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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들여다보기 20선]논술(설.문)독서도서詩소설수필연설 2006. 9. 19. 07:58
[남자 들여다보기 20선]
<1>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책 읽는 대한민국’ 시리즈 제9부의 테마는 ‘남자 들여다보기 20선’입니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도 하지요.
사회의 급속한 변화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요즘, 남자의 내면과 남성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책들을 20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책 시장의 흐름으로 보면 이 땅의 여성들은 날로 권력이 커졌다.
1980년대까지는 억압받는 대상에 불과했지만 1990년대 초반이 되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고 외치기도 하고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돼라’(전여옥)고 선동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천년의 사랑’(양귀자), ‘하얀 기억 속의 너’(김상옥), ‘남자의 향기’(하병무) 등의 주인공처럼 남자에게서 무한한 사랑을 받는 대상이었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모순’(양귀자)에서처럼 남자 고르기를 하거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은희경)의 주인공처럼 여러 명의 애인을 두기도 했다.
21세기는 그야말로 여성의 시대다. 잘나가는 자기계발서의 저자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그들은 가정이라는 굴레를 벗고 세계로 무대를 넓혀 갔다. ‘나는 나를 경영한다’(백지연)라는 선언에 뒤이어 최상의 멘터는 자기 자신이라는 자신감(‘자기설득파워’·백지연)을 내뿜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권력을 유지해 오던 남성들의 권위는 처참하게 무너져 갔다.
여성의 상승곡선과 남성의 하강곡선이 만나는 접점에 등장한 책이 ‘아버지’(김정현)다. 이때부터 ‘여성억압’에서 ‘남성억압’으로 논의가 옮겨 갔다.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버림받고 동정받는 인간으로 전락하던 남자들은 2003년에 들어서야 스스로 ‘권위주의’와 ‘자기애(나르시시즘)’라는 동굴에서 벗어나 자기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다. 진정한 ‘남자의 탄생’(전인권)이 시도된 것이다.
그즈음 그래도 남자가 쓸모 있다는 ‘깃발’을 들고 나온 책이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다.
이 땅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장남들에게 장남이라는 굴레는 족쇄이자 고뇌였다.
책의 절반은 부모의 모든 수모와 생존을 향한 몸부림을 지켜보고 자란 장남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저자는 인생의 후반에 돌입하면서 장남의 역할에 묘한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책의 다른 절반에서 저자는 장남정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신(新)장남 행복학’을 주창한다.
늘 앞장서고 베풀 줄 알고 책임지는 장남정신이야말로 리더십이 사라진 이 시대에 진정한 리더십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조직이나 회사를 제대로 이끌어 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남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막다른 골목으로 한없이 쫓기기만 하던 남자의 ‘인간선언’으로 읽힌다.
옛날에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여자의 특권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의 여자들은 이제 울지 않는다.
나아가 세상의 주인이고자 한다.
하지만 울어 본 적이 없었던 남자들은 이제야 모든 허울을 벗어 버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실컷 운 다음 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외침에 귀 기울여 주었다는 사실은 드디어 우리 사회가 남자의 서글픈 자기 고백을 받아들일 만한 사회가 됐다는 뜻이 아닐까.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장
동아일보----------------
<2>남자,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
《결코 남자가 악의나 고의로 문명을 파괴해 황폐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은 문명 속에서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을 뿐이다.
그런 남자를 비난하는 것은 마치 아메리카 들소에게 왜 골동품 상점을 고향처럼 편안히 여기지 않느냐고 나무라는 것과 똑같다.
들소에게는 곳곳에 웅덩이·습지·진흙탕이 있는 넓은 초원이 필요하다.
남자에게는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지하실, 차고, 운동장 그리고 술집이 필요하다. -본문 중에서》
알고 지내던 방송인이 결혼할 때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남자’를 선물했다.
눈치 빠른 이들은 그 방송인이 여성이었음을 금세 알아차렸을 터다. 결혼하는 남자에게 책을 선물하는 경우는 없다.
아마도 책을 선물로 받았다면 무척 기분 나빠했으리라.
왜냐고 묻지 말기를. 본디 남자라는 족속이 다 그러니까 말이다.
한창 깨가 쏟아질 무렵 그 방송인을 만났는데, 대뜸 하는 소리가 결혼선물로 받은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단다.
비록 적령기를 한참 넘어 맺어진 사이지만 누구나 결혼과 사랑에 대한 낭만적 환상과 기대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성에 차지 않을 때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도록 이끌어 준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슈바니츠가 역시 역량 있는 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의 박학다식과 책을 많이 읽고 기억을 잘하는 박람강기, 그리고 날렵하며 풍자적인 문체는 ‘교양’에서 입증된 바 있다.
그것도 베개로 쓰기 맞춤한 분량을 소화해 냈으니 기동력뿐만 아니라 지구력도 갖춘 글쟁이다.
하지만 여성이 남자가 쓴 남자에 관한 책을 읽고 남자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 스스로 비유를 들었지만 남자와 여자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개와 고양이 같은 법이다.
그런데 그는 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저주의 장벽을 넘어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책의 구성부터 독특하다. 세 가지 색 조각보를 짜 맞춰 화려한 보자기를 만들어 내는 격이다.
먼저 8편의 ‘남자론’이 바탕색으로 깔린다. 경탄할 만한 입담으로 남자를 까발려대니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남자의 나라에 자리 잡은 ‘대도시 테스토스테론에 대해, 그리고 그 나라의 풍부한 천연자원, 특히 그 나라의 산업과 부강함의 기초를 이루는 귀중한 Y염색체에 대해서 서술’한 것이다.
지루할까봐 그랬는지 아니면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랬는지 중간에 슬쩍 12명의 ‘남성초상화’를 집어넣었다.
앞서 설명한 내용에 걸맞은 전형적인 인물을 통해 반복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다.
마지막 조각보는 ‘여성들의 희극’. 본문 내용을 여성의 관점에서 변형해 읽는 맛을 더한다.
아는 것도 많고 말도 많은 사람이 쓴 책이라 핵심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결국 남성과 여성과의 다름이 어디에서 비롯하고 있는지를 톺아보고 있다.
그 가운데 핵심은 ‘모든 남성 유전자는 성공적인 남자의 몸속에만 살아왔다’는 구절에 있다.
투쟁과 경쟁에서 살아남아 세운 것이 바로 남자의 나라라는 것이다.
“여자들이여! 이 점을 이해한다면 남자들의 그 터무니없는 짓들을 두루 용서할 수 있으리라”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덧붙이는 한마디. ‘남자’를 선물하면서 내털리 앤지어의 ‘여자’도 함께 넣어두었다.
그녀의 남자가 읽어보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여자’는 읽혀지지 않았다는 전언이다. 내가 보기에 이래서 남자의 나라가 몰락하고 있는 듯싶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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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자 vs 남자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배신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남자들의 삶의 터전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충성이나 의리에 대한 남자들의 무의식적 집착은 그 뿌리가 놀랄 만큼 깊고 집요하다.
천연기념물인 ‘정이품송’에 대한 민간설화는 ‘충성심’의 원시적 속성을 잘 보여 준다. ―본문 중에서》
어디선가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온다.
매우 낮고 느린 어조로 부르는 동요 ‘오빠생각’.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매주 한 명씩 우리 사회의 유명 인사를 초청해 자신이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나 시의 한 구절을 낭독하고 노래를 부르는 ‘낭독의 발견’이란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
무대에서 한 정신과 의사가 상념에 잠긴 채 동요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저어새가 짝을 부르듯,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던’ 세상의 모든 오빠들을 기다리는 여동생의 목소리. 오빠생각의 주인공, 바로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박사였다.
2001년 나온 이 책은 저자에게 ‘남성심리전문가’라는 칭호를 확실하게 붙여 준 심리평전이다.
이 책의 흥미로움은 우리가 흔히 동형의 범주에서 비교하던 세간의 비교 틀을 넘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남자들을 한테이블에 마주앉게 한 대담한 역발상에 있을 것이다.
