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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연속기획 (사탁왕후와 선화공주에 대한 소고Ⅲ)<칼럼사설수필> 2010. 10. 17. 20:34
3회 연속기획 (사탁왕후와 선화공주에 대한 소고Ⅲ)
"'639년 음력 1월29일' 미륵사에 인파가 몰렸다. 西석탑 사리장엄 봉영식 때문이다. '재물을 희사해 가람(미륵사)을 세웠다'는 사비(부여)에서 온 사탁왕후를 비롯 왕족과 귀족, 관리, 승려와 신도, 무사와 시녀에 백성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은 1370년 후손인 대한민국 문화재 관계자가 사리장엄을 ”'국보 중의 국보'로 보존처리와 연구를 한다"며 대전국립문화재연구소로 가져갈 줄 몰랐다. 더구나 봉영기에 가람 창건 및 발원자, 발원내용 등을 상세히 기록했음에도 640년 후 충렬왕 때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만 믿고 서동축제에 경주에서 뽑은 선화공주를 앞세우고, 사탁왕후는 언급조차 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처럼 금(동)제사리호 및 금제봉영기 등을 가져간 것도 통탄할 일인데 후손들이 미륵사를 세운 자신을 거론조차 안한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서운할까?
‘사탁’ 가문을 알아보자. 사탁이나 사택(沙宅=砂宅), 사문(沙門), 사타, 사(沙)씨는 백제말 ‘권력의 심장부’를 장식했던 왕족에 버금가는 최고 귀족층이다. 사탁 가문과 왕권과의 상호관계나 역학구조가 백제말과 미륵사지 연구에 핵심으로 등장했다.
'봉영기'에는 선화공주는 없고 대왕폐하(무왕)와 사탁적덕(좌평)의 딸, 사탁왕후만 있다. ‘사탁’의 ‘탁’=<택(宅)에서 갓머리 없는 글자>를 놓고 읽기조차 제각각이다. 백제시대 ’탁‘은 ’택‘의 약자로 같은 의미와 발음으로 읽혔을 가능성이 농후하나 현행 한문은 ’탁‘이다. 안동김씨를 安東金門이라 하는 것처럼 宅이나 門은 沙씨에 붙어 ‘집안과 가문’의 ‘높임말’로 보이나 복성일 수도 있다. 北史, 隋書, 新唐書 등에는 沙.燕.협(協 왼쪽 十이 없음).解.眞.國.木.백(白 위에 풀초가 있음)씨가 ‘백제 8족’으로 기록됐다. 왕족인 扶餘씨에 解·眞씨는 부여계로 북쪽에서 내려온 귀족이고, 沙·燕·백씨는 남부토착 금강유역 마한계로 추정된다.
삼국사기(484) 기록에 내법좌평 沙若思가 최초 등장하고 관세음응험기에 백제승려 沙門發正이, 일본서기(543)에 상좌평 사탁기루(己婁)가 등장해 사비시대 '백제 8족' 으뜸으로 득세한다. 기해년(639) 봉영기의 좌평 '사탁적덕(積德)', 의자왕 14년(654)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과거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의 사택지적비를 남긴 대좌평 '砂宅智積', 일본서기(660) 백제멸망 기록과 소정방이 백제정벌을 기념한 정림사지 5층석탑 금석문에 등장하며 당나라 포로가 된 대좌평 '沙宅千福', 당나라에 압송됐다 웅진도독부 요직을 맡은 후 일본에 망명한 沙宅孫登, 일본에 망명해 671년 大錦下라는 벼슬을 받았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沙宅紹明 등 무수하다. 왕족인 扶餘씨나 沙(砂)씨 등 백제8족은 남아 있지 않다. 백제멸망 때 항거하다 도륙 당했거나 일본에 망명하고, 당나라로 압송됐거나 성을 바꿨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탁적덕'과 관련 주목할 인물이 '사택지적비'를 남긴 砂宅智積이다. '積德과 智積'은 똑같이 '積'자가 있고 "지혜와 덕을 쌓으라"는 의미다. '善化'처럼 불교색채가 짙고 10여년 시차를 두고 왕의 장인인 좌평과 대좌평을 역임해 부자나 형제간일 수 있다. 智積은 일본에 다녀온 후 대좌평까지 오르고 관직에서 물러나 비를 남겼는데 백제 유일한 금석문이다. "갑인년(654) 정월, 나지성(城) 사택지적은 몸이 해가 가듯 쉽게 가고 달이 가듯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해 금을 뚫어 珍堂을 세우고 옥을 깎아 寶塔을 세우니, 웅장하고 자비로운 모습은(중략)"이라고 기록됐다. '인생무상'을 읊은 내용으로, 도교와 불교가 융합된 백제귀족 정신세계를 나타냈으며 사찰과 보탑을 세울 정도 막강한 부를 축적했다. 積德의 딸이 왕후로 미륵사를 세우고 봉영기를 남긴 것처럼 불교가문이 확실하다. 佐平은 고이왕(260)이 만든 백제 최고관직으로 성왕이 관산성에서 죽은 후 왕권약화와 함께 강화됐다. 부족장에서 중앙귀족으로 흡수된 귀족에서 선임됐으며, 권력분배를 통한 왕권강화와 귀족의 득세에 따라 숫자나 위치가 변했던 좌평을 통괄하는 상좌평이 설치(408)됐는데 5좌평에서 훗날 6좌평으로 정착됐다.
