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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화공주는 '백제인'이 아닐까?)
    <칼럼사설수필> 2009. 4. 4. 11:52

     

     

     

     

     

     

    (선화공주는 '백제인'이 아닐까?)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 나온 ‘사탁적덕’ 딸이 뜨거운 학술논쟁을 제공했다. 신라 선화공주는 언급조차 없다. 이에 ‘선화공주=사탁적덕의 딸’임을 조심스레 제기한다.




     

    “선화공주가 백제인일 수 있다”는 주장은 ‘봉안기’ 이전 일부 학자들이 제기한 바 있다.

     

     

     

     

    百濟는 漢城백제(BC18~475)와 熊津백제(475~538) 및 泗沘백제(538~660)로 나뉜다.




     

    고주몽의 아들, 온조가 세운 백제는 475년 장수왕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21대 개로왕(이하 재위연도, 455~475)이 살해당하자 웅진으로 천도한 文周王(475~477)은 扶餘·解·眞씨 등 부여족 계통 舊귀족과 沙·燕씨 등 남부토착 마한계 암투와 반란으로 살해되고 동생 곤지와 문주왕 아들인, 23대 三斤王(477~479)도 살해된다.




     

    곤지 아들 東城王(479~501)은 苩.沙.燕씨 등 웅진 지배세력을 등용해 한성에서 내려온 귀족과 균형을 꾀하며 귀족 발호를 막고 왕권강화에 전념했다.




     

    특히 백제를 22개로 나누어 주로 왕족이 담로장(分國王)으로 통치하는 담로제를 확립했는데 6세기 중엽 이전인 '웅포 입점리고분'에서 왕족만이 사용한 금동제 장신구 출토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공주’라는 용어도 국왕의 딸만을 뜻하지 않아 봉안기 ‘大王陛下(무왕)‘에 버금가는 佐平의 딸, 사탁왕후를 결혼전 선화공주로 칭했을 가능성이 짙다.




     

    고구려 남하에 493년 신라 소지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한 동성왕도 좌평 苩加에 살해된다. 武寧王(501~523)이 백가세력을 토벌하고, 사비 천도는 26대 聖王(523~554) 16년(538) 이뤄졌다.




     

    사비를 전·후·상·중·하 五部로 나누었는데 화폐로 추정되는 금제소형판에는 '“중부 덕솔(16관등 중 4품) 지율이 금 한 덩어리를 보시한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와, “하부 비치부와 부모처자가 함께 보시한다(下部非致夫及父母妻子同布施)”는 銘文이 있어 관심을 끈다.




     

    중.하부는 사비 행정구역으로 추정돼 “서동요 주인공이 무왕이 아닌 웅진시대 무령왕이다”는 주장에 반박자료가 될 듯하다.




     

    진흥왕과 연합한 성왕은 진흥왕에 553년 한강하류를 빼앗기자 아들 ‘餘昌’과 신라를 정벌하다 관산성(옥천)에서 전사한다.

     




    왕권강화는 수포로 돌아가고 ‘8성 대족’이나 귀족중심의 ‘좌평제’에 좌우되고 잦은 싸움과 국제외교 실패로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여창이 즉위한 威德王(554~598) 시대가 지나고, 惠王(598~599)과 法王(599~600)을 거쳐 薯童이 즉위한 30대 武王(600~641) 시대를 맞는다.




     

    불과 2년여만에 네 명의 국왕이 지배한다. 위덕왕이 阿佐태자를 일본에 보낸 이듬해 동생 혜왕의 즉위나 혜왕과 법왕의 짧은 기간 사망은 왕권붕괴와 귀족암투 및 정변이 연상된다.




     

    극도의 혼란을 딛고 무왕의 42년 통치는 신라 진평왕이 아닌 엄청난 백제귀족의 확고한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삼국유사 외에 삼국사기와 화랑세기는 물론 일본과 중국 사서에도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결혼기록이 없다는 점은 바로 백제 안의 결혼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捨淨財造立’伽藍‘<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라는 내용도 선화공주와 사탁왕후가 동일인임을 내포한다.




     

    삼국사기나 수서(隨書)에는 법왕(餘宣)의 아들이 무왕이라 했으나 ’삼국유사‘는 “제30대 무왕 이름은 璋(장)으로 과부인 어머니가 서울 남쪽 연못가에 살다가 연못의 龍과 정을 통해 낳았는데 서동이라 했으며 도량이 넓어 기량을 헤아리기 어려웠다”며 “마를 캐어 생활하다 진평왕 셋째 딸, 선화공주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美艶無雙)는 말에 서울로 가 ’서동요’를 퍼뜨려 차지했으며, 황금을 사자사 지명법사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신라궁중으로 보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했다.




     

    “무왕이 부인과 사자사로 가던 중 미륵삼존이 출현해 부인이 ‘大伽藍‘을 창건하기를 원하니 왕이 허락해 연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세웠는데 진평왕이 장인을 보내 도왔으며 지금도 그 절이 있다”고 했다. 말미에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했으나 여기서는 혼자 사는 여자(獨女) 아들이라 전하니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未詳)“고 했다.




     

    그러나 정변의 희생물이었을 법왕의 아들은 아닐 수 있다.




     

    최근 중국에서 발견된 당나라에 끌려간 의자왕의 태자, ’扶餘隆(융)’ 묘지명에 의자왕과 조부인 무왕은 나오나 증조부인 법왕의 이름이 없는 것도 이를 대변한다.




     

    아버지 龍과 아들 璋은 모두 왕과 남자를 상징한다. 미모가 출중해 궁 밖에서 법왕이 아닌 또 다른 왕의 눈에 띤 과부가 낳은 왕의 서자 목숨을 부지하러 숨어 살며 ‘마’를 캐 연명하다 미모가 뛰어난 ‘사탁선화’를 차지하기 위해 사비에서 서동요를 유포시킨 것은 아닐지?




     

    ‘배후세력 지원과 신분적 변화’를 의미하는 ‘흙처럼 쌓인 황금’을 사비궁궐이나 사비의 명문거족으로 현재 총리격인 좌평 사탁적덕에 보내 인심을 쌓아 사탁선화와 결혼해 왕위계승권자들이 몰락할 정도로 극심한 정변에 법왕이 희생된 후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닐지?



     

    봉안기의 ‘가람’과 삼국유사 ‘대가람‘은 너무 일치하고 眞平과 佐平은 한문은 물론 발음까지 유사하다. 미륵사에 제석사, 왕흥사, 왕궁성을 세우려면 현재도 兆 단위 재력가가 있어야 가능하다. 무왕과 사탁적덕 집안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2009. 04. 06. 月>

     

     

    /편집부국장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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