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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가.서예가 고당 엄찬성(70) 선생을 찾아
    대담기획인터뷰인물 2011. 3. 12. 08:23

     

     

     

     

     <진안 마이산 금당사 대웅전 현판>

     

     

     

     

     

     

     

     

     

     <마이산 금당사 일주문>

     

     

     

     

     

     

     

     

     

     

     

     

     

     

     

     

     

     

     

     

     

     

     

     

     

     

     

     

     

     

     

     

     

     

     

     

     

     

     

     

     

     

     

     

     

     

     

     

     

     

     

     

     

     

     

     

     

     

     

     

     

     

     

     

     

     

     

     

     

     

     

     

     

     

     

     

     

     

     

     

     

     

     

     

     

     

     

     

     

     

     

     

     

     

     

     

     

     

     

     

     

     

     

     

     

     

     

     

     

     

     

     

     

     

     

     

     

     

     

     

     

     

     

     

     

     

     

     

     

     

     

     

     

     

     

     

     

     

     

     

     

     

     

     

     

     

     

     

     

     

     

     

     

     

     

     

     

     

     

     

    <작품이 가득 걸린 고당 엄찬성 선생 자택>

     

     

     

     

     

     

     

     

     

     

     

     

     

     

     

     

     

     

     

     

     

     

     

     

     

     

     

     

     

     

     

     

     

     

     

     

     

     

     

     

     

     

     

     

     

     

     

     

     

     

     

     

     

     

     

     

     

     

     

     

     

     

     

     

     

     

     

     

     

     

     

     

     

     

     

     

     

     

     

     

     

     

     

     

     

     

     

     

     

     

     

     

     

     

     

     

     

     

     

     

     

     

     

     

     

     

     

     

     

     

     

     

     

     

     

     

     

     

     

     

     

     

     

     

     

     

     

     

     

     

     

     

     

     

     

     

     

    <고당 엄찬성 선생이 작품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고당 엄찬성 선생>

     

     

     

     

     

     

     

     

     

     

     

     

     

     

     

     

     

     

     

     

     

     

     

     

    <고당의 문인화>

     

     

     

     

     

     

    <고당의 문인화>

     

     

     

     

     

     

     

     

    <고당의 문인화>

     

     

     

     

     

     

     

     <고당의 문인화>

     

     

     

     

     

     

     

     

    <고당의 한국산수화>

     

     

     

     

     

     

     

     

     

     

     

    화가.서예가 고당 엄찬성(古堂 嚴贊成,70)선생을 찾아

     

    -지필연묵(紙筆硯墨) 벗하며 한 획 한 획 30여년

     

    -"(書如其人)글씨는 그 사람이다"

     

    -서예와 한국화, 문인화 세 길에서 큰 성과

     

     

    평생을 ‘서예’와 한국화 및 문인화’ 등과 함께 살아온 전주 출신 원로 예술가가 노익장을 과시하며 세 분야 작품활동에 전념해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불굴의 정신으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서화로 명성을 날리게 됨은 물론 고희전을 위해 25시 인생을 살고 있어 선생의 필생의 작품내용이 주목된다.

     

     

    전주 고사동 출신으로 전주에서 활동하는 서예가 고당(古堂) 엄찬성(嚴贊成, 70) 선생이 주인공이다.

     

     

     

     

     

    고당 선생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던 1941년 서울 인사동처럼 화랑가, 골동품상 등 문화인의 집결지인 전주시 고사동에서 한학자의 3남2녀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난다.

     

     

     

    어릴 적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은 6.25 당시 풍남국민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호주기가 폭탄을 투하해 피해를 당한 일이다.

     

     

     

    여선생을 포함해 어린이 등 여러 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고당 선생도 파편을 맞아 무릎 위부터 엉덩이까지 크게 다친다.

     

     

     

    수백미터 떨어진 전주고 다리 아래로 끌려오다시피 한 선생은 형과 함께 숨어 있느라 바로 병원에 가지 못했다.

     

     

     

     

    이후에도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한약으로 치료하다 병을 키운 꼴이 돼 평생을 건강 때문에 고생하는 잊지 못할 사건으로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피난처인 상관국교를 다니다 고사동에 돌아와 기전국교를 졸업한다.

     

     

     

    폭탄 투하사건으로 다리가 아파 군대를 가지 못한 선생은 건축도면에 해박한 안목과 실력을 지녀 1974년께 건축회사 이사로 근무한다.

     

     

     

     

    1977년 아예 주택건설회사를 차려 학교와 교회 등을 직접 세우게 된다.

     

    직원도 많을 때는 1백여명이 돼 크고 작은 교회 80 곳과 두 군데 학교도 세웠다.

     

    이 때 자연스레 선물할 기회가 많아 서예가와 화가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화랑가 등이 집중된 고사동 분위기도 한 몫 했다.

