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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논술(설.문)독서도서詩소설수필연설 2007. 3. 5. 15:59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
<1>어니스트 섀클턴 자서전
《나는 내 어깨 위에 무거운 책임이 지워졌음을 느꼈고 대원들의 의기소침한 태도를 보니 용기를 내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난파선 634일만의 귀환, 그 힘은?
이 책을 읽으면서 군 생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살을 에는 추위와 싸워야 했던 이틀간의 동계훈련. 정말이지 너무나 힘이 들어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저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1874∼1922)은 내 기억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동계훈련보다 수백 배는 더 어려운 상황에서 634일 동안이나 대원들을 이끌면서 모두 살려 냈다는 사실이다.
섀클턴의 위대한 리더십과 조직원들의 팀워크가 그 역경을 이겨 내게 했다.
1914년 12월 5일 섀클턴은 남극 대륙을 횡단한다는 야망을 품고 27명의 대원과 함께 인듀어런스호에 올랐다.
하지만 이들은 부빙(浮氷)에 배가 난파하면서 엄청난 시련을 겪는다.
펭귄을 잡아 허기를 달래고, 혹독한 추위에 발이 썩으면서도 전진하고 또 전진했던 이들이 구조되기까지 2년간 겪은 일들은 인간의 생존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얼어붙은 웨들 해 부빙 위에서의 생활, 지붕도 없는 보트로 험난한 남극해를 두 번이나 건너는 위험천만한 항해, 절해고도 엘러펀트 섬에서의 사투. 이 모든 것이 인간이 가진 인내력의 한계를 보여 준다.
이 처절한 여행의 하루하루 그리고 고비마다 탐험대장 섀클턴은 대원들에게 역경을 극복하는 지칠 줄 모르는 힘, 창의성, 영감을 불어넣었다.
비슷한 시기인 1913년 8월 3일 빌햐울머 스테펀슨이 이끄는 캐나다 탐험대가 캐나다 최북단 해안과 북극점 사이의 지역을 탐험하기 위해 출발했다.
이들이 타고 간 탐험선 칼럭호도 단단한 빙벽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승무원들은 고립된 지 수개월 만에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이기적인 사람들로 변해 버렸다.
거짓말과 도둑질은 일상이 됐고, 11명의 승무원은 북극 황무지에서 죽음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섀클턴이 이끄는 인듀어런스호는 완전히 달랐다.
똑같이 지옥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의 대원들이 보여 준 행동은 칼럭호와 반대였다.
거짓말과 속임수가 아니라 팀워크, 희생정신, 그리고 서로에 대한 격려가 충만했다.
최근 기업들은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시장에서의 경쟁뿐만 아니라 예측하지 못했던 사고와 재난이 수시로 기업을 엄습한다. 그리고 이런 위기를 리더가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섀클턴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면 조직원들의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팀의 구성원으로선 긍정적인 사고와 인내심, 존중과 협력의 정신을 가지면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 닥쳤던 역경, 아니 다가올지 모르는 역경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섀클턴과 대원들이 겪은 634일간의 어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섀클턴과 대원들이 역경을 극복했듯 긍정적인 사고와 인내심을 갖고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도 함께 들었다.
조성용 한국리더십센터 사장
동아일보------------
<2>살바도르 달리
꿈을 일상으로 바꾼 천재 예술가
《나는 늘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인간의 맹목적인 습성에 경악한다. 은행직원이 수표를 먹지 않은 것에 놀라고 나 이전에 어떤 화가도 흐물거리는 시계를 그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란다.》
천재를 열망하는 세상을 향해 ‘나는 천재이다’라고 깜짝 선언한 화가가 있다. 바로 초현실주의 스타 화가인 달리이다.
독자여, 그대가 설령 미술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혓바닥처럼 축 늘어진 달리의 시계는 기억하리라.
치즈처럼 물렁한 달리표 시계는 미술교과서와 상업광고에도 단골로 등장하니 말이다.
달리가 흐느적거리는 시계를 개발한 덕분에 시계처럼 정확한 인간이 되기를 갈망한 사람들은 긴장감을 떨치고 한결 여유를 갖게 되었다.
아울러 시간은 정확하고 견고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도 해방되었다.
그렇다면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에게 원초적 시계를 선물한 달리를 천재로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실 천재라는 단어만큼 평범한 사람들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단어는 드물다.
과연 천재는 어떤 사람일까? 백과전서의 저자이자 프랑스 사상가인 디드로의 입을 빌려 천재를 정의해본다.
‘정신의 확장, 상상력, 영혼의 활달함, 그것이 천재이다.’
디드로의 이론에 따르면 달리는 분명 천재이다.
그는 엄청난 상상력과 샘물처럼 솟는 아이디어, 기발한 발상으로 사람들의 잠든 의식을 단숨에 깨우곤 했으니까.
그런 달리가 자신의 독특한 예술관, 사랑, 인생, 속내를 파격적으로 털어놓은 책이 지금 소개할 ‘살바도르 달리’이다.
그는 이 자서전에 아이처럼 치졸한 발상과 불경스럽도록 자유분방한 성의식, 편집광적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 천재성을 뽐내는 이기주의자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허풍쟁이 달리라고 흉보지 말자.
왜? 그것이 곧 천재예술가의 특권이니까. 생각해 보라.
만일 자아에 대한 확신, 혹은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토록 지나친 열정을 가지고 미친 듯 예술에 몰입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시인 장 콕토는 ‘천재는 자신과 사랑에 빠진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흔히 세 살에서 일곱 살까지를 창조성의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아이들은 불꽃같은 열정으로 세상을 공부하고 농축된 호기심과 탐구심을 자양분 삼아 창의성과 상상력을 활짝 꽃피우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에 비추어 볼 때 달리는 영원한 아이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던 도중 소설 양철북과 영화 아마데우스가 머리에 스쳤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는 위선과 증오로 가득 찬 세상을 거부하고 속물적인 삶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 세 번째 생일날, 자신의 의지로 신체적 성장을 멈춘다.
그리고 그는 영원한 아이로 살아가는 운명을 선택한다.
한편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르는 천재성 대신 천재를 알아볼 능력만을 준 신을 저주하며 열등감의 원천인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이끌며 그 또한 파멸의 길을 걷는다.
오, 천재에 대한 선망과 감탄, 그리고 질투여!
독자여, 만일 그대가 영원한 아이이며, 천재인 달리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꿈을 일상으로, 일상을 꿈으로 변형시킨 위대한 연금술사의 자서전을 꼭 탐독하기 바란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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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잭 웰치·끝없는 도전…
‘CEO의 전설’이 말하는 인재경영
“CEO는 정말 골치 아픈 직업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없다.”
잭 웰치는 제너럴 일렉트릭(GE) 최연소 회장으로 부임한 후 20년간 GE의 시가총액을 40배로 키워놓은 전설적인 경영자이다.
그는 GE를 오늘날 ‘경영사관학교’라는 별칭을 얻게 하며 세계적인 기업들의 최고경영자(CEO) 공급처로, 또 세계 초우량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잭 웰치·끝없는 도전과 용기’는 잭 웰치가 GE를 은퇴하면서 최초로 집필한 경영지침서이자 회고록이다.
관료적이고 보수적이었던 GE를 변모시켜 기업의 시장가치를 120억 달러에서 4500억 달러로 끌어올린 잭 웰치의 경영 철학에 대해 다른 사람이 쓴 책은 많이 나와 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기업경영에 관해 직접 쓴 것으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이 책에는 잭 웰치가 GE의 조직 체질을 바꿔가며 추진했던 수많은 혁신 사례들이 일화 위주로 실감 나게 소개되어 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그가 주장했던 4가지 이니셔티브, 즉 ‘6시그마’, ‘세계화 전략’, ‘서비스 사업 개발’, ‘e비즈니스로의 전환’ 등은 이미 경영학계의 정설이 된 실천 경영 사례로 많은 독자들에게도 익숙하다.
이 책은 딱딱한 경영지침만을 열거하지 않는다.
잭 웰치 개인의 가족 이야기부터 경영의 성공담과 실패담까지가 때로는 흥미진진하게, 때로는 실감나게 그려진다.
어릴 적 말더듬는 버릇으로 인해 소심했던 웰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어머니의 이야기라든지, 일중독에 빠져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이후 재혼하게 된 사연 등은 어려웠던 시절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준다.
그런가 하면 1700여 건의 인수합병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키더 피보디(Kidder Peabody)’ 인수가 실패로 판명된 것이나 ‘허니웰(Honeywell)’ 인수가 무산된 데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대목도 나온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웰치의 인재 경영 방식이다.
잭 웰치는 “안타를 잘 치는 10명의 선수보다 홈런을 치는 1명의 선수를 키워라”라고 주장하며 5년간 무려 11만 명이나 되는 인원을 감축해 ‘중성자탄 잭’이라는 씁쓸한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가능성이 보이는 핵심 인재에게는 아낌없는 지원과 믿음을 쏟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깊은 우물에 호스를 대는 것뿐이다”라고 말한 그는 핵심 인재 중심의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기업 문화를 만들며 직원들에게 최대한의 자율성을 부여했다.
이렇듯 잭 웰치 본인의 카리스마 넘치고 대담한 성격을 그대로 닮은 그의 삶과 경영법이, 반드시 모든 환경과 기업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지침들을 거울삼아 더욱 의미 있는 인생과 혁신적인 경영 사례를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이 책을 읽고 실천을 다짐하는 모든 독자의 몫일 것이다.
최효진 HR코리아 대표
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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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정치와 관련된 나의 언행은…소위 진찰하는 입장에서, 정부 내에 지위를 점하고 정권을 휘두르며 천하를 치료할 뜻은 없지만, 아무래도 국민 모두를 문명개화의 문으로 인도하여 일본을 병력이 강하고 상업이 번창한 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근대 이후의 일본을 생각할 때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장했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은 전근대 아시아에서 탈피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의 한 쪽이 되지도 못하였고 아시아에 복귀하지도 못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근대 일본 서구문명의 길라잡이였던 후쿠자와는 메이지(明治)시대 일본 근대화의 방향을 서구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창한 사상가이자 교육가로 게이오(慶應)대를 설립했다.
특히 그의 초상은 오늘날 일본은행권 최고가 화폐인 1만 엔권 지폐의 앞면에 새겨져 있고 일본인들에게는 근대 일본의 민주화에 공헌한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실제 어떤 인물이었을까?
후쿠자와는 소년 시절 학문에 뜻을 두고 봉건적이고 계급적 질서의 근거로 비판받았던 한학 등에 반발하여 나가사키와 오사카에서 난학(네덜란드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20대 중반에 도쿄에 가서 당시 세계의 중심이 네덜란드가 아니라 영국 미국 등 영어권이라는 사실에 놀라 학문의 방향을 영학(英學)으로 바꾸었다.
그는 1860년 미국을 최초로 방문했던 일본 사절단에 합류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고, 몰락 직전의 막부에서 외국 관련서류 번역담당관으로 근무했다.
1861년에는 막부의 유럽 사절단 일원으로 약 1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을 순방했다.
이런 경험으로 유럽과 미국의 학문 및 서구사상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그는 ‘서양사정’(1866년)을 비롯한 엄청난 저술활동으로 당대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또 저작물 수입을 바탕으로 게이오의숙을 창설하였다.
1868년 에도막부가 몰락한 뒤 신정부에 참여하지 않고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핵심 정치가들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며 당대 오피니언 리더로 자리 매김했으며, 서구화를 지향하는 재야인사이자 친정부적 국권론자로 변모해 나갔다.
