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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풍습-놀이로 본 우리문화논술(설.문)독서도서詩소설수필연설 2009. 2. 26. 08:01
‘2009 책 읽는 대한민국’의 첫 시리즈로 ‘민속 풍속 이야기 20선’이 선보인다.
‘민속 풍속 이야기 20선’의 취지는 민족의 명절 설과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민속의 의미를 되짚어 보자는 것이다.
20권의 책은 주영하(민속학)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와 정종수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의 조언을 바탕으로 동아일보 문화부 출판팀이 선정했다.
책들은 세시풍습과 통과의례, 의식주, 구비문학 등으로 갈래를 친다.
김명자(민속학) 안동대 교수가 전국을 누비며 고유의 세시풍속을 조사해 정리한 ‘한국 세시풍속 1’(민속원)과 김광언 인하대 명예교수의 ‘민속놀이’(대원사), 이문성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이 18, 19세기 풍속을 사료에서 뽑아낸 ‘조선후기 풍속의 재구성’(한국학술정보) 등은 세시풍습에 관한 책이다.
통과의례와 관련해서는 한국인의 탄생에서 죽음을 민속 측면에서 살핀 정종수 국립민속박물관 과장의 ‘사람의 한평생’(학고재), 삼신아씨에서 남근 숭배까지 고유문화의 뿌리를 찾는 서정범 경희대 명예교수의 ‘한국문학과 문화의 고향을 찾아서’(문학사상사), 박태호 한국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 정책연구실장이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의 장례문화를 추적한 ‘장례의 역사’가 있다.한국복식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석주선 전 단국대 교수가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우리 옷 변천사를 살피고 유물 이야기를 담은 ‘민속학자 석주선의 우리 옷나라’(현암사), 강영환(건축학) 울산대 교수가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비롯한 사료를 망라해 주거문화를 시대별로 정리한 ‘새로 쓴 한국 주거문화의 역사’(기문당), 신명호(사학) 부경대 교수의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돌베개) 등은 의식주를 다룬다.
구비문학과 관련해서는 도깨비를 민속학적으로 분석한 김종대(민속학) 중앙대 교수의 ‘저기 도깨비가 간다’(다른세상), 민속과 지명에 얽힌 의미를 마을신앙을 중심으로 풀어낸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한국 대왕신앙의 역사와 현장’(일지사),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의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사계절) 등이 독자들과 만난다.
황장석 기자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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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한국세시풍속1
《“세시풍속은 전국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지역별 차이가 없이 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세밀히 들여다보면 마을의 성격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나타난다.”》
‘나무 장가 보내기’-‘장꽁’ 아시나요
이 책은 민속학자인 저자가 1970, 80년대 농촌 분위기가 물씬했던 서울 송파지역, 장승마을로 알려진 경기 광주시 엄미리 등 전국 민속현장을 찾아다니며 현지 조사한 자료들을 정리해 엮은 것이다.
저자는 같은 현장을 몇 년에 걸쳐 수십 차례 찾으면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녹취, 촬영을 하며 자료를 수집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마을의 현황, 생업, 문화적 배경 등과 함께 각 달의 고유한 세시풍속을 정리했다.
설날에 이뤄지는 차례, 세배와 덕담이나 정월 대보름의 더위팔기, 달맞이 등 우리에게 익숙한 세시풍속들 외에도 각 지역만의 특색 있는 풍속이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풍속들의 면면까지 살펴볼 수 있다.
불과 20∼30년 전이지만 사진 속 풍경이나 다양한 세시풍속에 관한 설명에서 현재 문화적 환경과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저자가 현지 조사를 한 1970년대 서울 강동구 석촌동(1981년 기준) 마을은 탈놀이, 송파산대놀이 등이 전승되고 있는 지역이다.1970년대 말부터 송파 전역에 큰길이 나고 아파트, 주택 등이 들어서며 도시화됐지만 저자의 조사가 마지막으로 이뤄졌던 1981년까지만 해도 전 지역의 40%가 농사짓는 지역일 만큼 농촌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풍속 중에는 당시에도 사라지고 없어 나이든 주민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는 것도 많다.
‘원일소발’은 머리를 빗을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뒀다가 정월 초하룻날 태우는 풍속인데 잡귀를 쫓기 위한 것이었다.
정월 대보름에 하는 ‘장꽁’은 박달나무로 만든 주먹만 한 나무토막을 길에 놓고 사람을 향해 막대기로 치는 놀이. 규칙 없이 무지막지하게 치며 상대편 집까지 쫓아가 항복을 받으면 끝나는데 남의 집 장독을 치는 사고가 빈번했다고 한다. 모두 지금은 사라진 풍속이다.
경북 예천군의 골마을은 예천읍 외곽에 있는 농촌이다.저자가 1982년에 현장 탐사한 이곳에서는 2월 초하루면 하늘에 있는 영둥할마이(영등할머니)가 지상에 내려온다고 믿는다.
며느리를 데려오면 비가 내리고 딸을 데려오면 바람이 분다고 하는데 이때 주부들은 새벽 일찍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평안과 풍작을 빈다.
이 물은 인적 없는 새벽 우물가에서 떠오는데 가장 먼저 뜨는 물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잠을 설치며 첫새벽부터 물을 뜨러 우물에 간다고 한다.
7월 열사흗날은 ‘풋굿날’이라고 해서 풍농을 기원하는 마을 잔치가 벌어진다.이날은 마을에 있는 우물의 물을 퍼내서 깨끗이 치우는데 우물이 깨끗해지는 것은 물론 마을의 운수도 좋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물 주변에 있는 나무에 떡 밥 과일 등 제물을 장만해 와 아이의 장수를 빌기도 한다.
산촌인 강원 원주시의 금대리 일론마을은 정월 보름날 아침 ‘나무 장개(장가) 보내기’ 풍습이 있다.“가지 가지 열어라” “눈 눈 열어라”라고 주언(呪言)을 한 뒤 두 가지 사이에 돌멩이를 넣는다.
그리고 숟가락에 밥을 떠서 나무 앞에 놓고 먹이는 시늉을 하면 그해 과일 열매가 탐스럽고 풍성하게 열린다고 한다.
과수가 적어지며 이런 풍속도 사라졌다.
오랜 연구의 결실을 정리한 이 책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게 장점이다.지역마다 다채로운 세시풍속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박선희 기자
동아일보------------
[민속 풍속 이야기 20선]<2>민속놀이
윷놀이, 남북미 원주민도 하더라
흔히 ‘민속놀이는 우리 고유의 놀이’라고 여겨진다.
국립민속박물관장을 지낸 민속학자 김광언 인하대 명예교수는 이런 생각이 틀렸다고 말한다.
윷놀이를 보자. 우리 윷놀이의 기원은 6세기. 중국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 “투호, 저포(樗蒲) 등의 놀이가 있고 특히 바둑을 즐긴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저포의 기원은 인도의 파치시다.
왕, 코끼리, 말, 양으로 불리는 말 4개를 십자꼴로 벌여 놓은 24개의 밭(윷판, 장기판, 바둑판에서 말이 머무는 자리)에서 옮긴다.
말은 중심부에서 출발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왼쪽에 이른다.
등이 둥글고 바닥에 홈이 파인 조개껍데기 7, 8개를 던져서 나온 결과에 따라 말을 움직인다.
우리 윷처럼 상대 말의 자리에 이르면 그 말을 잡고 잡힌 말은 처음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놀이는 스리랑카 미얀마로 퍼져갔고 서쪽으로 페르시아, 팔레스타인을 거쳐 스페인, 소말릴란드(아프리카 동부 지역에 있는 반도)까지 퍼져갔다. 동쪽으로는 중국으로 전파돼 남북조시대(4∼6세기)에 저포가 크게 유행했다.흥미로운 점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도 윷과 흡사한 놀이를 즐겼다는 것.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사우스웨스트박물관에는 여러 형태의 윷이 전시돼 있으며 130여 원주민 부족이 윷놀이를 즐겨 대륙 전체에 퍼졌다는 게 현지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미국 오클라호마 주의 카이오와족 윷은 우리 윷과 똑같다. 짝이 4개고 단면이 반달꼴이다.윷이 나오면 한 번 더 던지고 누운 것이 하나면 한 밭, 둘이면 두 밭, 셋이면 세 밭을 가며 같은 밭에서 만나는 상대의 말을 잡는 것까지 똑같다.
심지어 남아메리카 사람들도 윷놀이를 즐겼다.
저자는 “파라과이 볼리비아에 사는 차코족의 윷은 우리 윷과 모양이 똑같을 뿐 아니라 이름도 윷이라고 불렸다”고 말했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 민속놀이의 기원을 다른 민족의 민속놀이와 비교하며 밝혔다.세계사적 관점에서 민속놀이의 기원을 추적한 것이다.
저자는 우리 민속놀이 문화가 인도 근처에서 태어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들어온 북방 계열과 중국의 남서부에서 발생해 벼농사와 함께 들어온 남방 계열로 나뉜다고 말한다.
정월 대보름날 잡귀를 쫓고 복을 맞아들이기 위한 사자놀이는 인도, 서역(중국 신장 성 위구르 자치구), 당나라를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봉산탈은 눈이 지나게 강조되고 코가 우뚝 솟은 형태가 중앙아시아와 이란 사람들의 얼굴을 닮았다.
윷, 씨름, 수박(손을 써서 겨루는 놀이), 투호, 쌍륙(주사위를 던져 말을 옮기는 놀이)도 북방 계열의 놀이다. 벼농사와 관련된 강강술래, 줄다리기, 소싸움, 닭싸움, 횃불싸움, 팔매싸움은 남방 계열의 놀이다.
