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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 추리소설 20선]논술(설.문)독서도서詩소설수필연설 2007. 7. 7. 07:08
[한여름 밤의 전율, 추리소설 20선]<1>단 한 번의 시선
조각난 사건들, 퍼즐처럼 하나씩…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필연적인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다.
평범한 사람들도 우연한 사건 하나 때문에 소설보다 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있다.
혹은 그 순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선택한 사람만이 아니라 이 세계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조각조각 나 있는 우연들이 모아지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세계가 완성된다.
그 우연을 모아 절묘하게 배치하고 엮어 숨 막히는 긴장감을 끌어내는 장르가 바로 스릴러다.
할런 코벤의 ‘단 한 번의 시선’은 추리소설이자 탁월한 스릴러다.
검사보인 스콧 덩컨은 전설적인 킬러 몬티 스캔론에게서, 화재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한 누이를 그가 죽였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3개월 후, 단란한 가정의 주부인 그레이스는 사진관에서 찾은 가족사진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남편 잭의 젊은 시절로 보이는 단체사진을 보여 주자, 그날 밤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북한 출신의 범죄자 ‘우’는 미팅 사이트에서 찾은 남자의 집에 가서 그를 반신불수로 만들어 버린다.
이 책을 펼치면 이렇게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것 같은 사건들이 줄지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익숙한 스릴러의 독자라면, 그 우연한 사건이 잘 짜인 퍼즐의 한 조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초반의 단서를 기억하면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조각을 맞춰 본다.
무엇과 무엇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를 찾아 헤매면서 그림이 조금씩 맞춰질 때마다 전율이 느껴진다.
스콧은 자신의 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을 찾아다니고, 그레이스는 남편의 과거를 찾아다닌다.
일단 독자에게 주어진 과거의 사건은 하나다.
스물한 살의 그레이스는 지미 엑스 밴드의 공연장에 갔다가 한 마약중독자가 총을 난사하는 바람에 우왕좌왕하던 군중에게 깔려 크게 다쳤으나 살아났다.
그 사고에서는 무려 18명이 죽었다.
그레이스의 이런 과거는 스콧의 누이와 잭의 과거와 겹쳐지게 된다.
그들에게 이어진 선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너무나도 명료한 교차점이 존재한다.
할런 코벤은 그 교차점에 이르는 과정을 아주 탁월하게 구성해 낸다.
할런 코벤은 미국의 3대 미스터리상으로 꼽히는 에드거상, 셰이머스상, 앤서니상을 모두 수상한 유일한 작가다.
이 책 ‘단 한 번의 시선’은 우연한 것,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의 중첩을 통해서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사건으로 좁혀져 가는지를 현란한 속도로 그려 내고 있다.
독자를 빨아들이는 기교라는 점에서 이 책은 스릴러의 정점을 보여 준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서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장면은, 저자의 기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탄성을 내지르게 한다.
이 책이 개인의 비극적인 우연들을 통해 세상의 비극성을 보여 주고는 있지만 그 시각이 협소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협소함이 오히려 이 책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개인에게 부여된 비극은 때로 세상의 논리와 법칙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김봉석 영화평론가
동아일보---------
[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2>방각본 살인사건
조선시대 연쇄살인에 숨겨진 정치음모사실과 허구를 뒤섞으며 탄탄한 역사 지식에 추리 소설의 기법을 가미한 역사추리소설이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매슈 펄의 ‘단테클럽’,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모두 수수께끼 같은 살인사건을 미로게임처럼 풀어나가는 재미와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놀라운 진실, 그리고 당시의 사회 정치 종교 미술 문학에 대한 심도 있는 지식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 대표적 역사추리소설이다.
우리에게는 왜 그런 수준 높은 역사추리소설이 없을까 탄식하는 독자들에게 ‘방각본 살인사건’은 반가운 책일 것이다.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던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과 그 사건에 뛰어든 젊은 의금부 도사,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음습한 비밀과 정치적 음모는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러나 소설과 소설 쓰기를 살인사건의 직접적 원인으로 설정하고 문학과 정치를 능숙하게 뒤섞음으로써, 작가는 더욱 세련된 지적 즐거움의 세계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당대 조선사회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도 작품에 무게와 신뢰를 부여해 주며 풍부한 교양과 각별한 재미를 제공해 준다.
소재만 가지고는 자칫 당파싸움과 권력을 둘러싼 암투에 대한 통속적인 이야기로 그쳤을 수도 있는 이 소설을 작가는 뛰어난 예술적 장치와 심도 있는 주제의식을 통해 한 편의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변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중 돋보이는 것은 작가가 당시 혁신적인 신(新)장르인 ‘소설’에 대한 지배계급의 배척과 서민의 매료를 대비시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대설(大說)-소설(小說), 정통-비정통, 북벌파-북학파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서 한 양반 고위 관리는 소설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양반과 중인과 천민이 한데 어울려 놀고, 먹고 마신다는 게야. 그 만남을 아름답다 이르고 그 사귐을 귀하다 여기는 매설가도 있다더군. 세상을 미혹하는 데 소설보다 더 좋은 수단이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방각본 살인사건은 오늘날 우리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우리는 국가의 미래보다 사적인 한풀이에 매달려 있으며, 명분파와 실리파, 수구파와 개화파, 민족주의자와 세계주의자 사이의 이분법적 반목과 대립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소외된 서얼 출신 개화파 서생들이 권좌에 올라도 어쩌면 똑같은 한풀이와 정적 제거를 되풀이하고, 결국은 자신들이 그렇게도 비판하던 수구파 민족주의자로 변신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잘못된 역사는 결국 되풀이된다. 방각본 살인사건은 바로 그런 깨우침을 주는 소설, 한번 펼치면 덮을 수 없는 소설, 역사와 교양이 풍부하면서 박진감 넘치는 소설이다.
김성곤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동아일보-----------------
[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3>펠리컨 브리프
공포는 강렬한 호기심을 동반한다.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순간의 그 짜릿한 긴장감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피서지의 어느 해변에 앉아, 혹은 잠 못 드는 한여름 밤 침대에 엎드려 추리소설을 읽는다.존 그리샴의 ‘펠리컨 브리프’는 “신경이 피부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긴박감을 느끼게 하는 추리소설이다.
발간 당시 2년 연속 전미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이 소설은 그를 할리우드 감독들이 뽑은 흥행의 보증수표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리샴의 최근작들을 보면 이 작가의 스타일이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을 앞둔 코치와 선수들의 증오와 사랑을 그리기도 하고, 여러 국가를 상대로 한 첩보 스릴러물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법정 스릴러’라는 자신만의 장르로 차근차근 긴장의 완급을 조절하며 독자들을 사로잡았던 초기 소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미약한 주인공이 조력자와 함께 거대한 권력 기관을 상대로 힘겹게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들은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펠리컨 브리프’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 소설에서는 명석한 두뇌의 법대 여학생 다비 쇼가 기업가와 백악관이 연루된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추정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 뒤 다비 쇼가 암살자에게 쫓기면서도 정의로운 기자 그랜섬과 함께 이 사건의 실체를 밝혀 가는 과정을 박진감 있게 그리고 있다.
작가는 대법원의 판사 로젠버그, 다비 쇼의 스승이자 연인인 캘러헌 교수, 희대의 살인범 카멜, 대통령과 그를 조종하는 비서실장 콜, 미국 연방수사국(FBI), 중앙정보국(CIA) 등으로 장(章)마다 시점을 옮겨가면서 전체적인 사건을 빠르게 전개해 나간다.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살인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다비 쇼는 필사적으로 옷과 머리 모양을 바꾸고, 호텔과 행선지를 변경하면서 목숨을 내건 두뇌게임을 벌인다.
