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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장 재현에 평생 바친 천철석씨
    대담기획인터뷰인물 2009. 7. 30. 08:35

     2006년 기사

     

     

     

     

     

     

     

     

     

    -완주군 모악산 작업장까지 35년 헌신

     

    HP. 011-682-9284

     

     

     

    낙엽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늦가을, 모악산 자락에서 35년을 전주장(全州欌) 재현에 바친 사람이 있어 찾아가기로 했다.

     

    힘들고 소득없는 일을 싫어하고 물질만능 풍토로 전락한 요즈음 세태에 장롱이나 문갑을 비롯한 전통가구를 만드는 것은 겨울을 맞는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힘겨운 일이면서 누군가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한국 전통가구를 재현키 위해 평생을 다 바친 소목장(小木匠) 천철석(47) 씨가 주인공이다.

     

     

    그의 작업장이자 부인 빈순남(43) 여사와 1남2녀가 거주하는 조립식 주택은 비교적 넓고 크다.

     

    뒷켠의 작업장은 비교적 넓어 수리를 맡은 전주장을 재현하느라 어지럽다.

     

    참죽나무로 된 가로 1m, 세로 2m나 되는 짙은 적색 계통의 식탁겸 사무실 탁자는 한 눈에도 대단한 작품이다.

     

    이 곳이 6년전 자신의 땅에 세운 천철석씨의 ‘장인공방’이다.

     

    소목장은 목재로 세간과 자그마한 물품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건물이나 사찰 등의 목재를 다루는 사람은 대목장이고, 장롱과 문갑, 반닫이와 등잔, 경대 및 옷걸이, 책상이나 애기장, 가마 등이 바로 소목장 몫이다.

     

    특히 제조기법과 디자인 및 색깔에서 독특한 전주에서 생산되는 장롱으로 보통 여닫이와 반닫이가 상하로 합쳐진 것을 ‘전주장’이라 한다. 

     

    조선말기 양식을 지닌 전주장은 완주 용진과 봉동에서 주로 제작됐는데 문짝 형태가 다양하다.

     

    골격은 참죽나무를, 문짝과 서랍 등은 무늬가 탁월한 느티나무를 활용했으며, 나무결과 색깔까지 좌우대칭으로 운치있게 배치한다.

     

    모서리는 백동이나 무쇠장식을 사용해 품위있고 견고한 느낌이 들며, 못을 사용치 않고 정교하게 짜 맞추는 것이 전주장 특징이다.

     

     

     

     

     

     

    "인간은 환경을 완전 극복할 수도, 환경에 완전 지배당하지도 않는다"는 말은 사실같다.

     

    전주장에 평생을 바치게 된 것은 천씨가 태어날 당시 상황이 그러하듯 환경 때문이다.

     

    59년 구이면 가난한 집안에서 2남6녀 장남으로 태어난 천씨는 구이초등을 졸업했으나 집안형편은 진학을 허락치 않했다.

     

    가난이 뭔지 깨닫기도 전인 13세에 오직 먹고 살 길을 알아보려 전주에 나갔다 당시 동서학동에 ‘서라벌공예’를 열었던 소목장 김춘태(66)씨를 만난다.

     

    잔심부름과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다 3개월만에 첫월급 1천원을 받아본 것이 기억에 남는 천씨는 당시 상황을 산업화 이전으로 할 일이 없어 농촌마다 젊은이들이 넘쳐났다고 말한다.

     

    농방에 다닌다니 동네어른과 주변사람이 부러워할 정도였다.

     

    가난하고 배고픈 가운데 학업열망도 많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패와 끌, 톱 등 기초적 장비 밖에 없어 6개월이 지나니 너무 힘들고 아직 기술을 습득치 못해 수입도 없었다.

     

    반년의 방황 끝에 다시 내려와 J모(55)씨 팔복동 공방에서 기초부터 본격 수업을 시작했다.

     

    끌질과 대패질, 나무 짜맞춤 등으로 손에 피가 나도록 노력하며 2년여가 흐르니 일취월장 하는 실력을 스스로 느낄 정도였다.  

     

    수영을 배우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붕 뜨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세월이 흘러 월급생활 20년이 지나 산업화 영향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어서인지 대부분 다른 일을 선택하고 천씨 혼자서 소목장 수업을 계속한다.

     

    드디어 2천년 팔복동에 ‘장인공방’을 세워 직접 운영하다 임대료를 주느니 내 건물에서 작업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듬해 옮긴 것이 현재 구이면의 ‘장인공방’이다.

     

     

    소목장 작업은 나무구입부터 시작된다.

     

    느티나무 괴목, 참죽과 오동나무, 먹감나무 등 국내산 외에도 수입목인 흑단 등 다양한 나무를 구입한다.

     

    느티나무는 색깔이 안 질리고 문양이 섬세하며 약간 노란 빛이 나는 특색이 있고, 울타리로 많이 활용하던 참죽나무는 빨간 빛깔의 무늬가 훌륭하다.

     

     

    딸을 낳으면 시집갈 때 장롱을 해주려 심는다는 오동나무는 장롱 옆과 뒷면 처리용으로 주로 활용된다.

     

    괴목 등은 나이테가 흠집이 없는 것을 고르나 나무를 베기만 할 뿐 심지를 안 해 귀해지고, 어떤 나무는 겉은 말짱하나 속이 비어 구입자금도 만만치 않다.

     

    용도별로 제재를 해 그늘에서 4-5년간 자연건조한 것만 쓴다.

     

    그러나 가로 12자가 되는 쓸만한 장롱 하나 만드는데 반년이 걸려 한 점당 수천만원을 호가해 대중화가 안돼 돈이 목적이었다면 오래 전에 때려치웠다.

     

    한국 전통가구 및 전주장 재현과 계승발전 때문에 손을 놓지 못하고 노력해 오늘의 명성을 얻게 됐다. 

     

    어느덧 1남2녀도 장성해 학비가 많이 들어가 부인도 직장에 나간다. 힘든 일을 기피하는 풍조로 후계자는 엄두도 못 내지만 전주 전통문화고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는 큰 딸이 중학교부터 전국대회에서 최우수상과 금상을 독차지 해 손재주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대견스럽다고.

     

     

    하루 인건비를 계산하면 10만원이 안되는 소목장 일이지만 누군가는 맥을 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각고의 노력으로 80년 전북기능경기대회 은상, 81년 전국기능대회 은상, 83년 전북지방기능경기 금상, 97년과 98년 대한민국전승공예전 입선 2회, 98년 가구 및 창호제작기능사 2급 획득 등 전후 30여 차례 수상경력과 표창 및 위촉을 받았다.

     

     

    기독교 신자인 천씨는 영세사업장을 위한 저리자금 지원 등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나무를 자르기만 할 뿐 심지 안 해 언젠가 수입목으로 전통가구를 만들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천씨는 지방 무형문화재가 되는 것이 희망이다. 35년이라는 세월을 한국 전통가구와 전주장 재현에 바친 천철석 장인의 뒷모습에서 늦가을 바람에 잎새가 힘들게 매달려 있듯 전통의 맥을 이어 후손에 계승 발전시키려는 마지막 장인을 보는 듯했다.

     

    전북도 등 관련 지자체가 자금지원과 모악산 전시판매장 건립 등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전주로 돌아오는 길이 바람만 더욱 거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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