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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도감사 송애(松崖) 반석평(潘碩枰)선생)
    대담기획인터뷰인물 2006. 12. 6. 11:31

     



    반기문 유엔총장 직계선조

     

    군산출신 8도감사 송애(松崖) 반석평(潘碩枰)

     

     



    내년 1월1일 5년간 공식 임기를 시작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당선자는 광주 반씨 문중을 넘어서 국가와 민족적 자랑이다.



     

    그러나 반기문 총장 고향이 충북 음성군이란 것은 알아도 그의 직계 선조가 군산시에서 태어났던 송애(松崖) 반석평(潘碩枰) 선생으로 조선시대 두 사람 밖에 없던 팔도감사(八道監司)인 것은 아는 사람이 드물다.



     

    송애 선생은 함경도에서 전라도까지 조선팔도 관찰사를 두루 역임한 것을 비롯 5도 병마절도사와 6경(卿), 한성판윤 등을 지낸 특이경력의 인물이다.



     

    특히 도내가 아닌 타지역에서는 '팔도감사 반석평'에 대해 심층적 연구논문까지 발표되고 후손들이 선생을 기리는 전기까지 펴냈으나 정작 도내에서는 연구는 커녕 별다른 자료조차 없어 '지역의 수치'로까지 받아들여 진다.



     

    지난 89년 춘천시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가 펴낸 '아시아문화 제5호'에 실린 오춘택교수 연구논문 '반석평론' 등 다수의 보고서와 선생의 15대 후손인 潘在植(69 前종로문화원장)씨가 펴낸 '관산별곡(關山別曲)이란 전기 등에 선생의 일대기가 상세히 소개됐다.



     

    이에 반기문 유엔총장 고향마을과 충북 상황을 알아보고, 오교수 논문과 송애 선생 전기를 참고로 선생의 생애와 작품세계 및 유물, 광주반씨 유래와 현황도 파악한 다음 지역개발 활용방안도 모색한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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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재 순서)



    (1) 반기문 차기 유엔총장과 고향 및 광주반씨

    (2) 군산출신 8도감사 송애 반석평을 게재하며

    (3) 송애 반석평의 생애

    (4) 송애 반석평의 전라감사 시절

    (5) 송애 반석평 작품세계

    (6) 지역개발 활용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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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반기문 차기 유엔총장과 고향 및 광주반씨


     

     
    북한 핵실험으로 동북아시아가 일촉즉발 위기에 처했던 올해 10월 14일 새벽, 대한민국에 국가적 낭보가 날아들었다.




    미국, 일본 등 견제를 당당히 물리치고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이 한국 최초로 UN총회에서 192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제8대 사무총장에 선출되는 쾌거를 일궈냈다.

     



    이는 비단 광주 반씨 가문나 충북의 영광을 넘어선 민족적 경사로 국민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유엔은 국제평화와 안전을 위한 세계에서 가장 큰 조직이고, 사무총장은 유엔 수장으로서 '세계 대통령'으로 치부되며 국가원수 대우를 받는 막중한 자리다.

     



    더욱이 한반도를 둘러싼 핵위기 상황에서 한 나라만을 대표하는 국가원수를 넘어 192개 회원국과 지구촌 평화를 위해 각국의 이해관계와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유엔 사무총장 역할은 필설로 표현이 어려울 만큼 중차대하다.



     

    지구상 몇 안되는 분단국에다 분쟁과 긴장이 지속되는 한반도 출신이 유엔총장 당선은 또 하나의 이변으로 기록됐다.



     

    사무총장은 유엔총회와 안보리, 경제사회이사회, 신탁통치이사회 등 모든 회의에 사무국 수장 자격으로 참여하며 국제분쟁 예방을 위한 조정과 중재 역할에 있어 독자적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다.



     

    전 세계 1만6천여명 유엔직원 인사권과 막대한 예산을 집행하는 중요인물로 24시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전담경호를 받으며 뉴욕 맨하탄 외곽 서톤플래시스에 위치한 별도 관저에서 살게된다.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 반기문 총장 당선 소식은 경향각지에 희소식으로 등장했다.



     

    연간 50억 달러 유엔예산을 총괄하고, 9만2천여명 평화유지군을 통솔하는 세계 최고 행정관인 유엔 제8대 사무총장에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장관이 당선된 것은 비단 국제관계 뿐 아니라 북한 핵문제 해결의 시대적 소명을 해결할 최적임자로 평가된다.  