그녀가 조력자로 위장한 살인범의 손을 잡고 걷는 장면에서는 우리도 숨을 쉴 수가 없다.
다비 쇼란 인물은 너무나 완벽하기에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매력적이기도 하다.
정치계, 법조계, 경제계는 부패했으며, 환경과 인간, 법과 정의 모두 위협받고 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다비 쇼나 그랜섬 기자와 같은 존재를 갈망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장면을 보는 것은 언제나 통쾌하다.
추리소설의 매력은 무엇보다 독자로 하여금 책에 온전히 몰입하여 단숨에 읽게 하는 흡입력이다.
그 흡입력은 범인을 밝혀 내는 고난의 과정에 독자 스스로가 참여하고 있다는 일체감에서 나온다.
이 일체감의 근원은 진실에 대한 갈망이다. 현실의 수많은 사람은 진실이 결국 밝혀지리라는 기대를 안고 살아간다.
조윤경 이화여대 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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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 추리소설 20선]<4>비숍살인사건
미스터리 황금시대를 구축한 최대 공로자는 S S 반 다인이다. 그가 창조한 파이로 번스는 라이벌인 앨러리 퀸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명탐정으로 손꼽힌다.
번스는 35세의 독신으로 하버드대 출신이다.
그는 냉철하게 빛나는 회색 눈동자와 탄탄한 체격에다 깊은 교양과 뛰어난 지식, 재산과 인격까지 두루 갖췄고, 명배우 존 배리모어를 닮은 미남이다.
그는 뉴욕 이스트38번가 호화 아파트에서 생활하며, 동서고금의 미술품 수집이 취미이고 골프와 펜싱을 즐긴다.
작가의 이름을 딴 반 다인이 번스의 친구이자 재산관리인으로 등장한다.
번스가 이집트 고문서 연구로 바쁘게 보내던 어느 날 지방검사 매컴이 기괴한 살인사건을 들고 찾아와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
로빈이라는 사내가 가슴에 표본 화살을 맞고 숨진 것이다.
로빈은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딜러드의 외동딸에게 구혼해 온 사람이었다.
사건 현장에는 체스 말이 하나 남아 있었다. 비숍이다.
‘참새가 말했다. 내 활과 화살로 코크 로빈을 죽였어요’라는 ‘머더 구스’(주로 자장가로 쓰인 서양의 전통 동요)의 한 가사처럼, 로빈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후 사건 현장이었던 저택에서는 ‘머더 구스’의 여러 가사에 따라 사람들이 차례차례 살해된다.
이 냉혹하고 잔인한 범인은 대체 누구인가?
‘머더 구스’의 악의 없는 잔인함이 작품과 걸맞기로는 이 ‘비숍살인사건’을 따를 만한 것이 없다.
작품 속 범인의 예상 밖의 범행 동기와 무시무시한 분위기는 많은 독자에게서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반 다인은 이렇게 말한다. “미스터리 소설은 하나의 지적인 게임이다. 스포츠라고 할 수도 있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페어플레이다.
작가의 기지는 독자보다 뛰어나야 하고 독자의 흥미를 일깨울 수 있는 기교로 이끌어 가야 한다.”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정신의 깊이가 얕아진 미국 문명에 체념한 번스는, 미국 땅에서 ‘소외자’이며 ‘이방인’이다.
그리고 이 이방인은 실로 낭만적이고 인간적이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 논증적이다.
번스는 인간의 범죄를 심리적 측면에서 해명하려는 독특한 추리 방법을 쓴다.
그의 탐정법은 심리학을 기초로 한 분석적 연역적 추리법이다. 번스는 단순한 물적 실마리나 정황 증거로는 범죄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는 “진실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범죄의 심리적 요인을 분석해 개인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매력은 번스의 추리 방법과 범인의 비정상적인 범죄동기가 멋지게 대응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세계 10대 미스터리 명작에 꼽힌다.
무더운 여름밤, 파이로 번스의 대활약이 펼쳐지는 반 다인의 걸작에 매료되는 체험을 권한다.
동아일보-----------------
[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5>미스틱 리버
세 친구의 운명 뒤흔드는 배신과 복수기억은 결코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비록 아득한 옛일이었다 해도 실제의 삶 속에서 계속 리플레이되면서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면 기억의 시제를 더는 과거라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억의 진짜 이름은 살아 있는 현재이거나 앞서 일어난 미래일지도 모른다.
데니스 루헤인의 ‘미스틱 리버’는 미국 보스턴 변두리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세 친구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범죄 이야기이며 과거의 기억과 죄책감에 관한 심리학적 통찰을 담아낸 인과의 드라마다.
플로리다대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루헤인은 주차보조원에서 반전운동가까지 사회파 추리소설의 밑천이 될 다양한 경력과 경험을 쌓았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은 도시 빈민, 인종 차별, 성범죄, 유괴 등 사회파 추리소설의 문제의식과 하드보일드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장르 문법을 보여 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동명의 영화로 만든 ‘미스틱 리버’는 루헤인 표 미스터리의 전형적 특징을 고루 갖춘 잔혹한 운명 비극이다.
소설은 숀, 지미, 데이브 등 세 남자의 유년 시절을 잔잔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깊은 강 물살처럼 완만하고 유장한 흐름을 보여 주던 이야기는 성인이 된 지미의 딸 케이티의 죽음에서 급박해진다.
그리고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는 세 남자의 과거와 현재가 살인사건과 함께 씨줄날줄로 얽힌다.
사건을 맡은 형사 숀은 아내와 별거 중이며, 데이브는 한때 고교야구의 스타였으나 어린 시절 성폭행당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전직 갱단 리더 지미는 딸을 잃은 아버지의 비통과 분노의 양극단 사이에서 시소게임을 벌인다.
현대 미스터리답게 소설은 절반의 권선징악과 절반의 찜찜함으로 종결되지만, 둔중한 문제의식을 던져 준다.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루헤인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의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드보일드 메시지가 그렇다.
남편을 믿지 못한 대가로 남편 데이브와 가정을 잃는 아내 셀레스테, 사랑의 이름으로 남편 지미의 모든 허물을 덮는 아나베스, 그리고 가정의 품으로 귀환하는 숀의 아내 로렌과의 선명한 대비라든지 개인적으로 사회악을 응징하려다 어이없는 최후를 맞는 데이브의 운명이 단적인 예다.
배신한 친구를 죽이고 그 친구의 자식들이 자신의 자식을 죽이는 인과의 미스틱한 연쇄는, 이 소설의 약점으로 지목될지도 모를 거시적 관점과 반전의 결핍을 상쇄해 버린다.
루헤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미스틱 리버’는 미스터리 장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사회파 탐정소설의 대가인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나 마쓰모토 세이초처럼 미스터리도 ‘사회적 발언의 한 형식’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 명품 하드보일드로 ‘기억’될 것이다.
조성면 문학평론가
동아일보-----------------
[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6>훈민정음 암살사건
역사는 작가들의 상상력에 날개를 다는 원동력이다.많은 작가가 한 줄 역사에 의지해 무궁무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켰다.사실을 뜻하는 팩트(fact)와 허구를 뜻하는 픽션(fiction)의 조합어인 팩션(faction)은 방대한 역사적 지식에 상상력을 보탠 소설을 말한다.‘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만든 것이 아니다’라는 가설에서 시작한 ‘훈민정음 암살사건’도 그런 이유로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형 팩션 추리소설 중 하나다.
