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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갑진년 지진과 1898년 무술(년) 해일<칼럼사설수필> 2024. 6. 1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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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벽골제(대동여지도,초낭유적) 부안청자박물관> :: 흐르는 강물처럼 (tistory.com)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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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익산 황등지역, 우측이 현재 익산 도심 신용동지역으로 추정됨, 멀리 미륵산과 용화산이 보인다. 임익수리조합 사진>
황등호 전경
1915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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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등제(1861년 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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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등제(1872년 호남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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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등호(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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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등호(1911년~1937년)
임익수리조합저수지(요교호)라 쓰여 있다. 요교호는 황등호를 말한다. 요교제 남쪽에 신곶리나 내곶리 지명도 바닷가임을 반증한다. 곶串은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내민 땅'을 말한다.
요교호(황등호) 북쪽이자 황등면 남단 마을 이름이 현재도 '도선' 마을이다. (배나드리)라 쓰여 있다. 요교제 이전에는 바닷가로 현재 익산 도심을 오가며 배를 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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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등호 나룻터1911년 ~ 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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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등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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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교제+황등호+황등배수개선사업(1982년)>
요교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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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부안 고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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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 고지도>
<부안군 고지도>
<칼럼> 갑진년 지진과 1898년 무술(년) 해일
『새들이 날아오르고, 좋던 날씨가 갑자기 비가 올 듯 새까맣더니 지진이 발생했다. 엄청난 중량감 폭발음이 들리면서 전쟁난 줄 알았다. 부안댐이나 새만금 방조제가 무너진 줄 알았다. 새만금으로 어염시초·생거부안·십승지도 옛말이다. 방폐장(핵폐기장) 사태에 이어 작년에는 잼버리 실패와 올해 새만금 예산감소이더니 지진이냐? 이미지 실추가 우려된다. 누가 땅을 사거나 오려고 하겠는가? 위도 방폐장 안 하기 잘했다. 뭔 소리냐? 경주는 부안보다 지진이 많고 강력해도 방폐장에 이상 없다. 지역발전에 엄청 보탬이 됐다. 수많은 관광객으로 불국사와 석굴암은 물론 한옥단지 등이 인산인해다. 갑진년 청룡의해, 용의 승천 전조 현상으로 큰 인물이 나오거나 지역발전에 획기적 소식이 기대된다.』
지진 직후, 나돈 수많은 말 중의 일부다.
12일 오전 8시 26분, “부안군 남남서쪽 4㎞ 지점, 행안면 진동리 지하 8㎞에서 규모 4.8 지진이 발생했다.”고 공개됐다. 그러나 “변산반도 전체로 보면, 부안군 동북쪽이며, ‘군청 남남서 4km 지점‘의 오류”가 아닌가 여겨진다. ’진동리’라는 지명이 振動(흔들려 움직임)이나 震動(지진 등으로 물체나 땅이 몹시 흔들림)과 관계있는 지 알아봤으나 眞洞(참한 고을)이다.
경주나 포항 무수한 지진에도 인근 월성 원전이나 방폐장, 제철소는 이상 없다. 타지는 삼국시대부터 지진이 많이 발생했던 것에 비해 호남지역은 비교적 적고, 지진 규모도 작다. 현재까지 부안 등 수백 건 피해신고가 접수됐지만 경미한 내용이다.
그러나 지진 안전지역은 없다. 백두산·한라산·울릉도는 화산 폭발로 생성됐다. 수많은 지진 기록이 입증한다. 전북도 육상이나 해저 지진으로 문화재 파괴나 해일(쓰나미) 기록이 많다.
가장 피해가 심한 것이 1898년 10월 17일, 무술(년) 해일이다. 해수가 높아지는 (백중)사리나 홍수가 겹치면 해일 수위가 훨씬 높아진다. 엄청 상류까지 범람한다. 무술년 해일은 “위도 앞바다에 물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는 기록으로 봐서 해저 강력 지진이 유력하다. 상류 홍수는 없었으나 시월 보름 사리 때와 겹쳐 발생했다.
당시에는 평상시 사리 때도 해수가 정읍 신태인, 고부 및 김제 원평 지척까지 올라왔다. 해일까지 겹쳤으니 현재 고창 심원, 부안 줄포·백산·행안·하서·상서, 정읍 신태인 화호·고부 일대를 휩쓸었다. 다행히 주간에 발생해 인명피해는 극소수였다.
부안 행안 삼간평을 휩쓸고, 상서 감교나 개암사 입구, 하서 일대 및 줄포만 등 저지대, 김제 만경 일대가 바닷물로 그득했다. 고부 눌제나 김제 벽골제, 부안 사산제나 고마제, 익산 황등제가 대부분 방조제로 축조된 것을 반증한다. 선조들의 한시 등을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무술 해일 당시 전라감사가 훗날 매국노로 지목된 이완용이다. 이완용 관찰사는 이재민 식량과 물, 옷이나 임시 숙소 대처를 못했다며 당시 윤 모 군수 파직 요청 장계를 고종에 상신했다. 곳곳에 방조제 둑을 쌓았다. 도내에 ‘언독‘이나 ’신기新基‘ 지명이 대거 등장했다.
