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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 김명수 선생, 고희를 맞아<칼럼사설수필> 2007. 6. 27. 10:18
샘물 김명수 선생, 고희를 맞아
"야 이놈아, 글을 써 달라니 너처럼 기다리게 하는 놈이 어딨냐?"
샘물 김명수(金明洙) 선생이 고희를 맞아 펴낼 책에 기고할 글을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했더니 전화로 호통 겸 농담이다.
욕이 입에 붙을 정도이나 사랑이 담겨서인지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다.
'샘물'은 김명수 선생의 호이다.
샘물은 고였거나 썩은 물이 아닌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퍼 마시면 마실수록 깨끗해지고 시원해진다.
더욱 선생은 평생 한글사랑을 몸소 실천해 왔다는 점에서 순수 한글인 '샘물'은 주민과 선후배에 정신적 청량감을 주는 선생의 호로써 안성맞춤이다.
선생은 농민운동가, 흥사단 운동, 교회 장로, 부안군 초대 군의장, 한글 기독교 서예, 재야민주화운동 등 많은 단어가 연상될 정도로 불꽃 같은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내가 처음 만난 때가 1984년이니 어연 23년이 흘렀다.
서울에서 고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를 한답시고 고향인 변산반도 개암사에 머물 때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이란 노래를 부르며 눈물 흘리던 당시 어느 가수가 부르던 유행가처럼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잔인한 4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뭉게버린 폭압적인 전두환 군사정권이 중반기에 접어들어 어느 정도 표면적인 안정을 찾았으나 여전히 내부에서는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던 시기였다.
스물칠팔 나이에 처음 만난 샘물 선생은 지금 내 나이보다 약간 적은 40대 후반으로 생각되나 당시에는 엄청난 어른으로 여겨졌다.
당시 주지 스님은 '개암죽염'으로 99년 전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효산(79) 스님이었다.
7~8살 위로 생각되는 효산 스님과 뭔가 의기투합됐는지 기독교 신자인 샘물은 개암사에 자주 놀러왔다.
거주지인 부안군 주산 면소재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절이 있던 것도 원인이었을 게다.
두루마기 한복 차림의 샘물은 호수처럼 투명하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과 거침 없는 언행 등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람을 만나면 오른 손을 반갑게 처들며 "할렐루야!"라고 소리쳐 선생을 농담삼아 '할렐루야'로 지칭하기도 했다.
그러던 인연이 강산이 두 번 이상 변하는 23년 세월 동안 끊기지 않고 내려온 것이다.
이후 전주에서 신문사를 전전하며 지내던 나 보다는 오히려 후배에게 항상 자주 전화를 주시고 '할렐루야'로 대표되는 붓글씨를 보내주는 정감 넘치던 선생이 인연의 끈을 이어간 셈이다.
그런 점에 있어 나는 샘물 선생에 많은 정신적 빚을 진 셈이다.
1960년대 농민운동에 뛰어든 샘물은 네 아들 이름을 "강산을 말로 다스리라"는 의미로 치(治), 언(言), 강(江), 산(山)이라 지을 정도로 자식들에게도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그 중에 둘 째인 '김 언'이 나를 자주 따랐다.
또한 선생은 샘물 선생의 아버지와 나의 할아버지의 돈독한 관계 등 선대 인연을 자주 말하기도 했다.
어쨌든 능력도 없고 별 도움도 주지 못했는데 나는 선생의 오랜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아왔다.
흥사단운동은 샘물이 15년간 전북지부장을 맡을 정도로 몰두해 평생 도산 안창호 선생 가르침을 전파했다.
또한 샘물은 농촌계몽운동과 농민운동, 재야민주화운동에 몸담아 유신정권을 비판하며 세상을 바꾸려 했다.
자연스레 야당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까워 동교동에도 무수하게 다녔고 함석헌, 문익환목사, 도산 사상계승자 안병욱 교수 같은 인물과 교분을 맺었다.
그의 거침없는 언행은 자연 유신말기 경찰 끄나풀 단골 보고서 작성대상이 됐고 그 가운데는 K모씨가 악랄하게 괴롭혔다고 전한다.