못 다한 아버지의 꿈을 간직한 역사학자 서민영 교수와 우연한 사건으로 의식불명이 된 동료의 원수를 찾아 나선 형사 강현석.
이들은 크고 작은 여러 사건에 휘말리면서 ‘한글의 기원’을 재평가할 수 있을 만한 ‘훈민정음 원류본’을 찾아 나선다.
작가는 주인공 서 교수를 통해 한글은 고조선에서 쓰인 가림토 문자에서 시작되었으며 가림토 문자 전승론이 맞는다면 한글은 4000년이 넘는 문자이며 세계적으로 재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훈민정음 원류본이 진짜 있었고 그 진품이 발견된다면 우리나라의 문자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해요. 고작 1443년에 만들어져 갓 560여 년을 넘긴 글자가 아니라, 단군시대에 만들어져 4000여 년을 넘긴 문자라는 게 밝혀지면 우리나라 한글의 유구한 역사성은 세계에서 다시 한 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어요. 문자의 역사는 바로 그 문자의 값어치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역사적 의문을 바탕으로 한 소설 속에는 독자의 관심을 끌 만한 흥미로운 장치가 가득하다.
소매치기에 의해 발견된 세종대왕의 친필문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고문서 감정가 등이 그것. 역사학자의 유서를 가득 채우고 있는 비밀 암호가 등장하는 부분에선 잠시 책장을 덮고 암호 해독의 방법을 고민해 보게 된다.
숫자나 기호가 아닌 우리말로 된 암호는 낯설고도 신선하다.
지금까지의 추적을 한 번에 뒤엎는 끝 부분의 반전 또한 묘미이다. 책을 읽다 보면 문득 ‘다빈치 코드’가 오버랩된다.
그러나 이 책 속에는 그동안 가까이 두고도 잘 알지 못했던 우리의 문화재들과 한글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이 녹아 있다.
그 점이 이 책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여름이다. 1년 동안 선보이는 추리소설과 공포소설의 3분의 1 이상은 이 계절에 출간된다.
한 편의 추리소설은 콜라 한 잔보다 더 짜릿한 청량감을 준다. 귀신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살인사건의 배후와 역사의 비밀을 교차해 풀어 나가는 ‘훈민정음 암살사건’의 이야기 전개는 등골이 오싹해지면서도 흥미진진하다.
서늘한 공포를 느끼기 위해 공포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을 찾지 않아도 추리소설 한 권을 통해 충분히 시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김경수 온오프라인서점 ‘리브로’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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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7>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사람이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스밀라?”“사소한 부분은요. 하지만 커다란 일들은 저절로 일어나죠.”
얼핏 추리소설 속의 대화 같지는 않다.
다음과 같은 단락도 마찬가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눈송이, 이사야의 무덤에 내리던 카니크다.
얼음은 아직도 따뜻해서 눈송이는 그 위에서 녹아버렸다.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눈송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지 않고 바다에서 자라나는 것 같다.”
스밀라를 처음 만났던 그해 여름, 책을 펼치면 눈이 내렸다.
책 속에서 불어오는 눈보라, 책 속을 둥둥 떠다니는 유빙(遊氷). 그때 나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고 있던 누군가와 함께 강원도의 뜨거운 바닷가에 있었다.
나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었고,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고 있던 누군가도 읽었다.
폭염 속에서, 눈이 내리는 코펜하겐과 얼어붙은 그린란드는 아주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고독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그녀, 스밀라가 손을 내밀면 그녀가 입고 있는 코트 자락을 쓰다듬어 볼 수 있을 것처럼 가깝고 생생했다.
스밀라 야스페르센. 그녀의 몸속엔 야만인의 피와 문명인의 피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린란드인 사냥꾼이고, 아버지는 덴마크인 의사다.
그녀는 어머니를 잃으며 야성(野性)의 자유를 빼앗겼고, 오랜 세월 문명의 이기 속에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야성을 지키려 애쓰며 살아간다.
그리고 한 소년이 죽는다.
스밀라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었던 이누이트 소년, 이사야. 그녀는 눈과 얼음을 읽어 소년의 죽음에 깃들인 음모와 비밀을 파헤쳐 간다.
어떻게? 야성의 용기로, 문명의 합리로, 아니, 그보다는 온기(溫氣)로. 살을 에는 듯한 눈보라 속에서, 차디찬 얼음 벌판 위에서 스밀라는 말한다.
이사야의 싸늘한 주검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며 그녀는 우리에게 일러준다.
“삶의 본질은 온기”라고. 그것이 그녀의 ‘감각’이다.
그리고 그녀는 녹아내린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 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그들은 다시 한결같이 덧붙여 말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 소설은 더없이 아름다운 추리소설이라고.
유혈이 낭자하지 않더라도, 잔인한 살인마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이 소설은 추리소설로서 온전히 존재한다.
추리소설보다 더욱 추리소설 같은 우리의 삶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미스터리와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스밀라를 처음 만났던 그해 여름, 책을 펼치면 눈이 내렸고, 나는 비로소 ‘나’라는 사건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신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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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 추리소설 20선]<8>용의자 X의 헌신
추리소설을 읽는 재미는 무엇일까?추리소설은 범죄가 해결되는 과정에 독자를 초대한다.범인이 누구인지,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추리하는 가운데 독자는 적극적으로 사건 현장에 개입한다.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은 추리소설의 가장 큰 효용은 공포를 이기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마음대로 조율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위협, 추리소설은 이 오래된 공포를 잊게 해 준다.2006년 나오키상을 수상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 X의 헌신’ 역시 그렇다.주목해야 할 것은 히가시노의 소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추리 소설의 문법을 위반하면서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위반은 첫 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이혼녀 야스코는 자신을 괴롭히는 전 남편 도미가시를 우발적으로 죽이게 된다.
가장 마지막에 등장해야 할 범인과 살해 동기가 앞부분에 도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재미는 누가 범인인가를 밝히는 과정이 아니다.
“왜?”라는 질문 역시 폐기되어야 한다.
야스코는 우발적으로 전 남편을 죽였고 이시가미는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범죄를 뒤집어쓴다.
그렇다면 질문의 방식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 것일까? 질문은 바로 ‘어떻게’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책은 주도면밀한 추리들이 직조되고 허물어지는 과정, 그 자체에 추리의 핵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히가시노는 중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의 방식임을 주지시킨다.
수학자 이시가미와 물리학자 유가와의 대결이 압축된 지점 역시 이곳이다.
수학에서 가장 난제로 꼽히는 ‘P≠NP’라는 반복되는 공식은 전환의 본질을 암시한다.
기하학으로 푸느냐, 수학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해답은 완전히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과 과정인 셈이다.
결국 사건의 전모는 야스코를 사모해 왔던 이시가미의 헌신으로 밝혀진다.
문제는 이시가미의 범죄가 야스코를 보호하기 위해 조작된 위장 살해라는 사실이다.
유가와도 수사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규명해 낼 수 없다.
자백을 받아들이는 것도 실패이며 그것을 부정하는 것 역시 실패이다. 히가시노는 이시가미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증명 불가능한 완벽한 가설을 축조하는 데 성공한다.
추리소설이 숨겨야 할 마지막 패를 가장 먼저 내려놓음으로써 작가는 케케묵은 장르적 관습을 거절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범죄소설이라기보다 논리적 대결 과정에 가까워 보인다.