봉영기는 물론 각종 역사적 상황과 자료를 살펴본 것처럼 사탁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닐까?
"왕의 서자인 서동은 훤칠하고 포용력이 대단한 것을 무기로 좌평 사탁적덕 셋째 딸이 '美艶無雙'이라는 것을 듣고 금강을 따라 사비로 들어간다. 서동요를 퍼뜨려 사탁선화를 차지한 서동은 '흙처럼 쌓인 금'을 지명법사 도움으로 하룻밤에 사비궁궐이나 사탁적덕에 보내 인심을 쌓고 '왕의 핏줄'임을 내세워 결혼에 성공한다. 법왕이 변란으로 급서한 후 막강한 사탁가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어릴 적 애환과 첫사랑이 서린 익산에 자주 들린다. 사자사로 가다 사탁왕후는 가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해 미륵사를 세우고 사리호와 봉영기를 안치한다. 늙은 대왕의 건강을 기원했으나 무왕은 2년후 죽어간다"는 것이 정확한 진실이 아닐까? 자신의 텃밭인 익산에 왕궁성과 '제석사'를 세우고 천도를 꿈꾸었으나 실현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봉영기에 태자인 의자왕 언급이 없고, 의자왕 재위 중 익산이나 미륵사와 관련 내용이 없는 것 등 의자왕과 사탁가문과는 대립관계로 추정된다. 의자왕(641~660) 즉위 후 일본서기(642)에 "모후인 ‘國主母’가 죽자 왕자 '교기'를 비롯 그 여동생과 고위관리 40여명을 섬으로 추방시켰다"는 내용의 ‘국주모‘가 國母격인 정실왕후 사탁왕후였으나 아들이 없어 다른 왕후 소생인 의자왕이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632)된 것은 아닐지? 사택지적이 654년 비에 남긴 내용이나 의자왕(657)이 왕족 41명을 좌평에 임명해 실권을 빼앗은 것처럼 사탁 가문과 의자왕은 대립관계로 보인다. 이처럼 봉안기 안치 21년후 멸망한 ‘백제 佐平’이 통일신라와 고려조를 거치면서 640년후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는 ‘신라 眞平’으로 둔갑돼 사탁선화가 신라 선화공주가 되지 않았을까? 진평왕 딸이 선화공주로 사탁왕후와 별개 인물이어도 부여에서 역사왕후(사탁왕후)를 경주 설화왕후(선화공주)와 함께 선발하는 것이 후손의 의무가 아닐까? 사탁왕후 선발로 역사논쟁이 활발해져 익산을 크게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음력 1월29일 사리장엄 봉영제 및 봉영의식을 불교계나 문화원과 연계 추진하고, 충남 부여. 공주. 논산의 세계대백제전을 익산을 중심으로 호남권과 공동추진 방안도 검토돼야 한다. 부여군이 초대형 백제금동대향로를 설치하고, 모형 대향로 등을 관광상품화한 것처럼 초대형 금(동)제사리호는 물론 금동대향로까지 익산에 설치하고 봉영기 등과 함께 모형 보급도 시급하다. 7만4천명 부여군과 충남이 국비 1709억원에 지방비와 민자를 포함 6904억원을 들여 1백만평 백제문화단지를 조성할 때 31만 익산과 전북은 미륵사복원과 관광단지는커녕 석탑 해체복원도 부지하세월이고, 사리장엄만 뺏길 지 모를 부끄러운 상황이다. 심지어 "미륵사나 왕궁리 유물 등을 부여군이 완벽히 재현해 익산은 올 필요조차 없다"는 도내 역사학자 증언을 교훈 삼아 금마면에 ‘마한백제문화단지’ 건립도 검토돼야 한다./편집국장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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