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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
    논술(설.문)독서도서詩소설수필연설 2007. 9. 23. 07:0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가만히 좋아하는


    《사람들 가슴에/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사람들 가슴에/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사람들 가슴에//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사람들 가슴에/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깊이 묻다’ 중에서》
     
     

     

     

     

    세상 모든 것들은 그의 시 안에서 인격으로 대우받는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만물은 순해지고 순간과 풍경들은 가지런해진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춥지 않으냐 안부를 묻는다.

     

    김사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은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을 힘껏 붙든다.

     

    ‘뜨겁고 쓰’게 붙들어 세우지만 시인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도는 걸 어쩌지 못한다.

     

     

     

    책장에서 김사인 시인의 시집을 꺼내다가 시집 밖으로 수북하게 삐져나온 포스트잇들을 보고 깜짝 놀란다.

     

    시집에 그런 것을 붙인 적 없는 내 습관에 놀란다.

     

    시집을 읽으며 설�을, 시집을 덮으며 덮기 아까웠을, 그 두 마음이 포스트잇을 떼어내 그곳에 붙이게 했으리라.

     

     

     

    오늘 다시 시집을 펴 들며 “시를 쓰는 이는 피가 같은 시인 하나쯤 마음에 품기 마련”이라는 말을 되새기기도 했던 것 같다. ‘눈앞이 자꾸 아련해지기도 하는’ 이 시집을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닌 것만으로도 지난해 봄, 견디는 힘을 구했던 것도 같다.

     

     

     

    물경, 19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낸 김사인 시인에게 그 세월은 이 시집만큼이나 평화로웠을까.

     

    ‘좋은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시인은 그 세월 동안, 혹한의 고드름은 어찌 녹이고 어찌 떼어냈을까.

     

     

     

    김사인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아무 말도 없다.

     

    그 세월과 함께 그가 떠나보내야만 했던 존재들, 그럼에도 그의 눈가에 여전히 가만히 머물고 있는 존재들이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있다.

     

    “삶의 큰길에서 조금은 비껴나 있고 조금은 뒤처져 있는 이것들을 삶의 중심에 갖다 다시 세우는 것이 그의 시”라는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그의 시는 살아 있는 것들을 끌어다 더 살라고, 조금만 더 살자고 눈으로만 타이른다.

     

     

     

    이제 풍경은 깊어가고, 찬바람은 닥쳐올 테니 이 시집을 펴 들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안쪽에서 솟구치는 허망한 바람을 이 시로 막아야 할 것 같다.

     

     

     

    ‘…몰라 아무것도 아닌지도/돌아가 어둠 속/혼자 더듬어 마시는 찬물 한 모금인지도 몰라/깨지 못하는, 그러나 깰 수밖에 없는 한 자리 허망한 꿈인지도 몰라/무심히 떨어지는 갈잎 하나인지도 몰라//그러나 또 무엇일까/고개 돌려도 솟구쳐 오르는 울음 같은 이것/끝내 몸부림으로 나를 달려가게 하는 이것/약속도 무엇도 아닌 허망한 기약에 기대어/칼바람 속에 나를 서게 하는 이것/무엇일까’(‘네거리에서’ 중에서)



     

     

    이 시집 속에는 바람이 있다.

     

    무엇이든 다 받아낼 수 있는 눈빛과 삶이 뜨겁게 타오를 때나 형편없이 식을 때, 그 옆을 지켜 줄 온도계가 있다.

     

    그리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만히 다정한 목소리가 있다.

     

     

     

    그러니 이 가을엔 속는 셈치고 한 시인의 말을 들어야겠다. ‘강으로 가서 우리는/강으로 가서/다만 강물을 보자/취한 듯 슬픔인 듯 강으로 가서/다만 묵묵히 강물을 보자’는 그의 말을 새기러 가만히, 강으로 가야겠다.

     

     

     

    이병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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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2>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요즘은/ 바람 불면 뼈가/ 살 속에서 한쪽으로 눕는다// 꽃잎이 검은 무늬를 쓰고/ 내 눈에서 떨어져/ 발등을 깨친다// 나는 안 보이는 나라를 편애하는 것이 틀림없어/ 이 진흙별에서 별빛까지는 얼마만큼 멀까―‘진흙별에서’》
     
     

     

    잠시 걸음 멈추고 피워올린 ‘상상력의 군불’

     

     

     

    가을 밤하늘에 점자처럼 꾸욱 눌러 찍어놓은 별이 있다.

     

     길을 가다 가끔씩 그 별을 바라본다.

     

    흐트러진 숨을 가지런히 하고 골똘하게 시선을 별에 비끄러맨 채 잠자코 한참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던 별이 조금씩 살아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아, 별이 흐르는구나.

     

    별도 나도 어딘가로 글썽이며 흘러가고 있구나.

     

    보일 듯 말 듯한 그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멈춤, 그렇다.

     

     

    별을 보기 위해선 ‘멈춤’만 한 천체망원경도 없다.

     

    세상의 어떤 망원경 렌즈보다 더 배율 높은 렌즈를 일상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장석남의 시를 읽는 일은 별을 바라보는 일과 같다.

     

    그의 시 앞에서 나는 곧잘 번잡한 일상에서 놓여난 채 시간이 정지되는 황홀한 경험을 하곤 한다.

     

    뿌연 안개가 한 방울의 투명한 이슬로 뭉쳐지듯, 이 정지된 시간에 대한 집중을 통해 나 역시 간신히 한 점의 맑은 응결체를 꿈꾸게 된다.

     

     

     

    시인의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을 들고 떠돌던 문청 시절이 생각난다.

     

    ‘햇빛들이 피난을 온’ 사리포구(‘건어물들’)와 ‘풀들이 아관파천한’ 서해(‘붉은 구름’)와 ‘어미소가 송아지 등을 핥듯 마음을 핥는’ 섬진강(‘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

     

     

    캄캄했던 한 시절 내 배낭 속에 있던 그의 시집은 여행지도였고, 나침반이었다.

     

    독도법이라도 익히듯 까맣게 손때가 묻어나도록 어루만진 풍경들을 통해 나는 얼마나 큰 위안을 얻곤 하였던가.

     

    허위단심 망명정부라도 찾듯 찾아간 풍경 한 점.

     

     

    ‘군불을 지핀다/ 숨쉬는 집/ 굴뚝 위로 집의 영혼이 날아간다/ (가출)하여, 적막을 어루만지는 연기들/ 적막도 연기도 그러나/ 쉬 집을 떠나진 않는 것/ 나는 깜빡 내/ 들숨 소리를 지피기도 한다’(‘군불을 지피며’)

     

     

     

    이 시를 지피고 있는 ‘군불’은 생명의 불이다. 순환하는 들숨과 날숨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따라 몽상의 불이 타오른다.

     

    지상을 떠나 적멸에 이르고 싶은 연기의 상승 의지와 지상에 뿌리 내린 집의 하강 의지를 숨결에 비유한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시인은 언뜻 상충되어 보이는 두 의지를 자연스러운 생명의 호흡으로 받아들인다.

     

    지상의 들숨을 끝없이 들이쉬면서 날숨으로 토해지는 연기. 여기서 삶에 대한 시인의 은근한 긍정을 읽을 수는 없을까.

     

    비록 적막한 집이지만 그 속에 ‘버짐 핀 아낙과 새끼들을 품고 그냥 환한 방’(‘물방울 방’)이 되고 싶은 따듯한 마음을 더듬어 볼 수는 없을까.

     

     

     

    시의 천체에 빛나는 거개의 명편들이 그렇듯 장석남의 시는 그대로 하나의 고즈넉한 풍경이 될 줄 안다.

     

    누가 말했던가. 풍경은 해석보단 다감한 연애를 꿈꾸기 마련이라고.

     

     

     



    이 가을, 한 음 한 음 저마다 다른 음표로 떨어져 내리는 낙엽이라도 끌어 모으고 나도 상상력의 군불을 지펴봐야겠다.

     

    안으로 깊어진 아궁이에 오도카니 웅크려 앉아 굴뚝 연기가 더듬는 하늘의 별이라도 하나 꾹 눌러 찍어봐야겠다.

     

     

    손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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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3>김종삼 전집



    《희미한/풍경 소리가/툭 툭 끊어지고/있었다/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하늘 밑으로 ―‘물(통)’에서》
     
     

     

    청춘 시절엔 연애도 예쁜 옷도 여행도 관심 없었다.

     

     

    다만 너무나 시인이 되고 싶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상 앞에 앉아 밤을 새우곤 했다.

     

    그래도 어떻게 하면 시인이 될 수 있는지 몰라 무턱대고 시를 외웠다.

     

    외우기 쉬운 짧은 시가 좋았다.

     

    묘사와 상징을 알고부터, 군더더기 하나 없는 길고 가느다란 자코메티의 작품을 이해하기 시작한 순간부턴 짧고 간결한 시에 더욱 끌렸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같은 김종삼의 ‘묵화()’를 읽다가 자고 있던 친구에게 전화로 낭송해 주기도 했다. 그래도 정작 시인이 되는 길은 까마득해 보였다.

     

    시인은 아무나 되나? 공책을 새로 사곤 끼적거리던 시 대신 소설 비슷한 것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읽어 왔던 시처럼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이야기’가 있는 글들을.

     

     

     

    이미지의 눈부신 소묘를 보여 준 ‘북치는 소년’은 김종삼 시인의 대표작이다.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소년들은 혼자이며 소외돼 있다. 그러나 시인은 고독을 고독이라고,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느 날 시인은 판잣집 안에 어린 코끼리가 옆으로 누운 채 잠들어 있는 걸 본다.

