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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특집> 新변산유람기(上)(中)(下)
    ##가족문중동창저서발간연락망 2018. 6. 30. 19:38


    직소폭포 일대


    채석강




    <기획특집> 변산유람기()




    성남고교 331반 친구들이 부부 간 혹은 본인만 참석해 변산여행을 했다.



    최근 퇴계 이황 선생 변산유람기가 전북언론에 발굴·보도돼 선조처럼 변산유람기도 남기고 싶었다.




    지난 518일부터 19일까지 1박2일, 변산유람이 시작됐다.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샹그릴라 펜션 김재석 회장이 저렴한 가격에 룸 5개와 캠프파이어 및 바비큐 시설과 영상음악까지 제공했고 1반 친구 찬조도 이어졌다.



    신개념 샌드위치를 생산하는 SLB코리아() 정주백 대표는 샌드위치와 상당금액만 찬조하고 갑작스런 중국출장으로 참여치 못해 아쉬웠다.



    과일 수출입을 하는 태봉 심재우 대표가 펜션비, 이기학·장태석(금일봉)·박세홍(음료 주류)·이종웅(삼겹살)·오인석(멸치) 친구 등이 찬조한데다 친구 110만원, 부인 5만원씩 거출해 여유롭게 변산유람이 시작됐다.




    부안읍 신석정 시인 고택과 석정문학관이 518일 오전 10시 최초 만남장소이자 유람 후 19일 헤어지는 곳으로 약속됐다.



    김광호 친구가 임차한 대형버스가 서울 곳곳에서 일행을 태우고 오는 동안 영광에서 염전업을 하는 김영선 친구(광주)는 시외버스와 택시를 잡아타고 석정문학관에 도착했고 김영재 부부와 필자 부부(전주)는 승용차를 몰고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했다.






     

    <성남고교 간략 소개>


    1938년 설립된 성남城南고교는 성남시에 소재한 학교로 착각하기 쉬우나 서울 대방동에 위치했다.



    1938()원석학원으로 설립됐고, 그 해 성남고등보통학교로 인가가 나 어연 개교 80주년이다.



    1951년 전쟁으로 학교가 전소되는 등 격동의 역사에도 의에 살고 의에 죽자(의생의사義生義死)!”는 교훈 아래 정의로운 인간,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해 왔다.



    일제 강점기 기업인 원윤수(1887~1940) 선생과 창군 주역이자 6·25 때 혁혁한 전공을 세운 김석원(1893~1978) 장군이 설립자로 훗날 대방동 용마산 서쪽에 수만 평 교정을 마련했으며 성남중·고가 같은 교정과 교훈을 사용한다.



    20182, 75회 졸업생까지 4만여 명을 배출했다.



    19911회 자랑스런 성남인의 영예를 안은 이현재(1929~) 국무총리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33회는 소위 뺑뺑이(연합고사)’가 있기 직전, 마지막 시험세대로 73년 입학해 762월 졸업했다.



    필자 고향집 남쪽 2km가 고향인 백광석 부부, 류국환(당진), 인태환(세종), 도상무 부부와 노재윤(서울)· 박영규(광명), 변산유람을 위해 베트남에서 귀국한 신경식 친구를 포함해 모두 24명이 참여했다.



    며칠 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18일 새벽에는 잔뜩 구름이 끼었다.



    소풍을 갈 때처럼 설레고 맑기를 고대했다.





    부안의 진산 성황산=상소산=서림산


    석정문학관에서 수백m 서쪽 부안읍 진산인 성황산(상소산)이 환히 보일 정도로 구름이 뒤로 물러갔다.



    날이 맑아지는가 여겨져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12일 내내 비는 없었으나 구름이 사라지지 않아 마음을 졸였다.




     

    <변산 개요>


    부안면적 4931/3에 육박하는 154가 변산국립공원이다.



    변산은 동서 15km, 남북 10km 정도다.



    궁궐 목재로 사용됐을 정도로 소나무변산호랑이’, 휴전 이후인 1954년에서야 토벌이 끝났을 만큼 피아간 수많은 사상자를 남긴 변산 빨치산으로 유명하다.



    “(우리처럼) 한 세대만 늦게 태어나 자유와 풍요가 넘치는 현재 대한민국을 봤더라면 좌익이 준동하지 않았을텐데라는 생각이다.