완벽한 논리의 알리바이의 허점을 찾아내는 과정은 끊임없는 질문을 만들어 낸다.
유가와와 이시가미의 문답이 수학적 가설과 물리학적 해답의 대결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별하면서도 다른 추리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이 주는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강유정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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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9>법의관
연쇄살인 실타래 풀듯 치밀한 과학수사사건기자와 법의관실 직원, 경찰서 인턴을 경험한 여성작가 퍼트리샤 콘웰이 쓴 ‘법의관’은 미국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의 모태로 알려질 만큼 사실적인 묘사와 치밀한 구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여성 법의관 스카페타가 잔혹한 미지의 연쇄살인범과 벌이는 두뇌 싸움에는 첨단 법의학적 지식이 총동원된다.
시체 상태와 현장 상황을 통해 사건 윤곽을 파악한 뒤 시체를 부검대로 옮겨 메스와 레이저 광선으로 사인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미세 증거를 찾아내며, 혈액과 섬유 등 중요 물질을 분석하고 감정하는 일련의 절차는 잘 만들어진 과학수사 교과서를 보듯 정확하고 현실적이다.
공지영과 애거사 크리스티를 섞어놓은 듯 섬세한 심리묘사와 절제된 여성주의적 관점이 치밀한 추리 구조와 잘 어우러져 색다른 재미를 준다.
갑작스레 죽은 남자 법의국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스카페타는 성공한 젊은 여성이 그렇듯 편견과 질시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그 와중에 전문직 여성들이 차례로 살해당하는 희대의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희생자 중 한 명은 스카페타가 외래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병원의 인턴이다 보니 피해자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범인 찾기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게 된다.
스카페타는 미국 연방수사국(FBI) 프로파일러(범죄분석요원)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강력계 형사의 도움을 받아 엉킨 실타래를 풀듯 범인의 윤곽을 조금씩 밝혀낸다.
여기에다 하이에나처럼 사건 주변의 비밀스러운 냄새를 맡고 곤혹스러운 폭로기사를 써대는 여기자, 위선과 자만에 가득 찬 장관, 묘한 매력과 어두운 비밀을 함께 지닌 검사와 공적 사적으로 애증과 갈등 관계를 조성하며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당겨진 활시위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주인공 스카페타는 초인적인 정신력을 지녔거나 천재적인 발상을 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고뇌와 갈등,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와 인간적 약점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서 현실적이며, 남녀를 떠나 동감하고 동정하며 동일시하기 쉬운 인물이다.
1990년에 원작이 출간된 ‘법의관’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선 지난 17년간 눈부신 발전과 급속한 보급이 이루어진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전화에 대해서는 잊는 게 좋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클라이맥스에 이를 때까지 등장인물 모두가 범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인물 묘사와 상황 설정, 작가가 곳곳에 지뢰처럼 심어 둔 복선과 단서를 찾아내고 연결해 나름의 추리를 해 보는 맛과 재미가 쏠쏠하다.
외출과 TV의 유혹을 물리치고 잠을 잊게 만드는 추리소설의 세계로 빠지고픈 분에게 일독을 권한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
동아일보-----------------
[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10>데드라인
범죄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항상 느끼는 것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범죄현상과 추리소설에서 일어나는 범죄현상이 유사하면서도 상이하다는 점이다.유사한 부분은 추리소설에 나오는 범죄자들의 엽기성이나 범죄 행위의 저돌성, 그리고 범죄 결과의 일치성이다.반면에 상이한 부분은 현실 속의 범죄자들이 추리소설 속의 범죄자들보다는 그렇게 치밀하지가 못하다는 점이다.앤드루 클레이번이 쓴 ‘데드라인’은 사형 집행을 18시간 앞둔 사형수와, ‘사형수의 무죄 입증’이라는 특종을 만들어냄으로써 개인적 위기를 돌파하려는 신문사 사회부 기자의 이야기로 구성됐다.
저자의 경력은 매우 흥미롭다.
신문기자 출신인 클레이번은 키스 피터슨이라는 여성 필명으로 발표한 ‘더 레인’과 역시 여성 이름인 마거릿 트레이시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미세스 화이트’라는 작품으로 추리소설 분야의 작품상 중 최고로 꼽히는 에드거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다.
신문기자인 에버렛은 직장 상사의 딸과 성관계를 맺고 그것도 모자라서 상사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다.
이 때문에 간신히 얻은 직장에서 잘릴 위험에 처하고, 이 사실을 안 아내는 이혼하자고 난리를 치는 상황이다.
그런 그에게 사형수와의 마지막 인터뷰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사형수 프랭크 비첨을 만난 에버렛은 직감적으로 사형수가 무죄라고 확신한다.
‘무죄 특종’을 잡으면 모든 ‘개인적인’ 문제가 한번에 해결되고 영웅이 되리라는 기대에 부푼 에버렛. 사형수의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에버렛이 집요한 뒷조사에 나선다는 게 소설의 내용이다.
사건을 취재하는 신문기자가 진실을 밝혀낸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로 보이지만, 추적하는 사람이 결코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존의 소설과는 다른 독특한 면모를 보인다.
명탐정 셜록 홈스와 같이 정의롭고 모범적인 사람이 아닌, 어떻게 보면 쓰레기와 같은 인생을 사는 3류 기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건을 추적해 간다는 점이 통상적인 추리소설의 틀을 깨고 있다.
주인공을 포함한 인간 군상은 인간의 본래 모습을 적나라하게 대변한다.
형 집행을 앞둔 사형수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며 으스대는 목사, 큰 이슈를 위해 죄 없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넣는 검사….
이들이 보여 주는 ‘인간적인’ 모습에서 비애마저 느끼게 된다.
사형수의 심리적인 궤적을 그리는 작가의 묘사 또한 대단히 치밀하고 섬세하다.
죽음이 눈앞에 닥친 사형수의 심정을 좇아가면서 클레이번 자신도 많은 고민과 어려움을 겪었을 법하다.
‘데드라인’은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와 더불어 사형제도라는 이슈에 대해 진지한 문제 제기를 함으로써 무게감도 함께 주는 독특한 추리소설이다.
최영인 한국범죄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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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11>모방범
“어머니는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아이만은 지켜주고 싶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불행이 닥쳐와도. 하느님, 그런 힘을 제게 주세요.”범죄자들은 대개 욕망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
과거에는 재물 애정 명예 질투 등 단순한 욕망에 가까웠지만 언제인가부터 그 욕망은 더욱 복잡해졌고 심지어 범죄 자체를 즐기며 과시하는 범죄자가 나타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건 어떤 사람이 남의 인생을 쉽사리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일본의 인기 작가이자 우리나라에도 고정 독자들을 확보한 미야베 미유키.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모방범’은 이런 쾌락형 범죄자의 범행을 다루고 있다.
도쿄의 공원 쓰레기통에서 여자의 오른쪽 팔과 핸드백이 발견된다. 핸드백과 오른팔은 서로 다른 사람의 것이다.
이어 핸드백 주인인 실종된 젊은 여성의 가족에게, 그리고 TV 방송국에 범인의 전화가 걸려 온다.
이유 없는 살인극을 벌이고 매스컴을 이용해 범죄를 과시함으로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쾌감을 느끼는 범인….
살인사건은 피해자뿐 아니라 피해자 가족의 인생마저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만다.
