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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서예가 노산(蘆山) 최난주(崔欄周) 선생,미술가수국(음)악서예사진조각도예 2005. 6. 4. 11:38
(기획)서예가 노산
(蘆山) 최난주(崔
欄周) 선생, 수필
집 펴내
紙筆硯墨 벗 30여년, 필명
'최원용' 수필집 '내가 그
린 초상화' 발간
서예가, 수필가, 교육공무
원 세 길에서 괄목성과
전북도교육청 간부 공무원이 수필집을 발간해 화제가 무성하다.
특히 당사자는 한글서예로 30대에 국립현대미술관 (국전)초대작가 반열에 올랐고, 한글서체인 원곡체를 개발한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이 고희 기념으로 만든 한해 한 사람만 주는 상을 83년 전북인 최초로 30대에 수상했을 뿐 아니라 剛菴 宋成鏞 선생 수제자로 알려져 관심을 끈다.
그는 익산교육청 관리과장을 거쳐 연수원 교육을 마친 뒤 올해 1월 道교육청 기획예산과장으로 발령을 받은 노산(蘆山) 최원용(본명 최난주=崔欄周) 선생(56)이다.
노산은 최근 '최원용(崔原榕)'이란 필명으로 '내가 그린 초상화'라는 수필집을 발간했다.
7부로 이뤄진 수필집은 6부까지는 41편 수필을 게재했고 7부는 그를 잘 아는 저명인사의 평과 작품해설을 실었다.
37년째 교육에 헌신한 그는 혹시 구설에 오를까 취재요청을 따돌린다.서예계에서 중량감을 아는 기자가 수필집 발간 취재요청을 거듭해 응할 정도로 노출을 꺼린다.
한 가지도 성공하기 어려운데 서예가와 수필가 및 교육공무원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그의 이력은 이렇다.
고창군 공음면 출생인 노산의 조부 斗南 최린휴(崔麟休)는 조선말 대과에 급제해 현재 청와대공보담당관과 언론인 역할를 하는 정언(正言) 벼슬을 하다 한일합방이 되자 관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선다. "왜놈에게 교육을 맡길 수 없다"는 조부 영향으로 부친 4형제는 한학에 전념한다.
부친은 동네 어른 성화에 본의 아니게 훈장이 됐다.
노산은 한문에 자질을 보여 형들과 함께 한문을 배웠는데 한문이나 붓글씨도 이 때 기초를 다졌다고.
선천적 자질에다 국민학교 시절 서예에 능한 담임에게 붓글씨를 배워 친구의 헝겊 명찰을 도맡아 써주고 '5.16 혁명공약'은 하도 써 봐 지금도 전문을 외울 정도다.
목소리가 좋아 '아나운서'가 꿈이었는데 중·고교를 지나며 서예에도 빠져든다. 69년 고창 무장초등에서 공무원(공채1기)으로 투신한 이래 글쓰기에 정진했다.
봉급으로 방송교재를 구입했던 노산은 3년간 정훈부 아나운서로 군복무를 마치고 여러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초빙 받았으나 고창교육청에 복직했던 73년경 방송의 꿈을 접고 본격 서예에 몰두한다.
28세 되던 77년, 한국 서예계 거목이던 강암과 인연을 맺어 서예인생에 대전환기를 맞는다.
노산도 강암 제자의 모임인 '연묵회'에 가입했다.
강암 문하생으로 사군자와 한문 서예를 배우며 차원 높은 수련을 한다. "성급히 출세하려 말고 좋은 책과 선생을 만나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강암의 충고는 지금도 되새기는 문구이다.
78년 도연명(陶淵明)의 잡시(雜詩)를 연묵회 전시에 출품했다.
같은 해 가을, 민전으로 처음인 '전시계'라는 잡지에 이은상의 '가고파'를 출품 입선한다. 83년에는 '원곡서예상'을 받는 쾌거도 이뤄냈다.
특히 87년, 국전(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반열에 우뚝 선다.
이는 전북교육계를 망라해 여산 권갑석씨에 이어 두번 째 국전 초대작가로 등극한 것이며 당시 대한민국 123명 초대작가 중 최연소 대열로, 한글 궁체로는 호남권 최초 영입이다.
신세지기 싫어 꺼렸던 그가 개인전을 갖은 것은 서예강좌에서 강사로부터 "개인전 한 번 못 가진 사람은 작가라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어서다.
집념과 뚝심의 노산은 이에 충격을 받고 작가관을 달리하고 새롭게 몰두한다.
