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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사리장엄 이전, “선화공주 토착세력” 주장
    <칼럼사설수필> 2019. 1. 9. 11:08



    <2009년 1월의 사리장엄 발견 이전, 가장 정확하게 예견한 책과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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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사리장엄 이전, “선화공주 토착세력주장



    올해는 기해년 황금 돼지해다.



    온통 황금으로 된 사리장엄 봉안() 연도인 서기 639년도 기해년이다.



    올해가 사리장엄 발견 10주년周年, 봉안 23주갑周甲(1380주년)이다.









    선화공주가 백제인으로 토착세력의 딸이라는 주장은 사리장엄 발견 이전부터 있어왔다.



    신라 진평왕 딸, 선화공주와 서동설화가 담긴 삼국유사는 고려말 일연스님(1206-1289)이 현재 터만 남은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서 1279-81년께 저술하고 입적했다.




    삼국유사 외에는 한중일 사서에 기록이 없는데다 당시 백제와 신라 무수한 전쟁, 특히 백제가 주로 공격했다는 점, 경주와 부여는 사투리도 확연하고 현재도 익산에서 오가기 쉽지 않은 등 여러 정황으로 통일신라·고려시대 수많은 전란으로 사료가 사라져 삼국유사 서동설화가 잘못된 구전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많았다.



    사리장엄이 발견된 2009114일 전부터 선화공주는 진평왕 딸이 아닌 토착세력이다.“는 주장이 적지 않았다.



    사리장엄봉안기 백제왕후 사탁적덕의 딸(사택왕후)이 선화공주일 개연성뒷받침하는 주장이 발견 전부터 나왔다.










    1999년 초판을 발행한 이덕일·이희근 공저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을 보자.



    우리 역사를 바꿀 34가지 오해와 진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 73-81p까지 서동설화의 주인공 선화공주는 신라인인가라는 내용 요약해 보자.







    선화공주님은/남몰래 시집가서/서동이를/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는 선화공주는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 셋째 딸로 미천한 서동과 정을 통했다는 서동설화다. 서동은 훗날 백제 30대 무왕(재위 599-600)이다. 진평왕과 무왕이 사위라면 있을 수 없는 공격이 있었다. 무왕 3(602) 신라 아막산성(남원 아영) 공격을 비롯, (무왕) 재42년 동안 13차례 공방을 계속하는데 다른 왕보다 훨씬 많았고 주로 백제가 공격하는 것이었다. 혼인이 사실이라면 두 나라는 동성왕과 소지왕이 맺었던 것처럼 결혼동맹을 맺은 것인데 삼국사기가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 백제 동성왕이 공주도 아닌 신라왕족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한 사실도 기록한 삼국사기가 무왕과 (선화)공주 결혼을 적지 않았을 리 없다. 두 나라 관계와 백제 내부 사정을 감안할 때 선화공주는 신라인이 아닐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미륵사를 지어달라고 요청한 인물이 선화공주다. 불우한 시절을 보낸 무왕(서동)이 정국중심이 되고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난 다음인데 공주 집안이 상당한 세력임을 뜻한다. 미륵사 창건과 연결시켜 보면 선화공주는 익산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토착세력임을 뜻한다. 무왕은 이 세력 도움을 얻어 임금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과거 공주라는 칭호는 국왕의 딸만 쓸 수 있는 용어가 아니었다는 점도 이런 추론을 뒷받침한다. 무왕은 이 세력에 보답도 할 겸, 왕권도 강화할 목적으로 미륵사를 창건한 것이다. 토착세력 출신인 선화공주가 어떤 경로를 거쳐 적국 신라 진평왕 딸로 변화됐는가 하는 점이다.



    사리장엄 발견 10년 전, 발행된 이 책은 사리장엄을 통한 사택왕후를 예견한 듯 쓰였다.








    2002년 발행된 박은봉의 한국사편지1을 보자.



    진평왕 때는 백제와 신라가 몹시 사이가 나빴을 때야. 무왕과 선화공주가 결혼했다면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니 반드시 기록됐을 텐데. 삼국사기는 한 마디도 없어. 그래서 학자들은 무왕이 익산사람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사람이니 선화공주는 익산의 유력한 집안 딸로 추측하기도 한단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어느 틈엔가 신라공주로 바뀌게 됐을 것이라고 말이야.




    고려 말, 금마군이 원나라 순제의 비, 기황후의 추향楸鄕(조상묘가 있는 마을)이나 외향外鄕(외가 마을)이어 익주益州로 승격됐다.“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익산은 무왕 때는 없던 지명이다.



    현재 익산은 금강만 건너면 부여와 맞닿았다.



    익산은 전····하 오부五部로 나뉜 백제수도 사비(부여) 외곽으로 당시 수도권이었을 개연성이 짙거나 사비 외곽도시였을 것이다.