그의 이상은 그가 남긴 어록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자존’이라는 한마디에 압축돼 있다고 하겠다.
후쿠자와는 1882년 임오군란 후 조선에서 청국 세력이 확대되자 조선의 급진개화파를 지원해서 그들이 스스로 국내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후 그는 1885년 3월 16일 ‘탈아론’을 시사신보에 발표하며 일본이 다른 동양 국가들과 협조할 게 아니라 그들을 넘어서자고 주장했다.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한국의 근대는 왜 일본과 다르게 시작했는지 알 수 있다.
개방과 근대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사회 인식과 이를 부채질한 지도층의 빈약한 국제 인식 등 19세기 말 우리는 너무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의 침략이 정당화될 순 없으나 당시 우리의 안이한 대응을 지적하지 않고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서민교 연세대 강사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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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성공적인 자서전은 어떤 것일까?
독자가 저자의 위대한 삶에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가슴에 저자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한 교훈을 은은히 남기는 글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과학자와 일반인에게 두루 유명했고, 많은 사람이 “물리학계의 무서운 신동”이라 불렀던 미국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1918∼1988)이다.
그는 유쾌하고 재치 있고 수수께끼 풀이에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물리학에서 불멸의 업적을 남겼고, 그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대중을 위한 강연과 저술의 능력도 탁월해서 물리학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를 친근하게 기억한다.
우리가 100m 세계기록 보유자에게 감탄하듯이, 파인만에게 감탄하는 것은 그의 천재성에 대한 아주 단순하고 본능적인 반응이다.
만약 이 자서전이 그런 반응을 일으키는 데에 그치고 만다면, 그건 명백히 실패다.
새내기 물리학도로서 노벨상을 꿈꾸던 시절에 감히 영어로 읽으려 애썼던 이 책을 훌륭한 우리말 번역으로 다시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이 성공적인 자서전이라고 재평가하게 되었다.
과거엔 욕심이 앞서 감탄하는 데 급급했던 것 같다.
호기심, 모험, 나만의 방법, 관습에 대한 무관심, 앎과 배움 그 자체의 즐거움, 놀이, 책 밖의 실제 세상 등의 핵심적인 화두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알고 보니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라는 제목에 이미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파인만은 이런 말을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자주 듣는 사람이었다.
파인만은 나름대로 진지한데, 사람들은 그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왜일까?
파인만은 실제 세상에서 스스로 배운 반면, 사람들은 책과 권위와 격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배웠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즐겁지 않으면 안 하는 족속인데, 사람들은 하라면 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수수께끼를 보면 군침을 흘리는데, 사람들은 울상을 짓거나 무시하거나 다수가 의지하는 권위자에게 달려가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권위와 겉치레에 반대하도록 배웠다”고 파인만은 말한다.
이 배움을 실천하면서 살기는 어렵다.
그리고 더욱 어려운 것은, 그렇게 살면서 진정으로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파인만은 사랑스럽다.
설령 그가 천재 물리학자에다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많은 사람은 과학의 즐거움에 관심이 있기보다 과학을 잘하는 비법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앨버트 R 힙스가 기억하는 파인만의 눈빛이 전하던 메시지, 그건 ‘물리학, 그 자체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니 파인만의 자서전에서 과학 잘하기 비법을 건질 가망은 일단 없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 보자.
혹시 과학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과학을 잘하는 비법이 아닐까? 더 나아가 파인만의 아버지가 남긴 가르침을 보라.
그것은 또 다른 과학 잘하기 비법이 아닐까?
자유로운 자만이 과학을 잘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틀에 맞지 않는 제 자신을 깎아내다 지치고 풀이 죽은 젊은이들에게 이 성공적인 자서전이 주는 교훈인 듯하다.
전대호 시인·과학평론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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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러셀 자서전
한 사람의 자서전이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의 문화적 사상적 지형도가 되는 드문 일이 있다.
철학자, 수학자, 문필가, 반전운동가, 백작, 노벨 문학상 수상자, 대안 교육가, 여권 신장 운동가 등 하이브리드의 삶을 산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이 바로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 케임브리지 시절, 학문적 활동기, 활발한 사회 활동기 등으로 이어지는 이 자서전에서 단연 흥미로운 대목은 문화계와 사상계 저명인들과의 교유다.
철학자 조지 무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앨프리드 화이트헤드, 경제학자 존 케인스, 소설가 데이비드 로렌스, 조지프 콘래드(러셀은 아들 이름을 콘래드로 지었다.
‘내가 늘 가치를 발견하는 이름’이라는 게 이유였다), 사회운동가 시드니 웨브 부부, 시인 T S 엘리엇,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한밤중 러셀의 집으로 찾아와 서재에서 불안스럽게 서성거리는 비트겐슈타인을 향해 던진 러셀의 질문.
“자네는 지금 논리학을 생각하나?
인간의 죄를 생각하나?”
비트겐슈타인의 대답인즉, “둘 다입니다.”
러셀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그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국가나 타인이 간섭할 수 없다는 원칙에 철저했다.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시를 쓴 어느 젊은 시인을 영국 경찰이 구속하자, 러셀은 영향력을 발휘하여 시인을 석방시키려 했다.
시인이 시 때문에 구속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결국 시인은 러셀의 노력으로 석방됐지만, 러셀은 문제의 시를 읽어보고 매우 역겹게 느꼈다. 그러나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시가 아무리 역겹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끼친다고 할 수는 없다.’
자서전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들 가운데 하나가 그 솔직함이라고 볼 때, 러셀의 자서전은 최고급의 자서전이다.
청소년 시절 러셀은 하녀를 유인하여 키스와 포옹을 하고 ‘나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하녀는 러셀의 제의를 거부하면서 ‘당신이 훌륭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러셀은 자신의 약점으로 비칠 소지가 있는 행적이나 심경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밝힌다.
중국과 러시아 방문 경험에도 비교적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중국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면 소비에트 체제가 막 들어서고 있던 러시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특히 당시 중국 베이징대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러셀은 그들의 열정과 헌신에서 중국의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러셀의 자서전은 자서전 문화에 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시시비비의 판단을 드러내지 않는 두루뭉술한 자서전,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목은 슬쩍 넘어가는 자서전, 자화자찬으로 가득한 자서전. 이것이 그동안의 우리 자서전 문화가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해보는 것이다.
러셀 자서전은 우리에게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할 사연 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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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마가렛 미드 자서전
‘인류학의 어머니’ 치열했던 발자취
프란츠 보아스를 미국 인류학의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마거릿 미드(1901∼1978)는 인류학의 어머니다.
미드는 인간 본성과 문화의 다양성을 탐구하기 위해 오지에서의 고독한 현지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말년에 미드가 쓴 이 자서전은 얼마나 그녀가 자신의 삶과 직업과 사랑과 가족과 인류학에 대하여 진지했고 치열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녀는 50여 년을 남자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하고 고단한 오지의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남태평양의 사모아 제도, 뉴기니의 세픽 강가와 마누스 섬,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에서 그녀가 평생 실험하고 연구한 남녀의 문화적 차이와 양육, 문화와 기질의 관계는 당시 프로이트 심리학이 지배하는 인간 과학에 새로운 의문을 던져 주었다.
미드는 자신의 삶이 보여 준 것처럼 성과 결혼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했다.
그녀는 인간의 수명이 연장될수록 일부일처제가 평생 지속될 가능성은 적어진다는 생각을 하였고, 결혼에 지나친 기대를 하지 말 것과 예비결혼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녀는 목사 지망생, 현지 연구 중에 만난 열정적인 인류학자 레오 포천, 그레고리 베이트슨과 혼인하는 등 3번 결혼하고 또 이혼했지만 전남편들과 그들의 배우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도전적 삶을 살았다.
이 자서전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미드의 연구는 항상 실천적인 사회 참여로 행동에 옮겨졌으며 사회활동은 말년까지 그칠 줄 몰랐다.
그녀는 미국 인류학회와 미국과학진흥협회 회장을 지냈을 뿐 아니라 국립 아카데미 회원이었고 세계교회협의회 등 10여 개 조직에도 관여했다.
미드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종교와 여성, 범죄, 음주, 결혼 문제 등 거의 모든 사회문제에 대해 대중 강연을 했으며 여성잡지 ‘레드북’에 16년간이나 기고를 하여 여성 인권 신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무엇보다도 미드는 인류학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으며 그 덕분에 미국 사회는 편협한 문명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외부 세계를 바라보고 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1978년 11월, 미드가 췌장암으로 생을 마감하였을 때 그녀가 현지 조사를 했던 남태평양의 마누스 섬 마을 사람들은 대추장이 서거했을 때 치르는 5일간의 장례식을 거행하며 애도를 표했다.
그녀가 사망한 이후 호주의 인류학자 데릭 프리먼은 미드의 사모아 제도 연구가 믿을 수 없이 순진한 것이었다고 비난하는 책을 발간했고, 뉴욕타임스는 이를 1면에 보도하여 ‘미드의 신화’가 다시 엄청난 논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사모아 제도를 다시 찾은 인류학자들은 그녀가 옳았고, 객관적이었으며, 매우 훌륭한 연구자였음을 증명해 주었다.
미드의 자서전은 참으로 문학적이고 세심하게 삶과 학문,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 줌으로써 왜 미드가 인류학의 어머니로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는지를 가슴으로부터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그녀는 자신이 머무는 곳 어디든지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열정적으로 만났던 것이다.
이태주 한성대 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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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나는 다다(dada) 다
근래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열렸던 맨 레이(1890∼1976) 사진 전람회의 맨 끝 벽에는 ‘참여하지는 않지만, 무관심하지도 않았던’이라는 문구가 인상 깊게 쓰여 있었다.
이 문구는 레이와 생의 마지막을 같이했던 그의 부인 줄리엣 맨 레이가 파리 몽파르나스에 있는 그의 묘비에 썼던 것이었다.
이는 물론 레이가 살아 있을 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었다.
그의 자서전 ‘나는 다다다’(원제 ‘Self Portrait’)를 펼치면, 왜 그가 평소 자신의 삶을 이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레이는 현대 문학예술의 정신적 기반이며 20세기의 예술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던 다다(dada) 운동과 초현실주의 운동의 한복판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한 사진가이자 화가였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평범한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당시의 현대미술에 매혹되어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그는 ‘뉴욕 다다’를 이끈 마르셀 뒤샹, 프랑시스 피카비아 등과 만나면서 뉴욕 다다운동의 주도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1921년엔 파리로 거처를 옮겨 파리 다다에 합류했다.
앙드레 브르통과 파리 다다의 회원들이 주도한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사진가로서 또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고, 파리와 미국을 오가며 오랜 기간 다양한 장르의 실험을 지속했다.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사진을 레이는 초현실주의적인 사진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그에 의해서 사진은 처음 본격적으로 현대예술의 주류로 편입되었고, 기계시대의 미학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매체로 인정받게 되었다.
레이의 자서전엔 이러한 그의 삶의 여정, 작품에 대한 고민과 철학, 주변 사람들의 얘기 등이 잘 녹아 있다.
평생을 친구로 살았던 뒤샹과의 일화부터 여성들과의 사랑과 이별, 전쟁의 경험, 당시 파리 미술계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한 위대한 예술가의 삶과 주변이 파노라마처럼 얽혀 있다.
때로는 성공을 위해 브르통이나 돈 많은 귀족 부인들의 눈치를 보는 대목도 있고, 생존을 위해 혹은 작은 편리함을 위해 슬쩍 거짓말을 하는 장면 등도 스스럼없이 솔직하게 펼쳐 보인다.
그래서 이 위대한 예술가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고 옆집 아저씨 같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나온다.