훗날 그의 서예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강암은 노산 서예 개인전 격려사에서 "서력은 물론 경력도 중견이 됐음에도 이제야 개인전을 연 것은 중후한 인품과 겸허의 소치"라고 칭찬했다.
96년 글자 8천여자로 가로 9m, 세로 2m가 넘는 대형 병풍작인 '농가월령가'를 엄격 심사를 거쳐 작품을 받는다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미술관 작품수집심의위가 작가경력과 작품가치로 엄선해 수십 명 기증 희망자를 제치고 노산작품을 기증작으로 선정했다.
서울시교육청, 교원대, 전북대, 전주대, 경상대, 道교육청, 전북교원연수원에도 작품을 기증했다.
수필가로도 인정받는 노산은 계간지 '시와 의식'을 통해 등단했고 수필집도 준비했다. 김동리 선생이 원곡상 축사에서 "소년 문장가는 있어도 소년 명필가는 없다"며 "詩書畵를 三絶이라 했는데 노산이 이뤄봄이 어떠냐"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수필에도 공을 들였다.
'글 쓰기'는 같으나 '筆과 書'라는 '전혀 다른 글쓰기'에 노력을 함께 했다.
붓글씨나 수필이나 공무원 신분에 따른 눈치도 많아 항상 조심하지만 수필집에 대한 의지는 대단했다.
지난해 일간지에 필명 '최원용'으로 발표된 '삶의 향기'를 읽고 이름이 잘못 나왔다는 촌극도 벌어졌다.
20여년 문사로 활동했으나 노출을 꺼려 교육계에서는 잘 몰랐기 때문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금번 수필집을 내게 된 것이다. 교육에는 헌신적 공직자로 모범을 보였고 서예는 한국계보를 이룬데다 수필집까지 낸 것은 겸양과 절제에 끊임없이 정진하는 불굴의 집념 때문이다.
부인 서영숙여사도 진안교육청 초등교육담당 장학사로 교육가족이다.
"글씨는 그 사람이다(書如其人)"는 노산은 "묵향(墨香)에 취해 온 저의 삶과 교육계 헌신에다 수필은 인생의 일정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할 정도로 서예와 교육, 수필을 모두 중시한다.
전북 교육계에서 중책을 맡고, 서예계는 87년부터 국전 초대작가로 전국을 누비는 명필이며 잔잔한 수필집까지 내게 된 것이다.
수필집 첫 부분은 '독도는 우리 땅' '묵난' '무명교사예찬' '농가월령가' 등 그의 서예작품이 사진으로 실려있다.
최원용은 책머리에서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만을 자랑삼아 쓰고 싶었지만 비밀은 없다는 전제하에 부끄러운 면은 부끄러운 대로 가슴 아팠던 사연은 아픈 대로 숨김없이 털어놓았다"고 고백했다.
또한 "어연 20년간 신문, 잡지, 동인지 기고내용을 책으로 발간했다"고 밝혔다.
수필 내용은 '사제지간'과 '서예작가 및 작품활동 경험' 및 '가족'에 대한 내용도 있다.
또한 조부 3부자 얘기 등 '집안과 가족' 그리고 '사회비판' 수필과 행정가이자 서예가며 수필가로써 자신을 뒤돌아보는 반성문격의 '자화상' 같은 수필을 물이 흐르듯 잔잔한 필치로 엮어냈다.
문학박사 전영우씨(수원대 명예교수)는 노산을 말할 때 "멀리서 보면 근엄하고 가까이 가면 온화하고, 말을 들으면 엄정하다"는 子夏의 말이 떠오른다며 수필집 발간을 축하했다.
임승래 前도교육감도 "준수한 용모에 다정한 음성, 뛰어난 필력과 예리한 판단력 등 身言書判을 고루 갖춘 모범공무원"이라며 새 출발을 다짐하는 노산을 격려했다.
여러 번 같이 근무해 본 심수일 前 도교육청 총무과장은 '인감도장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시인이며 한국예총전북지회장을 지낸 김남곤 전북일보 전무는 노산을 "돌이 아닌 쇠다리도 두드리며 걷는 사람"이라며 " 첫인상에 대한 나의 점수매김 때문에 수필가 최원용보다 서예가 노산 최난주가 훨씬 친밀감이 들지만 수필집에서 나타났듯 분수 밖의 허세를 용서치 않는 성품"이라고 밝혔다.
前 전주대 교수 이기반 시인은 작품해설에서 "유능한 공직자요, 이름높은 서예가며 수필가로 일가를 이뤘으니 삼관왕의 경지에 오른 無冠의 帝王"이라고 평가했고 "'내가 그린 초상화'는 37년 공직생활과 30여년의 서예가, 20년 가까운 수필가로서 인생편린의 다양한 체험을 진솔하게 고백한 수필집"이라고 말했다.