     

    서예와 그림 등 소장을 위한 매입과 선물용 구입을 제대로 하려면 무엇보다 안목이 필요했다.

     

    서서히 1978년께부터 여가를 이용해 그림도 배웠다.

     

     

    건축사업상 술을 가까이 해 술값만 엄청나게 들어갔다.

     

    술을 많이 마셔 건강도 좋지 않았고, 돈을 벌자 인간적 배신감을 느끼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남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못하는 선생은 주변 사람 재산보증으로 엄청난 돈을 날리기도 하고 건축에서 자금회수가 안돼 곤욕도 치뤘다.

     

    때문에 평생 반려자 김행순(66) 여사를 무척 고생시켰다고 회고한다.

     

     

    급기야 1981년에는 휘청할 정도로 엄청난 거금을 떼이자 매일 술을 마셔 위벽에 구멍이 날 정도였다.

     

    이로 인해 그간 어느 정도 실력이 늘었던 예술분야에 본격 뛰어든다.

     

    1982년 사업을 완전 접은 선생은 벽강 유창희(현 원광대교수) 선생에 한국(산수)화를, 군산에 거주하는 남천 정연교 선생에 사군자를, 남정 최정균 수제자인 우관 김종범 선생에 서예를 배우는 등 두루 섭렵한다.

     

     

     

     

    다행히 안식구가 '의자와 벤치, 강대상' 등 교회비품을 생산공급하는 공장을 운영해 먹고사는 문제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말기 노조가 득세해 10여명 직원 월급이 한 달에 10~20% 이상 오르는 것에 견디지 못해 1990년 중단했다고.

     

     

    이후 선생은 주경야독이 아닌 낮에는 낚시, 밤에는 그림과 서예에 몰두했다.

     

     

    이밖에 경향각지의 다양한 그림과 예술가를 접하며 자연스레 고당의 실력은 일취월장한다.

     

     

    서예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91, 93, 95, 99년), 전북미술대전대상(94)과 특선(94, 98), 전국전통서예대상전 금상(96) 등 무수한 상을 받았고, 문인화도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00, 05년)과 특선(06) 등 상복이 이어졌으며 전시회도 많았다.

     

     

     

    한국화도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92)을 시작으로 헤아릴 수 없는 상복이 이어져 대한민국미술대전초대작가(문인화), 대한민국원춘서예대전초대작가, 전국춘향미술대전초대작가(한국화), 대한민국문인화휘호대회(국전) 이사 및 운영위원 등으로 위촉됐다.

     

     

     

    고당의 한국화는 현재 남원국립국악원이 소장한 24폭 무대병풍과 마이산 금당사 일주문과 대웅보전 휘호 등 전국에 널리 파급됐다.

     

     

     

     

     예술인은 "글씨나 그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자세, 행동거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고당은  절치부심 노력해 그림만으로 1녀2남을 가르치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고.

     

     

     

     

    IMF 이전에는 대단한 호황을 이뤘으며, 이후에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한다.

     

     

     

     

     올해 2011년 고희를 맞아 서예, 한국화, 문인화 등 세 분야 개인전을 갖으려 최대한 시간을 아껴 노력하는 선생은 현재 12폭 등 병풍 5점과 서예, 문인화, 한국화 80여 점을 준비해 개인전을 하고 남을 정도나 더 좋은 작품을 위해 작품활동을 계속한다. 

     

     

    고당은 전주시 진북동 어은터널 동편에 화산공원을 뒤로 하고 자리잡은 한옥으로 된 자택 겸 서실에서 최대한 시간을 보낸다.

     

     

    대지 120평에 건평만 70여평인 한옥은 소나무와 동백, 소사 및 느티나무 등 분재와 수목에 휩싸여 제법 운치가 있다.

     

     

     

    고당은 "서예는 마음을 선으로 나타내는 心線으로, 글씨는 그 사람이다(書如其人)"며 "서예와 한국화, 문인화 세 길에서 나름대로 큰 성과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 왔는데 벌써 고희전을 준비한다니 '세월은 쏘아 놓은 화살과 같다'는 옛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고 회고한다.

     

     

     

    큰 아들도 원광대 한국화학과를 졸업하고 국전입선 등 발군의 실력을 지녔으나 사법고시를 보다가 1차만 세번 합격하고 안돼, 현재는 회계사 사무실은 운영하고, 둘째는 회계사로 학원강사 등 열심히 지낸다고.

     

     

    특히 "딸은 남원시립국악원 교수(가야금)로, 사위는 남원국립국악원 계장으로 근무하며 분야는 다르지만 예술을 위해 사는 셈"이라고 웃는다.

     

     

    조부모가 기독교신자였을 정도로 독실한 모태신앙을 갖은 고당 선생은 "올해 전시회를 위해 서예와 한국화 및 문인화에 힘이 닿는데까지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노익장'의 따뜻함을 느끼며 발길을 재촉했다./고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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