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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변산에 ‘퇴계 이황’ 시비·동상을
    <칼럼사설수필> 2018. 9. 5. 12:26























    <칼럼> 변산퇴계 이황시비·동상을




    조선 대유학자인 퇴계退溪 이황(1501-1570) 선생 변산유람기가 주목받는다.





    단양·풍기군수와 성균관 대사성, 대제학을 지낸 퇴계는 본관이 진보眞寶이고 경상도 예안현(안동시 도산면)에서 태어났다.




    1560년 선생이 세운 도산서당에서 독서·저술에 전념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제자로 임진왜란 경험을 스스로 미리 징계해 후환을 경계하는 기록이란 뜻의 징비록懲毖錄에 남긴 유성룡과 김성일·기대승 등 수백 명을 남겼다.




    작고 5년 후 제자와 후손이 서당 뒤에 준공한 것이 도산서원이다.










    퇴계 선생은 올 연초 주목받게 됐다.




    퇴계문집 별집에 남긴 한시로 쓴 변산유람기가 보도됐다.




    도산서원 이동구(69) 별유사別有司(·하유사와 함께 사무를 맡은 인물)10여 년 전부터 변산에 가지 않은 분이 어떻게 유람기를 남겼지?”라는 의문에서 시작됐다.





    퇴계 선생은 6·25 전란에 불탄 변산 최대사찰 실상사와 변산백미白眉직소폭포直沼瀑布(직연폭포直淵瀑布) 및 변산 최고봉인 508m 의상봉義相峯 별칭인 마천대摩天臺를 각각 7856자 씩 168자로 유람기를 남겼다.





    퇴계는 변산에 와 본 적이 없다.




    전남 광산 칠계漆溪 김언거(15031584) 친구가 퇴계가 단양군수 시절인 음력 15486월29일 풍영정시첩을 보내며 미리 받은 듯 풍기군수를 지낸 주세붕(1495-1554)이 참여한 발문을 써 달라며 유람기도 보내자 운율에 맞춰(차운次韻) 답시와 발문을 지었다.




    퇴계나 칠계가 호에 계자를 쓴 것과 머나먼 길을 사람을 보내 시첩과 유람기를 보낸 것이나 퇴계가 답시를 주고 문집에 남긴 것만 봐도 보통 절친이 아니다.



    우연인지 퇴계나 칠계는 같은 1560년 도산서당과 풍영정詠亭을 세웠다.



    극심한 당쟁에 관직에서 물러나려는 뜻을 함께 한 듯하다.




    김언거는 광주시 광산구 극락강 변에 풍영정을 세우고 10여 년 유유자적하며 이황·김인후·기대승과 교유했다.




    풍영정시첩으로 봐 정자를 세우기 전 풍영정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 같다.





    유람기는 말이나 도보로 여행이 일부 양반층 전유물일 때 남긴 한시다.




    여행이 어려워 방안에서 누워 아름다운 산수를 유람하는 기록이란 뜻의 와유록臥遊錄을 남긴 것도 이 때문이다.




    퇴계 변산유람기는 실상사와 직연폭포, 마천대를 본 듯 생생하고 현실감 있다.














    <實相寺南溪韻실상사남계 운>


    千古名山斷俗埃 천고의 명산 속세 티끌을 끊었으니/


    得君佳賞寄山隈 그대 아름다운 풍광 글은 산굽이(낭떨어지)에 남겨두네/


    水經寶地全然潔 물은 보지寶地(불지佛地: 사찰을 품은 곳)를 흐르니 더없이 깨끗하고/


    雲向叢林別樣堆 구름은 총림(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 등을 갖추고 수행승이 모여 수행하는 큰 사찰로 실상사를 의미한 듯)을 향해 별난 모양으로 쌓였고/


    瘦竹微吟閒遶石 가녀린 대는 사각거리는 소리 내며 돌을 막고 둘러쳐 있고/


    淸尊高興晩登臺 맑은 술을 마시니 흥이 일어 늦게야 높고 평평한 곳에 이르렀네/


    從來造物嫌多取 여태까지 조물주는 많이 갖는 것을 싫어하니/


    莫把風烟騁逸才 세상을 쥐고 뛰어난 재주를 펼치려 마시게나.









    <直淵瀑布韻직연폭포>


    白練橫飛翠障圍 흰 명주(폭포수) 옆으로 날아 푸른 장벽을 둘렀고/


    劈開山骨減雲肥 산 바위가 쪼개져 구름이 살찌는 것을 덜었구나./


    漲時河落深舂地 넘칠 때는 하천이 깊은 땅으로 떨어진 듯/


    急處雷奔下激磯 빠른 곳은 번개처럼 돌을 내려치네/


    何許靈源連海窟 어디쯤에서 신령스런 근원이 바다 굴로 이어졌을까?/


    幾多餘沫散林霏 무수한 남은 거품 수풀로 흩어지고/


    雄觀未遂罏峯勝 웅장한 향로봉 승경(빼어난 경치)을 구경 못했으니/


    且向玆山欲拂衣 다시 이 산을 향해 옷소매를 털고 싶구나.