노산은 종이(紙)와 붓(筆), 벼루(硯)와 먹(墨) 등 문방사우와 벗하며 글쓰기와 독서 및 수필 쓰기에 전념하는 '25시 인생'을 산다.
프로스트(1876∼1963)가 '가지 않은 길'에서 한 쪽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한탄할 때 노산은 무려 세 길을 함께 하여 큰 성과가 있었음에 부러움을 느끼며 그의 筆運과 文運 및 官運이 날로 번창하기를 빌어본다. <익산/고재홍 기자>
전북도교육청 공무원이 한글서예(筆)와 수필(文), 그리고 공무원(官)으로서 세 분야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와 화제가 무성하다. 그는 익산교육청 관리과장과 연수원교육을 거쳐 올해 1월 道교육청 기획예산과장의 중책을 맡은 노산(蘆山) 최원용(본명 최난주=崔欄周 56)님이다. 특히 한글서예로 30대에 국립현대미술관 (국전)초대작가 반열에 올랐고, 한글서체인 원곡체를 개발한 原谷 김기승(1909∼2000)이 고희 기념으로 만든 한해 한 사람만 주는 상을 83년 전북최초로 30대에 수상했을 뿐 아니라 剛菴 宋成鏞 선생 수제자여서 관심을 끈다. 노산은 수개월전 '최원용(崔原榕)'이란 필명으로 '내가 그린 초상화'라는 수필집도 발간했다. 수필집은 6부까지는 41편 수필을, 7부는 저명인사의 평과 작품해설을 실었다.
교육에 헌신해온 그는 구설에 오를까 취재요청을 따돌린다. 서예계에서 중량감을 아는 기자가 취재요청을 거듭해 응할 정도로 노출을 꺼린다. 그의 이력은 이렇다. 고창군 공음면 출생인 조부 斗南 최린휴는 조선말 대과에 급제해 현재 청와대공보담당관과 언론인 역할를 하는 正言 벼슬을 하다 한일합방이 되자 관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선다. "왜놈교육을 시킬 수 없다"는 조부 영향으로 부친 4형제는 한학에 전념한다. 부친은 본의 아니게 훈장이 됐고, 노산은 형들과 한문을 배웠는데 한문이나 붓글씨도 이 때 기초를 다졌다고. 서예에 능한 국민학교 담임에게 붓글씨를 배워 친구의 헝겊 명찰을 도맡아 써주고 '5.16 혁명공약'은 하도 써 봐 지금도 전문을 외울 정도다. 목소리가 좋아 '아나운서'가 꿈이었는데 중·고교를 지나며 서예에도 빠져든다. 69년 고창 무장초등에서 공무원(공채1기)으로 투신한 이래 글쓰기에 정진했다. 노산은 3년간 정훈부 아나운서로 군복무를 마치고 고창교육청에 복직했던 73년경 방송의 꿈을 접고 본격 서예에 몰두한다.
77년, 서예계 거목인 강암과 인연을 맺어 대전환기를 맞는다. 강암 제자의 모임인 '연묵회'에도 가입했다. 강암 문하생으로 사군자와 한문서예를 배우며 차원 높은 수련을 한다. "성급히 출세하려 말고 좋은 책과 선생을 만나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강암의 충고는 지금도 되새기는 문구이다. 78년 도연명의 잡시를 연묵회 전시에 출품했다. 같은 해 가을, 민전으로 처음인 '전시계'라는 잡지에 이은상의 '가고파'를 출품 입선한다. 83년에는 '원곡서예상'을 받는 쾌거도 이뤄냈다. 특히 87년, 국전(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반열에 우뚝 선다. 이는 전북교육계를 망라해 여산 권갑석씨에 이어 두번 째 국전 초대작가로 등극한 것이며 당시 대한민국 123명 초대작가 중 최연소 대열로, 한글궁체로는 호남권 최초다. 그가 개인전을 갖은 것은 서예강좌에서 강사로부터 "개인전 한 번 못 가진 사람은 작가라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어서다. 집념과 뚝심의 노산은 작가관을 달리하고 새롭게 몰두한다. 훗날 그의 서예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강암은 격려사에서 "서력은 물론 경력도 중견이 됐음에도 이제야 개인전을 연 것은 중후한 인품과 겸허의 소치"라고 칭찬했다.
