. ‘내가 더 이상 루소의 문체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고 내 생각에 비추어 그를 이해하게 될 때까지 나는 여러 번 그의 책을 읽어야 했다.’ 칸트의 이 말은 ‘에밀’에 대한 최대의 찬사로 남게 될 것이다.


    김안중 서울대 교수 교육학과





    (82) 구운몽-김만중



    구운몽-김만중  




    한국 고전소설 중 최고 명작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의 ‘구운몽(九雲夢)’을 첫손에 꼽는다. ‘구운몽’은 불교의 공(空)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불승인 성진의 세계와 관료인 양소유의 세계가 몽중 액자형식을 통해 대조적으로 교섭하면서 불교의 적멸주의와 유교적 공명주의를 대비시켜 인간의 삶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조명한 작품으로, 사상적 깊이나 인물의 행위와 사건을 통해 주제를 형상화하는 소설의 기법 면에서 고전소설의 백미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흔히 ‘구운몽’은 일찍이 도암 이재(陶庵 李縡)가 언급한 대로 세속의 부귀공명이 일장춘몽과 같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불교의 세계로 귀의하는 내용을 담아낸 것이라고 말하여 왔다. 또는 양소유의 여성 편력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절제하는 교육을 받았던 사대부가 억압된 욕망을 상상의 세계 속에서 마음껏 발현하는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구운몽’의 특정 부분에 중점을 두어 이루어진 것으로서 작품 전체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전체적 의미와는 다른 것이다.

    ‘구운몽’에 등장하는 인물 중 부처의 가르침을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는 신의 경지에 이른 존재는 육관 대사이다. 반면 꿈꾸기 이전의 성진은 불승의 신분이면서도 세속의 부귀공명을 동경하고 불가의 적막함을 회의하는 미망에 사로잡힌 존재이다. 육관 대사는 석교 위에서 노니는 팔선녀의 자태를 보고 불가의 적막함에 염증을 느끼고 세속의 공명과 부귀영화를 동경하는 성진을 속계의 양소유로 환생하게 한다.

    양소유는 팔방미인으로 환생한 여인들과 별다른 고통 없이 인연을 맺고 승상의 벼슬에 올라 부귀와 행락을 일삼는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삶의 모습은 성진이 꿈을 깨고 난 후의 부귀공명의 무상함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기법임을 알게 된다. 성진이 꿈에서 깨어 육관 대사를 보고 속세의 부귀가 허망함을 깨달았다고 하자 아직도 꿈을 깨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금강경(金剛經)’ 큰 법을 강설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 ‘구운몽’의 진정한 주제가 금강경의 공사상(空思想)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의 의미는 금강경의 공사상을 집약한 것으로, 인세에 존재하는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현실계와 몽중세계를 분별하려는 마음 자체가 그릇된 집착의 산물이며 진실과 거짓을 따지려는 것 역시 불변의 실체가 아닌 거품이나 그림자와 같은 무상한 대상에 대한 집착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구운몽’은 성진의 삶과 양소유의 삶을 대비시키면서 불교적 적멸주의와 유교적 공명주의가 논쟁과 갈등을 하면서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차원 높은 상승을 지향하고 있다. 즉, 불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성진이 육관 대사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어 육관 대사와 같은 경지에 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깨달은 성진의 문하에는 깨닫기 이전의 성진과 같은 세속의 공명을 탐하는 존재가 이어질 것이고 제2, 제3의 양소유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운몽’은 신성과 세속, 불교와 유교, 도념(道念)과 정념(情念)의 영원한 토론의 장이라고 볼 수 있다.


    서대석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83) 변신이야기-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오비디우스  




    성서를 제외한다면 아마도 서양문학의 전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중세 후기에 이미 뚜렷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문예 부흥기에 이르면 오비디우스의 영향은 절정에 달한다.

    ‘변신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를 집대성해 후대인에게 전해준 결정적인 문헌이다. 그러므로 이 저술은 문학작품이면서 동시에 신화기록으로 간주될 수 있다. 실제로 후대에 알려진 그리스 신화는 많은 경우 이 작품을 원전으로 하며, 널리 읽히는 불핀치나 해밀턴이 서술한 그리스 신화도 모두 오비디우스를 풀어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작품을 탄탄한 구성과 주제적 통일성의 관점에서 평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작품 앞에서 절망할 것이다. 각 이야기가 모두 변신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뚜렷이 어떤 주제적 통일성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은 매우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다. 한 이야기에 이어 다음 이야기가 나와야 할 어떤 필연적인 이유를 찾기 어려우며, 오비디우스는 그때그때 편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점이 그다지 흠이 되지 않는다.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의 원천은 경탄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도록 교묘하게 짜인 그리스 신화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전체적인 주제를 들자면, 이 작품에 수록된 것은 결국 사랑과 애욕(愛慾)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젊은 남녀 간의 사랑은 물론이요, 인간을 미치도록 사랑한 신의 이야기, 불멸의 신을 짝사랑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인간의 이야기, 동성애, 자기애, 아버지와 딸 간의 또는 오누이 간의 사랑 등 사회적으로 용인된 또는 금기시된 모든 형태의 사랑 이야기가 이 작품 전편에 걸쳐 펼쳐진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오비디우스는 인간 심리의 다양한 측면을 탐색한다. 오비디우스의 세계에서 꽃과 나무, 새, 돌, 메아리 등 자연계의 사물과 자연현상에는 모두 사랑, 증오, 질투, 분노, 복수심 등 어떤 사연이 간직되어 있다. 그 애틋한 사연의 결과 인간은 어찌할 수 없이 그런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애욕은 인간이 피할 수도 없고, 거역하거나 저항할 수도 없는 존재조건이라는 생각이 이 작품에 짙게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비디우스는 로마인들이 세운 제국 ‘Roma’의 철자를 거꾸로 하면 애욕의 신 ‘Amor’가 된다는 사실을 대단히 흥미롭게 여겼다. 제국을 이룩한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력에 의한 정복전이었을진대, 오비디우스는 폭력과 인간의 애욕이 동전의 양면이라고 느꼈음일까? 엄청난 제국을 이룬 로마는 문화적으로는 피정복국인 그리스의 압도적인 영향하에 있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는 무엇인가? 그리스와 구별되는 로마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변신’의 주제는 이러한 로마의 정체성 문제에 간접적으로 물음을 제기하는 장치가 된다. 로마를 바라보는 오비디우스의 시선에는 그래서 약간의 지적 희롱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아마도 이 점이 아우구스투스의 눈 밖에 나서 흑해 연안의 작은 마을로 추방되는 이유이기도 하였으리라고 짐작되고 있다.


    이성원 서울대 교수 영어영문학과




    (84) 과학혁명의 구조-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토머스 쿤  




    과학사학자이자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이 20세기 후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과학혁명’ ‘패러다임’ ‘정상과학(正常科學)’ 등의 개념을 사용한 그의 과학관(科學觀)은 과학사와 과학철학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역사학과 철학은 물론 거의 대부분의 사회과학 분야와 심지어 문학, 예술 이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쿤의 유명한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는 바로 이 같은 그의 과학관을 담고 있다.

    1962년에 출판된 이 책은 근본적으로 과학의 변화에 대해 다루고 있고, 특히 과학상의 변화 또는 발전이 ‘축적적’이지 않고 비연속적 또는 ‘혁명적’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쿤의 주장은 “과학혁명은… 하나의 패러다임이 이와 양립 불가능한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대체되는 비축적적인 변화의 에피소드를 가리킨다”는 그 자신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가 있다.