즉, YS 하면 DJ, 김우중 하면 정주영. 이런 비교의 틀을 깨고 그녀는 이건희에게 조영남을 가져다 붙이고, 장세동에게 전유성을 가져다 붙인다.
어째 이들에게 비슷한 점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싶은데, 저자의 조리 있고 섬세한 설명을 듣다 보면 어느덧 무릎을 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 가서 기도할 때 고개를 숙이지 않고, 늘 사진을 찍을 때면 뒷짐을 지는 김영삼 대통령의 모습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진 오만함을 짚어내고, 가장 빨리 먹을 수 있다는 비빔밥과 설렁탕을 시켜 먹은 김우중 회장에게서는 조증(躁症)의 증후를 찾아낸다.
반면 이외수, 조영남, 마광수처럼 시대를 거스르며 진정한 자신을 찾아 헤매는 자유인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책을 읽다 보면 세상의 권력자로 대한민국 남성들이 가진 어마어마한 가면을 벗겨 내고 그 밑의 열등감이니, 나르시시즘이니, 패배에 대한 두려움과 내면 풍경을 보여 주는 저자의 통찰력이 새삼 든든하고 매섭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강준만 교수가 사회적인 관점에서 현대 인물 사상을 펼친다면, 저자는 심리적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현대 남성들을 연구한 첫 케이스인 셈이다.
아울러 저자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남성성의 신화를 깨고 자유롭고 부드럽고 융통성 있는 새로운 남성성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저자의 클리닉에 왜 이 시대의 남성들이 북적이는지 이해가 간다.
누나 같은 든든함과 여동생의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이 정신과 의사에게 남성들은 치열한 자기 대면과 위로감을 동시에 구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고 보면 저자가 쓴 ‘남자 vs 남자’가 이 시대의 남성들에게 가하는 ‘칼’이라면 그녀가 부른 오빠생각은 그 환부에 바르는 ‘연고’일 터. 문득 이것이야말로 정혜신, 저자 특유의 ‘색기 없는 색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으로서 언젠가 여자 대 여자라는 평전을 쓴다면, 유독 대한민국 남성에게 관심을 갖는 정혜신 박사의 심리를 꼭 한번 분석해 보고 싶다.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교수 상담·행동치료학과
동아일보----------------
<4>남자들, 쓸쓸하다
《필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가 더불어 사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동류항으로 묶이면 서로 이해 못할 것이 없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든 남편과 아내의 관계든 간에 최종적으로 우리가 만나야 할 지점은 인간의 자리이다.
‘거울 앞에 돌아온 내 누님 같은 꽃’이 되어 만날 때, 그 눈물겹고도 따뜻한 자리에서 만날 때 최종적으로 붙들어야 하는 이름은 인간뿐이다. -본문 중에서》
그리스신화에서 오디세우스는 10년간의 방랑생활 가운데 7년을 칼립소와 함께했다.
칼립소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오기기아 섬에서 오디세우스와 영원을 함께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돌아누운 오디세우스의 등을 바라보며 그 쓸쓸함을 읽고 그를 페넬로페에게 떠나보낸다.
그렇다. 작가의 말처럼 돌아누운 모든 남자는 쓸쓸하다.
‘남자들, 쓸쓸하다’는 남자가 왜 쓸쓸해지는지를 고백하고 그 쓸쓸함을 나누고 시간을 함께 건너갈 여자들을 기다리며 쓴 에세이다.
얼핏 자전적 성격 때문에 작가의 연배와 비슷한 사람이라면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처럼 꼭 맞게 느껴질 듯하다. 여자보다는 남자들에게 더 통쾌하게 읽힐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화해라는 점에서, 또한 남녀의 구별이 없는 인간의 길로 눈길을 던진다는 점에서 이미 남녀와 노소의 경계는 없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에서 작가는 남자가 쓸쓸해진 이유를 엄살 부리듯 한바탕 늘어놓고 슬쩍 여자들에게 남자의 쓸쓸함을 떠넘긴다.
요컨대 남자의 쓸쓸함은 권력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권력을 뒷받침했던 것이 여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여자들은 그 역할을 손에서 놓았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적어도 여자들이 남자를 권력자로 뒷받침하는 시대는 아니다.
이제 쓸쓸함의 원인을 찾았으니 해결을 해야 할 텐데, 그것이 바로 두 번째 부분이다.
고대인이나 쉬운 해결을 원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그 해결을 여신에게 기탁할 법도 하지만 작가는 여자들에게 떠넘기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들이 듣기에 서운한 말들을 자근자근 풀어놓는다.
이쯤 되면 원하지도 않던 권력을 누리다가 이제 그 권력을 잃고 쓸쓸해진 남자의 넋두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상은 쓸쓸해진, 그래서 좀 더 멀리 볼 수 있게 된 남자의 눈으로 본 이 시대의 모습이다.
신이 사라졌을 때 이미 인간은 쓸쓸해졌다.
굳이 책 말미에서 작가가 히말라야를 찾고 카일라스를 찾으려고 하는 것도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산 속이든 도시 속이든 사람들이 살고 이제 남은 것은 ‘너와 나’라는 실존뿐이다.
너와 나는 함께 손을 잡고 긴 시간의 강을 건너야 한다.
여기서 비로소 행간에 숨은 인간이라는 단어가 수면 위로 부상한다.
부사 가운데 가장 웅숭깊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함께’라는 말이 아닐까?
남녀가 함께, 노소가 함께, 너와 함께, 그들이 함께, 우주가 함께. 남녀가 만나 함께 살면서 사랑가를 주고받던 춘향과 몽룡의 첫날밤처럼 늘 뜨거울 수는 없다.
인간의 삶에도 계절이 있어서 요즘처럼 가을이 오고 단풍이 물들고 잎이 지면 거리를 지나는 바람과 더불어 쓸쓸함도 찾아든다.
돌아누운 남자 또는 여자의 등을 보며 쓸쓸해하지 말고 가만히 몸을 움직여 서로를 보듬을 일이다.
그래서 ‘거울 앞에 돌아온 내 누님 같은 꽃’이 되어 서로의 이름을 부를 일이다.
이경덕 저술가
동아일보---------------
<5>우리 속에 있는 남신들
《남신에 관해 안다는 것은 자기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을 돕고 남성들이 스스로에 관해 남들과 생각을 나누는 길을 열어 보며 많은 남성과 여성들이 자아를 실현하고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심리학자 롤로 메이는 기쁨을 “고양된 의식과 어울리는 감정,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경험에 수반되는 분위기”로 정의 내렸다. 원형들은 곧 잠재력이다.
우리 속에는 ― 우리의 가부장제 문화 속에는 ― 해방될 필요가 있는 남신들과 억제될 필요가 있는 남신들이 있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요즘 들어 한국 사회 남성성이 달라진다. ‘뿌리 너무 깊은 나무’였던 가부장적 권위주의 남성상이 흔들리고 새로운 남성상들이 나타나 서로 부닥친다.
영화에서도 ‘영웅 같은 아버지’와 ‘어깨 처진 가장’, ‘터프가이’와 ‘꽃미남’이 엇갈린다.
남성상의 바탕인 남성성이란 처음부터 하나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역사 흐름이나 문화의 틀 속에 서로 다르게 만들어지고 부닥치고 새로 나타나곤 한다.
오래도록 가부장적 권위주의 남성상,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남성성이 마치 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남성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생각과 마음을 가두고 옥죄고 있었을 뿐이다.
이 책은 그리스신화의 남신들을 통해 남성성의 원형을 찾아 나선다.
원형이란 사람들 마음속 깊이 똬리 튼 채 저 안에서부터 성을 규정짓는 타고난 유형이다.
그 원형의 밑그림으로 무소불위한 권위주의 아버지인 제우스부터 신비와 황홀을 추구한 철없는 이단아 디오니소스까지 여러 남신이 등장한다.
이 원형은 신화처럼 개인에게 깃들어 있기보다 집단 무의식에 숨어 있는, 모두들 알게 모르게 갖고 있고 내면화시킨 무의식의 부분이다.
