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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익산시장후보 김재홍,광주시민항쟁 30돌기념 심포지엄 주제발표시장군수관사국장비서지자체(제) 2010. 5. 14. 19:07
무소속 익산시장후보 김재홍,광주시민항쟁 30돌기념 심포지엄 주제발표
6.29선언은 6월시민항쟁 뿐 아니라 광주항쟁에 대한 굴복
시민추대 익산시장 후보인 김재홍 전 국회의원(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은 1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광주시민항쟁 30돌 기념 심포지엄에서 ‘1980년 신군부의 정치사회학’에 대하여 주제 발표를 했다.
이날 김재홍 전 의원은 “1987년 5공 정권측이 민주화 조치라고 내놓았던 6.29선언은 6월 시민항쟁에 대한 굴복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었다”면서 “그러나 이는 단기적인 해석이며 좀 더 긴 시야로 보면 6월 시민항쟁 뿐 아니라 80년 광주항쟁에 대한 굴복의 성격도 강하게 내포돼 있다” 고 밝혔다.
이는 새로운 역사 해석으로 학계와 진보개혁 진영에서 큰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의 요청으로 이날 주제발표를 맡은 김 전 의원은 “80년 광주항쟁에 대한 유혈진압은 하나회 장교들로 구성된 신군부와 5공 정권에 큰 역사적 교훈을 주었다.
87년 6월 시민항쟁 때 5공 정권이 군부와 경찰 등 물리적인 힘을 충분히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발포하지 않은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제시했다.
그는 “또 다시 동일한 살상진압을 반복하기에는 그들에게 광주의 악몽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군부정권 시위 진압도 지역에 따라 차별적 방법 구사”
부마항쟁 때 무력과시만…광주항쟁에는 발포와 잔혹행위
김 전 의원은 또 “80년 5월 광주와 79년 10월 부산 마산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지휘관이 모두 하나회 장교로 동일 인물이었으나 진압방법은 대조적이었다”면서 “부산 마산에서는 탱크 동원으로 무력을 과시했을 뿐 발포하지 않았으나 광주에서는 엄청난 살상과 잔혹행위가 자행됐다”고 지적했다.
이는 군부정권이 시민 시위대에 대한 진압에서도 지역에 따라 차별적 방법을 구사한 것이라는 지적으로 새로운 문제 제기의 의미를 갖는다.
김 전 의원의 논문은 정치장교 비밀사조직 하나회가 회원 가입의식 때 국가와 국민 앞에서 하는 것처럼 조직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고 밝혔다.
이것이 1979년 10.26 이후 벌어진 12.12 군사반란과 80년 정권찬탈 내란행위에서 하나회가 보인 응집력의 기반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노무현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과
국회의원으로 ‘정치개혁과 언론개혁의 전도사’
김 전 의원의 논문에 따르면 하나회는 1950년대 초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대구 출신 장교들의 친목 모임에서 출발했으나 대통령 박정희의 친위대로 키워졌으며 나중에 호남 출신도 구색 맞추기로 가입시켰다. 호남 출신 중 하나회 가입자로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육사 16기. 전남 장흥)과 고명승 전 보안사령관(육사 15기. 전북 부안) 등이 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은 하나회 출신이 안기부와 보안사령부,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 등 권력 요직을 독점한 사실상 하나회 정권으로 평가된다. 김재홍 전 의원은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 이 같은 하나회의 죄과를 파헤친 공로로 1993년 1월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언론상인 관훈언론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재홍 전 의원은 동아일보 재직 때인 1990년대 초 국방부와 군 전문기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그 후 경기대 교수, 노무현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정치개혁과 언론개혁의 전도사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고재홍 기자>
--끝--
< 요 약 문 >
1980년 5월 ‘신군부’의 정치사회학
--6.29는 6월시민항쟁 뿐아니라 광주항쟁에 대한 신군부의 항복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80년 신군부의 행동과 성격 규정을 위해서는 10.26 직후 12.12 군사반란부터 분석해야 한다. 12.12 군사반란은 대부분 수도권 부대의 지휘관을 맡고 있던 군내 사조직 하나회 장교들이 육군본부, 수도경비사령부, 특전사령부에서 자신들의 직속 상관들을 총격으로 살상하고 불법 체포한 반인륜적인 행위였다. 12월13일 아침 신군부는 국방부 장관, 육참총장, 1군과 3군 사령관,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을 모두 자기 계열로 임명해 군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다음해인 1980년 신군부의 정권 찬탈과 광주시민항쟁 살상진압을 가능케 한 물리력의 배경이 됐다.
합수부는 5월17일 밤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과 김종필 공화당 총재, 김상현 의원 등 정치인과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 씨 등을 체포했다. 이외에도 합수부는 이화여대에서 회합 중이던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 10여명을 검거했다.
신군부가 합수부를 내세워 특히 김대중, 김상현 씨와 정동년 씨 등 광주 출신 인사들을 구금한 것은 광주 시민 학생들을 격분시켰다. 이것이 광주시민항쟁의 도화선이었다. “계엄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은 퇴진하라”는 광주 시위대의 구호가 그것을 말해 준다.
신군부의 광주항쟁에 대한 진압작전은 몇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 적지에 투입해 사살 폭파 등 특수임무를 수행하도록 훈련된 공수부대를 학생 시위 진압현장에 보낸 점이다. 둘째,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정규 지휘체계에 맡기지 않고 하나회 사조직의 수뇌 장성들이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신군부가 80년 5월 광주시민항쟁에 대해 살상진압한 행위는 불과 7개월 전인 79년 10월 부산 마산 항쟁 당시 보였던 진압작전과 대비된다. 광주와 부산 마산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그 지휘관은 모두 하나회 장교로 동일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시위대에 잔혹행위가 자행됐으며 발포가 이루어졌고, 부산 마산에서는 처음부터 탱크 동원으로 무력을 과시했을 뿐 그런 살상진압 행위가 없었다.
80년 광주항쟁에 대한 유혈진압은 하나회 장교들로 구성된 신군부에 큰 역사적 교훈을 주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87년 6월 시민항쟁 때 신군부 출신 5공정권이 군부와 경찰 등 물리적인 힘을 충분히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발포하지 않은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또다시 동일한 살상진압을 반복하기에는 그들에게 광주의 악몽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6.29는 6월시민항쟁 뿐아니라 광주항쟁에 대한 굴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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