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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석재 강현녀 대표대담기획인터뷰인물 2005. 8. 25. 13:21
<인터뷰>천일석재 강현녀 대표
"신용과 정직을 무기로 불철주야 노력했더니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막 오십대 주부가 남성도 힘든 석재인 대표로써 명성을 날려 화제가 무성하다.특히 납골묘 일본수출로 익산과 도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적을 정도인데 남편은 장비 및 제품은 물론 직원관리 등 현장감독과 회사내부를 통제하고, 부인은 제품홍보와 판매를 위해 국내외를 마다 않는 특색있는 회사다.
다름 아닌 익산시 함열읍 석매리 천일석재 강현녀 대표(50)가 화제 주인공이다.
분진과 소음, 엄청난 장비와 굵직한 팔뚝의 인부를 연상하는 석재업계에 천일석재가 우뚝선 것은 2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완주 상관이 고향인 강대표는 결혼 2년 후인 78년 육군대위 출신인 남편 박광신(58)씨와 석재업에 뛰어든다.납골묘 등을 수출하던 업체는 경기가 안좋아져 남편은 예비군 중대장으로 10년 가량 지낸다.
돌을 다루는 험난한 현장을 지킨 당사자는 가냘픈 새악시였던 강현녀 대표였다.
상담과 계약부터 '정직과 신용' 모토로 전국을 헤매고 주문에 따라 정확한 설계도면을 살피고, 원석공급 및 인원관리와 제품생산을 20대 중반의 주부 혼자 해결했다.
유교적 전통이 가득했던 당시 남성 전유물이던 석재업에 도전은 많은 화제와 일화를 만들었다.
"원석이든 제품이든 남의 물건을 구입했으면 최우선 돈을 지불해야 된다"는 신조를 지키고 최고제품을 만들었더니 더 나은 가격을 받게 됐고 일취월장 성장가도에 접어들었다.
86년 천일석재를 정식 설립하고 여성 섬세함과 정확함이 납골묘와 묘비석 및 석재조형물에 반영돼 소비자와 업계에서 천일석재는 신용과 정직은 물론 제품도 최고로 평가받게 됐다.86년 무역업에 등록해 일본에 납골묘를 수출해 제29회 무역의 날 '1백만불 수출탑'과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남편도 회사에 복귀했고 거칠고 힘든 현장은 박광신 대표가, 주문을 맡고 해외 세일즈 등과 설계도면 작성을 비롯 완제품을 공급한 뒤 사후관리는 강현녀 대표가 맡는 부부 공동대표제가 정착됐다.
최선을 다했고 운도 따랐는데 타회사가 매출액 7-8%를 바이어 상담료 및 술접대로 활용했으나 강사장은 "제품은 엉망인데 접대만 우선할 수 없다"고 고집해 손해를 보기도 했다.그러나 천일석재 제품과 사후관리 완벽성은 국내외에 알려져 현재 경북 영천 공원묘지 '호국원' 묘비와 상석, 납골당 1백%를 공급한다.
결루(이슬맺힘) 방지로 습기피해를 축소해 냄새없는 납골묘를 추구한다.
"여성으로써 장·단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강대표는 거침없이 "여성이라 석재업을 잘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와 의구심을 여성특유 섬세함과 고집이 결합돼 완벽처리해 믿음으로 바꾸었다"고 일축한다.친정인 완주 상관 죽림온천 근처에 납골묘 전시장도 마련했다.
천주교 신자인 박광신·강현녀 부부는 2남1녀 뒷바라지를 위해 출발한 석재업을 위해 새벽 6시에 배산에서 운동을 한 후 식사 후 회사에 출근하는 일을 반복한다.밤에는 오늘 한 일과 내일 할 일을 반드시 기록해 꼼꼼히 챙겨야 잠이 든다고.
중국산 대량유입과 건축 등 경기침체로 석재업이 어려움을 맞았지만 고객이 '身土不二' 정신으로 국산품을 활용하고 석재인이 힘을 합치면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익산시민연대 이사와 각기 다른 업종대표 상호교류 모임인 '異협정교류회'에도 참여한 강현녀 대표의 미소 뒤에 숨겨진 한국여성의 강인함에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재촉했다. <익산/고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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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CEO 천일석재 강현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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