원래 사진가는 자기 작품 외에도 인물사진이나 잡지 및 도록에 필요한 사진을 찍어 주는 재주 때문에 다른 예술 분야의 사람들과 유달리 교분이 많은 편이다.
레이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의 자서전에는 뒤샹이나 브르통 외에도 트리스탕 차라, 파블로 피카소,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콘스탄틴 브란쿠시, 살바도르 달리, 장 콕토 등 20세기 예술을 빛낸 수많은 작가의 삶과 취향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더구나 이 책은 소설 쓰기를 열망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가장 허구적인 자서전이 가장 사실적인 전기보다 낫다’고 뻐기면서 1951년부터 63년까지 13년간 집필한 그의 또 다른 예술작품이며, 원제목처럼 그의 자화상이다.
박주석 명지대 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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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낙오자의 만남… 이별… 그리고 용기
가수 신해철은 서태지의 음악에 대해 주류의 대열에서 뛰쳐나온 ‘낙오자’ 정서를 담고 있고, 자신의 음악은 주류를 비판하면서도 그 속에 머물러 있는 ‘비겁자’ 정서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에릭 호퍼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문득 서태지식 ‘낙오자’라는 규정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 책은 미국의 떠돌이 철학자 에릭 호퍼(1902∼1983)의 ‘트루스 이매진드(Truth Imagined)’를 완역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1941년 부두 노동자로 ‘정착’하기까지의 반생을 몇 가지 에피소드 중심으로 정리해 놓았기에 ‘자서전’으로 이름 붙이더라도 손색이 없다.
에릭 호퍼는 가난과 실명(글자를 익힌 뒤인 8세 때 실명하였으나 15세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했다고 한다) 등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행상과 떠돌이, 웨이터, 부두 노동자 등을 전전하면서 독학으로 철학 체계를 구축한 사상가다.
부두 노동자로 정착한 뒤 1951년 첫 저서 ‘맹신자들’을 비롯해 10여 권의 사회철학 저술을 남겼으며 81세로 사망하기 전해인 1982년 생애 마지막으로 이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돋보이는 점은 하층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처지에 대해 자기과장이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낙관주의적 허세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그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자서전의 내용은 대부분 저자가 떠돌아다니면서 마주친 수많은 인간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교수직 대신 고물상이 된 유대인 샤피로를 비롯해 자신과 사랑에 빠졌던 대학생 헬렌, 유능한 일꾼 앤슬리, 저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유산을 사회에 환원한 농장주 쿤제 등 수많은 인물과의 만남과 이별이 저자의 경험을 살찌우고 있다.
저자로 하여금 단순한 떠돌이 노동자로 살게 내버려두지 않고 독특한 사회철학자로 성장시킨 것은 독서열(떠돌이 노동자로 살아가면서도 저자는 언제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과 아울러 떠돌아다니면서 만난 동시대 사람들의 삶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었다.
물론 타인들의 삶에 대한 묘사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대부분 저자의 투철한 관찰력과 결합하여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상으로 승화된다.
인상적인 대목은 저자가 자살 충동을 극복하고 방랑자로 살기로 결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센트로 임시수용소에서 겪은 경험이다.
공장과 감옥의 결합체와도 같은 그곳에 모인 수용자 200여 명이 대부분 ‘적응 불능자’임을 발견한 뒤, 저자는 이 적응 불능자야말로 새로운 개척자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제자리에 안주하는 게 보통이지만 약자에게 내재하는 자기혐오가 훨씬 더 강한 에너지를 부여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 결별하고 자연을 넘어서게 하는 일탈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승엽 문학평론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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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스콧 니어링 자서전
지금 이 순간 근심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이 그 근심이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의 벗과 이웃들의 것이기도 하다면, 그러나 그 모든 근심을 뒤로하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쯤 읽어야 할 책이 여기에 있다.
바로 ‘스콧 니어링 자서전’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삶을 실천했던 사람, 스콧 니어링. 그는 다른 사람이 사는 방식과 기호에 맞춰 살지 말고 자기 개성에 따라 살 것을 역설했고 그 역시 자신의 신념과 소신에 따라 단순하게, 치열하게, 저항하며 한 세기를 살았다.
자본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며 인간을 괴롭히는 권력으로부터, 그러한 사회가 조장하는 근심과 두려움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수반되는 조급함과 분주함으로부터,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좁은 지역으로 몰려드는 데서 생기는 복잡함과 혼란으로부터. 그것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나라에서 태어나 가장 비자본주의적으로 살았던 보기 드문 삶의 모습이었다.
자서전에서 잘 드러나듯 니어링의 삶에 대한 원칙은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지속적인 안락’보다 더욱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은 없으니 가진 것이 많을수록 행복은 줄어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삶이란 일상적 긴장과 지혜로운 해결의 연속선이지 한참 고생하여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놓고 그 다음부터 안락하게 영위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가 가진 소유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임을 늘 기억하며 살아갔던 그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 세계적 규모로 계획된 파괴와 살상이 서구 문명이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라면 서구 문명은 조금이라도 빨리 세계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서슴없이 말했던 니어링.
그는 아내 헬렌 니어링과의 시골 생활이 “이 폭력적인 미친 세상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제 정신을 갖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삶의 한 본보기”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수많은 젊은이들은 그를 통해 스스로도 발견치 못했던 자신의 욕망마저 끄집어내고 만들어내는 도시의 달콤한 것들에 대하여 의심하였고, 그 속에서 무엇이 대안인지 고민하였으며, 나아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의 필요만을 취하기 위해 철저한 자급자족의 삶을 꾸려나갔고, ‘부의 덫’이 사회를 짓누르지 않는 공정한 분배의 공동체가 되기를 계획하고 실천한 사회주의자였으며, 하루 4시간 노동과 4시간 글쓰기와 4시간 친교활동을 지키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니어링. 그는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함으로써 진정한 웰빙은 철저한 웰두잉(well-doing)이 선행되어야 함을 몸으로 가르쳐 준 인물이었다.
허혜란 소설가·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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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만화가의 길
‘아톰’이 나오기까지
《만화를 그리는 것도 죄가 되던 시절, 나는 애써 그린 만화를 들키지 않고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매일 아침 화장실 안쪽 벽에 그림을 바꿔 붙였다. 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쳐다볼 수밖에 없는 정확한 위치에 말이다.》
일본의 효고 현 다카라즈카에는 전철회사 한큐가 경영하는 곤충관이 있다.
곤충관 진열실의 오사무시(딱정벌레) 표본 책장에는 견학 온 학생들이 해 놓은 낙서가 있는데 거기에는 ‘데즈카’라고 적혀 있었다.
데즈카는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를 말하고, 벌레라는 뜻의 무시는 데즈카의 필명이었다.
일본에서 만화의 신으로 추앙받는 데즈카에 대한 일본인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데즈카는 무시라는 필명을 지은 배경을 설명하면서 밤만 되면 이상하게 활기가 넘쳐서 네온 불빛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오사무시가 만화가와 정말 비슷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꿈이라는 불빛을 찾아 날아갔던 만화가 데즈카. 그의 자서전 ‘만화가의 길’은 만화를 벗 삼아 열정적이며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던 데즈카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그가 1989년 2월 9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추억이나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과정을 만화가다운 필체로 풀어낸다.
데즈카는 1928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오사카대 의학부 2학년 시절 ‘마이니치소학생신문’에 네 컷짜리 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가로 데뷔했다.
그는 만화를 통해 당시 전쟁의 폐허 속에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어 했다.
그는 “재미없는 만화는 만화가 아니다.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 웃음이 되는 것. 이것이 만화가의 길”이라고 말한다.
그는 음악, 발레, 무대, 영화, 천체, 곤충, 역사, 여행 등에 조예가 깊었지만 무엇보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사랑했다.
이러한 열정이 데즈카의 창작에 집약되어 펜과 종이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일을 했다고 그의 매니저는 회상한다.
책 속에는 그가 그렸던 ‘신보물섬’, ‘읽어버린 세계’, ‘메트로폴리스’, ‘리본의 기사’, ‘정글 대제’, ‘철완 아톰’ 등에 대한 숨은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2001년 오디세이’의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과의 인연, 미국 애니메이션의 왕 디즈니를 만났던 사연 등도 소개된다.
‘만화가의 길’을 읽는 또 다른 재미는 데즈카가 살았던 1950년대 일본의 사회상을 읽는 것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본 젊은이들의 꿈과 좌절 그리고 도전이 펼쳐지고 미국의 점령 속에서 가졌던 비참한 기억들은 고스란히 데즈카의 만화 속으로 스며든다.
지구인과 우주인의 알력 싸움, 이민족 사이의 분쟁, 인간과 동물 사이의 오해, 로봇과 인간의 비극 등은 그의 대표작 아톰의 테마를 형성한다.
책 제목처럼 이 자서전은 데즈카가 만화가로서 꿈꾸고 걸었던 하나의 길을 예시해 준다.
데즈카는 의학박사, 문필가, 프로듀서, 영화감독 등 다양한 일을 해 왔다.
그러나 어디에 글을 쓰든지 자신의 직업을 만화가라고 서슴없이 밝혔다고 한다.
만화를 사랑하고 만화가를 지망하는 학생은 물론 꿈을 꾸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이루어 가는 기쁨과 사명감을 일깨워줄 만한 책이다.
이동훈 장난감박물관 토이키노 기획이사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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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 위대한 말을 남긴 미국의 흑인 해방운동 지도자 마틴 루서 킹. 그는 1929년 애틀랜타의 중산층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스턴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집안 좋은 여자 성악가와 만나 결혼을 하고, 몽고메리의 덱스터 교회 목사가 된 그는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었으나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없애기 위해 험난한 삶을 택했다.
그 시절에 흑인들은 버스에서 백인과 함께 앉을 수 없었고, 운전자들은 흑인들을 검둥이, 검은 원숭이, 검은 젖소라 부르며 멸시했다.
또 흑인은 똑같은 돈을 내고도 백인처럼 식당의 카운터에 앉아서 먹을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던 중, 1955년 12월 1일 몽고메리에서 로사 파크스라는 흑인 여인이 버스 안에 앉아 있다가 흑백분리법을 위반한 죄로 체포된다.
이를 계기로 흑인들의 버스 보이콧 운동이 벌어졌고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들과 손자들을 위해서”라며 동참한 흑인들은 작은 승리를 쟁취했다.
이 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틴 루서 킹은 그때부터 흑인의 인권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64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또한 흑인의 투표권 쟁취, 베트남전 반전 운동, 빈민운동 등을 벌이다가 1968년 4월 4일, 멤피스의 한 호텔에서 암살당한다.
이 자서전은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넘어서 현장의 구체적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마틴 루서 킹의 사상과 고뇌도 잘 보여 준다.
그의 중심에는 예수의 사랑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정신이 있었다.
이런 태도는 양심적인 백인들의 협조를 이끌어내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미국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흑백 차별은 견고했다.
백인들은 집요하게 그를 방해했고 과격한 흑인들은 그를 온건 타협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생전에 마틴 루서 킹이 남긴 글을 편집한 이 자서전은 한 개인의 일생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과 미래를 생각하게 해 주는 소중한 책이다.
버스에서 같이 앉을 수 있는 권리, 투표권 등 당연해 보이는 기본권이 흑인들에게 제한된 나라가 민주주의 대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의 40년 전 상황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현재의 미국은?’이라는 의문이 남는다.
개인적으로 여행 중에 인종차별적인 시선 속에서 설움을 느껴 보았고, 모스크바에서 내 얼굴이 노랗다는 이유로 주먹을 휘두르던 스킨헤드들과 싸웠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분노에 떨기도 하고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을 받기도 했다.