각각 500쪽이 넘는 3부작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1부에선 이유 없는 폭력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과 분노, 죄의식까지 느끼게 되는 피해자의 가족들, 2부에선 매우 영리하지만 제멋대로인 논리와 유치한 특권 의식을 가진 범인의 시점으로 잔혹한 범행이 묘사된다. 그리고 3부에서는 잠깐 멈춘 듯했던 사건이 다시 시작되어 긴박하게 전개된다.
‘모방범’에서는 천재적 명탐정이나 기발한 트릭 같은 것을 볼 수 없으며 연쇄살인범은 일찌감치 독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주목해야 할 점은 범인을 잡는 데에만 집중했던 대부분의 추리소설과는 달리 피해자의 고통과 가족의 쓰라린 슬픔을 정면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강한 면과 약한 면을 가지고 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마주쳤을 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결정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하고 스스로 길을 찾아야만 한다.
피해자의 할아버지 아리마 노인과 범행의 첫 발견자이자 자신도 강도에게 온 가족을 잃은 신이치는 사건 해결에 힘을 쏟는다.
미성숙한 자아를 지닌 절대악(絶對惡)의 존재도 무서운 일이지만, 작품의 저변에는 비극적인 사건마저도 대중의 흥미와 소비 대상이 되어 버리는 현대 사회의 위험한 모습이 깔려 있다.
그것이 소설 속의 일이나 외국의 일이라고 넘겨 버리기 어려울 만큼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결말 부분에 나오는 ‘이 아이만은 꼭 지켜주고 싶다’는 한 어머니의 결심은 더욱 뼈저리게 마음에 와 닿는다.
박광규 한국추리 작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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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12>황제의 코담뱃갑
애거사 크리스티도 두 손 든 절묘한 트릭존 딕슨 카의 추리소설의 재미는 난마(亂痲)처럼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맛일 것이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불가사의한 살인 사건이 벌어진 뒤 긴박하고 현란한 서스펜스로 전개되다가 의외의 충격과 함께 명쾌한 결말에 다다른다.
미국 작가인 카는 열다섯 살 때 처음으로 단편 추리소설 ‘라메세스의 루비’를 발표했으며 ‘화형법정’ ‘세 개의 관’ 등 수많은 걸작을 선보였다.
그의 서가에는 스스로 “나의 범죄서적 수집은 세계 최고이리라”고 자랑할 만큼 동서고금의 많은 범죄서적이 꽂혀 있었다.
집필실인 다락방에 박쥐를 기르고 있다는 소문이 날 만큼 기인이었고, 집필에 몰두할 때 그 열정은 대단했다.
오후 8시가 되면 커다란 커피 잔을 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커피를 16L씩 마셨으며, 불이 붙은 담배를 바닥에 그냥 내버렸기 때문에 바닥이 온통 불에 탄 자국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탄복한 명작’으로 유명한 카의 ‘황제의 코담뱃갑’.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한 여자가 약혼자와 함께 연극을 보고 돌아온 날 밤, 여자의 전남편이 그녀의 방에 몰래 들어와서는 관계 회복을 요구한다.
그때 앞집 서재에서 나폴레옹 황제의 코담뱃갑을 감상하던 집주인 로즈 경이 담뱃갑에 맞아 죽는다.
담뱃갑은 로즈 경이 그날 얻은 수집품이었다.
맞은편 집에 있던 여자와 전남편은 그 현장을 목격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살인자 얼굴을 보지 못했다.
살인 사건 뒤 앞집 식구들이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그녀는 전남편을 집 밖으로 몰아낸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가 살인용의자로 지목된다.
무죄를 입증하려면 전남편이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증언해야 하는데, 여자는 전남편을 피해자 가족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다.
여자의 약혼자가 죽임을 당한 로즈 경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남편은 여자 집에서 쫓겨난 뒤 뇌진탕으로 쓰러져 의식불명이다.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한 여자를 구하기 위해 범죄심리학의 대가 다모트 킨로스 박사가 나선다.
인간의 두뇌를 시계처럼 분석하면서 수수께끼를 푸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여기는 박사는 여자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세밀하게 분석해 영상을 정확하게 재현한다.
이처럼 독특한 심리적 추론 기술은, 미스터리 소설사에서 전례가 없는 새롭고 흥미진진한 착상이다.
이 사건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밀실살인이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데서 독자의 허를 찌른다.
그것은 밀실살인에 자주 등장하는 기계적 트릭과 달리 인간의 심리를 절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애거사 크리스티도 두 손 들었다는 이 작품의 심리적 속임수는 감탄할 만하다.
극적인 스토리와 섬세한 캐릭터 묘사도 읽는 맛을 돋우지만 독자의 무릎을 치게 만드는 절묘한 트릭은 이 작품을 독보적인 추리소설로 돋보이게 한다.
김유경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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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 추리소설 20선]<13>부패의 풍경
한 남자가 있다.한때 잘나가던 권투선수였지만 다친 후 지금은 거리의 해결사로 살아간다.주로 도둑맞은 물건을 찾아주던 그는 가끔은 좀 더 그럴듯한 일도 해결하곤 한다.이 남자, 그리 똑똑하지는 않다. 그러나 배짱과 완력은 자신 있는 사람이다.결혼은 안 했다.줄곧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서다.최근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자신과 다르게 사회적 명망도 높고 재산도 많다.남자는 쓰라린 상실감으로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낸다. 일도 하지 않는다.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사건을 하나 맡는다. 누군가가 어떤 이를 협박한 것이다.남자는 새로운 의지로 협박범을 쫓는다.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뭔가 거대한 음모에 휩쓸린 것 같다.그것도 정치와 관련된. 이 남자, 위기다. 정치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다.‘부패의 풍경’의 주인공인 벤저민 위버가 활약하는 시기는 18세기 영국이다. 왕위 찬탈을 두고 영국 양대 정당 토리당과 휘그당이 총선을 앞두고 정면으로 붙는 시대를 배경으로 위버는 좌충우돌하면서도 통쾌한 액션을 선보인다. ‘
지극히 정치적인’ 시대에 ‘정치에는 전혀 관심 없는’ 남자의 모험담이 박진감 있게 펼쳐진다.
양당의 정치 공방 속에 우연히 말려든 위버는 소설의 시작부터 살인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재판정에서 어떤 여인이 쥐여 준 연장을 이용해 가까스로 탈옥에 성공하지만 진짜 고생은 그때부터다.
알몸으로 빗속을 달리던 위버는 취객의 옷을 뺏어 입고 판사를 찾아간다.
판결에 대한 진실과 배후를 말하라고 협박하지만 정치와 관련된 내용이라 위버는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
급한 마음에 판사의 돈을 갈취하고 도망가는 우리의 파렴치한 주인공은, 그나마 자기보다 유식한 의사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유수의 추리소설상으로 꼽히는 에드거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리스는 역사추리물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작가다.
아무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독자라도, ‘부패의 풍경’ 속 주인공 위버와 숨 가쁘게 영국의 옛 뒷골목을 헤매다 보면 사건의 감을 잡을 만큼 작가의 묘사 능력은 뛰어나다.
사실 그것이 생생한 역사이기도 하다.
18세기 영국의 커피하우스, 술집, 매음굴, 도박판, 재판정, 감옥, 선거 유세장 등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긴박한 사건을 풀어 가는 추리소설에 역사적 고증이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소설을 읽는 재미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재현’이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작가의 입담을 통해 들을 때 독자는 머릿속에서 오감을 작동시킨다.