특히 이완용 관찰사는 해일로 침수된 줄포 등지를 시찰하고 둑을 막고(언덕골=언독·언뚝) 이재민을 구휼해 당시 군수와 일부 주민이 휼민선정비를 세웠다. 일제 때까지 줄포면사무소에 있다가 해방 후, 매국노 선정비에 비판이 일자 현재 줄포면사무소 지하에 있다.
“백제좌평 사택적덕 딸(사택왕후)이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세웠다.“는 사리장엄 명문 기록이 발견된 미륵사 등도 지진 피해를 당했다. 성덕왕 29년(730) 6월 뇌진이 쳐서 ‘서탑'이 반쯤 무너져 고쳤다는 기록도 지진에 무게가 실린다.
1978년 지진 관측 이후 부안 진앙 반경 50km 내에서 관측된 규모 2 이상 지진은 모두 40여 건이다. 인근에 약 80km ‘함열 단층’이 지나가는데 이번 지진과 상관관계가 관심사다. 전주·군산·익산·고창·순창 내륙과 해역에 지진이 다수 발생했다. 관련 연구와 건축물 내진설계 등 대책으로 지진에 대비해야 한다.
주민 등도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적절히 대처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차제에 (잼버리 지역 산단 전환이나 골프장 조성) 등 정부의 획기적 발전대책이 아쉽다. 주민도 위무하고, 잼버리 실패와 새만금 예산감소 등으로 상처받은 민심을 다독일 일대 정책 전환이 절실하다.
이번 지진으로 변산반도 및 새만금 일대 발전 기폭제가 되길 고대한다. 한국 등 지구촌 경기도 바닥을 찍고 대상승 전환이 예상된다. 올해가 청룡이 승천하는 갑진년 아닌가?/편집국장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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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해안선과 구 해안선 비교>
구 해안선- 방조제가 유력시 되는 김제 벽골제, 익산 황등제(호), 김제 만경 능제, 부안 고마제와 사산제 등 오랜 역사 이전부터 전혀 간척이나 방조제를 쌓지 않았을 때를 가정한 태고 적의 해안선
<전라북도 백제문화의 꽃, 전북해양문화- 곽장근 지음> 16p 스캔 사진
빨간 선은 간척사업을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한 현재 해안선이고,그 안쪽 검정 리아스식 해안선은 전혀 간척 등을 하지 않았을 때 지도로 추정된다.
고군산군도 신시도를 중심으로 직선으로 그은 선은 해당 지도에 새만금방조제를 그린 후, 스캔한 사진임.
김제 벽골제도 저수지가 아닌 백중사리 때의 최고 밀물을 고려한 방조제였던 것과 과거 호남평야 대부분도 바다였음을 보여준다.
현재 격포항 이전에 곰소항에서 여객선이 출발했듯, 더 오래 전에는 줄포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줄포항이 어항이었음을 보여준다.
위 지도 고부천 아래에 기록된 시제는 눌제를 잘못 적은 듯하다.
원평청이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바깥 북쪽(김제시 쪽)에서 동에서 서로 흘러 오랜 세월이 지나 물길이 바뀌었나 생각했는데 이번에 원평천 건너에서 수여거로 추정되는 개수로가 발굴됐다. 이로써 제방은 현 2.5km 보다 훨씬 긴 최소 3.8km다. 평야부에 3.8km 제방이 저수지 용도이겠는가. 해수를 막기 위한 방조제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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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군청+ 황등요교 과거 호수일 때 지도>1872년 제작한 고지도
당시 익산군은 현재 금마 왕궁 춘포 삼기 팔봉동 정도가 행정구역
1872년 제작된 고지도, 오른 쪽 아래에 쌍릉이 있고, 왼쪽은 지금과 달리 요교 북쪽 깊숙이 호수였음을 알 수 있다.
원광대와 황등 중간 요교 남북쪽이 단순 저수지 제방이 아닌 (방조제)였음이 유력시 된다.
심지어 삼기면 삼기산 지척까지 호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안 동진과 김제 죽산 사이에 놓여진 동진대교에서 직선거리로 4km 상류에 있는 (김제 벽골제)도 단순 저수지 용도가 아닌 백중사리나 해일 때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방조제)다.
근년에 벽골제 발굴에서 드러난 '초낭'이나 '부엽토'가 층층이 쌓인 것도 하류 바닷물에 갯벌이 쉽게 녹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갯벌 유실을 막기 위한 새만금 방조제 '바닥보호공'과 유사한 연약지반 보호를 위한 초낭을 활용한 공법과 낙엽과 흙을 섞어 쌓는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제 벽골제는 '단군 이래 최초 간척사업'으로 평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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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강 제수문 제원
설치위치 :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설치년도 : 1979년
개보수 : 2004년
수문폭 : 10m
수문높이: 3.85m
수문련수 : 8련
인양장치 : 호이스트
동력 : 3.7kw 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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