이 책은 40년 전 미국의 얘기를 넘어서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미 우리 땅에도 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과 혼혈인이 많아졌다.
우리와 함께 살아갈 이 생명들에 대해 우리는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이 책을 읽고 나면 ‘인종 차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악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된다.
이지상 여행칼럼니스트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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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마음의 진보
《영웅은 낡은 세상과 낡은 길을 버리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남의 괴물과 싸울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괴물과 싸우고 자기의 미궁을 탐색하고 자신의 시련을 감내해야만 삶에서 잃었던 것을 결국 찾아낼 수 있다.》
환속한 수녀, 종교의 본질을 만나다
여기, 아주 섬세하고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한 소녀가 있다.
그녀는 17세가 되는 1962년 9월,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로마 가톨릭 수녀회의 수련원에 들어간다.
“사방에서 신을 만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것을 기대하면서.”
‘마음의 진보’ 저자인 영국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이야기이다.
이 책은 자신의 어린 날 결정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 위에 선 것인지를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960년대의 수녀회는 강압적인 규율, 불합리한 의례, 냉담한 악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수녀의 신분으로 옥스퍼드대 영문학과에 다니던 저자는 결국 7년 만에 수녀 서원을 철회해 달라는 청원을 넣는다.
수녀복을 벗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 생활을 계속하지만 거식증, 불안 장애에 시달리며 자주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3년여에 걸쳐 정신과 의사의 상담치료를 받지만 자살 기도에까지 이르고 만다.
공교롭게도 박사 학위 과정을 통과하지 못해 교수가 되고자 하는 꿈도 좌절된다.
세상에 발을 붙이고 남들처럼 살고자 하는 삶은 시련의 연속이어서 나중에는 간질병 진단까지 받는다.
이 자서전은 저자가 예순 살을 넘긴 시점에서 썼다.
교수 직이 좌절된 뒤 그녀는 저술가로 살기 시작한다.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면서 바울로 마호메트 붓다 등 성인의 평전을 쓰고,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세 종교를 비교 분석하는 저서를 쓴다.
그러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의 정신적 삶이란 나선형 계단 같은 것임을. 계단의 모서리마다에서 어둠과 좌절을 만나지만, 그 과정을 묵묵히 살아내다 보면 모르는 새에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음을.
그녀는 나선형의 계단을 인간 마음이 진보하는 상징의 형태로 설명한다.
그리하여 이 책을 쓰는 시점에서 이윽고 알아차린다.
그 고난스럽고 다단했던 생이 결국은 소녀 시절의 소망, “사방에서 신을 만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에 다가가는 것이었음을.
암스트롱의 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인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면서 의존성을 버리는 일이다.
그녀는 수녀원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절대적 힘을 지닌 초월적 존재가 자신을 이끌어줄 것이라 기대하는 의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의존성 때문에 거듭 종교에 실망했을 것이다.
수녀 직을 버리고 종교를 버리면서 바로 그 지점에서 의존성도 벗는다.
또한 그 지점에서 자신이 특별하다는 나르시시즘을 이겨내면서 동시에 종교적 나르시시즘도 벗는다.
‘버림으로써 얻는다’는 명제처럼, 그제야 그녀는 범우주적인 종교의 본질과 만나게 된다.
이 책은 인간이 왜,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한 개념을 저자 자신의 삶을 표본으로 하여, 종교 신화 문학의 상징과 은유를 통하여 설명한다.
종교적 믿음의 문제로 회의를 느끼는 사람, 삶의 총체성에 대한 개념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급격히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모색하는 이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김형경 소설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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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영원한 청춘
《경영은 끊임없는 창의적 연구를 통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경영이란 본래 그 가치가 매우 높은 예술적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경영자는 종합예술가라 할 수 있다.》
초등중퇴 점원서 ‘경영의 신’으로
다신교를 믿는 로마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죽어서 신(神)이 됐다.
그러나 신전은 정치가와 군인들이 차지했고 상인들은 꿈도 꾸지 못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도 상인의 지위는 마찬가지였으나,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1894∼1989)는 큰 발자취를 남기고 ‘경영의 신’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점원 생활을 시작한 마쓰시타는 1917년 23세에 ‘마쓰시타 전기제작소’를 설립한다.
‘회사 근무는 하루 일하면 하루치 급료를 주었으므로 쉬는 날은 밥을 먹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쉬더라도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초라하게 시작했지만 연결 플러그, 자전거 램프 제조에 성공하면서 사업은 번창했다.
그러던 1932년 5월 5일 마쓰시타는 사업가로서의 사명이 ‘가난 극복, 물자를 풍족하게 생산해 사람들이 수돗물처럼 마음껏 쓰게 한다’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이날을 창업 기념일로 정한 뒤 250년간을 사명달성기간으로 정해 1기인 25년을 자신이 책임진다고 생각할 만큼 긴 호흡의 사고를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어려움 속에서 재기한 그는 1951년 승전국인 미국을 처음 방문해 그 풍요로움에 놀라면서도 마음을 열고 세계를 배운다.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전개한 마쓰시타는 네덜란드 필립스와 제휴하면서 1959년부터 다가온 무역과 외환 자유화의 물결을 앞장서 수용해 일본이 개방경제 체제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1973년엔 회장 직을 사임한 뒤 사회사상가이자 미래기획자로 변신한다.
‘민주주의는 번영주의’이지만 ‘경제가 아무리 발전해도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진정한 풍요로움은 찾아오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그는 21세기 아시아 시대에 대비한 인재를 기르기 위해 사재를 털어 1980년 마쓰시타 정경숙(政經塾)을 설립했다.
이곳을 나온 200여 명의 졸업생은 국회의원 30명을 포함해 100여 명이 정치권으로 진출해 일본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소년 시절, 배움이 적어 야학에서 가르치는 수학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마쓰시타가 무일푼으로 시작해 거대 기업을 일으키게 된 까닭은 제품이나 기술이 아니라 뛰어난 경영이었다.
인간을 이해하고 조직을 다룰 줄 알았던 그는 경영을 논리와 기법이 아니라 사상과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마쓰시타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끝없이 낮춤으로써 신의 경지에 올랐다.
‘나는 배운 것도 적고 재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내가 경영을 잘한다거나 인재를 잘 활용한다고 평가한다.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짚이는 점이 있다.
내 눈에는 모든 직원이 나보다 위대한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직원들을 꾸짖을 때가 많았지만 속으로는 늘 상대방이 나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장사꾼은 돈을 남기지만 큰 상인은 사람을 남긴다.
경제와 정치를 넘나들면서 사람을 남기고 떠난 위대한 상인 마쓰시타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파트너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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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크로포트킨 자서전
《말로만 인류의 진보를 역설하는 진보주의자들, 농민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체하면서 실은 농민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은 단지 자신의 모순을 감추는 데 급급하여 궤변만 늘어놓고 있었다.》
대중을 보듬은 혁명가의 영혼
진보와 혁명, 한때 청년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이 단어들은 어느덧 케케묵은 낡은 의미가 돼버렸다.
혼신의 힘을 바쳐 조금 더 살 만한 세상, 모두가 평등하게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열정은 이제 불가능한 공상이 돼버렸다.
물론 자신이 진보주의자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진보는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통용되는 얘기일 뿐 대중의 가슴을 파고들지 못한다.
크로포트킨이 자서전에서 기록하는 시대는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와 맞닿아 있다.
우리에게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속담이 있다면, 그 당시 러시아에는 ‘자기 이마로 돌담을 부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속담이 널리 퍼져 있었다.
사회의 모순을 목격하고도 눈을 돌리는 지식인들이 대다수였다.
그나마 비판적인 지식인들도 자신들을 따르라고 외칠 뿐 대중 속에서 그들과 함께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런 시대에서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명문 귀족의 작위와 젊은 나이에 쌓은 지리학자로서의 명성을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로 나섰다.
“내가 이 고상한 정서의 세계에서 생활하기 위하여 소비하는 모든 것은 바로 땀 흘려 농사지어도 자식들에게 빵 한 조각 배불리 먹일 수 없는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은 크로포트킨을 투옥과 망명 생활로 이끌었다.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크로포트킨은 억압을 겪으며 혁명가로 살아야 했다.
크로포트킨이 걸었던 길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대표되던 사회주의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이 신뢰했던 것은 과학적인 이론이나 혁명조직이 아니라 대중이었다.
대중이 스스로 자신의 욕구와 목소리를 내고 서로 학습하며 시민으로 성장하는 공화국, 그것이 크로포트킨의 이상이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제도보다 선하다”고 믿었던 크로포트킨에게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념이나 제도보다 서로 보살피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이었다.
왜 우리는 자서전을 읽을까?
아마도 그것은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대를 온몸으로 헤쳐 간 인물의 삶을 통해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 자서전’은 시대와 교감하려면 합리적인 지성만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하려는 영혼을 품어야 한다고 알려 준다.
자신의 내면세계로 도피하는 영혼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고 때론 그 시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영혼 말이다.
그런 영혼의 무게를 담지 못했기에 사회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가 대변한다고 주장했던 그 대중이 사회주의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사회의 변화와 진보를 추구해 왔던 사람들의 정신은, 항상 대중과 함께하고자 했던 그들의 영혼은 아직 현실에 뿌리내려 있다.
600쪽을 조금 못 채우는 이 두꺼운 한 권의 책 속에 그 소중한 영혼의 싹이, 아직 인류가 걷지 않은 가려진 길이 숨어 있다.
하승우 제3섹터연구소 연구원·한양대 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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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에드거 스노 자서전
《“중국 서북지방에서 나는 기근으로 어린이들이 수천 명씩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 기근은 결국 5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것이 나를 각성시킨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 가난, 폭력, 혁명으로 점철된 내 생애의 온갖 경험들 가운데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으로 남았다.”》
천생기자의 냉정한 기록, 열정적 증언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일러 ‘극단의 시대’라 했다.
오늘의 풍요로운 삶에만 눈을 돌리면, 이 정의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류가 지난 세기에 벌인 고투를 기억한다면, 홉스봄에 동의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에드거 스노 자서전’은 홉스봄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반봉건, 반식민, 반파시즘의 기치를 내세운 거대한 혁명의 물결 한복판에서 보고 겪은 바를 기록한 책이기에 그러하다.
알려진 대로 스노는 서구 언론인으로서는 최초로 마오쩌둥과 홍군을 취재해 보도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세기의 특종을 한 셈인데, 이때의 기록을 바탕으로 쓴 ‘중국의 붉은 별’은 스노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스노의 자서전을 읽을 때 초점을 맞춰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호기심과 진지한 기사거리를 얻겠다는 생각뿐”이었던 청년이 어떤 연유로 “나는 분명 더는 중립이 아니었다”고 토로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기자라면 객관적 사실을 보도하면 그 임무를 다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기자정신이라는 방파제를 넘어오는 거대한 역사의 파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 해일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냉정한) 기록자이면서 (열정적인) 증언자가 되고 마는 삶이라는 것이 있다.
스노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오해가 있었으나, 스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굳이 그의 이념을 규정하자면 점진적 사회주의자 정도가 되리라. 그럼에도 스노는 중국대륙을 휩쓴 혁명의 실체를 명확히 이해했다.
이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아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천생 기자였다.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물결을 편견과 억측으로 물들여 보아야 소용없다.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니라, 직업적으로 충실했다. 그러기에 마오의 성공을 점칠 수 있었던 것이다.
스노가 중국통으로만 활약한 것은 아니다.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도 취재했고, 간디와도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방문해 그 특유의 냉철하면서도 객관적인 관찰기를 남겼다.