노는 방법을 해설한 수준을 넘어 민속놀이가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엄밀하게 분석한 책이 없어 이 책을 쓰게 됐다는 노(老)학자는 우리 민속놀이를 347가지로 나눈 뒤 노는 사람의 연령대, 놀이 유형, 목적, 시기, 장소를 기준으로 나눠 분석했다.
윤완준 기자
동아일보------------------------------------------------
[민속 풍속 이야기 20선]<3>저기 도깨비가 간다
《“도깨비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정다운 이름이다. (도깨비는) 어떤 면에서는 장난꾸러기 친구 같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게 없는 신통한 능력을 지녔기에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요놈의 도깨비는 어디서 툭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일까?”》
조선 도깨비와 日오니의 차이는?
도깨비 얘기 한번 듣지 않고 자란 사람은 드물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것이 중앙대 민속학과 교수인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도깨비가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였는지 제대로 이해해보자고 손을 내민다.
흔히 도깨비 하면 원시인 같은 옷에 뿔이 나고 손에는 못이 박힌 철퇴를 들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는 일본에서 들어온 요괴 오니(おに)의 형상을 본뜬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일본 민담 ‘혹부리영감 이야기’가 초등학교 국어책에 실리면서 그 삽화로 쓰인 오니가 도깨비로 둔갑한 것이다.
저자는 일제가 우리의 ‘도깨비방망이 얻기’와 이야기 구조가 동일한 혹부리영감 이야기를 들여온 것은 한일 강제합방의 당위성을 조작하려 한 것이라고 말한다.
내선일체(內鮮一體) 논리를 주입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이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민족이라는 증거로 내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깨비방망이 얻기와 혹부리영감 이야기는 구조는 같지만 주제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도깨비방망이 얻기에는 ‘효(孝)’와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두 가지 교훈이 있지만 혹부리영감 이야기에는 권선징악만 있을 뿐이며 이는 일본 동화들이 갖는 일반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도깨비가 처음 글 속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시대부터다.1447∼1449년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보상절(釋譜詳節)’에 도깨비에 대한 글이 있다.
저자는 이렇듯 책에 도깨비가 등장할 정도면 당시 조선사회에서 도깨비는 익숙한 존재였을 것이라고 본다.
도깨비방망이 얻기의 원조는 신라시대 ‘방이설화(旁G說話)’라고 한다.당나라 때의 문헌인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실린 방이설화는 가난하고 착한 형 방이가 ‘붉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휘두르는 금방망이를 얻어 부자가 되자 그 얘기를 들은 못된 동생이 똑같이 금방망이를 얻으려다가 아이들에게 붙잡혀 혼이 난다는 내용이다.
저자는 여기서 붉은 옷을 입은 아이가 도깨비라고 말한다.
도깨비는 성별로 구분하자면 남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많은 도깨비 이야기에는 도깨비가 여성과 술을 좋아하는 데다 씨름을 좋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제주도에서 전승되고 있는 영감놀이에서 심방(무당의 방언)이 구연하는 신화인 영감본풀이를 보면 도깨비를 ‘만고의 오입쟁이’로 표현한다.도깨비가 과부를 찾아가 성관계를 맺고 재물을 던져준다는 ‘도깨비 만나 부자 되기’ 이야기도 많다.
또 도깨비는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는 사람들과 곧잘 씨름을 하는 존재다.
자신이 좋아하는 돼지고기와 개고기를 사들고 오는 남성들과 고기를 판돈으로 걸고 씨름을 한다.
저자는 씨름이 대표적인 민속놀이였고 씨름판에서 우승한 사람이 여성들의 흠모 대상이 됐던 시대적인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고 해석했다.
풍어를 기원하며 바다의 도깨비에게 고사를 지냈던 전남 무안 해제 지방의 어장고사, 충남 홍성과 태안 등 서해안에서 어민들이 새해를 앞두고 동네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 도깨비불이 보이는 곳을 확인하는 도깨비불보기 등 도깨비와 얽힌 우리 전래의 풍습이 흥미진진하다.
황장석 기자
동아일보-----------
[민속 풍속 이야기 20선]<4>한국의 전통연회
《“우리의 전통연희는 주변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그 독자성과 우수성을 갖춰 왔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은 중국과 서역의 악(樂)을 받아들여 우리의 예술 생활을 풍부하게 가꿔 나간 것으로 나타난다. 나아가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외래 연희를 수용해 연희 문화를 풍부하게 영위하면서 그것을 우리 취향에 맞게 개작하고 한국화해 새로운 연희 문화를 창출해 왔다.”》
서커스를 닮은 삼국시대 산악-백희
불교와 유교, 한자 등 공동의 문화유산을 가진 동아시아 국가들은 연희(演戱) 문화에서도 동일한 뿌리를 바탕으로 각각의 연희 문화를 만들었다.
저자는 “산악(散樂) 또는 백희(百戱)로 불리는 공동의 연희가 동아시아 각국에서 발전되고 재창조됐다”고 말한다.
산악은 중국 고대의 악무(樂舞)를 지칭하는 용어로 원래 주나라의 민간 악무를 가리키던 말이다.
백희는 고대의 악무잡기(樂舞雜技)에 대한 총칭이다.
산악과 백희의 종목은 오늘날의 서커스와 비슷하다.
방울을 여러 개 공중에 던졌다가 받기, 줄타기, 타오르는 불을 밟고 걷기 같은 곡예와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가 있었다.
칼 삼키기, 입에서 불 토해내기 같은 환술(幻術)과 노래 부르고 춤추는 가무희도 빠지지 않았다.
산악, 백희의 전통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대표적 전통연극인 노가쿠(能樂), 노쿄겐(能狂言), 가부키(歌舞伎) 등을 탄생시켰다.
한국에선 삼국시대에 산악과 백희가 성행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잡희, 산대잡극, 가면극, 판소리 등으로 발전했다.
전통연희 연구에 몰두해온 저자는 230컷에 이르는 풍부한 도판을 통해 한국 전통연희의 생성 과정과 시대별 연희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이 중국, 서역과 연희를 교류한 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잘 나타나 있다.저자는 “고구려 각저총의 벽화에 그려진 씨름꾼 가운데 매부리코를 한 서역인이 있고, 안악3호분 벽화 중 가면희도(假面희圖)에도 외국인으로 보이는 춤꾼이 등장하는 등 고구려의 대외 교섭이 매우 활발했다”고 설명한다.
한국은 중국의 연희를 받기만 한 게 아니라 중국에 전하기도 했다.신라의 ‘입호무’와 ‘신라박’이라는 종목이 대표적이다.
입호무는 조금 떨어진 두 개의 탁자 위에 항아리를 하나씩 두고, 그중 한 항아리로 연희자가 들어갔다가 다른 편으로 나오는 환술이고, 신라박은 동물 가면을 착용한 가면희다.
당나라, 서역과 활발히 교류한 통일신라 때는 처용무에서 교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저자는 “아직 이렇다 할 정설이 없으나 깊이 파인 눈과 높은 코, 기이한 의관에서 처용을 서역 계통의 외래인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최치원은 ‘삼국사기’ 잡지에 당시 연희들을 본 감상을 ‘향악잡영 5수(鄕樂雜詠五首)’라는 시로 남기기도 했다.
‘몸을 돌리고 팔을 흔들며 방울 놀리니/달은 돌고 별은 떠다녀 눈 안에 가득하네/의료의 재주인들 이보다 나으랴/동해 바다 파도 소리 잠잠하겠네.’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중시하는 기풍으로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성대히 거행했고, 송나라로부터 아악과 교방가무희 등 선진문화를 수용했다.조선시대에 들어선 유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전통연희에도 반영됐다.
저자는 “불교와 연관 있는 연희는 대폭 축소된 대신 과거 급제자 축하 잔치인 삼일유가(三日遊街)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같은 것을 성대히 벌였고 민간의 경제력이 높아짐에 따라 사대부가의 잔치에서 연희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금동근 기자
동아일보-----------
[민속 풍속 이야기 20선]<5>민속학자 석주선의 우리 옷 나라
《“옷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다. 우리나라 옷을 보면 본래 우리는 겸손한 백성이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은 전통적인 우리 복장이 서구식으로 많이 바뀌었다. 윤리적인 면에서 퇴폐성이랄까 방종함이 드러나고 있고 한편으론 개성이 강해졌다는 것도 눈에 띈다.”》
겸손한 민족이 지닌 ‘옷의 역사’
이 책은 평생 우리 옷을 연구하고 유물을 모은 전통 복식사의 개척자 고(故) 석주선 선생의 글을 담았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옷의 역사를 비롯해 매듭 은장도 흉배 노리개 등 장신구를 소개했다.
저자는 의복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완성해 가기 위해 필요한 요건이라고 말한다.
1911년 평양에서 태어난 저자는 일본에서 옷을 공부하고 광복 이후 국립과학박물관에서 일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한 줄의 역사라도 ‘∼일 것이다’가 아니라 ‘∼이다’라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문헌을 뒷받침하는 유물을 모았다.
저자는 유물을 쫓아 옛 무덤을 찾고 시골 마을을 누비고 골동품 가게를 뒤졌다.
간곡한 부탁 끝에 주인이 옷을 내오면 옷에 큰절을 올리고 흰 장갑을 낀 채 조심스럽게 다뤘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돈은 모두 전통 옷을 수집하는 데 썼다.
“섬유는 본래 종이보다 수명이 짧고 약하다. 그래서 옛날 섬유는 아기 다루듯 해야 한다. 한 번 바람을 맞히는 것, 광선이나 햇볕에 노출되는 것…. 이런 소소한 일로도 옷감이 힘없이 바삭바삭 부서져 내린다.”