     

    자세히 보니 코끼리가 아니라 15년 전에 죽은 동생이다.

     

    그래서 시인은 ‘더 자라고 둬 두자’ 하면서 ‘뭐 먹을 게 없을까’ 하고 생각한다.

     

     현실을 환상과 병치시킨 시다.

     

     

     

    현실과 환상의 병치는 슬픔을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만드는 예술적 방법이다.

     

    그의 시는 이처럼 환상의 아름다움과 비세속적인 순수에서 출발한다.

     

    평론가들이 그의 시를 두고 정의한 ‘비극적 세계관’은 긍정적 세계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런 열망은 고독한 사람, 기댈 곳 없는 사람일수록 더 강렬하게 느낀다.

     

    말러와 드뷔시의 음악을 좋아했고 커피와 술을 좋아한 가난한 김 시인이 오후가 되면 나타나곤 했던 광화문 거리를 30년 후 할 일 없이 나, 어슬렁거리다가 그의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다.

     

     



    피곤한 나는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시큰둥하게 생각한다.

     

     ‘어제의 나를 만나지 않는 날이 계속되’고 ‘연인이 생겼으나 잘 만나주지 않고’ 그러니 ‘살아갈 앞날을 탓하면서 한잔 해야겠다’라고.

     

    그러자 그의 또 다른 시가 이렇게 속삭인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사노라면/많은 기쁨이 있다고’ 어느 때의 시는 아무 때나 기대서 울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크고 넓은 가슴 같다.

     

    노랫말처럼,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네’ 혼자 흥얼흥얼거리는 사이에 집에 다 왔다.

     

    그런데 누가 나한테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는다면 어쩌나.

     

    아무래도 그건 술 한잔하면서 곰곰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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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4>도장골 시편



    《‘누구의 배고픔 속에 깃들었다가 새롭게 싹을 얻는 일, 뿌리를 얻는 일/그렇게 새의 먹이가 되어, 뱃속에서 살은 다 내어주고 오직 단단한 씨 하나만 남겨/다시 한 생을 얻는 일’ ―‘도장골 시편-(영실)’ 중에서》
     
     

     

    그를 딱 한 번 본 적 있다. 그것도 아주 잠깐 스치듯 봤다.

     

    평생 부모 그늘에서 잘 살아 온 부잣집 도련님의 새하얀 얼굴은 무엇으로 만들어냈을까?

     

    내가 알고 있는 그는 젊은 날엔 지게를 져 받은 품삯으로 밥을 해결한 적 있는 시인이다.

     

    그래서 육순이 넘은 지금도 지게를 졌던 자리가 아픈 사람, 나무의 환상통을 대신 앓고 있는 사람이다.

     

    고생을 아름다운 물방울로 승화시켜 제 얼굴을 빚은 양 그는 참으로 잘 늙어 보였다.

     

     

     

     

    작년 계간지 봄호에 실린 많은 시인의 작품 중 단연 그의 시편들이 우수하다고 느꼈다.

     

    읽고 또 읽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집에서는 가족에게, 또 내가 아는 많은 사람에게 숨이 가쁘게 읽어 주거나 외워 주며 흥분했다.

     

    그때 읽은 시들이 시집 ‘도장골 시편’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중 산골에 피어 열매를 맺는 찔레나무 열매를 노래할 때가 가장 눈부셨다.

     

    제 열매를 아름답게 가꿔 새에게 먹히기를 기다리는 찔레나무 열매인 영실(), 영실에게 새의 날개는 유목의 천막이며 새의 깃털들은 꿈의 들것이다.

     

    남의 눈에는 영어() 같겠으나 누군가의 배고픔 속에 깃드는 일은 따뜻한 포복이며 누군가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대신 다음 해에 새롭게 싹을 얻고 뿌리를 얻는 일이라고 기뻐하다니!

     

     

     

    어디 그뿐인가.

     

    집 앞 언덕배기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려 있는 것을 본 그는 생각한다.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를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놓을 수도 있을 텐데’라고….

     

    그러나 곧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라고 자위하는 시인이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소년가장이셨던 내 친정 오빠의 일생은 물론 배고픈 시대를 부모 대신 책임져야 했던 세대들의 언니 오빠 모두에게도 울컥 하는 내 가슴을 달래며 읽어드리고 싶다.

     

     

     

    또 어디 그뿐인가. 냇가의 돌 위를 걸어가는 민달팽이, 햇살의 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를 무방비로 열어 놓고 사는 민달팽이가 안쓰러워 아내가 배추 잎사귀로 알몸을 덮어주자 ‘치워라, 그늘!’ 하는 대목에서 더는 할 말이 없어야 옳다는 생각에 미친다.

     

     



    그러나 ‘몸에 부레 같은 구근을 매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신세지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벌레가 먼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제 몸에 벌레 키워’ 비록 ‘딱따구리일지라도 힘껏 안아 주겠다’는 그, ‘자신은 씨앗이 되지 못한다고 여겨 씨앗을 팔고 사는 사람’이라도 되려는 그를 이 가을에 우리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갈대도 셋이 엮이면 집이 된다는 것을 새들도’ 안다는데 누구도 쉽게 ‘간장 종지만 한 새 알의 흙집이라도 짓고’ 싶은 그에게 한 가닥 갈대일 수조차 없으니!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그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우리 처지가 새삼 남루할 뿐이다.

     

     

    박라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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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5>끝과 시작


    《스스로에게 낯설고, 좀처럼 잡히지 않는 존재./스스로 알다가도 모르는 불확실한 존재./육신이 존재하는 한, 존재하고 또 존재하는 한,/영혼이 머무를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문’에서》
     
     

     

     

    재미있는 일이다.

     

    다들 차에 내비게이션을 장착하는데 막히는 길은 더욱 막힌다.

     

    내비게이션은 가장 빨리 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기계인데, 다들 그 기계를 달았기 때문에 가장 빨리 가는 길은 가장 늦게 가는 길이 된다.

     

    내비게이션은 왜 가장 빠른 길이 가장 느린 길이 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당연히 내비게이션은 그토록 열심히 일했건만 삶은 왜 힘들어지기만 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떨까?

     

    ‘부채는 있는데, 홍조 띤 뺨은 어디 있나요?/칼은 있는데, 분노는 어디 있나요?’(‘박물관’) 가족사진첩 속에 형제들과 찍은 사진은 남아 있는데, 그 웃음은 어디로 갔을까?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집 ‘끝과 시작’을 읽으면 우리가 왜 과거나 미래에, 또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웃지 못하고, 지금 여기에서만 웃을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시인은 박물관에 가서 그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에게 박물관이란 오래된 유물을 보여 주는 곳이 아니라 100년 정도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인간을 보여 주는 극장이니까.

     

     

     

    박물관은 역설의 극장이다.

     

    전시된 부채는 그 부채로 가리던 홍조 띤 뺨을 보여 준다.

     

    날이 선 칼은 그 칼을 움켜쥐고 적을 향해 돌진하던 기사를 보여 준다.

     

    나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반가사유상을 본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조명을 받고 있던 반가사유상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들어지던 시대에 살았던 인간들은 지금 먼지가 됐노라.

     

    그런 점에서 우리는 반가사유상을 바라볼 때, 그 당시 인류 전체의 웃음과 울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아이로도 웃을 수 없고, 해골로도 웃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만 하나?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웃고 싶다면 지금 여기에서 웃어야만 한다. 세상의 모든 내비게이션, 일류 대학으로 가라던 선생님들, 성공하려면 빈둥거리지 말라고 말했던 처세서들은 다 틀렸다.

     

    행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없다.

     

    우리는 인간이므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가 될 수 없음을.’(‘작은 별 아래서’)

     

    이런 문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먼 길을 에둘러 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가장 빠른 길이다.

     

    내비게이션의 역설, 박물관의 역설이 이를 증명한다.

     

    내가 어릴 때는 국민총생산(GNP)이 1만 달러가 되면 잘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GNP 4만 달러가 되어야만 잘산다고들 말한다.

     

    이러다가 우리는 끝내 잘살지 못하리라. 심보르스카가 이렇게 노래하고 있으니.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결코 두 번은 없다.

     

     

     

    김연수 소설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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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6>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자기가 선택한 세계 속에서 온몸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보얀 알과 멧비둘기 부부의 극진한 고요 앞에 합장했네 지상의 새들이 날 수 있다는 건 자기 선택에 대한 최선일 뿐 모든 새가 날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어떤 출산’ 중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지독한 깨달음의 노래

     

     

     

    내게 시를 읽는 일은 늙은 어머니의 몸을 주무르는 일과 같다.

     

    어머니의 입에서 나직이 흘러나오는 “얘야, 아프구나, 살살 좀 주무르거라” 소리를 통해 나는 화들짝 모국어를 회복하고 다시금 글쓰기에 접근할 수 있다.

     

    듣는 이가 없더라도 모국어의 목청은 늘 간절하고 간곡하다.

     

     

     

    영혼의 문법인 모국어를 탐하는 자를 우리는 시인이라 부른다.

     

    또한 그가 목청껏 쏟아 놓은 소리를 우리는 시라고 부른다.

     

    난데없이 마당에 떨어진 편지 꾸러미를 뜯어서 읽어 보듯, 김선우의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를 읽는다.