    과학의 변화가 이처럼 혁명적이라면 그러한 ‘과학혁명’ 사이에는 비혁명적이고 안정된 기간이 있어야 하고, 이것이 쿤이 말하는 ‘정상과학’의 기간이다. ‘패러다임’이란 바로 이러한 정상과학을 특징지어 주는 개념으로서, 정상과학의 시기에 과학자 사회 전체에 공유된 이론, 법칙, 지식, 방법과 가치관, 취향, 습관, 규범을 통틀어 폭넓게 지칭한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이 같은 정상과학과 패러다임에 관한 논의에서 시작해 정상과학이 ‘위기’를 맞아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인 과학혁명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과학혁명의 결과로 새로운 정상과학이 생기게 되는 과정에 대해 쿤 특유의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 논의의 과정에서 그는 서양 과학 역사상의 수많은 생생한 예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책은 출판과 동시에 굉장한 주목을 받았고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영향이 컸던 것은 과학철학 분야였다. 물론 많은 과학철학자의 반응이 비판적이었지만, 설득력 있는 쿤의 견해는 이미 그들이 느끼기 시작하고 있던 전통적인 정적(靜的), 분석적 과학철학의 문제점을 명확히 노정시켜 주었던 것이다. 특히 쿤의 견해는 과학철학의 여러 논쟁에 한 구심점을 제공했고, 많은 사람이 쿤을 이해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학철학의 입장을 다져 갔다.

    다른 분야에서는 이 책이 준 감명이 조용하기는 했지만 훨씬 더 호의적으로 나타났다. 많은 과학사학자는 쿤이 자신들의 공통된 인식을 체계화하고 이론화해 준 것으로 생각했고, 당시 태동하기 시작하던 과학사회학에는 쿤의 이론이 강한 추진력을 제공했다. 그리고 과학 이외 분야의 이론이나 역사에 종사하는 사람도 자신의 분야에서의 지식, 이론, 양식, 사고 등의 변화가 과학지식의 변화에 대한 쿤의 모형과 잘 들어맞음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따라 쿤의 이론을 학문,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의 변화를 설명하는 모델로 원용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같은 시도는 급격히 퍼져 나가서 결국 이 책이 수많은 분야의 사람에게 필독의 책이 되고 20세기 후반의 고전(古典) 중 하나가 되게 했다.


    김영식 서울대 교수·동양사학과





    (85) 사기-사마천

    사기-사마천  




    조선시대의 선비 김득신(金得臣)은 ‘사기’ 열전이 너무 좋아 일생 동안 무려 1억2만80번을 암송했다고 한다. 물론 극단적인 과장이다. 그러나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에서 가장 애독된 역사서가 ‘사기’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 인기는 현재에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사기’는 사마천이 중국 문명 초기 단계에서 자기가 생존한 기원전 1세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약 2000년 전 저술된 중국 고대 역사책이 왜 이토록 사람을 매료시키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가장 흥미 있는 주제를 박학다식한 천재가 예리한 통찰력으로 통관하고 생명을 건 사명의식을 갖고 집필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문명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확립하는 과정이었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물질적 정신적 기반과 제도를 창조 발전시켰다. 황제 지배체제는 동아시아 고대 문명을 가장 효과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도록 개발된 체제인데, 사마천의 시대는 그 체제가 대체로 완성된 시기다. 제국은 문명의 결정체였고, 그 발전의 주체였다. 사마천은 바로 이 문명과 제국을 ‘역사’로 만든 것이다.

    사마천은 어떤 위대한 문명도 역사가에 의해 ‘역사’로 서술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이 문명의 ‘역사화’를 자신의 운명적인 사명으로 자각했다. 그가 ‘사기’의 저술을 공자가 지었다는 ‘춘추’의 계승이라며, 커다란 치욕과 시련(궁형)의 순간에도 ‘사기’의 완성을 위해 생을 포기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사마천은 가능한 한 모든 자료를 수집 정리 분석했고, 자신이 통찰한 문명의 본질과 그 변화 발전의 과정을 가장 적합한 체제와 문장으로 서술했다. 그는 궁정의 도서관에 보존된 전적과 문서를 거의 빠짐없이 섭렵하고 역사의 현장에서 광범위하게 청취했다. 그 결과 그는 인간의 역사를 우주 질서와 인간의 능동적인 의지가 맞부딪친 결과로 파악했고, 그것에 시간과 공간의 좌표와 함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기전체(紀傳體)란 독특한 체재를 창안했다. ‘사기’가 모든 역사를 포괄한 종합사 통사 세계사가 된 것도, 전체 권수와 각 부분의 권수가 모두 우주 성수에 맞춰진 것도, 특정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가치 평가가 서술된 위치로써 표현된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특히 사마천은 ‘열전’에 압도적인 비중을 할애해 인간 주체의 역사를 제시했다. 여기에는 고대 문명과 삶을 구성하는 요소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인물이 수록됐다. 심지어 거리의 깡패까지 포함된 다양한 인간은 현명함과 어리석음, 선과 악, 도덕과 이욕, 이상과 현실의 사이를 오가며 좌절과 성공을 거듭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뭐, 그러면 어때요’하며 사는 몰가치한 사람은 없고 모두 나름대로 문명적 가치에 동참하려는 비장한 의지와 자각이 충만하다. 바로 이 점이 ‘사기’의 백미인데, 냉철한 사마천이 간간이 감정을 폭발하는 장면은 그 묘미를 더해 준다. 시정잡배에서도 확인되는 자각과 의지의 역사화, 이것은 바로 사마천이 자각한 사명과 의지였다.

    고금의 변화를 창조한 주체와 저자가 맞부딪치면서 그 변화의 원리와 문명적 가치가 제시된 ‘사기’. 현대의 독자에게, 특히 열전을 중심으로, 일독을 권하는 것은 바로 이 매력 때문이다.


    이성규 서울대 교수·동양사학과




    (86) 법의 정신-바롱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바롱 몽테스키외  




    1689년 1월 18일 태어난 바롱 몽테스키외가 1748년에 출간한 ‘법의 정신’은 약 20년에 걸친 필생의 대작이었고, 당대에 이미 22판을 찍을 정도로 큰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

    ‘법의 정신’이란 제목만 보더라도 단순히 법전 속의 법이 아닌, 환경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사이의 다양한 상호작용 속에서 생장한 풍부하고 생명력 넘치는 법의 모습이 떠오른다. 좋은 책이란 이처럼 제목 자체에서부터 이미 독자의 상상력을 계발하는 힘을 내뿜는 것일까?

    몽테스키외가 방대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추출한 법의 보편적 정신은 무엇일까?

    그는 자유의 보호와 증진, 평등의 보장, 그리고 개인적 사회적 안녕의 달성이라고 말한다.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는 ‘법의 정신’에서 특히 중요한 제2부에서는 ‘자유의 보호와 신장이라는 법의 정신이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달성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고찰한다.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로부터 독립된 상태로서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체계를 구상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양 정치철학의 과제였다. 이와 같은 공화주의적(共和主義的)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 ‘법의 정신’인데, 그 실현되는 구체적 내용은 한 정치적 공동체가 민주정(民主政), 귀족정(貴族政), 군주정(君主政)이냐에 따라서 다르게 될 것이라고 몽테스키외는 말한다.

    어떠한 통치구조에서이건 ‘법의 정신’의 핵심적인 표현은 ‘법의 지배’와 ‘삼권분립(三權分立)’에 있음을 확인한 몽테스키외는 21세기 한국사회가 배울 만한 교훈 두 가지를 역설한다.

    우선 몽테스키외는 민주주의 정체에서는 ‘시민적 덕성(德性)’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더 주목하여야 할 점은 민주정의 부패와 관련한 몽테스키외의 경고이다.

    그는 “민주정체는 구성원이 평등의 정신을 상실할 때문만이 아니라, 극도의 평등정신을 가짐으로써 통치자로서 선출된 자와 평등해지려고 할 때에도 부패한다”고 경고했다.

