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징비록과 을미사변 2주갑<칼럼사설수필> 2015. 8. 12. 13:58
<칼럼> 징비록과 을미사변 2주갑
최근 광복70년 대하드라마, ‘징비록懲毖錄’이 끝났다.
특히 올해는 명성황후(민비) 시해, 2주갑(120주년)이다.
징비록은 선조 때 영의정과 도체찰사(사령관)로 임진. 정유 7년 전쟁을 겪은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낙향해 안동에서 지은 전기戰記다.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치며, 삼가 하는 기록‘을 남겨 훗날 환란이 없도록 조심하기 위해서”다.
‘징비’란 『시경』의 “내가 징계해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에서 따온 말이다.
왜적에 유린당한 강토와 백성을 되새기며 당시 상황을 기록해 교훈으로 삼으려 했던 류성룡의 충절 가득한 기록이다.
류성룡은 당파싸움 와중에서 이순신을 음양으로 도와 국토수호와 함께 충무공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영웅으로 부각케 했다.
서애가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을 남겼건만 ’빼앗긴 땅과 주권을 되찾는다‘는 광복光復 기획드라마 제목으로 활용되는 아이러니다.
을미사변 2주갑에 말이다.
’징비록‘ 효험도 없이 정묘. 병자호란을 거쳐 을미사변으로 궁중에서 황후가 무참히 살해돼 불태워지고 나라도 뺏겼다.
임진란 왜적 후손에 의해서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무능한 임금 셋을 꼽으라면 ‘선조와 인조, 고종’이다.
연산군은 중종반정,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무너져 폭군의 대명사로 남았지만 왕권만 바뀌었을 뿐이다.
임진. 정유왜란을 당한 선조나 정묘. 병자호란으로 치욕을 안긴 인조, 나라를 일제에 뺏긴 고종처럼 외적에 나라를 강탈. 유린당한 것은 아니다.
광해군은 명과 청(후금) 교체기, 명분보다 실리추구의 중립외교 등으로 재평가돼야 한다.
인조는 ‘징비록’ 30여년 만에 청태종에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경험한다.
삼정 문란과 탐관오리 수탈은 극에 달해 민란이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외세침략 야욕은 거세지나 왕실과 외척의 매관매직과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고종과 민비는 연회로 재정을 탕진하고 벼슬을 팔기도 했다.
급기야 돈 많은 집 개인 ‘황발이’를 사람으로 알고 벼슬 값으로 5500냥을 매긴 일도 있었다.
명성황후는 1895년 10월 8일(양력),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 군인과 낭인에 무참히 살해돼 불태워진다.
조선이 러시아에 기우는 것을 막고 침략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가 아닌 을미사변부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치욕적이다.
이후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거창하게 이름만 바뀌었을 뿐 황실과 종친, 황후의 친인척 및 외척의 관심은 개혁이나 백성의 삶에 대한 관심은 추호도 없었다.
벼슬을 팔고 재산을 강탈하다시피 해 과거제도도 있으나 마나였다.
“관찰사는 십만냥에서 이십만냥이고 일등 고을 수령은 오만냥 이하로는 어려웠다“고 ‘매천야록’에 기록됐다.
관찰사나 수령은 그 이상 백성들의 고혈을 짜 내었다.
망하지 않으면 이상했다.
반면 도요도미 히데요시 사망 직후, 일본전역은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의 ‘동군’과 히데요시 아들, 히데요리를 받드는 이시다 미쓰나리(1560~1600)의 ‘서군’ 다이묘로 두 패로 나뉘어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다.
도쿠가와 승리로 전국시대를 끝내고 에도막부(1603~1867)가 출현한다.
천왕을 옹립하는 왕정복고파가 일으킨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은 서구 과학문명을 받아들여 철도 등 교통과 통신 및 각종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조선을 합병하고 중국과 동남아 등지로 세력을 확대한다.
결국 태평양전쟁으로 패망했지만 임진. 정유 이후 조선과 일본은 크게 달랐다.
서애가 "(외국의) 선진무기와 병법을 배우고 전쟁에 시달린 백성을 돌봐라"는 징비록을 남겼지만 이를 소홀히 한 조선은 정묘. 병자호란과 을미사변을 거쳐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러나 일본은 1695년 서애가 남긴 징비록을 간행하며 "조선인이 나약해 빨리 패한 것은 평소 가르치지 않고 방어의 도를 잃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잊은 것이다"는 요지의 매서운 서문을 남긴다.
근간의 일본은 아베를 중심으로 한 우경화가 갈수록 도를 더해 간다.
과거사 반성은 남의 일이고 평화헌법을 고쳐서라도 군비증강을 꾀하려 한다.
징비록과 이들 외세침략을 잊어버리면 일본인은 언제든지 한반도로 다시 진입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때다.
역사망각증(historical Amnesia)이 있는 민족은 다시 비슷한 위기를 맞게 된다./취재국장 고재홍>
<칼럼> 징비록과 을미사변 2주갑
'<칼럼사설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럼> 총선임박, 어지러운 익산정가! (0) 2015.08.28 <칼럼> 초미의 관심사, 시장 재선거! (0) 2015.08.27 <칼럼> 백제무왕, 왕후 둘에 축제 셋~ (0) 2015.07.27 <칼럼> 내년 총선, ‘춘추호남시대’될까? (0) 2015.07.21 <칼럼> 호남민심 3~4파전, 와르르~ (0) 2015.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