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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문화관광>화심순두부송광사벚꽃터널종남산송광사위봉산성위봉폭포터널위봉사(종각사물)화심온천만덕산만덕사(미륵사)곰치재웅치전적비완주사진 2011. 10. 23. 09:04
<소양면 화심일대 화심순두부 주변>2018/04/23
<화심순두부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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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입구벚꽃터널>2013/02/24
<송광사입구벚꽃터널>2013/02/24
<송광사 입구 벚꽃터널>
이하 <종남산송광사탱자나무>2013/02/24
이상<종남 산송광사탱자나무>2013/02/24
위봉산성위봉폭포터널위봉사(종각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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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봉산성>2013/06/17
이하 2013/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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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3/02/24
이하 <2010/10/23>
이상 <2010/10/23>
이하 201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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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2013/02/24오후
이상 2013/02/24오후
<이하 2016/01/31>
이하 013/03/09
이상 2013/03/09
<위봉폭포>2013/06/17
이하 2014/10/19
이상 2014/10/19
<이하 011/10/22>
<2011/10/22>
위봉산성위봉폭포터널위봉사(종각사물)
이하 2014/10/19
이상 2014/10/19
이하 2011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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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2015/05/05
<완주 소양(화심온천만덕산,만덕사(미륵사),곰치재웅치전적비, 진안 부귀(모래재)>2011/11/19
<완주군 소양면-왼쪽은 전주~완주~진안간 4차선도로 법면, 보이는 길은 모래재와 곰티재 가는 길>
<완주군 소양면-왼쪽은 전주~완주~진안간 4차선도로 법면, 보이는 길은 모래재와 곰티재 가는 길>
<화심온천이 손님이 없어서인지 연수원으로 바뀌었다>
<모래재 가는 길>
<왼쪽은 모래재 가는 길, 오른쪽은 곰티재 가는 길>
<곰티재 가다가 두목마을의 시골가게를 만났다. 오랫만에 정들었던 시골 할머니를 본듯하다>
<멀리 익산~장수간 고속도로가 보인다>
<원신촌 마을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곰티재와 웅치전적비를 만날 수 있다.>
<곰티재 가는 길은 비포장이나 차량 통행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양호하며 마실길이나 둘레길로 개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숲터널을 이룬다. 여름에는 불과 몇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데이트 코스로도 일품이다>
<익산~장수고속도로 교각은 25층 아파트 높이는 되는 듯하다.>
<이 위로 수많은 차량이 지난다니 터널과 교량으로 주로 이뤄진 고속도로 건설기술이 놀랍기만 하다.>
<십여년전에는 분명히 만덕산 만덕사였는데 그 새 절 이름이 바뀌었나 보다, 겨울 해가 짧아 나중에 절을 구경하기로 하고, 곰티재(熊峙: 웅치)로 향하기로 했다>
<만덕산에서 북쪽으로 뻗어있는 산줄기>
<곰티재(熊峙)-이 곳에서 임진왜란시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와 식량창고 역할을 하는 전라도를 점령하려는 왜군과의 3일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1592년 7월 8~9일경 일이다.
그러나 조선의 민관군 1천여명은 밀고 밀리는 육탄전으로 맞섰으나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 세 지휘관과 민관군 대부분이 전사하는 혈전 끝에 패배한다.
웅치전투는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왜적도 일대 타격을 입어 왜군은 훗날 "웅치전투가 가장 치욕적인 싸움이었다"고 기록했다.
<앞으로 난 길은 진안군 부귀면> 왼쪽 산 길은 웅치전적비로 가는 길
<소나무 사이로 웅치전적비가 보인다>
한편 진안군 부귀면과 완주군 소양면의 경계인 이 곳 웅치를 돌파한 왜군은 지금의 우아동 부근인 안덕원까지 처들어 왔다가 패퇴해 결국 전라감영을 점령하지 못하고 만다.
아중저수지 남동쪽에는 왜군의 막사가 설치됐다고 해 '왜막(망)실'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웅치전투 직후인 1592년 7월에는 당시는 전라도 땅이었지만 현재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과 완주군 대둔산 경계를 이루는 이치(梨峙: 이재, 배티재 혹은 배재)전투도 치뤄진다.
금산을 점령한 왜군이 적장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부대를 이끌고 처들어 오자 전라도 절제사 권율 장군과 동복현감 황진 장군이 이끄는 1천여 민관군이 치열하게 싸워 격퇴했다.
황진 장군은 남원진에 있다가 전주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웅치(곰티재)를 돌파한 후 전주 안덕원까지 처들어 왔던 적을 물리치고 바로 이치전투에 합류한다.
1만여명 왜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 끝에 황진 장군은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대둔산 자락의 좁은 길목에서 왜군을 물리쳐 왜군의 시체가 수십리에 즐비했다고 전한다.
연이은 웅치전투에 이은 안덕원에서 패배와 이치전투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한 왜군은 전라도 침공을 포기하고 만다.
때문에 조선의 식량창고인 전라도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현장에는 황진 장군 이치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최초의 육상전투 승리로 꼽힌다.