    산내들, 바다와 점점점··· 섬섬섬···’이 늘어진 변산 최고봉은 의상봉(508m)이다.



    변산은 금강산 여름 명칭인 봉래산蓬萊山이나 제주 한라산, 혹은 제주에 한라산과 별개인 영주산瀛州山및 능가산楞伽山이라고 한다.



    능가산은 부처에 의해 능가경楞伽經 설법이 행해진 장소란다.


    봉래산은 영주산, 방장산方丈山과 함께 중국 삼신산으로 신선과 선녀가 산다고 전한다.




     

    <선조들의 변산유람기>



    고려후기 대문호 이규보(1168~1241)동국이상국집십이월 어느 날 작목(나무를 자름)하러 처음 변산에 갔다가 마상馬上에서 2수 짓다변산은 산천과 물산이 좋은 천부天府로 불리며 좋은 재목이 많아 동량으로 쓴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규보는 1199년 작목사斫木使로 첫 부임지가 부안이고, 1230년 유배지도 부안 위도였다.



    심광세(1577~1624)는 부안현감 부임(1607) 직후인 5, 유변산록遊邊山錄을 남겼다.



    이기경이 1748년 쓴 변산동유일록도 있고 표암豹菴 강세황(1713~1791)도 변산을 유람하고 글과 그림을 남겼다.



    강세황은 시서화 삼절三絶로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불리며 처갓집인 안산에 머물며 단원 김홍도등 제자를 배출했다.


    김홍도를 기리는 안산 단원고는 이런 배경을 갖고 있다.



    강세황은 부안현감 강완의 아버지로 노비와 월명암 스님이 멘 가마를 타고 변산유람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음력 2월, 부안읍에서 개암사, 우금암과 실상사, 월명암, 직소폭포, 내소사까지 대부분 가마를 타고 유람했는데 당시 민초들의 고통이 눈물겹다.



    요즘은 희대의 갑질(?)’로 당장 구속감이다.



    육당 최남선이 1925년 기록한 심춘순례에서 변산팔경 하나로 실상용추實相龍湫를 꼽았다.



    실상은 실상사, 용추는 직소폭포 주변이다.



    최근 퇴계 이황(1501~1570)이 실상사와 직연()폭포直淵()瀑布, 마천대摩天臺(변산에서 가장 높은 의상봉 별칭)를 각각 7언 율시를 8행으로 56자 씩 쓴 유람기가 보도됐다.



    친구인 전남 광산 칠계 김언거가 자신의 변산유람기를 보내자 운율을 맞춰(차운次韻) 쓴 유람기로 변산에 오지도 않고 쓴 유람기다.



    유람기는 유람여행이 극히 일부 양반층 전유물일 때 글로 남긴 것이다.



    방안에서 누워 아름다운 산수를 유람하는 기록이란 뜻의 와유록臥遊錄이란 명칭도 이 때문이다.



    수십 편 변산유람기가 남아 있다.





    <부안 입구>05/18




     

    <신석정辛夕汀(1907~1974) 고택과 석정문학관>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중략)”

        




    <석정 문학관>





    <신석정 고택>






     

    신석정 대표작,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194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청정하고 애수가 담긴 목가시인이자 참여시인인 신석정을 기리는 석정문학관에서 여성 해설사 강의로 유람이 시작됐다.



    좌우대립과 6·25 소용돌이에 맘고생을 많이 한 신석정 시인은 부안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가 석정夕汀이다.



    1930년대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고, 주로 전원시를 썼다.



    한용운 영향을 받아 경어체를 자주 사용했다.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1930년 서울에서 박한영 가르침을 받아 불전도 배웠으며, 6·25 후 태백신문사 고문, 전주고 교사, 전북대에서 시론 강의, 김제고 교사, 전주상고 교사로 근무했다.



    67년 한국예총 전북지부장도 역임했다.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한 후 수많은 명시를 발표했고 39년 첫 시집 촛불에 이어 슬픈 목가‘, ’빙하氷河‘, ’산의 서곡’, ‘바람소리를 펴냈다.



    현실사회에 관심을 갖은 시도 많다.













    뜻이 높은 산과 흐르는 물, 즉 자연에 있다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가 석정의 좌우명이다.