뜨거운 여름, 더위를 피해 아예 먼 시간으로 떠나는 건 어떨까.
충실히 재현된 소설일수록 시간여행의 훌륭한 가이드가 될 것이다.
거기에 모험도 있잖은가.
최필원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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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 추리소설 20선]<14>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
숨조차 가누기 어려울 만큼 무더운 여름밤. 소름을 오싹 돋게 하는 미스터리 소설에 몰입하다 얼핏 뒤돌아보니, 더위도 오들오들 떨면서 등 뒤에서 내가 읽는 소설을 함께 읽고 있더라.여름은 미스터리 소설의 계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너스레를 떨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당신은 그 어떤 미스터리 소설로도 더위를 쫓지 못했던 경험의 소유자라고 하자.뭐라고 하겠는가.등 뒤에서 떨고 있던 더위도 더위인지라, 여전히 견딜 수 없더군.그런 불평을 할 만큼 기존의 미스터리 소설에 식상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여탐정 라모츠웨의 활약상을 다룬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를 읽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여탐정이라니?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다.
그렇다.
아프리카의 보츠와나에서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30세의 뚱뚱한 이혼녀 라모츠웨도 미스 마플처럼 평범하고 수수한 여자다.
하지만 미스 마플이 전통적 미스터리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라모츠웨는 전통을 깨고 새롭게 태어난 미스터리 소설의 주인공이다.
무엇보다도 라모츠웨는 살인사건 등 강력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녀에게 의뢰되는 사건들이란 누구나 일상에서 겪을 만한 소소한 것들뿐이며, 사건 해결 방식도 이웃의 갈등을 해결하는 너그럽고 오지랖 넓은 동네 아줌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경직된 선악의 기준이 아닌 화해라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기준에 맞춰 사건을 해결한다.
활약상을 하나 들어 보자.
어떤 늙은 남자가 혈혈단신의 어떤 젊은 여자를 찾아와 자신이 옛날에 헤어진 아버지임을 내세우며 그녀의 집에 들어앉는다.
난처해진 여자는 라모츠웨를 찾는다.
라모츠웨는 간호사 차림으로 그를 찾아가, 당신의 딸이 교통사고로 다 죽게 되었는데 아버지인 당신의 피가, 그것도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만큼 엄청난 양의 피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솔로몬의 지혜가 연상되지 않는가.
그동안 나는 문학을 통해 인간미 넘치는 아프리카 사람들과 수없이 만났다.
하지만 라모츠웨만큼 멋진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백인이지만 짐바브웨 출생인 작가가 멋진 아프리카 사람이기에 그처럼 멋진 아프리카 여탐정의 탄생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라모츠웨의 뚱뚱한 외모조차 이 소설에서는 매력이다.
하기야 날씬하고 말라야 미인이라는 식의 가치 기준은 사진술과 오늘날의 상업주의가 공모하여 꾸며낸 허구가 아닌가.
며칠 전 밤늦은 시간 이 책을 펼쳐 들었다.
번역도 유려하지만 라모츠웨의 인간미가 어린 시절의 엄마 품만큼이나 푸근하기에 끝까지 읽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이 무더운 여름, 여탐정 라모츠웨와 함께 미스터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느긋한 미스터리―이른바 ‘안락한 미스터리(cozy myst
숨조차 가누기 어려울 만큼 무더운 여름밤. 소름을 오싹 돋게 하는 미스터리 소설에 몰입하다 얼핏 뒤돌아보니, 더위도 오들오들 떨면서 등 뒤에서 내가 읽는 소설을 함께 읽고 있더라.여름은 미스터리 소설의 계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너스레를 떨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당신은 그 어떤 미스터리 소설로도 더위를 쫓지 못했던 경험의 소유자라고 하자.뭐라고 하겠는가.등 뒤에서 떨고 있던 더위도 더위인지라, 여전히 견딜 수 없더군.그런 불평을 할 만큼 기존의 미스터리 소설에 식상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여탐정 라모츠웨의 활약상을 다룬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를 읽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여탐정이라니?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다.
그렇다.
아프리카의 보츠와나에서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30세의 뚱뚱한 이혼녀 라모츠웨도 미스 마플처럼 평범하고 수수한 여자다.
하지만 미스 마플이 전통적 미스터리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라모츠웨는 전통을 깨고 새롭게 태어난 미스터리 소설의 주인공이다.
무엇보다도 라모츠웨는 살인사건 등 강력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녀에게 의뢰되는 사건들이란 누구나 일상에서 겪을 만한 소소한 것들뿐이며, 사건 해결 방식도 이웃의 갈등을 해결하는 너그럽고 오지랖 넓은 동네 아줌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경직된 선악의 기준이 아닌 화해라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기준에 맞춰 사건을 해결한다.
활약상을 하나 들어 보자.
어떤 늙은 남자가 혈혈단신의 어떤 젊은 여자를 찾아와 자신이 옛날에 헤어진 아버지임을 내세우며 그녀의 집에 들어앉는다.
난처해진 여자는 라모츠웨를 찾는다.
라모츠웨는 간호사 차림으로 그를 찾아가, 당신의 딸이 교통사고로 다 죽게 되었는데 아버지인 당신의 피가, 그것도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만큼 엄청난 양의 피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솔로몬의 지혜가 연상되지 않는가.
그동안 나는 문학을 통해 인간미 넘치는 아프리카 사람들과 수없이 만났다.
하지만 라모츠웨만큼 멋진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백인이지만 짐바브웨 출생인 작가가 멋진 아프리카 사람이기에 그처럼 멋진 아프리카 여탐정의 탄생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라모츠웨의 뚱뚱한 외모조차 이 소설에서는 매력이다.
하기야 날씬하고 말라야 미인이라는 식의 가치 기준은 사진술과 오늘날의 상업주의가 공모하여 꾸며낸 허구가 아닌가.
장경렬 서울대 영문과 교수
동아일보-----------------
[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15>환상의 여인
도대체 누가 이 기준을 정한 건지는 모른다.하지만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은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더불어 ‘세계 3대 걸작 추리 소설’로 꼽힌다.뒤의 두 작품이 범인의 의외성이라든가 기막히게 특이한 살인 설정 때문에 유명해졌다면 ‘환상의 여인’은 로맨틱 스릴과 서스펜스, 흥분을 자아내는 데 단연 최고의 솜씨를 발휘하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볼 뿐이다.아내와 크게 싸운 헨더슨은 우연히 마주친 오렌지색 모자를 쓴 낯선 여인과 함께 몇 시간을 보낸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끔찍하게 살해된 채였고, 그는 곧 유일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놀랍게도 그날 밤 오렌지색 모자의 여인과 함께 들렀던 모든 장소에서 마주쳤던 이들은 ‘그런 여자를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다.
사형 집행일이 다가온다.
그 전에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여자를 찾아 대도시의 한복판을 질주해야 한다.
아이리시는 ‘진짜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에선 아예 범인이 주인공으로 나서거나, 누명을 뒤집어쓴 평범한 남녀가 필사적으로 정해진 시간 내에 진범을 찾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라든지 애거사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아로 등 고전적 탐정들이 정교한 이성적 추리로 승부를 가렸다면 아이리시의 주인공들에겐 곰곰이 생각해 볼 잠깐의 여유조차 없다.
관찰과 이성이 아니라 남들보다 한발 빨리 다음 장소로 넘어가는 행위 자체가 중요해지고, 이런 행동의 전환으로부터 가장 순수한 서스펜스가 빚어진다.