그러면서 감정과 이미지를 불러일으켜 살아 숨쉬는 개인의 존재며 행위, 생각이며 느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런 원형과 원형에 따른 유형화는 사람의 속성이나 성격을 대뜸 파악하는 데 쓸모 있지만 자칫 억지나 막무가내로 가르고 나눌 수도 있다.
사람은 그렇게 한 틀로만 꼴 지워진 존재는 아니다.
이를 테면 제우스 같은 유형이면서도 헤르메스나 아폴로, 그리고 디오니소스 같은 속성을 함께 간직한 남성도 있게 마련이다.
이 책의 장점은 원형의 틀을 분석하면서, 이를 통해 가치를 강화하고 힘을 부여하는 일정한 남성성의 강요, 곧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성격을 비판한다는 데 있다.
실제로 오랜 역사를 통해 가부장적 권위주의 남성성의 틀은 다양한 유형을 무시한 채 유일한 남성성의 기준으로 대부분의 남성들을 억눌러 왔다.
사회의 제반 제도, 의식, 문화가 모두 그랬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달라지고 사람들도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 지배했던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남성성의 원형도 사라질 때가 된 것이다.
책 끝부분에 나오는 제우스의 첫 부인이면서 뒤안길로 사라진 지혜의 여신 메티스가 예언대로라면 낳았을 아들이 그 상징이다.
가부장 질서와 남성중심의 폭력과 지배, 가름과 나눔의 문화를 이겨내고 생명 중심의 보살핌과 돌봄, 나눔과 섬김의 문화를 만들어 갈 새로운 남성의 원형이 그것이다.
이 책은 원형들을 통해 바로 지금, 여기 살아가는 남성의 자신을 찾고 제 모습을 들여다볼 뿐 아니라, 나아가 달라지는 세상에 새롭게 태어나 살아갈 남성의 원형을 찾아나서는 데 길잡이가 되어 준다.
정유성 서강대 교수 교육문화학
동아일보---------------
<6>남자들에게
《천연기념물은 희소가치가 있으니까 천연기념물이다. 역시 그대로 두는 편이 좋겠다.
그러나 이런 남자가 진짜 나쁜 놈이다. 귀여운 구석이란 조금도 없다.
빈틈투성이인 것 같은데 실제로는 빈틈이란 바늘만큼도 없다. 이런 남자는 전면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
여자뿐 아니라, 최대공약수적인 남자들도 말이다. -본문 중에서》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한 남자가 이 책 속의 ‘천연기념물’ 대목을 말하면서 내쉰 한숨 때문이었다.
그 한숨 속에 숨은 남성의 복잡한 심경이라니.
시오노 나나미는 남자들의 허영심을 교묘하게 부추기는 데 출중하다.
그 자신이 정의한 대로 ‘갖고 싶으나 갖지 못한 것을 선망’하는 남성의 특질을 포착하고 있다.
게다가 ‘남자들에게’라는 제목이니, 남자들은 마치 러브레터라도 온 듯 착각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착각은 자유다. 게다가 유럽풍의 러브레터이니, ‘냄새’부터 뭔가 다르다.
이 책은 초판이 1989년이니까, 아직 ‘불쌍한 남자, 흔들리는 남성성’이 대세가 아닌 시절에 나온 책이다.
유전자와 호르몬을 들이대며 남성을 적나라하게 과학적으로 분해하지도 않거니와 ‘먹이사슬, 정글, 위계사회, 신계층 사회’ 등의 구조 속에서 찌들어 가는 남성을 사회적으로 분석하지도 않는다.
하긴 그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어차피 삶이란, 과학서도 사회분석서도 아닌, 에세이다.
이 에세이의 첫 대목, ‘스타일’에 대한 정의에 이르면 거개의 남성은 솔깃해진다. “그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줄 아는 것이 스타일이다.” 나는 스타일이 있나 없나, 나는 ‘자기 냄새를 피우는 자’인가 아닌가, 나는 ‘매사에 대처하는 자세(스타일)’가 있나 없나, 남자들은 전전긍긍할까 아니면 자신만만해할까.
게다가 ‘천연기념물’의 대목에 이르면 남자들의 마음은 어디로 갈까?
이 책은 도도하다. 사치스럽다.
시오노가 그리는 남성성을 한마디로 하면 ‘섹시한 지성, 관능적인 권력’이다. 머리가 좋은 만큼 자기 냄새를 피울 줄 알아야 하고, 권력은 관능을 건드리는 능력이 없이는 허무할 뿐이다.
이쯤 해서 시오노의 남성관 또는 인간관을 비판할 남녀도 무척 많을 것이다.
권력에 대한 지독한 관심, 보통 능력을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지독한 호감에 질린다, 일본인의 유럽 콤플렉스다, 오죽 ‘로마인’에게 빠졌으면 ‘남자의 관능은 목덜미에 있다’며 로마 시대의 헤어커트를 탐탁해하느냐, 오죽 제국주의적 세계관에 빠졌으면 영국 신사의 자신만만한 분방함에 경탄하느냐는 둥. 시오노가 카이사르를 연인으로 삼고 마키아벨리를 친구로 삼았음을 안다면 더욱.
하지만 시오노의 개인적 호불호를 마땅해하건, 못마땅해하건 이 책은 ‘문제는 스타일이다’라는 시대적(?) 또는 영원불멸한 인간적 명제를 쿨하게 짚어낸다.
이미지와 콘텐츠를 어떻게 한그릇에 담을 것인가라는 명제다. 이 세상에 황금 자체에 반하는 인간, 황금의 광채에 반하는 인간 두 부류가 있다면 시오노는 단연 황금에도 반하고 그 광채에도 반하는 인간이다.
시오노는 스타일이 있다.
이 책은 스타일이 있다.
남자를 스타일이라는 난관에 빠뜨려 놓고 시오노는 ‘우리 여자들은 남자들을 존경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해요’라고 속삭인다.
남자는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기법이다. 여자가 남자를 부려먹는 영원한 기법이 아닐 수 없다.
여자는 한수 배우고, 남자는 한수 접을 수밖에 없다.
김진애 도시건축가 서울포럼 대표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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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남자의 탄생
《사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아버지 살해의 역사였다.
다만 그것을 아버지 살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는 새로운 세대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권위를 부정하고 아버지를 살해했던 그 사람들도 세월이 지나면 아버지처럼 권위주의의 화신이 되었다.
그들도 ‘동굴 속 황제’였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근·현대사에 흐르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일관성이다. ―본문 중에서》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그토록 흥겹고 포용력 넘치는 ‘화해’의 축제에도 ‘아버지의 자리’는 없다는 사실이다.
다름 아닌 ‘아버지’ 자신이 “(여자가 되려는 아들을) 다시는 안 본다”며 스스로를 가두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더는 ‘아버지’이기를 포기하고서야, 자신 안의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그 잔치에 자신을 기꺼이 초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저자 자신의 유년기에 돋보기를 들이댄 책이 ‘남자의 탄생’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의 집필 동기는 10여 년간 거듭해 온 실패한 삶의 경험이다.
저자는 가족 직장 친구 등 ‘관계의 실패’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왜 실패했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한다.
그는 또 우리 사회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것이 사회 탓인지 개인 탓인지 함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런 일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 결과물이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어머니의 공간에서 양육되고 아버지의 질서에 의해 완성되는’ 한국 사회의 남성은 ‘동굴 속의 황제’들이다.
동굴 속의 황제는 자신의 우월함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타인에게서 인정받으려 하며, 그 같은 신분관계에서 생겨나는 심리적 영토를 끊임없이 넓히려는 행동원칙을 가진다.
이러한 태도는 특히 개방된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다.
또 요즘 아이들이 “과거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이며 훨씬 덜 위선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이끌어 줄 만한 통제 장치를 상실한 채 심리적 영토의 추구라는 황제적 특성만 강화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이런 교육방식, 육아방식이 계속된다면 우리나라는 정말 동굴 속의 황제들의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동굴 속의 황제에서 벗어나는 길로 저자는 “내 안의 아버지, 네 안의 아버지를 살해하라”고 메시지를 던진다.