    속된 것을 멀리 한다는 도연명의 경지를 추구한 시인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한다.



    고택, ‘청구원靑丘園을 돌아보고 부안읍 남쪽 매창공원에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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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특집> 변산유람기()

        

    여류 시인 매창이 사후 407년만에 김호석 화백에 의해 영정으로 재현됐다. 사진은 20174월 매창 영정 제작 발표회에서 공개된 영정 모습.(부안군청 제공)




    <매창공원>













     

    <매창공원>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매창李梅窓(1573~1610) 대표작 이화우梨花雨로 그리운 임, 촌은 유희경(1545~1636)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다.



    매창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3대 여류시인이다.



    황진이가 꼽았다던 서경덕·황진이·박연폭포등 송도삼절松都三絶(개경에서 유명한 세 가지)처럼 신석정은 부안삼절扶安三絶이매창과 이매창이 사랑한 유희경, 직소폭포를 꼽았다.



    석정 자신이나 초임지와 유배지가 부안인 고려말 대문호 이규보를 선택치 않고 유희경을 선택한 것은 시인의 겸양의 소치이나 부안삼절도 바꾸어지기 바란다.




    매창은 부안현 아전 이탕종 서녀로 태어났다.



    황진이(1506?~?)보다 늦은 시기다.



    황진이가 수많은 남성을 적극 유혹하기도 하고 희롱했던 반면, 매창은 사랑을 기다리며 마음이 삭히는 전형적인 조선여인이다.



    1590년 처음 만난 천민 출신 천재시인 유희경과 2년 간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임진란이 발발하자 이별한 후, 그를 기다리며 이화우를 남겼다.



    촌은은 의병을 이끌고 공을 세워 양인으로 면천免賤은 물론 종2품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도 매창을 지극히 사랑해 계량에게(증계랑贈癸娘) 등 다섯 편의 시를 남겼다.



     ”그대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 비 뿌릴 때 애가 끊겨라.“


    라는 유희경의 매창을 생각하며라는 시비 앞에서 해설사는 이 비를 볼 때마다 여성 탐방객들이 이런 시를 남기면서 왜 매창을 내버려 두었는가?“라며 분통을 터뜨린단다.



    부안현 소속 기생을 소실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천민에서 종2품까지 오르면서 얼마나 처신을 조심했는지 알 수 있다.







    시조와 한시, 춤과 거문고에 능한 매창은 1599~1601년 김제군수 이귀(1557~1633)’ 총애를 받았고, 1601년 부안에 들렀던 홍길동 저자 허균(1569~1618)과 정신적 사랑이 시작된다.















    허균이 부안에 올 때마다 매창과 필자 직계 11대 선조로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켰던 노곡공 고홍달할아버지가 늘 함께 했다.


    노곡공 친동생 '고홍건' 할아버지는 인조를 수행하고 남한산성 수어장대 북쪽 서문 장수로 활동했다.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三頭(세 절하 그 때마다 각각 , 모두 아홉 머리 조아려 절하 방식) 치욕을 당한 인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매창은 1602년 전라관찰사 한준겸(1557~1627) 생일잔치에 초대돼 시를 남기기도 한다.





    이후 부안현감 심광세(1577~1624) 등과 변산유람을 하며 어수대에 올라등의 시를 남긴다.



    유희경과 15년 만에 재회한다.




    이미 양반이 돼 버린 유희경과 35세 늙은 기생으로 변한 매창과의 만남이다.






    허난설헌 동생 허균은 공주목사를 지낼 때 심광세 등과 백마강을 유람했다.



    1608년 공주목사에서 파직된 허균은 노곡공, 매창과 함께 말을 나란히 타고 우반동 성계골 등 변산을 유람했다.



    우반동은 훗날 실학의 비조鼻祖, 반계 유형원(1622~73)1653년부터 은거하며 반계수록을 지은 곳이다.



    한양에서 허균은 1609계량에게봉래산(변산) 가을빛이 생각나 변산에 가고픈 글을 남긴다.



    161038세로 요절한 매창은 현 위치인 공동묘지에 묻힌다.



    뛰어난 재능과 미모를 겸비했으면서 기생이라는 신분의 굴레로 사랑과 가정은 물론 자녀도 일구지 못하고 스러져갔다.