     



     

    반기문 총장은 1944년 광주반씨(光州潘氏) 집성촌인 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1리 행치마을에서  8도 감사를 지냈던 송애 반석평 선생의 시호인 장절공(壯節公) 행치파 후손으로 태어났다.



      

     한의원을 운영했던 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 반명환 선생(~1991)도 청주 농고를 수석졸업하고 시와 붓글씨에 조예가 깊을 정도로 뿌리가 있는 가문이었다.

     



    그러나 부친이 창고업 및 통운회사 소장을 지내다 빚보증을 잘못 서 50년대말 사업이 실패하기 전만해도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모범생으로 성장했다.



     

    이후 가족들이 고생도 했는데 부친은 91년 교통사고로 작고했다.



     

    작은 아버지가 충주 부시장을 지낸 반필환씨이고 반 총장은 3남2녀 장남으로 동생들도 모두 공부를 잘 해 첫 째 남동생은 제일은행 지점장과 본사 이사를 지내고 정년퇴직했다.



     

    둘째 남동생은 보험금융감독원 호남지부장, 첫째 여동생은 초등교사, 둘째는 약사로 일한다.



     

     


    반총장 생가마을은 청주와 음성을 연결하는 국도변 행치고개에 위치한 전형적 농촌마을로 마을 입구에는 상당 1리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눈길을 끈다.



     

    음성읍에서 청주 방향으로 10분 가량 달리면 이 마을에 도착한다.



     

    표석에 '삼신산과 행치마을 유래'를 보면 행치마을이 흔한 농촌마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수많은 전란에도 무사해 보덕산(普德山)이란 해발 510m 삼신산에 감사하며 3년마다 산신제를 지낸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칠 벼슬을 할 사람과 큰 부자, 위대한 장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전설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는 전언이다.



     

    "보덕산에는 음택명당으로도 유명해 마을과 자손이 태평성대하리라 전하여오고 1450년경 광주 반(潘)씨가 터를 잡고 살매 그 우애가 형제와 같더라" 는 내용도 전해온다.



     

     조상묘를 마을 한 가운데에 모셔놓고 제사를 합동으로 지내는 재실인 큰 규모의 ‘숭모재’도 있다. 



     

    반 총장 당선이 확실시됐던 10월부터 이 마을은 물론 음성을 포함한 충북 전 지역에 경축 플래카드가 곳곳에 나부끼고  풍수지리학자 등의 발길이 쇄도했다.



      

     풍수지리에 밝은 전주 우석대 김두규 교수는 "선학인가형(仙鶴引駕形)으로 선한 학이 백성 등을 태운 수레를 끌고 간다"고 설명했다는 전언이다.



     

      대전을 방문해 고향 충청인의 열렬한 환대를 받은 반총장은 고향분들 덕분에 외교통상부장관직을 원활히 수행했음을 표현하며 남다른 애정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주시민 환영대회는 충북도민과 반총장 고향 어른, 학교 선후배와 동기동창, 광주 반씨 문중원들 모두 자신의 일인양 반총장을 부여잡고 경축하며 즐거워 했다.

     



    특히 지난달말 충북도청에서 음성군과 진천군 혁신도시 협의회장, 대학교수 등이 참석해 음성군과 진천군에 건설되는혁신도시 명칭 선정회의가 열려 △반기문시 △빛누리시 등 6개 명칭으로 제안됐는데 현재로선 ‘반기문시’가 가장 유력하게 검토된다는 전언이다.



     

     이 밖에도 충북도와 음성군은 반기문 활용방안 찾기에 고심중이어 지역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방안을 마련키 위해 노력하고, 유엔총장 탄생지와 볼거리를 연계해 관광개발 용역을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광주반씨 제실인 위행치마을 숭모제 옆 부근에 비닐하우스가 반 총장 생가로 몇 년 전까지 사촌동생이 살았으나, 청주로 이사 가며 집이 헐려 밭으로 사용 중이다. 



     

    행치마을 17가구 중 16가구가 반 씨가 차지할 정도 집성촌이다.



     

    충청도 양반에다 국제신사에 세계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반 총장은 "총장 선임은 ‘나라’와 ‘국민 및 충청인의 성원' 때문"이라고 했다는데서 승승장구하는 그가 의외로 겸손함과 감사함을 잊지 않는 풍모를 알 수 있게 한다.