    그때 시민들은 자신이 위임한 권력마저 인정할 수 없으므로 원로원(의회)을 대신하여 심의하고, 집정관(대통령)을 대신하여 집행하고, 재판관을 파면하고 모든 것을 자신들이 직접 하려고 하게 되면서 국가와 법의 민주적 권위가 약화되고, 급기야 독재정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즉, 법의 정신이 ‘공화주의적 자유와 평화’의 보장에 있기는 하지만, 민주적 권위가 사라지게 되면 ‘나쁜 의미의 안정성’을 위하여 구성원은 자유를 희생하면서라도 독재정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히 ‘민주정의 역설(逆說)’이라 할 만하다. 이런 경우를 몽테스키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찾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3부는 “각 나라의 실정법이 비슷한 법의 정신을 지향하면서도 왜 구체적인 법규정은 달리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부분은 ‘걸리버여행기’와 비교하면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읽고 감동받은 적이 있는 독자라면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종류의 지적(知的)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김도균 서울대 교수 법학과




    (87) 주역-작자 미상

    주역-작자 미상  




    주역(周易)은 시(詩), 서(書)와 더불어 유교의 삼대 경전 중의 하나로 음양의 두 효(爻)가 여섯 번 겹쳐 만들어진 64개의 괘(卦)와 경문, 경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십익(十翼)으로 이루어진 점서(占書)이다. 음양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기호의 모임인 64괘도 그렇고 예언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한 경문도 호기심과 신비감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주역의 근원은 유래가 불분명한 점괘들이지만 주역이 불후의 고전 중의 하나가 된 것은 일반적인 역술서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들 수 있는 특징은 신탁과 같은 초월적 방법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역의 신비는 마치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듯한 부호들의 형상과 수학적 배합에서 나온다.

    태극기의 네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가 하늘과 땅, 물과 불을 상징하고 있는 주역의 중요 4괘라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8괘의 하나하나가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를 상징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합쳐짐으로 이루어지는 64괘의 형상과 변화는 세계의 모습과 변화를 보여준다 하겠다. 부호의 형상과 질서를 잘 해석하기만 하면 우주와 만물의 변화를 알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는 걸 보면 주역이 보여주는 세계는 꽤 매력적인 모양이다.

    사실 고대에는 점(占)이라는 게 오늘날 생각하듯이 과학과 대치되는 행위가 아니었다. 자연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부족했던 그때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경험을 깔고 최대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이루는 한 방법이었다.

    사실 점 혹은 예언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역설적인데 주역은 이 역설을 절묘하게 피해 간다.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숙명론 내지 결정론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만 점에는 숙명론을 부정하는 요소 또한 동시에 존재한다. 점을 쳐서 알게 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점을 쳐서 알게 된들 아무 소용없을 것이고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점의 결과를 검증할 수 없을 것이니 이래저래 난감한 일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점치는 행위 자체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라는 신탁을 받고 거기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지만 결국 그 신탁은 실현된다.

    만약 신탁이라는 예언 행위가 없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만약 그때 주역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상이다.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몸을 깨끗하게 해야 흉함에서 벗어나리라.’ 이런 괘가 나왔을지 모르겠다.

    주역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미래는 정해진 게 아니라 점을 치는 나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괘나 나쁜 괘나 답은 한가지다.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라.’ 지극히 상식적이나 진리가 아닌지. 여기서 주역은 역술서가 아닌 도덕과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철학책이 된다. 심심할 때 설명대로 괘를 한번 뽑아보면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허남진 서울대 교수·철학과



    (88) 오이디푸스 왕外-소포클레스등

    오이디푸스 왕外-소포클레스등  




    그리스 비극은 세계 어디서든 ‘만년 히트작’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야말로 엽기적이다.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아들, 아들을 맨손으로 갈가리 찢어 죽이는 어머니 등 그리스 비극은 사회적 인습과 제도가 송두리째 파괴된 세계를 보여 준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은 왜 이런 끔찍한 얘기를 즐겼을까? 이 모진 얘기들이 아직도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왜 그리스 비극인가?

    그리스 비극은 페르시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잇달아 치르면서 ‘그리스의 기적’을 이룬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민주정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아테네 디오니소스제에서 상연된 그리스 비극은 시민들이 서로 자신과 자기 사회에 대해 논하는 장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인이 무대에 올려 함께 구경한 세계는 그들의 조국이 아닌 ‘타자’의 세계였다. 그리스 비극은 거의 모두 영웅시대를 배경으로, 다른 도시국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오이디푸스의 얘기는 테베, 오레스테스의 얘기는 아르고스, 메데이아의 얘기는 코린트에서 펼쳐진다. 타자의 비극적 세계는 아테네인에게 자기 문명의 우월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조국을 잃으면 그들에게도 어떤 재난이 닥칠지 모른다고 경고했을 것이다. 결국 그리스 비극은 아테네인이 자신의 행운을 자축하고 바깥 세계의 야만적 어둠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다지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이 자기 찬양과 자기 무장만을 설교했다면 만년 히트작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위대함은 시민교육이라는 역사적 테두리를 벗어나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는 데 있다. 그리스 비극은 국가 수호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순간에도 국가주의의 모순을 폭로하며, 국가와 가족의 요구가 상충할 때 전자를 따르는 게 얼마나 어렵고 도덕적으로 위험한지 보여준다. ‘부동의 신념’이나 영웅주의에 감춰진 독선과 국가주의의 허구성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다. 이피게네이아가 아버지 아가멤논의 명예욕에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보면서 아테네 시민은 전쟁과 폭력이 애국심이나 희생의 논리로 둔갑하는 과정을 목도하고 영웅주의의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얼굴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우리가 당장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려 할 때조차 ‘나는 누구이며 인간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니체가 지적하듯 그리스 비극은 관중으로 하여금 인간이란 노쇠와 죽음의 운명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비이성적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임을 새삼 깨닫고 통곡하게 하는 통찰의 순간을 담는다. 이 순간을 통해 관중은 인간 존재의 진실과 대면하고, 그 대면의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필멸의 존재인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 비극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던지는 엄중한 질문인 ‘너는 누구인가’야말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이디푸스와 이피게네이아의 격렬한 비극이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을 ‘통곡’의 순간으로 이끄는 이유라 해도 좋을 듯하다.

    추천된 천병희 번역본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그리스 원전에 의거한 번역이지만, 아직 전작 번역이 끝나지 않았으며 이미 나온 번역도 원문에 충실하면서 우리글로서도 잘 읽히는지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이종숙 서울대 교수 영어영문학과


    (89) 백석시전집-백석

    백석시전집-백석  




    1930년대 중반에 ‘정주성’이란 짤막한 시를 발표하면서 백석(白石·본명 기행)은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 이전과 이후의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고향마을과 그가 여행했던 지역에 파묻힌 우리의 오랜 풍속을 맛깔스럽고도 구수하며 투박한 고향의 언어로 그려냈다. 우리 스스로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시대를 이끌어 나가지 못하던 시대에 점차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에 종속되어 옛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에 대해 그만큼 애정을 갖고 안타깝게 노래한 사람은 없다.

    그는 등단 이듬해인 1936년 초 시집 ‘사슴’을 200부 한정판으로 냈다. 주로 자신의 고향마을을 배경으로 한 토속적이고도 설화적인 이야기를 썼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 가운데 ‘여우난골족’ ‘고야(古夜)’ ‘가즈랑집’ 등이 가장 선명하게 그러한 경향을 보여준다.

    백석은 자신의 시집 ‘사슴’ 첫머리에 ‘가즈랑집’을 배치했는데, 이 무당 할머니 집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백석은 그 집에서 아이가 느낄 만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을 잘 표현했다. 귀신의 딸이라고 생각되어서 슬퍼 보이기도 하는 이 무당 할머니는 야생적인 자연에 바짝 다가서서 승냥이나 곰과 가까이 지내고, 온갖 나물과 약초의 세계 속에 거주한다.

