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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룡천역과 익산역...))
    <칼럼사설수필> 2004. 4. 25. 19:04

     

     

     

    ((룡천역과 익산역...))

     

     

    평북 룡천역 폭발사고는 한반도 열차피해의 최대 참사로 기록될 전망이다.

     

    77년 11월 11일 익산역(당시 이리역) 화약폭발사고와 흡사해 '같은 병을 앓았거나 어려운 처지끼리 동정하고 돕는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익산역 폭발 당시 인구는 13만으로 수출공업도시 웅지를 펼치다 초대형 참화를 당한 것이다.

     

    열차는 사고 이틀 전, 인천시 한국화약 공장에서 다이나마이트, 초안폭약 등 30여톤 화약을 싣고 광주로 출발했다.

     

    10일 하오 11시반 익산역에 도착했는데 하루 수백회 여객열차가 통과하는 역에 22시간을 대기한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호송원 신무일씨는 화약류 직송원칙을 무시하고 수송을 늦추는 역에 항의했으나 묵살되자 인근에서 소주 한병과 막걸리를 마셨다.

     

    화약열차에 들어가 어둠을 밝히려 양초에 불을 붙이고 취기에 한기까지 엄습(掩襲)하자 이내 잠이 들었다.

     

    매캐한 냄새에 잠이 깼을 때는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고 이를 피하기 위해 "화약에 불이 붙었다"고 고함을 지르며 도망쳤다.

     

    철도직원들이 열차로 달려갔으나 화차가 폭발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장거에도 이를 막지 못했다.

     

    신무일은 폭발물 취급자격도 없고 화약류의 목적지까지 직송원칙을 무시한 무사안일(無事安逸)과 만성적 타성이 빚은 참사였다.

     

    룡천역 폭발이 북한 고위인사를 노린 것이라는 항설(巷說)처럼 간첩 소행이라느니 전쟁이 터졌다는 등 유언비어(流言蜚語)가 있었으나 사건 전모가 밝혀지자 민심은 안정됐다.

     

    가공할 파괴력은 삽시간에 시가를 아수라장(阿修羅場)으로 만들었고 엄청난 구덩이가 패였으며 창인동, 모현동, 남중 2가동은 물론 평화동까지 811동 가옥이 전파됐다.

     

    반파된 집은 무수했다. 주저 앉은 집무덤, 희뿌연 하늘, 시가를 덮은 유리조각, 피난가려 자식과 부모를 찾는 아비규환(阿鼻叫喚) 등 생지옥을 연출했다.

     

    열차바퀴는 7백m 떨어진 舊익산군청 지붕을 뚫고 떨어졌다. B-29 폭격기 12대가 동시에 투하한 폭탄 피해에 맞먹는 규모였다.

     

    학교 피해는 1천여개 교실에 달했고 객화차 117량이 날아갔거나 찌그러졌다.

     

    사망 59명에 중경상자 1343명 등 1402명의 인명 피해에 이재민은 1674세대 7873명에 이르렀다.

     

    각골통한(刻骨痛恨)의 피해였다.

     

    민관군이 복구에 나섰고 의료진과 구호반 천막이 전쟁터를 방불했으며 성금이 답지했고 헌혈이 줄을 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딛고 성장한 이리시는 훗날 익산군과 통합하여 '익산시'라 개칭했고 33만의 '전북 제2의도시'이자 서해안 중심 도시로 발돋움했다.

     

    이리역도 '익산역'이라 개칭했고 올해 4월부터 고속철 전북권 정차역으로 성장했다. 폭발 당시와 비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 금번 룡천역 폭발은 이리역 피해를 훨씬 능가한다.

     

    폭발은 질산암모늄과 연료용 기름을 넣은 열차 교체작업 도중 두 차량이 충돌하는 바람에 역내 전신주가 넘어지고 전선이 끊기면서 발생한 불똥이 이들 차량으로 튀어 강력한 폭발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자 161명, 부상자 1300여명에 건물 1800여채가 완파됐고 6천여채가 파손됐다.

     

    신의주까지 파편이 떨어져 익산역보다 2배 이상 피해로 파악됐다.

     

    역 주변 반경 500m가 함몰됐고, 반경 4㎞까지 피해를 입어, 사상자는 늘어날 전망이다.

     

     

     

    한반도 최악의 열차 참사이다.

     

    비슷한 경험 외에도 익산시와 룡천군은 많은 점에서 흡사하다.

     

    수십킬로 북쪽에 압록강과 금강이 있어 국경과 도계를 이루고 서해안고속도로를 북한까지 연장한다면 일직선으로 갈 수 있는 서해연안이다.

    사고 발생 당시 이리시와 룡천군 인구도 이상스레 13만이다. 

    익산시에는 함라평야, 룡천군에는 룡천평야가 있어 전북과 평북 쌀 주산지이기도 하다.

     

    룡천역 복구와 부상자 및 주민 구호에 익산시와 전북도가 동포애와 인도적 차원에서 적극 나서면 좋을 듯 싶다.

     

    의료수준과 교통, 통신이 열악한 점을 감안해 시민단체와 함께 폭발사고를 경험한 익산시민과 전북도민이 나서 의료단 파견, 의약품과 구호물자 및 장비 지원, 헌혈 등을 추진하면 교류협력에도 도움이 될 듯 싶다.

     

    상황이 급한 듯 북한이 이례적으로 국제사회와 당국에 지원 요청을 해왔고 정부도 우선 1백만 달러 구호물자를 지원키로 했다.

     

     

     

    이럴 때 선조들은 '열 사람이 밥 한 술씩 보태면 한 사람 먹일 밥이 된다'는 의미의 십시일반(十匙一飯)이란 말을 자주했다.

     

    언젠가는 통일국가에서 함께 살아야 할 동포형제의 아픔이다.

     

    아프리카 난민도 도와주는 판에 동족의 참사를 돕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익산시와 전북도의 관심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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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스크 칼럼)
    (제목) 용천역과 익산역
    제2사회부장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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