     

    초등학교 다섯 살 때 충주로 이사간 반 총장은 공부벌레라 할 정도로 학창시절 1등과 반장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다.



     

    6.25 직후 학생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애국으로 알았다는 반 총장은 외교를 잘해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는 일념으로 필수적인 영어에 몰두했다.



     

    모든 과목에 능했으나 영어는 특출했는데 충주중학교 시절 영어교사가 배운 것을 10번씩 써오라고 하면 문장을 통째로 외워버릴 정도로 영어로 된 것은 무조건 달달 외웠다.

     



    당시 충주 비료공장을 미국인들이 세웠는데, 미국인들을 찾아다니며 회화공부를 했고, 고 2때 회화를 마스터 했다고 전한다.



     

    충주고 2학년 때 대한적십자사가 주관한 영어경시대회에서 1등을 한데 이어 주한미대사관이 주관하는 외국학생 미국방문 프로그램(VISTA)'에 한국대표 4명 중 하나로 선발돼 충주시가 떠들썩 했다고 전한다. 



     

    '영어의 신동'으로 불리던 반총장은 1962년, 충주고 3학년 여름에 한 달 동안 미국을 방문할 때 충주여고 학생들이 가사시간에 미국인에게 선물할 복주머니를 만들어 전달했다.

     



    이를 대표로 전달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 지금의 부인인 류순택(62) 여사다.


     

     

    미국에서 접견한 케네디 대통령이 꿈이 무엇이냐고 묻자 반기문 학생은 ‘외교관’이라고 답변했는데 뜻대로 외교관이 됐다.



     

     그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외무고시 3회에 2등으로 합격해 외교관이 됐다.

     



    외유내강형 인물로 처세도 잘하고 관운이 좋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고, YS, DJ,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도 승승장구했다.



     

    한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가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고교시절 미국을 방문시 묶을 곳을 제공했던 할머니와 40년 이상 인연을 유지해왔다. 



     

    대단한 체력을 갖고 있던 반총장은 2004년 1월 외교통상부장관이 된 이래 105개국을 방문하고 재직기간 990일 가운데 1/3을 해외에서 보냈고 320여회나 외교장관 회담에 참석했을 정도로 활약을 보인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37년 정든 외교부를 떠나 유엔총장 업무 인수인계 작업 중인 반총장은 큰 딸(36)은 아시아재단 사업부장, 둘째 딸 (31)은 유엔아동기금(UNICEF) 케냐사무소에서 국제기구초급전문가, 아들(33)은 서울대 공대를 나와 캘리포니아 주립대(UCLA)에서 MBA 과정 중일 정도로 1남2녀도 훌륭히 키워냈다 .



     

    청와대 외교 수석일 때 외아들이 자원해 해병대를 다녀오겠다고 해서 보낼 정도로 국가관이 투철한 인물이다.





    (필요사진) 광주반씨 제실 숭모제, 제실 옆에 있는 쉼터 보덕정, 반총장 생가, 마을 표석, 집안 묘지, 마을 전경, 플래카드 걸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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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군산출신 8도감사 송애 반석평을 게재하며

     

     

     

     

     

    조선팔도 감사를 두루 역임한 송애(松厓)  반석평(潘碩枰, 1472~1540, 중종35)은 본관이 광주(光州)이고, 호가 송애,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그의 후손들은 이를 기려 광주 반씨 장절공파이다.



     

    조선 팔도 감사를 지냈다는 것은 당시 함경, 평안, 황해,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도 관찰사를 두루 역임한 것을 말한다.



     

    조선 5백년 동안 이성계를 도운 조선왕조 개국공신 3등으로 개성소윤에 임명된 강릉 함씨, 난계(蘭溪) 함부림(咸傅霖, 1360~1410)과 함께 단 두사람에 그친다.



     

    함부림(咸傳霖)은 이태조의 공신(이태조 수창궁록)으로 팔도감사(八道監司)를 지내고 동원군(東原君) 작위를 받은 것으로 기록됐으나 그의 동생, 죽계(竹溪) 함부열(咸傳說.1371~1442)은 끝까지 공양왕과 고려왕조를 따라 대조를 이룬다.



