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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솔바람 따라 봄 물결이는 관동(2)
    강원제주탐라표해록 2006. 3. 9. 18:45
    솔바람 따라 봄 물결이는 관동(2)
    안보전시관.준경.영경묘.공양왕릉.죽서루.추암.
    2006. 2. 26. 날씨 포근함

     

    밤새 강릉 안목의 파도는 술 몇잔에 잠든 길손의 단잠을 깨울 요량으로 길게 넌출거리고 겹겹히 포개져 뭍으로 몰려오는 너울은 백사장을 사정없이 덮치며 가더니 해변에 늘어선 솔가지로  해풍은 쉰소리로 목을놓고 울어댄다. 9시경 숙소를 나와 순대 해장국으로 요기를 취한후 길손은 일어섰다. 강릉은 적송의 고장인지 곳곳에 늘어진 소나무의 품세가 정말 아름답다. 어릴적 부터 신사임당의 교훈과 금강송을 보고 자란 강릉여인의 지조는 대단하다는 군복무 시절 부관의 말이 새삼 생각나 한번더 해장국집앞 적송을 바라보며 차에 올랐다.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안보전시관에 들렀다. 이승만 전대통령의 전용기에 올라 기내를 돌아본후 옥빛 물감을 풀어놓은듯 맑은 동해바다가 날을 세우듯 흰포말을 밀며 파노라마를 펼쳐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하는 나그네는 아늑한 행복감에 젖는다. 남해바다는 올망졸망한 섬들이 둥둥 띄워져 아름답다면 동해는 드센 파도와 긴 백사장 그리고 겹겹히 포개져 밀려오는 파도의 유희가 장관이다. 무엇이 그리도 한이 많은건지 아니면 무엇이 분노를 솟게 하는지 대양 동해의 파도는 거부할줄도 모른체 천년만년 꿈쩍도 하지않는 바위를 향해 오늘도 연신 발길질을 해댄다.     

     

     

    정동진으로 가는길 아니 정초 해돋이가 장관이었던 옥계 망상 해변으로 가는길이다.

    왠지 낮이 익다 싶더니 아름다운 곳으로 다시 길손을 데려다 놓는다.

    봄이오고 있다.

    물빛은 이미 오래전에 춘색(春色)인듯 파도의 왈츠는 신바람이 났다. 기지개를 켠 바다는 거칠것도 없이 도전하듯 나를향해 달려든다. 세상살이에 지쳐 두렵고 나약한 필자를 조롱하듯 더 큰 몸짓으로 용트림하며 달려든다. 물빛이 하늘을 쳐다볼수 없게 만든다. 바다가 하늘이고 물빛이 곧 하늘이다.

    합궁골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남근같지 않은 남근바위옆 표지판에서 합궁골의 전설을 얻고 다시 해변을 향해간다. 웃통을 드러낸 소년들이 축구공 하나에 봄을 굴리고 있는 망상 해수욕장 드넓은 백사장엔 지난 여름날의 함성처럼 파도소리가 가슴까지 일렁이게 한다.

     

     

                

     

     

    합궁골.

     

     

       망상 해수욕장

     

    생전 처음 지나는 묵호항을 돌아 환선굴과 두타산을 가는 댓재 방향 38번 국도를 가던중에 우측 영경묘의 표지판을 만났다. 삼척시 미로면의 호젓한 지방도를 따라 조금 들어가 마을 경로당앞에 차를 세우고 맞은편 다리를 건너서면 송림속에 영경묘가 있단다. 묘 아래 양지 바른곳에 자리한 독가 입구에 마른 장작들이 쌓여있는게 참 따뜻하게 보인다. 산새소리 마져 나즉히 들려 산중임을 암시하고 솔바람은 얼굴을 간지르며 지나간다. 삼척시 미로면 하사전리 산53.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모의 묘로 목조의 어머니인 이씨의 묘란다. 개국후 태조를 비롯하여 여러 임금들이 묘지를 찾을려고 백방으로 수소문 하던것을 고종 광무3년(1899년)태조의 5대조 묘인 준경묘와 함께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세웠다고 삼척시의 표지판이 당시를 말해주며 서있다.

     

     

    영경묘 입구. 처음부터 솔향이 코끝에 스며들어 상쾌하다.

     

     

    영경묘. 사진 좌측이 제각. 우측이 비각이다.

