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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미륵사(탑) 발원·봉안·시주·건립주체 사택왕후<칼럼사설수필> 2019. 1. 22. 11:43
<칼럼> 미륵사(탑) 발원·봉안·시주·건립주체 사택왕후
사탁沙乇·사택沙宅=砂宅·사沙라는 성씨를 가진 왕족에 버금가는 귀족 상호관계나 왕권과의 역학구조가 백제 말과 미륵사 연구에 관심이다.
왕은 '부여夫餘'씨가 독점했으나 북사·수서·신당서 등에는 ‘백제8족’으로 사沙·연燕·협劦·해解·진眞·국國·목木·백苩씨를 기록했다.
왕족인 부여扶餘씨와 해·진씨는 부여계로 북쪽에서 내려온 귀족이고, 사·연·백씨는 남부토착 금강유역 마한계다.
사 씨는 모든 사서에 8성 대족 중 가장 먼저 기록됐다.
사 씨 인물기록은 삼국사기·일본서기, 신당서·남제서南齊書 등 중국사서·봉영기·정림사지5층석탑 대당평백제국비에 남아있다.
한성시대 사두沙豆를 비롯 동성왕(484) 때 내법좌평 사약사沙若思, 동성왕이 남제에 관작을 요청하는 표문에 왕후작위를 받았다는 사법명沙法名, 무령왕 때 달솔 사오沙烏, 일본서기(543)에 나온 상좌평 사탁기루己婁는 사비천도 주도세력이다. 627년(무왕28) 신라 두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까지 붙잡아 개선한 사걸沙乞 장군, 639년 봉영기의 무왕 장인, 좌평 '사택적덕積德', 일제가 부여에 신궁을 세우려 쌓았던 돌무더기에서 1948년 발견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 의자왕 14년(654)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과거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을 남긴 대좌평 '사택지적智積',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사탁상여沙矺相如, 신당서 돌궐과 전쟁기록에 나오는 사탁충의沙矺忠義, 660년 소정방에 의자왕과 함께 포로가 된 대좌평 사택천복千福, 당나라에 압송됐다 웅진도독부 요직을 맡은 사택손등孫登, 일본으로 달아났다 671년 대금하大錦下 벼슬을 받았다고 '일본서기'에 나온 사택소명紹明, 관세음응험기의 사문발정沙門發正 등 무수하다.
왕족인 부여 씨나 백제8족은 남아있지 않다.
백제멸망 때 도륙 당했거나 일본에 망명하고, 당나라로 압송됐거나 성을 바꿨기 때문이다.
'사탁적덕'과 관련, 주목할 인물이 '사택지적비'를 남긴 사택지적이다.
'적덕積德과 지적智積'은 똑같이 '積'자가 있고 "지혜와 덕을 쌓으라."는 의미다.
'선화善化'처럼 불교색채가 짙고 10여년 시차를 두고 왕의 장인인 좌평과 대좌평을 역임해 부자나 형제일 수 있다.
‘지적‘은 일본에 다녀온 후 대좌평까지 올랐으나 물러나고 비를 남겼는데 백제 금석문이다.
"갑인년(654) 나지성城 사택지적은 몸이 해가 가듯 쉽게 가고 달이 가듯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해 금을 뚫어 진당珍堂을 세우고 옥을 깎아 보탑寶塔을 세우니(중략)"라고 기록됐다.
'인생무상'을 읊어 도교·불교가 융합된 귀족 정신세계를 알 수 있으며 사찰·보탑을 세울 정도 부를 축적했다.
’적덕‘ 딸인 왕후가 가람(미륵사)을 세우고 봉영기를 남긴 것처럼 불교가문이다.
좌평佐平은 고이왕(260)이 만든 최고관직으로 성왕이 관산성에서 죽은 후 왕권약화와 함께 강화됐다.
중앙귀족이 선임됐으며, 권력분배를 통한 왕권강화와 귀족득세에 따라 숫자가 변한 좌평을 통괄하는 상좌평이 설치(408)됐는데 6좌평으로 정착됐다.
'봉영기' ‘가람’은 미륵사 전체이고, "대가람을 선화공주 발원으로 세웠다"는 ‘삼국유사’와 일치해 백제인 '사택선화'일 가능성이 짙다.
선화공주가 삼국유사 외에 한국·중국·일본사서에 기록이 없고, 무왕 초 백제군 4만이 몰살한 아막성 전투(602), 사리장엄, 당시 정치상황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서동은 훤칠하고 포용력이 대단한 것을 무기로 '미염무쌍' 좌평 사탁적덕 셋째 딸을 찾아 사비(부여)로 간다. 서동요를 퍼뜨려 사택선화를 차지한 서동은 '흙처럼 쌓인 금'을 하룻밤에 지명법사 도움으로 실질적 '나라의 주인' 사탁적덕에 보내 인심을 쌓고 결혼에 성공한다. 사택적덕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애환과 첫사랑이 서린 익산(금마)에 자주 들린다. 사자사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다 사택선화가 가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해 미륵사를 세우고 사리호와 봉영기를 안치한다. 사택적덕은 막대한 재물을 시주할 뿐 아니라 백공을 보내 건립을 돕는다. 늙은 대왕 건강을 기원했으나 무왕은 2년 후 죽어간다.⌡는 것이 진실이 아닐까?