저자는 예닐곱 살 때 평양 냇가에서 주운 구멍이 뚫려 있는 조약돌을 보면서 ‘물도 돌을 뚫는데 사람이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어디 있나’ 하는 다짐과 함께 이 돌을 손가방 속에 지니고 다녔다.저자는 “옷에 매달려 한평생을 살아온 나 자신을 한복으로 표현한다면 소박한 모시옷일 게다.
깨끗이 빨아 풀 먹여서 빳빳하게 다림질한 옷, 눈같이 희고 날렵한 동정을 단 옷이기를 늘 바라며 살았다”라고 적고 있다.
저자는 우리 옷은 북방계 복식권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다.
북방계 복식은 상의하고(上衣下袴·윗옷과 바지)를 기본으로 하는 분할형 양식이다.
유라시아 대륙 초원지대에서 살았던 기마 유목민의 복장으로 추운 날씨와 유목 생활에 맞는 실용적인 형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치마, 저고리, 바지, 두루마기가 그 예다.
고려 초 문무관의 공복(公服)은 당나라 식에 가까웠는데 나중에 원나라 식으로 바뀌었다.왕은 상복으로 오사모(烏紗帽·검은 실로 만든 모자)에 소매가 좁은 포를 착용하고 종묘에 봉사할 때는 면류관을 썼다.
평소에는 검은 모자에 흰 모시 도포를 입어 백성과 별 차이가 없었다.
조선시대 복식은 문헌에 따른 유물이 일부 남아 있다.고려 말의 백저포(흰 모시로 만든 포), 세조 때의 적삼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광해군 비의 북청색 비단 저고리는 전체 길이와 소매가 길고, 깃과 섶이 넓으면서 당코(여자 저고리 깃의 뾰족하게 내민 끝)로 되어 남자 저고리와 흡사하다.
영조 때 사회가 안정되고 문화가 번성하면서 전통 복식은 외래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전통 한복의 미도 이때 창출됐다.
저자는 우리 옷의 아름다움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변화를 주지 않고도 전통의 아름다움을 고상한 배색, 아름다운 곡선으로 나타냈다.바탕 선을 모두 직선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정적인 면을 그윽하게 안으로 지녔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동아일보-----------------------------------------
[민속 풍속 이야기 20선]<6>사라져가는 우리의 오일장을 찾아서
축제와 여론마당, 시끌벅적 5일장
이 책은 1993년 5월에서 1995년 2월 사이 열렸던 한국의 오일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같다.
모두 4권으로 구성된 책은 각 지역의 오일장을 중심으로 해당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 형태와 사람들의 삶, 특산물과 별미 음식 등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들은 서강대 사학과 출신 동기 3명으로, 당초 땅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위해 지역문화를 찾아다닐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지역문화의 집산처(集散處)이며 반영처가 오일장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집필 작업의 행로를 바꾼다.
첫해 경기, 충남, 충북 정도만 돌아다니자고 결심했던 저자는 출판사 사장의 권유로 이듬해부터는 아예 장돌뱅이처럼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때 맞춰 나오는 배추 무 등의 채소들이 장터의 앞길을 차지하는 나주장터부터 남대문시장(서울), 국제시장(부산), 서문시장(대구)과 같은 역할을 하는 전북 전주의 남쪽 관문 풍남문에 있는 남문시장, 제주십경의 하나인 ‘사라낙조’를 만끽할 수 있는 제주장…. 팔도를 유람한 저자는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오일장의 사소한 풍경도 놓치지 않았다.
살아있는 현장의 소리를 들려준 장꾼들과 나물 한 움큼을 더 팔기 위해 각박한 생업 전선에 뛰어든 할머니들의 목소리도 담겼다.
저자의 말처럼 전통사회에서 오일장은 일상의 생활 리듬을 좌지우지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생활의 터전이었다.
지금처럼 7일을 1주일로 여기지 않았던 옛날 사람들은 장날을 휴일로 여겼다는 것.
장날은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여흥을 돋우는 씨름판이 열리거나 놀이꾼들이 모여들었기에 자연스러운 축제날이 됐다.
안면을 익히고 혼담을 교환하는 혼인권(婚姻圈)이기도 했다. 사회 문제와 관련한 집회를 열어 여론을 형성하는 마당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오일장은 “무시(無市·장이 없는)날에도 장이 선다”는 말처럼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저자들은 입을 모은다.저자는 특히 한국산이 아닌 외국 농산물이 버젓이 등장하는 오늘날 시장의 풍경에 더욱 속상해한다.
이들은 “구한말 일본의 경제 침략이 맨 먼저 사람들의 눈에 띄었던 곳도 장터였다”며 “그동안 없었던 일본 상품이 난데없이 우리 장터에 등장했고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의 침략 야욕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그래서 단순히 오일장의 풍경이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기대했던 저자들은 1000년 넘게 이어져 오면서 선조들의 삶이 깃든 오일장을 1990년대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기록하는 작업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 책은 14년 전에 처음 나왔다.책에서 소개하는 내용들이 이제는 희미해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읽는 인상을 주지만, 오일장이 사라진 현실에 오일장의 현장을 기록했다는 저자의 말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염희진 기자
동아일보-----------
[민속 풍속 이야기 20선]<7>새로 쓴 한국 주거문화의 역사
《“경북 경주 강동면 양동리 관가정(觀稼亭) 대청의 구조 부재들은 장식이 거의 없는 간결하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준다. 주두(柱頭)와 초익공(初翼工)을 사용한 것이 장식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아치형 곡선재를 대들보로 사용해 대공 없이 종도리를 받치는 형식도 상류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다. 청백리로 명성을 얻었던 대학자인 우재(愚齋) 손중돈의 사대부적 품성이 느껴진다.”》
집을 완성하는 건 깃들여 사는 사람
건축을 완성하는 주체는 건축가가 아니라 공간 안에 들어가 삶을 짓는 사람들이다.
울산대 건축학부 교수인 지은이는 머리말에 밝힌 대로 “한국 주거사의 체계를 수립하는 일에 학자로서 인생을 건” 인물. 한국 땅의 주거문화를 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꼼꼼히 살핀 그는 건축물에 대해 딱딱한 설명을 늘어놓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공간 안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생생한 분석이 이 책이 전하는 화두다.
위 인용문에서 주두는 기둥머리, 초익공은 소 혀 모양 장식이 하나인 기둥머리 덧댐 나무, 대공은 들보 위에 세워서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 종도리는 마루를 받치는 가로지름 나무를 뜻한다.
전문용어에 대한 주석이 부족한 점은 아쉽지만, 전통 주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하나하나 말뜻을 짚으며 공간의 모양새를 상상하는 과정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시대별로 나뉜 11개 장의 말미에는 해당 주거유적의 대표적 사례들을 덧붙였다.
서울 강동구 암사동의 신석기 주거유적,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수졸당 등 수천 년을 오르내리는 안내가 무심히 지나치던 주변 공간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경주 양동마을에 대한 설명에서는 건축물보다 사람을 먼저 들여다보는 저자의 시선이 읽힌다.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씨족마을의 형성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
손중돈과 이언적을 필두로 한 두 집안이 이곳에 뿌리내리게 된 사연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공간 구성 디테일에 대한 묘사로 연결된다.
“1540년에 건립된 향단(香壇)은 이언적이 경상감사 시절에 아우인 이언괄에게 지어준 건물이라고 전한다.
가까이 세워진 행랑채와 안채가 지극히 좁은 통로로 연결돼 동선을 은밀하게 만들었다.
거대하고 위엄 있는 외양과 달리 내부는 폐쇄적이다.
중앙에 위치한 방에는 이언적의 어머니가 기거했다.
행랑채가 그 앞을 가로막아 외부의 시선을 차단한다.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 주택이 양식적 규범에서 벗어나 건축주의 요구를 반영했음을 보여준다.”
풍성했던 이 땅의 주거문화를 차례차례 확인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진다.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기술한 ‘온돌의 결점’에는 삶의 공간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 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비효율적 연료 소비, 목재 남벌 문제, 구성원 개별 공간 확보의 어려움 등에 대한 연암의 치밀한 지적은 현대 건축전문가의 분석과 비교해 모자람이 없다.
부록에는 139개 국가지정 주거문화재의 소재지를 간략하게 표로 정리해 실었다. 전국의 전통 주거 유적을 답사하려는 이들에게 유용할 길잡이다.서울 종로구 평동 경교장에서 저자는 해외 건축양식의 적용 방법을 고민했던 일제강점기 건축가들의 자취를 찾는다.
‘백범 김구가 암살당한 곳’이라는 익숙한 사연을 벗어난 시각이 신선하다.
손택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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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8>한국의 샤머니즘
《“서양화와 산업화의 길로 정신없이 달려가면서 우리들의 재생에 대한 믿음은 크게 위축 변질되고 말았다. 굿의 이해는커녕 그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만연해 있다. 그것은 마음의 본향을 부정하는 상황임을 말해준다. 한국 무의 저승은 사계절 꽃이 피고 지는 우리의 본향(本鄕) 세계인 것으로 밝혀졌다. 거기에, 우리 마음에 조상이 산다.”》
굿, 민족의 신화와 상상력이 담긴…
샤머니즘은 17세기 후반 러시아 쪽에서 시작된 용어다. 당시 러시아인 탐험가들이 시베리아 퉁구스 부족들 사이에서 ‘샤먼(shaman)’이란 주술사를 접하고 소개했다.
우리 표현으로 하자면, 샤먼은 무당이며, 샤머니즘은 무속(
巫俗) 혹은 무 정도가 적당하다.
한국에서 샤머니즘은 오랫동안 핍박의 대상이었다.
고려 때까지도 무속은 불교 유교 도교 등과 공존했으나, 성리학을 내세운 조선 왕조는 무속을 조직적으로 천대했다.
