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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화산동의 추억~
    <칼럼사설수필> 2011. 5. 31. 11:42

     

     

     

     

     

     

    중화산동의 추억~

     

     

    계절의 여왕, 5월은 가고 여름 문턱인 6월로 들어섰다. 고교와 대학을 다녔던 서울에서 1980년대 말 전주에 내려와 정착한 지 어느덧 20여년이 됐고, 만 20년을 중화산동에서 살게 됐다. 팔복동과 금암동이 어딘지도 모르고 내려 왔으나 이제 도내 구석구석 다녀봤다. 출향인으로써 서울의 삶과 달리 ‘등 굽은 나무 선산 지키듯’ 하는 자부심과 자격지심이 교차한다. 처음 우아동에 살았다. 도심 전주역이 전라선 철도이설로  지금의 전주역에 옮겨졌고, 6지구와 우아동을 비롯 택지개발로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전주를 전혀 몰라 주변 권유도 한 몫 했다. 얼마 안돼 잘못 판단했음을 알게 됐다. 아버님(1999년 작고)이 살고 계신 고향, 변산반도를 가려면 우아동에서 전주 도심을 관통하느라 30분이 걸린다. 때문에 ‘여우가 고향에 머리를 두듯’ '전북정치1번지' 완산 갑구에 속하는 중화산동에 1991년 정착한다. 우아동에서 도심을 지날 시간에 이동교를 건너 김제에 가고도 남으니 얼마 좋은가? 노환의 아버님을 뵈러 가기 쉬웠기 때문이다.

    중화요리가 연상되는 중화산동(中華山洞)이란 이름도 맘에 들었다. 네 자나 돼 관심을 끌었지만, '中華'는 중국인이 자기 나라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는 말 아닌가? '中山'도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황조를 몰락시키고 동아시아 최초 공화정인 중화민국을 건국했던 손문의 별명이 아닌가? 자연 “중국 화교(?)가 많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착각했다. 예수병원 옆을 지나다 보니 ’중국어학원’도 있는 것이 아닌가? 훗날 전혀 사실무근임을 알게 됐지만 전주를 모르던 당시에는 “화교가 많이 산다는 내 판단이 옳았구나”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백제로도 연결이 안됐을 때 전주팔미로 유명한 선(서원)너머 미나리꽝 한복판에 세워진 아파트로 이사한 지 20년째다. 사회부와 경제부, 정치부 및 완주, 정읍, 군산, 서울 등지를 전전하다 전주는 살면서 알게 되니 출퇴근이 가능하고 ‘전북 제2의 도시’인 익산시를 정통해 보자고 결심한다. 미륵사지와 왕궁탑 등 마한.백제문화도 생소했지만 관심을 끌었다. 익산에서 91년과 92년, 2003년부터 현재까지 10년째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 흘렀으니 익산이 '제2의 고향'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애정도 갖고 있다.

    익산 가는 길은 처음 중화산동 논길을 가로질러 팔달로와 번영로를 이용하다가 서부우회도로가 개통돼 번갈아 이용했다. 화산택지개발로 백제로가 연결돼 익산 가는 길이 쉬워졌고, 걸어서 5분 거리에 신도청이 들어서 미나리꽝에는 온갖 문화시설과 음식점 및 편의시설이 총집중된 명실공히 '전북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천변로와 전군산업도로에 전주서부국도대체도로도 준공돼 익산을 오가는 길이 바뀌고, 번영로 벚꽃이나 삼례~금마간 옛날 국도는 남의 일이 됐다. 이서교차로를 통하면 동이리까지 20여분이면 갈 수 있다.

    요즈음 하루가 다르게 모내기 한 논이 늘어가고, 춘포 들녘에 보리 잎이 노랗게 물들어 간다. 며칠 지나면 보리베기를 마치고 완전 푸르른 논으로 바뀔 것이다.

    20여년간 전북과 전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변치 않은 것은 전국 '2% 경제'다. 출퇴근 길목인 이서교차로에서 보는 것이 ‘전주. 완주혁신도시’ 조성현장이다. 참여정부 시절, 지역균형을 위해 토지공사 등이 입주키로 했다. 그런데 토공과 주공이 LH로 통합을 거쳐 진주 일괄배치로 어느 때보다 도민의 실망감은 크다. 현정부에 대한 비판과 함께 다수 여당 시절을 합쳐 ‘집권 10년’을 허송한 도내 정치권에 "몰매를 들어야 한다"는 여론도 많다. 정치권도 내년 총선과 대선 때문인지 신문방송에 얼굴을 자주 내민다. 공천 받고도 떨어지는 극소수 정치인이나 오랜 국회의원 생활후 공천탈락으로 정치를 그만 둔 사람은 어김없이 한양으로 올라간다. 대부분 도내 국회의원도 선거철만 되면 공천장과 금배지를 바꿔갈 뿐 야당이나 여당, 다시 야당 시절 무엇 하나 해 놓은 것이 없다. 이들도 중화산동에서 잘나가던 어떤 정치인이 공천받고 낙선후 발버둥치다 조용히 한양으로 올라간 수순을 밟을 것이다.

    언론은 서민의 피 같은 돈을 탕진한 ‘저축은행’ 사태에 금감원과 감사원 등 고위인사의 엄청난 부정비리를 연일 보도한다. 한쪽에서는 ‘등록금 반값’ 운운하며 달래기에 들어가 ‘아파트 반값’ 공약이 연상된다. 선거 후 안 지키는 공약이 무수하고 과거 정부약속인 LH도 뒤바꿔버리는데 믿는 국민이 별로 없지만 말이다. 하여간 전북민심은 과거와는 천양지차다. 정치인을 소 닭보듯 하거나 외면하기 일쑤다. 그만큼 차별과 역차별에 다시 홀대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사필귀정'이 맞다면 LH토지부는 반드시 전북도로 돌아와 도민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질 때가 오리라 믿어본다. <2011. 06. 03. 金>

     

     

    편집부국장/고재홍>

     


    중화산동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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