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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전봉준 피체유적비 논란))<칼럼사설수필> 2005. 6. 15. 10:42
전봉준 피체유적비 논란
딥 스로트(Deep Throat)는 72년 닉슨의 재선을 노려 워터게이트 빌딩 민주당사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사건을 취재했던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에게 닉슨 행정부 조직적 비리은폐 등 결정적 정보제공자를 말한다.
사전적 의미는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 '결정적 단서가 나오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후, 딥 스로트는 '내부 고발자'나 '밀고자'를 뜻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당시 FBI 부국장 마크 펠트는 지난달말, 자신이 '딥 스로트'라고 밝혔다.
여기에 국내 특정정당은 내부고발자 보호를 강화하는 부패방지위 법개정안을 6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키로 했다.
내부고발은 부정비리에 파괴적 효과가 있다.
감찰기관과 시민단체도 있지만,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는 내부고발자 용기는 정부나 기업 비리를 아는데 충격과 효과를 준다.
그러나 고발자 자신은 개인이 거대조직에 맞서 온갖 어려움과 수모를 겪는다.
내부고발자가 정의구현자가 아닌 희생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고발(告發)에 대한 인식도 곱지 않은데 밀고(密告)의 의미는 한층 부정적이다.일제시대 순사에 정보를 제공하던 '밀대'라는 용어가 아직 남아있다.
그런데 111년전 밀고자 출신지역 표기를 놓고 정읍과 순창 민심이 극한으로 치닫는다.
전봉준이 체포됐던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마을 인근 폐교에 순창군이 세운 '피체지 유적비'의 '정읍출신 김경천의 밀고'라는 글귀가 말썽이다.
1894년 '반봉건, 반외세'로 일어난 동학혁명군은 전라도 대부분과 전주를 점령했다. 조정은 원병을 요청, 청국군과 일본군도 들어왔다.
농민군은 폐정개혁 12개안을 제의해 5월 전주화약으로 휴전이 성립됐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침략의도를 드러내자 9월 중순 반외세 기치로 농민군은 논산에 집결, 전봉준과 손병희 남·북접 수십만이 동학교주 최시형 아래 전열을 정비했다.
그러나 훈련된 일본군의 우수한 무기에 11월 공주 우금치에서 대패한 뒤 금구 원평과 태인 三山전투를 끝으로 진압됐다.
전봉준은 입암산성을 거쳐 갈재(蘆嶺)을 넘어 쌍치면 피노리(현 금성리)로 부하였던 김경천을 찾아간다.
태인현 종성(현 산내면)에 피신한 김개남과 합류하려 지나다 들린 것이다.
김경천은 전봉준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막으로 안내해 저녁밥을 시킨 뒤 마을 全州退校 한신현에 밀고했다.
당시 전봉준 체포자는 '상금 천냥과 一等郡守'가 걸렸다.
혁명이 실패했음을 감지한 김경천은 밀고를 안해 닥쳐올 피해와 금욕·벼슬욕이 교차했을 것이다. 한신현은 마을장정 김영철과 정창욱 등과 함께 주막을 포위했다.
전봉준은 千步銃을 든채 나무단을 밟고 담을 넘었으나 이들이 총개머리와 몽둥이로 발을 때려 보행불능으로 붙잡힌다.
동학혁명 최후는 이렇게 12월 2일(음) 한 겨울 밤에 끝났다.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돼 이듬해 손화중, 최경선과 함께 처형됐다.
이로써 피노마을은 '전봉준 被逮地'로 역사에 남았고 순창군민은 치욕으로 여겼을 법하다.
지난달말 순창군은 피체지복원사업을 준공했으나 유적비 및 표지석 등에 '정읍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잡혔음을 강조한 것이 문제점으로 부각됐다.
'정읍출신 김경천' 글씨는 훨씬 크고 색인까지 해 정읍시민들은 지역분쟁을 촉발시키고, 혁명발상지 정읍 자긍심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라며 정정을 요구했다.시민단체도 대책위를 구성하고 순창군수를 항의방문 했다.
정읍시 곳곳에 항의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서명과 항의방문을 계속할 방침이다.
이에 순창 시민단체는 '최현식의 갑오동학혁명사'에 김경천이 '정읍시 덕천면 출신'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거꾸로 정읍시 전봉준 장군 허묘에 "순창 피노에 사는 김경천이 밀고했다"는 글귀가 순창출신으로 오해 소지가 있어 누차 시정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고 공개했다.
더욱 피노마을에 정읍시가 순창군과 상의도 없이 '전봉준장군 피체유적비, 정읍시장'이라는 비석을 한밤중에 세웠음도 거론했다.
피체유적비 및 표지석만을 문제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정읍시 일각에서는 '전봉준 체포자는 순창출신'이란 비석을 세워야 한다는 말도 있다.
워터게이트나 동학혁명에서 보듯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밀고자나 내부고발자는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쉽게 접근키 어렵다.
이제 정읍·순창주민들은 보다 냉정해져야 한다.
과거 역사로 지역대결이 심화되는 것은 누구에도 도움이 안된다.
양지역 시민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상호불신을 토로하고 '일괄 해결방안'을 모색할 때가 아닌가 싶다. <2005. 06. 17. 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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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부장, 고재홍
전봉준 피체유적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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