    ‘외갓집’이나 ‘오금덩이라는 곳’ ‘고사(古寺) 개’ 등의 시에서도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마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설적 경이로움과 신비한 마력의 세계가 근대화되고 서구화되면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백석은 시집 ‘사슴’을 낸 이후에는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각 지역의 토속적인 풍물을 소재로 시를 쓰게 된다. 경남 고성이나 삼천포 등 남해안 지역에 대해서 쓴 ‘남행시초’ 연작이나 평안도 함경도 지역을 노래한 ‘서행시초’ 연작, 그리고 만주지역과 그 접경지역을 방랑하며 쓴 ‘북방에서’ ‘수박씨 호박씨’ ‘귀농’ ‘고향’ ‘절망’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마을 밖에서도 우리 땅 고유의 토속적인 풍물과 음식 맛, 거기에 깃들인 정신을 잘 포착해낸다. 그는 만주지역을 유랑하면서는 자신의 외로운 처지에 대해 뼈저린 슬픔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한 방랑의 끝에서 그는 거대한, 그러나 처절한 외침을 ‘북방에서’라는 시를 통해 토해냈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시는 우리 민족의 고대적 영토에서 이제는 낯선 자가 되어 방랑하는 자신의 깊은 회한을 노래했다. 그는 그 옛날 만주 북방영토로부터 남쪽으로 쫓겨 갔던 시절로 되돌아가 그 선조의 역사와 그 이후의 역사를 모두 하나로 엮어 ‘나’라는 서사시적 자아로 통합시켰다. 이제 만주벌판을 헤매는 자신은 그 ‘나’의 태반으로 돌아온 셈이지만 이곳에는 ‘나’와 관련된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이 장탄식이야말로 지금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절절하게 울려오는 것인가.

    그는 이 안타깝고도 장대한 우리 민족의 서사적 비가를 한때 ‘여성’지에서 같이 근무했던 화가 정현웅(鄭玄雄)에게 바쳤다. 1935년부터 동아일보사 등에서 전문 삽화가로 활동한 정 화백은 그 당시 매우 단아한 백석의 옆모습을 한 장 그려 잡지에 싣기도 했다. 백석의 시는 그 단아한 모습을 닮았다.


    신범순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90) 미디어의 이해-마셜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마셜 맥루한  




    저자 마셜 맥루한은 1960년대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 캐나다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이다. 그 이론을 바탕으로 역사와 문명의 변화를 설명해 낸 중요한 현대 사상가이기도 하다. 고정관념을 뒤집는 새로운 발상법으로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역사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을 구축해 냈는데 ‘미디어의 이해’는 그 같은 미디어 결정론의 대표작이다.

    1960년대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는 사람을 설득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당연히 메시지의 힘이라고 보았다. 미디어는 그저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용기(用器)일 뿐. 그런데 맥루한은 세상을 바꾸는 것은 메시지가 아닌 미디어의 힘이라고 ‘어이없는’ 주장을 한 것이다. 쇠붙이 같은 물질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미디어가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일까?

    맥루한은 기술이 인간 몸의 다양한 기관과 기능의 연장(延長)이라는 지적에서 출발한다. 그 성능을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높여 주고 강화시켜 주는 것이 도구이며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술의 변화는 모든 사회적, 문화적 변동을 이끈다. 기술 중에서도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기술은 인류 사회 변화의 지배적 요인이다. 왜 그런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인간의 감각기관의 연장이어서 세상을 지각하고 인식하는 방법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책은 시각의 연장이요, 라디오는 청각의 연장, TV는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을 동시에 연장시켜 주는 미디어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지각한다. 그러므로 한 사회 혹은 한 시대가 지배적 의사소통 수단으로 어떤 미디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대상에 대한 지각이나 인식은 달라질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생각하는 체계, 사회관계, 문화도 바뀌게 된다.

    예컨대 TV라는 전자 매체는 거의 모든 감각기관의 연장이어서 시각 위주였던 문자시대의 과도한 분석적 사고, 개인주의, 합리주의의 병폐에서 벗어나 총체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균형 잡힌 인간형으로 유도한다. 게다가 우리의 감각기관을 즉각적인 주변 환경만이 아니라 전 세계, 우주 공간의 구석구석까지 연장시켜 주어 지구 차원의 연대의식이 가능한 지구촌 사회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미디어는 메시지이다.

    TV 이후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 DVD, DMB, MP3 등 새로운 미디어는 과연 우리 자신과 역사와 문명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가? ‘미디어의 이해’에 이어서 맥루한의 사후에 발표된 ‘미디어의 법칙’이라는 책을 읽으면 그 답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 책의 핵심은 다음의 4가지 문제 풀이이다. 새 미디어가 확장시켜 주는 것은 무엇인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회복시켜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사용이 고도화되어 한계에 달할 때 어떤 반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인가? 이 두 책의 도움으로 새로운 미디어를 대입시켜 문제 풀이를 해 본다면 아마도 21세기가 어떤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인지 맥루한식으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박명진 서울대 교수 언론정보학과



    (91) 청구야담-작자미상

    청구야담-작자미상  




    ‘청구야담(靑邱野談)’은 1840년경에 편찬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문으로 된 이야기 모음집인데 편찬자는 미상이다. ‘청구야담’에 수록된 이야기는 총 270여 개이며, 이야기마다 일곱 자 내지 여덟 자의 운치 있는 제목이 붙어 있다. ‘청구야담’에 수록된 이야기는 비교적 길이가 짧다. 이런 짧은 이야기를 학문적으로는 ‘단형서사(短形敍事)’라고 부른다.

    한국고전문학사에서 단형서사의 전통은 대단히 오래다. 고려 중엽에 일연(一然,)이 저술한 ‘삼국유사’라든가 조선 초기에 성현(成俔)이 저술한 ‘용재총화’ 같은 책은 모두 단형서사 모음집에 해당한다. ‘청구야담’은 이런 단형서사의 유구한 전통을 잇는 이야기 모음집이다.

    그러나 ‘청구야담’은 조선 전기까지의 단형서사와는 질적 성격을 달리한다. 조선 전기까지의 단형서사는 대체로 편폭이 극히 짧고 서술이 단순하지만 ‘청구야담’의 이야기는 대체로 그 편폭이 훨씬 길며 서술 또한 자세하다. ‘청구야담’은 근대 이전 시기 한국 단형서사문학의 전개과정에서 그 대미를 장식한 책으로서, 한국 고전단형서사의 ‘완성’임과 동시에 최고의 성취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야담’이라는 말은 17세기 이후에 사용된 용어다. 그것은 주로 시정세계(市井世界)를 진원지로 하여 양반사회를 넘나들며 유포된 이야기가 한문으로 기록된 것을 일컫는 말인데, 일화 전설 민담 단편소설 등 다양한 갈래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야담’이라는 명칭이 책이름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초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다.

    ‘청구야담’은 ‘어우야담’ 이후 19세기 초반까지 창작된 여러 작가의 야담을 추려서 모아 놓은 일종의 ‘선집’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구야담’의 편찬자는 그 문학적 안목이 비상히 높아 비교적 문예성이 높은 야담만 선별해 이야기 하나하나에 일관된 방식으로 제목을 붙여 놓고 있다. 이 점에서 ‘청구야담’은 한국 야담문학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청구야담’에 수록된 야담은 주로 조선 후기에 구연되던 이야기가 기록으로 정착된 관계로 이 시대의 분위기와 정조(情調)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청구야담’에 특징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사회상은 새로운 사회관계의 형성, 지배층 내부의 부패와 모순, 몰락양반의 비참한 현실, 신흥부자의 대두, 지배층에 대한 하층의 항거, 자유분방하고 생기발랄한 시정 풍속,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새로운 윤리관 및 가치관의 형성 등이다.

