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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용인전투 위령탑을 세우자!
    <칼럼사설수필> 2012. 12. 24. 03:27

     

     

     

     

     

    용인전투 위령탑을 세우자!

     

    임진년 한 해가 저물어 온다.

     

     

    올해는 임진왜란 발발 420주년이다.

     

     

    즉 육십갑자(六十甲子)가 일곱 번이나 흐른 해다.

     

     

     

    그런데 우리가 망각한 것이 있다.

     

     

     

    바로 전라도 민병 4만을 포함한 5만명이 왜군 1600명에게 몰살한 ‘용인전투’다.

     

     

     

    청나라 기병 3백기에 4만명이 대패한 廣州 ‘쌍령(雙嶺)전투’가 병자호란 최대의 패배라면 이의 45년전 ‘용인전투’는 임란 최대의 치욕이다.

     

     

     

    그런데 대패한 전투여서인지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위령비 조차 거론치 않는다.

     

     

     

    임란 삼대첩인 한산대첩이나 행주대첩, 진주대첩은 대규모로 성역화했다.

     

     

    명량대첩이나 도내 이치(梨峙)전투, 웅치(雄峙)전투도 전적비 등이 세워졌다.

     

     

    금산의 칠백의총, 남원의 만인의총도 국토수호를 위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성역화됐다.

     

     

     

    외세침탈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보상도 이뤄졌고, 부마민주항쟁 명예회복과 유신시절 긴급조치 피해자 보상특별법 처리도 이루어진다.

     

     

     

    심지어 1894년 동학혁명 유공자와 유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도 통과됐다.

     

     

    동학혁명 전적비나 위령탑도 곳곳에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한 예우도 각별하다.

     

     

    근년에는 6.25에 희생돼 산야에 묻힌 국군 유해발굴도 진행된다.

     

     

     

     

     

     

     

    ‘용인전투’를 알아보자.

     

     

     

     

    이는 임진왜란이 발발 두 달이 채 안 된 1592년 음력 6월5일 경기도 용인에서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 충청도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이끄는 5만 명 조선군이 1600명 왜군에 참패한 전투다.

     

     

     

    1592년 음력 4월13일 왜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무너지고 충주 탄금대를 거쳐 5월초 한양이 무너지는 등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6월13일 평양도 함락돼 선조는 의주로 떠난다.

     

     

     

    한양 탈환작전은 전라도순찰사 이광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급히 4만 명의 민병을 모아 북진한다.

     

     

    온양에 모인 군세는 전라군 4만 명, 충청군 8천명, 경상군 등 약 5만 명이다.

     

     

     

     

    이광을 맹주로 삼도 민병군은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으로 불렸다.

     

     

     

    이들은 북상해 6월3일 수원 독성산성을 무혈 점령했다. 엄청난 조선군에 왜군이 용인으로 도망갔다.

     

     

     

     

    전투에 밝은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600명 가운데 주력 1천명은 한양에 주둔했고, 6백명은 용인 부근에 진을 쳤다.

     

     

     

     

     

    권율의 만류에도 이광은 각각 1천명으로 선봉부대를 편성해 6월5일 왜군을 공격하게 했다.

     

     

     

    집요한 공격에도 왜군은 진지에서 나오지 않았고, 야스하루가 한양에서 1천명을 거느리고 용인에 도착했다.

     

     

     

    나무그늘과 풀숲에서 쉬는 근왕군을 발견하고 기습했다.

     

     

     

    장수들이 전사하고 조선군은 도망쳤다.

     

     

     

    현재 용인시 수지구 일대로 추정된다. 6월6일에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수원 광교산에 진을 쳤던 이광의 주력군이 아침밥을 짓기 위해 불을 피우자 왜군이 급습했다.

     

     

     

    충청병마사가 놀라 도망치자 군사들도 앞 다퉈 도망쳤다.

     

     

    이광과 경상도순찰사도 줄행랑을 쳤다. 지휘관이 통째로 도망갔다.

     

     

     

     

    수만 명의 근왕군이 깔려 죽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선조수정실록에는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 듯했다”고 기록했다.

     

     

     

     

    이광은 파직 유배됐고 승리한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임란 명장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용인전투‘는 군사전략에 무지하고 적에게 등을 돌리는 어리석은 지휘관에 의해 몰살한 치욕이다.

     

     

     

    권율은 같은 용인전투에서 휘하 군사를 보존해 한 달 후 이치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훗날 행주대첩에서 크게 승리했다.

     

     

     

    문제는 당시 지휘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라감영이 있던 전북도민의 책임이 누구보다 크다.

     

     

     

    육십갑자 일곱 번인 임진년이 다 가도록 구천을 떠돌 이분들의 위령탑 건립을 주장하는 의견조차 없다.

     

     

     

    치욕의 역사라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총독부였던 중앙청을 철거한다고 일제강점기가 없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당시 4만명의 전라도 병사는 농사짓다 끌려온 하층농민이나 노비였다.

     

     

     

    우리들의 선조다.

     

     

     

    420년은 오랜 과거 같지만 유구한 역사에서는 백 살 먹은 노인이 불과 네 번의 인생을 보낼 짧은 기간이다.

     

     

     

    ‘역사 망각증(historical Amnesia)’이 있는 민족은 또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공로를 챙기는데는 시효가 없다.

     

     

    최소한 위령탑(비)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임진년을 보내며 전북도나 역사단체 및 문화원 등의 관심을 촉구한다./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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