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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나훈아의 고향역, 황등역을 아시나요?대담기획인터뷰인물 2004. 7. 11. 18:50
<기획> 나훈아의 고향역, 황등역을 아시나요?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 역/
입뿐이 곱뿐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 역.
이번 추석에도 객지의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다.
지금은 자가용과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만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가 고향역에 대한 아른한 향수를 갖고 있다.
국민 애창곡 '고향역'은 왕년 인기 트롯가수 나훈아가 불러 크게 히트를 쳤음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노랫말을 곱씹으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향수와 서정심을 자극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나훈아가 불렀다는 것은 알아도 작사. 작곡가가 순창읍 출신에 익산 '남성중고'를 나왔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더욱이 '고향역'이 바로 익산시 황등역을 무대로 했음을 아는 이는 더욱 없다.
그는 다름 아닌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는 임종수선생(61)이다.
임씨는 부모가 각각 50세와 46세에 낳아 8남매 막내로 태어났다.
순창국교를 졸업하고 타고난 머리 덕분에 '호남의 명문' 익산 남성중(8회)과 남성고(11회)을 졸업한다.
한창 사랑을 받을 나이에 경찰관이던 형님과 기거하면서 학교를 다닌다.
그의 데뷔곡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게 한 '고향역'을 작사. 작곡하게 된 근원도 형님이 삼기 지서 주임으로 발령을 받은 것에서 유래한다.
남성중 2학년인 그는 삼기면에서 산을 넘고 넘어 무려 25리 떨어진 황등역에 도착한다.
황등역에서 대전발 기차를 타고 익산역에서 내린 다음 남성중에 가는 일이 형님이 타지역에 발령 받을 때까지 1년여 간 반복됐다.
방과 후에는 반대로 익산역까지 가서 열차를 타고 황등역에 내린 다음 25리를 걸어 삼기면을 오갈 때마다 어린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것은 배고픔과 고향에 대한 향수였다.
더욱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황등역 주변 코스모스를 볼 때마다 더욱 커졌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나이에 객지생활은 코스모스가 다정한 어머님 얼굴이 되는 것인 양 반가움과 그리움을 줬다.
훗날 통학길의 고달픔과 배고픔 속에서 오르내렸던 철마의 기적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대합실 모습이 되살아나, 언젠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역 같은 '황등역'에 내려 보고 싶었다.
광주 및 전주 KBS 전속가수로 활동하는 등 가수가 되려 했으나 운명적으로 작곡하게 됐다는 임씨는 순창에는 기차가 없지만 황등역에서의 느낌을 '고향역'에 담아 71년 작사. 작곡한다.
그러나 무명 작곡가 노래를 불러줄 가수가 없었다. 나훈아가 부를 때까지 한 달 이상 쫓아다니는 무명의 설움도 톡톡히 겪었다.
72년 방송을 타기 시작한 '고향역'은 공전의 대히트였다. 산업화와 고속성장의 70년대는 농촌 청년들이 무더기로 '서울로 가는 길'에 내몰렸다.
개발에서 소외된 호남인의 무조건 상경과 빚에 몰린 야반도주는 특히 절정을 이루었다.
자연 '이농과 망향의 노래'는 대중음악의 중요한 메뉴였고 나훈아는 '물레방아 도는데'와 '고향역' 등 3곡을 크게 히트시킨다.
30여년 나훈아 노래 목록 첫 장에 기록될 이 곡들은 공업화 위주로 재편되던 전환기 사회 내면을 현실적 서정으로 포착한 수작이다.
비슷한 시기, 김상진도 '고향이 좋아' '이정표 없는 거리' '고향 아줌마'처럼 향수를 자극하는 '고향 시리즈'로 스타덤에 오른다.
이처럼 '고향역'은 산업화에 따른 이농으로 인한 향수와 더불어 대가수 나훈아와 결합돼 국민의 감성 속에 파고드는 수작이 됐다.작사에도 천부적인 재질이 있었던 그는 발표곡만 50여 곡에 이른다.
두번 째 곡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와 '대동강 편지'는 물론 '옥경이' '부초' '착한 여자' '남자라는 이유로' 등 대히트곡을 차례로 선보였다.
올해도 최진희의 '가져가'와 남진의 '모르리' 그리고 나훈아의 '분교(分校)' 등 3곡을 발표했다.
'고향역'의 모티브가 된 황등역을 찾아 봤다.
행인에게 황등역을 물으니 "바로 저기"라고 오던 길을 가리킨다.
차를 면사무소에 주차해 두고 걷기로 했다.
한참을 가도 역사가 보이지 않아 다시 물으니 "쪼끔만 가면 된다"고 했다.
어느덧 뜨거운 날씨에 4-5백m는 족히 걸었나 보다.
중앙선도 없는 역사 앞길에 접어들어 다시 150m를 걸어서야 황등역에 도착했다.
"바로 저기"가 졸지에 왕복 1킬로가 넘어 버렸다.
많이 걷는 시골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고생한다는 말이 맞나 보다.
역사 주변에는 건축 폐기물 더미가 쌓여 있고 오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꽤나 붐벼 시골 풍경을 찾아볼 수 없는 황등에서도 외딴 곳이라 통일호만 하루 세 번 정차할 뿐 너무 적막하고 한적하다.
6급역으로 부역장과 직원 둘이서만 근무한단다. 열차운영원 이한용씨(54)에게 들으니 옛날에는 상당히 붐볐으나 이제 승하차를 합쳐 하루 15명 정도가 이용한단다.
역사 안 철로 입구에는 조롱박이 걸려있고 임종수씨가 학창 시절, 어머니를 연상하며 바라보았을 코스모스는 전혀 없다.
대신 주황색 '메리 골드'와 '유포르시아' 등 볼품 없는 꽃들이 피어 있다.
'고향역' 노랫말처럼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역사 주위나 철로변 울타리에 가냘프고 청초한 여인의 모습으로 수없이 피어나 한들거리는 그런 역사는 아니었다.
철로 건너 서쪽에는 녹색 물결이 끝없이 넘실대는 함라면의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형적인 시골 역이었다.
금방이라도 열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헐레벌떡 대합실에 뛰어드는 임씨의 모습이 보일 듯하다.
마르지 않아 연기만 내뿜고 잘 타지 않했던 장작불로 만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비우고, 안개 속에 동트는 아침을 가르며 10여km 통학길을 뛰었을 임종수씨.
대합실에 들어서면 개찰구와 승강장에는 또래의 소년들이 물고기 떼처럼 왁작거리고, 저만치 함열 방향의 일직선 레일 위에는 기적 소리 한 번 울리고 석탄 연기 날리며 꼬리 긴 철마가 들어오고 있었겠지.
그러나 아마도 임씨가 황등역에 다시 들리면 너무도 쓸쓸함과 황량함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리라.
잠시 기다리니 부역장, 박영화씨(56)가 민방위 모자에 노란 장화를 신고 작업복 차림으로 농약을 하다 들어 온다.
악수를 청하니 제초제를 하느라 손이 더럽다며 사양한다.
누구도 황등역이 나훈아의 '고향역' 무대였음을 모른다.
입구에는 고향역 노래비나 이를 알리는 소공원 하나 없고 한 쪽에 누렁이 한 마리만 더운 날씨에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하기사 이 곳 황등역에서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며 코스모스에 향수를 달래던 임씨도 천리타향 서울로 가버리고 없는데.
초라하고 허전한 황등역에 노래비나 소공원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발길을 재촉했다. <고재홍 기자>'대담기획인터뷰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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