여기에 한국 전통신앙을 몰아내고 민족정신을 꺾길 원했던 일제의 강점기와 서구 합리주의를 내세워 무속을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현대사회에 이르며 무속은 멸시와 비판의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종교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이런 냉대는 불합리하다. 인류 문화는 어떤 것이든 일정한 의미를 가지며 소중하다.
저자가 볼 때 한국에서 굿은 한국 샤머니즘의 정점이다. 때문에 한국의 가장 오래된 기층종교의 발현이자 예술성과 축제성, 신화적 요소가 고루 갖춰진 복잡한 전통으로 굿에 집중한다.
“굿은 덜 조직적이고 산만한 것처럼 보이나, 신내림이 왕성하고 인간 감정의 표현이 직접적이고도 생생하다.
축제판처럼 흥분의 기운이 감돌고 어수선하기도 하나, 신화가 펼쳐지는 카오스의 세계란 원래 그렇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나름의 엄밀한 구조와 원리가 작용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신령과 직·간접적으로 만나는 종교체험의 세계이다.”
책에 따르면 굿은 여러 종류가 있고, 운영 방식도 조금씩 다르다.명칭만 봐도 망자의 넋을 하늘로 보내는 망자천도굿이 진오기 또는 새남굿(서울 경기), 씸깃굿(전라), 오구굿 또는 시왕굿(동해안 지역) 등으로 지역에 따라 바뀐다.
저자는 이 가운데 한국 사회 문화의 중심이라 할 만한 서울 경기 지역에서 시행된 대표적인 굿, 천신굿과 새남굿을 분석한다.
천신(薦新)굿이란 글자의 뜻 그대로 계절의 새로운 소산을 신령에게 올리는 굿이다.지역과 계절에 따라 ‘꽃맞이굿’ ‘잎맞이굿’ ‘햇곡맞이굿’ ‘신곡맞이굿’ ‘단풍맞이굿’ 등으로 불리는 것들이 모두 천신굿이다.
비슷한 양식의 재수굿이 서민들이 주로 하던 굿이라면, 천신굿은 상류층이나 부유층이 격식을 갖춰 제대로 놀던 것이다.
반면 새남굿은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망자를 천도하는 굿이다.‘새남’이란 말 자체에 서방 극락세계에서 ‘살아나길’ 염원하는 재생(再生) 신앙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굿은 많은 레퍼토리에 화려하고도 정교한 구성을 자랑한다.
여기에는 한국 무속에 담긴 내세관(來世觀) 내지 저승관 또는 지옥 및 영혼 관념이 잘 표현돼 있다.
저자가 이렇듯 굿에 관심을 보인 것은 굿 자체에 한국인 마음의 본향이 스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여기서 마음의 본향이란 그리움과 신화와 상상력의 세계이다. 꽃과 재생이 살아 숨쉬는 ‘새남’의 세상이다.
“마음의 본향이 살아나고 거기에 꽃과 재생의 상상력이 싹트면 한국 자연의 본향도 금수강산으로 살아날 것이다.한국 문화 주체성과 신명을 되찾아야 21세기 한국인 가치관도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정양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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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9>한국의 신화
《“신화는 신의 집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금방 폐가가 되듯이, 신이 죽은 곳에 그의 정주처인 신화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신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여기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신화는 사실이 아니라 상징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의 신화를 통해 민족의식의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상징을 읽어내야 한다.”》
건국신화로 본 ‘문화적 DNA’
개천절은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이 개국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저자는 이처럼 믿기 어려운 신화를 근거로 국경일을 정하고 휴일로 삼은 것은 사회적 낭비일 수 있지만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신화의 상징적 가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신화는 역사, 학문, 종교, 예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문화적 산물이다.
신화를 들여다보면 거기에 새겨진 우리 민족의 문화적 DNA를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문헌에 기록된 여러 건국신화부터 남매가 남녀로 결합해 인류의 시조가 된다는 남매혼 신화 같은 구비설화까지 넘나들며 한국인의 세계관과 상상력을 탐색한다.한국의 신화 중에서 많이 보이는 것이 건국신화류. 단군 신화를 비롯해 주몽 신화, 혁거세 신화, 수로 신화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마한(馬韓)을 개국한 무강왕 신화, 제주의 삼성혈 신화들이 모두 건국신화에 속한다.
그러나 신화시대를 지나 역사시대에 접어들어서도 건국신화가 ‘생산’되기도 했다.고려건국과 관련해 ‘고려사’에 실린 ‘고려세계(高麗世系)’,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 설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가 그 사례.
저자는 건국신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다양한 타계관(他界觀·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보는 눈)을 살펴봤다.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은 천상, 지하, 수중, 해양 등에서 탄생했다.천상타계의 경우 강림과 승천, 지하와 수중타계의 경우 매장과 용출, 해양타계는 물결에 떠돌다 뭍에 닿거나(표착·漂着) 바다 또는 강을 건너는 형태로 나타났다.
한국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땅 속으로 간다고 믿기도 하고 하늘로 오른다고도 했으며, 바다를 건너 멀리 간다고 생각하기도 했다.“탄생과 죽음은 이질적인 두 공간 사이의 왕복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는 역설을 신앙체계로서 실현하여 영원한 삶을 향유했던 것이다.”
저자는 고전시가 ‘처용가’의 배경인 처용랑 설화를 들여다봤다.처용랑이 헌강왕을 따라 경주에 와서 왕을 보필했다.
왕이 처용에게 아름다운 아내를 줬는데 역신이 욕심을 내 동침을 했고, 처용이 잠자리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 가무를 하며 물러난다. 이때 부르는 노래가 ‘처용가’다.
처용의 가정은 국가, 미인 아내는 아름다운 신라에 대한 비유다.역신에게 능욕을 당한 상황은 신라가 적군에 의해 유린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거리에서 ‘처용가’가 불렸다면 신라가 망하리라는 뜻을 담았을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했다.‘처용가’가 참요(讖謠·미래의 어떤 징후를 암시하는 노래) 기능을 한 것은 처용랑 설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진시황의 중국 통일이 우리 신화에 미친 영향, 신화적 성소의 의미를 간직한 전남 화순군 운주사 천불천탑, 구비전승물인 송징전설(완도 지역을 중심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송징 장관에 얽힌 설화)과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웅 서사시 ‘송대장군가’ 비교를 통한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의 관계, 한국인의 미의식이 반영된 수로부인 이야기 등을 담았다.
조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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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0>조선후기 풍속의 재구성
사대부 나라의 해학적 뒷모습
그룹 ‘소녀시대’가 신곡 ‘Gee’의 게다리춤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게처럼 좌우로 오가면서 팔다리를 우스꽝스럽게 움직이는 장난기 어린 모습이 청순하게 다가온다. 게살 피자 광고에서 코맹맹이 소리로 덩치 큰 게 인형들과 함께 ‘오∼게살 몽∼땅’을 부르는 배우 문근영 씨는 또 어떤가. 성숙한 여성의 모습을 풍기지만 여전히 귀엽다. 두 여성 아이콘은 모두 옆걸음 치는 게의 이미지에서 귀여움과 장난기를 끌어냈다.
조선후기 서민문학과 풍속화를 씨줄과 날줄 삼아 당시의 시정풍속을 재구성한 이 책에 따르면 게는 질펀한 육담(肉談)의 대상이었다. ‘청구영언’에 실린 한 사설시조에 대한 풀이를 보자. 게장 파는 장사치와 여인이 펼치는 대화로 구성된 이 사설시조에서 게의 외모를 표현한 ‘외골내육(外骨內肉) 양목(兩目)이 상천(上天)’하는 표현은 남성 성기를 빗댄 표현이었다. 게의 움직임을 묘사한 ‘전행(前行) 후행(後行) 소(小)아리 팔족(八足) 대(大)아리 이족(二足)’은 또 어떤가. 작은 발 8개는 한 몸이 된 남녀의 팔다리 수를 의미하고 큰 발 2개는 그들의 머리 수라면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옆걸음질 치는 게라면 마땅히 좌행우행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 터인데 전행후행이란 표현은 또 웬 말이란 말인가. 유식한 척 한문 섞어 너스레를 떠는 장사치에게 “거북하게 말하지 말고 그냥 ‘게젓’이라 하려무나”라고 여인이 쏘아붙이는 종장은 비슷한 발음을 활용한 익살의 정점이다.
‘사대부의 나라’로 일컬어지던 조선이었지만 그 성(性)풍속은 이처럼 기발한 상상력이 깃들 만큼 노골적이면서도 해학적이었다.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최근 집중 조명을 받은 혜원 신윤복보다 그의 스승인 단원 김홍도가 더 노골적인 춘화(春畵)를 그렸음을 확인하는 것도 이 책의 재미다. 하지만 단원의 춘화보다 혜원의 ‘춘화 아닌 춘화’가 더 깊은 맛을 낸다. 저 멀리 폭포수가 웅덩이로 떨어지는 풍경을 배경으로 굳게 문이 닫힌 방문 앞에 주안상을 들고 주춤거리는 하녀를 그린 ‘사시장춘(四時長春)’. 얼핏 밋밋해 보이는 그림을 자세히 보자. 툇마루 위에 급하게 벗어놓은 두 켤레의 신발과 저택 기둥에 적혀 있는 ‘일년 내내 봄’이라는 글귀를 읽노라면 폭포수와 웅덩이를 그린 원경(遠景)의 숨은 뜻에 웃음이 절로 난다.