    또 ‘청구야담’의 이야기는 대체로 도시적 분위기를 강하게 띠고 있다. 이는 대체로 도시 시정인들을 중심으로 구연되던 이야기가 정착된 데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청구야담’에는 여러 계층의 인물이 등장하며, 사실적인 이야기와 신비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골고루 섞여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인간과 사회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100권의 역사책을 읽느니 ‘청구야담’ 1권을 읽는 것이 아마도 낫다고 생각한다.

    ‘청구야담’의 번역본으로는 이우성 임형택 두 분이 공역한 ‘이조한문단편집’이 신뢰할 만하다.


    박희병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92)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전형적인 ‘일본 회귀’형 작가에 속한다. 일본 회귀란 처음에는 서양문학의 영향 아래 작품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일본 전통에 기초하는 작풍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 가와바타는 ‘설국’을 계기로 전통 미학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이 소설은 무려 13년간의 개고를 통해 완결판이 나왔다. 마치 분재를 다듬는 정성으로 조탁한 일본어 표현은 당대 최고의 예술적 성취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며 여행지에서 매력적인 두 명의 여성과 조우하는 시마무라는 무릇 남성의 꿈과 환상을 대신 구현하는 존재다. 산행 길에 우연히 찾아든 온천 마을에서 게이샤(藝者) 고마코를 만난 시마무라는 그녀의 청결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세 차례 방문하게 된다. 고마코도 시마무라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키워간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고마코의 사랑이 현실적인 크기로 다가왔을 때 시마무라는 온천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결국 시마무라가 추구한 것은 현실적인 사랑이 아닌 도회의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게 해 주는 감미로운 환상이었다.

    이 소설은 중편 이상의 분량을 지녔지만 이렇다 할 만한 줄거리도 없다. 주제는 모호하고 인물의 성격도 뚜렷하지 않다. 주고받는 예사로운 대화를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수묵화의 여백을 감상하는 것 이상의 내공을 요한다. 이 정도면 “몇 번을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는 ‘용감한’ 고백이 일본인 독자 사이에서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가와바타의 노벨 문학상 수상연설 제목을 비아냥거리듯, 26년 후 같은 자리에서 ‘모호한 일본의 나’라는 제목의 수상연설을 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도 분명 그러한 독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연설 제목에 나오는 ‘아름답다’와 ‘모호하다’는 두 개의 형용사야말로 이 소설의 특징을 적확하게 짚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결여된 점이 적지 않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오랫동안 읽히는 이유는 작가의 섬세한 미의식과 감각적인 문체 때문일 것이다. 전편에 걸쳐 펼쳐지는 자연의 정경 묘사는 거의 시의 영역에 미쳐 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밤하늘의 은하수에 대한 묘사는 그 정점을 보여준다. 등장인물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다. 작품 속에 그려지는 고마코와 요코는 자연과의 합일 속에서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이 점에서 ‘설국’은 동양적 정신세계의 요체를 현대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게이샤, 온천, 후지산 등의 대상은 한두 세기 전부터 서양에서 일본에 대한 환영(幻影)을 만들어 내는 데 쓰인 대표적인 재료이다. 설국이 눈으로 인해 외부로부터 고립된 세계라면, 소설 ‘설국’은 고유의 풍토와 전통 그리고 번역을 완강히 거부하는 일본어 문체로 세계문학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설국’이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은 비서구 세계를 ‘신비’의 영역에 가둬두고자 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설국’은 이른바 ‘일본적 미학’에 대한 신화를 추인(追認)하고, 나아가 그것을 범세계적으로 증폭시키는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윤상인 한양대 교수 일본언어문화학부



    (93) 보조법어-지눌

    보조법어-지눌  





    세상이 어지럽고 잘못되어갈 때, 나서서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고 직접 실천하여 본보기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 고려 중기의 불교승려인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도 그런 이로 꼽힌다. 지눌은 한국 불교역사, 특히 한국 불교사상사에서 신라 때의 원효(元曉)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추앙된다. 그의 글을 모아놓은 것이 ‘보조법어’다.

    당시 고려사회는 민란이 거듭되고 무신정권이 등장하여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불교계에는 분열과 타락상이 심각했다. 지눌은 세속의 명리를 좇는 데에만 급급한 당시 불교계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수행을 하는 승려조차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된다는 불교 본령의 목표는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기껏해야 내생에 좋게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데 대해서 비판을 가했다.

    그러면서 정과 혜를 나란히 닦아 성불을 목표로 하는 수행에만 전념하자는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벌였다. 정이란 바깥의 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혀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혜는 맑은 정신으로 세상의 실상을 환히 비추어보는 지혜를 가리킨다. 지눌은 그 둘을 함께 닦는 수행을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라 일컬었다. 이것이 지눌이 제시한 수증론(修證論·닦음과 깨달음에 관한 이론)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다.

    지눌은 또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이라는 수증론을 제시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님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 범부로 살고 있다는 게 선불교의 관점이다. 마치 열쇠를 손에 들고도 한참 찾아다니다가 어떤 계기에 문득 제 손에 든 열쇠를 알아차리듯이, 자기의 본래 정체를 알아차리는 깨달음은 단박에 일어난다. 이를 일컬어 돈오(頓悟)라 한다.

    하지만 깨달음만으로 부처님으로 살게 되지는 않는다. 워낙 오랫동안 범부로 살아가는 습관에 속속들이 젖어있기 때문이다. 얼음이 본래는 물이라 해도, 얼음 그대로 물 노릇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이 물 노릇을 하게 하려면 열을 가하여 녹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치열한 수행과정으로 자신의 삶을 채워야 한다. 이를 일컬어 점수(漸修)라고 한다. 이는 수행과 깨달음에 관한 선종(禪宗)의 사상을 교종(敎宗)인 화엄사상을 가지고 설명한 것으로, 선교일치를 표방하여 당시 불교계의 분열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마지막으로, 지눌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을 천명했다.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이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으로 자신의 의식을 꽉 채워 망념이 스며들 틈이 없게 하면, 그 의심덩어리가 커지다 못해 터져버리는 깨침의 체험에 이른다. 지눌을 통해 한국불교에 간화선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땅으로 인하여 넘어진 자는 땅으로 인하여 일어선다. 땅에 의지하지 않고 일어설 수는 없다.” 보조법어의 ‘권수정혜결사문’의 첫 구절이다. 우리가 잘못 살아가는 것은 마음을 잘못 써서 그런 것인데, 올바르게 되는 것 또한 바로 그 마음에 달렸다는 뜻이다. 궁극적인 해결은 저 밖 어디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며, 모든 문제를 우리가 만들었고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해결책이 보인다는 교훈이다. 만사를 소유의 문제로만 보는 습관이 든 이 시대에 새삼 귀중하게 새겨볼 만한 가르침이다.


    윤원철 서울대 교수 종교학과




    (94) 토지-박경리

    토지-박경리  




    시인 김구용(金丘庸)은 서울에 이괴(二怪)가 있으니, 북에는 박경리요 남에는 손창섭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괴란 범상치 않음이리라. 필자가 여기에 대구를 맞추어 본다면, 한국에 이대가(二大家)가 있으니, 남에는 박경리요 북에는 최인훈이다.

    박경리는 통영, 최인훈은 회령이 고향인 두 사람은 반도의 남북 쪽 끝 태생이다. 두 사람의 문학은 모두 전쟁으로부터 발원해(박경리의 ‘시장과 전장’, 최인훈의 ‘광장’),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초극하는 문학(박경리의 ‘토지’, 최인훈의 ‘화두’)을 창조하려 했다.