     

    그의 시는 여전히 독하고 비리고 환하다. 그의 시가 독하다 함은 오래된 쇠북처럼 내부의 소리를 쉽게 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에 값하는 기나긴 응시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린 온몸을 열어 묵직하고도 환한 소리를 들려준다.

     

     

     

    표제작인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를 본다.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그대가 피는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시인은 오직 응시를 통해서만 사랑을 완성한다.

     

    그것은 경도와 위도가 겹치는 혼자만의 어느 절대적인 지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 ‘아욱국’에서 시인은 아욱의 푸른 독을 치대어 빨아야만 마침내 뜨거운 국으로 화하는 힘겨운 자기 정화의 과정을 보여 준다.

     

    ‘치댈수록 깊어지는/이글거리는 풀잎의 뼈/오르가슴의 힘으로 한 상 그득한 풀밭을 차리고/슬픔이 커서 등이 넓어진 내 연인과/어린것들 불러 모아 살진 살점 떠먹이는/아욱국 끓는 저녁이네 오, 가슴 환한.’

     

    그의 시에 정화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선은 감춰진 현실에 깊숙이 칼날을 들이대며, 일본군 위안부의 일생을 긴 서사시로 고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번 시집은 곳곳에 불교의 향을 피우며 좀 더 단단하고 환한 깨달음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가령 ‘칠흑 같은 흙 속에 뚜벅뚜벅 박힌 희디흰 무우(사), 이쯤 되어야 메아리도 제 몸통을 타고 오지 않겠나’가 그렇다.

     

    ‘그렇게 오는 사랑 있네/첫눈에 반하는 불길 같은 거 말고/사귈까 어쩔까 그런 재재한 거 말고/보고 지고 그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솨아아아아/온몸의 물길이 못 자국 하나 없이 둑방을 넘어’ 오는 사랑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시인의 목청이 우주로 향한다.

     

    이토록 강렬한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언젠가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시와 시인이 이토록 하나로 일치할 수 있는가 하고 놀라워했다.

     

    누군가 그를 “살아 있는 몸을 신전으로 하여 뭉클한 생명의 향연을 펼치는 샤먼”이라고 했거니와, 과연 그가 ‘시의 무당’이란 느낌을 좀처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윤대녕 소설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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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7>껍질



    《어머니가 그러셨듯 손 속에서 손을, 팔다리 속에서 팔다리를, 몸통 속에서 몸통을, 머리털 속에서는 머리털까지 빠뜨리지 않고 하나하나 빼곡하게 빼내어서 그리로 보내고 싶다 온전한 껍질이고 싶다 ―‘껍질’ 중에서》
     
     

     

     

     

    가을이 들어오고 있다.

     

    정신이 말갛게 갓 솟는 샘물처럼 차가운 계절이다.

     

    한적하고 바람이 지나가는 곳에 의자 하나 놓아두고 싶어진다.

     

    자기를 만나도 좋다.

     

    독왕독래()도 좋다.

     

    바깥이든 안쪽이든 세계를 좀 더 잘 배알()할 수 있는 시간이 가을이다.

     

    배알은 상대를 섬긴다.

     

    자기를 낮추고 맞은편을 높여 애써 찾아가 상면하는 일이 배알이다.

     

    시 쓰는 일도 배알하는 일이다.

     

     

     

    정진규 시인은 1939년 기묘생()이다.

     

    1960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니 시 쓰는 일을 고집한 게 반백()의 세월이 되었다.

     

    여전히 정진규 시인은 왕성하게 많은 시를 발표하고 세상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아기 천사께서 옹알이를 시작하신 아침 나와 모든 것들의 사이가 한결 좋아졌다 (무사통과)다 옹알이는 의미도 무의미도 다 통한다 하느님은 그것만 가르쳐 보내셨다 나의 말씀들을 잠시 반납했다’

     

     

     

    시 ‘옹알이’에는 경이와 동심이 들어 있다.

     

    배워서 짓는 언어가 아닌,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 아닌 본래 그대로의 마음에서 나온 언어가 아기 천사의 옹알이다.

     

    겉말이 없는 온몸의 언어가 아기의 말이다.

     

    시집 ‘껍질’에 담긴 시들이 아름답고 소중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천연()한 시인의 마음이 시편마다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는 것이 있으면 틀어막는다.

     

    새어 나가 줄어드는 것을 놔두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새는 게 상책이라고 말한다. ‘새지 않으면 소리가 되지 않는다 음악이 되지 않는다 노래가 되지 않는다 구멍으로 새어야 소리가 된다 막히면 끝장이다 한 소식도 들을 수 없다’(‘새는 게 (상책)이다’ 중에서). 꽉 움켜쥐는 순간 끝장이다.

     

    조금은 내주고 잃어야 중도를 얻는다.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지나치게 느슨해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는 거문고 줄처럼.

     

     

     

    시인은 작고한 김춘수 시인으로부터 ‘번외()’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모양이다.

     

    시인은 ‘번외’와 ‘등외()’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시 ‘번외’는 내가 참 좋아하는 시다.

     

     ‘(대여·김춘수 시인) 선생은 라는 말을 쓰셨다 쥐오줌풀이나 달개비꽃, 어릴 때 본 참빗, 약과틀 같은 그런 것들이 선생의 다 혼자서 등 보이고 앉아 있는, 어깨가 좀 시린 그런 들, 라는 말은 아마 멀리해 하셨을 것이다 함부로 순서에 들지 않는 것이란 말, 에는 (무량) 자유가 있으나 순서에도 들지 못한다는 말, 에는 너무 아픈 폄하가 있다’.

     

    모든 생명과 사물은 낱낱이 고귀한 종자이다.

     

    장자가 말했듯이 모든 생명은 독립적으로 자생자화()한다.

     

    칠순의 종심지년()을 한 해 앞두고 펴낸 정진규 시인의 시집 ‘껍질’은 이렇게 천연, 새는 것, 자생을 나직한 음성으로 말한다.

     

     



    빈 들처럼 빈 곳이 생겨나고 있다.

     

    깨를 떨고 난 마른 들깻단 냄새도 좋다.

     

    비워지고 마른 자리가 좋다.

     

    그곳이 침묵의 자리이다.

     

    그곳이 가을이 들어앉는 처소요, 시가 사는 곳이다.

     

     

     

    문태준 시인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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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8>이 시대의 사랑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매독 같은 가을./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한쪽 다리에 찾아온다.//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개 같은 가을이’ 중에서》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는 시인. 그러므로, 지극한 절망의 끝에서 가을을 본다.

     

    저 산의 빛깔과 바람의 온도. 낙엽의 행진처럼 쓸쓸한 풍경들이 스스럼없이 고통으로 체험될 때, 가을은 더는 아름다움으로 찬사되지 않는다.

     

    깡마른 풍경으로 사물들은 버려지고 몸이 또는 마음이 운신할 모든 길에 선언된 무효. 누구도 연결해 내지 못하는 전화선을 붙들고 애원해도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대체 무엇이 가을을 저 끔찍한 매독에 빗대게 만드는 것일까?

     

     모든 날을 마비된 한쪽 다리로 저물어 버리게 만드는 삶의 정체를, 그러나 가을은 답하여 일러 주지 않는다.

     

    다만, 이 징글징글한 삶과 정면으로 마주서게 만들 뿐. 정면으로 마주하여 ‘절망하기 위하여 밥을 먹고 절망하기 위하여’ 잠을 자게 만들 뿐(‘과거를 가진 사람들’). 도무지 어리둥절 풀 수 없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에 대해(‘이 시대의 사랑’), 가을은 흔한 답장 한 장 쓰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시 시집에게 묻는다. 우리가 모조리 가을에게 덮어씌우는 이 지독한 혐의에 대해.

     

     

     

    시집의 30쪽을 펼치면 ‘서른 살’이라는 시가 나온다.

     

    ‘피는 젤리’처럼 굳고 ‘머리칼은 철사’처럼 뻗는 시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찾아온다고 말한 서른 살.

     

    누구나 한 번씩은 거쳐 왔거나 거쳐 갈,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삶이 하나씩은 옆구리에 차고 가는 고독이라는 주머니가 더는 낭만의 보석들로 빛나지도 추억의 가옥으로 따뜻하지도 않은 때. 뒤집힌 주머니처럼 발가벗은 삶이 그 통렬함으로 스스로를 비추는 때.

     

     

     

    그때에 이르러 문득, 가을은 모든 수사를 버린다.

     

    볕 아래 펼친 듯 너무도 명징하게 드러난 현실이 매독균처럼 우리의 혈관을 흘러 다니기 시작하는 것. 그때부터 가을은 ‘아주 잘 닦여진 거울’로 놓인 것이다.

     

    거기에 대고 보면 우리는 ‘죽음 이상으로 투명해 보인다’(‘우우, 널 버리고 싶어’). 이 무서운 적나라함! 이제 통속의 거웃으로 치장하지 못하는 몸에게, 더는 비밀스러울 것도 없는 마음에게, 비로소 최승자의 시는 묻는다.

     

    사랑은 안녕하니? ‘눈물의 단두대’ 앞에 선 ‘참으로 알 수 없는 날에 시작한 치명적인 사랑’에게(‘슬픈 기쁜 생일’).

     

     



    그리고 이런 고백이 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너당신그대, 행복/너, 당신, 그대, 사랑//내가 살아 있다는 것,/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 일찍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시인의 아픈 고백이 우리의 삶을 저 바닥에서부터 되돌아보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진실의 얼굴이라는 듯.

     

    마음에 추를 달아 끝없이 추락하게 하는 ‘개 같은 가을’, 말할 수 없는 아픔이 구차하게 번져 가는 ‘매독 같은 가을’에.