의자왕(641~660) 즉위 후 '일본서기' 642년에 "모후인 ‘국주모國主母(나라 주인인 어머니)’가 죽자 왕자 '교기'를 비롯 그 여동생과 관리 40여명을 섬으로 추방시켰다."는 ‘국주모‘가 정실왕후 사택선화였으나 ’아들이 없어(?)‘ 후궁 소생인 의자왕이 40세 가까운 매우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632)된 것은 아닐지?
사택가문 위세에 눌린 태자 시절, “효도로 섬기고 형제와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으나 집권 직후, 사택왕후가 죽자 사택세력을 거세한 것으로 풀이된다.
봉영기에 대왕폐하 만수무강 내용 등만 있을 뿐 40대 중반 태자(의자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도 이를 반증한다.
국립(왕립)사찰이므로 중앙탑과 중앙금당은 무왕, 동탑과 동東금당은 태자가 발원했을 가능성이 짙다.
사택왕후와 애초 존재하지 않던 신라 선화공주가 각각 발원했다는 것은 억지 주장이다.
“신라 선화공주를 주장해 온 일부 사학계가 봉안기 ‘역사‘에 삼국유사 ’설화‘가 허구로 드러나자 ’도피처‘로 삼은 주장“에 불과하다.
能謹捨淨財造立伽藍(능히 공경심을 갖고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미륵사‘를 세우시고)와 당시 전쟁 등 정치상황 등을 볼 때 미륵사(탑) 발원·봉안·시주·건립주체는 사택왕후다.
의자왕은 태자 부여융과 당에 끌려갔고, 백제부흥과 이후 수많은 전란에 사서는 소실·멸실되고 고려 말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는 사리장엄 봉안(639) 641년이 지난 1280년(충렬왕 6년) 전후여서 구전 밖에 없어 신라 선화공주로 기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봉영 21년 후 멸망한 ‘백제좌평佐平’도 ‘신라진평眞平’으로 둔갑되지 않았을까?/취재국장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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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미륵사(탑) 발원·봉안·시주·건립주체 사택왕후
사탁沙乇·사택沙宅=砂宅·사沙라는 성씨를 가진 왕족에 버금가는 귀족 상호관계나 왕권과의 역학구조가 백제 말과 미륵사 연구에 관심이다. 왕은 '부여夫餘'씨가 독점했으나 북사·수서·신당서 등에는 ‘백제8족’으로 사沙·연燕·협劦·해解·진眞·국國·목木·백苩씨를 기록했다. 왕족인 부여扶餘씨와 해·진씨는 부여계로 북쪽에서 내려온 귀족이고, 사·연·백씨는 남부토착 금강유역 마한계다. 사 씨는 모든 사서에 8성 대족 중 가장 먼저 기록됐다.
사 씨 인물기록은 삼국사기·일본서기, 신당서·남제서南齊書 등 중국사서·봉영기·정림사지5층석탑 대당평백제국비에 남아있다. 한성시대 사두沙豆를 비롯 동성왕(484) 때 내법좌평 사약사沙若思, 동성왕이 남제에 관작을 요청하는 표문에 왕후작위를 받았다는 사법명沙法名, 무령왕 때 달솔 사오沙烏, 일본서기(543)에 나온 상좌평 사탁기루己婁는 사비천도 주도세력이다. 627년(무왕28) 신라 두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까지 붙잡아 개선한 사걸沙乞 장군, 639년 봉영기의 무왕 장인, 좌평 '사택적덕積德', 일제가 부여에 신궁을 세우려 쌓았던 돌무더기에서 1948년 발견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 의자왕 14년(654)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과거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을 남긴 대좌평 '사택지적智積',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사탁상여沙矺相如, 신당서 돌궐과 전쟁기록에 나오는 사탁충의沙矺忠義, 660년 소정방에 의자왕과 함께 포로가 된 대좌평 사택천복千福, 당나라에 압송됐다 웅진도독부 요직을 맡은 사택손등孫登, 일본으로 달아났다 671년 대금하大錦下 벼슬을 받았다고 '일본서기'에 나온 사택소명紹明, 관세음응험기의 사문발정沙門發正 등 무수하다. 왕족인 부여 씨나 백제8족은 남아있지 않다. 백제멸망 때 도륙 당했거나 일본에 망명하고, 당나라로 압송됐거나 성을 바꿨기 때문이다.