     

    이 같이 조선왕조 전체에서 팔도감사를 지낸 반석평을 연구한 한림대 국어국문학과 오춘택 교수 '반석평론'은 '아시아문화 제5호'에 실린 논문이다.



     

     

    '서론'에서 오교수는 지난 85년초 춘천 한림대 뒷편 봉의산(鳳儀山) 남쪽 기슭 바위에 새겨있는 詩가 발견돼 강원대 강원문화연구소 신종달 교수가 '춘천 봉의산 암벽의 반석평시'라는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계기가 돼 '반석평론'을 저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충북 괴산 출신 홍명희(洪命熹. 1888(고종 25)~1968)가 그의 소설 '林巨正(임꺽정)'에 반석평을 삽화로 등장시킨 것을 보고 그의 삶을 객관적 시각으로 추적했으나 선생의 文集이 전하지 않으므로 조선왕조실록과 야사류, 읍지 및 족보와 同시대 사람들의 문집 등을 참고해 논문을 작성했다.



     

    서론에 이어 '생애'편에서는 반석평의 출생과 신분 및 가족관계 등을 상세히 다루어 반석평이 서얼의 자손임에도 갖은 역경을 극복하고 관직에 등용돼 8도감사와 한성판윤 및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과정을 서술했다.



     

    또한 반석평의 아버지, 반서린(潘瑞麟)과 어머니 澮尾 張氏 무덤이 군산시 회현면 고사리에 있다가 광주 반씨 묘지를 음성군 원남면 상당1리 행치마을에 합동 이장한 (##)년 함께 이장됐다.



     

    현재 군산시 澮縣면이 원래는 澮尾縣에서 '꼬리 미(尾)'가 빠진 것을 감안하면 반석평의 어머니 회미 장씨는 회현면 출신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부모 묘소가 군산시 玉山면과 경계인 회현면 고사리에 최근까지 있다가 음성으로 이장된 것을 고려하고, 반석평 생존 당시를 전후한 반씨 가문 유명인물이 지척 옥산면에서 출생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반석평이 태어났거나 살았던 마을은 옥산면과 회현면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짙다.



     

    또한 오교수는 반석평이 충청감사 시절 현재의 충북 제천군 청풍면에서 남긴 詩인 '한벽루(寒碧樓)'나 춘천 '봉의산시(鳳儀山詩) 등 선생의 작품 및 다른 사람의 화답시 등을 통해 '관산별곡(關山別曲) 등 작품세계를 분석했다.



     

    관산별곡은 전하지 않으나 반석평이 짓고 이행(李荇,1478~1534)이 윤색한 작품으로 다른 자료에 명칭 등이 나와있다.



     

    마지막으로 '結語'에는 반석평이 서얼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극복하고 8도감사, 5도병사, 6경 등 고위관직을 역임해 가는 과정과 그의 신분에 대한 조정의 시비 등을 그의 내면적 갈등과 함께 객관적 시각으로 서술했다.



     

    팔도감사 반석평이라는 부제에 '관산별곡'이라는 그의 작품은 전하지 않으나 경흥부사 시절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관산별곡'이라는 詩 제목을 따서 그의 15대 후손인 반재식(69 前종로문화원장)씨가 반석평 일대기를 썼다.



     

    반재식씨가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했던 반석평의 생애를 전기화한 것으로 당시 시대상황을 무리없이 소화해 낸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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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송애 반석평의 생애

     

     

     

     

    팔도감사 松崖 潘碩枰 선생은 1472년(조선 성종 3년) 潘瑞麟(반서린)과 澮尾 張氏 사이의 3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가 본관인 선생은 조선왕조 개국공신인 潘忠(1348~?)의 후손으로 반충이 光州伯에 봉해져 집안들이 호남지역에 거주하게 됐다.



     

    부친 반서린(1436~1484)은 碩楨, 碩枰, 碩權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 형 석정과 동생 석권은 각각 현감까지 지냈다.



     

    반서린과 회미 장씨 합장묘는 군산시 회현면 고사리에 최근까지 남아있다 음성 반씨 문중이 전국에 산재한 선조 묘소를 행치마을에 이장할 때 함께 이장됐다.