2부가 성풍속이라면 1부는 생활풍속을 다룬다. 춘화류(春花柳) 하청풍(夏淸風) 추월명(秋月明) 동설경(冬雪景)이라고 하여 한양 살던 사람들이 자주 찾았던 봄 꽃놀이, 여름 물놀이, 가을 달구경, 겨울 눈구경의 경승지가 각각 어디였고 그 놀이문화는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다. 판소리 학술상을 수상한 저자는 판소리를 통해 당시 서민들이 생계를 위해 얼마나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는지도 소개한다. 또 재테크의 일환으로 이자놀이가 성행했으며 오늘날 ‘다양한 여가활동’으로 통하는 잡기가 곧 노름을 의미했음도 확인할 수 있다.권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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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1>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한국사에서 현대사와 조선왕조의 단절 과정은 행복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왕실 문화의 연구, 정리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유구한 역사 속 우리 조상들이 창조했던 수많은 문화 중에서도 왕실문화는 그 정수에 해당한다.”》
잊혀진 왕실문화 한눈에
이 책은 조선의 왕실문화 면면에 대해 두루 다루고 있다.
사학자인 저자는 일제 식민통치 극복 과정에서 조선왕조와 단절된 우리에게 왕실문화는 “이해되고 계승되어야 할 대상보다 속히 극복하고 망각해야 할 그 무엇”이 돼 버렸다고 지적한다.
이어 저자는 사적으로는 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이면서 공적으로는 국권과 정통성을 상실하는 조선 왕실의 문화를 다양한 사료,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해냈다.
왕의 일과는 새벽을 알리는 파루(왕이 하늘을 대신해 조선의 백성들에게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왕이 밤을 보내는 침전은 왕의 사적인 영역이지만 그곳만 벗어나면 그는 절대 권력자로 상징화된다. 침전 주변에는 지밀상궁(왕을 지척에서 모시는 상궁)을 비롯한 시종들이 있다.
준비를 마치면 외전으로 가는데 침전의 정문 바깥으로 가는 순간부터 왕은 준비된 붉은색, 푸른색 가리개로 가려지며 호위병들의 경호를 받았다.
왕이 면담하는 양반 관료들은 모두 꿇어 엎드린 채 말을 해야 했는데 왕의 얼굴을 보고 싶을 때는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만약 마음대로 왕을 쳐다보면 중벌을 받았다.
연산군 때 심순문이란 문신은 연산군을 마주보고 왕의 옷소매가 좁다는 말을 했다가 불경죄로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왕들에게도 인재를 뽑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은 중요했다.
문과의 경우 3차 시험에 해당하는 ‘전시’는 대궐에서 치러졌으며 문제도 왕이 직접 출제했다.
주로 국정 현안에 대한 대책, 시 등이 문제로 출제됐다고 한다.
왕은 아침 8시경 문과 전시장에 나타났으며 해가 지기 전까지 시험이 계속됐다.
이 밖에도 반차도로 보는 어가행렬, 어가행렬의 깃발 종류, 왕의 예복과 수라상 등에 대해 사료와 그림 분석을 통한 해설이 덧붙었다.
왕비의 경우는 국모가 되는 과정부터 복잡다단하다.왕비 간택을 위해서 국가에서는 10세 전후 처녀들의 혼인을 금하는 ‘금혼령’을 내렸다.
전국 사대부 가문에서는 처녀의 사주단자와 함께 집안 이력을 기록한 신고서인 ‘처녀단자’를 나라에 올렸다고 한다.
이 중 금혼령의 예외가 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씨 성을 가진 자, 대왕대비의 동성 5촌 이내 친족…부모가 모두 생존하지 않거나 한 명만 생존한 자’ 등이었다.
사대부 가문에서는 앞날에 대한 불안 등으로 처녀단자를 올리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세 번의 간택 뒤 이어지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국모가 된 왕비의 생활은 어땠을까.사진 자료와 그림으로 살펴보는 왕비의 예복, 백옥립봉잠, 마리삭금댕기 등의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머리 장식은 눈을 즐겁게 한다.
이 밖에도 왕세자와 후궁들의 일상, 이들의 삶의 터전인 궁궐, 조상들을 모시는 왕실의 의례, 조선왕실의 독특한 기록문화 등도 함께 실려 있다.
교과서뿐 아니라 사극, 역사소설 등을 통해 익숙하게 접해 왔음에도 실제로는 잘 알지 못했던 궁중 문화의 요모조모를 소개했다.이 시대 수많은 장인과 지식인의 노력으로 완성됐을 왕실문화를 한눈에 엿볼 수 있다.
박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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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2>사람의 한평생
《“우리 어머니들은 아이를 갖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왜 아들이면 금줄에 고추를 달고 딸이면 솔가지를 달았는지…해답을 딱딱한 이론이 아닌 우리의 삶에서 찾고자 했다. 스물다섯 해 동안 필자가 머리로 생각하고 발로 뛰며 알아낸 한국 전통 의례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다.”》
태교부터 장례까지 전통의례 총망라
자식,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해 바위 샘 돌 서낭당 칠성당 등에 비는 기자(祈子) 행위, 출산 때의 풍습, 아기가 백일을 맞았을 때의 풍습, 어른이 됐을 때의 풍습, 궁합….
출생, 관례, 혼례, 장례, 상례 같은 통과의례 풍속을 다양한 사례로 풀어냈다.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으로 재직 중인 저자의 공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선조들의 태교 방법은 어땠을까.
태교에 관해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말 정몽주의 어머니가 남긴 ‘태중훈문(
胎中訓文)’이다.정몽주의 어머니 이 씨는 “선현들의 지나간 행적을 더듬고 그에 관한 책을 읽으며 나도 그와 같은 위인을 낳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보통 인간이 행하기 힘든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태교를 강조한 지침서도 있다.1801년 편찬된 ‘태교신기(胎敎新記)’에는 “잉태 시 부친의 청결한 마음가짐은 모친의 열 달 못지않게 중요하다…헛된 욕망이나 요망하고 간악한 기운이 몸에 붙지 않게 하는 것이 자식을 가진 부친의 도리다.
고로 아기가 똑똑하지 못한 것은 부친의 탓이다”라고 적혀 있다.
허준도 ‘동의보감’에서 “장차 태어날 아이의 성품은 물론, 한 가정의 길흉화복조차 아버지의 마음가짐에 좌우된다”고 말했다.가부장적 조선시대에 태교를 여자만이 아닌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한 점이 이색적이다.
저자는 460여 년 전 조선시대의 돌잔치로 안내한다.1552년 1월 5일 경북 성주에 사는 양반 이문건이 남긴 기록이다.
“손자 숙길이의 돌날이다…옥책, 붓과 먹, 벼루, 활, 도장, 쌀, 떡 등의 여러 물건을 차리고 숙길이를 동쪽 벽에 앉혀 놓아…숙길이가 엉금엉금 기어…필묵을 쥐고 한참 동안 가지고 놀았다…또 활을 집어서 놀다가…쌀그릇 옆에 앉더니 쌀을 쥐고 다시 앞으로 가 도장을 잡고 놓았는데…다시 실을 잡고 흔들었다.”
오늘날의 돌잔치에서 흔히 보는 ‘돌잡이’와 다를 게 없다.첫돌을 맞은 아기는 돌빔을 입혔는데, 장수를 기원하는 돌띠를 매줬고 복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는 돌주머니를 채웠다.
대체로 중국의 예법을 따른 조선시대에 중국과 다른 풍습이 있었다.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는 혼례 풍속이다.
저자는 “이는 양이 음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예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왜 남자 집에서 혼례를 치르지 못한 것일까. ‘세종실록’에 답이 있다.
세종이 김종서에게 묻자 김종서가 답했다.“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필요한 노비와 의복 기구와 그릇 등을 모두 여자 집에서 바로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곤란해 어렵게 된 것입니다.”
요즘과 달리 예전에는 사흘이 지나야 시신을 입관했다. 공자는 “사흘이 지나 염을 하는 것은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고 말했다.
저자는 “소생을 바라는 마음과 함께 장례를 치르기 위한 물품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며 “사흘 뒤 입관은 생명존중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윤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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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3>한국 문학과 문화의 고향을 찾아서
《“말의 뿌리를 밝히는 일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일과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의 문학과 문화를 통해서 민족의 정신적 고향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이는 곧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도리도리 잠잠” 돌은 머리, 잠은 주먹
경희대 명예교수인 저자는 평생 우리말의 뿌리를 찾기 위해 매달려 왔다. 국어학자이면서도 무속 전문가로 불릴 만큼 무속을 연구하게 된 계기도 무속인의 입을 빌려 나오는 신의 말(神語)을 통해 선조들이 썼지만 지금은 사라진 언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무속과 문학에서 찾은 우리말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다.
강원 강릉시에서 시준굿을 할 때 부르는 무가(巫歌)에는 ‘도술이 대단한 금강산의 스님과 동침해 아이를 낳은 아씨가 삼신할머니가 된다’는 삼신할머니의 유래가 담겨 있다. 시준굿은 ‘조왕(조王)과 성주, 삼신(三神) 등 가신(家神)을 모셔놓고 1년 동안 집안의 평안과 무병장수,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며 지내는 제사인 안택(安宅)을 할 때 부르는 무악(巫樂)’의 하나다.
시준굿의 내용을 보면 삼신의 ‘삼’은 삼줄(탯줄), 삼터(출생지) 등 태(胎), 생명, 출산의 뜻을 지니며 삼신은 ‘생명의 신’ ‘출산의 신’을 뜻한다고 한다. 몽고점은 새 생명의 탄생에 신이 난 삼신이 두들기는 손매에 아기의 엉덩이가 시퍼런 멍이 든 것이라고 여겼다.