     

     

     

    신용목 시인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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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9>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만큼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봄이면 제 영혼을 조금씩조금씩 털다가 사라져 버리는 나비처럼.―‘우주로 날아가는 방2’ 중에서》
     
     

     

     

    어머니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우리는 오랜 시간 시를 결핍의 시간으로 읽어 왔다.

     

    시인이 가진 트라우마에 동조하며 때론 동정하며 다른 종족의 언어, 다른 우주의 몸짓, 신비한 언어의 비늘로 둘러싸인 물고기의 비밀을 읽는 것이었다.

     

    시인과 소통한다는 것은 우주와 나만의 길을 여는 것이었음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여전히 시인들은 진화하고 새로운 세계와 미래에 대한 융통성을 갖게 해 준다.

     

     

     

    그러나 새로운 시인의 탄생이 꼭 은하계 밖 동떨어진 우주의 탄생과 같은 것은 아니다.

     

    언제나 시인의 더듬이는 현존하는 세계 안의 다른 세계를 향하고 있고, 그 안에서 작은 우주, 또는 더 큰 우주를 생성해 내곤 한다.

     

     새로운 시인을 대면할 때마다 어디서 본 듯하고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중적인 감성의 흐름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기 생소하기도 하고 언젠가 본 듯도 한 시인 김경주가 있다.

     

     

     

    ‘나 없는 빈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충혈된 빗방울이 창문에 눈알처럼 매달려 빈방을 바라본다’(‘부재중’ 중에서).

     

    그의 언어는 ‘이 세상엔 없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존재하는 또 하나의 계절이다.

     

    새로운 세계, 소우주를 어디에 펼칠 것인가 하는 것도 시인의 몫, 우리만 모를 뿐이다. 그가 제약하는 공간과 시간도 이 세상엔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분명 현존한다. 시인은 그 경계에서 줄을 탄다.

     

     

     

    시의 세계가 언제는 그렇지 않았던가.

     

    있는 듯 없는 듯.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과 보임, 존재와 부재를 뒤섞어 ‘환영’의 공간을 창출해 낸다.

     

    시간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공간 없는 곳에 시간이 없듯 시인의 시에서 흘러가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의 초침은 시계 위에 있지 않고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는’ 창문 앞에 놓여 있다. 공간 아닌 공간, 시간 아닌 시간의 시는 독자를 우주로 인도하는 듯하다.

     

    서사의 범주에 있는 나로서는 그것이 기이하고 신비로울 따름이다.

     

     

    김경주의 시를 어려워하거나 생소해하는 이도 있다.

     

    그 생소함은 시인이 창출해 낸 시공간에 있지 않을 것이다.

     

    김경주는 시인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것을 ‘봉인된 선험’에서 찾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는지. 김경주는 그것마저 우주의 한 딜레마로 여길 뿐 비애스럽지 않다.

     

    ‘문득 어머니의 없었던 연애 같은 것이 서러워지기 시작’하는 것은 오래도록 숨겨진 여성성, ‘웬만해선 시들지’ 않을 어머니의 재탄생에 가깝다.

     

     ‘밤이 되자 몰래 달력의 흰 뒷면에 눈이 큰 미미들을 그려 넣’는 누이들에게 김경주라고 왜 그 비애스러움이 없겠는가.

     

    다만 비애스러움을 말하는 새로운 방식일 뿐. 이렇게 심오한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소우주적 사실을 신문 알림이나 기사 같은 형식으로서 발설하는 위트는 분명 시가 주는 새로운 재미다.

     

    시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자, 김경주의 시를 읽어 보시길.

     

     

     


    백가흠 소설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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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0>무인도를 위하여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흐린 강물이 흐른다면/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디딤돌을 놓고 건너려거든/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디딤돌은 온데간데없고/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

    ―‘강물이 될 때까지’ 중에서》

     

     

    1979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나는 젊고 힘센 산양처럼 뿔과 발굽에서 불꽃과 먼지를 일으키며 시의 상봉, 상상봉을 내달리는 느낌을 주는 시를 만났다.

     

    문학에 뜻을 두기 전이었지만 용돈을 아껴 그런 시가 알알이 들어찬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를 샀다.

     

    시인의 첫 시집이기도 하고 내가 돈 주고 산 첫 번째 시집이며. 내가 잘못 판단했을 경우 혼자만 손해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여러 사람에게 꼭 사서 읽으라고 권한 최초의 시집이기도 하다.

     

     

    시집 표지를 넘기자 표지 안쪽 하단에 시인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었다.

     

    맨 뒷부분에 ‘자연 속에서 현대인의 내면 정황을 포착하는 유니크한 시세계를 보이고 있다’라는 표현이 내 마음에 경외감과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사전에서 ‘unique’를 찾아서 ‘유일무이한, 독특한, 진기한’이라는 뜻을 새기며 수십 번을 써보았다.

     

     

    ‘죽은 사람이 살다간 (남향)을 묻기 위해/사람들은 앞산에 모여 있습니다//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소년들은 잎 피는 소리에 취해 (산) 아래로 천 개의 시냇물을 띄웁니다. 아롱아롱 울림에 실리어 떠가는 물빛, 흰 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 나비로 날아와 앉고 저 아래 저 아래 개나리꽃을 활짝 피우며 활짝 핀 누가 사는지?//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깎이어 갑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 물 밑바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로 부서집니다./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흰 모래 사이로 피라미는 거슬러 오르고/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쪽에 모여 있습니다.’(흰 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 나비로 날아와 앉고’)

     

     

    되풀이해서 읽다 보니 눈물이 날 듯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무리 읽어도 뼈처럼 단단한 시는 물러지지 않고 식상하지도 않았다.

     

    정련된 우리말 표현과 날카로운 감각, 교과서에서 배운 내재율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노래의 울림은 그때까지 알고 있던 어떤 시보다 천연스럽게 시다웠다.

     

    그러면서 시가 그토록 나의 ‘생활()’-태어나서 살아간다는 것-에 가까워 보일 수 없었다.

     

    그러면서 시인은 상상하기 힘든 고독과 초극의 의지를 동무처럼 동반하여 어디론가 끝없이 달아나고 있었다.

     

     

    20여 년 후 만난 신대철 시인은 비무장지대와 몽골, 바이칼 호수와 알래스카, 그리고 정신과 육신의 극오지를 두루 다녀온, 육체와 정신 양쪽 모두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단단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또한 내가 마음속 깊이 경외하는 바요 동경하는 바였으니 그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득한 무인지경, 인적 끊어진 절경으로.

     

     



    ‘바닷물이 스르르 흘러 들어와/나를 몇 개의 섬으로 만든다./가라앉혀라,/내게 와 죄 짓지 않고 마을을 이룬 자들도/이유 없이 뿔뿔이 떠나가거든/시커먼 삼각파도를 치고/수평선 하나 걸리지 않게 흘러가거라./흘러가거라, 모든 섬에서/막배가 끊어진다.’ (‘무인도를 위하여’ 중에서)

     

     

    성석제 소설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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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1>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고향 언저리에서 나지 않는 열매들이 추억을 채우네/이국의 푸성귀들이 내 살을 어루네/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입술은 사랑의 노래로 헤어졌네/과거는 소멸되지 않았으나 우리는 소멸했네

    ―‘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

     

     

    누구에게나, 처음 보는 순간 이유 없이 가슴에 와 박힌 시가 있을 것이다. 1990년대의 어느 날, 허수경 시인의 시가 내겐 그랬다.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혼자 가는 먼 집’)

     

     

    ‘킥킥’이라는 장난스러운 웃음소리와 ‘당신’이라는 다감한 호칭이 서로 스미고 섞이어 만들어 내는 이 절묘한 경지라니!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도 무를 수도 없는 참혹, 당신. 사랑의 본질에 관하여 이보다 더 적확하게 해석하는 문장을 아직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2001년 허수경 시인의 새 시집을 만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독일에 머물고 있는 시인은 시인의 말에 ‘8년 만에 시집을 묶는다며 시를 쓰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한 세월이었다’고 썼다.

     

    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오랜만에 꺼내어 펴 보았다.

     

    군데군데 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다.

     

     

    ‘과거는 소멸되지 않았으나 우리는 소멸했네//오 오 나는 추억을 수치처럼 버리네/내 추억에서 나는 공중변소 냄새’(‘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 ‘술병 깨고 손에 피를 흘리며 여관에서 혼자 잠, 여관 들어선 자리 밑 옛 미나리꽝 미나리 순이 걸어 들어와 저의 손으로 내 이마를 만지다, 아픔은 아픔을 몰아내고 기쁨은 기쁨을 몰아내고 장님인 시절 장님의 시절은 그렇게 가고……’(‘아픔은 아픔을 몰아내고 기쁨은 기쁨을 몰아내지만’) ‘아무도 기록하지 않을 나, 그러나 영혼을 믿는 나, 기억들이 섬광처럼 사라지는 것을 늙은 늑대 같은 외투를 입고 내 영혼은 멍하게 지켜보리라.’(‘늙은 들개 같은 외투를 입고’)

     

     

    당시 내게는 무엇이 그리 간절했기에 그 문장들 앞에서 한동안 고개를 끄덕였던가.

     

    2001년의 내 영혼이 흔들렸던 기척들을, 늙은 늑대 같은 외투를 입은 2007년의 내가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어떤 시집을 꺼내 읽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호출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누렇고 고요한 책갈피마다, 돌이킬 수 없는 기억의 흔적들이 불완전하게 깃들어 있다.