     

    군산시 회현면 합장묘의 金安國(1478~1543)이 지은 墓碣銘 및 3남 석권이 옥구(군산시와 95년 시군 통합 전에는 옥구군 회현면이었음)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으로 반석평은 옥산면이나 회현면에서 출생해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송애 반석평(1472~1540)은 적자가 없어 동생, 석권의 아들 士濂(사렴)을 후사로 이었고, 석권이 음성 현감으로 부임하며 후손들 대부분이 현재 충북 음성군에 이주해 정착했다.



     

     

    자연 군산시 반씨 가문은 소멸되다시피하고 군산시 회현면과 경계인 김제시 진봉면에 집성촌으로 일부가 남아있다.



     

    음성 현감으로 석권이 이주하며 현재 음성군 원남면 상당 1리 행치마을은 광주 반씨 장절공(壯節公)  행치파 집성촌이 됐다.



     

    장절공은 송애 반석평 선생의 시호다.

     



     

    그런데 행치마을의 광주 반씨는 장절공 행치파(壯節公 杏峙派)라고 하는데 아마 현재 마을을 기준으로 독자적으로 사용해 온 듯 싶다.



     

    행치 마을 한가운데에는 가로 7m, 세로 3.5m의 큰 돌이 놓여있다.



     

    돌족보로 ‘세계도(世系圖·사진)’라고 새긴 돌의 이름이 크게 새겨졌다.



     

    반씨 종친회는 2천년 조상의 시제를 지내는 사당을 만들며 이 돌족보를 세웠다.




    족보에는 중시조 충(忠)부터 22세손 아이에 이르기까지 남자 후손 720명 이름이 차례로 새겨져 있다.



     

    송애 반석평은 갑자사화가 있었던 1504년 32세의 늦은 나이에 司馬試에 급제했다.



     

    13세에 아버지 반서린이 죽자 회미 장씨 손에 이끌려 한양으로 갔다는 기록과 어떤 재상의 종이었으나 재상이 그의 재주와 성품을 사랑해 글을 가르치고 아들없는 부자집에 보내어 아들로 삼게 하고 공부에 힘쓰게 했다.

     



    아마도 서얼이라는 신분적 차별로 인해 한양 재상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등 초년시절 많은 고생을 한 것이 사마시에 늦게 급제한 원인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마시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하나로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쳐 부르는 명칭인데 소과(小科),·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라고도 한다.


     
    이 때 반석평은 생원이 됐고 성균관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마치고 중종 반정이 일어난 이듬해인 1507년(중종 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다.


     
    반석평은 사초 및 임금의 명령을 기록했던 藝文館 檢閱(예문관 검열)을 첫 관직으로 한 뒤,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언 등 시종직을 거쳐 중종 8년인 1513년 敬差官(경차관)으로 함경도 민정을 살피고 돌아오는데서 그가 실록에 등장한다.


     
    경차관(敬差官)으로 함경도에 파견돼 여진의 동정을 보고했으나 천얼출신이라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경차관은 조선시대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체제 강화과정에서 국가의 필요에 따라 여러 특정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중앙 관원의 하나다.


     
    임명과 파견에 특별히 선발 관청이나 관직에 관한 법제적 규정은 없었고, 대개 관련 사무에 밝은 관원 가운데 골라 정했다.
     


     

     

     훗날 크게 성장해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 등과 교유했던 반석평은 1524년 군기를 살피지 않고 도로사정 보고를 잘못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



     

     같은 해  52세 나이에 병조참의를 맡았다가 함북병마절도사를 거친 후 1530년(중종 25년) 종2품으로 8도에 1명씩 두었던 지방장관인 충청감사직을 처음 맡게된다.



     

    1531년 6월 명나라에 聖節使로 다녀온 뒤 예조참판으로 임명됐다가 드디어 1532년 2월 '전라감사'로 부임했다.



     

     

    현재 전남북과 제주도를 관장하던 전라감사가 업무를 수행하던 전라감영은 전주에 있었다.



     

    자연스레 고향인 군산 회현면에 여러 번 들린 것으로 알려졌다.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금의환향한 셈이다.



     

    이듬해 6월 경상감사(관찰사)로 부임했다가 이후 평안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쳤는데 '봉의산詩'는 강원감사 시절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도 함경도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타계 1년 전에는 형조참판, 한성판윤(현재 서울특별시장), 특진관, 공조 및 형조판서, 의정부좌찬성 등 많은 관직을 거쳤다.