96년 글자 8천여자로 가로 9m, 세로 2m가 넘는 '농가월령가'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미술관 작품수집심의위가 작가경력과 작품가치로 엄선해 노산작품을 기증작으로 선정했다. 서울시교육청, 교원대, 전북대, 전주대, 경상대, 道교육청, 교원연수원에도 작품을 기증했다.
"'江山'이라 쓰면 무겁다 하고 '강산'이라 쓰면 가볍다하네"라며 한글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를 아쉬워한다. "서예는 마음(心)을 선(線)으로 나타내는 예술"이라 단언하는 노산은 "점선획(點線劃)의 태세장단(太細長短), 필압(筆壓)의 강약경중(强弱輕重), 운필(運筆)의 지속(遲速)과 먹(墨)의 농담(濃淡), 글자 상호간 비례균형이 혼연일체를 이뤄 미묘한 조형미를 느끼며, 이는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평가했다.
수필가로도 인정받는 노산은 계간지 '시와 의식'을 통해 등단했고 수필집도 준비했다. 김동리 선생이 원곡상 축사에서 "소년 문장가는 있어도 소년 명필가는 없다"며 "詩書畵를 三絶이라 했는데 노산이 이뤄봄이 어떠냐"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수필에도 공을 들였다. '筆과 文'이라는 '전혀 다른 글쓰기'에 함께 노력했다.
붓글씨나 수필이나 공무원 신분 때문에 항상 조심하지만 수필집에 대한 의지는 대단했다. 지난해 일간지에 필명 '최원용'으로 발표된 '삶의 향기'를 읽고 이름이 잘못 나왔다는 촌극도 벌어졌다. 20여년 문사로 활동했으나 노출을 꺼려 잘 몰랐기 때문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최근 수필집을 발간했다. 모범공직자로 서예는 한국계보를 이룬데다 수필집까지 낸 것은 겸양과 절제에 끊임없이 정진하는 불굴의 집념 때문이다. 부인 서영숙(53)여사도 전주교육청 초등장학사로 교육가족이다. "글씨는 그 사람이다(書如其人)"는 노산은 "묵향에 취해 온 저의 삶과 교육계 헌신에다 수필은 인생의 일정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할 정도로 서예와 교육, 수필을 모두 중시한다.
수필집 첫 부분은 '독도는 우리 땅' '묵난' '농가월령가' 등 그의 서예작품이 사진으로 실려있다. 책머리에서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만을 자랑삼아 쓰고 싶었지만 비밀은 없다는 전제하에 부끄러운 면은 부끄러운 대로 가슴 아팠던 사연은 아픈 대로 숨김없이 털어놓았다"고 고백했다. 수필내용은 '사제지간'과 '서예작가 및 작품활동 경험' 및 조부 3부자 얘기 등 '집안과 가족' 그리고 '사회비판내용'에다 행정가이자 서예가며 수필가로써 반성문격의 '자화상' 같은 수필을 물이 흐르듯 잔잔한 필치로 엮어냈다. 문학박사 전영우씨는 "노산을 말할 때 멀리서는 근엄하고 가까이 가면 온화하고, 말을 들으면 엄정하다는 子夏의 말이 떠오른다"며 수필집 발간을 축하했다. 임승래 前도교육감도 "신언서판을 고루 갖춘 모범공무원"이라며 격려했고 여러 번 같이 근무한 심수일 前 도교육청 총무과장은 '인감도장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시인이며 한국예총전북지회장을 지낸 김남곤 전북일보 전무는 노산을 "쇠다리도 두드리며 걷는 사람"이라며 "수필집에서 나타났듯 분수 밖의 허세를 용서치 않는 성품"이라고 밝혔다. 前 전주대 교수 이기반 시인도 작품해설에서 "유능한 공직자요, 이름높은 서예가며 수필가로 일가를 이뤘으니 삼관왕의 경지에 오른 無冠의 帝王"이라고 평가했고 "'내가 그린 초상화'는 37년 공직생활과 30여년의 서예가, 20년 가까운 수필가로서 인생편린의 다양한 체험을 진솔하게 고백한 수필집"이라고 말했다. 노산은 문방사우(紙筆硯墨)와 벗하며 글쓰기와 독서 및 수필 쓰기에 전념하는 '25시 인생'을 산다. 프로스트(1876∼1963)가 '가지 않은 길'에서 한 쪽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한탄할 때 노산은 세 길을 함께 하여 큰 성과가 있었음에 부러움을 느끼며 그의 筆運·文運·官運이 날로 번창하기를 빌어본다. <익산/고재홍 기자>(기획)서예가 노산(蘆山) 최난주(崔欄周), 서예가, 수필가, 공무원 세 길에서 괄목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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