     

     



    허수경 시인의 시는 천연하고 덤덤하고 나직하게 생의 불가사의를 응시한다. 그래서 더 아프다.

     

    아프지만, 고통의 심연을 어쩌면 천연하고 덤덤하고 나직하게 지나갈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을 품게 한다.

     

    가령 이 가을 당신이 고독 혹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면, 이런 시편 앞에서 어찌 위안받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숨죽여 기다린다//숨죽여, 이제 너에게마저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척을 내지 않을 것이다//버림받은 마음으로 흐느끼던 날들이 지나가고//겹겹한 산에/물 흐른다//그 안에 한 사람, 정막처럼 앉아 붉은 텔레비전을 본다’(‘몽골리안 텐트’)

     

     

    정이현 소설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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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2>진달래꽃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그냥 갈까/그래도/다시 더 한 번……//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서산에는 해 진다고/지저귑니다. ―‘가는 길’ 중에서》
     
     

     

     

    읽을수록 사무치는 ‘사랑의 교향악’

     

     

     

    소월 시를 읽노라면 ‘당신’이라는 말은 어찌 그리도 순하고 그윽한지, 천 년쯤은 족히 묵은 당신의 꼬리를 잡고 있는 듯하다.

     

    ‘당신’도 그쯤 되는 당신이니,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초혼’ 중에서)라고 영혼을 다해 부르는 것이리라. 그쯤은 되는 사랑, 그쯤은 되는 시를 꿈꾸게 하는 시인이 내게는 늘 소월이다.

     

     

     

    그러니까 소월의 ‘진달래꽃’을 읽노라면, 태생적으로 모든 서정시는 사랑시임을 새삼 깨닫곤 한다.

     

    그리고 목숨이고 설움이고 눈물겨운 사랑도, 시도 정작 ‘추거운(축축한) 베갯가의 꿈’(‘님에게’)이거나 ‘흩어지는 물꽃뿐 아득한’(‘산 위에’)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 사랑은 우리 삶을 지탱하고 관통하는 심지다.

     

     

     

    소월처럼 우리말의 결과 곡을 맛깔스럽게 구사한 시인도 드물다.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입말()을 오묘하게 자르고 엮어 그 여백에 정서의 계곡이라든가 의미의 허방을 만들어 놓곤 한다.

     

    소월의 시가 노래인 이유이다.

     

    그러니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개여울’)처럼, 꼭 ‘홀로이’여야 하고 ‘주저앉아’야만 하고 또 그 풀포기는 ‘파릇’해야만 하고 물은 ‘잔물’인 채 ‘해적’여야만 한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고 약속하며 떠난 사람도,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 그 약속을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으로 새겨듣곤 하는 사람도 간절하기는 마찬가지다.

     

    소월 시에서 사랑은 이별이고, 약속은 부탁인 이유이다.

     

    여자인가 싶으면 남자이고, 여기인가 싶으면 저기이고, 가는가 싶으면 오고, 오가는가 싶으면 길 복판에 갇혀 있고, 사람인가 싶으면 귀신이고, 소박하다 싶으면 애매하다.

     

    그의 언어는 그렇게 불쑥불쑥 육()과 혼()의 경계를 넘나들곤 한다.

     

    그의 언어가 사무치는 마음 어디쯤에 애틋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가을 못물가를 싸고 떠돌다 그 못물로 노을이 질 때 이렇게 노래해 본다면?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서럽다, 높아 가는 긴 들 끝에/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가을 저녁에’).

     

     

     



    저물녘이면 종종 떠올려 보는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저문다’는 고백. 노래방에서 종종 불러보는 ‘당신은 무슨 일로/그리 합니까’라는 물음. 심란할 적이면 되짚어 보는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하는 맘. 세상 모든 경계를 확장시켜 주고, 마치 노래처럼 모든 사람의 심금()이 되곤 하는 소월의 시가 새삼 그립다.

     

    이렇게 쉬운 말로, 이렇게 맑게, 이렇게 오묘하게, 이렇게 간절하게 시를 쓸 수 있다면!

     

    사랑이라면 더더욱! 시정시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초가을에 소월(), 그 흰 달이 드물게 아름다운 이유!

     

     

    정끝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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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3>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소리가/나지 않는 몸을 빛이 문고리처럼 잡고 자꾸만 흔든다/그러나 거울의 허공은 몸의 기억을 켜는 법이 없어 나는/소리의 깊이가 되어간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 있는가’ 중에서》
     
     

     

     

     

    지금도 나는 잠들기 전에 기도를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기도의 클라이맥스가 여섯 살짜리 아이들의 기도 내용과 똑같다.

     

    “제발 오늘 밤도 무서운 꿈 안 꾸게 해주세요!”

     

     

     

    수조 속의 물이 불어나 입으로 물이 들어온다든가, 들판을 달리던 중 늑대에게 물릴락 말락 하는 꿈은 최악이다.

     

    몸이 훼손되는 순간을 상상하는 건 정말 두렵다.

     

    그런데 사실 요즘 사람들치고 어떤 방식으로든 몸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이원도 몸에 예민한 시인 중 한 명이다.

     

    이원이 본 바에 의하면 사람들의 몸엔 그리움이나 추억은 들어 있지 않고 ‘녹슨 삽 하나’, ‘한밤의 검고 불룩한 TV’가 들어 있다.

     

    몸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되는 기존의 관념적인 요소들은 쏙 빠지고 즉물적이고 교환가치가 있는 상품들로 병치돼 몸을 누빈다.

     

     

     

    게다가 이 몸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채 질주한다. 질주하다 ‘거울 끝에 벽’을 만나고 결국은 ‘날계란처럼 터지’고 누구나 죽듯이 죽는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 놓고는, 시간이 어떻고, 죽어서 얼마나 불쌍한지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재미가 없다.

     

    이원은 ‘울퉁불퉁한 시간을 짝짝이로 신고’ 쇼핑몰로 몰려가는 귀신들의 뒤를 따라간다.

     

    소비하는 인간은 죽어서도 여전히 소비하기 때문에 귀신들은 쇼핑에 몰두한다.

     

     

     

    ‘고단백 눈알 통조림, 나비 2천 마리의 날개 분말 한 병, 사과처럼 머리꼭지를 사각사각 도려낼 수 있는 칼 세트, 발목을 잘라야 신을 수 있는 말굽 세트, 미로형으로 완성시키면 사방 7백 리의 숲을 걸을 수 있는 DIY 시간 팩, 5천년 묵은 뿌리를 대신할 5십년짜리 뿌리’(‘고스트월드’ 중에서)를 산다. 안고만 있어도 별에 가 닿는 눈알 통조림이라니, 물 없이 한 숟가락을 삼키면 동남쪽에 폭우를 몰고 오는 분말이라니, 너무나 짜릿하고 유쾌한 상상이다.

     

    도대체 귀신들은 밤마다 어쩜 이렇게 재미있게 노는 걸까.

     

     

     

    이원에게 삶은 꽃이면서 벼랑이고, 모니터이면서 거울이다.

     

    인간은 시리얼 번호가 찍힌 전자제품 아니면 공산품, 모니터 뒤의 검은 그림자, 상하기 쉬운 단백질 덩어리, 아니 그냥 깨지기 쉬운 날계란이다.

     

    이번 시집에는 죽음에 관한 진술이 여러 구절 보인다.

     

     ‘오해마라 잔인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내 몸이다 그래서 내 몸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나는 부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중에서) ‘죽음은 끝까지 관념이다…

     

    관념을 벗은 몸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에 사람들은 먼저 제 죽음을 만난다.’(‘몸 밖에서 몸 안으로’ 중에서)

     

     



    물신 사회의 최전선에서 문명의 온갖 달콤한 루머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몸, 문명의 온갖 테크놀로지가 통하고 잔류하는 몸, 문명의 쓰레기가 축적되어 결국 악취를 풍기고야 마는 몸을 우리도 하나씩 갖고 있다.

     

    어쩌면 몸에 대한 천착, 몸에 관한 새로운 이미지 보여 주기야말로 오늘의 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앙가주망(현실 참여)이 아닐까 생각한다.

     

     

     

    강영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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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4>불과 얼음

     


    《단풍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잣나무 숲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가지 않은 길’ 중에서》
     
     

     

     

     

     

    산속 오두막 사립문 가에 우연히 나와 자란 산초나무에 새까만 열매들이 꽃보다도 예쁘게 여물어 반짝인다.

     

    길가 쪽으로 휘어진, 가시가 많은 산초나무를 함부로 스칠 수는 없으나 그래도 모르는 척 지나쳐서 팔뚝에 가시 긁힌 상처를 가져 보고 싶은 심사는 아마도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살고 있는 프로스트의 이 소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는 소년이었다./그래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걱정이 많아지고/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 같아서/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근지러울 때/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한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자작나무’ 중에서)

     

     

     

    조석으로 바람이 선득해지면 세상은 맑아지기 시작한다. 일러 가을이다.

     

    청명한 하늘과 청명한 숲, 그 속에서 유난히 일찍 물들어 가기 시작하는 북나무나 벚나무의 잎들을 나는 어느 사상서적의 핵심 단락보다 더 깊이, 더 오래 되새겨 바라보고 싶다.

     

    청명 속으로 나타나는 그 얼굴이 신의 그것이 아니겠는지 확신하면서. 그리고 또다시 의심하면서. 일찍이 그 질문의 선구자들 중에서 프로스트는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놀라움을 선사하는 기막힌 노인이었다.