한 개인이 이 모든 사람을 만나고 그 현장을 목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열적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혁명 이후의 소련과 중국을 보는 스노의 시각은 냉정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그 혁명이 “인간적인 연대, 인류 전체의 진보 및 자유, 평등, 박애 이념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다.
스노를 세계적 명성을 누린 기자로 성장시킨 힘은 억압받는 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있었다.
세계 차원에서 불평등 구조가 뿌리내리는 오늘, 우리에게 스노에 견줄 만할 기자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권우 도서평론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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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내가 큰 실수를 했다거나 내 작업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그리고 결정적인 비판을 받거나 심지어 지나친 호평을 받아서 불쾌해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뇌면 위안이 되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열심히, 그리고 가장 잘했다.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진화론 어떻게 만들어졌나
2009년은 아주 특별한 해다.
내겐 더욱 그렇다.
내 학문의 경전과도 같은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50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이 책을 쓴 내 학문의 스승 찰스 다윈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지금 서양에서는 2009년 다윈의 해를 맞이할 온갖 사업과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미국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은 전례 없이 성대한 다윈 특별전을 마련하여 이미 성황리에 전시를 마쳤고 지금은 세계 순회전시에 들어갔다.
캐나다와 호주의 대표적인 자연사박물관을 거쳐 드디어 2009년에는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각종 이벤트와 더불어 다윈의 해 피날레를 장식할 예정이다.
다윈의 이론에 관한 책보다 다윈 자신에 대한 책이 더 많이 출간됐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는 다윈이 직접 쓴 유일한 자서전이다.
독일의 한 편집자에게서 자서전을 집필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할아버지가 자기 정신에 대해 쓴 짧은 글이라도 읽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흥분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손자들을 위해 쓴 글이다.
다윈은 모든 과목을 두루 잘하는 이른바 모범생은 아니었다.
다윈의 위대함은 거의 전적으로 호기심과 상상력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엄청난 수집가였는데, 특히 딱정벌레를 좋아했다.
어느 날 오래된 나무의 껍질을 벗기다가 진귀한 딱정벌레 두 마리를 발견하곤 양손에 한 마리씩 쥐었는데도 또 다른 종류의 딱정벌레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것을 입에 넣었는데 그놈이 분비액을 쏴 대어 황급히 뱉어 내느라 세 번째 딱정벌레도 잃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이 그가 케임브리지대에 있던 시절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의 나이는 호기심을 잠재우는 데 철저히 실패했다.
다윈의 진화론, 즉 자연선택론은 지난 한 세기 반의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치며 생명의 본질과 역사를 설명하는 가장 탁월한 이론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훌륭한 이론이란 논리의 완벽함과 더불어 간결성과 적응성을 지녀야 하는데 자연선택론은 이런 점에서 거의 완벽하다.
이 책에는 그가 어떤 계기로 비글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할 수 있었으며 어떤 사람과 사건들이 그의 이론이 확립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는지가 잘 나와 있다.
그의 이론도 그의 삶과 더불어 ‘서서히 진화해왔다’.
서양에서는 다윈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10인 중 한 사람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다윈의 이론은 단순히 학문 세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 인간의 의식구조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킨 위대한 사상가다. 이제 더는 우리 주변에 세상 모든 것이 영원불변하다고 믿는 이는 없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그들 간의 관계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독자들도 드디어 인간 다윈, 그리고 위대한 사상가 다윈을 새롭게 발견하기 바란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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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
《“이따금 나 자신이 한 줄기 흐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고체처럼 충일하고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라는 개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보다는 한 줄기 흐름이 나는 더 좋다.
시간 속에서, 장소 안에서, 온갖 기묘한 형태로. 그렇다고 반드시 앞으로만 움직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과연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과 모순투성이의 정체성이 혼재하는 내면을 깊이 있게 대면할 용기가 있는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자서전은 한마디로 좌충우돌과 종횡무진의 표상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문화와 문화 사이를 넘나든다.
영국 왕세자의 이름을 딴 ‘에드워드’와 아랍 이름인 ‘사이드’. 그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팔레스타인인으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자랐고, 아랍인이면서도 미국 국적의 기독교 집안이라는 독특성이 있다.
아버지의 사업적 성공으로 부유하게 살면서 프린스턴과 하버드대라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컬럼비아대의 교수로, 저명한 비평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는 근본적인 정체성의 혼란으로 항상 불안정한 이방인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가 사용했던 언어는 ‘금지된’ 아랍어였고, 프랑스어는 항상 ‘자신’의 언어가 될 수 없었으며, 불가피하게 사용한 영어 또한 사이드의 정체성 혼란에 무게를 더하였다.
어느 순간에는 거짓된 자신의 대내외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기로 결심하지만 그의 내적 자아의 분출은 통제가 불가능하였다.
사이드는 강력한 아버지의 권위에 짓눌려 있지만 지속적으로 일상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는 문제아였다.
‘본국과 식민지 관계’처럼 심리적으로 갈등관계에 있으면서도 영양분이 많은 최면효과로서의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비록 정치와는 무관한 ‘온실’ 속에 자라도록 제한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식민지와 피식민지의 처절한 실상을 경험하였다.
열등한 지위 때문에 체념하며 가슴 한구석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부끄러움과 분노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인’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의 자서전은 단순하게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세계의 권력구조를 학문적으로 파헤친다. 서양의 식민권력으로 열등한 이미지를 생성하여 동양을 지배한 제국주의 음모를 해부한 명저 ‘오리엔탈리즘’(1978년)은 그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권력의 중압감에 따라 달라지는 흑백논리와 사이비 지성의 프리즘을 거부하고 편견에서 벗어나 진솔한 면모를 대면하도록 통렬히 비판한 사이드는 세계지성사에 충격을 던져 주었다.
‘한 시대를 움직이는 책’이라는 찬사를 받은 ‘문화와 제국주의’(1995년)는 문화와 제국주의 관계를 해부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동서양의 화해를 내포하였다.
사이드 인생의 불협화음을 통해 그의 삶과 학문을 이해할 수 있는 자서전은 ‘세계화’에 휩쓸려 자신의 정체성에 무감각한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에 쓰라린 아픔을 던져 준다.
또한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에도 위험은 언제든지 닥쳐올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이는 ‘다모클레스(Damocles)의 검’을 상기시켜 우리의 현재를 되돌아보는 마력으로도 작용한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 인문사회학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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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
《인생은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맡은 일을 완수했다. 실수도 했지만, 변화를 이루어냈다. 나는 힘든 선택을 했고 그 결과를 안고 살아갈 수 있었다. 잃어버린 사람들과 목표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컸지만, 내 영혼을 잃었다는 슬픔은 없었다.》
부당한 해임. 그리고 자서전. 갈등이나 폭로는 없었다.
단지 믿는 것에 전부를 바친 여성 최고경영자(CEO)의 솔직한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은 추락하던 HP에 구조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고 컴팩과의 합병을 통해 사상 초유의 성과를 올리고도 구(舊)세력인 이사회에 의해 밀려난 HP의 전 CEO 칼리 피오리나의 자서전이다.
만일 이 책을 펼치며 피오리나의 화려한 외모, 저돌적인 경영스타일, 성공한 여성 CEO를 따라다니는 갖가지 루머, 혹은 비즈니스계의 드라마틱한 뒷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유감이다. 결코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은 여성 CEO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졌던 피오리나의 개인 성장 일기이자 조직과 비즈니스의 실체에 대한 멘터링 북이다.
부모와 유년기의 이야기, 법대를 자퇴하고 부동산 업체의 말단사원으로 비즈니스 업계에 입문해 타인의 인정을 통해 잠재력을 발견했던 사회 초년 시절, 그리고 실패와 두려움 속에서도 배우고 느끼며 성장해가는, 치열하게 살아온 개인의 흔적을 통해 성공이란 결코 운명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 준다.
여성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고통도 다루고 있다.
신입 시절, 스트립 바에서 상담하면서 장애를 선택할 순 없지만 장애를 넘는 법은 선택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 일화, 편견에 맞서기 위해 사랑받기보다 존중받아야 함을 배우고, 말과 제스처를 읽고 남성들의 힘의 언어를 익히는, 안정보다 도전을 택하게 되는 과정은 이 시대 여성이라면 꼭 읽어 봤으면 하는 대목이다.
여성이라는 불리한 입장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발전의 계기로 삼는 피오리나의 현명함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AT&T, 루슨트테크놀로지에서의 관리자 생활에 대한 회고부터는 비즈니스에 대한 본격적인 멘터링이다.
협상, 마케팅, 인사관리, 법정공방, 기업 간 문화갈등, 비즈니스에 있어 성공과 승리의 개념, HP에서의 열정에 찬 구조개혁 작업과 합병에 관한 상황설명과 의사결정과정을 꼼꼼하게 그려 내고 있어 비즈니스에 포부를 가진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지침서가 될 것 같다.
그 어떤 것보다 가슴 벅찬 멘터링은 책을 덮을 때쯤 들려오는 피오리나의 열정에 찬 목소리다.
“어떠한 환경과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원칙을 잃지 말고 스스로를 지켜 나가십시오.
자신의 세계는 온전히 자기 것이어야 합니다. 영혼을 팔지 마십시오.”
피오리나는 ‘비즈니스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진정한 리더가 되는 길을 가르쳐 준다.
삶이 자신을 속인다고 불평하거나, 세상이 불공평해서 언짢게 느껴진다면 ‘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을 읽었으면 한다.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영혼을 되찾게 도와줄 것이다.
하민회 이미지21 대표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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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하인리히 슐리만 자서전
《“아버지! 아버지가 틀렸어요. 예러는 틀림없이 트로이를 봤어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겠어요.” “얘야, 이 그림은 상상으로 그린 거란다.” “아버지, 만일 정말로 그런 성벽이 옛날에 있었다면 완전히 없어졌을 리 없어요. 틀림없이 그건 수백 년 동안 흙먼지에 묻혀 있을 거예요.”》
현실은 꿈을 이루는 과정이다.
때로는 한 권의 책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 더욱이 아주 어릴 때 만난 책은 한 인간의 일생을 지배하기도 한다.
책은 인간의 호기심과 열정과 집착을 끝없이 부추기는 강력한 마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여덟 살이 될 무렵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라는 책을 읽고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겠다는 뜻을 품었고, 평생을 그 꿈을 이루는 데 바쳤다.
인간이 꾸는 꿈은 늘 ‘지금 이곳’이 아니라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혹은 아예 현실 너머의 아득한 곳에 있기 마련이다.
어린 슐리만은 생생한 삽화가 그려진 역사책을 보는 순간 ‘그때 그곳’으로 거슬러 올라가 트로이를 꿈꾸기 시작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문학적 허구로 존재하던 트로이가 한 소년의 가슴에서 역사적 현실로 발아한 것이다.
슐리만은 자서전의 서두에서 ‘나의 인생 후반기에 진행됐던 모든 발굴 작업이 어린 시절에 받았던 여러 가지 감명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필연의 결과였다’고 밝혔다.
‘여러 가지 감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불타는 트로이 도시 속을 아이네아스가 아버지 안키세스를 업은 채 어린 아스카니우스의 손을 잡고 빠져나오는 장면’을 상상하며 가슴 벅차하던 일이야말로 그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기억이었음이 분명하다.
열성적으로 고대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와 나중에 커서 결혼한 뒤 함께 트로이를 발굴하겠다고 약속한 동갑내기 여자 친구 민나 덕분에 끝없이 샘솟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을 빼놓으면, 슐리만의 어린 시절은 불우하기 짝이 없었다.
