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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마공원’ 교량세운다며, 초대형 암반파괴
    <금마> 2015. 3. 11. 09:57

     

     

     

     

     

     

     

     

     

     

     

     

     

     <서동마테마공원 진입도로 교량을 세울 위치에서 발견된 초대형 암반으로 일부 파괴됐다>

     

     

     

     

     

     

     

     

     

     

     

     

     

     

     

     

     

     <교량을 세우다 초대형 암반이 발견된 지척에는 양곡 7형제 생가터가 남았는데 현재는 민가 두채와 논밭으로 이뤄졌다>

     

     

     

     

     

     

     

     

     유상곡수흐르는 물에 띄워 자기 오기 짓는 놀이로 황각마을 입구에는 양곡의 금씨라는 유상곡수라는 암각서가 남아 있다.

     

     

     

     

     

     

     

     

     

     

     

     

     

     

     

     

     

     

     

     

     

     

     

     

     

     <황각마을에 남아 있는 양곡이 썼다는 하서대라는 암각서>

     

     

     

     

     

    서동마공원교량세운다며, 초대형 암반파괴

     

    -양곡 소세양 생가와 말년 거주지 지척

    -양곡 형제, 어릴 적 놀던 곳, 말년 보내며 남긴 암각서 곳곳

    -지표조사 및 시.발굴후 보존대책 수립해야

     

     

     

    한국농어촌공사 익산지사가 서동마농촌테마공원진입도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금마저수지 북단의 초대형 암반을 파괴하고 교량을 세울 계획이어 이를 보호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다.

     

     

     

    특히 황진이(黃眞伊, 1506~1567?)와 로맨스를 남긴 양곡 소세양(陽谷 蘇世讓, 1486~1562)이 초년과 말년을 보냈던 생가가 지척인데다 미륵산과 용화산 중간을 흐르다 금마저수지로 모아지는 도천道川 곳곳에는 양곡의 암각서가 남아 생가복원과 함께 암반파괴를 중단하고 문화재 지표조사 및 시. 발굴을 통해 보호대책을 세워야 한다.

     

     

     

     

    한국농어촌공사 익산지사는 국비와 시비 및 민자 등 1399300만원을 투입해 금마저수지 동편에 방문자센터와 주말농장, 농경체험장, 유실수원, 마공원 등을 내용으로 한 서동마농촌테마공원 조성사업을 2010년 착수해 2013년 준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산지원이 터덕거리고 각종 행정절차 미흡으로 2013년말 발주를 통해 2014년부터 공사에 착수했을 뿐 아니라 민자 6억원을 빼고도 남은 예산만 재정난을 겪는 시비가 17억원에 달해 2015년 준공도 불투명하다.

     

     

     

     

    이런 과정에 금마저수지 상류(북단)에 회전교차로를 포함한 폭 8m, 길이 250m 진입도로를 개설하며 P송어횟집 지척 도천道川 위에 폭 12m, 길이 25m의 새로운 교량을 세울 계획이다.

     

     

     

     

    그러나 다리를 세운다며 4~5m 가량 파내자 드러난 것만 10m에 달하는 초대형 암반과 기암괴석이 노출됐으나 공사관계자는 교각을 세운다며 암반을 일부 파괴한 상태에서 최근 주민들에 발견됐다.

     

     

     

    이에 주민들은 형조. 호조. 병조. 이조판서를 지냈을 뿐 아니라 우찬성. 좌찬성 등을 역임하다 을사사화 등 정쟁을 피해 1545년 낙향한 양곡 선생 7형제 생가가 초대형 암반이 드러난 교량 설치장소에서 10m 밖에 안 돼 무분별한 파괴보다 보호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곡은 송강 정철(鄭澈, 1536~ 1594)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시문과 글씨로 유명해 1480편 시문이 문집인 양곡집에 수록됐을 뿐 아니라 양곡과 함께 문과에 장원급제 후 대사간을 역임했던 그의 둘째 형, 곤암 소세량(困菴 蘇世良, 1476~1528)과 함께 화암서원에 배향되는 등 7형제 대부분이 크게 활약했다.

     

     

     

     

    또한 道川은 국도1호 신작로가 생기기 전, “물이 흐르는() 바위가 호남에서 한양까지 길()로도 활용됐다도천이라 했으며 양곡 생가 및 말년 거주지 상류 황각마을에는 삼짇날, 물에 잔을 띄워 잔이 앞에 오기 전에 시를 짓는 유상곡수流觴曲水하서대荷鋤臺’(호미를 걸고 쉬는 평평한 곳이나 정자) 등 양곡 필체라는 암각서가 남아 있다.

     

     

     

     

    특히 양곡은 말년을 생가에서 보내다가 금마저수지 아래 서계마을 퇴휴당退休堂으로 이사했다가 1562년 세상을 떠나 용화산에 묻혔는데 주민들은 양곡 선생 7형제가 어렸을 적 놀았고 말년을 보냈을 교량 설치 암반에는 암각서나 암각시 등이 남아 있을 수 있다며 보호대책을 강력 주문했다.

     

     

     

     

    소신섭(78) 전 도의원은 곤암과 양곡의 생가 및 말년 거주지에서 발견된 초대형 암반은 그 분들이 어렸을 적과 말년을 노닐었던 바위가 확실하다양곡 어르신이 남긴 암각서도 많아 이곳을 파괴하기 전에 지표조사와 시. 발굴을 거쳐 정확한 암반 크기 등 문화재적 가치를 파악한 후 다리를 세워도 늦지 않다고 주장했다.

     

     

     

     

    한편, 양곡 선생과 한 달을 지낸 송도 3황진이달빛 아래 오동잎 지고. 들국화는 찬 서리에 누렇게 시들었는데(중략)”로 시작되는 헤어지기 무척 싫어하는 애절한 로맨스를 담은 시를 남겼을 정도로 양곡은 시문과 글씨는 물론 풍류에도 유명했다./고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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