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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잉그리드 버그먼(Ingrid Bergman)
    배우텔런트모델미인왕비태자비 2005. 11. 3. 16:42
    [잉그리드 버그만]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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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잉그리드 버그만

    출생 : 
    1915년 08월 29일

    사망 : 
    1982년 08월 29일

    출생지 : 
    스웨덴 스톡홀름

    신체 : 
    178cm

    학력 : 
    스웨덴 왕립연기학교

    직업 : 
    영화배우

    데뷔 : 
    1935년 영화 'Munkbrogreven'으로 스크린 데뷔

    수상경력 : 
    1945년 아카데미/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1946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1957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1975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1976년 세자르상 명예상
    2005년 영화잡지 프리미어선정 '위대한 영화스타 50인' 5위

    출연방송 : 

    출연영화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잉그리드 버그만은 부드러운 얼굴 윤곽이,

     

     

     


    ▼잉그리드 버그먼 (1915년생)

     

     

     

     

     

     

     

     

    잉그리드 버그만 (Ingrid Bergman) | 해외연예 2005/03/31 04:10
    http://blog.naver.com/jb0351/120011550533
    출처카페 : classic cinema / 내코드
     

     
     
     
    1945년 가을, 버그만은 <무방비 도시>를 뉴욕에서 보았다.  이 이탈리안 리알리스모 선구자의 작품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헐리우드 영화에선 기대할 수 없는 선열한 주제이고, 영상이었다.  로베르토 롯셀리니 감독의 작품에 나서고 싶다고 생각했다.
    1948년 봄, 다시 뉴욕에서 롯셀리니의 <전화의 저쪽>을 보고 더욱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저 유명한 서한을 보냈다.
    <친애하는 롯셀리니씨에게.  나는 당신의 영화 <무방비도시>와 <전화의 저쪽>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만일 스웨덴 여배우를 필요로 하신다면 저는 서슴치 않고 찾아가 귀하와 영화를 만들 용의가 있습니다.  나는 영어는 자유자재롭고 독일어도 잊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어는 전혀 잊었고 이탈리아어로 알고 있는 것은 Ti Amo 뿐입니다.  잉글리드 버그만>
    이 '티 아모'는 <개선문>에서 쓴 말인데  그  뜻은 I Love You이다. 버그만으로선 가벼운 뜻으로 썼으난 롯셀리니러선 할리우드 스타로부터이 이런 편지를 그저 팬레터로서만 보아 넘길 수는 없었다.
     
     

    1949년 1월 롯셀리니가 <전화의 저쪽>으로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을 받은다음 <스트롬블리> 제작 협의차 로스앤젤레스로 향했을 때 세상은 소란했다.
    이로부터 불과 1개월 후 버그만은 롯셀리니의 안내로 이탈리아 관광 여행을 즐겼다.  마침내 버그만은 남편 린드스트롬에게 이혼을 제의 했고, 버그만과 롯셀리니는 로마에서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녀의 임신 뉴스가 파다하게 나돌았다.  전 미국의 여론은 들끓었다.  순진무구한 베네딕트 수녀, 쟌다르크가 불륜의 관계에 빠진데 대해 분노했다.  1950년 2월, 두 사람 사이에 로벨티노가 태어났다.  요즘 같으면 프리섹스로 처리되겠지만, 당시의 세정으로는 분격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다.  버그만은 헐리우드에서 얻은 재산 대부분과 딸 피아를 남편에게 넘기고 롯셀리니와 <스트롬벨리>를 제작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이탈리안 리얼리스모의 아버지와 럴리우드 스타가 만들어낸 작품치고는 졸작이었다.  계속 만든 작품도 마찬가지로 졸작이었다.  심지어 저널리즘은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혹평까지했다.  버그만은 남편과의 작품은 자신이 바라는 예술적 결과를 초래하지 못함을 비로서 깨닫게 되었다.  이탈리아 주간지 '오지'는 안젤로 소르미의 말을 게재했는데  그것은 통렬한 것이었다.
    "여섯 작품은 모두 나쁜 결과가 되었다.  이 부부는 관객에게나 비평가에게 줄만한 아무런 것도 창조하지 못함을 드러냈다.  한때 그레타 가르보의 후계자로 지목된 명 여배우였던 버그만의 근래의 작품은 그녀 자신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렇듯 가혹한 비평, 결과의 저조로 인해,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에 이르렀고, 그처럼 불타던 정열도 차차 식어갔다.  버그만은 1956년 <사랑많은 여자>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헐리우드로 돌아왔다.  1958년 혼인 무효 판결이 내려 동년 연극 프로듀서인 슈미트와 사실상 세번째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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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잉그리드 버그만은 2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잃고 사진관을 경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2세때 아버지 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숙부의 밑에서 자라게 된다. 1933년 스웨덴 왕립 연기학교(The Royal Dramatic Theater)에 입학해 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녀는 1934년 으로 영화계에 데뷔한다. 이 영화로 인해 스웨덴에서 촉망 받는 여배우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그녀는 구스타프 몰란더스의 <인터멧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1939년 헐리우드로 진출한 잉그리드 버그만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작한 데이비드 O. 셀즈닉의 눈에 띄게 되고 <아담의 네 아들>, <천국으로 가는 장의사>,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 출연하면서 연기 세계의 폭을 넓혀간다. 그리고 1942년 파라마운트 창사 50주년 기념 대작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캐스팅이 될 뻔 했지만 그만 중도에 탈락을 하게 되고 같은 해 제작된 <카사블랑카>에 출연을 하게 된다. <카사블랑카>가 그녀의 출연으로 인해 성공하게 되자 파라마운트는 다시 그녀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캐스팅 한다. 게리 쿠퍼와 함께 출연한 이 영화로 그녀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된다.

    이듬해인 1944년 <가스등>으로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그녀는 게리 쿠퍼와 함께 <여행 가방>에 출연하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스펠바운드>에서는 정신과 의사역을 맡기도 한다. 하지만 <스트롬볼리>에서 함께 작업한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염문으로 배우 생활에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미국 상원으로부터 "할리우드의 명예를 더럽힌 배우"로 낙인 찍히기까지 했던 잉그리드 버그만은 1956년 아나톨레 리트바크 감독의 <아나스타샤>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받은 이 작품으로 그녀는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된다.

    1972년 그녀는 암선고를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과 <가을 소나타>에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펼쳤고,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으로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에미상 수상식 참여를 끝으로 1982년 8월 29일 자신의 생일 날 친구들과의 생일 파티 후 조용히 숨을 거둔다.

    스타로서의 고귀함과 순수함을 갖춘 배우로 평가받는 잉그리드 버그만은 북유럽의 액센트와 화장기 없이도 고혹적인 풍모로 당대의 스크린을 풍미했던 글래머 스타들을 압도하는 배우였다. 그녀의 우아한 미소와 범접하기 힘든 자태는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를 헐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기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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