     

     

     

    ‘자연의 연초록은 찬란하지만,/지탱하기 제일 힘든 색./그 떡잎은 꽃이지만,/한 시간이나 갈까./조만간 잎이 잎 위에 내려앉는다./그렇게 에덴은 슬픔에 빠지고,/새벽은 한낮이 된다.’(‘어떤 찬란한 것도 오래가지 못하리’)

     

     

     

    떡잎의 연초록이 쉬 짙어져 제 빛을 잃는 것에서 ‘에덴’이 ‘슬픔’에 빠지는 것을 본다. 떡잎 속에서나 있을 수 있다는 낙원의 발견은 얼마나 아무렇지 않은 놀라움인가.

     

    그렇듯 삶이 절망의 바다라는 것을 보다가도 ‘샘 치우는’ 단순한 행동을 통해 큰 지혜에 이르고자(이른다가 아니라!) 한다.

     

     

     

    ‘샘 치러 나가 볼까 합니다;/그저 물 위의 나뭇잎이나 건져내려고요/(물이 맑아지는 걸 지켜볼는지도 모르겠어요)/오래 안 걸릴 거예요. 같이 가시지요.//엄마소 옆에 있는 어린/송아지를 데리러 가려고 해요. 너무 어려서/엄마소가 핥으면 비틀거리지요./오래 안 걸릴 거예요. 같이 가시지요.’(‘목장’)

     

     

     

    샘에 가라앉은 나뭇잎이나 건져내는, 별것 아닌 행위 속에서도 잃어버린 낙원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이 아슬아슬한 정신의 곡예가 바로 최대의 겸손이 아니겠는가.

     

    ‘물이 맑아지는 걸 지켜볼는지도 모르겠어요’라고 괄호 속에 숨겨놓은 저 문장 속에서 내내 나는 나오고 싶지 않다.

     

     



    ‘까마귀 한 마리/독미나리 가지를 흔들어/내 위에/눈가루 떨어지니//기분 한결/달라지고/후회스러운 하루/조금은 구해 내네.’(‘눈가루’)

     

     

     

    눈 내린 겨울 아침 나는 지난 한해살이의 후회들을 들고 숲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까마귀가 주는 맑은 눈가루를 머리에 맞아야 조금은 나아질 테니까.

     

    그때 산초나무 열매들 아직 있을까?

     

     

    장석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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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5>황금빛 모서리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이탈한 자가 문득’ 중에서》
     
     

     

    어떤 책은 20대에 읽어야 제 맛이 난다.

     

    그런 책을 뒤늦게 만나면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든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많지 않지만 내가 20대였던 시절에는 생일 선물로 시집을 주고받았다.

     

    책 앞장에 약간은 치기 어린(그러나 비장한) 글을 적어서. 3000원이 생기면 자동으로 시집이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인데 이상하게도,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김중식 시인은 “그래도 한때는 최선을 다해 방황했다”고 고백한다.

     

    그 글을 읽었을 때 나는 내가 선물했던 많은 시집을 떠올렸다.

     

    그중 어느 시집의 앞장에 나도 그런 문장을 적었던 것이다.

     

    시집을 읽은 후 나는 다시는 “최선을 다해 방황했다”는 문장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건 내가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허영이었다.

     

    나는 ‘니네들은 못 해본 단식을 나는 해보았다는 허영/나도 내가 징그러워졌다’라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내 허영은 시인의 허영에 훨씬 못 미쳤지만, 시집을 읽는 동안 나도 내가 징그러워졌다.

     

     

     

    ‘매 맞고 뒹굴수록 내 혓바닥에 독을 키우는 것만이 내가 사는 것임을 알게 하였노라.

     

    발등에는 독버섯을, 썩은 겨드랑이와 배꼽털에는 찢기면 찢길수록 놈들의 이마에 엉기는 거미줄을 걸어놓게 하였나니 나를, 더욱, 그늘지게 해다오.’(‘(성)에서’) 누구나 자기 몫의 삶의 무게가 있다.

     

    그림자처럼, 삶의 무게는, 낮게 포복한 채로 들러붙어 있다.

     

    우리가 읽고, 웃고, 울고, 달리고, 노래하는 이유는 그 무게에 짓눌려 질식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기꺼이 자기 몫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을 짊어지는 시인이 있다. 그는 말한다.

     

    더욱, 더욱, 그늘지게 해 달라고.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그늘이 된다.

     

     

     

    세상 모든 것의 그림자를 껴안고 그는 사막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같이 헤매자는 연대감’을 위해 ‘낙타를 두 번 죽인’다.

     

    그러고는 ‘제 삶을 (방목)시킨 유목민’이 된다.

     

    ‘살아 있음의 유일한 증거는 우리가 밖으로 피해 버린 사이에 안에서 불타버리곤 하였’으니까. ‘사람을 벗어나면 외롭지 않’으니까.

     

    그러니 스스로 유목민이 되어 ‘모래를 구워 만든 (문)을 향하여’ 걸어갈 수밖에. 가끔 그림자를 만들어 주는 새를 보고 ‘발목이 퇴화할 때까지’ 날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가 시집을 내고 오랫동안 침묵했을 때, 나는 ‘버터플라이 (영법)’으로 사막을 가는 고행자를 떠올리곤 했다.

     

    사막은 넓으니 아직 그가 돌아오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그러나 어서 돌아와 이런 말을 더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말이 안 통해서 병 대신 병적인 것, 아픔 대신 아픔적인 것, 애인 대신 애인적인 것에서 우리는 위안받는다/말이 안 통해서 우리는 상처 없는 아픔과 절망 없는 고통을 하고 싶어 한다.’(‘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엄살 피우기 싫어서, 벽을 바라보며 독백하기 싫어서, 나는 그의 시들을 기다린다.

     

     

     

    윤성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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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6>그늘과 사귀다

     


    《한번 죽어본 것들을 만난 적이 있으신지 돋아나는 새잎 같은 푸름도 시들어 떨어진다는 걸 알고도 피어나는 아아, 알고도 살아나는 어여쁘고 천진한 죽음을 맞은 적 있으신지. ―‘청명’ 중에서》
     
     

     

     

     

     

    아버지를 묻고 잇달아 형을 태운 한 사내가 있다. 오래된 그늘에 끌려들어가 죽은 자들을 골똘히 생각하는 사내가 있다.

     

     

    그에게 와서 죽은 이들, 죽어서도 끝끝내 떠나지 않는 이들. 살아남은 사내는 번뜩이는 그늘과 같은 죽음에 잠기는데, 망자들은 죽은 사내의 몸속에 떵떵거리며 살아간다.

     

    사내는 생각한다. 죽은 자들은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들어와 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 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떵떵거리며’)이라고.

     

     

     

    호두나무 아래 앉은 이 사내, 부모 살았을 때 잘하라는 말을 생각한다. 살았을 적에 잘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죽은 자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보지 못하는데.

     

    산다는 것은 ‘고락을 한데 버무려 짠 단술 한 모금 같은 것’인데. 사랑한다는 것은 ‘먼지로 흩어진 것들의 흔적 한 톨까지도 끝끝내 기억한다는 것’인데. 잘한다는 것은 ‘죽은 자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이 사내, 윙윙거리는 울음소리로 죽은 자를 몸속에 받아들이려 한다.

     

     

     

    그런데 살아남아 음복하는 이 사내의 낯빛은 왜 이리 파리하며, 두 손은 왜 까맣게 식어 가며, 두 다리는 오래 매 맞은 사람처럼 삐거덕거리는가.

     

    늙고 병든 사내에겐 진정 휴식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목련나무 아래 햇볕을 쬐고 있는 낡은 의자처럼. 목련꽃 가슴팍에 받아 달고 ‘의자에 앉아 쉬는 의자’처럼. 의자에게도 의자가 필요한 법이니까.

     

    죽은 자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은 죽은 자와 함께 쉬는 것일 수도 있으므로.

     

     

     

    ‘죽은 자가 모두의 기억 속에서 깡그리 죽어 없어진 뒤에도 호두나무 그늘을 갈구리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가 바지에 똥을 묻힌 채 헛간 앞에서 쉬던 생전의 그를, 젖은 날 마당을 지나가는 두꺼비마냥 뒤따라가 그의 자리에 앉아 더불어 쉬는 것.’(‘호두나무 아래의 관찰’)

     

     

     

    ‘그늘과 사귀다.’ 누가 과연 죽은 자와 더불어 쉬고 죽음과 사귀려 하겠는가.

     

    아비를 묻고 형을 태우고 난 후, 광릉 숲 어느 그늘에 앉은 시인이라면. 숲에 서서 나무들의 만 갈래 찢어진 손을 보며 ‘껴안는다는 것’의 의미를 파악한 시인이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시인 이영광은 죽음이 배어 불룩한 무덤을 껴안고, 기억 속에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망자를 껴안고, 강철 이빨로 물고 뜯고 사생결단하는 고통의 배후를 껴안는다.

     

     

     

    ‘껴안는다는 것은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숲’ 중에서)

     

     

     



    이 가을, 떨어지는 낙엽과 아침 찬바람에 늙음을 떠올린다면, 혹은 죽음을 떠올린다면, 기꺼이 그 죽음의 그늘들과 사귀어 보는 것은 어떨는지.

     

    호두나무 그늘에 앉아 죽음과 함께 쉬어 보는 것은 어떨는지.

     

    기어이 골다공증에 걸리고 말 것을 알면서도 바람을 통과시키는 저 시인처럼.