     

    예나 지금이나 힘 있는자들의 특혜는 살아 있을때는 그 기세가 하늘에 닿고 그것도 모자라 죽어서도 누리는 혜택은 명산 명당만을 깔고 앉았다. 언젠가 풍수지리학에 상당한 권위를 지닌 지인의 말은 이제 대한민국엔 단 한곳도 명당자리는 없단다(권문세가들이 다 차지함) 혹 지관이 명당이라고 권하는것은 고액의 금전을 요구하는 수단이니 절대 말려들지 말라는 이야기가 납득이 간다. 일단 필자의 생각으로도 국토의 척추인 대간줄기가 도처에 파헤쳐저 지혈이 끊어졌을 것이고 정간.정맥. 심지어 곁가지를 친 기맥 또한 난개발앞에 무수히 끊어진 현실에 무슨 명당자리가 남아 있겠는가?   

    영경묘를 둘러싼 금강송의 자태가 군자의 덕목처럼 느껴져 한참을 심취해 있다가 비각과 제각을 둘러본후 준경묘를 향해 내려선다.  

     

     

    혼례소나무. 철제 보호막안 쭉 뻗은 소나무 

     

    준경묘(濬慶墓)를 가는길은 영경묘에서 다리를 건너 직진한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산149. 묘 표지판이 서 있는 활기리에 도착하니 산불감시원이 탐방객들의 인적사항을 적은 명부를 내어놓는다. 양지바른 공터에 모인 산골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가 봄햇살보다 더 화사하고 아이들의 머리위로 첩첩산을 넘어온 봄이 내려 앉는다. 준경묘까지는 1.8km. 가파른길과 호젓한 솔숲길을 발품을 팔아야 하지만 부부또는 연인은 물론 혼자 걸어도 정말 정겨운 드라마속 같은 산길이 여기에 있다. 시작은 시멘트 임도이지만 능선에 올라서면 솔향과 산새소리 그리고 잘 생긴 금강송이 너스레를 떨며 양팔을 벌리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이 숲길에 서면 모두가 밀어를 나눌 분위기다. 아니 정다운 대화가 없으면 이 길은 너무 지루할 것이므로 저절로 대화가 무르익어 갈 것이다. 길목에서 필자는 특이한 사건 하나를 접하게 된다. 소나무가 혼례를 한 사건이다. 그것도 정이품송과 혼인을해 한국의 기네스북에 오른 이 사건의 전모는 아래 표지판을 대신한다. 주변 적송들이 모두 기품있지만 유독 이 소나무는 길손 눈에도 확연히 달라 보였다.

     

     

    혼례 소나무의 위용

                     

     

    늘어진 솔가지에 감탄하며 다리를 건너자 골을 울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 가만히 살펴보니 허허 필자도 모르게 해동된 작은 연못안에 벌써 알을낳은 맹꽁이떼가 집요하게 봄이 왔다고 난리를 치더니 다가간 나그네 발소리에 놀라 울음을 딱 그치고 일시에 입수를 한다 . 잔설사이로 그렇게 봄은 개울가에 버들개비의 보송보송한 털을 달아 놓더니 어느새 봄 합창대 마져 데려다 놓았다. 좌 청룡. 우 백호. 범부도 다 아는 명당자리의 기본이다. 준경묘는 세인의 눈에도 명당으로 보였다. 여인의 사타구니에 터를 잡은형상 그리고 근처의 금강송(적송)이 일제히 묘를 안듯이 머리를 조아리며 숙어져 있는게 정말 신기하다. 제각옆 거북에서 나오는 생수로 목을 축이며 또 다시 묘역 금강송의 자태에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나 나무도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그 품격이 다르다는걸...이른 봄나들이를 나온 연인들과 가족들을 돌아가는 길에서 만났다. 아름다운 금강송이 떠나는 길손을 자꾸 불러 세우는것 같아 또 한번 뒤돌아보며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릉이 있는 궁촌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준경묘

     

    삼척시 근덕면 궁촌 바닷가 기슭 양지쪽에 누워있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과 3부자.

    천하의 이성계도 이들을 살려두고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수 없었을까 ?  왕릉치고는 초라하기 그지없어 힘없는자의 설움이 묻어난다. 현재의 것보다 더 초라한것을 개축까지 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흥망성쇠가 한눈에 들어온다. 기세등등한 개국자들의 억누름에 점차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는 부자간의 정마져 애증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비운의 사연을 적은 표지판이 길손을 능으로 데려간다.