     

    뒤에 자신을 키워준 재상집 자손이 어렵게됐지만 노상에서 만나면 반드시 예의를 차렸고 벼슬을 주선했을 정도로 의리가 있었으며 청렴하고 겸공한 관리로 이름났다.



     

    그는 중종 35년 1540년 5월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최근까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조안리 팔당호수변에 묻혀있다가 음성 행치마을에 이장할 때 함께 이장됐다.



     

     

    송애 반석평은 변방의 외직에서 내직에 이르기까지 항시 신분과 책임추궁 문제로 시비 대상이 됐으나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8도감사, 5도병사, 6경이라는 고위직을 거친 역사상 드문 인물이다.



     

    어쨌든 함부림에 이어 조선왕조 5백년 동안 8도감사를 지낸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송애 반석평은 성품이 온화하고 청렴결백했으며 이 같은 성품이 많은 관직을 두루 역임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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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송애 반석평의 전라감사 시절

     

     



    松崖 潘碩枰은 조선 중종 27년인 1532년 2월 60세 나이에 태어난 고향, 옥구현(95년 군산시와 시군통합 전에는 옥구군이었음)을 관장하는 전라관찰사(전라감사)로 임명된다.



     

    충청감사로 재임 중 명나라 황제인 世宗의 생일을 맞아 지금의 축하사절단장과 같은 聖節使로 1531년 6월 중국에 다녀온 반석평은 같은 해 12월 예조참판으로 임명됐다가 전라감사로 부임하게 된 것.



     

    당시 광주 반씨 문중에서는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많았으나 그 가운데 潘佑亨과 반석평이 두각을 나타냈다.



     

    반우형은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사람으로 연산군 폭정에 과감히 반기를 들고 일어선 중종반정(1505년) 공신이다.



     

    송애 반석평이 감영이었던 전주로 떠나기 직전 이미 고희를 넘긴 반우형은 종친으로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詩 한 수를 지었는데 현재 세보(世譜)에 남아 전해진다.



     

    세보는 집안 계보(系譜)를 모아 엮은 책이다.



     

    반우형의 詩는 집안의 소원을 성취한 반석평을 칭송하고 앞날에 대한 당부의 말을 표현한 것으로 이에 송애 반석평은 다음과 같은 詩로 화답한다.



     

     

    "蓬萊(봉래)의 仙杖(선장)을 존중하면서 郡國民憂(군국민우)를 힘쓰오리다. 집안의 명성을 손상할까 조심하고 오직 친족들이 소원타고 생각치 않도록 노력하겠오"



     

    7字4行에 도합 28字의 화답시를 남긴 송애 반석평은 13세의 나이에 아버지 반서린이 타계하자 어머니 회미 장씨 손에 이끌려 한양으로 올라온 후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부임했다.



     

    당시 반석평은 창원부사 딸인 예안이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 함께 살고 있었다.



     

    첫째부인 남양박씨가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데 이씨 역시 자식을 낳지 못했고 전라감사로 부임할 때는 중병을 앓아 동행하지 못한 것으로 중종실록 등에 전해진다.




     

    전라감사 부임직후 반석평은 그의 고향이자 선산 및 부모 묘소가 있는 옥구현에 들렀다.



     

    당시 옥구현 관원들은 1516년 중종 11년 반석평이 경흥부사로 부임할 때 위용을 젊은 재사 鄭膺(정응, 1490~1522)이 지은 詩를 객사현판에 새겨 그를 환영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향 옥구 주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반석평은 1532년 2월에서 이듬해 3월말까지 1년2개월 동안 전라감사로 재직했는데 지역발전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린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1533년 봄, 한양의 아내 李氏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은 반석평은 조정의 허락을 받고 자리를 비워야 함에도 부인의 병환이 시각을 다투자 한양에 들렀다가 전주에 다시 내려온다.



     

    이로 인해 사사로이 공무 자리를 비웠다는 사헌부 주장에 의해 전라감사에서 파직된 반석평은 한양으로 다시 올라와 한달쯤 지난 5월 3일 예안이씨 임종을 맞게된다.



     

    송애 반석평은 군산이 낳은 팔도감사로 전라감사 재직 시절에는 다른 지역에 있을 때보다 남다른 애정을 갖고 공무에 임했으며 문무를 겸비한 청렴결백한 관리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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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송애 반석평 작품세계

     

     

     

     



    松崖 潘碩枰의 문집은 전하지 않으며 그의 작품 5수와 다른 사람의 화답시 및 증시 15수가 남아 있다.