    박경리 선생은 지금 원주 근교에서 밭을 일구며 살고 있는데, 어느 산문에서 그 뜻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생은 ‘자투리 시간이 아니라 두루마리 같은 시간을 쓰고 싶었다’고 쓰고 있었다. 이 두루마리 같은 시간이라는 말은 박경리 문학의 본질에 관한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가로로 길게 이어 둘둘 말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이 두루마리는 시간의 연속성을 의미한다. 그는 단절 없이 이어진 이 시간과 초인간적인 의지로 ‘토지’를 썼다. 이것은 박경리 선생이 ‘토지’라는 이야기 속 시간으로 한국근대사라는 역사 속 시간에 맞서서 이를 초극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도 아래서 써나간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쓰인 장편 대하소설로 구한말로부터 해방기에 이르는 민족 수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3만 장이 넘는 기다란 원고지 피륙 위에 수놓아 나간 대작이다. 이 속에는 신분이 다른 결혼을 한 서희와 길상이를 비롯해 숱한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죽고 또 새로운 인물이 그 삶을 ‘반복’해 이어간다. 최근에 나온 ‘토지’와 관련한 한 논문은 “‘토지’의 놀라운 힘 가운데 하나가 끊임없는 등장인물을 증식해 내는 창조력”(김은경)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들 자신이 타고난 운명과 맞싸우는 것이다. 실로 박경리 처럼 운명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문제를 그토록 집요하게 다루어온 작가도 드물다. 그의 장편소설 가운데 일반에 널리 알려진 ‘시장과 전장’이나 ‘김약국의 딸들’ ‘파시’의 여성 주인공들은 모두 운명이라는 거대한 초인간적 힘 앞에서 서 있는 문제적 인간들이다.

    ‘토지’는 이러한 운명의 힘과 그것에 맞서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지극히 다채롭고 풍부하게 묘사해 나간다. 경상도 하동 평사리에 군림해 온 최참판댁의 혈육으로, 쓰러진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서희, 이 집안의 머슴 출신으로 서희와 결혼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등 변모를 거듭해 가는 길상, 소작인의 딸 용이와 무당의 딸 월선이, 서희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후 방황을 거듭해 가는 상현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의 형상은 조밀하게 직조된 커다란 피륙을 이룬다.

    ‘토지’는 식민지 시대를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 심층적 의미는 특정한 시대와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토지’는 인간에 의해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가 하는 한계를 시험하는 두루마리요 피륙이고 거대한 벽화인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95)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과학고전’은 16∼17세기 ‘과학혁명’ 시기에 쏟아져 나온 과학의 원리와 기초를 제시한 다양한 과학자의 이야기다. 그 속에는 과학 ‘혁명’의 역사가 담겨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과학혁명의 서곡을 연 저술이다. 그는 이 책에서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씩 자전하며, 태양 주위를 1년에 한 번씩 공전하고, 지구 축이 회전한다는 3가지 운동을 지구에 부여했다. 케플러의 ‘신천문학’은 행성이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운동을 하며, 태양과 행성을 잇는 반경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그리며 움직인다는 케플러의 1, 2법칙을 담고 있다.

    갈릴레이는 1632년에 출판된 ‘두 세계에 관한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역학적으로 옹호했다. 이 책의 출판은 당시 가톨릭교회의 노여움을 샀고, 그 결과 갈릴레이는 1633년에 종교재판을 받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뒤에 종신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갈릴레이의 ‘새로운 두 과학’(1638)은 갈릴레이가 가택연금이 된 상태에서 자신의 역학적 논의를 집대성한 저술이다.

    메르센은 페르마, 파스칼, 가상디, 데카르트와 같은 프랑스 과학자와 폭넓게 교류하던 프랑스 과학자이자 신학자였다. 당시 17세기 초엽에는 참된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 극단적인 회의론이 팽배했으며, 메르센은 이에 맞서서 신학과 과학적 지식의 진실성을 옹호하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것이 바로 ‘과학의 진리’이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데카르트는 지식의 확실한 근거를 찾아 나섰던 사람이었다. 자연세계의 모든 현상이 물질(외연)과 운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우주, 인간, 영혼을 설명하는 3부작 ‘세계’를 기획했고, 이를 1629년부터 저술하기 시작했다. 1633년 이후 데카르트는 철학적으로 확실한 인식의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했으며, 회의론의 방법을 도입해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철학적 방법론을 담은 ‘방법서설’을 1637년에 출판했다. 그의 ‘방법서설’은 독립된 저술로서가 아니라 ‘굴절광학’ ‘기하학’ ‘기상학’이라는 3권의 자연과학 소고와 함께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과학혁명은 물리학과 천문학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는데, 영국의 생리학자이자 의사인 윌리엄 하비는 피가 인체를 순환한다는 새로운 이론을 주장했다. 그의 새로운 생리학 이론은 1628년에 출판된 ‘동물의 심장과 피의 운동에 대한 해부학적 논고’에 나와 있다.

    과학혁명의 완성은 아이작 뉴턴에 의해 이루어졌다. 역학과 천체이론을 집대성한 ‘프린시피아’에서 뉴턴은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만유인력)을 도입해서 그 전에 알려졌던 수많은 지상, 천상의 현상을 설명했다. 1704년에 출간된 뉴턴의 ‘광학’은 어려운 수학을 적용했던 ‘프린시피아’와는 달리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빛과 색깔의 성질을 탐구했는데, 이 책에서는 빛이 단색광의 혼합물이라는 그의 핵심적인 이론에 근거해서 회절, 복굴절과 같은 현상을 탐구하고 있다. 이러한 16∼17세기 ‘과학혁명’ 시기의 고전을 발췌해 하나의 책에 담은 ‘과학고전선집’은 올해 말이나 되어서야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올 예정이다.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각각의 고전을 구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


    (96) 율곡집(율곡문선)-이이

    율곡집(율곡문선)-이이  




    율곡 이이(李珥)는, 인간이란 욕구하는 존재라고 본다. 그런데 욕구하는 대상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활동은 사회 성원 간의 경쟁과 충돌을 낳고 이는 결국 사회 전체의 혼란과 무질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점에서 욕구의 충족을 위한 행위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지만 사회의 차원에서 볼 때는 ‘악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이가 볼 때,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착하게 행동할 수 있는 여지란 거의 없다.

    이에 대한 이이의 처방은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규범 체계인 예를 따르라는 것이다. 개인은 먼저 무조건 그리고 전면적으로 예를 수용해야 한다. 예에 비추어 자신의 욕구가 옳은 것으로 판정되면 욕구대로 행위하고, 그른 것으로 판정되면 욕구를 버리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사회가 개인을 감시하는 장치를 내면화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라고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이의 철학은, 중국 선진 시대의 순자(荀子)와 송·명 대의 장횡거(張橫渠·본명 재·載), 나정암(羅整庵·본명 흠순·欽順) 등 기철학자의 견지를 잇는 것이기도 하다. 곧 이이는 성악설의 계보에 몸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이는 사회 성원 전체를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처방도 생각한다. 흔히 ‘변통론’ 또는 ‘경장론’이라고 말하는 갖가지 사회 제도적 장치의 고안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이는 국가 운영에 참여하는 관료에게는 인격적 면모보다는 현실의 제도를 운영하고 개선하는 행정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견해는, 당시 서인이 취한 정치적인 입장에 대해 탄탄한 철학적 기초를 부여해 준 것이기도 하다. 양시양비론이라는 이이의 정치적 태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욕구하는 존재이므로, 달리 보면 인간은 어느 정도 이미 타락해 있다는 점에서 모두 동등하다.