농촌운동을 위해 75년부터 2년간 일본에 머물기도 한 그는 농촌 강연회도 무수히 갖어 농촌개혁을 위해 애를 썼다.
그런 이력은 전두환 집권 직후인 1981년 4월 20일부터 9박10일간 사상범으로 몰려 남영동 안가에 끌려가 온갖 모진 고문을 당하는 빌미가 된다.
몽둥이 찜질에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무수히 당해 무려 30번을 까무라쳤다 깨어나는 일이 반복됐다.
광주학살 원인을 몰아씌운 김대중과 관계, 일본 체류목적, 사상문제 등 없는 사실을 어거지로 짜 맞추려던 남영동 안가 고문현장은 나중에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사망하니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고문 당한 사실을 알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린다"는 협박을 받은 샘물은 지금도 후유증에 몸서리친다.
지인이 가져다 준 뱀술을 먹고 오랜 세월 후 겨우 기력을 찾은 샘물과 만난 것은 고문 당한 3년 후이다.
아무 것도 알 리 없는 나는 호방하고 거침새 없으며 후배를 아끼고 사랑하는 샘물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마치 지식과 삶에 목마른 갈 길 몰라하는 나그네가 달콤한 샘물을 보듯 말이다.
그런 샘물 김명수 선생 고희를 맞아 예총에서 칠순 기념문집을 발간해준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흥사단에 몸담아 ‘무실역행(務實力行)'의 도산 정신으로 살아온 선생은 4H활동을 통한 농촌운동에도 앞장서 주민을 일깨웠다.
독특한 서체의 한글서예만을 고집했고, 여기에 '할렐루야'나 '고린도전서' 등 기독교 서예에 몰두해 무려 12만점 작품을 국내외 지인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세계 50여 개국에 넘나들며 해외교포들에게도 고국과 한글사랑, 기독교 전파를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서예작품을 증정했다.
일본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기독교를 영접해 장로로 활동하며 서예로써 전도도 하는 셈이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한글로만 서예를 써 YS 시절에는 한글날 세종문화회관에서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지방자치제가 부활하자 초대 부안군 의장을 맡은 선생은 허울과 이기심만 가득찬 현실의 벽에 허탈감만 남긴 채 지방정계를 떠난다.
많은 사재를 털어 건립에 힘을 보탠 고향 주산교회 장로로 모범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간경화로 복수가 차고 고문후유증으로 병상생활을 여러 번 했으나 여전히 호방함을 지키고 있다.
학 같이 고고한 삶을 살아온 샘물 선생은 어느덧 백발로 변모해 두루마기를 걸친 모습을 보면 정말 천년을 살았다는 학 같은 모습이다.
이런 선생이 어느덧 고희를 맞게돼 책까지 발간한다니 "세월은 쏘아놓은 화살 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나 '고희(古稀)'라는 말은 지금부터 1300년전 당나라 시인 두보가 남긴 말로 현실에 적합치 않다.
"사람의 나이 일흔은 옛날부터 극히 드물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두보의 시에 나온 말이다.
그러나 의술이 뒤지고 식생활이나 소득수준이 극히 영세해 평균수명이 사십도 안되던 시절에 나온 말이다.
평균수명이 고희를 넘어 팔순에 가까운 요즈음 이제 말이 바뀌어야 한다.
인생일백고래희(人生一百古來稀)라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샘물 선생은 고희까지 산 것이 아니라 고향에서 반갑게 객지 후배를 맞아주고 가르침을 줄 수 있도록 고희까지 더 살아야 한다.
평생을 샘물 선생이 모신 노모가 1백세를 맞은 것처럼 말이다.
피고 또 지는 꽃잎은 지난해 꽃이 아니지만 한산모시 두루마기와 하얀 고무신을 신고 "할렐루야!"를 외칠 샘물 선생은 과거와 똑같은 모습으로 최소한 30여년 이상 더 뵐 듯하다.
그 때도 아마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칠 것이다.
" 이 썩을 놈아, 요새 내가 나이 좀 들었다고 연락도 안하고 찾아 오지도 않냐?
야이! 너 같은 놈을 짝사랑한 내가 바보다 이 놈아, 허허허..."라고 말이다. <2007. 06. 27. 水>
/<언론인/고재홍>(부안 하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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