    <摩天臺 마천대>


    但驚海闊與山崇 다만 바다 넓고 산 높음에 놀랐으니/


    誰識元初辦結融 누가 원초 신비로움을 깨달았을까?/


    日月低垂氛翳絶 해와 달 낮게 드리워 끊어지고/


    靈仙游集瑞光叢 신선이 모여 노는 서광(상서로운 빛)이 모인 곳/


    胷襟浩氣三杯後 가슴 속 호기는 석 잔을 마시니 높아지고/


    羽翼培風六月中 깃 날개 바람타고 유월에 오르네./


    矯首西雲無計往 머리 들어보니 서쪽 구름에 갈 엄두가 나지 않는데/


    因君豪句喜坡蒙 그대 좋은 글귀로 어둠을 깨쳤구려.









    고려 후기 대문호이자 1199년 작목사斫木使(궁궐목재를 위해 변산 소나무를 잘라 공급하는 책임자)로 첫 부임지가 부안이고, 1230년 유배지도 부안 위도였던 이규보(1168-1241), 부안현감을 지낸 심광세(1577~1624), 시서화 삼절三絶로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불리며 처갓집인 안산에 머물며 단원 김홍도등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부안 현감 강완의 아버지로 노비와 월명암 스님이 멘 가마를 타고 변산유람을 한 것으로 유명한 표암豹菴 강세황(1713~1791) 등이 남긴 수십여 편 변산유람기와 그림이 남아있다.





    육당 최남선도 1925년 기록한 심춘순례에서 변산팔경 하나로 실상용추實相龍湫를 꼽았다.




    실상은 실상사, 용추는 직소폭포 주변이다.





    실상사도 복원하고 직소폭포 가는 중간 넓은 실상사 터 입구나 세 곳 중간 청림 삼거리에 퇴계 유람기와 번역 시비 및 동상을 세워 관광자원으로 활용이 어떨까 싶다.



    지폐에 퇴계 영정이 그려졌고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및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음을 참고하고 후손과 의논해 건립하면 변산홍보와 관광객 증대에 효과가 예상된다.




    관심을 기대한다./취재국장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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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변산에 퇴계 이황시비·동상을

    조선 대유학자인 퇴계退溪 이황(1501-1570) 선생 변산유람기가 주목받는다. 단양·풍기군수와 성균관 대사성, 대제학을 지낸 퇴계는 본관이 진보眞寶이고 경상도 예안현(안동시 도산면)에서 태어났다. 1560년 선생이 세운 도산서당에서 독서·저술에 전념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제자로 임진왜란 경험을 스스로 미리 징계해 후환을 경계하는 기록이란 뜻의 징비록懲毖錄에 남긴 유성룡과 김성일·기대승 등 수백 명을 남겼다. 작고 5년 후 제자와 후손이 서당 뒤에 준공한 것이 도산서원이다.

    퇴계 선생은 올 연초 주목받게 됐다. 퇴계문집 별집에 남긴 한시로 쓴 변산유람기가 보도됐다. 도산서원 이동구(69) 별유사別有司(·하유사와 함께 사무를 맡은 인물)10여 년 전부터 변산에 가지 않은 분이 어떻게 유람기를 남겼지?”라는 의문에서 시작됐다.

    퇴계 선생은 6·25 전란에 불탄 변산 최대사찰 실상사와 변산백미白眉직소폭포直沼瀑布(직연폭포直淵瀑布) 및 변산 최고봉인 508m 의상봉義相峯 별칭인 마천대摩天臺를 각각 7856자 씩 168자로 유람기를 남겼다.

    퇴계는 변산에 와 본 적이 없다. 전남 광산 칠계漆溪 김언거(15031584) 친구가 퇴계가 단양군수 시절인 음력 15486월29일 풍영정시첩을 보내며 미리 받은 듯 풍기군수를 지낸 주세붕(1495-1554)이 참여한 발문을 써 달라며 유람기도 보내자 운율에 맞춰(차운次韻) 답시와 발문을 지었다. 퇴계나 칠계가 호에 계자를 쓴 것과 머나먼 길을 사람을 보내 시첩과 유람기를 보낸 것이나 퇴계가 답시를 주고 문집에 남긴 것만 봐도 보통 절친이 아니다.

