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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사라진 백제가람 미륵사, 그 웅대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다.
    <인물산하기관> 2006. 5. 7. 08:23

     

    사라진 백제가람 미륵사, 그 웅대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다.


    4월 11일. 모악산 대원사의 진관스님과 동행하여 익산 미륵사지를 찾았다. 가는 길에 익산 왕궁면 왕궁리에 있는 사적 408호 왕궁리 유적지와 국보 제289호 왕궁리 오층석탑을 보면서, 한창 발굴중인 유적지와 그 중앙에 자리한 오층석탑의 위용에 눌려 가랑비가 오는데도 우산도 펴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의 금마면 동고도리에 있는 보물 제46호 고도리 석불입상이다. 비가 내려 진입로가 질척거려 발이 빠지기도 했지만 보물을 볼 수 있다는 기쁨에 그까짓 발이 빠지는 것쯤이야 먼 상관이리요. 200m 정도를 두고 마주 선 2기의 석불입상은 수호신격인 역할을 하고 있다. 사다리꼴의 석주에 얼굴과 손, 옷 주름과 대좌들을 표현한 석불입상은 신체의 표현이 지극히 절제화된 모습에서 오히려 단아한 점을 느끼는 것은 나 하나의 생각일까?


    미륵사지. 백제시대 가장 큰 가람이 있던 곳이다. 미륵사는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기이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루는 백제 30대 무왕(AD600~641)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예배 하였다. 부인이 왕께 아뢰기를 '나의 소원은 이곳에 큰 절을 세웠으면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知命(지명)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삼상과 전(殿), 탑(塔),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액호를 미륵사라 하니 진평왕이 여러 工人(공인)을 보내어 도와주었다.」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미륵사는 거대한 절집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건축, 공예 등 백제미술의 역량이 최대한 발휘되었으며, 신라 등 삼국문화가 결집되어 모든 문화를 집대성한 곳이기도 하다. 가람의 배치가 3원 이루고 있어 동, 서, 중앙이 서로 연결이 되어 있으며, 동서의 길이가 172m나되었다고 하니 가히 그 웅장함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미륵사지 안으로 들어가니 여기저기 발굴이 된 석물들이 즐비하게 나열이 되어 있다. 잘 정돈이 된 사지는 그야말로 광활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잔비가 내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한 바퀴를 도는데 만도 족히 30여분 이상은 걸리는 것 같다.


    진관스님이 미리 익산에서 불화를 그리는 임귀란 선생에게 전화를 한 덕에 미륵사지 현장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양희제 연구원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음은 얕은 지식을 가진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임귀란 선생은 대학을 다닐 때 불화 공부를 시작을 해 벌써 15년 정도 불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미륵사지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기도 해서인가 자연히 이곳 발굴조사단과 친분이 있어 보인다. 백제 때는 5,500여 평에 달하던 미륵사는 통일신라에 와서 방대한 사찰로 늘어났다고 한다. 미륵사지를 둘러보니 어림잠아 만여 평은 되는 것 같다. 이 미륵사지에 서 있는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은 일제 때인 1915년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6층만 남아있던 한편에 시멘으로 발라놓았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탑의 한 면이 완전히 시멘트로 각을 이루게 해 놓았다. 여기서 떼어낸 시멘트만도 무려 15톤이나 되었다고 양희제 연구원은 설명을 한다. 2001년까지 6층만 남아있던 탑의 당시 높이는 14.2m 나 되였다고 한다. 2001년부터 해체를 시작한 석탑은 백제 무왕 때 세운 것으로 보이며 아직도 그날그날 해체된 돌을 도표를 그리며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본 석탑은 그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전국을 다니면서 석탑을 무수히 보아왔지만 이러한 크기의 석탑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중앙에 목탑이 있고 양편에 9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는 미륵사지의 중앙목탑 동편석탑은 1974년 동원 탑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유물로 보아 목탑을 좌우로 같은 형태의 9층 석탑이 있었음을 알게 되어 1991년부터 석탑의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완공하였다. 복원을 한 탑은 하중 기단의 한 변이 12.5m, 상층 기단이 10.5m 인 이중 기단으로 되어 있으며 비면에서 상륜부까지의 총 높이는 27.8m에 달하는 거대한 석탑이다. 탑의 내부는 1층 탑신에 +형 통로가 나 있으며 2층부터는 공간이 없이 막혀 있다. 이 9층 석탑을 복원하는 데는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 총 2,000여개 2,700여 톤이 사용되었으며 백제시대 석탑의 기단석과 탑신석 35개가 포함되어 있다. 양 석탑의 앞쪽에는 보물 제236호로 지정된 거대한 당간지주가 있고 그 앞으로 연못이 있다. 이 절을 지을 당시에는 기와를 직접 구워서 사용하였으며 절을 짓는데 필요한 돌도 바로 미륵사 절 뒤편에 있는 산의 돌을 사용했다고 한다.


    석탑의 상단부 높이 정도를 올라가 내려다보는 미륵사지는 산자락을 끼고 넓게 펴진 절터다. 시원스레 내 뻗은 절터가 층계 논으로 묻혀 있던 것을 하나하나 발굴해 냈다고 하니 그 정성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사지에서 출토된 전시물을 보아도 미륵사가 얼마나 웅장한 가람이었던가를 새삼 짐작케 한다. 미륵사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사지 안에 있는 출토유물을 전시한 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각종 명문 와편이며 도자기 등 무수히 발굴된 유품들이 다시 한 번 미륵사지의 위용을 깨닫게 한다. 한 바퀴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어 있다. 황룡사로 대표되는 신라 화엄신앙에 대비되는 백제 미륵신앙에 바탕 한 미륵사. 1600년을 전후로 폐사가 되었을 이 절터에 아직도 1,500년 가까이 온갖 세월속의 역사를 지켜 본 석탑 조각 하나하나가 다시 돌아보게 한다. 새삼 그 위용에 눌려 새삼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누군가 미륵은 바로 내 마음에 있다고 했다던가? 그래서 이곳 미륵사지를 돌아보면 나 지신을 더 낮추고 작아질 수만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다음에야 세상에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으랴? 어차피 비워버린 마음에 채울 것도 없을 터인데.. (2006, 4, 21)       

     

     

     

     

     

     

     

     

     

    사진 위로부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

    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46호)

    미륵사지(사적 제150호)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석물들(동원 9층석탑 부재들이다)

    복원된 동편 9층석탑의 위용(높이가 27.8m에 달한다)

    금당지 초석들

    미륵사 당간지주(보물 제236호)

    2001년부터 해체보수정비 중인 서편 중원9층석탑(국보 제11호)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 

    출처 : 전통을 찾아서~
    글쓴이 : 늪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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