이것은 실제의 아버지를 죽이라는 무시무시한 패륜의 선동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이 각인된 ‘이상적인’ 사람의 이미지를 죽여 없애라는 의미이다.
아버지를 대신하는 또 다른 아버지가 되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찍이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갈파한 것처럼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 반대 짝인 남성 또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는 지금껏 어떤 남성들을 만들어 왔으며 만들고 있는가.
남성 또는 여성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사회는 과연 건강한 사회인가.
성별화되지 않은 개인을 만들어 내는 사회란 불가능한 것인가.
한국 남성의 가장 정직한 초상 중의 하나일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이다.
변정수 미디어평론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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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남자를 보는 시선의 역사
《다빈치의 인체 해부학 연구는 인간, 특히 남성의 신체가 모든 사물의 척도가 된다는 생각을 그 근본에 두고 이루어졌다.
뒤러가 그린 비례 드로잉도 같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카데미의 미술가들은 실제 남성 누드를 보고 습작하면서 모델이 보여 주는 형태를 어떻게 일반화하고 또 이상화하는지에 관해 배웠다. -본문 중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벨베데레의 아폴론.
이 세 남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벌거벗었다는 것이다.
왜 미술가들은 투지와 용기의 상징인 ‘다비드’와 사유하는 인간의 전형인 ‘생각하는 사람’, 완벽한 이상미의 표본인 ‘아폴론’의 옷을 죄다 벗긴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원하면 ‘남자를 보는 시선의 역사’를 펼쳐야만 하리라. 책의 주제는 파격적이면서 독특하다.
왜냐하면 남성의 알몸을 감상하면서 과연 남자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탐색하기 때문이다.
저자인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남성 누드에 남자의 정체성뿐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남성형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남성 누드는 남자에 대해 알고 싶은 모든 것의 알파이며 오메가라는 얘기다.
이런 도발적인 저자의 이론에 화답하듯 책에는 다양한 남성들이 나체를 선보이며 속내를 털어놓는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의 남성 ‘얼짱’ ‘몸짱’은 당대인들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갈망한 나머지 남자 누드를 창안한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독자가 공감한다 싶으면 이번에는 헤라클레스형 남성들이 나선다. 그들은 근육질 몸매를 과시하며 가공할 힘과 초인적인 의지, 영웅심을 강조하기 위해 알몸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또한 남자의 몸에 여성적 분위기를 장신구처럼 걸친 꽃미남들은 두 성을 통합한 양성미를 구현하기 위해 남성을 벗고 여성을 입었다고 속삭인다.
그뿐 아니다. 처참하게 살이 찢긴 희생자들은 상처투성이 알몸을 드러내며 인간이 육체적 고통에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깨닫기 위해 나체가 되었다고 호소한다.
자연과 동화된 웰빙족 삶을 구현한 남자 나체, 현대인의 변화된 성적 취향이 투영된 동성애적 누드, 해방된 여성의 성욕을 반영한 남성 누드도 눈길을 끈다.
독자는 각양각색의 남자 누드를 감상하면서 시대적 취향과 성적 욕구가 어떻게 남성의 몸을 재단했는지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불끈 치솟는 의문 한 가지! 남자의 본성을 공부하기 위해 보호막을 벗긴다는 책의 주제에는 100% 공감한다.
하지만 왜 굳이 알몸일까?
해답은 벌거벗은 몸보다 강렬한 언어는 없기 때문이다. 나체는 인간의 감각에 테러를 가하기 때문에 생각이나 감정을 알리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미술가들이 사람을 자주 발가벗기는 것도 작품의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친밀한 관계는 스스럼없이 상대에게 속살을 보여 주는 사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독자여, 그대가 남자의 세계를 탐험하고 싶다면 지도 대신 남자의 몸에서 발산하는 원초적 언어를 먼저 배우라고 권하고 싶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국민대 겸임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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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남자의 미래
《여성은 남성보다 말을 더 잘한다.
뇌에 대한 연구 결과 말로써 문제를 해결할 때 여성은 남성보다 더 넓은 뇌의 영역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사소통 능력에서 근본적이고 생물학적인 차이가 나는 것이다.
여성의 타고난 이 기술이 또 다른 선천적 자질, 즉 남을 돌보고 양육하는 능력과 결합한다면 사회생활의 주요 영역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 의해 지배될 것은 분명하다. ― 본문 중에서》
하나의 종(種)으로서 남자는 어떤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
이제까지 우리가 지녀 왔던 고정관념 즉, ‘남자는 지배하고 여자는 지배받는다’는 고정관념은 미래에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남자 독자라면 조금 섭섭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권력이동은 남자로부터 여자에게로 분주하게 움직여 가고 있다.
미래에는 여자를 향한 권력이동이 가속화할 것이다.
이런 추세는 변할 기미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대세라는 말이다.
트렌드 분석가 매리언 살츠먼 등 3인이 남자의 미래를 조망한 최근작 ‘남자의 미래’는 이미 현실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인터뷰와 관찰을 곁들여 생생하게 전해 준다.
물론 남성 우위의 문화가 지배하는 이 땅에서는 미국보다 좀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이제는 완력에서 힘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과 서비스 중심의 세계는 근육이 힘의 원천이 아니다.
대인관계와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서비스와 아이디어를 네트워크화하는 경제에서 여성들이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현실이 보여 주고 있다.
게다가 성적인 기능에서 시작해 다양한 영역에 걸쳐 남성이 필수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선택적인 존재로 바뀌어 가고 있다.
한마디로 선택의 헤게모니는 과거처럼 남성이 쥐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갖는 쪽으로 변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의 말처럼 “자동차 엔진에서 스페어타이어” 신세로 전락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남자들은 새로운 문화에 서슴없이 적응해 나가야 한다.
가족 내에서의 존경심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고 존경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스스로 대인관계 기술이나 일을 복합적으로 처리하는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더욱 융통성이 있어야 하며 계획을 세우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동시에 일과 가정 그리고 인생의 목표 사이에 균형을 잡는 법도 배워야 한다.
한마디로 더 나은 ‘프로젝트 관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게다가 남자들은 자신과 자신의 직업 및 직책과 관련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싸워야 할 대상이 여성이나 다른 남성이 아니라 책에서 저자가 말하듯 “남성이 항상 최고이며, 언제나 최고일 것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과 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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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막대에서 풍선까지-남성 성기의 역사
《남성은 자신의 신비 때문에 자기 의지를 이 세계에 관철하려고 한다.
그러나 남성이 언제나 그 신비의 살아 있는 상징인 음경에 자기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음경은 자기들만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안녕? 나일세. 날 몰라보겠는가?
자네 중심 잡아 주겠다고 늘 붙어 다니지만, 실은 천방지축 건방이나 떠는 변덕쟁이 거시기일세.
내게도 멀쩡한 이름이 없는 건 아니나, 왠지 다들 거시기 거시기 하니, 그냥 편한 대로 가지 뭐.
이 친구 난데없이 왜 이러나 싶겠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좀 진지한 얘길 하려고. 모처럼 책을 한 권 읽었거든. ‘
막대에서 풍선까지: 남성 성기의 역사.’ 한마디로 거시기인 내가 주인공인 셈이지, 껄껄. 프리드먼이라는 기자가 쓴 건데,
무엇보다 책의 원제목이 맘에 들어.
‘A Mind Of It's Own.’ ‘나만의 본심이 따로 늘 있어 왔다’ 뭐 그런 뜻 아니겠나.
하긴, 자네 말 잘 안 듣고 되바라진 날 보면 딱이지.
하여튼 이 책은 그런 나와 자네의 밀고 당기는 관계를 까마득한 옛날부터 파란만장하게 담아내고 있더군.
애초 나라는 존재는 삼라만상을 가늠하는 잣대나 다름없었지.
만물의 척도가 인간이고, 그 인간은 남성이었으니, 당연히 거시기인 내가 그 잣대일밖에. 툭하면 신격화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어.
아, 근데 아담과 이브가 나무열매 하나 잘못 따먹는 통에 내 신세도 망했지 뭔가.
