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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서예가 노산(蘆山) 최난주(崔欄周)선생을 찾아서대담기획인터뷰인물 2005. 2. 3. 10:09
서예가 노산(蘆山) 최난주(崔欄周) 선생을 찾아서
-"(書如其人)글씨는 그 사람이다"
-지필연묵(紙筆硯墨) 벗하며 한 획 한 획 30여년
-서예와 교육, 두 길에서 큰 성과
후진양성에 평생을 바친 교육공무원이 서예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 부러움을 사고 있다. 30대에 국립현대미술관 (국전)초대작가 반열에 우뚝 섰던 그는 지금도 종이(紙)와 붓(筆), 벼루(硯)와 먹(墨) 등 문방사우와 벗하며 글쓰기와 독서에 전념하는 '25시 인생'을 살고있다.
그는 다름 아닌 익산교육청 관리과장으로 재직중인 2003년말 서기관으로 승진하고 국가전문행정연수원에서 교육을 마친 뒤 올해 1월19일자로 도교육청 기획예산과장으로 발령을 받은 노산(蘆山) 최난주(崔欄周) 선생(56)이다. 37년째 교육에 헌신한 그는 자그마한 흠집이나 구설에 오를까 노심초사하며 취재요청에 차일피일했다.
서예계에서 중량감을 아는 기자가 요청을 거듭하자 응할 정도로 대외 노출을 꺼리는 겸양과 실력을 겸비한 인물이다. 그가 서예계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글씨에서 기교보다 마음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고창군 공음면에서 태어난 노산의 붓글씨 근원은 국민학교 입학 전에 시작됐다. 조선말 대과에 급제한 조부 斗南 최린휴(崔麟休)는 지금의 청와대공보담당관과 언론인을 혼합한 역할을 하는 정언(正言) 벼슬을 하다 한일합방이 되자 관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선다. "왜놈에게 교육을 맡길 수 없다"는 조부 영향으로 부친 3형제는 한학에 전념한다. 부친은 동네어른 성화에 본의 아니게 훈장이 됐다. 6.25 직후라 학교가 적었고 사친회비(수업료)도 없어 학교에 못 가는 아이가 많았다.
어깨 넘어 배우던 그가 한문에 자질을 보여 아버지 권유로 형들과 한문을 배웠다. 한문이나 붓글씨 실력도 이 때 기초를 다진 것이라고. 타고난 자질에다 국민학교 시절 서예에 능한 담임에게 붓글씨를 터득해 친구의 헝겊 명찰을 도맡아 써주고 '5.16 혁명공약'은 하도 써 봐 지금도 전문을 외울 정도다.
목소리가 유난히 좋아 '아나운서'가 꿈이었는데 중고교를 지나며 서예에도 빠져든다. 69년 고창 무장초등에서 5급을류 공무원(공채1기)으로 투신한 이래 계속 글쓰기에 정진했다. 봉급 10%로 방송교재를 구입했던 노산은 3년간 정훈부 아나운서로 군복무를 마치자 여러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초빙 받았으나 고창교육청에 복직했던 73년경 방송의 꿈을 접고 본격 서예공부에 몰두한다.
28세 되던 77년, 도교육청 시절에 우연히 한국 서예계 거목이던 강암과 인연을 맺어 서예 인생에 대전환기를 맞는다. 봄에 난로 구멍을 메우기 위해 국민교육헌장 습작품 액자를 걸었는데 강암 제자의 모임인 '연묵회' 회원 조옥영씨가 뛰어난 붓글씨임을 알고 강암에게 노산을 소개한다. 마침 "문하에 한글을 잘 쓰는 제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하던 강암과 평생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노산도 연묵회에 가담했고 강암 문하생으로 사군자와 난을 배우며 차원 높은 수련을 한다. "성급히 출세하려 말고 좋은 책과 선생을 만나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강암의 충고는 지금도 되새기는 문구이다.
78년 도연명(陶淵明)의 잡시(雜詩)를 연묵회 전시에 출품했다. 같은 해 가을, 민전으로 처음인 '전시계'라는 잡지에 이은상의 '가고파'를 출품해 입선한다. '날쌔고 민첩한 물고기가 큰물을 만난 듯' 각고의 노력은 계속돼 83년에는 '원곡서예상'을 받는 쾌거를 이뤄냈다.