    우연인지 퇴계나 칠계는 같은 1560년 도산서당과 풍영정詠亭을 세웠다. 극심한 당쟁에 관직에서 물러나려는 뜻을 함께 한 듯하다.


    김언거는 광주시 광산구 극락강 변에 풍영정을 세우고 10여 년 유유자적하며 이황·김인후·기대승과 교유했다. 풍영정시첩으로 봐서 정자를 세우기 전 풍영정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 같다.

    유람기는 말이나 도보로 여행이 일부 양반층 전유물일 때 남긴 한시다. 여행이 어려워 방안에서 누워 아름다운 산수를 유람하는 기록이란 뜻의 와유록臥遊錄을 남긴 것도 이 때문이다. 퇴계 변산유람기는 실상사와 직연폭포, 마천대를 본 듯 생생하고 현실감 있다.


    <實相寺南溪韻실상사남계 운>

    千古名山斷俗埃 천고의 명산 속세 티끌을 끊었으니/得君佳賞寄山隈 그대 아름다운 풍광 글은 산굽이(낭떨어지)에 남겨두네./水經寶地全然潔 물은 보지寶地(불지佛地: 사찰을 품은 곳)를 흐르니 더없이 깨끗하고/雲向叢林別樣堆 구름은 총림(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 등을 갖추고 수행승이 모여 수행하는 큰 사찰로 실상사를 의미한 듯)을 향해 별난 모양으로 쌓였고/瘦竹微吟閒遶石 가녀린 대는 사각거리는 소리 내며 돌을 막고 둘러쳐 있고/淸尊高興晩登臺 맑은 술을 마시니 흥이 일어 늦게야 높고 평평한 곳에 이르렀네/從來造物嫌多取 여태까지 조물주는 많이 갖는 것을 싫어하니/莫把風烟騁逸才 세상을 쥐고 뛰어난 재주를 펼치려 마시게나.


    <直淵瀑布韻직연폭포 운>

    白練橫飛翠障圍 흰 명주(폭포수) 옆으로 날아 푸른 장벽을 둘렀고/劈開山骨減雲肥 산 바위가 쪼개져 구름이 살찌는 것을 덜었구나./漲時河落深舂地 넘칠 때는 하천이 깊은 땅으로 떨어진 듯/急處雷奔下激磯 빠른 곳은 번개처럼 돌을 내려치네./何許靈源連海窟 어디쯤에서 신령스런 근원이 바다 굴로 이어졌을까/幾多餘沫散林霏 무수한 남은 거품 수풀로 흩어지고/雄觀未遂罏峯勝 웅장한 향로봉 승경(빼어난 경치)을 구경 못했으니/且向玆山欲拂衣 다시 이 산을 향해 옷소매를 털고 싶구나.

    <摩天臺韻 마천대 운>

    但驚海闊與山崇 다만 바다 넓고 산 높음에 놀랐으니/誰識元初辦結融 누가 원초 신비로움을 깨달았을까?/日月低垂氛翳絶 해와 달 낮게 드리워 끊어지고/靈仙游集瑞光叢 신선이 모여 노는 서광(상서로운 빛)이 모인 곳/胷襟浩氣三杯後 가슴 속 호기는 석 잔을 마시니 높아지고/羽翼培風六月中 깃 날개 바람타고 유월에 오르네./矯首西雲無計往 머리 들어보니 서쪽 구름에 갈 엄두가 나지 않는데/因君豪句喜坡蒙 그대 좋은 글귀로 어둠을 깨쳤구려.



    고려 후기 대문호이자 1199년 작목사斫木使(궁궐목재를 위해 변산 소나무를 잘라 공급하는 책임자)로 첫 부임지가 부안이고, 1230년 유배지도 부안 위도였던 이규보(1168-1241), 부안현감을 지낸 심광세(1577~1624), 시서화 삼절三絶로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불리며 처갓집인 안산에 머물며 단원 김홍도등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부안 현감 강완의 아버지로 노비와 월명암 스님이 멘 가마를 타고 변산유람을 한 것으로 유명한 표암豹菴 강세황(1713~1791) 등이 남긴 수십여 편 변산유람기와 그림이 남아있다. 육당 최남선도 1925년 기록한 심춘순례에서 변산팔경 하나로 실상용추實相龍湫를 꼽았다. 실상은 실상사, 용추는 직소폭포 주변이다.

    실상사도 복원하고 직소폭포 가는 중간 넓은 실상사 터 입구나 세 곳 중간 청림 삼거리에 퇴계 유람기와 번역 시비 및 동상을 세워 관광자원으로 활용이 어떨까 싶다. 지폐에 퇴계 영정이 그려졌고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및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음을 참고하고 후손과 의논해 건립하면 변산홍보와 관광객 증대에 효과가 예상된다. 관심을 기대한다./취재국장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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