아홉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가난한 목사인 아버지는 슐리만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비용을 댈 수 없어 실업중학교를 마치고는 상점의 사환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사업가 생활에 정신없이 바쁠 때에도 나는 트로이를, 그리고 언젠가 그곳을 발굴하겠다고 30여 년 전 아버지와 민나에게 했던 맹세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나의 금전에 대한 집착도 사실은 어떻게 해서든 평생의 목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 때문이었다’는 자서전의 한 대목을 보면 그는 철저한 현실주이자이며 동시에 낭만적 이상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낭만적 러브 스토리는 해피엔드가 아니었지만 그는 마침내 트로이를 문학적 허구에서 역사적 사실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부를 축적하는 데 급급한 상인이었다고 말하든, 낭만적 상상력에 기댄 단순한 발굴가였다고 부르든, 그리스의 고대 유적을 입증한 위대한 고고학자였다고 평가하든 그에겐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과정으로서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신형건 아동문학가·푸른책들 발행인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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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마더 테레사 자서전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가득하지 않다면 우리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지 않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없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과 접촉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고 있다고 믿는다.”》
“세계는 가장 큰 것을 잃었다.
테레사 수녀는 이제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
전 세계 특히 인도는 테레사 수녀의 사망으로 더욱 가난해졌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에 속하고 자신의 뜻대로 인도를 세웠다면 마더 테레사는 그 인도를 세계의 것으로 만들었다.”
1997년 테레사 수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인데르 쿠마르 구지랄 당시 인도 총리가 남긴 말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기독교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국민 대다수가 다른 종교를 가진 알바니아나 인도 정부도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했다.
테레사 수녀는 그가 죽을 때까지 이루려고 노력했던 것, 종교를 넘고 인종을 넘어 모두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죽음의 순간에 연출해냈던 것이다.
원동력은 그가 일생 동안 보여 줬던 소외된 사람들을 섬겼던 사랑과 자비와 청빈의 힘이었다.
‘마더 데레사 자서전’은 마더 테레사에 대한 각종 인터뷰, 편지, 대화 등을 자서전 형태로 편집한 글이다.
그가 평생 걸어온 삶의 기록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그것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감동을 느끼는 한편 부담스럽기도 하다.
‘과연 나는?’이라는 자기 반성적 질문이 뒤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모두에게 자신처럼 살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가 이끄는 ‘사랑의 선교회’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어떤 도움을 주면 좋은가’라고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성스러움은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선 가족 가운데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간단한 일을 권고하고, 그 다음에 앞집에 사는 이웃, 그 다음에 근처에 사는 가난한 사람을 찾아볼 수 있도록 권유하라.”
평화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이유를 앞세워 펼쳐지는 온갖 화려한 구호와 정치 사회적 퍼포먼스들을 무색하게 하는 현답이었다.
나눔과 사랑의 실천이 어렵지 않다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큰 가르침이자 숙제이기도 하다.
마더 테레사는 가난 해결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현대사회가 실은 역사상 가장 가난한 시대라는 점을 일깨웠다.
물질적 가난보다 정신적 가난으로 고통 받는 현대인의 우울한 자아를 우려했던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질병은 나병이나 결핵이나 혹은 암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고독이나 자기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에서는 언젠가 실험을 했는데, 그 내용은 봉사활동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한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체내 면역기능이 향상된다는 것이었다.
이 실험에 따르면 마더 테레사의 전기를 읽어도 면역기능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것을 ‘테레사 효과’라고 부른다.
사랑의 힘은 진실로 사람을 강하게 해 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마더 테레사의 자서전을 꼭 한 번 읽도록 권하고 싶다.
표혜령 화장실문화 시민연대 대표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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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벤저민 프랭클린
《늘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하려면 반대되는 습관을 깨부수고 좋은 습관을 익혀야 한다. (그 좋은 습관으로 일생을 살았기에) 누군가 내게 똑같은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그렇게 하겠느냐고 물어볼 때 나는 주저 없이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10여 년 전 좋아하는 출판사의 사장이 지금까지 나온 책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서전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서슴지 않고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을 추천하면서 새로이 출판할 것을 부탁하였다.
국내에서 여러 번 출판됐으나 번역 수준이 낮고 품질도 원서에 비해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 후 몇 년이 흘러 훌륭한 번역을 거쳐 고품질의 양장본으로 재탄생한 이 자서전을 받아 들고 매우 기뻤다.
이 책은 혼자 읽는 데도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지인들에게 마음을 담아 선물하기에 부족함 없는 보물이었고 나아가 전 국민에게 읽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펜실베이니아대의 설립자인 벤저민 프랭클린을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도 한편에 있었다.
이 자서전을 추천하는 데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내용에 아무런 과장이나 숨김이 없다.
둘째는 내가 이 책에서 자주 인용하는 13가지 덕목과 50여 가지 명언이 동양 사상과 기독교 정신에 부합되고 2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먹어라. 먹기 위해서 살지 말라’ ‘손윗사람에게 겸손하고, 동등한 사람에게는 예절 바르며, 아랫사람에게는 고결해야 한다’ 등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교훈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셋째는 많은 한국인이 범하고 있는 시간 관리의 잘못과 작심삼일 심리를 물리치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13년 동안 시간관리 워크숍을 진행해 오면서 “그대는 인생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왜냐하면 시간은 인생을 구성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는 명언을 수없이 인용하였고 나도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다.
마지막 이유는 이 책은 내가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청소년들의 인생지침서 1호로 꼽힌다는 점이다.
이 자서전이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청소년 지침서가 된 이유는 프랭클린의 인생이 철저히 인본주의적이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긴 결과 많은 분야에서 성공을 이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벼락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피뢰침를 발명했고 주민 편의를 위하여 우체국 소포제도와 의용소방대를 창설하였으며 신문 발행, 대학과 병원 설립, 세계 최초의 화재보험회사 설립 등 업적을 남겼다.
영국 식민지의 시민으로서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치인이 되었다.
과학자이자 외교관이며 저술가와 정치가로서, 어느 역할에서도 빛을 발했던 벤저민 프랭클린. 그가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자 100달러 지폐의 모델이 되는 이유를 이 자서전에서 엿볼 수 있다.
정규 교육이라고는 2년밖에 받지 못한 사람이 독학으로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공부했으며 여러 가지 분야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으니 학구열이 높고 자기계발에 힘쓰는 한국인들의 필독서 1호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책이다.
김경섭 한국리더십센터 회장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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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불꽃 - 최승희 자서전
《내가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은 모든 일에 대해서 더욱 나를 조심스럽게 만듭니다.
고국을 대표할 만한 위인은 못 되지만, 어떻든 무용에는 나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동안 나는 잠자고 먹는 것도 잊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피투성이가 되어….》
식민지의 설움, 춤사위에 실어 사르다
최승희는 어린 시절 내게 수수께끼였다. 어딘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가라고 나오지만 찾아보려고 하면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 이유가 좌익인 남편과 함께 북으로 가서 활동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의 삶은 정치적으로 불행했다. 남편과 함께 숙청돼 역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승희는 정치가가 아니라 무용가였다.
우리는 그를 예술가로 기억한다.
예술가의 불행한 삶은 단지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참고 사항일 뿐이다.
이 나라가 식민지이던 어두운 시절에 무용이라는 예술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이가 있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민족은 춤과 노래를 즐기는 흥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는 아름다운 용모와 늘씬한 몸매로 무용을 하기에 적당한 몸을 타고났다고 한다.
자서전은 자료가 드문 최승희의 육필 원고와 그의 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평을 담고 있다.
최승희 자신의 이야기는 슬프다.
어린 시절 가세가 기울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학교에 다니던 일, 글 쓰는 오빠가 돈이 생기면 사오는 쌀로 끼니를 잇느라 먹을 것이 부족해 아침이면 부모와 아이들이 서로 먼저 밥을 먹지 않았던 일이 무거운 풍경으로 펼쳐져 있다.
그러나 춤을 배우기 위해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떠나는 모습에선 그의 배짱이 당당하게 전해온다.
시대의 암울함이 그에게 준 것은 무용에 대한 평에서도 보인다.
그가 일본에서 조선춤을 창작해 호평을 받을 때 일각에서 조선의 혼을 팔아먹는다는 비난도 받았던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세계적인 무용평론가 존 마틴은 그의 공연을 보고 “엄청난, 여성의 매력 그 자체”라고 평했다.
그는 “최승희, 그에게는 일본의 색, 중국의 몸짓과 한국의 선이 함께 흐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대를 뛰어넘는 것은 예술가의 숙명이다.
최승희는 와세다대 문학부 출신의 인텔리 안막과 결혼할 때의 심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결혼을 했다고 내가 변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결코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오히려 무용에 대한 열정이 날이 갈수록 더해졌을 뿐이다.”
조선에서 무대에 서는 여자는 사내들의 장난감이 되어 무절제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혼은 말없는 항의와도 같다고도 했다.
좋은 예술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오는 법인지도 모른다.
최승희는 민족의 비극 속에서 민족의 춤을 춘 무용가다.
그런 그의 행적 때문에 우리가 이 희귀한 예술가를 잊는다는 것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가치가 있다.
나는 그의 춤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글과 글의 행간에서 춤을 추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듯하다.
식민지의 설움이 키우고 남북의 분단이 삼켜 버린 무용가 최승희, 이 책의 제목 ‘불꽃’처럼 산 사람이다.
전 윤 호 시인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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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감옥에서 나와) 멍들고 지친 몸을 쉴 새도 없이…
국어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정말 태산 같았다…
우리말을 뿌리째 뽑아 없애려던 일제의 국어말살 정책이 10년 가까이 계속된 터였다.
때문에 우리는 잃어버린 말부터 되찾아야 했다.》
우리말 지키기 한평생
이희승 선생은 19세기 말(1896년)에 태어나서 국어학자로, 시인으로, 문장가로 활동하면서 이 땅의 지성인으로 살다 갔다.
이 책은 저자가 80세가 넘어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쓴 자서전이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36년, 제1, 2차 세계대전, 미군정, 6·25전쟁, 자유당과 민주당 정권, 군사혁명과 공화당 정권을 겪으며 기구한 세월 속에서도 우리 문화, 특히 국어를 지키고 키운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내용을 기록한 저술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를 잃은 소년이 보고 들은 일들, 당시로서는 생소한 언어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가출한 일, 한성외국어학교를 시작으로 여러 학교를 거쳐 중앙학교를 20세가 되어서야 졸업한 일, 3·1운동 때 태극기를 그려 돌리면서 만세를 불렀고 동지들과 등사판으로 지하신문을 만들어 돌린 일….
이 같은 일화들이 입지전적인 기록으로 펼쳐진다.
재수를 하면서까지 조선어문학과가 있는 경성제국대 예과에 30세의 만학도로 입학하여 드디어 언어학 공부의 꿈을 이루었고 대학의 낭만을 즐기며 친구들과 어울리던 일은 그의 삶을 윤택하게 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화여전 교수로서 여성 문인들을 길러낸 일, 조선어학회에 참여하여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국어생활을 생각할 때 길이 찬양될 일이다.
그러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이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악랄한 고문을 받았고 굶주림과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동지들이 죽어나간 일들은 개인의 고난이자 우리 문화의 시련이었다.
출옥하자마자 일제의 국어 말살 정책으로 폐사 직전에 있던 국어를 살리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고, 경성대를 재건하기 위한 일을 맡아 교수가 된 것은 우리 문화의 재건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이 땅 비극의 단면을 보여 주는 일도 많다.
