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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는 사탁선화가 아닐까?)사택왕후사탁왕후사택선화사탁선화<칼럼사설수필> 2009. 4. 5. 10:25
‘선화공주‘는 ’사탁선화‘가 아닐까?
사탁이나 사택(沙宅=砂宅), 사문(沙門), 사타, 사(沙)씨를 가진 백제말 ‘권력의 심장부’를 장식했던 왕족에 버금가는 최고 귀족층 상호관계나 왕권과의 역학구조가 백제말과 미륵사지 연구에 새로운 논란으로 등장했다.
미륵사지西석탑 '봉안기'에 선화공주는 없고 대왕폐하와 사탁적덕의 딸, 사탁왕후만 있다.
‘사탁’의 ‘탁’=<택(宅)에서 갓머리 없는 글자>를 놓고 학자마다 읽기조차 제각각이다.
백제시대 ’탁‘은 ’택‘의 약자로 같은 의미와 발음으로 읽혔을 가능성이 농후하나 현행 한문은 ’탁‘이다.
宅이나 門은 沙씨에 붙어 ‘집안과 가문’의 ‘높임말’로 보이나 복성일 수도 있다. 안동김씨를 安東金門이라 높여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北史, 隋書, 新唐書 등에는 沙.燕.협(協 왼쪽 十이 없음).解.眞.國.木.백(白 위에 풀초가 있음)씨가 ‘백제 8족’으로 기록됐다.
왕족인 扶餘씨에 解·眞씨는 부여계로 북쪽에서 내려온 귀족이고, 沙·燕·苩씨는 남부토착 금강유역 마한계로 추정된다.
사씨는 삼국사기 동성왕 6년(484) 기록에 법무부장관격인 內法佐平 沙若思가 최초 등장하며 일본서기(543)에 상좌평 사탁기루(己婁)가 등장해 사비천도 주도세력으로 보이며 사비시대 '백제 8족' 으뜸으로 득세한다.
己亥年(639년), 사리호와 봉안기 안치 당시 살았을지 모르나 왕의 장인, 좌평 '사탁적덕(積德)',
일제가 부여에 신궁을 세우려 쌓은 돌무더기에서 해방후 발견돼 역사에 나오는 사택지적비에 의자왕 14년(654)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난날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을 남긴 대좌평 '砂宅智積',
일본서기 660년 백제멸망 기록과 소정방이 백제정벌을 기념해 새긴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금석문에도 등장하며 의자왕과 함께 포로가 된 대좌평 '沙宅千福',
당나라에 압송됐다 웅진도독부 요직을 맡은 후 일본에 망명한 沙宅孫登,
일본에 망명해 671년 大錦下라는 벼슬을 받았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沙宅紹明,
관세음응험기에 나오는 沙門發正을 비롯 백제말 최고 귀족층을 형성했다.
왕족인 扶餘씨나 沙(砂)씨 등 백제8족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백제멸망 때 끝까지 항거하다 도륙 당했거나 일본에 망명하고, 당나라로 압송됐거나 성을 바꿨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탁적덕'과 관련 주목할 인물이 '사택지적비'를 남긴 砂宅智積이다.
'積德과 智積'은 똑같이 '積'자가 있고 "지혜와 덕을 쌓으라"는 의미다.
'善化'처럼 불교색채가 짙고 10여년 시차를 두고 왕의 장인인 좌평과 대좌평을 역임해 부자나 형제간일 수 있다.
智積은 일본에 다녀온 후 대좌평까지 올랐으나 관직에서 물러나고 비를 남겼는데 백제의 유일한 금석문이다.
내용은 "갑인년(654) 정월 9일, 나지성(城) 사택지적은 몸이 해가 가듯 쉽게 가고 달이 가듯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해 금을 뚫어 珍堂을 세우고 옥을 깎아 寶塔을 세우니, 웅장하고 자비로운 모습은(중략)"이라고 기록됐다.
'인생무상'을 읊은 내용으로, 도교와 불교가 융합된 백제귀족 정신세계를 알 수 있으며 사찰과 보탑을 세울 정도 막강한 부를 축적했다.
積德의 딸이 왕후로 가람(미륵사)을 세우고 석탑에 봉안기를 남긴 것처럼 불교가문이 확실하다.
특히 좌평(佐平)은 260년 고이왕 때 만들어진 백제 최고관직으로 성왕이 관산성에서 신라에 죽임을 당한 후 왕권약화와 함께 더욱 강화됐다.
부족장에서 중앙귀족으로 흡수된 귀족에서 선임됐으며, 권력분배를 통한 왕권강화와 귀족의 득세에 따라 숫자나 위치가 변했던 좌평들을 통괄하는 상좌평이 설치(408년)됐는데 5좌평에서 훗날 6좌평으로 정착됐다.
의자왕 초기 왕권강화를 위해 왕족 41명을 좌평에 임명해 명예직으로, 실권을 상실했다.
'봉안기'에는 "淨財를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무왕 40년인 己亥年(639년)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기록됐다.
가람은 통상 미륵사 전체를 의미하고, "대가람을 선화공주 발원으로 세웠다"는 삼국유사와 일치해 선화공주는 백제인으로 '사탁선화'일 가능성이 짙다.
봉안기에는 '沙乇積德女種善因'처럼 '착할 善'이 두 번 나오는데 '善化공주'와 관련이 없을지?
"왕의 서자로 힘들게 살던 서동은 훤칠하고 포용력이 대단한 것을 무기로 좌평 사탁적덕 셋째 딸이 '美艶無雙'이라는 것을 듣고 금강을 따라 사비(부여)로 들어간다.
서동요를 퍼뜨려 사탁선화를 차지한 서동은 '흙처럼 쌓인 금'을 하룻밤에 지명법사 도움으로 사비궁궐이나 사탁집안에 보내 인심을 쌓고 '왕의 핏줄'임을 내세워 결혼에 성공한다.
법왕이 변란으로 급서한 후 막강한 사탁가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어릴 적 애환과 첫사랑이 서린 익산에 자주 들린다.
지명법사가 있는 사자사로 가다 사탁왕후는 가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해 미륵사를 세우고 사리호와 봉안기를 안치한다.
늙은 대왕의 건강을 기원했으나 무왕은 2년후 죽어간다"는 것이 정확한 진실이 아닐까?
'관세음응험기' 기록처럼 자신의 텃밭인 익산에 왕궁성과 '제석사'를 세우고 천도를 꿈꾸었으나 실현치 못하고 죽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641~660) 즉위 후 '일본서기' 642년 기록에 "모후인 ‘國主母’가 죽자 왕자 '교기'를 비롯 그 여동생과 고위관리 40여명을 섬으로 추방시켰다"는 내용의 ‘국주모‘가 지금의 國母격인 정실왕후 사탁선화였으나 아들이 없거나 늦게 낳아 다른 왕후 소생인 의자왕이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632)되고 왕위를 계승한 것은 아닐지?
의자왕이 왕족 41명을 좌평에 임명해 실권을 빼앗은 것처럼 사탁왕후 아버지인 좌평 가문이나 의자왕은 대립관계가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봉안기 안치 21년후 멸망한 ‘백제 佐平’이 통일신라와 고려조를 거치면서 640년후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는 ‘신라 眞平’으로 둔갑돼 기록에도 없는 신라 선화공주가 되지 않았을까?/고재홍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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