    현청에서 남쪽으로 5리가량 떨어진 묘지는 매창뜸이라 불려졌다.






    자신은 적자이면서도 서자의 가여운 처지를 생각해 홍길동전을 썼던 시대 불운아이자 선각자, 허균은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를 지어 애도한다.


















    훗날 현대시조 거장, 가람 이병기(1891~1968)를 비롯한 기라성 같은 문학인이 매창을 기리는 작품을 남겼다.


    매창묘는 나무꾼 등 이름 없는 민초들이 벌초를 해주고 1655년 부안 사람들이 비석을 세웠으며, 1668년에는 부안현 아전들이 수백 편을 남겼다는 매창 작품 중 57편 한시와 이화우라는 시를 모아 개암사에서 매창집을 간행했다.



    하도 인기가 좋아 종이가 딸릴 정도였다고 전한다.



    2001년에는 1천여 기 묘를 이전하고 이매창과 판소리 명창 이중선(1901~1931) 묘만 남기고 수많은 선비와 매창이 주고 받은 시나 매창을 기리는 시를 새긴 시비와 함께 매창공원이 준공된다.




    허균처럼 호방하고 재기가 넘쳤던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1583년 평안도도사로 부임하다가 송도 황진이 무덤가에 술상을 펴 놓고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라는 시를 지었다가 파직됐다.




    매창도 죽은 지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시대를 풍미하는 시인묵객은 물론 수많은 사람의 매창을 기리는 시와 소설은 물론 매창문화제 등도 그치지 않고 있다.



     

    매창은 갔어도 그가 남긴 빼어난 한시와 시는 후세인의 심금을 울리고 그녀가 선비와 거문고를 뜯으며 노닐었던 성황산 중턱 서림공원 금대琴臺 주변에는 매창시비 등이 세워졌다.




    여류시인 매창은 사후 407년만에 김호석 화백에 의해 영정으로 재현됐다.



    그러나 2017년 4월 영정 제작 발표회에서 공개된 모습은 38세 요절한 매창이 오십 대를 넘어 육십 대로 보이는 것은 필자 시각만일 지 궁금하다.








    <석불산 고씨 종중산>




     

    <석불산 영상랜드와 청호저수지>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세트장은 변산면 궁항리와 하서면 석불산 등 세 곳에 있다.



    석불산은 임진란과 갑자년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 임갑병공신으로 사방 십리를 사패지로 하사받은 필자 선조들이 묻힌 세장지世葬地다.



    노곡공의 큰 아버지, 고희 장군은 북쪽으로 피신하는 선조 어가를 수행하며 임진강을 업고 건넜을 뿐 아니라 개경에서 선조의 명을 받고 변장을 한 다음 왜구가 점령한 한양을 지나 충청관찰사와 전라관찰사를 만나러 남쪽에 내려 온다.



    의병 모집을 하라는 선조 명령을 충청, 전라관찰사에 전달하기 위해서다.



    전주에 도착해 명령을 전달하는 사이 부안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나라가 왜구에 짓밟히는데 자식 죽은 것이 대수냐?"며 부안에 들리지도 않고 선조를 향해 다시 북행한다.



    고희 장군 역할로 호남에서 고경명 장군 등이 대규모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 등에서 장렬히 산화한다.



    평양에서 선조를 만난 고희 장군은 선조를 호위하며 대동강을 건너다가 왜구들과 싸우면서 오른 쪽 귀를 잃는다.



    때문에 훗날 선조의 명령으로 만든 영정에도 한 쪽 귀밖에 없다.




    조선중기 대표 서예가 한석봉(1543~1605)이 쓴 유교서 등 20215점이 보물 739호로 지정됐다.






    <종중산 내 2만평에 들어선 불멸의 이순신 세트장-왜관거리와 오사카성>






    문중토지에 오사카성과 왜관거리 등이 세워져 방영 시에는 수 킬로 가량 차량이 밀릴 정도였으나 관광 동선動線을 벗어나 찾는 이가 많지 않다.



    필자가 하서국민(초등)학교 때 소풍지다.



    해발 288m 정상까지 탐방로가 잘 개설됐으며 동쪽에는 호남평야와 청호저수지가, 서쪽은 서해바다, 남쪽은 변산, 북쪽은 군산을 넘어 충남 장항까지 환히 보인다.