    마찬가지로 이이는 동인과 서인이라는 두 정파는 어느 한쪽이 옳고 다른 한쪽이 그른 것이 아니라, 양쪽이 모두 옳은 점도 있고 그른 점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동인과 서인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다툼은 국가의 운영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므로, 이들을 조정하여 화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척의 국정 간여를 배제하자는 동인의 주장에 직면하여, 이이의 이 같은 주장은 상대적으로 명분에서 밀리는 서인의 견지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자주 들먹여지곤 하는 양시양비론을 실제 정치 현장에서 가장 먼저 전형적인 방식으로 구사했다는 점에서 이이는 양시양비론의 원조라고 할 만하다.

    이이의 글은 거의 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7권으로 간행한 ‘국역 율곡전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의 글을 가려 뽑은 선집은 대부분 사상전집류에 포함되어 있어 서점에서 구하기가 어렵다. 그중 일반 독자가 사 볼 수 있는 것으로, 내용이 비교적 충실한 번역본은 ‘한국의 유학사상’(삼성출판사·1997)이다. 이 책은 이황과 이이의 저술만을 뽑아 옮긴 것인데, 이이의 저술로는 ‘격몽요결’ ‘동호문답’ ‘천도책’ 등과 함께, 이이가 묵암 성혼(成渾)이나 사암 박순(朴淳)과 논쟁하면서 주고받은 편지, 이이가 국왕 선조에게 올린 ‘인심도심도설’ 그리고 ‘성학집요’의 서문 등을 수록하고 있다.


    정원재 서울대 인문대·철학과 교수


    (97) 체호프 희곡전집-안톤 체호프

    체호프 희곡전집-안톤 체호프  




    서구의 근대 사실주의 연극이 출현한 지 한 세기를 넘긴 지금, 그 시대의 극작가 가운데 안톤 체호프의 희곡만큼 세계적으로 꾸준히 공연되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입센, 스트린드베리, 하웁트만, 버나드 쇼 같은 쟁쟁한 거장이 근대 연극의 북두좌를 이뤘다면, 오늘날 체호프는 이들로부터 성큼 떨어져 북극성의 자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호프는 모두 7편의 장막극과 10편의 단막극을 썼는데, 이 중에서 1896년부터 사망하기 바로 전 해인 1903년 사이에 쓰인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동산’ 등 ‘4대 장막극’이 가장 널리 읽히고 공연되는 희곡이다.

    젊은 예술가의 열정과 사랑, 가슴 아픈 좌절을 그리고 있는 ‘갈매기’는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희곡이다. 이 작품은 1896년의 초연에서 대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2년 뒤 스타니슬라프스키라는 걸출한 연출가에 의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획기적인 성공을 거둠으로써 체호프의 독특한 극작술이 본격적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무대 커튼 위에 날개를 펼치고 있는 갈매기의 그림은 지금도 러시아 연극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바냐 아저씨’와 ‘세 자매’는 가슴속에는 고귀한 이상을 품었지만 현실의 질곡과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서 빛이 바래 가는 섬세한 영혼을 보여 준다. 실제로는 자신의 고향을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면서 항상 ‘모스크바로 가자!’고 읊조리는 세 자매의 모습이 안쓰럽지만 그것은 닿을 수 없는 낙원을 희구하며 현실을 견디어 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체호프는 서글픈 운명의 등장인물을 보여 주면서도 자신의 작품이 ‘희극’이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작가의 주장에 명실 공히 부합하는 희곡은 마지막 장막극인 ‘벚꽃동산’이다. ‘벚꽃동산’의 낙천적인 옛 지주들은 자신들의 영지가 경매로 팔려나가는데도 소풍과 파티로 소일하며 과거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역사적인 격변을 떠들썩한 시골 빚잔치의 풍경 속으로 담아낸 작가는, 무대를 텅 비워 놓고 벚나무 동산을 떠나간 자신의 주인공을 따라 그 다음 해에 이 세상을 떴다.

    그의 희곡은 특별한 사건이 없이 일상의 저변에 흐르는 미묘한 심리의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행동이 없는 희곡’, 또는 ‘분위기의 희곡’으로도 불린다. 이 밖에도 등장인물 간의 의사소통의 단절, 빈번한 침묵, 다양하고 서정적인 음향 효과, 비극적 요소와 희극적 요소의 절묘한 결합 등등이 체호프 희곡의 중요한 특징으로 거론된다.

    체호프는 단편소설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단편 작가로서의 체호프가 위대한 거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힐 수 있다면, 극작가로서의 체호프는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극작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체호프는 근대 이전의 극작술이 문학으로 성취할 수 있는 정점을 보여 주었으며, 현대 연극이 가야 할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이정표를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국내에 나와 있는 나름의 장단점을 갖고 있는 여러 종류의 번역서 가운데 ‘벚꽃동산’(오종우 번역)이 체호프 전공자의 번역이라는 점에서 눈에 띈다. ‘체호프 희곡전집’(이주영 번역)은 체호프의 모든 희곡을 담고 있다.


    박현섭 서울대 교수 노어노문학과


    (98) 니코마코스 윤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은 어떤 것일까? 행복을 누리는 삶이라고 한다면 일단은 수긍할 수 있겠다. 그러나 행복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해두지 않는 한 아직 알맹이 있는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삶을 보장해주는 행복의 실질적인 내용에 대한 질문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가 제시한 답은 인간에게 주어진 역량을 최대한 계발하여 발휘할 수 있게끔 삶을 꾸민다면 그것이 곧 진정 행복한, 즉 최선의 삶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답 역시 인간에게 주어진 역량에 관한 설명이 따라주어야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바로 그에 관한 설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핵심부분을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관건이 되는 역량을 크게 지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두 종류로 나누어 상론한다. 그는 삶의 방식으로서는 지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진리탐구에 몰두하는 관조적인 삶을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 때문에 그의 윤리관은 너무 주지(主知)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실천적 역량을 지적인 것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취급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실천적 역량이란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특정한 정서적 반응을 보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성향으로서 흔히 말하는 덕(德)과 같은 것이다. 가령 의로움, 너그러움, 우애, 용기, 절제 등이 그 예다. 이런 덕목이 결핍된 인간은 지적인 역량을 갖추더라도 심각하게 잘못된 인생을 살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을 잘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상 실천적인 덕에 관한 논의에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아주 세심한 정성을 쏟는다.

    각 덕목에 관한 그의 논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논변의 정교함과 깊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철학적 분석의 뛰어난 모범으로 통용되고 있다. 각론뿐 아니라 덕 일반에 관한 총론적 논의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 많다. 가령 정서적인 반응과 관련된 측면에서는 덕이 중용(中庸)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동양사상사에도 비슷한 이론이 있기에 비교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대목이 특히 흥미로울 것이다.

    또한 덕은 정서적 반응을 넘어 결국은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덕의 논의는 행위이론을 포함하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여는 기념비적인 것이다. 행위 일반의 구조와 그중에서도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행위의 특성에 관하여 그가 시도한 분석은 최초의 본격적인 행위이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어떤 기발한 윤리교설을 창안해내서 열렬한 신봉자를 끌어 모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윤리문제에 관한 학문적인 논의의 기반이 되는 개념 틀을 차분하게 정리해서 마련해놓은 것이 그의 가장 큰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그 개념 틀은 적어도 이 책이 쓰인 기원전 4세기부터 계속 서양 윤리학의 사상적 골격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서양 윤리사상사의 큰 흐름을 그 저류에까지 깊이 탐사하고자 하는 지적인 호기심을 가진 독자는 이 책을 재독, 삼독하면서 저자와 토론하기에 결코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번역으로는 최명관 역(서광사)을 추천한다.


    이태수 서울대 교수 철학과


    (99) 삼국유사-일연

    삼국유사-일연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역사서로 손꼽힌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오랫동안 이른바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로 분류되어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한국의 고대문화를 더욱 원형에 가깝게, 그리고 총체적으로 담은 사서(史書)로서 제대로 평가받게 됐다.

