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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역사를 바꾼 건축 ③] 콜로세움 <파주시 부동산은행>
    우주세계UN여권국제외교영토주권분쟁 2006. 5. 13. 18:59
    보다 많은 파주시 고양시(일산)지역 재테크정보는→ 일산 부동산은행으로...
     
    ▒ [역사를 바꾼 건축] 콜로세움

    ○ 세계를 담은 ‘초대형 그릇’
    이집트 콘크리트 개량해 건축 재료로 사용… 기술의 승리 상징하는 기념비적 축조물

    유럽을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로마를 찾고 싶어한다. 그곳에는 꼭 보아야 할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아서다. 그러다가 운이 좋아 로마 시내를 거닐게 되면 거대한 건축물들이 빚어내는 웅장함에 놀라고 만다. 그때 십중팔구 파리나 런던 또는 빈에선 결코 느끼지 못했던 그 무엇을 느끼게 된다. 아니, 느낄 수밖에 없다. ‘역사의 무게’가 바로 그것인데, 그 중에서도 콜로세움이 특히 그러하다. 아무리 고층건물에 눈에 익었다 하더라도 콜로세움 앞에선 그 거대함에 압도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만큼 콜로세움은 ‘영원한 도시’ 로마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원래 지상 4층 구조였으나 오랜 세월 3층 또는 2층으로 내려앉은 부분이 많지만 아치형 문틀, 문틀 양쪽에 세워진 원주, 층과 층 사이를 나누는 백색의 선은 아직 남아있어 여전히 볼 만하다. 장경(長徑) 188m, 단경 150m, 둘레 527m의 타원형 공간인 콜로세움의 명칭은 ‘거대하다’는 뜻의 라틴어 ‘콜로수스’에서 유래됐다. 최대 5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니까, 전체 인구의 20분의 1이 동시에 이곳을 찾았다고 하니 당시의 로마 인구는 100만명 정도로 짐작된다.(전성기인 3세기엔 150만명)

    콜로세움(정식 명칭은 ‘엠피테아트룸 플라비움’)은 원형투기장으로 플라비스 왕가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에 판 황금궁전의 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로마 시민의 오락공간을 마련한다’며 세운 것이라 성격상 공공건축물이다. 고대 로마에는 이러한 공공건축물이 콜로세움 외에도 많았다. 로마제국이 다신(多神)을 섬겼음을 보여주는 판테온(만신전), 한꺼번에 1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카라칼라 대욕장, 광장의 기능을 수행했던 포로 로마노(로마광장), 개선문, 수도교(水道橋) 등이 그것이었다. 로마는 서구문명의 모태가 되는 그리스를 정복한 이후 그곳의 신전과 아고라(광장), 노천극장 등을 모델로 하여 이를 세운 것이다. 동양에선 좀처럼 보기 어려운 다양한 공적 건축물을 선보임으로써 로마는 일찍이 공화제(res publicus)를 탄생시켜 민주주의 발전 도정에 커다란 이정표를 세웠다.

    공적 건축물이란 공적 자금이 투입돼 건설된 것인 만큼 그 용도 또한 다중을 위한 것이다. 로마라는 체제가 시민을 배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물증으로 이를 앞서는 것은 없다. 그들에겐 공과 사는 분명했고, 황제라도 그걸 혼동해서는 안됐다.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지만 공익을 키우면 사익도 따라 커지고 또 보호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을 것이고, 이 점이 로마가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원형투기장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여느 문처럼 아치형이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육중한 벽 사이를 뚫고 좌우 양쪽으로 통로가 나타난다. 통로 역시 아치형 구조다. 옛날에는 이 통로를 따라 입장객이 자기 좌석을 찾아갔다. 관중석의 위치는 신분에 따라 달랐다. 지금 타원형의 아레나(라틴어로 ‘모래’란 뜻이나 여기선 ‘무대’)는 앙상한 몰골만 드러내놓고 있다. 원래 마루였던 바닥은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지고 그 아래 맹수들을 가두었던 우리만이 그대로다. 관람석 또한 허물어진 채 붉은 벽면을 노출하고 있어 거칠고 투박하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2000년의 세월을 이기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콘크리트 구조물이란 사실이다.

    ○ 대리석·벽돌로는 못만들어
    당시 주된 건축재료는 대리석이었다. 하지만 대리석은 너무 값이 비싸 귀족의 저택에서나 사용됐다. 일반인은 돌이나 벽돌로 만족했다. 그렇다고 해서 콜로세움 같은 대형 축조물을 돌과 벽돌로 쌓을 수는 없었다. 우선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술적인 데 있었다. 2만~3만명에 이르는 노동자는 그렇다 하더라도 수천 명의 숙련 기술자를 확보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아치형 통로와 원형의 관중석을 설치하는 일은 벽돌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다행히 이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콘크리트 공법이었다.