이 보다 2백여년 전인 고려말에는 왜구가 남원 운봉에서 이성계에 패퇴되기도 하는 등 태인. 고부, 전주 등 대부분이 왜구의 말발굽 아래 들어 갔던데 반해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도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이 우리나라에 처들어 온 것은 일제의 한일합병과 임진.정유재란 등 두 차례 가량 되는 것으로 생각하나 고려말에는 전라도 대부분이 왜구의 노략질에 내 맡겨지는 등 임진란보다 훨씬 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런 의미에서 완주군 운주면 대둔산 자락의 '이치대첩'과 완주군 소양면 '웅치대첩'은 조선의 식량창고와 조선왕조실록의 온전한 역사보전이라는 큰 쾌거로 기록될 것이다.
<웅치전적비 옆에서 본 전주 방향>
<완주군 소양면-왼쪽은 전주~완주~진안간 4차선도로 법면, 보이는 길은 모래재와 곰티재 가는 길>
<완주군 소양면-왼쪽은 전주~완주~진안간 4차선도로 법면, 보이는 길은 모래재와 곰티재 가는 길>
<화심온천이 손님이 없어서인지 연수원으로 바뀌었다>
<모래재 가는 길>
<왼쪽은 모래재 가는 길, 오른쪽은 곰티재 가는 길>
<곰티재 가다가 두목마을의 시골가게를 만났다. 오랫만에 정들었던 시골 할머니를 본듯하다>
<멀리 익산~장수간 고속도로가 보인다>
<원신촌 마을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곰티재와 웅치전적비를 만날 수 있다.>
<곰티재 가는 길은 비포장이나 차량 통행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양호하며 마실길이나 둘레길로 개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숲터널을 이룬다. 여름에는 불과 몇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데이트 코스로도 일품이다>
<익산~장수고속도로 교각은 25층 아파트 높이는 되는 듯하다.>
<이 위로 수많은 차량이 지난다니 터널과 교량으로 주로 이뤄진 고속도로 건설기술이 놀랍기만 하다.>
<십여년전에는 분명히 만덕산 만덕사였는데 그 새 절 이름이 바뀌었나 보다, 겨울 해가 짧아 나중에 절을 구경하기로 하고, 곰티재(熊峙: 웅치)로 향하기로 했다>
<만덕산에서 북쪽으로 뻗어있는 산줄기>
<곰티재(熊峙)-이 곳에서 임진왜란시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와 식량창고 역할을 하는 전라도를 점령하려는 왜군과의 3일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1592년 7월 8~9일경 일이다.
그러나 조선의 민관군 1천여명은 밀고 밀리는 육탄전으로 맞섰으나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 세 지휘관과 민관군 대부분이 전사하는 혈전 끝에 패배한다.
웅치전투는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왜적도 일대 타격을 입어 왜군은 훗날 "웅치전투가 가장 치욕적인 싸움이었다"고 기록했다.
<앞으로 난 길은 진안군 부귀면> 왼쪽 산 길은 웅치전적비로 가는 길
<소나무 사이로 웅치전적비가 보인다>
한편 진안군 부귀면과 완주군 소양면의 경계인 이 곳 웅치를 돌파한 왜군은 지금의 우아동 부근인 안덕원까지 처들어 왔다가 패퇴해 결국 전라감영을 점령하지 못하고 만다.
아중저수지 남동쪽에는 왜군의 막사가 설치됐다고 해 '왜막(망)실'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웅치전투 직후인 1592년 7월에는 당시는 전라도 땅이었지만 현재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과 완주군 대둔산 경계를 이루는 이치(梨峙: 이재, 배티재 혹은 배재)전투도 치뤄진다.
금산을 점령한 왜군이 적장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부대를 이끌고 처들어 오자 전라도 절제사 권율 장군과 동복현감 황진 장군이 이끄는 1천여 민관군이 치열하게 싸워 격퇴했다.
황진 장군은 남원진에 있다가 전주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웅치(곰티재)를 돌파한 후 전주 안덕원까지 처들어 왔던 적을 물리치고 바로 이치전투에 합류한다.
1만여명 왜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 끝에 황진 장군은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대둔산 자락의 좁은 길목에서 왜군을 물리쳐 왜군의 시체가 수십리에 즐비했다고 전한다.
연이은 웅치전투에 이은 안덕원에서 패배와 이치전투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한 왜군은 전라도 침공을 포기하고 만다.
때문에 조선의 식량창고인 전라도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현장에는 황진 장군 이치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최초의 육상전투 승리로 꼽힌다.
이 보다 2백여년 전인 고려말에는 왜구가 남원 운봉에서 이성계에 패퇴되기도 하는 등 태인. 고부, 전주 등 대부분이 왜구의 말발굽 아래 들어 갔던데 반해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도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이 우리나라에 처들어 온 것은 일제의 한일합병과 임진.정유재란 등 두 차례 가량 되는 것으로 생각하나 고려말에는 전라도 대부분이 왜구의 노략질에 내 맡겨지는 등 임진란보다 훨씬 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런 의미에서 완주군 운주면 대둔산 자락의 '이치대첩'과 완주군 소양면 '웅치대첩'은 조선의 식량창고와 조선왕조실록의 온전한 역사보전이라는 큰 쾌거로 기록될 것이다.
<웅치전적비 옆에서 본 전주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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