저자는 신라 화랑(花郞)에도 무속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당나라 ‘신라국기’에서 화랑에 대해 ‘곱게 단장한 귀인의 자제’라고 표현하고 조선 중종 때 한자학습서인 ‘훈몽자회’에서 화랑을 격(覡·남자무당인 박수)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화랑이 여장(女裝) 박수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화랑의 화(花)는 무속적인 면에서 사랑과 아름다움, 부활을 뜻하는데 신라 사람들이 화랑을 존경했다는 사실은 그 같은 종교적인 의미를 동경한 것”이라고 말한다.예로부터 흰색을 좋아한 우리 민족의 태양숭배사상과, 시조(始祖)들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의 관련성은 오래 전 ‘알’이 ‘해’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래 ‘알의 자손’이라는 말이 ‘해의 자손’이라는 의미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점차 ‘알’이란 말 대신 ‘해’를 의미하는 다른 말이 생겨나면서 후대인들이 알을 ‘난(卵)’으로 잘못 인식해 난생설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말에 옷, 밥, 떡, 김과 같이 말음(末音)에 자음이 붙는 폐음절어(閉音節語)가 많은 반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의 언어에는 모음으로 끝나는 개음절어(開音節語)가 많은 이유는 기후 때문이라고 저자는 분석했다. 폐음절어가 많은 이유는 추위를 견뎌야 하기 때문에 입에서 공기를 내보내지 않기 위해서이며, 날씨가 따뜻한 남방계 언어가 개음절어 중심으로 이뤄진 까닭은 될 수 있으면 입에서 공기를 내보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젖먹이 아이에게 시키는 ‘도리도리’와 ‘잠잠’은 옛말에서 기원했다. 도리의 어근인 ‘돌’은 머리(頭)의 뜻이며 잠잠의 ‘잠’은 주먹의 옛말이기 때문. 이 때문에 머리를 좌우로 돌리는 목운동을 시키며 도리도리라고 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도록 시키면서 잠잠이라고 얘기한다는 것이다.
쉽게 풀어썼다는 의미에서 부제에 ‘서정범 에세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우리말의 뿌리와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무게도 연륜만큼 묵직하다.
황장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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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4>장례의 역사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과정을 지날 때마다 치르는 일정한 격식, 즉 통과의례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좁은 의미로는 관혼상제만 해당되지만, 넓은 의미로는 백일과 돌, 생일 회갑 진갑 고희 등을 포함시켜 인생의례가 된다. 인생의례는 모두 당사자를 주인공으로 하며 그의 생각에 따라 치러진다. 반면에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정해진 격식과 다른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喪)과 제(祭)라는 두 부분이다.”》
고인돌서 왕릉까지 ‘무덤의 변천’
장례 문화 전문가인 저자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장례 문화가 어떻게 변천해왔는지 살폈다.
또 시대를 거치면서 장례 문화의 변화로 무덤의 형태가 달라지는 양상을 추적했다.
저자는 한국에서 구석기시대의 매장 문화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충북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의 두루봉동굴 유적을 소개한다.
이곳에서 발견돼 ‘흥수아이’라는 이름이 붙은 어린이의 유골이 놓인 상태를 보면 당시의 장례 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사 결과 편평한 돌 위에 고운 흙을 뿌린 다음 아이의 주검을 똑바로 누이고 다시 그 위에 고운 흙을 뿌리고 넓적한 돌판을 덮은 것으로 추정됐다.
저자는 “이 시대에도 죽음과 주검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인돌이 성행한 청동기시대의 장례 문화를 의례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일정한 격식을 지닌 장례의식이 행해진 것으로 확인된다.
고인돌 주변에서 일상용품이 많이 출토되는데 이는 묻힌 자의 영혼을 위해 제사를 지낸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고유의 전통 문화에 중국적인 색채가 강하게 덧입혀졌다.무덤은 전 시대에 비해 종류가 다양해지고 부장 유물의 수준도 높아졌다.
삼국 시대의 왕들은 장대한 고분을 축조했고 현세의 생활도구를 그대로 무덤에 옮겨 놓기도 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장례 문화는 큰 변화를 겪는다.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불교가 확산됨에 따라 왕릉이 사찰 주변에 만들어졌고, 화장 장례가 증가하면서 무덤의 수가 감소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의 장례 문화는 사찰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불교적 의례와 유교적인 절차가 때로 혼합돼 나타났다.고려 전기에는 절이 상제례를 행하는 장소로 흔히 활용됐다.
절 근처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을 수습해 절에 모시고선 예법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저자는 “이처럼 절에서 장례 절차의 대부분과 화장까지 진행된 것을 놓고 절을 우리나라 ‘장례식장의 원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 가문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같은 묘역에 묘지를 정하는 문중묘지 현상이 나타난 것도 고려 때다.또 부부를 같은 묘역 안에 함께 묻는 합장이나 같은 묘역 안에 묘소를 달리하는 부장(附葬)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조선 왕조를 주도한 세력들은 상장례를 유교화하면서 화장을 근절시키는 데 가장 신경을 썼다.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은 절에서 승려의 주관으로 장례가 치러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 때는 엄격한 장례 규범을 만들었고, 무덤 속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무덤을 가리키는 이름도 달리 했다.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은 원(園), 사대부와 일반 서민의 무덤은 묘(墓)로 불렀다.
금동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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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5>한국 대왕신앙의 역사와 현장
《“자기의 고장이나 하찮은 유적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하지만 신당과 제사터에 정성을 바치는 주체는 국가 권력이 아니었다. 이 책은 한 줄 남짓 되는 지리지 사묘조의 내용을 펼쳐 보이는 작업이며, 지배계급이 무성의하게 처리한 민중의 정신사를 돋보기로 보는 것이다.” 》
神으로 모신 민중의 영웅
대왕신앙은 일차적으로는 왕조시대 임금을 경외해 신으로 모시는 행위와 믿음을 뜻한다. 하지만 반드시 임금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민간 전설 속에 남은 비운의 영웅들과 마을을 둘러싼 숲, 산, 하천 등이 모두 대왕신앙의 범주에 속한다. 제단이나 당집이 없는 경우도 있고 건물이 있더라도 신상 위패 탱화를 모시거나 이들을 이중으로 설치하기도 한다. 그 개념이나 모습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저자는 고대국가 초기부터 존재했던 대왕신앙의 종류와 향유 형태를 사료와 답사 등을 통해 정리했다. 사료에 기록된 대왕신, 마을신앙으로 남아 있는 대왕신, 대왕신으로 모셔지는 인물과 임금들, 무속과 불교에서의 대왕 등을 수록했다.
대왕신을 모신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올라가지만 고려시대 이후 더 풍부해진다. 저자는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 등을 사료로 활용했다. 이 사료에서는 삼국시대 백제의 대왕포, 고려시대 개성의 송악산을 비롯해 조선시대 현풍 성황사, 안변 성황사 등이 대왕으로 불렸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저자는 또 현지 조사를 통해 마을의 신앙으로 남아 있는 대왕신앙을 정리했다. 강원 양양군 현남면 웃달내마을의 경우 여자들만 대왕터로 불리는 산에 올라가 늙은 소나무에 제사를 지낸다. 이들 대왕은 집안 성씨를 따서 김씨 대왕, 조씨 대왕 등으로 불린다. 웃달내마을의 신앙은 신당이 없는 소박하고 원초적인 모습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단계의 신앙 형태다. 웃달내마을의 신앙은 반세기 전에 사라지고 없지만, 저자를 비롯한 답사자들의 요청으로 진행된 제사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강원 원주시의 가매기마을의 경우에는 서낭당 이름이 ‘대왕당’으로 돼 있었다. 역사상의 대왕이 아니라 신을 모시는 것을 ‘대왕’이라고 일컬은 경우다.
역사 속의 인물을 대왕신으로 모시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강릉 최씨 문한공파의 시조인 최문한이 그 예다. 그는 포악한 성황신의 횡포에 맞선 강직함 덕분에 마을 사람들에게 성황신보다 먼저 제를 받게 됐다고 한다. 강릉시 북쪽 마명산에 그의 무덤이 있기 때문에 그는 마명산신이자 대왕으로 불리게 됐다.
대왕신으로 모셔지는 임금이나 장군으로는 수로왕, 문무왕, 견훤 등이 있다. ‘동해의 큰 바위에서 화장했다’는 문무왕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후 전설적 요소들과 맞물리며 대왕신앙으로 굳어졌다. 동해 신을 모시는 감은사와 대왕암의 존재, 문무왕이 사후 호국룡으로 변했다는 민간 설화가 영향을 미쳤다.
무속이나 불교계의 대왕으로는 무속의 대왕, 오구굿 계통의 대왕 등이 있다.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오구굿 중에는 여러 대왕이 등장한다. 궁업대왕, 업비대왕인데 정확한 뜻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죽은 사람을 상대하는 저승귀신으로 추정된다.
중국과 일본의 대왕신 자료와 경북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에서 이뤄지는 견훤대왕 동제 관련 인터뷰 등도 참고자료로 실렸다.
박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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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6>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
《“욕, 욕설, 욕지거리. 어떻게 부르든 그것은 그늘의 말, 음지의 말이었다. 어엿한 한국어면서도 시궁창쯤 됨직한 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악구 험담 험구 등으로도 불린 욕은 욕된 처지를 감수해야 했다. (…) 우리는 스스로 똥을 누면서도 똥을 피해왔듯이, 스스로 욕하고 욕 들으면서도 욕을 피해왔다. 이제 욕과 맞대면하면서 우리 각자와 정면으로 대좌해야 한다. 우리 내면과 스스럼없는 맞선을 보아야 한다.”》
‘두룽박 쓴 야시’는 무슨 뜻?
신화 전설 민담 등을 통해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탐구해 온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그가 말하는 우리말의 욕은 “민간의 행위, 짓거리, 그 소산”의 일부다.
욕은 그것이 갖는 역사성과 사회성으로 인해 한국문화의 상(像)을 만들어 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으로 욕의 미학과 해학을 파헤친다.
