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부터 가랑비인지, 이슬비인지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가랑비는 손님 가라는 비이고, 이슬비는 연인 있으라는 비다.“는 말도 있다. 지난 여름은 엄청난 폭염이 줄기찼다. 9월 20일까지도 한 여름 폭염이었다.
10월을 지나 11월 중순을 넘어섰다. “겨울로 접어든다.”는 ‘입동’이 이달 7일이다. 아직 여름인지, 가을인지 모르겠다. 겨울은 아득하다.
그러니 아파트 주변 은행나무와 아카시아 등이 여전히 푸르거나 일부 노랑색이다. 노랑색에서 주황색을 거쳐 핏빛으로 물들어야 낙엽이 된다. 초록색이 절반 이상이고, 일부만 노랑색이니 낙엽이 지려면 멀었다. 과거보다 열흘 이상 늦은 것 같다.
관리사무소 직원만 곤욕이다. 때가 되면 한꺼번에 떨어져야 낙엽 쓸기가 쉽다. 올해는 늦더위가 계속돼 가랑비처럼 떨어지다 마다하니 빗자루가 손을 떠나지 못한다.
찬바람이 불 때 출하되는 제주 감귤도 5년 내 가장 수확이 적을 전망이다. 여름 폭염에 가을 더위까지 계속되니 껍질이 물러 터지는 피해를 입었다. 반팔 차림도 흔한 풍경이다. 아침·저녁과 한낮 일교차가 크나 옷을 바꿔 입을 수도 없다.
김장철을 앞두고 배추·무 가격은 폭락했다. 배추 한 포기에 7~8천원이던 것이 엊그제다. 그러던 것이 1~2천원으로 떨어졌다. 금배추는 끝나고 그냥 채소로 돌아갔다. 과학이 발전해도 농사 2/3는 하늘이 짓는다.
콩나물과 함께 전주 대표 먹거리인 미나리는 다르다. 미나리는 차가운 물이나 심지어 얼음장 아래에서 잘 자란다. 한참 출하가 시작될 때다. 더운 날씨가 계속되니 물러 터지는 피해를 입었다. 가격은 폭등했다.
홍어 등 생선탕과 궁합이 잘 맞는 미나리도 많이 못 먹을 것 같다. 흑산도 홍어가 훨씬 북쪽인 군산에서 많이 잡혀 ‘군산 홍어’가 된지 오래다. 군산 해망동 수산시장에 가면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동해안에 오징어도 사라져 금징어다.
단풍 관광지로 유명한 내장산도 초록빛이 오래 계속됐다. 가을 더위로 단풍이 지각생 신세다. 설악산도 이제야 단풍 절정이다. 내장산·강천산·선운산 등 전북 단풍 명소는 이제부터 주말까지 피크를 이룰 전망이다. 당초 10월말 절정으로 예상됐으니 보름 이상 늦다.
계절이 제멋대로이니 전국 축제도 엉망이 되기 일쑤다. ‘벚꽃 없는 벚꽃축제’ 뿐 아니다. ‘상사화 없는 상사화 축제’나 ‘단풍 없는 단풍 축제’ 등 뒤죽박죽이다. 팔공산 단풍 축제는 단풍 없이 치러졌다. 연인끼리 걷기 좋은 ‘덕수궁 돌담길’은 어쩐지 모르겠다.
설악산이나 강원 홍천 은행나무 숲 등 곳곳 명산과 숲이나 보호수도 지각 단풍이다. 과거 11월 초순, 쓴 글을 보니 “은행나무 단풍은 빨갛다 못해 핏빛으로 변하면서 스치는 바람에 우수수 떨어진다.”는 내용이 있다. 올해는 11월 중순이 지났건만 절반 이상이 녹색이다. 일부만 노랑색이고 빨갛다 못해 핏빛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문묘 은행나무나 신라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경기도 용문사 은행나무도 단풍이 늦었을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은행나무, 전주 향교 은행나무 등도 지각 단풍이다. 이제 멋진 광경을 연출할 때다. 전국에서 연인과 함께 사진 동호인이 몰려들 것이다.
일출보다 장렬하게 산화하며 붉은 빛을 남기는 석양 노을이 훨씬 아름답듯 말이다.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고, 처연함과 장엄함을 남기고 의연하게 사라지는 인생이 멋진 것과 다를 바 없다.
“가을은 손님인가, 연인인가?” 가을은 눈치를 줘도 가지 않는 손님인지, 있으라고 해서 주저앉은 연인인지 모르겠다. 가을이 남자의 계절이라 해도 추남(?)이 계속되는 것은 그렇다.
가랑비인지, 이슬비인지, 비만 계속 내린다. 겨울은 빨리 오라고 해도 오지 않는 눈치 없는 연인이 아닌 가 싶다. “가기 싫은 가을, 오기 싫은 겨울이다.”/편집국장 고재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