    콘크리트는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인이 피라미드를 축조하면서 돌과 돌 사이를 때우는 접착제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로마인은 이미 이집트를 다녀왔기에 그걸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익힌 바 있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건축기술의 보조적 지위에 머물던 콘크리트를 개량하여 이른바 ‘로마식 콘크리트’를 개발했고, 또 건축의 주재료로 격상시켰다. 콘크리트는 서기 72년에 시작된 콜로세움 공사에 대대적으로 사용돼 빛을 발했다. 콘크리트 시대는 그렇게 열렸던 것이다.

    로마식 콘크리트는 ‘포졸란(pozzolan)’이라 부르는 화산회(火山恢)와 석회석을 2 대 1의 비율로 섞되 여기에 물을 전체의 15~20%가 되도록 하여 만든 것이다. 때로는 물대신 동물의 기름이나 석류의 열매즙, 피 등을 쓰기도 했다. 화산회는 폼페이를 잿더미로 만든 베수비오 화산에서 나온 것을 썼다. 콘크리트로 벽을 쌓고 지붕을 덮었으나 목재는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강도는 현대의 것에 뒤지지 않아 다양하게 쓰였다. ‘건축의 혁명’이라 일컫는 볼트(궁륭)와 반구형의 돔은 물론 심지어는 해상 부두시설에서도 강점을 발휘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콜로세움으로 들어가기 전에 만나게 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기술의 승리를 상징하는 기념비 같다.

    콘크리트란 특정 물질이 화학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나타내는 응집력을 이용한 기술이다. 로마는 카르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후로 대제국을 지향했다. 대제국은 그 속에 다양한 요소를 담아내야 한다. 로마는 먼저 아피아 가도라는 커다란 그물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로마식 콘크리트를 개발해 이질적인 요소를 하나로 단단히 묶어냈다. 얼핏 보기엔 형이하학적인 작업 같으나 그들의 정신세계가 그렇지 못했다면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다. 길을 따라 로마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라면 그 원산지가 어딘지 따지지 않고 로마의 것으로 대우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콘크리트가 아닌 것이다.

    ○ 돈 없는 사람도 입장할 기회 마련
    로마식 콘크리트의 최대 걸작품으로는 판테온이 꼽힌다. 볼트와 돔이라는 로마의 2대 건축기술을 이용하여 125년에 완공된 신전이다. 16개의 콘크리트 원기둥이 받혀주는 돔 지붕은 벽돌과 응회암, 경석(輕石), 콘크리트 등으로 축조됐다. 돔 안쪽은 반구형이라 하늘을 닮았는데 거기엔 별과 태양을 그려놓아 이곳이 세계의 중심임을 나타냈다. 로마인이 섬기는 신들이 사는 곳이 세계의 중심이라면 콘크리트 구조물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카라칼라 대욕장도 판테온에 못지 않다. 그리스에선 자유시민에게만 아고라나 신전의 출입 자격을 부여했지만 로마의 공공시설물에선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 소정의 입장료만 내면 누구든지 가능했다. 신분의 고하나 남녀 성별, 피부색을 가리지 않았으며 황제도 시민과 함께 즐겼다. 때로는 부자가 하루치 입장료 전액을 지불하여 돈 없는 사람도 입장할 수 있도록 했을 정도였다. 로마가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한 데는 이러한 개방성과 포용성이 큰 몫을 했다.

    내부로 들어간 입장객은 먼저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한 바닥과 벽에 걸린 그림, 통로나 회랑에 설치한 조각들을 감상한다. 그런 다음 순환입욕이라 부르는 코스에 따라 한 바퀴 도는데, 첫 코스는 현대식 ‘피트니스 센터’에 해당되는 체력단련실이다. 거기서 레슬링으로 땀을 흠뻑 빼고는 탈의실로 간다. 온욕실에서 몸을 담그고 사우나실을 거쳐 다시 온욕실로 갔다가 냉욕실에 들러 몸을 식힌다. 그 사이 도서실에 들러 책을 읽기도 하고 정원을 산보하기도 한다. 그것도 싫증나면 체스를 즐긴다. 부유층 인사들은 마사지를 받기도 한다.

    시간과 돈이 있는 사람은 스낵바와 바, 레스토랑, 숍, 라운지, 타베르나(간이주점), 박물관, 극장 등을 다녔으며, 노래에 자신 있는 이는 노래를 불렀고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장사꾼들은 사람들 사이로 다니며 “소시지 있습니다” “맛있는 케이크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마지막으로 옥상의 풀장으로 가 수영을 즐겼다. 로마 시대 공중욕탕은 심신의 피로를 푸는 곳일 뿐 아니라 사교장 역할도 했다. 콘크리트 공법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이런 대형 공적 공간이 과연 지어질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콘크리트의 위력이 크게 느껴진다.
     
    [자료출처: 주간조선(권삼윤 역사여행가)] <자료정리: 부동산은행>

     
    출처 : 블로그 > 고양시[일산]부동산(오피스텔.원룸.상가) | 글쓴이 : 일산 부동산은행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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