    삼국유사와 사리장엄에 일치되는 내용이 많다는 점도 사택왕후가 사택선화라는 가능성을 짙게 해 준다./취재국장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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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사리장엄 이전, “선화공주 토착세력주장

    올해는 기해년 황금 돼지해다. 온통 황금으로 된 사리장엄 봉안() 연도인 서기 639년도 기해년이다. 올해가 사리장엄 발견 10주년周年, 봉안 23주갑周甲(1380주년)이다.

    선화공주가 백제인으로 토착세력의 딸이라는 주장은 사리장엄 발견 이전부터 있어왔다. 신라 진평왕 딸, 선화공주와 서동설화가 담긴 삼국유사는 고려 말 일연스님(1206-1289)이 현재 터만 남은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서 1279-81년께 저술하고 입적했다.

    삼국유사 외에는 한중일 사서에 기록이 없는데다 당시 백제와 신라 무수한 전쟁, 특히 백제가 주로 공격했다는 점, 경주와 부여는 사투리도 확연하고 현재도 익산에서 오가기 쉽지 않은 등 여러 정황으로 통일신라·고려시대 수많은 전란으로 사료가 사라져 삼국유사 서동설화가 잘못된 구전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많았다. 사리장엄이 발견된 2009114일 전부터 선화공주는 진평왕 딸이 아닌 토착세력이다.“는 주장이 적지 않았다. 사리장엄봉안기 백제왕후 사탁적덕의 딸(사택왕후)이 선화공주일 개연성뒷받침하는 주장이 발견 전부터 나왔다.

    1999년 초판을 발행한 이덕일·이희근 공저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을 보자. ‘우리 역사를 바꿀 34가지 오해와 진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 73-81p까지 서동설화의 주인공 선화공주는 신라인인가라는 내용 요약해 보자.

    선화공주님은/남몰래 시집가서/서동이를/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는 선화공주는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 셋째 딸로 미천한 서동과 정을 통했다는 서동설화다. 서동은 훗날 백제 30대 무왕(재위 599-600)이다. 진평왕과 무왕이 사위라면 있을 수 없는 공격이 있었다. 무왕 3(602) 신라 아막산성(남원 아영) 공격을 비롯, (무왕) 재42년 동안 13차례 공방을 계속하는데 다른 왕보다 훨씬 많았고 주로 백제가 공격하는 것이었다. 혼인이 사실이라면 두 나라는 동성왕과 소지왕이 맺었던 것처럼 결혼동맹을 맺은 것인데 삼국사기가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 백제 동성왕이 공주도 아닌 신라왕족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한 사실도 기록한 삼국사기가 무왕과 (선화)공주 결혼을 적지 않았을 리 없다. 두 나라 관계와 백제 내부 사정을 감안할 때 선화공주는 신라인이 아닐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미륵사를 지어달라고 요청한 인물이 선화공주다. 불우한 시절을 보낸 무왕(서동)이 정국중심이 되고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난 다음인데 공주 집안이 상당한 세력임을 뜻한다. 미륵사 창건과 연결시켜 보면 선화공주는 익산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토착세력임을 뜻한다. 무왕은 이 세력 도움을 얻어 임금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과거 공주라는 칭호는 국왕의 딸만 쓸 수 있는 용어가 아니었다는 점도 이런 추론을 뒷받침한다. 무왕은 이 세력에 보답도 할 겸, 왕권도 강화할 목적으로 미륵사를 창건한 것이다. 토착세력 출신인 선화공주가 어떤 경로를 거쳐 적국 신라 진평왕 딸로 변화됐는가 하는 점이다.사리장엄 발견 10년 전, 발행된 이 책은 사리장엄을 통한 사택왕후를 예견한 듯 쓰였다.

    2002년 발행된 박은봉의 한국사편지1을 보자. 진평왕 때는 백제와 신라가 몹시 사이가 나빴을 때야. 무왕과 선화공주가 결혼했다면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니 반드시 기록됐을 텐데. 삼국사기는 한 마디도 없어. 그래서 학자들은 무왕이 익산사람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사람이니 선화공주는 익산의 유력한 집안 딸로 추측하기도 한단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어느 틈엔가 신라공주로 바뀌게 됐을 것이라고 말이야.

    고려 말, 금마군이 원나라 순제의 비, 기황후의 추향楸鄕(조상묘가 있는 마을)이나 외향外鄕(외가 마을)이어 익주益州로 승격됐다.“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익산은 무왕 때는 없던 지명이다. 현재 익산은 금강만 건너면 부여와 맞닿았다. 익산은 ····하 오부五部로 나뉜 백제수도 사비(부여) 외곽으로 수도권이었을 개연성이 짙거나 사비 외곽도시였을 것이다 삼국유사와 사리장엄에 일치되는 내용이 많다는 점도 사택왕후가 사택선화라는 가능성을 짙게 해 준다./취재국장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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