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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노산(蘆山) 최난주(崔欄周)
    대담기획인터뷰인물 2010. 11. 17. 11:33

     

     

     

     

     

    <노산 최난주 선생>

     

     

     

     

     

     

     

     

     

     

                                                 <노산의 작품>

     

     

     

     

     

     

     

     

     

    2005년 발간한 '내가 그린 초상화'라는 노산 수필집

     

     

     

     

                            <노산 전시회에서 강암 선생과 함께>

     

     

     

    <기획> 노산(蘆山) 최난주(崔欄周)

     

     

     

    "(書如其人)글씨는 그 사람이다"

    서예와 교육, 수필 세 길에서 큰 성과

    교육계 은퇴 후에도 오로지 한 길로 매진

    지필연묵(紙筆硯墨) 벗하며 한 획 한 획 40여년

     

     

    ‘서예와 수필, 교육’이라는 세 길을 가며 뛰어난 실력을 보여 부러움을 샀던 교육공무원이 퇴직 후에도 여전히 세 길을 함께 매진한다.

    30대에 국립현대미술관 (국전)초대작가 반열에 우뚝 섰던 그는 지금도 종이(紙)와 붓(筆), 벼루(硯)와 먹(墨) 등 문방사우와 벗하며 글쓰기와 독서에 전념하는 '25시 인생'을 산다.

    2008년 12월 전북교육문화회관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접은 노산(蘆山) 최난주(崔欄周)(61) 선생이 주인공.

    고창군 공음면 출생의 노산의 붓글씨는 국민학교 입학 전에 시작됐다. 대과에 급제한 조부 斗南 崔麟休는 현재 청와대공보담당관과 언론인이 혼합된, 왕에게 직언하는 사간원 正言 벼슬을 하다 한일합방이 되자 관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선다. "왜놈에 교육을 맡길 수 없다"는 조부 영향으로 부친 4형제는 한학에 전념한다. 부친은 동네어른 성화에 훈장이 됐다.

    어깨 넘어 배우던 그가 한문에 자질을 보여 형들과 한문을 배웠다. 한문과 붓글씨도 이 때 기초를 다진 것. 국민학교 시절 서예에 능한 담임에 붓글씨를 터득해 친구의 헝겊 명찰을 도맡아 써주고 '5.16 혁명공약'은 하도 써 봐 지금도 전문을 외울 정도.

    목소리가 좋아 '아나운서'가 꿈이었으나 중고교를 거치며 서예에도 빠져든다. 69년 고창 무장초등에서 5급 을류 공무원(공채1기)에 투신한 이래 글쓰기에 정진했다. 봉급 10%로 방송교재를 구입했던 노산은 3년간 정훈부 아나운서로 군복무를 마치자 방송국 아나운서로 초빙 받았으나 고창교육청에 복직했던 73년경 방송의 꿈을 접고 본격 서예에 몰두한다.

    77년 도교육청 시절, 서예계 거목이던 강암과 인연을 맺어 대전환기를 맞는다. 강암 제자 모임인 '연묵회' 회원 조옥영씨가 노산의 붓글씨를 보고 강암에 소개한다. "문하에 한글을 잘 쓰는 제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하던 강암과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연묵회에 가담했고 강암 문하생으로 사군자와 한문을 배우며 차원 높은 수련을 한다. "성급히 출세하려 말고 좋은 책과 선생을 만나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강암의 충고는 지금도 되새기는 문구다.

    78년 ‘도연명의 잡시‘와 '오우가'를 연묵회 전시에 출품했다. 같은 해 가을, '전시계'라는 잡지에 이은상의 '가고파'를 출품해 입선한다. 83년에는 '원곡서예상'을 받는 쾌거를 일궈냈다.

    原谷은 한글서체인 원곡체를 개발한 김기승(1909∼2000)으로 원곡이 고희 기념으로 만든 까다롭기로 유명하고, 한해 한 사람만 주는 상을 전북최초로 30대 서예가가 수상했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버스에서 '법첩'을 읽고 밤 세워 정진하다 87년 전주교육청 시절, 국전(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반열에 우뚝 선다. 전북교육계를 망라해 여산 권갑석씨에 이어 두번째 국전 초대작가로 당시 대한민국 123명 초대작가 중 최연소권에, 한글궁체로는 호남 최초다. 강암 문하에서도 강암 아들과 조카 외에는 최초다.

    노산은 서예강사로부터 "개인전 한 번 못 가진 사람은 작가라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작가관을 달리하고 새롭게 몰두한다. 도교육청 요직에서 개인전을 위해 한가한 민원실 근무를 자청한다.