‘환상의 여인’을 읽을 때에도 독자의 입장에선 ‘헨더슨의 아내를 죽인 자는 누구인가’보다는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인을 찾을 수 있을까’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말 부분에 이르러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진범이 밝혀지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얼얼한 충격을 느끼게 된다.
결국 사건이 해결되고 난 뒤 헨더슨은 이 악몽 같은 경험에서 뭔가 ‘배울 만한 점’이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마치 헨더슨이 했던 모든 선택이 이미 예정된 끔찍한 결말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도 ‘사건을 해결했다’는 청량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불안과 의혹만이 희미한 여운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환상의 여인’은 불가해한 세계 속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개인이 느끼는 절실한 패배감에 관한 소설이다.
만일 프란츠 카프카가 추리소설을 썼다면, 혹은 화가 에드워드 하퍼가 붓 대신 펜을 들었다면, 단언하건대 아이리시처럼 썼을 것이다.
‘환상의 여인’을 처음 읽고 카프카나 하퍼의 느낌을 받았다면 아이리시의 또 다른 작품 ‘상복의 랑데부’와 ‘죽은 자와의 결혼’도 함께 읽어 볼 만하다.
김용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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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16>원행
최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책과 드라마가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단순한 역사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추리물이 아닌 실제 우리와 호흡하는 시대와 인물과 유물이 배경이 되기 때문에, 감춰졌던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물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재미를 선사해 준다.역사추리소설, 이른바 팩션(faction) 중에서도 오세영 작가의 ‘원행’이 돋보이는 이유는 역사적 사건과 유물과 인물의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력과 함께 긴밀하고 세련되게 조화돼 있는 데다 소설의 배경인 1795년 정조의 수원화성 원행(園行)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상으로는 사도세자의 사갑(死甲)을 기념하고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한 행차였다.
하지만 정조는 이 행차를 통해 수구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확고히 하여 개혁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개혁파와 수구파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가운데 단행된 이 행차는 그 무게의 중심을 한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다빈치 코드’에서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둘러싼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이 스릴 넘치듯, ‘원행’에서도 과학 지식과 개혁 의지를 바탕으로 정조 시해 음모를 막아 내려는 정약용의 활약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학자 정약용이 아니라, 공역 책임자로서 화성 공사를 지휘하고, 암행어사로서 정조의 행차로를 점검하고, 한강에 배다리를 건설하는 정약용의 거침없는 활약이 긴장감을 더욱 높인다.
정약용과 정조 외에도 역사적인 상상력과 재미를 더해 주는 인물이 있는데, 문인방과 장인형이다.
문인방은 정감록을 토대로 새로운 세상과 개벽을 꿈꾸며 정조를 암살하려 한다.
정조의 군제개혁으로 기총에서 쫓겨난 장인형은 문인방이 말한 ‘소릉운’(오곡이 풍부하고 평등한 곳)에서 사랑하는 연인 소향비와 함께 살기 위해 역모에 가담한다.
작가는 문인방과 장인형과 상단의 모습을 통해 정조시대 신분상의 변화를 더욱 사실적으로 그린다.
여기에 정조의 개혁에 반대하는 신하들과 민초들의 세력이 맞물리고, 정약용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이들의 정체와 음모를 밝혀내면서 줄거리는 어느덧 마지막 고개를 넘는다.
등장인물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이상향을 꿈꾼다. 정약용은 실학과 개혁의 나라를, 벽파의 우두머리인 심환지는 선비가 중심인 유학의 나라를, 문인방은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누가 악인이고 선인이라는 관점보다 작가는 그들이 처한 상황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다각도로 조명해 보려고 한다.
이런 다양한 계층의 삶과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과정이 원행 8일 동안 치밀하고 치열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 소설 ‘원행’으로 격변이 심했던 정조 시대를 한껏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김도연 CJ미디어 드라마 기획팀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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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 추리소설 20선]<17>아웃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추리소설을 두 타입으로 구분한다.읽기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감탄을 하게 되는 추리소설과 읽는 내내 감탄을 하게 되는 추리소설이다. 전자는 일반적인 형태다.기가 막힌 반전을 갖추어 놓고 비범한 등장인물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일로매진해 이르는 결말과 맞닥뜨린 나는 그제야 무릎을 친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인위적이라는 생각에 다시 읽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감탄은 하지만 감동받지는 않는다고 할까.하물며 ‘나는 오직 너를 속이기 위해 썼다’는 식의 소설이라면, 아무리 뛰어난 반전이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반면 후자와 같은 추리소설은 결말을 알게 되더라도 얼마든지 다시 읽고 싶은 기분이 된다. 읽을 때마다 가슴 설레는 요소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러한 작품을 고르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기리노 나쓰오는 믿고 집어 들 수 있는 작품을 쓰는 몇 안 되는 작가다.
기리노의 ‘아웃’을 다시 읽는다.
이번이 세 번째다.
정말이지 독자를 압도하는 소설이다.
첫 장면이 한참이나 머릿속에서 맴돈다. 야요이는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함께 모은 돈을 몽땅 도박과 계집질로 날리고 외려 큰소리다.
급기야 구타하기에 이르자 야요이의 인내는 분노로 바뀌고, 결국 살인을 저지른다.
이것이 사건의 시작이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야요이가 동료에게 부탁해 불려나온 세 명의 여자들이 시체를 유기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그 질척질척한 풍경이라니….
단지 소설일 뿐이라고 애써 자위하면서도 무시무시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습게도 이들은 이후 시체를 유기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꿈이나 희망이 없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픽션에까지 그런 것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는 기리노답게 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니힐리즘’이다.
‘아웃’에 등장하는 네 명의 중심인물은 모두 사회로부터 ‘아웃’된 채 도시락 공장에서 야간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이기적인 소리만 지껄이는’ 가족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고독하게 현실과 맞서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때문에 ‘이제 됐어, 그만 끝을 낼까’ 생각하면서 죽음을 향해 한 발짝 나가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뒷머리를 잡아채어 이편으로 끌어당기는 힘은 가족이다. 결국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들에게 남은 수순은 가족을 죽이는(혹은 버리는) 일이다. 필요에 쫓기면 뭐든 하는 존재, 그게 바로 인간인 것이다.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묘파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공포와 등을 맞댄 황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장기인 기리노. 그 정점에 이 소설이 있다.
‘일본 범죄소설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아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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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18>캘리포니아 걸
“한가운데를 파고들어라. 잔혹한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타락한 이성의 검은 흡입구. 이런 하수구가 어떤 것인지 평생을 배워 왔다.익사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방법도 익혔다. 누구에게나 이런 하수구가 있다. 어떤 사람 것은 거대하고도 교활하게 숨겨져 있다. 땅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처럼.”1968년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카운티의 터스틴 마을. 한 젊은 여자가 죽은 채로 발견된다.
그녀는 ‘미스 터스틴’으로 선발될 정도로 아름다웠던 자넬이다.
자넬은 ‘플레이보이’ 표지에 실린 사진 때문에 ‘미스 터스틴’ 자격을 박탈당했다.
목이 잘린 채 발견된 자넬의 사건을 수사하게 된 사람은 닉 베커. 그의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자넬과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자넬과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던 목사이자 베커가의 큰아들 데이비드, 자넬 사건을 맡게 된 경찰이자 둘째인 닉, 한창 주가를 올리는 기자이자 막내인 앤디의 삶은 자넬 사건을 계기로 큰 변화를 겪는다.