     

     

    천운영 소설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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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7>먼 바다

     



    《가을, 노적가리 지붕 어스름 밤 가다가 기러기 제 발자국에 놀라 노적가리 시렁에 숨어버렸다 그림자만 기우뚱 하늘로 날아 그때부터 들판에 갈림길이 생겼다. ―‘들판’ 중에서》
     
     

     

     

     

     

    ‘내리는 사람만 있고/오르는 이 하나 없는/보름 장날 막버스/차창 밖 꽂히는 기러기떼,/기러기뗄 보아라/아 어느 강마을/잔광() 부신 그곳에/떨어지는가.’(‘막버스’)

     

     

     

    박용래의 시 전집 ‘먼 바다’와 만난 것은 20대 초입이었다.

     

    동인천역 부근 대한서림에서 2800원을 주고 산 뒤 이 시집은 마음 귀퉁이에서 한 번도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서울살이를 시작하면서 숱하게 전전했던 변두리의 빈방에서 저녁 무렵 펴들고 읽기 시작하면 고향집 창호지에 가득한 저무는 햇살이 떠오르곤 했다.

     

    한 시인이 평생을 쓴 시 치고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채 300쪽이 되지 않는 이 시 전집은 어느새 책등이 누렇게 변해 버렸다.

     

    그러나 그 세월만큼 이 시집의 시들 속에는 젊은 날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

     

     

     

    박용래의 시적 특징으로는 토착 정서나 한의 정서, 소멸해 가는 세계에 대한 연민 등이 거론된다.

     

    이러한 그의 시세계는 ‘가을’과 ‘저녁’ ‘기러기’로 나타난다.

     

    이 시어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긴밀히 연결돼 서러운 풍경으로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생명의 절정에서 죽음으로 조락해 가는 계절인 가을 저녁, 황혼 속에서 해는 하늘의 중심에 떠 있다가 서서히 사라져 간다.

     

    그 가을 저녁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떼. 박용래의 시에 나타나는 상실감의 밑자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시인이 15세 때 죽은 누님과의 이별이다.

     

    시인의 마음속에서는 늘 홍래()라는 이름의 기러기가 날아오른다.

     

    시인은 그때의 정황을 산문집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의 한 귀퉁이에 적어 놓았다.

     

     

     

     

     

    “누님은 만혼이었다. 스물여덟이던가, 아홉, 선창가 비 뿌리던 날, 강 건너 마을로 시집갔다.

     

    목선을 타고. 목선에 오동나무 의걸일 싣고 그 무렵 유행이던 하이힐 신고 눈썹만 그리고 갔다.”

     

     

     

    목선을 타고 강 건너 마을로 시집갔던 홍래 누님은 1년도 못 돼 세상을 떠났다.

     

    중학교 2학년이던 시인은 울지도 못하고 시퍼렇게 얼어붙은 강심만이 원망스러웠다.

     

    ‘우렁 껍질/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바닥에 지는 햇무리의/(하관)/(선상)에서 운다/첫기러기떼.’(‘’)

     

     



    그래서 이 예민한 소년이 오십이 되어서도 자신을 ‘오십 먹은 소년’(‘먹감’)이라고 했던가.

     

    월명사는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제망매가’를 불러 극락으로 가라고 기원했다지만, 시인은 오십이 되어서도 죽은 누님을 떠나보내지 못해 소년으로 남아 있다.

     

    내리는 사람만 있고 오르는 사람은 없는 보름 장날 ‘막버스’를 타고 가며 시인은 차창 밖에 꽂히는 기러기떼를 본다.

     

    그리고 누님이 시집가는 날처럼 기러기가 무사히 강마을 잔광 속으로 내려앉기를 소망한다.

     

     

     

    박용래의 시에는 탕아()의 가슴에도 가족의 소중함을 아로새기는 간절함이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을 펼쳐들면, 눈물 많은 아버지 무릎을 베고 창호지에 스미는 저무는 가을 햇빛을 바라보는 듯하다.

      박형준 시인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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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8>흑백


    《비껴 달아나는 거대한 침묵이여/사과란 사과는 다 쏟아지는 눈짓이다/불쌍한 실내극의 벼랑이여/반가워라 태풍이 온다/도시는 놀라워라 ―‘가을을 부르다’ 중에서》
     
     

     

     

     

    가을은 그 어떤 사건으로도 기록되지 않는다.

     

    비와 바람과 흔들리는 잎사귀와 청명한 햇빛은 저 홀로 방만하게 창궐하다 스스로 사멸한다.

     

    그 누구의 고통이나 기쁨 따위에도 가을은 무심하다.

     

    하강하는 바람의 온도를 따라 그저 마음의 깊은 자리가 욱신욱신 쓰라려 올 뿐,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은 이미 마음을 떠난 지 오래다.

     

     

     

    하지만 변화하는 공기는 연방 사람을 찌른다. 내용 없이 모종의 기미()들만 늘어선 계절의 초입에서 시인이 뭔가를 계속 끼적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탓이다. 침울한 가슴은 늘 세상만사에 대해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쉼 없는 본능처럼 계속 씌어질 수밖에 없는 어떤 말들. 또는, 의미를 고의적으로 상실한 말들의 사사로운 흔적과 처연한 시늉들. 그것들이 ‘불쌍한 실내극’처럼 내면의 텅 빈 여백을 죄여 올 때, 이 뻔하게 통속적인 도시가 새삼 ‘놀라워라’.

     

     

     

    이준규는 말의 조각난 뼈들을 긁적여 괴이한 언어적 도해로 풀어내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일상 화법, 나아가 한국어 일반 구문에 대한 의도적인 무지와 무시 속에서 자족적으로 씌어진다.

     

    전혀 거창하지도 의미심장하지도 않은 사물과 말들이 수평적으로 이어지면서 기묘한 효과를 낳는다.

     

    모종의 추상화 같기도 하고 애당초 음계 따위 파괴해 버린 미니멀리즘 음악 같기도 하지만, 계속 들여다보면 결국 그림도 음악도 아닌 그저 언어로 긁적여진 여지없는 시일 따름이다.

     

    그것도 그 어떤 언어적 세공술의 결과물보다 더 시의 본령에 가까운 원초적인 몸짓에 가깝다.

     

     

     

    ‘개 짖는 소리에 놀라는 잎사귀’처럼 미세하게, 그러면서 ‘비껴 달아나는 침묵’의 모가지를 꺾어 숨은 말을 토해 내려는 듯 집요하게 이 거창한 세계가 놓치고 있는 기미들을 포착하는 언어들.

     

    정작 그것들은 완결된 형상의 모사나 일관된 사유에 관한 토로가 아니었기에 육체의 첨단에서 자연 발생한 신음 소리를 닮았다. 때로 끔찍하고, 자주 처연하다.

     

     

     

    그 처연한 가을의 초입에서 시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슬픔은 어떻게 오는가 묻지 않았지만/풍광을 잡으러 떠나는 헛손질에서 숨이 곧 멎는다’고.(‘가을이 또’ 중에서)

     

     



    그러나 이 모든 ‘헛손질’의 무모한 반복 끝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바람 끝에 묻어오는 세계의 풍문들은 모종의 사건들을 암시하고 계시하며 그들만의 자족적인 가을걷이에 나설 뿐, ‘불쌍한 실내극의 벼랑’에서 절치부심하는 한 고독한 시인의 내면 따위 안중에도 없다.

     

    그건 슬픈 일이지만, 이 무정한 가을을 버텨 내려면 슬픔조차 유희가 되고 따뜻한 밥상이 되어야만 한다.

     

    이준규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 저 혼자만의 무연한 깊이 속에서 완전히 다른 풍경이 돼 버리는 이 세계의 허술한 거짓들을 깨물고 짓이긴다.

     

    그에겐 세상의 모든 계절이 노쇠한 가을에 불과하다.

     

    속엣말 감추고 뻔하게 마주 웃는 아랫녘 윗녘의 만석꾼들을 닮은 가을이여, ‘차를 마시겠는가/차를 마시겠다’(‘아’ 중에서).

     

     

    강정 시인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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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9>달의 이마에는…


     


    《일단 밖으로 나와야 집안 사정도 안다. 안 나오면 집안 사정이랄 것도 없다. 수신제가니, 부모봉양이니 물에 빠져 입만 남은 것들의 짓거리. 일단 바깥으로 나오면 바깥일도 집안일이다.

    ―‘일단 나와 봐야 안다’ 중에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 뉘로부터 유래했는지 알면 가 따져 묻고 싶다. 왜 하필 콕 집어 가을이었느냐고.

     

    독서의 계절은 숨 쉬는 족족이어요, 뉘라도 그리하였더라면 말 잘 듣는 착한 우리들 책 팔고 사고 읽는 재미 지금보다 훨씬 쏠쏠도 하였으련만, 내 식대로 말하자면 가을은 ‘일단 밖으로 나와야’ 하는 계절이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말은 또 얼마나 살쪘는지 ‘속속들이 내부를 알고 있는 네 방에서’ 일단 나와 봐야 아는 계절이다.

     

     

    해서 나는 이 가을, 책을 집어 던지고 대신 그 손으로 테니스 라켓을 집어 든 채 내 방에서 일단 나와 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개인 교습을 신청한 지 며칠 뒤 첫 수업에 운동화 끈 단단히 조여 매고 집을 나서는데 어럽쇼, 이거 가을비였다.

     

    김 팍 새서 풀 죽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쉬운 러닝도 머신도 다 놔두고 왜 하필 테니스였나 싶었다.