     

     

    이에 춘천 한림대 오춘택 교수 논문 등 다수의 보고서와 선생의 일대기를 펴낸 반재식(69 前종로문화원장)씨의 '關山別曲'을 참고해 작품세계를 알아본다.



     

     

     

    "철갑의 군용이 장엄하니 銅符(동부)에 늘어뜨린 刺史(자사)는 영광스럽기도 하지(중략)"

     



    이 시는 1516년 중종 11년 3월 경흥부사로 임명돼 떠나는 반석평에 대해 정응(1490~1522)이 지은 시의 앞 부분이다.



     

    이는 1532년 송애선생이 전라감사에 제수돼 고향 옥구현에 들렀을 때 관원들이 객사 현판에 새겨 그를 환영할 때 활용되기도 했다.



     

    여진족의 국경침입을 막기 위해 변방으로 가게 되므로 철갑을 입었겠으나 반석평의 문무를 겸비한 당당함을 표현했다.



     

    현재는 전하지 않으나 '관산별곡'은 반석평이 짓고 이행(1478~1534)이 윤색한 작품으로 경흥부사나 1523년 함남병마절도사 시절 임지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고려가요, 경기체가 및 가사작품들과 함께 작품명만 소개됐고 가람 이병기는 '국문학전서'에서 가사로, 김동욱, 박노춘 등은 경기체가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임형수가 1524년 중종 19년 '書關山別曲後'를 지은데서 관산별곡이 실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여진족 등의 시달림을 받는 국경주민을 위로해 주는 내용으로 분석되고 있다.

     

     



     

     

     

    "홀로 寒碧樓에 오르니 정신이 맑아져 십년 세상살이가 꿈만 같구나.(중략)"



     

    충청도 '읍지'에는 관찰사 반석평이 이 시를 지었다고 기록돼 1530년 중종 25년 작품으로 추정된다.



     

    무장으로서 10여 년간 변방생활을 마치고 누각에 올라 절경인 남한강을 바라보며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의 욕망을 끊고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봉래의 仙杖(선장)을 존중하면서 군국민우를 힘쓰오리다'(중략)"



     

    1532년 중종 27년 고향인 전라감사로 부임하기 직전 집안 어른인 반우형이 써준 증시 3수에 대한 화답시인데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라면 현실을 피하지 않으며 집안일도 잊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聖人의 敎化를 두른 푸르른 산, 그 이름 아름다워 지금까지 전하였네. 봉황새 날아가자 태평성대도 끝나버려 산에 올라 愴然(창연)함을 홀로 느끼네.(중략)"



     

     

    평안도를 거쳐 1534년 중종 29년 강원도 관찰사 시절, 소양강을 끼고 흐르는 鳳儀山에 올라 지은 시로 추정되는데 선생의 9대손인 반우한이 1725년에 이 산의 바위에 새긴 것으로 기록됐다.



     

    봉황을 상징하는 봉의산에서 "봉황이 날라가자 태평성대도 끝나버려"라고 표현한 것은 현실에 대한 어두운 인식이 직설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송애 반석평의 '鳳儀山詩'는 춘천읍지, 춘천지 및 광주반씨세보에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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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지역개발 활용방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당선자는 한 달도 안 남은 2007년 1월부터 UN의 새로운 수장이 된다. 



     

    이러한 반 총장 직계선조가 군산시에서 살다가 4백여 년전 충북 음성으로 이주를 했을 뿐 만 아니라 조선조 5백년간 팔도감사를 지낸 두 분 중의 한 분으로 밝혀졌다.



     

    반총장의 직계선조는 松崖 潘碩枰(1472~1540)으로 8도감사와 5도병사, 한성판윤, 공조 및 형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는 발굴내용은 반총장 당선과 함께 도민에 뿌뜻한 자긍심을 가져다 줬다고 판단된다.



     

    물론 역사상 감사나 판서보다 더 높은 우의정, 좌의정에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도 무수하게 많다.

     



    그러나 함경도에서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팔도감사를 두루 거친 이색적인 인물은 조선조에 단 두 사람에 그친다.



     

    조선조 개국공신인 함부림( 咸傅霖, 1360~1410)에 이어 군산출신 반석평이 조선왕조 5백년 동안 팔도감사를 역임한 두 분 중의 한 분으로 강원도 등지에서 연구보고서까지 나왔다.