그놈의 원죄를 내가 대대로 옮긴다는 거야. 졸지에 악마의 상징으로 전락해 버리더군.
나를 손에 쥐면 악마와 악수하는 거라나.
그 땜에 숱한 아녀자들 마녀로 몰려 새카맣게 타 죽었지.
사람 잡는 핑계엔 어김없이 악마의 거시기가 등장했으니까.
그 암흑시대에서 날 구해 준 분이 바로 다빈치 선생이라네.
그 양반 비록 내 몸에 칼 대고 헤집긴 했지만, 그를 통해 비로소 나는 살과 피를 가진 몸체가 될 수 있었던 거지.
풍요의 신도 악마의 막대도 아닌 인간의 일개 기관 말이야.
오, 그렇다고 내가 덜 중요해진 건 아닐세. 인간의 광기가 어딜 가겠나.
나를 내세워 또 사람 잡는 일을 벌이더군.
이번엔 마녀가 아니라 검둥이와 유대인. 거시기 생긴 게 흰둥이완 다르다나.
인간의 척도가 인종의 척도로 둔갑했을 뿐 기가 막히긴 마찬가지.
그런 거시기가 프로이트 박사를 만난 건 실로 행운이었지.
그분은 나를 통해 무의식이라는 미증유의 영역을 발견했거든.
인간과 거시기의 실체적이고 근본적인 관계라는 점에서, 다빈치 선생의 생물학적 쾌거를 프로이트 박사는 정신의 영역에서 이룬 셈이지. 아마 인간과 관련해 내가 가장 중대한 의미를 부여받은 시기일 거야.
그래서였나, 곧장 반작용이 오더군.
이번엔 여성 쪽에서 들고일어났어. 나는 또다시 내 본심과 무관하게,
남근이데올로기의 표상이 되고 말았지.
타도해야 할 정적(政敵)처럼 취급하더군.
웃기는 건 그래도 그때가 낭만이 있었다는 거야.
요샌 얄궂은 알약 하나로 나를 고무풍선처럼 멋대로 부풀렸다 말았다 하니, 말 잘 듣는 연장 나부랭이가 따로 없지.
어쨌든 책을 보니, 인간들 그동안 날 붙잡고 무던히도 못살게 굴었더구먼.
붙잡기 만만해서인가, 여하튼 물고 늘어지자 자기들 온갖 면면이 고구마 구근처럼 줄줄이 드러나는 꼴이야.
하긴 달리 보면, 자기 존재의 신비를 깨치려는 처절한 투쟁으로도 읽혀 가상한 점도 없지 않네 그려.
그래 봤자 내 본심은 여전히 따로, 오늘도 나 ‘꼴리는’ 대로 놀아날 테지만 말이야….
성귀수 시인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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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남자는 다 그래!
《남자는 결코 철들지 않는다.
절대 어른이 안 된다.
기회만 있으면 놀려고 한다.
사랑도, 명예도, 전쟁도 다 놀이다.
탈세도 일종의 경찰 놀이다.
남자들은 수집광이다.
어릴 적 딱지나 구슬을 모았듯 이제는 자동차를 수집하고, 집을 수집하고, 여자친구와 휴대전화를 수집한다.
남자들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어 한다.
축구를, 섹스를, TV를 즐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살다 보면 뜻대로 안 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남자들은 의기소침해지고 자기 연민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본문 중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연세가 지긋한 여성분들에게서 종종 이런 말을 듣곤 한다. “남자는 모두 똑같다.” 이 단순하면서도 부정적인 뉘앙스의 남성 평가에는 그녀들이 지난 세월 수많은 남성들과 부딪치고 고생하며 체득한 경험이 녹아 있어 함부로 부정할 수가 없다.
유럽 남자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독일 문화비평가 에릭 헤그만도 같은 주장을 한다.
책 제목부터 ‘남자는 다 그래’이다.
그는 남자들은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양성애자든, 자상한 사람이든 마초든 다 똑같다고 한다.
하나같이 철이 없으며 3분에 한 번꼴로 섹스를 생각하고, 좋은 차에 자존심을 걸며, 의무와 구속을 싫어하고, 무리를 짓기 좋아하고, 엄살이 심하다는 것이다.
모든 남자가 왜 똑같다는 걸까.
그것은 남자들의 원초적인 욕망과 본성이 동일한 데다 성 정체성과 역할을 사회적으로 훈련받아 행동양식도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남성성을 진지하게 분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저자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연스럽게 남자의 실상을 까발리는 방식을 취한다.
각 장은 한 편의 시트콤처럼 구성돼 매우 코믹하고 재미있다.
자기 경험과 연결하며 맞장구를 칠 만한 대목도 자주 나온다.
지나칠 정도로 솔직해서 점잖은 사람이 읽기에 불편한 감도 없지 않다.
저자가 동성애자라는 사실도 독자에 따라서는 불편함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게이 남성은 남성을 관찰하기에 좋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남성이면서 남성의 파트너이고, 여성의 솔직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한번쯤 남성의 실체에 대해 아무런 수식과 포장 없이 접근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엄숙함은 잠깐 접고, 술 취해 난장판을 벌이고 아이들 장난감으로 놀며 비뇨기과 의사 앞에 성기를 드러낸, 있는 그대로의 남자를 구경하면 된다.
약간의 불편함과 재미를 함께 즐기면서 남성의 원초적인 본성이 무엇인지, 그것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여성 독자들이 남자를 알고 대처하는 데 이 책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남성이 구조적으로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보듬어야 하고, 무엇을 치유해야 할지에 대해 잠깐이라도 생각할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한 가지 있다. 그
저 남자들의 생활을 시시콜콜 드러낸 이야기가 어떻게 코미디처럼 우스꽝스러워졌을까 하는 것이다. 저자가 글을 재미있게 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남성적이라 믿고 추구하는 것들 중 상당수가 실상은 욕망을 세련되게 포장한 것이며, 그것이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낡고 어색하며 어이없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김병후 정신과 전문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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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곱 가지 남성 콤플렉스
《이제 남성과 여성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평등이란 학의 다리를 잘라 오리 다리에 잇거나, 산을 헐어 골짜기를 메운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남성도 여성도 어느 한쪽을 다른 쪽에 맞춘다고 서로 평등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틀에 자신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사실에 대한 ‘위대한 거부’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본문 중에서》
‘싸나이’속에 숨은 겁먹은 아이
‘일곱 가지 남성 콤플렉스’는 남성이 아닌 여성들이 쓴 책이다. 저자들은 서문에서 “우리는 여성의 눈으로 남성의 삶을 다시 보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라고 밝혔는데, 이들의 시도는 남성을 더는 적대적인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아울러 남성의 입장에서는 여성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해함으로써 한국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남성에 대한 설문응답을 토대로 남성 역할과 관련된 콤플렉스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였다.
책이 소개하는 남성 콤플렉스는 외면적으로는 전통적인 남성이 표방하는 ‘강하고 능력 있는 남성’을 지키려고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그 반대를 비밀스럽게 추구하려는 자아상 간의 괴리를 반영한다.
이러한 괴리는 ‘온달 콤플렉스’를 가진 남자가 겉으로는 “보리쌀 서 말이면 처가살이 안 한다”라고 말하면서도 “기왕이면 배우자나 처가가 경제적 여유가 있었으면…” 하고 내심 바라는 이중성에서 잘 드러난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에 따르면 인간이 타인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부정하면 이상적인 자아상과 현실적인 자아상 간의 괴리가 생기고, 그 괴리가 심할수록 더 큰 스트레스를 겪는다고 한다.
즉, 이중적인 모습으로 사는 한국 남성들은 힘들 수밖에 없다.
‘영웅의 외면 속에 숨은 위축된 어린아이’의 모습을 지닌 한국 남성이 전통적 가정의 해체, 평생직장 개념의 상실, 급변하는 사회의 요구라는 격랑에 맞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저자들은 “껍질뿐인 지배 의식을 움켜쥔 외로운 남성보다 울 수 있고,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고, 가족에게 사랑받는 남성이 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잠정 결론을 맺는다.
