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Today
Yesterday
Total
  • 역사 ((의자왕 3천궁녀는 사실일까?...))
    (문화)문화원문화재단서원향교무속 2001. 6. 12. 05:39



    가끔 부여 낙화암에 들린다...

    항상 가 보면 백마강은 말없이 유유이 흐르고 있어 1천3백여년 전 3천 궁녀가 투신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러나 가끔은 의자왕이 과연 3천 궁녀를 거느렸을까 하는데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꽃이 떨어졌다)는 의미의 낙화암(落花巖)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이다...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 즉 여자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이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용기가 많고 재주가 많았는데 여러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명성을 높인 뒤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망해정(望海亭)에서 궁녀들을 데리고 가무주연(歌舞酒宴)의 향락을 일삼았다...

    좌평 성충은 이를 근심하고 극력 간언 하였으나, 왕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자 그는 마음이 아파서 죽고 말았다...



    이러할 때 일찍이 백제의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무열왕 및 김유신 등이 나라의 힘을 길러 복수를 하고자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은 5천의 적은 군사로써 황산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효를 데리고 웅진성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성문은 부서져 열리고 말았다...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대왕포(大王浦)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역사는 항시 승자에 의해서 기록 되어지며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승자에 의해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황음무도하고 패륜아로 그리기 위해 3천 궁녀를 만들어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백제 31대 의자왕 (義慈王)은 마지막 왕으로 641년부터 660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무왕의 맏아들로서 태자 때부터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형제와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 (海東曾子)’로까지 칭송되었고, 또 아들의 이름을 효(孝: 뒤에 태자가 됨)로 지을 정도로 효도의 덕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유교사상은 당나라의 국학에 자제를 보내어 입학시키는 등 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부왕인 무왕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고구려와 중국에 대하여 취해온 양면적인 외교노선을 수정하여 친고구려정책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정책변경에는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집권과 연개소문의 대중국 강경노선정책 및 신라와 당나라의 밀착관계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고구려와 연계성을 확립한 뒤 의자왕은 신라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압력을 가하였는데, 642년에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게 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성주 품석(品釋: 金春秋의 사위)과 그 처자를 죽이는 등 신라를 큰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을 공격하여 당나라와의 교통로를 차단하려고도 하였으며, 645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군을 동원한 틈을 타서 신라의 서쪽방면의 7성을 빼앗기도 하였다...

    또,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당나라의 위협적인 권고에도 불구하고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경계의 30여 성을 공파(攻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욕적인 활동도 만년에 이르러 사치와 방종, 귀족들의 내부 분열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더구나 궁중 안에서는 군대부인(郡大夫人)이 권세를 장악하고 어진 사람을 마구 죽이는 바람에 국가의 통치질서는 붕괴되고 말았다...

    여기에 더하여 빈번한 신라와의 전쟁은, 거둔 승리 못지않게 국력을 피폐시키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고립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에 멸망

    660년 나당연합군은 백제공격을 개시하여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당군은 수로로 백강(白江: 지금의 금강)을 건너오고, 김유신(金庾信)이 거느린 신라군은 탄현(炭峴: 지금의 대전 동쪽)을 넘어 왕도(王都)로 육박해왔다...

    계백(階伯)이 거느린 5천명의 결사대는 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하고 금강하구에서 당군을 막던 군사도 패배함에 따라 수도 사비성(泗城: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은 나당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사세가 다급하여지자 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태자와 함께 웅진성(熊津城: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피하였다가 사비성이 함락되자 마침내 당나라 군대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 결과 백제는 개국한 지 678년 만에 망하고 말았으며, 왕은 태자 효, 왕자 융(隆) 및 대좌평 사택천복(沙宅千福) 등 대신(大臣), 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만2천여명과 더불어 당나라로 압송되어 갔으며 거기서 병사하였다...





    역사는 의자왕과 백제 멸망 사실을 위와 같이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승자에 의한 기록과는 크게 차이가 날 때가 많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 멸망 당시 부여의 인구는 1만 가구에 5만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5만 인구의 수도 부여에 무려 3천명의 궁녀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나라가 고구려 백제 신라로 삼분되지 않고 훗날 지금의 한반도 전체를 국토로 한 조선시대에도 궁궐에 3천 궁녀가 있을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만약 3천 궁녀가 사실이라고 할 경우 부여의 궁궐터에는 이에 대한 근거가 남아 있어야 한다...

    최소한 이들이 묵을 숙소 등 건축물의 규모가 보통 방대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 어디에도 3천 궁녀가 머물렀다는 건축물에 대한 기록이 없다...



    또한 발굴조사를 해봐도 이처럼 많은 궁녀가 머무른 흔적조차 없다는 것이다...




    결론은 몇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승자인 통일신라의 사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패자인 의자왕의 황음무도와 패륜이 부풀러졌을 거라는 것이다...

    그러자니 자연 3천 궁녀가 나왔을 것 같다...

    둘째 나라가 흥망의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는 장군이나 군사 등은 자기 처자식을 죽이고 전쟁터에 나가거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도록 강요 받았다...

    계백장군에 대한 기록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백제의 마지막 저항군인 5천 결사대의 장수나 군사의 처자식들이 궁궐로 대피해 머무르다가 나당연합군이 처들어 오자 왕의 비빈과 궁녀들과 함께 낙화암에 뛰어들었을 거라고 분석하는 학자도 있다...

    적군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은 왕가나 장수의 처자식들이 주로 선택했음은 여러 역사적 기록이 증명해 주고 있다...

    셋째 일제시대 식민지 사관을 가진 학자들이 백제를 의도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꾸며 냈을 거라는 점이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에 의하면 (여러 비빈들)이 자살한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까지 어느 기록에도 3천 궁녀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식민지 사학자들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의 기록에 의하더라도 백제가 멸망하던 날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 올라가 물로 투신자살했다고만 적혀 있다...

    물론 의자왕이 어느 정도 술을 가까이 했다는 기록은 나온다...

    조선조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과음으로 폐해가 심해지자 (신라가 망한 것은 포석정의 술판 때문이었고 백제가 낙화암에서 멸망한 것은 모두 술 때문이었으니 백성들은 과음을 삼가하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인구 5만이 채 되지 않는 사비성에서 3천 궁녀를 거느리고 황음무도하다가 패망한 것이라는 항간의 설들은 허무맹랑한 것이 틀림없다...





    어쨌든 부여에 갈 때 마다 의구심이 나는 3천 궁녀는 사실이 아님이 분명하다...




    낙화암 앞을 흐르는 백마강은 여전히 말이 없이 유유이 흐르고 있다...

     

     

     

     

     

     

     

     

     

     

     

     

     

     

     




     

    '(문화)문화원문화재단서원향교무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주관상수상 블로그))jeeheanju  (0) 2006.03.22
    ((풍수지리 싸이트))  (0) 2006.03.05
    무속무당 블로그  (0) 2006.02.10
    한국역사블로그  (0) 2006.01.27
    ((독립투사 블로그))yyglc  (0) 2006.01.14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