욕에는 문학작품만큼이나 다양한 수사법(修辭法)이 녹아 있다.예컨대 얼간이를 가리키는 경북 고성 지역의 욕인 ‘두룽박(둥근 구멍이 뚫린 통박) 쓴 야시(여우)’를 비롯해 ‘제 아비 메치고 힘자랑할 놈’ ‘모기 하문(下門)에 말 ○○ 박기’ 등에는 각각 비유법과 과장법, 대조법이 쓰이고 있다.
이러니 바보는 욕쟁이가 될 가망이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욕은 성(性)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욕이 남녀의 성기와 성행위를 즐겨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저자는 쾌락이자 때때로 죄악인 에로스의 이중적인 성격 때문에 욕은 성에 탐닉하는 색한(色漢)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을 억압하는 금욕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말한다.
“주체궂어서(처리하기 어려울 만큼 짐스럽고 귀찮은 데가 있어서) 사람들은 성에 복수할 겸 성을 욕감태기(늘 남에게 욕을 먹는 자)로 삼았다”는 것이다.
북유럽과 그리스 신화처럼 우리나라 신화에도 욕이 담겨 있다. 저자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아니 곧 내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내용의 삼국유사 ‘가락국기’ 첫머리를 인용한다.
목숨 가진 것을 구워 먹겠다는 말부터가 이미 악담이고 험구, 악설(惡舌)이니 “나라의 개벽과 욕의 개벽이 때를 함께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욕에도 품격이 있다.
해학과 기지가 담겨 있지 않은 쌍욕은 뱉는 사람에게 되돌아올 뿐이다. 쌍욕을 해봤자 입만 더러워질 뿐 욕먹는 대상이 바뀔 리 없기 때문.
우리 욕 가운데 악매(惡罵·매우 심한 욕)라고 하는 악담 욕이 많은데 이 역시 쌍욕과 마찬가지로 피해야 할 욕이다.
‘염병할!’ ‘벼락 맞아 죽어라’와 같은 욕이다.
사람이 처지가 약해지고 경우가 궁해질수록 논리에 약해지고 이성에서 멀어지는데 이럴 때 “악담욕이 독을 뿜고 쌍욕이 악을 쓴다”고 한다.
쌍욕이나 악매와 달리 독기가 거의 빠지거나 악감정에서 한발 뒤로 물러선 욕에는 익살이 있다. ‘별, 새 뒤집어 날아가는 소리’와 같은 욕이다.방랑생활 중 들른 한 마을에서 자신에게 쉰밥을 먹인 일을 얘기하며 “망할(마흔) 놈의 마을에서 쉰밥 먹이더라(四十村中 五十食)”라고 한 김 삿갓의 욕은 이미 예술적 경지로 승화한 욕이다.
책에는 심청가에서 뺑덕어멈이 다른 봉사와 눈이 맞아 도망간 것을 알아챈 심 봉사가 “예끼, 천하에 무정한 ○”이라고 한 욕을 비롯해 수궁가와 흥보가, 양주별산대놀이와 봉산탈춤 등 옛 문학과 예술작품에서 뽑은 ‘욕 모둠’도 담겨 있다. 술술 풀어 쓴 ‘욕 백과사전’인 셈이다.
황장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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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7>나아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풍물·탈춤은 마을굿서 나왔다
경희대 한국어학과 교수인 저자가 단군신화 같은 신화, 전설, 민담, 민속 음악, 춤, 민화, 민간 신앙의 유래와 종류, 상징을 소개한 우리 민속 입문서다.
민속 소개에 그치지 않고 우리 민속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문화 콘텐츠의 의미도 강조한다.
풍물은 마을을 지키는 신에게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거나 농부들이 두레를 짜 일을 할 때 연주하는 음악이다.
풍물 중 꽹과리, 징, 장구, 북 등 네 가지를 빼내 실내악으로 편성한 것이 사물놀이다.
저자는 사물놀이를,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성공 사례로 꼽으면서 사물놀이의 특징이 조화의 원리라고 말한다.
금속 악기인 징(대금·大金)과 꽹과리(소금·小金)는 양(陽)을 상징하고 가죽 악기인 장구와 북은 음을 뜻한다.
꽹과리 소리가 커지면 장구 소리는 작아지고 장구 소리가 커지면 꽹과리 소리는 작아진다.
저자는 센 소리가 나며 울림이 적은 금속 악기를 ‘하늘의 소리’에, 부드러운 소리가 나며 울림이 큰 가죽 악기를 ‘땅의 소리’에 비유해 사물놀이를 자연과 인간의 소리가 합쳐진 민속으로 본다.
풍물을 농악이라고도 부르지만 저자는 농악이 일제가 만든 말이라고 한다.풍물이 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농악이라 불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일제가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일본 탈놀이인 능악(能樂)의 일본어 발음인 ‘노가쿠’를 본떠 농악이라는 말을 만든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저자는 풍물 복식의 상징성에도 주목한다.호남 지역의 풍물은 머리에 상모와 고깔을 쓰고 흰옷에 청색 황색 적색 띠를 걸친다.
경기, 충청 지역의 풍물은 흰옷에 등거리(등만 덮을 만하게 걸쳐 입는 홑옷), 잠방이(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도록 짧게 만든 홑바지)를 입고 검은색과 청색 더그레(조선시대에 군사가 입던 세 자락의 웃옷)를 걸치며 홍띠를 두른다.
영남 지방 풍물은 흰옷에 적색 청색 황색의 명주 띠를 두른다.
이처럼 풍물은 백색을 모체로 삼원색으로 아름다움과 정열을 상징하며 다채로운 색깔을 통해 춤을 돋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풍물은 마을 굿에서 유래했다. 풍물 치는 것을 “굿 한다” “굿 친다”라고 부르는 말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가면극도 제천의식, 마을 굿에서 비롯됐다.조선시대의 민속 해설서인 ‘동국세시기’에는 “군(郡)의 사당에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관에서 제사를 드린다.
비단으로 신의 가면을 만들어 사당 안에 비치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가면이 마을의 수호신을 형상화하고 이 가면이 마을 굿에 쓰였던 것이다.
저자는 가면, 즉 탈은 ‘탈났다’처럼 좋지 않은 일을 의미한다며 탈(액)을 쫓아내기 위해 탈을 쓰고 쓰는 춤이 탈춤이라고 설명한다.탈은 청색 적색 백색 흑색 황색의 다섯 가지 색을 중심으로 채색되는데, 이는 동서남북 및 중앙의 다섯 방위와 관련 있다.
온갖 곳에 몰려드는 액을 막아주는 벽사의 의미인 셈이다.
윤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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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8>풀어낸 비밀 속의 우리문화 1, 2
《“나는 쓰여지지 아니한 문화, 별 볼 일 없는 문화에 늘 애정을 쏟는 편이다. 번듯한 문화유산의 공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름표 없는 문화유산이야말로 새삼 눈길이 더 간다. 고려청자는 귀하기는 해도 박물관이나 개인 소장가가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 흔하디 흔했던 보릿짚 모자는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문화는 고급스럽고 성스러운 것’이라는 식의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으로 문화를 재단하고 평가하지 말지어다.”》
이름표 없는 문화유산이 말하다
한국민속문화연구소장인 저자는 “우리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해진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전국을 일주하면서 마주치는 풍경과 유물, 전통의 흔적을 통해 옛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을 풀어 쓴 책이다.
기행은 외연도로부터 출발한다.
외연도는 충남 보령시에 속한 섬들 중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이다.
섬에 도착한 저자는 섬을 뒤덮고 있는 숲에 주목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숲은 ‘마을을 지키는 숲’인 당숲이다. 섬사람들은 이 숲을 향해 살아 있는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낸다.
저자는 사물을 허투루 보고 지나치지 않는다.
남해의 앞바다에서 죽방렴(
竹防簾·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살이 드나드는 곳에 나무를 세로로 촘촘히 박은 뒤 끝에 그물을 연결해 두고 걸려든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 것)을 설치한 게 눈에 띄자 고유의 어업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는 식이다.
그는 “물살 빠르고 수심 낮은 곳에 나무를 촘촘히 박아 브이(V)자로 물고기를 유인하는 양 날개를 설치하고 가운데에 고기를 몰아넣는 둥근 통을 설치해 고기를 잡았는데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도 이런 죽방렴 어업을 그린 게 있다”고 설명한다.
남한강 상류의 선사시대 유적지인 금굴을 보면서 “인류 역사에서 굴은 단순 은신처가 아니라 신화가 탄생한 ‘황금동굴’이었다”고 말하는 저자의 해석이 이채롭다.
“동굴은 신성과 인간성이 만나는 곳이기도 해서 신이나 구세주가 모두 동굴에서 태어났다.그래서 지모신(地母神)의 자궁이 바로 동굴과 일치했다.
인디언은 세계가 동굴을 통해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며, 켈트족에게 동굴은 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다.”
낙동강의 가야사를 보기 위해 찾아간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선 놀이문화를 발견한다.작은 면임에도 불구하고 국가 지정 문화재가 2개나 되는데 하나는 나무로 만든 소를 어깨에 메고 승패를 가르는 쇠머리대기고,다른 하나는 동서로 편을 나눠 싸우는 영산 줄다리기다.
저자는 “단오 때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호장(文戶長)굿이 벌어져 ‘놀이문화의 메카’로 선언해도 괜찮을 듯싶다”고 말한다.
그는 하루 만에 산골과 바다 문화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강원 삼척시를 꼽는다.봉황산에는 바다를 향해 선 채로 뒤쪽에서 덮쳐 오는 산세를 막아내는 미륵불이 있고, 장호해수욕장 근처 신남의 해신당에는 바다에 빠져 죽은 처녀의 원기를 풀어주기 위해 남근을 모셔온 전통이 남아 있다.