    삼국유사보다 140년 앞선 삼국사기는 유교적 정치사관을 중심으로 한 것인 데 비해 삼국유사는 불교적 정신사관을 강하게 반영한 사서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불교사관을 유교사관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이나 부정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삼국유사의 찬술은 ‘유사(遺事)’라는 이름 그대로 사기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내지 못한 것을 보완한다는 의도에서 이뤄졌다. 삼국유사에서 삼국사기를 국사(國史) 또는 본사(本史) 등으로 칭한 것은 정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삼국유사는 기존의 역사서에서 간과한 고대의 사회 습속과 신앙, 특히 불교사의 많은 부분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보충해 삼국사기보다 역사 이해의 폭을 크게 확대시켜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지리 문학 언어 미술 고고 민속 사상 종교 등 고대의 역사와 문화의 총체적인 모습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삼국사기가 신이한 설화 형태로 전승되던 많은 고대 사료를 분해해 형식적인 편집체제에 맞추거나 화려한 문장으로 개서해 그 자료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게 한 데 비해 삼국유사는 신이한 설화를 원형 그대로 제시해 오늘날 우리들이 고대문화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한국의 고대사 체계는 고조선에서부터 삼국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국가와 정치세력을 잡다하게 나열하여 전체적으로 일정한 체계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그 시조 단군에 대한 인식이 확실하게 성립됐음을 나타내 준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생존하던 13세기 고려는 야만시하던 몽골족의 침입을 받아 30여 년간의 치열한 항쟁 끝에 마침내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문과 불교를 문명의 상징으로 자부하던 고려인의 뇌리에 항쟁과 패배의 경험은 강하게 각인되었다.

    또 그러한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기준을 찾기 위해 과거의 문화전통을 재인식하려는 사회적 배경이 당시 고려의 역사 인식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삼국유사의 불교사 인식에서도 이 나라가 오래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땅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몽골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불교적인 영험담을 통하여 혼란한 민심에 강렬한 신앙심을 고취하려는 문화 의식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또한 세속적인 명리에 집착하거나 부도덕한 승려를 비판하고 일반 서민과 노비의 신앙 사례 등에 따뜻한 애정의 눈길을 기울이는 모습에서 불교신앙의 중심 과제가 중생의 구제임을 분명하게 나타내 주려는 저자의 사회의식을 읽을 수 있다.

    오늘날 번역서로는 ‘삼국유사’(이재호 역·솔), ‘일연과 삼국유사’(정병삼 편역·새누리)가 있다.


    최병헌 서울대 교수·국사학과





    (100) 고전시가선집-유리왕 등

    고전시가선집-유리왕 등  




    ‘훨훨 나는 꾀꼬리는/암컷 수컷 정다운데/나의 외로움을 생각함이여/누구와 함께 갈거나.’

    고구려의 유리왕이 불렀다고 전하는 ‘황조가’이다. 문면에 나타난 현실은 짝을 잃은 화자의 고독한 처지이고, 이상은 꾀꼬리처럼 정다운 부부관계이다. 이 노래에서의 현실과 이상은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영원한 갈등으로 나타난다. 이상적인 삶의 추구가 강렬할수록 현실에서 경험하고 있는 결손의 상처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노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 노래의 앞부분은 자연의 정경을, 뒷부분은 화자 자신의 내면을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이 노래가 들려주는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는 곧 자연과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괴리인 것이다.

    ‘강강술래’나 ‘쾌지나 칭칭 나네’ 같은 노래도 이러한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전자는 호남지방에서, 후자는 영남지방에서 향유하고 있는 민요이다. 이 둘은 집단예술의 형태로 보존되고 있는 점, 선후창이라는 가창 방식과 상당량의 노랫말까지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공을 초월한 우리 선조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하늘에는 별도 총총/쾌지나 칭칭 나네/강변에는 잔돌도 많다/쾌지나 칭칭 나네/솔밭에는 옹이도 많다/쾌지나 칭칭 나네.’

    이 노래에 등장하는 하늘, 별, 강, 돌, 소나무는 자연물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자연이다. 인간의 손에 의해 가공되지 않은 그 순수 자연은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야말로 자연은 그 어느 것 하나 풍성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많다’는 표현이 인간사에 결부될 때 그 의미는 180도 달라진다.

    예컨대 ‘우리네 살림살이 수심도 많다’와 같은 구절은 풍성한 자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결핍과 부조화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천 년에 걸쳐 향유되었던 우리의 옛 노래를 어찌 이와 같은 한 가지 잣대로만 말할 수 있으랴. 꿈속에서도 시를 짓고,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그 시를 잊어버릴세라 종이에 옮겨 적었다는 수많은 문인. 그들이 꿈꾸었던 세계와 그들이 소요했던 정신세계를 어찌 한마디로 재단할 수 있겠는가.

    옛 노래의 참맛을 이해하려면 오늘 우리가 소중한 것이라고 꿈꾸고 있는 그 모든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 세계인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새로 제작하는 1만 원권 지폐에 ‘용비어천가’의 제2장을 넣기로 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 또한 조선 왕조의 꿈과 이상을 담았던 노래가 오늘 우리의 꿈과 이상을 표현하는 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제안이 아니겠는가.

    이 노래는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을 통해 대자연의 섭리를 노래하고 있다. 또 꽃 좋고 열매 많음은 자손의 번성과 풍요를, 바다로 나아감은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 민족이 더욱 융성하기를 바라는 것인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바람 아니겠는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일 새/꽃 좋고 열매도 많으리니/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아니할 새/내가 되어 바다로 가느니.’


    권두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동아일보-서울대 공동 ‘권장도서 100권’ 매일 소개




    서울大 권장도서 100권 선정
    “교양서적 이 정도는 읽어야”…  (2005.2.4)

    서울대는 4일 재학생들의 기초교육 강화를 위해 대학생이 읽어야 할 ‘권장도서 100선’을 선정했다.

    서울대는 또 이 도서들을 다룰 핵심교양과목 수업을 개발해 2학기부터 학부 교과과정에 추가 개설키로 하는 등 학생들이 선정도서를 읽도록 유도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시행할 계획이다.

    서울대 관계자는 “학생들의 종합적 판단력과 비판적 사고력 함양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기초교양을 쌓는 데 초점을 맞췄다”며 “급변하는 시대흐름 속에서도 변화에 적응하며 지속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잠재역량을 키우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전공분야를 대표하는 교수 20여 명이 1년여간 작업한 끝에 한국문학 17권, 외국문학 31권, 동양사상 14권, 서양사상 27권, 과학기술 11권 등을 선정했다.


    동아일보-서울대 공동 ‘권장도서 100권’ 매일 소개 (2005.4.5)

    동아일보는 창간 85주년을 맞아 서울대와 공동으로 최근 이 대학이 선정한 ‘대학생을 위한 권장도서 100권’을 소개하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1일부터 매일 한 권씩 100회에 걸쳐 소개하게 될 이 ‘독서기행’ 시리즈는 대학생은 물론 고교생과 일반인에게 책을 가까이하고, 또 책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이 코너는 해당 분야의 서울대 교수 80여 명이 그 책을 선정하게 된 이유, 책의 내용, 재미있게 책을 읽는 방법 등을 중심으로 집필합니다. 서울대가 왜 권장도서 100권을 선정하게 됐는지, 어떤 기준으로 선별했는지 등을 소개합니다.

    Culture Board에서 이 ‘권장도서 100권’ 소개를 전재할 것입니다.

    서울대가 2월 권장도서 100권을 선정, 발표한 것은 1993년 ‘동서고전 200권’을 발표한 지 12년 만의 일이다. 기존의 선정 도서들이 너무 어렵고 국내 번역서가 취약해 교양 수준의 도서로는 적절치 않다는 판단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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