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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최명희
    <김제>정치의회인사도시청사 2006. 3. 1. 12:57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그러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기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 나는 마치 한 사람의 하수인처럼, 밤마다 밤을 새우면서,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넋이 들려,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가라는 대로 내달렸다. 그것은 휘몰이 같았다.

     

    저는 달빛을 어둠 속에서의 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요. 그래서 달 중에서도 꽉 들어찬 만월을 좋아해요. 그런데 달이 뜨지 않는 그믐날은 아예 희망이 없는 때로 봐야 할까요? 외조부님이 말씀하시길 '그믐은 지하에 뜬 만월이지'하고 말씀 한 자락 툭 던지셨어요. 큰 깨침을 주셨죠. 저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그믐에 뜬 지하의 만월이고 싶다'는 것이죠.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천필만필 마다하지 않았다. 한 문장 아니 토씨 하나를 찍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쉼표 하나가 나의 모든 것을 요구한다' 역사 자료는 혼불이 아니라도 도서관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중요한 건 역사의 느낌을 복원하는 것이다. 박제돼 있는 선조들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어 오늘의 내 삶과 한 탯줄로 잇기 위해서는 어머니 할머니의 목소리를 그대로 혼불 안에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문방오우. 만년필 자 칼 줄 가위를 가지고 끝없이 오리고 붙이고 다시 쓰는 과정이 내 작업이다. 기억이 최초의 자료지만 준비한 자료와 경험이 섞여 내 속에 체화되고 나와 한 몸이 될 때까지 수십만 번을 주무른다. 온 밤 내내 쉼표를 찍었다 지웠다 했다는 시인처럼, 나도 때론 쉼표 하나를 어쩌지 못해서 며칠을 보낸 때도 많았다.

     

    연은 자신의 상처를 이마에 붙이고 그곳을 운명, 즉 바람을 이겨내는 가장 강한 곳으로 만들어 날아갑니다. 가운데가 뻥 뚫린 채, 상처와 함께 그 빈 가슴으로 무궁한 하늘을 비추며, 하늘과 한 몸이 되어 비상합니다. 나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삶의 비밀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아! 사람의 생애도 그러하리라' 절망이 어떻게 삶의 위로가 되고 상처가 어찌하여 생의 텃밭이 되는지를 깨닫게 하는 삶의 역설을 그때 들은 겁니다.

     

    혼불을 통해 우리말 속에 깃들인 우리 혼의 무늬를 복원하고 싶었다. 국제화다 영상시대다 들떠서 누천년의 삶이 녹아 우러난 모국어가 단순한 기호로 흩어져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럽다. 나는 혼불을 통해 순결한 모국어를 재생해보고 싶었다. 전아하고 흐드러지면서 아름답고 정확한 모국어의 뼈와 살, 그리고 미묘한 우리말 우리혼의 무늬를 어떻게 하면 복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늘 나를 사로잡는 명제였다.

     

    액막이연 하나를 만들 때도, 작은 골무 하나를 감칠 때도 온 마음을 다해 공을 들이는 혼불의 인물들, 그것은 삶에 대한 기도이다. 모든 것이 일회용으로 쉽게 만들어지는 현대를 살며 다 잊어버렸지만, 우리 어머니 할머니는 그렇게 일상사의 작은 것에도 온 마음을 기울여 사셨다. 혼불을 쓰면서 그 공들임의 자세를 닮으려 했을 뿐이다.

     

    다들 17년, 17년 하지만 그것은 17년 전인 80년 봄에 원고지 첫 장을 썼다는 사실에 불과하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배어든 경험이 저절로 넘쳐서 여울이 되고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 어귀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런 근원에 대한 그리움,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 그것이야말로 내가 혼불에 투혼한 바탕이다.

     

    혼불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혼불 속의 혼불들, 등장인물들이 저네들끼리 타올라서 쓴 것이다. 저희끼리 간절하게 타오르고 있는, 한 시대와 한 가문과 거기 사람들의 쓰라린 혼불들. 나는 그 불길이 소진해 사윌 때까지 충실하게 쓰는 심부름꾼의 역할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고통스럽지만 가장 황홀했던 시절이었다. 혼불과 혼연일체가 되어 기쁨과 괴로움을 함께 나눴다.

     

    나는 평생 소설을 쓰렵니다. 줄타는 광대가 광대로서 사는 것은 그의 몸에서 돌아가는 피가 그를 부르기 때문이지요. 나도 내 몸에 도는 피가 나를 부르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겁니다.

     

    혼불 하나면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 잘 살다 갑니다.


     
    출처 : 블로그 > 나 | 글쓴이 : 나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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