     

    그때 시인 이성복이 생각났다.

     

    ‘시가 안 될 땐 내 시에서 나와 테니스를 쳤다’니까 나도 따라 그랬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이성복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은 형식이 좀 별나다.

     

    시인이 외국시를 읽다가 ‘아 왔구나’ 하는 그 감()을 매개로 발화된 시편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술잔을 입에 대면서 내 그대를 쳐다보고 한숨짓는다’라는 예이츠의 시 한 토막을 수렴하여 이성복은 이렇게 발산한다.

     

    ‘사랑은 어떻든 견디기 힘든 것,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환영 나온 차우셰스쿠를 포옹하듯 서로 딴 방향을 바라보는 것.

     

    부둥켜안은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어떻든 견디기 힘드는 것’ 중에서). 이를 두고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시라 하면 시인이 상스럽다 버럭 그러실까, 음 난 좋기만 한데….

     

     

    해서 나는 이 가을, 다시금 그의 시집을 펼친다.

     

    이 문장 너머 저 문장 아래 연필로 흐릿하게 밑줄 긋고는 느낌표 쾅! 밀어 넣던 망치질의 흔적, 그 행복한 항복의 순간이 참으로 여럿이었다.

     

    ‘이 새낀 때릴 데가 없네’라는 구절 아래 내가 패러디한 한 구절이 눈에 띈다. ‘이 시는 버릴 데가 없네’… 그래, 이 마음이야말로 숨길 수 없는 질투겠지.

     

    한 사물이 시의 어떤 발상으로 새롭게 포착될 때 그는 촘촘히 거미줄을 치고 숨죽여 기다리는 한 마리의 거미를 닮았다.

     

    매운 만큼 정교한 바느질 솜씨로 침묵 속에 한복을 짓는 침선장(), 그도 제격이다. 가만있어 보자, 이거 모두 나와의 비교에서 비롯됨이네.

     

    시가 안 될 땐 내 시에서 나와 남의 시나 읽으라던 이성복 시인의 말을 따라도 내가 너무 따랐나.

     

     



    11월에 시집을 가는 막내 동생이 막바지 정 떼기로 엄마와 하루하루 싸움이다.

     

    노처녀 큰언니인 나는 마주한 채 참견은 주제넘고 해서 문자나 넣는다.

     

    ‘일단 밖으로 나와야 집안 사정도 안다’ ‘뭔 소리여’ ‘시여’ ‘그니까 뭔 말이냐고’ ‘효도하라고 이것아’ ‘웃겨, 언니나 좀 잘하시지’ 아, 맞다.

     

    그래 나는 나나 잘해야 한다.

     

    김민정 시인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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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20>새벽의 삼종에서…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나무병에/우유를 담는 일,/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밀 이삭들을 따는 일,/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떠나지 않게 하는 일,/숲의 자작나무들을/베는 일,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중에서》

     

     

    1975년판 ‘프랑시스 잠 시선’에는 깨알 같은 활자판 해설이 ‘나는 괴로워하고 사랑하나이다’라는 말과 함께 시집 입구에 실려 있다.

     

    곽광수 번역의 이 시선을 처음 보았을 때 시보다 먼저 해설을 읽었다(1995년 개정판이 나오면서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 해설에 매혹되었다.

     

    가스통 바슐라르라는 철학자의 이름을 처음 본 것도 그때였다.

     

    1970년대 남프랑스 작은 대학 도시의 한국 유학생이 ‘진리로 보이는 그 어떤 것’과 조우하는 순간의 감동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해설을 다 읽은 후에도 프랑시스 잠의 시편들보다는 먼저 서문을 읽었다.

     

     

    ‘주여, 당신은 사람들 가운데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괴로워하고 사랑하나이다.

     

    나는 당신이 주신 목소리로 말했고, 당신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 그들이 내게 전해 주신 말로 글을 썼습니다.

     

    나는 지금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는 가겠나이다.

     

    삼종()의 종소리가 웁니다. 프랑시스 잠’

    기도문 같은 서문을 처음 읽었을 때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어머니를 잊고 지낼 때, 내가 글을 쓰는 일보다는 다른 일에 마음을 쏟을 때, 내 태생이나 내 모국어의 연약한 기반에 좌절을 느낄 때…. 조롱당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 이 서문을 펼쳐 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를 읽곤 했다.

     

    마음이 곤혹스러울 때마다 프랑시스 잠의 눈부신 보편성이 내 마음속의 모든 평범함의 후광이 되어 주곤 했다.

     

     

    잠의 시들은 일부러 쓴 시가 아니다.

     

    그렇다고 시가 잠에게 온 것도 아니다.

     

    그는 그의 본성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사랑하는 것들을 썼다.

     

    그래서 ‘우리 집 식당에는 윤이 날 듯 말 듯한/장롱이 하나 있는데, 그건/우리 (대고모)들의 목소리를 들었고/우리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우리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은 것이다/그들의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장롱/그게 암 말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그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라고 쓸 수 있으며, ‘나는 프랑시스 잠/지금 (천국)으로 가는 길이지(…) 푸른 하늘의 다사로운 동무들이여/날 따라들 오게나(…) 내 아끼는 가여운 짐승들이여’(‘식당―아드리앵 플랑테 씨에게’ 중에서)라고 당나귀에게 속삭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시 어디에도 정열이나 치열하게 부서져 깨지는 파탄의 기미를 엿볼 수 없다.

     

    모든 누추한 일상을 수납한다.

     

    비탄과 좌절을, 탄생과 소멸을 고요히 받아들인다.

     

    경탄과 다정함과 당나귀와 함께 천국에 가겠다는 천진함이 넘쳐흐른다.

     

    무엇이라도 제 몫이 있고 빛이 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평온을 바라는 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시집이다.

     

     


    신경숙 소설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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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가을날의 추억

    ‘가을, 노적가리 지붕 어스름밤 가다가 기러기 제 발자국에 놀라 노적가리 시렁에 숨어버렸다 그림자만 기우뚱 하늘로 날아 그때부터 들판에 갈림길이 생겼다.’(박용래 ‘들판’ 중에서)
     

     

     

    ‘책 읽는 대한민국’의 2007년 일곱 번째 시리즈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이 22일 막을 내렸다.

     

    이번 시리즈는 가을에 잘 어울리는 책으로 ‘시집’이 꼽히면서도, 요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지 않는 현실을 염두에 뒀다.

     

    특히 학자와 출판인 등에게 책을 추천받던 다른 시리즈와 달리, 시인과 소설가가 시집을 골라서 소개하는 형식을 택했다.

     

     

     


    문청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 시집을 소개하는 신용목 시인의 문장은 단정하면서도 곳곳에서 열정이 배어 나왔다.

     

    정끝별 시인은 김소월의 아름다운 사랑노래 ‘진달래꽃’을 가을에 읽는 묘미가 어떤 것인지 알려줬다.

     

     

     

    작가의 내밀한 추억을 듣는 즐거움도 있었다.

     

    서울살이를 시작했을 때 숱하게 전전한 변두리 빈방에서 시인 박형준 씨는 저녁마다 박용래 시인의 ‘먼 바다’를 펼쳐 읽었다.

     

    너무나 시인이 되고 싶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상 앞에 앉아 밤을 새웠지만 조경란 씨는 결국 소설가가 되었다.

     

     

     

    시인이었다 소설가로 전업한 작가들의 글도 흥미로웠다.

     

    대학 1학년 때 신대철 시인의 ‘무인도를 위하여’를 몇 번씩 읽었다는 소설가 성석제 씨의 글에서 몇 년 뒤 시인으로 문단에 처음 이름을 알리는 젊은이가 그때 얼마나 들떴을지가 그려진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집 ‘끝과 시작’에 대한 소설가 김연수 씨의 담백하면서도 시적인 리뷰를 보면 시인으로 시작한 그의 문학 이력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심보르스카의 시집도 그렇지만, 소설가 신경숙 씨가 권하는 프랑시스 잠의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 장석남 시인이 소개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불과 얼음’ 등 해외 시인들의 작품이, 국경을 넘어선 시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일깨웠다.

     

    소설가 백가흠 씨가 소개한 김경주 시인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강정 시인이 권하는 이준규 시인의 ‘흑백’ 등 젊은 신인들의 작품에 대한 꼼꼼한 감상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성과였다.

     

     

     

    내달 5일부터 ‘뜨거워지는 지구’

     

     

     

    2007년 여덟 번째 시리즈는 11월 5일부터 시작합니다. 시리즈의 제목은 ‘뜨거워지는 지구’로 지구 온난화와 이상 기후의 문제점을 진단합니다.

     

    김지영 기자

     

     

     

     

     

     

     

     

     

     

     

     

     

     

     

    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시선 20 목록(게재 순)
    시집 저자 필자
    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 이병률 시인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장석남 손택수 시인
    김종삼 전집 김종삼 조경란 소설가
    도장골 시편 박라연 박라연 시인
    끝과 시작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김연수 소설가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윤대녕 소설가
    껍질 정진규 문태준 시인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신용목 시인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 백가흠 소설가
    무인도를 위하여 신대철 성석제 소설가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허수경 정이현 소설가
    진달래꽃 김소월 정끝별 시인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이원 강영숙 소설가
    불과 얼음 로버트 프로스트 장석남 시인
    황금빛 모서리 김중식 윤성희 소설가
    그늘과 사귀다 이영광 천운영 소설가
    먼 바다 박용래 박형준 시인
    흑백 이준규 강정 시인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이성복 김민정 시인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 프랑시스 잠 신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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