6·25전쟁 중 9·28수복 전날, 전투의 와중에서 한밤중에 집이 불에 타는 바람에 온 가족이 몸만 빠져나온 일이나, 1·4후퇴 때 부산까지 1000리 길을 걸어갔다가 어머님의 임종에 겨우 맞춰 돌아와, 흩어진 가족을 아슬아슬하게 찾은 일이 그것이다.
그는 4·19혁명 때는 교수 시위에 앞장섬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하게 했다.
이는 그의 선비정신을 그대로 보여 준다.
정년퇴직 후 동아일보 사장, 사립대의 대학원장, 동양학연구소장을 거치면서 한가롭게 쉴 틈이 없었던 것은 그가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였지만 몸에 밴 근면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그 안에 담긴 사건이 기구하고 문장이 평이하다.
무엇보다도 그 안에 흐르는 정신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이 책은 남산골 딸깍발이의 선비정신이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현대의 지성으로 성장하여 간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저술이라 하겠다.
남풍현 한국어문회 부이사장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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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체 게바라 자서전
《동지여.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 가족이 스페인 어느 지방 출신인지 잘 모릅니다. 내 생각에 당신과 내가 가까운 친척인 것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만일 당신이 이 세상에서 불의가 저질러질 때마다 분노로 떨 수 있다면 우리는 동지입니다. 이 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인터넷 혁명 시대에, 사이버 게릴라가 창궐하는 이 시대에 왜 사람들은 4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체 게바라를 그릴까.
이미 국내에서 체 게바라의 생애를 다룬 전기가 수십만 부 팔렸다고 하고, 뒤이어 사진첩도 나왔고, 그가 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도 번역되었다. 후자는 월터 살레스 감독의 영화로도 소개되어, 멋진 로드무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이런 붐을 타고 ‘체 게바라 자서전’도 출간되었다.
왜 하필이면 체 게바라일까. 68세대의 잃어버린 향수가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 것일까.
이상주의를 갈구하는 젊은 세대의 길 찾기의 일환일까.
아니면 독일풍의 교양소설로 읽히는 것일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같은 성장소설 말이다.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체 게바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가 풍기는 묘한 아우라 때문인 것 같다.
그는 게릴라로 죽었지만 불멸의 이미지를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쿠바산 시가 몬테크리스토를 피우는 모습은 가히 베네통 광고 사진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는 게릴라 이전에 지극히 사적(私的)인 인간이었다.
여행 중에도 일기장을 꼼꼼히 챙겼고, 틈틈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엽서를 부쳤으며, 마지막에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투쟁을 수행할 당시에도 글을 남겼다.
결코 게릴라답지 않은 독서광이기도 했다.
글을 읽고 나면 반드시 자신의 감상을 노트에 남겼고, 솔직담백한 작가 비평까지 곁들였다.
게릴라 아지트에서 시가를 피우며 괴테를 읽는 독서삼매의 사진을 보노라면 독서 취향도 얼마나 자유분방한지 알 수 있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그에게 강요된 관료적 생활은 천성에 맞지 않았다.
초기에는 “베트남을 여러 군데 만들자”며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누비며 반제(反帝) 전선 투쟁에 몰입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꿈꾸는 이상주의자였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베텔하임이 계획경제의 초기 단계에 물질적 유인이 중요하다고 지적했을 때 그는 정신적 자극이 중요하다고 맞받아쳤다.
그는 천식이 심해지면 늘 게릴라적 삶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볼리비아로 가서 게릴라 활동을 하다 낭카우아수 계곡에서 붙잡혀 총살당했다.
이 자서전의 전반부는 일종의 여행기이다.
전도유망한 아르헨티나 중류층 출신의 한 의학도가 라틴아메리카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대륙에 제도화된 빈곤과 불의에 분노하는 모습을 진솔하게 기록한다.
마야와 잉카 유적지 앞에서 그는 아메리카 대지의 뿌리와 하나가 됨을 느낀다.
자서전 후반부는 내밀한 일기와 편지글이 다수이다.
그가 남긴 편린은 산문체지만 정신은 대단히 시적이다.
피어오르는 시가 연기 속에서 혁명 속에서 그는 삶을 태웠고, 반제 투쟁의 성자가 되었다.
체 게바라의 관련 서적에 비해 이 책이 지닌 미덕이라면 사진을 적절히 배치하여 내밀한 육필 기록의 체취를 진하게 전달한다는 점이리라.
이성형 이화여대 교수 정치외교학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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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사흘만 볼 수 있다면
《세상만사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어둠과 침묵 속에서 만난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 그러하다. 어떤 처지에 있게 되더라도 나는 이에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헬렌 켈러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 종종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다른 대목들은 기억이 나지 않고 펌프 앞에서 어린 헬렌이 ‘물(w-a-t-e-r)’이라는 말을 아주 힘들게 하던 장면만 떠오른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헬렌의 자서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다시 읽었다.
헬렌의 이야기가 어떤 보편적인 감동을 담고 있다면, 그의 이야기가 결코 그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정도의 문제일 뿐 누구나 태어나면서 일정한 조건들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그 조건들이 늘 호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어려운 조건들을 가지고서 삶을 시작하기 마련이다.
인생이란 그런 조건들을 하나하나 극복하면서 이루어진다.
삶이 가져다주는 힘겨움은 원한을 낳기도 하고 창조를 낳기도 한다.
힘겨움이 닥쳤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 힘겨움에 대해 원한을 품는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을 저주하게 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힘겨움을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고 삶에서 어떤 새로운 경지를 여는 계기로 삼는다.
역사적으로 악한 일을 한 사람들도, 또 뛰어난 일을 한 사람들도 대개 남들보다 더 큰 힘겨움을 겪은 사람들이다.
다만 그 힘겨움을 원한으로 가져가는가 창조로 가져가는가가 그 모든 차이를 가져온다.
헬렌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것은 그의 삶에 남들보다 모진 조건들이 주어졌고, 그가 그 조건들과 싸우면서 그 방벽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려 가는 과정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사랑이다. 누구도 혼자의 힘으로 삶의 방벽들을 넘어갈 수는 없다.
그때 자신의 손을 잡아 주고, 걸음을 이끌어 주고, 미래를 보여 줄 사람,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헬렌의 이야기는 또한 설리번 선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이 책 앞의 사진들 중 왜 설리번의 사진이 없는지 궁금하다)
헬렌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한 사람, 그의 삶의 동반자가 되어 준 사람은 설리번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위대함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헬라스(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에는 여러 격언들이 씌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주어진 것을 선용(善用)하라”이다.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시작하고 어떠한 주어진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 어떻게 원한이 아닌 창조의 삶으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헬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바로 이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을 볼 것인지, 헬렌은 아름다운 필치로 이야기하고 있다.
독자들도 자신이 사흘밖에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과연 무엇을 보고 싶은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정우 철학자·소운서원 원장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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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자서전
《얘야, 대지의 맥박을 가까이 느끼며 살아가도록 해라. 거기에 힘이 깃들어 있단다.
농부도 목사도 마찬가지이지만, 건축가가 위대한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영혼의 단순함이 필수적인 것이란다.》
자연과 소통하는 건축을 위하여
술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처음 만난 이의 살아온 인생 편력을 듣다 보면 어느새 그가 내 오랜 지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렇듯 자서전은 개인의 독백이기 이전에 시공간을 초월하여 독자인 내가 그의 삶 속에 들어가고 그가 다시 나에게로 다가오는 소통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자서전으로 만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20세기 초반 마천루라는 미국 대도시의 기계문명에 대한 거친 저항과 광활한 남서부 대자연에의 순응을 애증에 찬 목소리로 들려준다.
아무리 위대한 건축가라 할지라도 그가 설계한 건축물보다 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진 못한다.
사람들은 위대한 건축물은 알지만 그 위대함을 창조해 낸 건축가는 기억하지 못한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아마도 이것이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아이콘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라이트의 대부분의 삶은 시카고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시카고는 근대건축의 상징인 마천루의 도시이다.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 라이트의 작품은 마천루도 아니거니와 마천루처럼 도심을 가득 채우고 있지도 않다.
지금은 시카고의 관광상품이기도 한 라이트의 작품들을 순례해 보면 그의 발자취는 시카고 근교의 자연과 하나가 된 다양한 주택에서 만날 수 있다.
“나는 이제 알았다. 집은 언덕 위에 혹은 그 어떤 것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집은 언덕 속으로 스며들어 가야 하는 것이었다.
언덕과 집이 함께 살면서 더 행복해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의 고백처럼 라이트의 주택은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유기적 건축을 갈망하였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광활한 초원지대를 배경으로 한 ‘프레리(prairie) 스타일’ 건축이다.
자연에 순응한 라이트의 정신은 탈리에신에 응축되어 있다.
탈리에신은 그의 고향인 웨일스의 음유시인 이름이다.
‘빛나는 이마’라는 뜻의 탈리에신은 라이트의 삶과 일, 가족의 기쁨과 슬픔을 담고 있는 자신의 집 이름이기도하다.
이곳은 라이트가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족과 함께 생활한 공동체 공간이다.
그래서 이 자서전의 상당 부분은 탈리에신 I, II, III을 통해서 그가 겪었던 인생의 희로애락을 이야기한다.
또한 탈리에신에서 함께했던 제자들과의 삶은 오늘날 건축 교육의 원형으로 탐독할 만하다.
이 책은 라이트가 건축가로서의 삶의 중간쯤에 서서 쓴 책이라 완전한 자서전은 아니다.
그래서 그의 불꽃같은 열정에 더해진 완숙미가 활짝 피어난, ‘낙수장’이란 별칭으로 더 유명한 카우프먼 저택과 구겐하임 미술관에 대한 독백이 없다.
라이트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열어 놓은 길을 독자들과 함께 가길 바라고 그 발길의 마지막에 낙수장과 구겐하임 미술관에 이르는 상상의 세계를 열어 놓은 듯하다.
그래서 이 자서전의 끝은 독자의 상상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근대를 풍미했던 거장 건축가가 걸어간 마지막 길을 찾아 나서는 여행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이영범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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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시와 진실-괴테 자서전
《인간이 이루려고 하는 모든 것은 행동이나 말이나 그 밖의 어떤 것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총체적으로 결합된 힘으로부터 생겨나야 한다.
모든 분리된 것은 배척되어야 한다.》
분열과 고난의 시대 구원의 빛은…
온 나라가, 아니 온 세계가 정치, 경제 및 민족의 갈등 등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시대에 괴테의 자서전 ‘시와 진실’을 읽는 것은 매우 의미 깊다.
괴테가 활동하던 고전주의 시대도 사회적으로 분열과 고난의 혼탁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괴테는 혼탁한 시대에도 퇴폐와 허무주의로 흐르지 않고 암담한 현실에 대해 끊임없는 구원을 모색했다.
1115쪽의 방대한 이 자서전에는 괴테 문학에 영향을 끼친 괴테의 여성 편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괴테는 첫사랑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헤어진 뒤 시 ‘제센하임의 노래’를 지었고 두 번째 찾아온 사랑인 샬로테 부프가 자신의 친구와 결혼해 떠나자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25세 때 16세인 릴리 쇠네만을 만나 약혼까지 했지만 양가의 반대로 결혼에 이르지 못했다.
마음의 상처가 매우 컸던 듯 괴테는 무려 56년 뒤인 1830년의 한 회고담에서 “릴리와 사랑하던 시절만큼 진정으로 행복에 다가간 적은 없었다.
그녀는 나의 마지막 여성이었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여성 편력은 계속되어 바이마르 체류 시절에 괴테는 유부녀인 샬로테 폰 슈타인과 사랑을 나누었고, 39세 때인 1788년에는 23세 꽃집 처녀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사랑에 빠져 동거를 거친 뒤 결혼식을 올렸다.