이에 공감하면서 남는 아쉬움은 한국 남성이 가정과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부분에 대해 더욱 따뜻한 시각이 있었더라면 하는 점이다.
저자들은 ‘고독한 아버지’상이나 ‘남성다움’을 세태에 적응하지 못한 모습 또는 ‘껍질뿐인 지배의식’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지만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성취를 위해 매진하는 모습이 근대 한국사회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심리학자 밀러와 롤닉이 양가감정은 변화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본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현상이 만족스럽다면 변화는 필요 없을 것이다.
남성 콤플렉스에서 드러나는 과장된 외면과 위축된 자아상 간의 괴리를 부정적인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변화된 세태에 적응하는 과정의 진통이며 그 속에 움튼 변화에의 의지를 읽는 긍정적인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남성이 여성과 동등하게 동반자로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곱 가지 남성 콤플렉스’는 변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강조한 의미 있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동귀 연세대 교수 심리학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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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남자의 인생지도
《삶에서 두 번째 성인기로 들어가는 남자들은 육체적인 힘과 긍정적인 공격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창의력과 직관력과 애정을 개발해야 한다. 이제는 남자들도 다양한 특성을 개발해야 한다. 육체적인 힘처럼 한 가지 측면만 강조하는 시대는 갔다. 21세기의 새로운 남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테우스처럼 변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본문 중에서》
여성이 쓴 남성 연구서다. 익숙한 주량을 못 견디고 속상해하거나 어느 날 갑자기 겪는 발기 불능에 충격받은 평범한 남자부터, 심각한 우울에 빠져 버린 사람까지 수많은 남성을 만났다.
늙는다는 것. 남자의 모든 특권을 누림으로써 부러움의 대상이던 옛 스승이 칠십을 조금 넘기며 건강 때문에 ‘재미있는’ 것은 전혀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을 생각하면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나에게도 얼마 후 곧 닥치게 될 일인 것이다.
저자가 관심을 기울인 대상은 ‘남성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분골쇄신하는 남자들이고, 그들의 편안한 노후를 위해 도움 될 만한 충고까지 내놓고 있다.
이 책은 ‘아,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하고 실감하는 남성들이 읽어볼 만하다.
삶이란 매순간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잘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의 사고방식, 행동 패턴을 과감히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중장년층 남성들이여, 그대들은 이제 싸움판의 전사도, 침실에서의 호랑이도 아니다.
저자는 위기라는 말 대신에 ‘통과점(passage)’이라는 부드러운 용어를 사용한다.
즉 인생의 고비는 그것으로 어떻게 되고 마는 게 아니라, 누구나 통과하는 과정이고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스트레스나 외적 장애물보다 그에 반응하는 각자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늙는다고 슬퍼하지 말고 다시 새 출발하는 ‘두 번째 성인기’로 삼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남자들에게 프로테우스가 되라고 권유하고 있다. 유연한 자아를 갖고 변신하라는 것이다.
변신을 경박하고 추하게 보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문제라는 생각도 들지만 곧 바뀌지 않을까 생각된다.
파괴적 자기 방어는 금물이다.
우울, 알코올 중독, 암 발병, 도박, 자살 시도 같은 현상이 다 그로 인한 것이다.
미리 목표를 수정하고 꿈을 조절하는 현실 감각도 필요하다.
호기심과 열정을 유지하고 성적 욕망도 소홀히 다루지 말 것이며, 삶의 애환을 같이할 배우자와 자녀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어린 시절 지향했던 것들 가운데 진정한 소망이 있을 수 있으므로 한번 시도해 봄 직하다.
창의성과 열정이 다시 샘솟을 것이다.
이런 자세라면 60대도 늦은 나이가 아니다.
활력 있는 삶을 통해 젊은이들에게도 부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런 모습 자체가 가장 소중한 선물이자 교육이 될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남자들이 점잖고 건전하게 늙어 가기를 권유하고 있으나, 남자를 너무 순수하게 보는 면도 있다.
좋은 말로 조언해도 여자 돈 출세와 권력을 탐하며 싸우다 소중한 인생을 소진해 버리는 어리석은 남성이 많은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김영진 정신과 전문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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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따로와 끼리: 남성지배문화 벗기기
《‘가름과 나눔’ ‘따로와 끼리’라는 남성 중심 지배 문화는 그 자체로도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문화는 사람의 본디 생김까지도 억압하며 나아가 그것을 무차별적으로 사람 사는 일 전체에 적용한다. 때문에 이러한 적용방식 또한 폭력과 억압일 수밖에 없다. 남성 중심 지배 문화는 가장 전형적인 ‘구조적 폭력’인 것이다. ―본문 중에서》
저자는 이 책에서 성 평등을 화두로 우리 사회를 비판적으로 응시한다.
그 결과 드러나는 것은 터전이 헝클어지고 무너져 내린, 위기에 처한 삶의 모습이다.
그 위기의 뿌리를 이루는 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 팽배한 남성 지배 문화의 폭력성과 억압성이다.
저자의 눈에 비친 권력 지향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 지배 문화의 본질은 ‘따로와 끼리’ 혹은 ‘가름과 나눔’이다.
우리 삶에 만연한 편가르기와 패거리주의, 이에 맞닿은 억압과 차별은 왜곡된 남성 지배 문화의 사생아들이다.
외환위기를 전후해 가정에서의 소외와 불안한 직장 생활로 위축된 ‘위기의 남자’ 담론이 불거져 나왔다.
문제는 때론 소설이나 TV 드라마로, 때론 학문의 외양을 하고 유통되는 남성 중심의 담론이 실상은 ‘고개 숙인 남자’들이 겪는 위기의 뿌리와 남성 지배 문화가 밀착돼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는 점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남성 위기 담론은 오랜 세월 누려온 권세를 빼앗긴 기득권자에게서 보이는 권력 금단 증상과 유사한 ‘엄살과 회한의 남성학’이었다는 점을 또렷이 드러낸다.
저자는 남성적 시각에 기초한 위기 담론이 잘못된 진단과 처방을 내림으로써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아가 그러한 위기 담론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일종의 알리바이를 제공함으로써 남성 지배 문화의 억압과 폭력을 강화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은 수혜자이므로 피해자이기 이전에 가해자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구조의 피해자로 겪는 남성의 고통도 ‘남성다움의 신화’에 대한 성찰의 결여와 맞물려 있다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남성 스스로 사회 전반에 또 자신의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가부장성을 타파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지 않는 한 남성이 겪는 위기와 남성 지배 문화가 초래한 삶의 위기는 극복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들은 날마다 ‘젠더’적 의미의 자살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간혹 우리 삶의 망가진 모습을 남성 지배 문화의 폐해로 과도하게 환원시킨다는 점, 또 남성의 ‘기질적인 폭력성과 악마성’과 같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개념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성 지배 문화의 폭력성을 응시하는 시선은 좀 더 인간다운 미래의 삶을 위해 과거 및 현재와 대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또 시종일관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인본주의적 시각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이 시대에 추구되어야 할 보편성에 한걸음 더 다가간다.
이 책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도 비로소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학문의 자격을 갖춘 남성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정진웅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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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여자로 길
《“내가 만일 팔다리를 잃어서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면, 오직 입에 물고 있는 막대기 하나로만 뭔가 표현할 수 있다면, 그럼 난 인간이 아닌가요? 마찬가지로 남근이 없으면 인간이 아닌가요? 다리 사이에 그 물건이 있느냐 없느냐에 모든 게 달려 있는 것처럼, 수술이다 호르몬이다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어야 하나요? (…) 만일 어떤 여자가 사고로 가슴을 잃었다면 남자로 만들어야 하나요? 그렇게 하면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는가요?” ―본문 중에서》
독일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어린 시절 남자가 아니라 여자로 컸다.
그의 어머니는 릴케에게 치마를 입혔고 소꿉과 인형을 갖고 놀게 했다.
결국 이것은 릴케에게 두고두고 가슴속의 큰 상처로 남았다. 그는 틈만 나면 어린 날에 겪었던 그 ‘끔찍스러운 악몽’을 되뇌곤 했다.