저자는 “우리가 마주하는 대다수의 것은 과거로부터 살아남은 잔재물”이라며 상상력을 갖고 사물을 대하라고 주문한다.
금동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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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9>우리 민속신앙 이야기
《“장승과 솟대, 서낭당, 미륵불 등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가장 원초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민속 신앙의 상징물들. 그러나 당당한 신앙이자 믿음이었던 신앙물들이 미신으로 치부되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장승-서낭당에 담긴 소박한 믿음
잡귀를 막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웠던 장승, 한적한 시골 마을이나 가까운 야산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미륵불, 높은 산을 신성하게 여겨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던 산신 신앙…. 이 책은 우리 민족의 생활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민속 신앙의 원형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고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 민족의 의식 속에 남아 있던 문화 자산들이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청소년들의 수준에 맞춰 우리 조상들의 소박한 믿음의 면면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1부는 장승을 비롯해 서낭당, 미륵불, 솟대에 관한 것이다.
요즘도 시골마을이나 큰 절 앞에서 만날 수 있는 나무 장승이나 이끼 낀 돌장승에는, 이들 마을을 지켜온 수호신이라고 생각한 선조들의 소박한 믿음이 담겨 있다.
장승은 홀로 서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한 쌍으로 세운다.
장승의 얼굴이 무서운 이유는 잡귀의 부정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승은 신라 말기 풍수도참 사상의 유행에 따라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은 것은 조선 후기부터다.
서낭당은 고을의 수호신을 모시거나 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며 미륵불은 미래에 이 땅에 나타나 백성들을 구제해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만든 부처다.
미륵불에는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려는 농민들의 소박한 종교적 믿음이 서려 있다.
솟대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긴 나무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수호신이다.
농사가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마을 공동으로 세웠다고 한다.
2부에서는 풍수지리설, 정감록, 동학에 대해 설명한다.
산과 땅의 모양을 살펴 도읍지나 집, 묘지 등을 정하는 풍수지리설은 고려시대 가장 유행했다.
풍수지리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정해진 곳이 아니면 사원이나 탑을 함부로 짓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원은 모두 도선이 고른 자리에 세웠는데 이를 비보사찰 또는 비보탑이라고 한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대표적인 비보탑이다.
‘정감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 혼란의 와중에서 유행한 도참서다.
지금까지 10여 종이 발견됐지만 누가 지었는지, 무엇이 원본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왕조와 현실을 부정하는 이 책은 신비하고 황당무계한 예언서지만 조선 후기 민중이 염원했던 이상 세계를 제시한 사상이기도 하다.
서학인 천주교에 맞서 유불도의 교리를 토대로 만든 동학에 대한 설명도 이어진다.미륵불의 배꼽에 있는 비결을 꺼내면 새 세상이 열린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동학교도들이 비결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는 ‘동학사’의 회고록도 눈길을 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미륵불은 전북 고창군 선운사 중턱 도솔암 가는 길의 절벽 바위에 조각돼 있다.
제3부에서는 무속신앙, 산신 신앙, 풍어제, 도깨비 등에 대한 내용이 수록됐다.
민속 신앙마다 그에 해당하는 전설과 관련 사료가 덧붙어 있어 흥미와 이해를 더한다.청소년을 위한 책이지만 차츰 잊혀져가는 우리의 소중한 민속 자산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기에 좋다.
박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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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풍속 이야기 20선]<20>민족생활어 사전
《“우리 것을 아끼자 사랑하자고 떠드는 것도 좋기는 하다. 그러나 대견하게 여기고 돌보자면, 우선 차분하게 알고 대해야지, 서먹서먹해서야 어떻게 사랑할 마음이 솟겠는가?…누군가가 손잡고 차근차근 일러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그 배역을 맡고 나선 것이 이 책이다.”》
까치와 호랑이 왜 함께 그렸을까
이훈종 전 건국대 국문학과 교수(1918∼2005)는 1992년 펴낸 이 책에서 옷차림, 머리쓰개, 바느질 도구, 집, 세간, 농기구, 공예, 여행, 묘제, 종교 의식 등 26가지 분야의 전통문화 관련 용어 3000여 개를 해설했다.
직접 그린 일러스트와 용어의 유래를 읽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전통문화에 무지했는지 깨닫게 된다.
1993년 제3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았고 지난해 6쇄가 나왔다.
이 책의 쓰임새는 저자가 집과 창살에 대해 설명한 부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예술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전문가와 초보자, 문외한이 있듯이 집을 보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감식안을 갖춰야 한다.
더구나 그것이 한국 고유의 건물일 때 우리는 남다른 사랑으로 이것을 대해야 되겠는데, 그러자면 어느 정도는 건물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알아야 사랑할 맛이 날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호랑이와 까치는 우리 민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인공이다.그런데 하필 왜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 등장할까.
이런 그림의 발상지는 중국이다.
희작(喜鵲)이라고 불리는 까치는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전령이며 기쁜 소식을 상징한다. 표범은 한자로 ‘표(豹)’인데, ‘알린다’는 뜻의 ‘보(報)’와 중국식 발음(바오)이 같다.
그래서 표범과 같은 발음의 ‘보’와 기쁜 소식을 뜻하는 까치의 ‘희’를 합치면 보희(報喜),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뜻이 된다.
까치와 표범을 함께 그린 그림을 보희도라 불렀다.
우리는 표범과 호랑이를 통틀어 범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표범 대신 호랑이를 그린 것이다.
패도는 군복 차림일 때 차는 칼이다.칼을 차는 방식이 특이하다.
오늘날의 민소매 조끼처럼 굵은 베로 만든 소매 없는 속옷을 받쳐 입고 왼쪽 겨드랑이 부분에 굵은 베를 겹쳐 만든 고리를 매단다.
저고리나 두루마기의 겨드랑이 부분에 구멍을 낸 뒤 군복을 차려입고 검의 끈을 고리에 걸어 칼자루가 뒤로 가게 찬다.
저자는 이런 전통을 모르는 TV 사극 제작자들을 비판한다.“텔레비전의 프로를 보면 군관이라는 작자들이 예외 없이 칼집에 꽂은 칼을 왼손에 든 채 날뛰고 있다…세상천지에 패검을 들고 다니는 군관이 어디 있더란 말인가.”
전통 복식인 도포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그러나 색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보통 도포는 흰색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뚜렷한 지위가 없으면 흰색, 지위가 높아지면서 점점 짙은 푸른 물을 들였다.
문무관의 첫째 품계인 1품 지위는 짙은 초록색 도포를 입었다.
도포의 술띠는 도포 색깔을 따라가다가 정3품 상(上) 이상의 당상관이 되면 복숭아꽃 빛깔인 도홍색을, 그보다 높은 지위는 자주색에 가까운 붉은색을 띠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물건이나 용어에 대한 설명도 있다.
조선시대 때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 손에 쥐었던 물건인 홀(笏). 길이 33cm, 너비 5cm가량의 이 나뭇조각의 용도는 메모지였다.임금에게 물어볼 말이나 임금이 한 말을 붓글씨로 메모했다.
버선은 한자로 ‘말(襪)’이다. 양말은 서양버선이라는 뜻이다.
윤완준 기자
동아일보-----------
[민속 풍속 이야기 20선]역사만큼 유구한 우리전통
지난달 중순부터 이어진 ‘2009 책 읽는 대한민국’의 첫 번째 시리즈 ‘민속 풍속 이야기 20선’이 20일 끝을 맺었다.
‘민속 풍속 이야기 20선’은 지난달 20일 김명자 안동대 교수(민속학)가 전국을 다니며 고유의 세시풍속을 조사해 정리한 ‘한국 세시풍속 1’(민속원)을 소개하며 시작됐다.
선정된 책들은 민속이라는 큰 테두리에서 (세시)풍습과 통과의례, 의식주, 구비문학 등을 상세하게 다뤘다.
시리즈를 마치며 저자들은 남다른 감회를 풀어놨다.
‘한국 세시풍속 1’의 저자 김명자 교수는 이번 시리즈에 대해 “생활 속에 깊숙이 녹아 있다는 이유로 오히려 잊혀가는 세시풍습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고 했다.
음력 3월 3일 삼짇날 꽃놀이를 가서 화전을 부쳐 먹던 풍습이 봄 소풍에 남아 있고, 9월 9일 중양절(
重陽節) 단풍놀이가 가을 소풍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람의 한평생’을 쓴 정종수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은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출산 혼례 장례에 이르는 통과의례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태어나 금줄을 달면서 시작돼 상여에 실려 저승으로 떠나는 순간까지 ‘사람의 한평생’이 통과의례로 이뤄져 있는데 이를 고리타분한 관습 정도로 치부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조선왕실의 의식주를 소재로 쓴 책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의 저자 신명호 부경대 교수(사학)는 “반만년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왕실문화, 궁중민속의 중요성을 알리는 기회가 됐다”며 “궁중민속은 일제 때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고 민주화 과정에서 반동 개념으로 인식됐지만 민중 민속과 더불어 의미를 되새겨야 할 우리의 민속”이라고 말했다.
구비문학과 관련해 도깨비의 의미를 분석한 책을 쓴 김종대 중앙대 교수(민속학)는 “도깨비처럼 민속에 등장하는 상징들은 민중의 삶이 반영되고 그들의 의지와 기원이 투영된 표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기 바란다”고 했다.
도깨비를 만나 금은보화를 얻고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의 의미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현재의 궁핍함을 해결해주는 메시아와 같은 존재로 도깨비를 상정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내달 9일부터 ‘미술 감상’
3월 9일부터는 올해 두 번째 시리즈로 미술의 역사와 미술가 이야기 등 미술 감상에 도움이 되는 책 20선을 소개합니다.
황장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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