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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안의 보물선 발견 - 7백년, 긴잠 깨다!<군산>정치 2006. 7. 9. 07:43
신안해저 보물선 발견이야기
우리 민족은 고대부터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어로생활과 문화교류의 전통을 쌓아오고 있습니다. 그 예로 울산 울주군의 반구대에는 청동기 시대에 이미 배를 타고 고래를 사냥했던 솜씨를 표현한 암각화에서 우리 조상들의 활발한 해상활동을 엿볼 수 있구요. 통일신라 9세기에는 해상왕 장보고가 동아시아의 해상 교역을 장악하여 우리 민족의 해상경영 능력을 과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우리 조상들의 해양활동 흔적들이 바다 속 곳곳에 고스란히 타임캠슐처럼 남아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듯 현재 우리나라 해역에 해양유물 신고지점은 230여 곳이 넘습니다.
바다에서 고대 유물의 발견은 대부분이 어로작업을 하는 어부에 의해서 신고되어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집니다. 최근의 군산 옥도면 비안도 해저발굴이나 군산 옥도면 십이동파도 해저발굴과 신안 안좌도 고선박 발굴조사가 대표적이다. 또한 군산 야미도 근해에서 도굴한 유물을 밀매하려다 체포된 도굴범에 대하여 경찰과 합동으로 현장을 조사하였는데 이와 같은 경우에도 매몰 유물을 조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해저의 유물을 조사하게 된 첫 계기도 1975년 5월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걸린 옛 도자기 몇 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신안 보물선’으로 더 많이 알려진 700여년 전 중국의 원나라 무역선이 해저 갯벌속에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죠. 이 일은 우리나라 해저발굴에 있어 전례가 없는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약 9년동안 10차례의 대규모 해저발굴을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발굴조사에 앞서 유물은 불법도굴과 훼손이라는 큰 아픔을 겪게 됩니다. 바다에 보물선이 매몰되었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가끔 바다에서 그릇이 그물에 올라오면 “옛날에 사람을 수장(水葬)하면서 사용했던 그릇이다”라는 속설로 죽은 자의 원귀가 끼어 있다고 생각하여 가까이 두려고도 하지 않았고, 조개류가 붙어 있어 별 관심도 없었으며, 특별히 쓸모도 없어 개밥그릇으로나 사용하는데 그쳤습니다. 신안 유물의 경우도 처음에 발견한 어부는 갯벌과 굴껍데기가 엉켜 붙어 볼품없는 그릇을 집에 가져가 잘 씻어 놓은 것을 친척이 관심을 갖고 지역 관서에 신고하였지만, 문화재 담당자는 바다에서 이런 최고급의 고려청자가 인양될 수가 없다며 “보상금이나 타려는 신고가 아니야”라는 시각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도굴꾼들이 모여들어 도자기들을 불법 인양하여 시중의 골동품 가게에 팔거나 외국으로 은밀히 밀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도굴 낌새를 눈치 챈 경찰이 도굴꾼들을 붙잡고 보니, 창고에서 값을 따질 수 없는 국보급 청자를 수백점이나 가지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 사건과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가 올려진 이후, 해가 바뀌어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신안해저유물 발굴조사단’을 해군과 함께 편성하여 비로소 1976년 10월 26일 정식 발굴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류도 거세고 수중 시계가 제로인 해저 20m 이하에서 유물이 매몰된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한강에 동전을 던져 놓고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조사자에 의하면 “처음 발굴때 최신장비와 많은 수중작전 경험을 가진 해군 심해잠수사도 유물이 매몰된 부근의 해상인데도 유물이 매몰된 위치를 찾지 못했다”라고 당시 해저발굴의 어려움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조사단은 경찰의 조치로 교도소에 수감된 도굴범에게서 위치를 확인하여 본격적인 발굴을 하게 됩니다.
유물이 매몰된 위치를 찾았지만 해저 발굴은 생각보다 쉬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해저하면 형형색색의 산호초가 군락을 이루고, 무수히 많은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는 맑은 수중의 환경을 생각하게 될 것입이다. 하지만 우리가 발굴을 위해 들어간 바닷속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은 갯벌이 형성되어 있고, 매일 반복되는 조류활동으로 인해 물이 탁하여 바다 속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캄캄한 밤과 같으며, 오로지 선임자가 내려놓은 유도줄인 밧줄을 따라 유물의 매몰위치에 이르러 손의 촉감으로 유물을 들고 나오는 작업이었습니다. 여기에 유속은 4노트(잠수복을 입은 잠수사가 가만히 있을 경우 1분에 120m를 떠내려감)로 정조때가 아니면 수중작업을 할 수 없어 결국 밀물과 썰물 시간을 헤아려 하루에 한번 또는 두번, 그것도 한 시간 정도 밖에 작업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해수에 온도가 10℃이하로 떨어지는 기간에는 작업을 할 수 없어서 결국 5월에서 10월까지 고작 다섯 달 정도만 발굴작업이 가능했습니다.
신안해저 유물발굴은 1976년 10월 1차부터 1984년 8월 10차 발굴까지 세계 수중발굴사상 시계가 없고 조류가 거센 해저 20m 이하에서 장기간 발굴조사를 했지만 아무런 인명사고도 없이 군·관이 합동조사반을 편성하여 안전하게 마친 경우는 유례가 없으며, 지금도 수중발굴을 하고 있는 일본이나 미국 등에서 항상 경이의 눈으로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때 발굴된 유물은 선체를 포함하여 도자기류 20,661점, 금속 729점, 석재 43점, 동전 28톤, 고급 목재인 자단목 1,017본과 기타 574점을 인양하였습니다.
발굴조사 결과, 경원로(慶元路, 현재 중국 절강성 영파)가 새겨진 저울추는 배의 출항지를 밝히는 결정적인 자료로 지치삼년명(至治, 원나라 연호 1323) 연호와 일본인 성명, 일본 사찰명이 적힌 물표(木牌)가 발견됨으로써 출항연대와 목적지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안선은 1323년에 중국 영파항에서 일본 구주 하카다항으로 향해하던 중 우리나라 해안에 침몰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인양된 대부분의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당시 740여편으로 분해해서 인양되었던 선체는 1981년부터 2002년까지 약 22년간 보존처리와 복원작업을 완료하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안선의 실제 크기를 알 수 있도록 2004년에는 선형(船形)을 구조물로 복원시켜 전시하고 있습니다.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예연구실장 문환석
출처 : 정부/정책글쓴이 : 문화재사랑 원글보기메모 :'<군산>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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