원곡(原谷)은 한글서체인 원곡체를 개발한 김기승(1909∼2000)으로 강암도 심사를 받을 정도 대가였다. 원곡이 고희 기념으로 만든 까다롭기로 유명하고, 한해 한 사람만 주는 상을 전북인 최초로 30대 서예가가 수상했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출장 갈 때 버스에서 '법첩'을 읽고 밤 세워 정진하다 강암 문하에 든 지 10년만인 87년, 전주교육청 시절에 국전(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반열에 우뚝 선다. 이는 전북교육계를 총망라해 여산 권갑석씨에 이어 두번 째 국전 초대작가로 등극한 것이며 당시 대한민국 123명 초대작가 중 최연소 대열로, 한글 궁체로는 호남권 최초 영입이다.
신세지기 싫어 꺼렸던 그가 개인전을 갖은 것은 서예강좌에서 강사로부터 "개인전 한 번 못 가진 사람은 작가라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어서이다. 강한 집념과 뚝심의 노산은 이 말에 충격을 받고 작가관을 달리하고 새롭게 몰두한다. 도교육청 시절, 요직인 감사2계장 재직 중에 개인전을 위해 한가한 민원실 근무를 자청한다.
새벽까지 붓과 씨름하고 일궈낸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격려사 받기가 까다롭다는 강암은 노산 서예전 격려사에서 "서력은 물론 경력도 이미 중견이 됐음에도 이제야 개인전을 연 것은 중후한 인품과 겸허의 소치"라며 노산을 칭찬했다.
96년 글자 수만 8천여자로 가로 9m, 세로 2m가 넘는 대형 병풍작인 '농가월령가'를 엄격심사를 거쳐 작품을 받는다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미술관 작품수집심의위가 작가경력과 작품가치를 기준으로 엄선해 수십 명 기증자를 제치고 노산 작품을 기증작으로 선정했다. 노산은 서울시교육청, 교원대, 전북대, 전주대, 경상대, 전북교육청, 전북교원연수원 등 수많은 기관에 작품을 기증했다.
"'江山'이라 쓰면 무겁다 하고 '강산'이라 쓰면 가볍다하네"라며 한글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를 아쉬워한다. "글쓰는 작업은 마음(心)을 선(線)으로 나타내는 예술"이라 단언하는 노산은 "서예는 점선획(點線劃)의 태세장단(太細長短), 필압(筆壓)의 강약경중(强弱輕重), 운필(運筆)의 지속(遲速)과 먹(墨)의 농담(濃淡), 글자 상호간 비례균형이 혼연일체를 이뤄 미묘한 조형미를 느끼며, 이는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평가했다.
수필가로도 인정받는 노산은 계간지 '시와 의식'을 통해 등단했고 수필집도 준비한다. 김동리 선생이 "소년 문장가는 있어도 소년 명필가는 없다"면서 "詩書畵를 三絶이라 했는데 노산이 이뤄봄이 어떠냐"는 원곡상 축사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다.
글씨나 수필집이나 공무원 신분에 따른 남의 눈치도 만만치 않아 항상 조심하지만 수필집에 대한 의지는 대단하다. 지난해말 일간지에 그의 필명(최원용)으로 발표된 '삶의 향기'를 읽고 이름이 잘못 나왔다는 촌극도 벌어졌다. 20여년 문사로 활동했으나 노출을 꺼려 교육계는 이런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교육에는 헌신적인 공직자로 모범을 보였고 서예는 한국계보를 이룰 만큼 큰 역할을 한 것은 겸양과 절제에 끊임없이 정진하는 불굴의 집념이 함께 했음이다. 부인 서영숙여사도 진안교육청 초등교육담당 장학사로 일하는 교육가족이다.
"글씨는 그 사람이다(書如其人)"는 노산은 "묵향(墨香)에 취해 온 저의 삶과 교육계 헌신은 인생의 반쪽씩 차지한다"고 말할 정도로 서예와 교육을 둘 다 중시한다.
전북 교육계에서 본청 기획예산과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서예계는 87년부터 국전 초대작가로 전국을 누비는 명필이다. 프로스트(1876∼1963)가 '가지 않은 길'에서 두 길을 다 가지 못하고 한 쪽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한탄할 때 노산은 두 길을 함께 하여 큰 성과가 있었음에 부러움을 느끼며 발길을 재촉했다. <익산/고재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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