‘캘리포니아 걸’은 미국추리작가협회에서 수상하는 에드거앨런포상(2005년)을 받은 작품이다.
퍼즐을 푸는 듯한 살인사건 해결 과정이 이 책의 유일한 관심사는 아니다.
작가 T 제퍼슨 파커의 통찰력 있는 시선과 매끄러운 문장은 이 책을 1960년대 말의 미국 사회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울로 자리 잡게 했다.
이야기는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건이 일어난 1968년까지 이야기가 진행된 뒤, ‘제대로’ 해결을 보기 위해서는 다시 36년의 시간이 걸린다.
전쟁으로 셋째 클레이를 잃은 베커 형제들은 어렸을 적부터 간간이 알고 지냈던 아름다운, 하지만 불행했던 소녀 자넬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한다.
1960년대 미국 소도시를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용의자와 수색자는 모두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인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과거사와 그에 얽힌 긴장감이 되살아난다.
이들의 대화와 생활로 그들이 살던 소도시와 시대를 재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건이 일어났던 1968년의 과학수사 기술은 현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범인의 유전자가 널려 있는 현장을 두고도 혈액형 외에 범인의 흔적을 알아내기 힘들었다.
저자가 그 시대를 무대로 소설을 쓴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격동’이라는 말 외에 쓸 수 있는 단어가 없던 시절. 대통령이 총 맞아 죽고, 이국의 전쟁터에 갔던 아들은 주검이 되어 돌아와도 이상할 게 없던 시대. 불안하게 들끓는 상태가 지속되던 전무후무했던 그 시대의 공기를, ‘캘리포니아 걸’은 예민하게 포착해냈다.
이다혜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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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19>뿌리 깊은 나무
누가 세종의 학사들을 죽였나?이정명 씨의 ‘뿌리 깊은 나무’는 근래 쏟아지는 국내외 팩션(faction) 중 돋보이는 소설이다.
세종 시대 경복궁에서 일어나는 집현전 학사 살인사건을 파헤친 이 소설은 ‘한국의 다빈치 코드’라고 부를 만하다.
연쇄살인을 추적하는 짜릿한 스릴과 절묘한 트릭은 물론이고,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궁궐 배치의 정치적 코드와 한글 창제의 원리를 놀라운 방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경복궁 후원의 우물에서 젊은 집현전 학사의 시신이 발견되고, 이후 매일 밤 학사들이 연쇄적으로 죽어 나간다.
소설은 참혹한 연쇄살인의 이면에 감춰진, 우리 역사의 가장 위대한 프로젝트인 한글 창제 추진파와 이에 맞서는 반대파 사이의 대립과 음모를 치열하게 그려낸다.
살인사건을 맡은 겸사복(궁궐 수비군)인 주인공 강채윤은 색다른 매력으로 독자들을 사건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그는 셜록 홈스나 미스 마플과 같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인물이 아니다.
뛰어난 지력도, 매력적인 외모도 지니지 못한 그는 살인범을 눈앞에 두고도 체포할 수 없는 말단 궁궐 수비병일 뿐이다. 독자들은 어리고 약하지만, 검은 세력의 위협에 굴하지 않는 그의 고군분투에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세종 또한 기존 이미지와 다른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조선을 명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로 우뚝 세우려는 비밀결사의 수장이며, 양반들이 독점한 문자권력을 모든 백성들에게 널리 펴고자 하는 개혁가이다.
단서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세종과 젊은 집현전 학사들이 주도하는 비밀 프로젝트가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고, 치열하게 전개되는 반대파의 검은 음모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연쇄살인을 풀어 가는 추리의 스릴이 이 책의 첫 번째 재미라면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 역사와 문화의 비밀을 찾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소설 속에는 열상진원, 향원정, 경회루, 강녕전, 아미산 등 경복궁에 남아 있는 수많은 건축물에 숨어 있는 놀라운 상징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 열쇠로 작용한다.
마치 ‘다빈치 코드’에서 루브르를 비롯한 배경 건축물들의 상징으로 사건이 풀리는 것과 같다.
음양오행의 동양철학을 비롯해 수학 미술 음악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도 사건을 해결하는 핵심 트릭으로 작용한다.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 속에 우주 창조의 원리가 내재해 있으며, 백성들의 마음에 ‘사맛디(소통하지)’ 아니하는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라는 세종의 생각을 느낄 때쯤 소설은 놀라운 반전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경복궁을 오래된 빈집들의 썰렁한 집합처가 아니라 수많은 한국적 스토리텔링의 보물 창고로 다시 보게 한 것 또한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이번 여름에는 우리도 몰랐던 우리 역사의 눈부신 전율 속으로 빠져 보는 것이 어떨까?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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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20>외과의사
사람이 공포를 느끼면 부신에서 공포 호르몬이라고 부르는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이때는 심박동이 빨라지고, 혈관 수축으로 혈압이 오르며, 피부가 수축되어 솜털이 곤두선다.그 결과 얼굴이 창백해진다.이런 상황이 돌발적으로 나타난다면 아주 끔찍한 기억으로 남지만, 의도된 것이라면 점점 그 자극에 중독된다.
이것이 사고나 범죄에서 느끼는 우발적 공포와 스릴러를 읽으면서 느끼는 공포의 차이다.
스릴러는 다른 장르보다 치밀하고 밀도 있는 구성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스릴러는 사실성과 함께 전문성이 요구된다.
허구라는 전제하에서는 독자를 상황 속으로 몰입시키기 위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명료한 얼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테스 게리첸의 ‘외과의사’도 스릴러물의 보편적 범주를 따르고 있다.
4명의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했던 사내가 마지막 희생자로 택한 여성의 총에 죽는다.
그런데 3년 뒤 사내의 범죄 수법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당한 여성들이 발견된다.
범인의 행각이 마치 의사가 해부해 놓은 시체와 흡사하다고 해서 ‘외과의사’로 불리는 살인범. 그 악마를 여형사 제인 리즐리가 쫓는다.
이 책의 주인공은 경찰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메디컬 스릴러로 분류된다.
왜일까?
그것은 범인이 사이코패스이기 때문도 아니고, 저자가 의사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전면에 흐르는 배경들이 모두 의학적 장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 풍경과 수술 묘사의 사실감은 물론이거니와 범인의 살인 방식,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 결과들은 잔인하고 실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 듯 생생하다.
필자는 의사인데도 장면들이 갖춘 압도적인 설득력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하나하나 소리 없이 사라져 가는 여인들, 경정맥을 파고드는 메스, 피부를 가르고 자궁을 적출하는 검은 그림자. 그러나 그 손길은 생명을 구하는 의사의 손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가는 냉혹한 손이다.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것을 서서히 느끼며 죽어 가야 하는 여인들. 더구나 이 여인들은 모두 과거에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피해자이다.
범인은 누굴까?
왜 이 가여운 여인들을 제물로 삼아 피의 카니발을 벌이는 것일까?
범인은 마지막 한 페이지까지 독자들의 머릿속에 아드레날린의 폭포가 뿜어져 나오게 한다.
이 책은 독일 의대생들의 추천도서가 될 정도로 의학적 감수가 철저하다.
지나치리만큼 사실적이기도 하다.
거기에 사람을 살리는 메스가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는 아이러니, 더럽혀진 몸과 피의 제전과 같은 섬뜩한 알레고리들이 부비트랩으로 감춰져 있다.
폭염이 예상된다는 올여름, 피서 계획이 없는 분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박경철 신세계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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