     

     

    공양왕릉과 3부자 묘

     

    이 능은 일명 궁촌왕릉으로 불리고 있으며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그의 아들 왕석.왕우.등 3부자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양왕4년(1392년)7월에 이성계가 즉위하자 8월에 전왕을 폐하여 공양군으로 봉하고 강원도 원주에 귀양 보내어 감시하다가 다시 왕과 맡아들 왕석.둘째아들 왕우를 간성으로 옮겨으나 역시 불안하여 1394년(태조 3)3월14일에 3부자를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로 귀양지를 옮겨 한달뒤 4. 17. 그들을 모두 죽였다고 전한다. 공양왕이 귀양와 묻힌곳으로 전해지나 그 후 경기도 고양시 식사리 대자산으로 옮겨가고 그곳에 현재 공양왕릉과 왕비릉이 사적제 191호로 지정되어 있다.

    1421년 공양왕의 왕녀(단양군 이성범의 부인)가 세종에게 상소하여 아버지를 공양왕으로 어머니를 왕비로 추봉하고 왕릉을 정릉으로 정하였다는 기록을 여기 적어보면서 이제 관동팔경의 하나인 송강 정철이 쓴 주옥같은 별곡이 오죽과 정자에 묻어나는 죽서루로 가야겠다.

    흰 포말 끝없이 밀려오는 해변을 따라서...   

     

     

    겹겹이 포개져 흰포말로 뭍으로 쉼없이 달려드는 아 ! 동해바다여

     

    옥빛 오십천 기암절벽에 그림으로 선 죽서루,

    누대에 오르니 범부의 가슴에도 시심이 요동친다. 

    바람이 오죽잎을 스치는 소리가 명기가 뜯는 애수어린 가야금의 소리가 되어 귓전에 돈다.

    예전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모여 오십천 물빛보다 더 밝은 소리로 시와 노래를 불렀을까? 

    죽서루의 이름이 지어진게 재미있다. 누 동쪽 죽림에 죽장사가 있어 죽서루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고 누 동쪽에 명기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전하지만 길손 생각엔 오죽숲이 있어서 지어진게 아닐까 한다. 창건연대는 불분명하나 고려때 학자인 이승휴가 고려 원종7년(1266년)서루에 올라 시를 적었다고 하니 그 이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죽서루의 서액중 제일계정은 현종3년(1662년)부사 허목이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는 숙종37년(1711년)부사 이성조가 썻다.

    그외 율곡 이이등 명사들의 시액이 굽이쳐 흐르는 옥빛 오십천의 물살마냥 고운글로 아직 남아있다. 

     

     

     

     

    이제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추암을 보기위해 죽서루 문을 나선다.

    동해의 거센 파도와 사는 추암의 촛대바위.

    애국가의 일출 영상으로 일약 관광 명소로 급부상 하면서 년중 여행객들을 불러 모운다. 

    촛대바위는 용트림하듯 차고 오르는 파도를 안으며 대양의 설레임을 귀엣말로 듣는듯 하니 여기서 길손은 봄맞이 심춘 테마여행의 정점에 도달하고 강한 그리움을 담아낸다.  자연이 인간에게 보여질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 조각의 달인이라도 도저히 흉내 낼수없는 그 어떤 경지가 여기에 모여 있는것 같다. 강한 바람에 오래 머물수없어 서둘러 전망대에 올랐다가 갈길을 재촉한다. 차츰 어둠이 드리워지고 아들 또래의 군인들이 소초로 향하는걸 보니 겨울내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해안에서 근무하는 아들 생각에 목젖이 뜨겁다. 길잡이님은 대간길인 백봉령에 이 고장 별미인 감자옹심이와 강냉이 막걸리가 사람들 발목을 잡는다며 그곳으로 데려가 정통 메밀전과 옹심이를 시켜 먹어보니  옹심이는 생감자 처럼 톡쏘는듯한 애한 맛이 받혀 이 맛에 길들여지지 않은 필자는 거북하여 결국 메밀 국수가락만 건져 먹었다. 산중 재의 어둠은 왜 그리도 빠른지 멀리 두타산도 검은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내일은 또 일상이 무섭게 기다리고 있겠지...

     

     

    추암 해수욕장과 촛대바위

     

     

    촛대바위

     

     

    메밀(전)부침개

     

     

      감자 옹심이

      


     
    출처 : 블로그 > 산길 묻거들랑 | 글쓴이 : 기산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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