물론 릴케는 그 아픔을 ‘빛나는 보석’으로 훌륭하게 빚어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 모진 흉터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의 내용이 그렇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어린 시절 ‘성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벌인다.
이 책은 바로 한 인간의 끈질긴 ‘성 정체성 찾기’의 발자취다.
그것은 의료 권력의 폭력에 맞선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다.
사건은 1966년 캐나다 위니펙 시의 한 병원에서 발생한다.
일란성 쌍둥이 중 형 브루스가 생후 8개월에 포경수술을 받다가 그만 남근을 잃은 것. 부모는 한동안 아들이 성 정체성을 잃어버릴까 고민한다.
그러다 결국 아이를 존스 홉킨스병원의 유명한 성 전문가 존 머니 박사에게 데려가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시킨다.
머니 박사는 ‘성은 후천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의사. 부모는 아들의 이름도 여자이름인 ‘브렌다’로 바꿨다.
머니 박사의 지시에 따라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을 주입하고 정신적 치료도 병행했다.
그러나 브렌다는 처음부터 여자이기를 거부했다.
청소, 결혼, 화장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늘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성 쌓기, 눈싸움, 군대놀이를 하며 놀았다.
소변도 서서 해결했다.
자신을 실험대상으로만 여기는 머니 박사에게는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병원에 갈 때면 디즈니랜드 구경을 미끼로 던져야 할 정도였다.
결국 브렌다는 “병원에 가면 죽어버리겠다”며 치료를 거부했다.
브렌다가 14세 되던 해. 아버지는 마침내 브렌다에게 두 손을 들었다.
그동안 비밀에 부쳤던 ‘포경수술 사건’도 브렌다에게 털어놓았다.
성의 선택권을 아들에게 맡긴 것이다.
브렌다는 한동안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다가온 것은 ‘안도감’이었다.
결코 자신은 돌연변이나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바로 수술을 통해 원래의 성을 찾았다.
이름도 다윗의 영어식 표기인 ‘데이비드’로 바꿨다.
자신의 삶이 거인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David)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머니 박사는 진실을 숨기고 브렌다의 사례를 성에 대한 환경 결정론을 입증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의학계에 소개하며 명성을 날렸다.
급기야 1997년엔 ‘금세기 최고의 성 전문가’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데이비드는 분노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실명으로 진실을 밝힌다.
30년 동안 전 세계 의학자들이 저지른 실수와 오류가 일거에 드러나는 순간이다.
인간은 늘 착각한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사람의 태어남, 늙음, 아픔, 죽음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신은 위대하다.
김원익 문학박사 신화연구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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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요된 침묵-억압과 폭력의 남성 지배문화
《역사적으로 볼 때 한 집단에 대한 다른 집단의 권력 행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어 왔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을 성별로 나누는 것의 타당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존재가 생후 18개월까지의 유아 성장에 필수라고 말하거나, 출산이야말로 여성의 가장 큰 임무라고 말하는 사람은 문화적인 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것이 문화적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본문 중에서》
오랫동안 남성들은 열쇠구멍으로 여성을 몰래 훔쳐보았다.
몰래 훔쳐보는 남성은 여성을 철저히 대상화한다.
훔쳐보는 남자는 자신의 욕망과 시선에 따라 일방적으로 여성을 규정한다.
그러나 훔쳐보기는 환상이었고 불행의 씨앗이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여성은 남성의 욕망과 시선을 벗어나기 일쑤였고 남성들은 이러한 여성들을 처벌하는 데 광분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훔쳐보기가 아닌 마주보기를 시도해야 할 때다.
서로 마주보기 위해 여성은 스스로를 표현할 언어를 찾아야 하며 남성은 일방적인 시선을 거두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 책은 이러한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저자 레이노는 남성으로서 여성 훔쳐보기의 시선을 거두고 가부장제로 대변되는 남성 자신의 역사를 돌아본다.
레이노는 가부장제의 역사를 분리의 역사, 이분법의 역사로 파악한다.
가부장제는 남성과 여성의 분리뿐 아니라 정신과 육체의 분리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그저 인간이었지만 그의 갈비뼈에서 여자가 만들어지는 순간 남자가 된다.
그리고 남자가 된 아담은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고 자신을 순수한 정신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분리의 다음 단계는 권력화이다.
분리된 여성과 남성은 차별화되고 계급화된다.
순수한 정신으로서의 남성이 무절제한 살덩어리로서의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논리가 된다는 것이다.
남성의 권력화는 성관계에 있어서 특히 극명하게 나타난다.
남성은 성관계에 있어서도 자신이 지배적 위치에 있다는 감흥을 만끽하고자 하며 이는 강간이라는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남성의 가부장적 권력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저자는 과감히 이분법을 초월할 것을 주장한다.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이분법 자체를 철폐해야 하며 그 같은 분리를 만들어냈으며 부당한 권력의 근원인 ‘남성’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막강한 권력을 가진 남성들이 순순히 ‘남성’을 포기할 것인가? 저자는 남성이 진정한 성적 쾌감에 이르고자 한다면 ‘남성’을 파괴해야 한다고 본다.
책에 따르면 가부장제하에서의 남성은 진정한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없다. 성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남성은 지배의 욕구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배의 욕구에 휩싸인 남성은 성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육체적 쾌감에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의 페니스가 여성을 어떻게 ‘죽여주었는가’ 혹은 자신의 페니스가 여성을 지배하기에 얼마나 강인한 도구인가를 확인하는 데 집착한다.
필자는 레이노의 명쾌하고 날카로운 주장에 연방 감탄하며 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내내 필자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있었다.
정말 성적 차이를 없애면 쾌감에 이를 수 있을까?
서로 마주보기 위해서 우리는 성적 이분법을 철폐해야 하는 것일까?
차이의 문제와 차별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닐까? 독자들도 함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현재 가톨릭대 초빙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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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남성이 사회적으로 더 많은 기회와 더 유리한 조건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면서 동시에 사적으로 여성(어머니 누이 아내)의 노동에 의존해서 살아가면서도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에게 여성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라고 밀어낼 수 있을까? 적어도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얘기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가해자라고 하면 거슬리는 표현이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남성 일반은 여성에 대하여 사회적 강자임이 분명하다. ―본문 중에서》
지금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말할지언정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시대이다.
‘평등’의 개념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성과 남성이 평등해져야 한다는 데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언론과 누리꾼 사이에서 여성문제가 끊임없이 논의되면서 ‘여성과 남성은 거의 평등해졌다’ ‘지겹다’ ‘오히려 남성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이란 상식과 교양이 되었고 사회가 많이 변화한 지금, 여성주의에 대한 반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된장녀’가 쉽게 ‘골페미’(극단적인 페미니스트를 비하하는 속어)와 동일시되듯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란 일종의 커밍아웃과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겁도 없이 자신은 페미니스트이며 “여성주의가 남자를 살린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이 책의 저자다.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소수의 남성은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에게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남성들의 반응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니 생략하고, 여성들 특히 여성 페미니스트 중에는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모순어법’이 이미 그 모순을 말해 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는가?” 곧 “페미니스트는 여성만 될 수 있는가?”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선 ‘자격’이 필요한가?” “페미니스트의 진정성은 여성만이 겪을 수 있는 경험에서만 비롯되는가?”라는 질문들을 제기한다.
성별화된 권력구조 안에서 수혜자인 남성이 그것을 편안하게 느끼는 것은 일면 당연하기 때문에 권력자인 남성들이 그러한 혜택의 부당함에 문제를 제기하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대한남성민국’에서 억압의 가해자이며 공모자가 남성이라는 점에서 사실은 ‘여성문제’가 아니라 ‘남성문제’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남자로서 여자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여성주의가 근본적으로 정의롭기 때문에, 또한 수혜자로서의 나 자신을 인식하기 때문에 여성주의 편을 택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러한 태도와 정체성을 지니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권력의 남초(男超)현상, 남성 기 살리기, 사이버 마초, 성매매특별법, 군대 등 첨예한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룬다.