    전시회는 대성공했다. 강암은 노산 서예전 격려사에서 "서력은 물론 경력도 중견이 됐음에도 이제야 개인전을 연 것은 중후한 인품과 겸허의 소치"라며 칭찬했다.

    96년 글자만 8천여자로 가로 9m, 세로 2m가 넘는 대형 병풍작인 '농가월령가'를 엄격심사를 거쳐 작품을 받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노산은 서울시교육청, 교원대, 전북대, 전주대, 경상대, 전북교육청, 전북교원연수원 등 수많은 기관에 작품을 기증했다.

    "'江山'이라 쓰면 무겁다 하고 '강산'이라 쓰면 가볍다하네"라며 한글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를 아쉬워한다. "서예는 마음을 선으로 나타내는 心線"이라는 노산은 "서예는 點線劃의 太細長短, 筆壓의 强弱輕重, 運筆의 遲速과 墨의 濃淡, 글자 상호간 비례균형이 혼연일체를 이뤄 미묘한 조형미를 느끼며, 이는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평가했다.

    수필가로도 인정받는 노산은 계간지 '시와 의식'을 통해 등단했고 2005년 '최원용(崔原榕)'이란 필명으로 '내가 그린 초상화'라는 수필집도 발간했다. 김동리 선생이 "소년 문장가는 있어도 소년 명필가는 없다"면서 "詩書畵를 三絶이라 했는데 노산이 이뤄봄이 어떠냐"는 원곡상 축사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였다.

    책머리에서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만을 자랑삼아 쓰고 싶었지만 비밀은 없다는 전제하에 부끄러운 면은 부끄러운 대로 가슴 아팠던 사연은 아픈 대로 숨김없이 털어놓았다"고 고백했다.

    前 전주대 교수 이기반 시인은 "유능한 공직자요, 이름 높은 서예가며 수필가로 일가를 이뤘으니 삼관왕의 경지에 오른 無冠의 帝王"이라고 평가했고 "'내가 그린 초상화'는 37년 공직생활과 30여년의 서예가, 20년 가까운 수필가로서 인생편린의 다양한 체험을 진솔하게 고백한 수필집"이라고 말했다.

    이는 겸양과 절제에 끊임없이 정진하는 불굴의 집념 때문이다. 부인 서영숙 여사도 김제 용동초등 교장으로 재직 중인 교육가족이다.

    "글씨는 그 사람이다(書如其人)"는 노산은 "墨香에 취해 온 저의 삶과 교육계 헌신은 인생의 반쪽씩 차지한다"고 할 정도로 서예와 교육을 모두 중시한다.

    2008년말 전북교육문화회관 관장을 끝으로 국민훈장 녹조근정훈장, 홍익장, 대통령상, 총리상, 문교부장관상, 전북교육감상, 고창교육장상을 안고 40년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제2의 삶인 서예가의 길을 간다. 2009년 1월에는 제2의 삶을 시작하며 두 번째 서예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지인과 언론에서 한글서예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느냐는 극찬을 받았다. 2009년 3월부터 5월까지 전주교대에서 강의를 했고, 후에도 초중고 교장, 일반행정직을 대상으로 생활 속의 고전이나 생활 속의 예술 등의 강의를 했다. '내가 그린 초상화' 발간 5년이 지나 그 후 작품만 한권이 되겠으나 수정과 새로 쓰는 일을 병행한다. 그는 “그간 미진했던 사서, 주역과 성경 및 문인화에 전념한다. 시간이 부족해 아쉬울 뿐이다. 친지나 후배들이 나에게 서예공부를 원하나 바빠 미안할 뿐이다”고 밝혔다. “독서의 계절은 따로 없다”며 시간 나는 대로 읽고 즐길 뿐이란다. 지난 1년간 구입한 책이 80여권일 정도 독서에도 열중한다. 올가을부터 매주 1회 산에 가고 버스를 타고 목적지 두 정거장 전에 내려 걷거나, 도서관이나 서점 등에도 걸어가 건강을 유지한다.

    프로스트(1876∼1963)가 '가지 않은 길'에서 두 길을 다 가지 못하고 한 쪽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한탄할 때 노산은 세 길을 함께 해 큰 성과가 있었음에 부러움을 느끼게 한다. <고재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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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산(蘆山) 최난주(崔欄周)

    "(書如其人)글씨는 그 사람이다"

    서예와 교육, 수필 세 길에서 큰 성과

    교육계 은퇴 후에도 오로지 한 길로 매진

    지필연묵(紙筆硯墨) 벗하며 한 획 한 획 40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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