1816년에 아내가 사망한 뒤 1923년 74세의 괴테는 19세 되는 울리케 폰 레베초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늙은 괴테는 울리케의 모친에게 딸을 달라고 부탁도 했지만 당사자가 끝내 망설이는 바람에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고, 이러한 배경에서 시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가 생성되었다.
결론적으로 괴테의 사랑은 천박하지 않았고 이해관계도 깔지 않았고 끊임없이 문학으로 승화되었다.
이들 여성 편력에서 괴테의 순수함도 느껴져 늙어서도 우리네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는지가 감동적으로 나타난다.
괴테의 삶의 이론도 자서전의 중요한 내용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원초적인 것에서 벗어났다 다시 원초적인 것으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원초적인 것에서 벗어남은 진취이며 다시 되돌아감은 헌신이다.
괴테는 이를 심장의 수축과 팽창의 양극적 운동으로 나타내고 있다.
심장의 팽창이 자신의 상승인 진취를 상징한다면 수축은 자신을 버리는 헌신을 나타낸다.
괴테는 이를 “생명의 영원한 방정식”이라고 하면서 시 ‘프로메테우스’(진취)와 ‘가뉘메트’(헌신)로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 이 자서전은 괴테가 어린 시절 7년전쟁으로 인한 삶의 시야 확대, 화려하기 그지없는 요제프 2세의 대관식, 경건파를 통한 열렬한 종교적 체험 등 18세기의 풍속을 잘 보여 준다.
또 자연, 감정, 개인을 중시했던 질풍노도 운동과 세계동포주의를 인식시키고, 루소, 하만, 셰익스피어, 헤르더 등의 작가들에게서 받은 영향 등 수많은 괴테의 발전 과정을 담고 있어 괴테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안진태 강릉대 교수·독어독문학
동아일보
-----<29>네루 자서전
《얼마 안 가 근처의 마을들 전체가 텅텅 비다시피 하면서 들판은 온통 모여드는 남녀노소로 가득 찼다.
그들은 “시타 람” 하고 일제히 소리쳤다.
그 고함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이웃마을까지 메아리쳐 마치 “시타-라-아-아-아-암”이라고 외친 것처럼 들렸다.
그러면 사람들은 물결처럼 때로는 전속력으로 달음박질쳐 왔다.》
인도 독립운동 역정 감동적 기술
개인의 이력이 한 국가의 역사인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1936년 나온 네루의 자서전은 네루의 경험과 인도의 기록이 부합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자서전은 반영(反英)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네루가 감옥 생활의 고독을 이기고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자신을 찾기 위해 1934년 6월부터 1935년 2월에 걸쳐 쓴 것이다.
여기엔 수동적 젊은이에서 독립운동가로 변모하는 네루의 개인 기록과 독립운동사라고 부를 수 있는 인도 근대사의 흐름, 특히 간디의 활약상이 잘 그려져 있다.
자서전은 카슈미르에서 갠지스 유역의 알라하바드로 이주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인 네루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네루는 자신을 성공한 ‘영국 신사’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영국에 유학하여 유명 사립학교와 케임브리지대에서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어 인도로 귀국하였다.
법률직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채 아버지 일을 돕던 네루는 1916년 중매로 만난 카말라와 결혼식을 올리며 필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곧 누에고치같이 안온한 집을 떠난 네루는 험한 세상으로 나가 지도자로서 국가적 서술의 주인공이 되었다.
1919년 영국군이 비무장 인도인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이 바로 네루 생애의 ‘루비콘 강’이었다.
그는 사건을 정당화하려는 영국군 장교들의 냉혹한 말투와 태도를 접하고 그 순간부터 영국의 ‘정의’에 대한 신뢰를 접고 간디가 이끄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인용한 발췌문이 보여 주듯, 도시에서 자란 네루는 1920년의 한여름에 갠지스 평원의 농촌을 방문하여 농민의 가난한 삶을 목격하였다.
‘계시’처럼 농민을 ‘발견’한 네루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농민의 열악한 처지를 동정하고 그 해결 방안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들의 지도자로, 독립운동의 리더로 부상하였다.
이 자서전에는 네루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인도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과 움직임도 함께 서술되었다.
간디와의 만남은 네루에게 영속적인 영향을 남겼다.
자서전에는 ‘진리의 힘’ 등 모호한 표현을 쓰며 단식과 비폭력의 기이한 투쟁 방식을 동원하는 간디와 달리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고 종교를 사적(私的) 영역으로 밀어내려던 네루의 속내가 엿보여 흥미롭다.
그럼에도 혁명적 개혁을 꿈꾸는 네루와 계급투쟁을 부정한 간디는 상대의 장점이 독립운동에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서로 손을 잡아 감동을 준다.
네루가 영어로 쓴 자서전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와 영국의 헉슬리가 극찬할 정도로 그 필치가 매우 빼어나다.
타고르는 네루와 같은 지성인이 정치를 하는 현실이 유감이라고 말했으나 네루는 독립한 인도의 총리로 75세까지 살았다. 네루의 자서전은 45세의 젊은 나이에 서술된 반생의 기록으로 독자에게 ‘뭔가’를 감춘다는 인상을 주는 약점이 있으나 인도 근대사라는 보너스를 선사하는 더 큰 장점이 있다.
이옥순 연세대 연구교수 인도근대사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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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앤드루 카네기 자서전
《‘스코테이스 아메리칸’지에서 우연히 한 줄의 격언이 눈에 띄었다. ‘옷감을 짜고자 기회를 노리면 신들은 실을 주게 된다.’
이 구절은 나를 위해 직접 주어진 것같이 생각되었다. 이것은 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정말로 신들은 적당한 형식으로 실을 갖춰 주었다.》
앤드루 카네기는 사상 세계의 다섯 번째 부호로 손꼽힌다. 실로 대단한 부를 쌓은 셈이다.
그러나 그가 존경받는 이유는 막대한 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썼느냐는 점이다.
부의 사회 환원,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그는 부를 사회에 되돌려야 하는 부자의 도덕적 책무를 맨 먼저 주장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다.
카네기는 스코틀랜드 덤펀린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토끼를 길렀는데, 새끼가 태어나면 이름을 붙여 준다는 조건으로 친구들에게 토끼풀을 구해 오도록 했다.
이 때 이미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사업적 수완이 드러난 셈이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치를 잘 깨닫고 실천한 때문이 아니라 이치를 깨달은 사람을 선별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네기가 가족을 따라 미국 피츠버그로 건너온 것은 1848년, 13세 때였다.
그는 면직물 공장에서 일하다가 전신국으로 일자리를 옮긴다.
전보를 배달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상황이 젊은이들에게 참고가 될 듯하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를 붙잡지 못하는 것은 큰 실수다. 일자리가 주어졌을 때 머뭇거리다가는 못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
이 말처럼 카네기는 주어진 기회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철도회사의 전신기사로 채용된 것은 1853년이었다. 1859년에는 피츠버그 지부장에 오른다.
그리고 승승장구하다가 독자적인 사업을 위해 1865년 봉급자 생활을 마감한다.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좁은 세계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카네기가 강철 사업을 시작한 것은 1875년. 사업은 번창해 그는 막대한 부와 함께 강철왕의 자리에 오른다.
1892년 세계 최대의 ‘카네기 강철회사’를 설립했을 때는 미국 철강 생산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1901년 카네기는 또 한 번 큰 결단을 내린다.
연간 40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회사를 U S 스틸사에 넘긴 것이다. 이는 오직 부의 분배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은퇴한 뒤 18년 동안 저 위대한 업적의 막이 오른다. 이른바 ‘부의 복음’이었다.
카네기는 앤드루 카네기 구제기금 설치, 공공도서관 건립, 카네기협의회 설립, 대학교수 연금 설립, 카네기공과대, 카네기교육진흥재단 설립 등에 생전에 쌓은 부의 90% 이상을 내놓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자세, 과감한 도전과 용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는 책의 전편을 통해서 읽는 이를 감동시킨다.
그것은 오직 위대한 인간의 결단과 정직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가 생전에 쌓은 부를 사회에 환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참다운 부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 앞에 내보였다.
권준환 전 롯데호텔 감사실장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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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대한민국]한국인 자서전 많이 소개 못해 아쉬움
‘책 읽는 대한민국’의 2007년 두 번째 시리즈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이 22일 막을 내렸다.
이번 ‘자서전 30선’은 역경을 딛고 자신의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룩한 인물들,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평생을 바친 감동적인 인물들의 삶을 통해 어수선한 이 시대를 되돌아보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 한번 성찰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선정의 기준은 ‘다양성과 조화’였다. ‘러셀 자서전’, ‘괴테 자서전(시와 진실)’, ‘네루 자서전’, ‘마틴 루터 킹 자서전(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자서전의 전범도 소개하고 그동안 쉽게 접하기 못했던 새로운 자서전도 함께 소개함으로써 자서전의 다양한 면모를 제공하고자 했다.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 목록 도서 어니스트 섀클턴 자서전 살바도르 달리 자서전 잭 월치 끝없는 도전과 용기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리처드 파인만 자서전 버트런드 러셀 자서전 마가렛 미드 자서전 나는 다다(Dada)다-만 레이 자서전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스콧 니어링 자서전 만화가의 길-데즈카 오사무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마틴 루터 킹 자서전 마음의 진보-카렌 암스트롱 자서전 영원한 청춘-마쓰시타 고노스케 자서전 크로포트킨 자서전 에드거 스노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 왔다-다윈 자서전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 칼리 피오리나, 힘든 선택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자서전 하인리히 슐리만 자서전 마더 테레사 자서전 불꽃-최승희 자서전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 체 게바라 자서전 사흘만 볼 수 있다면-헬렌 켈러 자서전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이희승 자서전 네루 자서전 시와 진실-괴테 자서전 카네기 자서전 특히 역점을 둔 것을 분야별 다양성이었다.
아톰의 아버지로 불리는 일본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 현대 사진의 문을 활짝 연 미국의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 현대 건축을 예술로 승화시킨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트로이를 발굴한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 일제강점기 한국 무용을 세계에 널리 알린 무용가 최승희, 유머 감각으로 더 잘 알려진 미국의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남극 탐험 도중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원들을 구해 낸 영국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수녀에서 종교학자로 변신한 영국의 카렌 암스트롱 등.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자서전을 소개한 것은 이 시리즈를 통해 한 개인의 숭고한 삶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학문이나 예술, 직업에 눈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자서전 30선’이 시작되자 독자들의 반응은 대부분 신선하다는 것이었다.
한 학부모는 e메일을 통해 “이렇게 다양한 자서전이 있는 줄 몰랐다”면서 “건축, 사진 등을 놓고 고민하는 고등학생 딸아이에게 좋은 진로 지도가 되었다”고 전해왔다.
또한 기록 문학이 취약한 한국의 풍토에서 많은 사람에게 삶의 기록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줬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번 기획의 아쉬움은 국어 연구에 평생을 바친 일석 이희승과 일제강점기 한국의 무용을 세계에 알린 최승희의 자서전을 빼고는 한국인의 자서전을 많이 소개하지 못한 점이다.
역사적인 평가가 끝나지 않은 생존 인물의 자서전이 많은 데다 일부의 경우 그 기록의 진실성에 의구심이 갔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진솔한 기록 문화가 정착되길 기대해 본다.
‘책 읽는 대한민국’은 4월 2일부터 희망찬 봄 분위기에 맞추어 ‘문화 예술 답사기’를 테마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계획이다.
이광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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