여성 페미니스트가 이런 문제를 다룬다면 편파적이고 편협하며 피해의식이라는 등의 반격이 예상되는 데 비해 남성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저자의 진단은 ‘편들기’라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객관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머리로는 알겠고 동의하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뭔지 모를 거부감이 드는, 그리고 반복되는 성대결 양상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남자, 그리고 여자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우리의 사회현상과 문화에 대한 분석이므로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김고연주 여성학자
동아일보---------------
<18>남자의 이미지
《남성성이라는 개념은 사회가 남성에게 요구하는 과묵한 근엄함과 자기 통제를 포함한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 냈다. 사회에서 허용하는 삶의 기준을 제시하는 윤리관이나 정상 상태가 반영된 분명한 스테레오타입의 겉모습을 남성성과 일치시키기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남성성, 다시 말해 전체로서의 현대사회는 자신에게 대립되는 이미지를 필요로 했다. 국외자나 주변화된 사람들이 바로 이런 대립되는 이미지, 곧 카운터타입을 제공했다. 이들은 볼록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사회적 규범의 대립물을 반영했다. -본문 중에서》
우리 시대 문화에서 ‘예쁘다’ ‘아름답다’라는 형용사가 여성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자명하다.
남자답지 않은 남자라기보다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 이른바 ‘꽃미남’의 시대인 것이다.
이들은 여성용품인 생리대를 광고하는 등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남성성을 창조하고 있다.
조지 모스의 ‘남자의 이미지’는 현대사회의 규범이 된 남성의 전형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조명함과 동시에, 국가가 성역할을 규범화하는 젠더화 작업이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살피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남성성이 기원에서부터 확고부동하고 단일하고 안정적인 것 등 사회 가치의 준거점으로 간주돼 왔다는 점을 보여 준다.
남성 전형의 구축은 남자다움에 대한 현대적인 인식의 등장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남성 전형을 만드는 과정에는 배제와 포섭의 원리가 개입하고 있다.
그러한 원리에 들어맞지 않는 자들은 배제되면서 적이 된다.
남성성은 여성이나 인종의 차별을 통해 강화되면서 끊임없이 ‘우리’와 ‘그들’을 분할하고 ‘적’을 발명하면서 유지돼 왔다.
이 책은 남성성의 이러한 측면이 사회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적의 존재는 사회에 중심과 응집력을 부여”했기에 “현대 사회 또한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성스러운 모성이나 순종하는 여성 등의 이미지는 남성성에 대립되는 게 아니라 그 부산물이다.
조지 모스는 이 외에도 저서 ‘내셔널리즘과 섹슈얼리티’(1985년) ‘파시스트 혁명’(1999년)을 통해 파시즘과 민족주의, 섹슈얼리티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왔다.
유대인인 그가 경험했던 민족주의와 파시즘은 전체주의적 경향을 내포하는 근대적 산물이다.
예를 들어 나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는 좀 더 효율적인 통제와 관리를 위해 개인보다 집단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
이러한 집합적 개념인 전체주의, 파시즘, 민족주의는 남성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조지 모스가 남성성의 형성에 주목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이상적인 남성의 육체와 그에 부여되는 특징을 광범위하게 살펴보려는 이유는 신체 구조와 아름다움이 점점 더 중요성을 지니게 된 시각 위주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국가적 상징뿐만 아니라 골상학 인류학 같은 과학에서 고전미의 기준에 맞춰 남성을 분류하는 사례들, 그리고 미술 및 문학작품을 통해 드러난 인간 육체의 상징을 분석하고 있다.
남자다움은 기존 질서를 보호하는 안전장치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속성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따라서 현대사의 중심축으로 남성성의 구축 과정을 설정하고 이를 역사적 현상으로 분석하는 과정은 새로운 남성성을 탐구해 나가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다.
한민주 서강대 국문과 강사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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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아버지로 산다는 것
《아버지는 아이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유대감을 경험할 때뿐만 아니라 ‘어머니-아이-아버지’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제 아버지는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친밀함에 대응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우선 아버지는 아이가 자율적인 존재가 되도록 가장 먼저 도움을 줄 수 있다. ―본문 중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세아서 4장 6절)
구약성경에 있는 말이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창조주를 깨닫고 이해하는 지식을 말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거슬러 올라가 가장 근원적인 아버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아버지를 아는 지식’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정과 아버지가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국가 기관이나 기업, 연구기관에서 가정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며 TV 드라마, 영화, 공연에서도 가정과 아버지를 소재로 한 작품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며 그만큼 사회적 요구가 절실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우리의 아버지를 비롯해 아버지인 우리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와 같은 아버지들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공감과 이해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실용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독일의 교육자이며 학자인 지은이는 16명의 아버지를 인터뷰해 그들의 아버지와 현재 아버지로서의 태도를 상세하게 기술했다.
이 인터뷰를 통해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방법론도 이끌어 내고 있다.
사례로 등장한 16명의 독일 아버지는 의사 변호사 목사 사회복지사 회사원 공장근로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독일과 한국의 가정환경이 서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의 내면은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경제 수준의 차이가 마음의 문제를 좌우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된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인터뷰 대상자들이 대부분 부모 세대부터 이혼이나 별거 등 가정의 해체를 겪었고 그들도 한 차례 이상 이혼과 가정 해체를 경험했다는 점이다.
이는 서구 사회가 가정 해체로 인해 심각한 정서적 피해를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상황에 들어선 한국에서도 이에 대해 무지한 탓에 무대책 무방비로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3년여 동안 아버지학교 운동에 참여하면서 한국 가정의 취약함과 가정, 아내, 자녀에 대한 아버지들의 무지를 실감하고 있다.
아버지학교 과정에는 아버지와 아내, 자녀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있다.
한 달에만 수천 통씩 쏟아지는 이 고백의 내용은 놀랍게도 90% 이상이 비슷하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너무 몰랐고 그러다 보니 아내와 자녀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이 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생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결국 그 해답은 아버지를 알아야 풀린다는 것을, 이 책은 입증해 주고 있다.
이정구 두란노 아버지학교 편집장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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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한국의 여성과 남성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도 현실 분석의 적확함, 폭넓은 전망과 안목에 놀라게 되는 책, 그래서 여전히 현재성을 잃지 않고 있는 책이 ‘한국의 여성과 남성’이다.
저자는 뜻을 공유하는 여성들과 함께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여성주의 인식론과 세계관으로 경직된 한국사회의 문화 환경을 명랑하고 자유롭게 변화시켜 왔다.
이 책은 저자가 구상하고 실천해 온 새판 짜기의 분석적 토대를 담고 있다.
여성은 공적 세계와 가족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도록 규정되어 왔는가, 남성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남성다움’이라는 규율체계에 갇혀 버렸는가, 한국의 근대화를 추동시켰던 발전 이데올로기는 어떤 방식으로 삶 자체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조선조부터 본격화돼 현재까지, 상징적 규범체계에서부터 일상적 삶의 자질구레한 규칙들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을 철저하게 옭아매고 있는 가부장제의 실체와 허구성에 대한 저자의 성찰은 한국에서 ‘여성’으로서 ‘남성’으로서, ‘여성답게’ ‘남성답게’ 살기를 강요당하는 우리 모두에게 폭넓은 관점의 지평을 열어 준다.
가부장제에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여성뿐이겠는가. 최근에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삶을 지향하면서 페미니스트 운동에 동참하는 남성들이 통렬히 고백하듯 남성 역시 ‘남성다움’의 이데올로기에 강요당하면서 다중적인 소외의 삶을 살아 나간다.
남성다움에 대한 자신감을 잃은 남성들이 늘어날 때 그 사회적 정치적 여파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우리는 외환위기 이후 무수히 보아 왔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의 남성들이 생계부양자로서, 산업역군으로서 고립된 소외의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여성들과 더불어 공동체적 돌봄의 행위에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는 정말 남성다움, 여성다움의 비인격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사회, 다양한 삶의 제안들이 아름답고 행복한 일상을 꽃피우는 마을들을 만들기 위해 각자의 고독하고 왜곡된 자아의 문지방을 넘어설 때가 아닐까. 마음의 시계에 귀를 기울이며.
김영옥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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