'사탁적덕'과 관련, 주목할 인물이 '사택지적비'를 남긴 사택지적이다. '적덕積德과 지적智積'은 똑같이 '積'자가 있고 "지혜와 덕을 쌓으라."는 의미다. '선화善化'처럼 불교색채가 짙고 10여년 시차를 두고 왕의 장인인 좌평과 대좌평을 역임해 부자나 형제일 수 있다. ‘지적‘은 일본에 다녀온 후 대좌평까지 올랐으나 물러나고 비를 남겼는데 백제 금석문이다. "갑인년(654) 나지성城 사택지적은 몸이 해가 가듯 쉽게 가고 달이 가듯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해 금을 뚫어 진당珍堂을 세우고 옥을 깎아 보탑寶塔을 세우니(중략)"라고 기록됐다. '인생무상'을 읊어 도교·불교가 융합된 귀족 정신세계를 알 수 있으며 사찰·보탑을 세울 정도 부를 축적했다. ’적덕‘ 딸인 왕후가 가람(미륵사)을 세우고 봉영기를 남긴 것처럼 불교가문이다.
좌평佐平은 고이왕(260)이 만든 최고관직으로 성왕이 관산성에서 죽은 후 왕권약화와 함께 강화됐다. 중앙귀족이 선임됐으며, 권력분배를 통한 왕권강화와 귀족득세에 따라 숫자가 변한 좌평을 통괄하는 상좌평이 설치(408)됐는데 6좌평으로 정착됐다. '봉영기' ‘가람’은 미륵사 전체이고, "대가람을 선화공주 발원으로 세웠다"는 ‘삼국유사’와 일치해 백제인 '사택선화'일 가능성이 짙다. 선화공주가 삼국유사 외에 한국·중국·일본사서에 기록이 없고, 무왕 초 백제군 4만이 몰살한 아막성 전투(602), 사리장엄, 당시 정치상황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서동은 훤칠하고 포용력이 대단한 것을 무기로 '미염무쌍' 좌평 사탁적덕 셋째 딸을 찾아 사비(부여)로 간다. 서동요를 퍼뜨려 사택선화를 차지한 서동은 '흙처럼 쌓인 금'을 하룻밤에 지명법사 도움으로 실질적 '나라의 주인' 사탁적덕에 보내 인심을 쌓고 결혼에 성공한다. 사택적덕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애환과 첫사랑이 서린 익산(금마)에 자주 들린다. 사자사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다 사택선화가 가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해 미륵사를 세우고 사리호와 봉영기를 안치한다. 사택적덕은 막대한 재물을 시주할 뿐 아니라 백공을 보내 건립을 돕는다. 늙은 대왕 건강을 기원했으나 무왕은 2년 후 죽어간다.⌡는 것이 진실이 아닐까?
의자왕(641~660) 즉위 후 '일본서기' 642년에 "모후인 ‘국주모國主母(나라 주인인 어머니)’가 죽자 왕자 '교기'를 비롯 그 여동생과 관리 40여명을 섬으로 추방시켰다."는 ‘국주모‘가 정실왕후 사택선화였으나 ’아들이 없어(?)‘ 후궁 소생인 의자왕이 40세 가까운 매우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632)된 것은 아닐지? 사택가문 위세에 눌린 태자 시절, “효도로 섬기고 형제와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으나 집권 직후, 사택왕후가 죽자 사택세력을 거세한 것으로 풀이된다. 봉영기에 대왕폐하 만수무강 내용 등만 있을 뿐 40대 중반 태자(의자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도 이를 반증한다. 국립(왕립)사찰이므로 중앙탑과 중앙금당은 무왕, 동탑과 동東금당은 태자가 발원했을 가능성이 짙다. 사택왕후와 애초 존재하지 않던 신라 선화공주가 각각 발원했다는 것은 억지 주장이다. “신라 선화공주를 주장해 온 일부 사학계가 봉안기 ‘역사‘에 삼국유사 ’설화‘가 허구로 드러나자 ’도피처‘로 삼은 주장“에 불과하다. 能謹捨淨財造立伽藍(능히 공경심을 갖고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미륵사‘를 세우시고)와 당시 전쟁 등 정치상황 등을 볼 때 미륵사(탑) 발원·봉안·시주·건립주체는 사택왕후다.
의자왕은 태자 부여융과 당에 끌려갔고, 백제부흥과 이후 수많은 전란에 사서는 소실·멸실되고 고려 말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는 사리장엄 봉안(639) 641년이 지난 1280년(충렬왕 6년) 전후여서 구전 밖에 없어 신라 선화공주로 기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봉영 21년 후 멸망한 ‘백제좌평佐平’도 ‘신라진평眞平’으로 둔갑되지 않았을까?/취재국장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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