     

    더욱이 후손이 '관산별곡'이라는 전기까지 발간한 사실이 오래 전 알려지자 정확한 고증을 거쳐 '감사마을' 조성 등 지역개발에 활용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신분적 제약 등 갖은 역경을 극복하고 고위직을 역임한 송애 반석평은 역사상 손에 꼽을만한 인물이다.



     

    더욱 전북 입장에서 '오백년만에 팔도감사 발굴' 소식은 가뜩이나 인물 및 문화유산이 빈곤한 전북지역에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격'이 되고 있다.



     

    특히 군산시의 경우 최근 인구가 급감하고 타지역으로 이주민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낙후와 소외를 면치 못하는데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타지역은 물론 전주 익산 등 도내 여타 지역보다 뒤쳐졌다는 인식이다.

     



    현재 군산시는 식민지 시대 조선인의 삶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탁류'의 작가 채만식 선생의 생가조차 완전 복원치 못하고 있다.

     



    또한 옥구읍 출신 항일투쟁가인 임병찬 선생을 소재로 한 지역개발도 지지부진하고 있다.



     

    이에 상당수 지역민들은 "남원시가 흥부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묘비를 발견한 이후 고증을 거쳐 '흥부마을'을 조성한 것을 참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남원시가 기존 춘향전과 관계있는 광한루에다 흥부마을을 대규모로 조성하고 이를 축제나 특산품 제작 판매까지 활용하고 있다.



     

    더욱 '변강쇠와 옹녀마을'까지 만들어 지역개발에 활용함은 물론 작가 최명희 고향에 '혼불문학관'까지 크게 정비를 마쳐 관광수익 증대에 활용한다.



     

    정읍시는 현존 유일의 백제가요 가운데 한글로 기록돼 전하는 가요 중 가장 오래된 '정읍사(井邑詞)'를 활용해 노래비와 백제 여인상 등을 세워 휴식 및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데 정읍사 공원 등 면적만도 5만 평에 이른다.



     

     익산시도 시조로 유명한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를 복원해 학생을 비롯한 관광객 탐방로로 활용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부안군은 공동묘지로 잡초 속에 묻혀 방치되던 이매창묘를 활용해 매창공원으로 만드는 등 역사적 인물이나 소설 및 설화 등을 소재로 지역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군산시 회현면 고사리에 최근까지 남아있다 음성군 행치마을로 이장한 송애 반석평 부모묘지와 각종 자료에서 알 수 있듯 조선시대 두 분 밖에 없던 팔도감사 반석평이 군산출신이라는 것은 알아본 바와 같다.



     

    그러나 현지에는 마땅한 표지판 하나 없이 방치되고 있어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춘천과 충주 등 타지에서는 반석평에 대한 연구논문까지 나온 상태에서 정작 출생지인 전북에서는 아무런 자료조차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세계 대통령'이라는 유엔사무총장에 당선돼 07년 1월부터 공식임기에 들어갈 반기문 총장이 바로 팔도감사 송애 반석평의 시호를 딴 장절공 행치파로 직계후손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차제에 전북도가 추진해온 '전라감영' 복원시 팔도감사에 대한 활용방안을 모색하고, 군산시도 그의 탄생지로 추정되는 마을에 표지판을 세우고 '감사마을' 조성 등 활용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문화예술 뿐만 역사상 인물을 지역개발에 활용하는 것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조류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당선자로 충북이 떠들썩하다.



     

    음성군은 반기문 총장 당선자 생가를 성역화하고 고향마을을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출생기념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원남면 상당1리 행치마을을 관광명소로 조성키 위해 주변 환경을 정비하고 행랑채 일부만 남아 있는 반 총장 생가터를 매입, 복원한다.



     

     생가 주변에 조경수도 심고 마을 연못과 농로를 정비하며 이곳을 찾는 탐방객이 반 총장 출생, 성장과정을 쉽게 이해하도록 표지판도 설치하고 진입로와 지하도를 확포장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 반 총장의 직계선조로 팔도감사를 역임한 송애 반석평 선생을 활용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감사마을 조성과 관광상품 활용 및 축제 등 다양한 방법이 모색될 수 있다.


     

    관계자와 당국의 적극적인 관심이 촉구된다./고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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