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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탁왕후와 선화공주<칼럼사설수필> 2009. 1. 22. 06:09
<칼럼>사탁왕후와 선화공주
미륵사지석탑에서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등 사리장엄(舍利莊嚴)을 비롯한 유물 5백여 점이 발견돼 서동과 선화공주(善花公主) 애뜻한 사랑이야기의 허구성을 놓고 설왕설래한다.
특히 백제말 무왕과 의자왕때 자주 나오는 '사탁'이나'사택(沙宅=砂宅)', 혹은 '사(沙)'씨라는 똑같은 성씨를 가진 왕족에 버금가는 귀족의 상호관계나 왕권과의 역학구조도 관심이 모아진다.
왕은 '부여(夫餘)'씨가 독점했지만 사비시대 '백제 8족'에 으뜸은 이들 성씨이다.
서기 639년 왕의 장인, 좌평 '사탁적덕(積德)', 일제가 부여에 신궁을 세우려 쌓았던 돌무더기에서 해방후 발견돼 역사책에 나오는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 의자왕 14년(654)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난날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을 남긴 대좌평 '사택지적(智積)',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자왕과 함께 포로가 된 대좌평 사택천복(千福), 당나라에 압송됐다 웅진도독부 요직을 맡았던 사택손등(孫登), 일본으로 달아났다 671년 大錦下라는 벼슬을 받았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사택소명(紹明)을 비롯 백제말 '사탁=사택'이란 최고 귀족층의 심도있는 연구가 백제말과 미륵사지 연구에 상당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 같다.
금번 유물은 서동설화를 근거로 '서동축제'를 벌여온 익산시의 정체성 혼란과 10월 축제는 과연 누구를 주제로 할 것인가와, '왕궁리 천도, 혹은 별도설'에 같은 시기 세워진 '제석사' 역할 등 백제사 재정리 필요성이 제기됐다.
미륵사지는 3개 금당, 3개 탑 구조로 동서 양쪽은 석탑이고, 중앙은 목탑이나 영조(1694~1776) 이전 폐사됐으며 무너진 국보11호 서탑에 일제가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고려 승려 일연(1206~1289)이 집필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서동설화를 부정할 근거가 없어 축제에 활용되고 '쌍릉'이 무왕과 선화공주 무덤이라는 설까지 확대됐다.
서경천도를 주장한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경주세력을 대표한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공식적인 正史이나 중국중심적이고 편향.왜곡된 점도 있는 반면, 몽고침략기 일연의 삼국유사는 민족의식과 불교색채가 강조됐고 삼국사기에 빠진 내용을 보완했으나 비현실적 내용도 많은 野史다.
그러나 두 책은 삼국시대 연구 기본서와 같은 중요사료임은 부인할 수 없다.
'서동요'는 서동이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 셋째 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경주에 숨어들어가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가장 오래된 4구체 향가로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에 이두(吏讀)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기록으로 남아있다.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남 몰래 시집가 놓고)/ 薯童房乙(맛둥 도련님을)/ 夜矣卯乙抱遺去如(밤에 몰래 안고 간다)"
쫓겨난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서동은 백제로 와 황금을 캐어 龍華山 師子寺 지명법사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신라로 보내 진평왕 마음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로 갈 때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 왕비가 절을 세우기를 원해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세웠다고 기록됐다.
이에 익산에서 선발한 서동(무왕)과 경주에서 선발한 선화공주가 '서동축제' 골간으로 '무왕행렬'을 벌이고 '뮤지컬'에 활용하며, 경주와 익산이 자매결연을 맺고 상호방문을 하는 등 신라와 백제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야기를 뼈대로 사극 '서동요' 세트장도 만들었다.
'부여군'도 "궁궐 남쪽에 못을 파고 물을 끌어들여(중략) 섬을 만들었다"는 기록과 삼국유사 서동탄생설화가 있는 궁남지를 근거로 '서동.연꽃축제'를 벌이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당시 신라와 백제는 무수한 전투를 벌였고, 무왕(재위 600~641) 큰아들 의자왕(재위 641~660)때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점에서 삼국유사에 의문점도 제기돼 왔다.
'사리봉안기' 명문은 "淨財를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己亥年), 즉 서기 639년(무왕 재위 40년)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기록됐으며 '百濟王后佐平沙<宅에서 갓머리가 없는 글자>積德女種善因'(백제왕후좌평사탁적덕녀종선인)'이란 내용으로 서동축제를 전면 바꿀지도 모르는 상황이다.이를, '백제왕후인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 선한 인연을 베풀어'나 '백제왕후와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 선한 인연을 베풀어' 또는 '백제왕후좌평사탁적덕의 딸, '종선'의 인연' 등 해석이 제각각이다.
당대 내노라하는 최고의 문장가가 썼을 내용에 '왕후'와 '좌평사탁적덕의 딸' 사이에 아무 문자가 없어 '사탁왕후'에 무게가 실린다.
반면 西석탑에서 유물이 나와 절의 구조상 먼저 세워졌을 불타없어진 중앙 목탑에 '선화공주'가 발원했거나 東석탑에도 별도 봉안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황룡사보다 넓은 미륵사지 무수한 가람 건물 및 세 탑 건립에 당시 국력으로 오랜 세월이 소요됐고, 봉안기 해석에 따라 '가람을 세운 훗날 사리를 맞아 발원했을 가능성'에 미륵사가 무왕때 건립됐고, 왕후가 절의 창건을 주도했다는 점, 회전(會殿)과 탑(塔)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했다는 내용이 삼국유사와 같아 선화공주를 부인하기도 이르다.
즉 사탁왕후와 선화공주는 무왕의 부인 중의 하나로 선화공주는 중앙 목탑이나 동탑에 비슷한 내용을 남겼을 가능성도 있다.
하여간 올 가을 익산 서동축제는 누구를 앞세울지 궁금하다.
둘을 내세울 수도, 그렇다고 현재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탁왕후를 뽑을지, 선화공주를 뽑을지, 서동왕자 양쪽에 나란히 세울지 그것이 문제로다.
유독 무왕만이 부여와 익산시 등 두 도시에서 축제를 벌이는데다 "미모의 선화공주와 밤마다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헛소문을 퍼뜨려 차지한 것도 모자라 귀족출신 왕후가 늘어 백제왕 31명 가운데 가장 행복한 大王임에는 틀림없다 하겠다. <2009. 01. 28. 水>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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