    사진을 찍고 주차장에 내려오니 성남고 33회 걸물인 장다리 오인석과 거꾸리 박영규가 헐레벌떡 따라온다.









    <세트장에서 청룡언월도를 치켜 세운  오인석-오운장>






    <세트장에서 장팔사모를 어데 두고 삼지창을 고누는 박영규-박익덕>






    세트장에 있던 청룡언월도를 세워들고 오인석이 관운장처럼 찍은 사진과 박영규가 장팔사모를 어데 두고 삼지창을 고누는 사진을 카톡에 올려 한참을 웃었다.



    에그~ 어디가나 인물값을 한다니까?








    <143만평 청호저수지-거북이 닮은 대덤산>






    석불산 동쪽 143만 평 청호저수지를 돌아봤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계화도간척사업을 하면서 바닷가에 인공제방을 쌓아 만들었다.



    정읍·임실 섬진댐(옥정호)에서 유역변경 식으로 물을 돌려 수십 킬로 동진강도수로를 따라 청호저수지에 저장했다가 제방 북쪽 계화도간척단지 농업용수로 공급한다.



    붕어와 메기, 장어 등이 지천이고 거북이가 잠수하는 듯한 대덤산앞 수만 평 연꽃과 함께 관광지로 개발될 조짐이다.



    전라도 관찰사로 풍수에 해박했던 이서구는 남쪽 2km 부근에서 대덤산을 바라본 후 "먼 훗날 큰 호수가 생기면 인물이 헤아릴 수없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는 구전을 어릴 적부터 들어왔다.



    암행어사 박문수(1691~1756)가 어염시초魚鹽柴草(·패류와 소금, 땔감, 나물과 채소)가 풍부해 조선팔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을이라고 왕에 고했다는 필자 고향, ‘청호晴湖마을은 원래 호수(저수지)가 없었다.



    훗날 간척으로 엄청난 호수(저수지) 명칭으로 사용되자 선조의 예지가 있었던 것이라고 회자된다.



    생거부안生居扶安(살기는 부안이 좋다) 어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변산을 십승지十勝地(전쟁이나 기근을 피하기 좋은 10개 지역) 중 한 곳으로 기록한 것도 우연이 아니리라.

        





    <비득지 풍차 바지락죽집>






     

    <바지락죽과 바지락회무침, 부안 뽕주>



    점심 때가 돼 하서면 비득지 풍차바지락집으로 갔다.



    서빙을 하는 시누이와 올케 등이 뛰어난 미모일 뿐 아니라 변산에서 바지락 회무침이 가장 잘나오는 곳이라고 했더니 서울 안가고 바지락죽집에 사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다.



    부안특산물인 뽕주와 소주에다 회무침을 먹으니 변산도 식후경이다.



    바지락이 많이 들어가 손꼽을 만하다.



    거나하게 한 잔씩 걸치고 새만금으로 차를 몰았다.






    <새만금33센터>




















     

    <새만금방조제와 새만금33센터>


    변산면 대항리에서 1991년 착공한 새만금 1호와 2호방조제를 따라 신시도 지척 새만금33센터에서 새만금 홍보영상과 함께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무려 28(27)째 공사만 진행되며 건설업체 공사물량으로 전락해 시공업체와 시행기관만 쾌재다.



    주민들은 한 해 5천억에 육박하는 새만금 수산물이 생산이 안 돼 생거불안生居不安으로 전락했다.



    지금도 조력발전과 해수유통및 개발가능지만 개발해 산단, 공항, 항구, 관광‘ 4대 핵심에 집중투자가 국가나 전북 모두에 이익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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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특집> 변산유람기()

        





    <직소폭포 가는 길>





     

    <실상사와 봉래구곡, 직소폭포>


     

    새만금33센터를 구경하고 지척의 고군산군도를 가려했으나 바쁘다는 의견도 있고, 섬들을 구경하기에는 구름도 잔뜩 끼어 그러자고 했다.



    변산면 소재지에서 내변산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내변산탐방센터 주차장에서 하차했다.



    수십년 전에는 상상 못할 도로다.



    가는 도중 20대 초반, 필자를 포함한 동네 선후배 다섯 명이 채석강을 거쳐 변산면(당시 산내면) 소재지에서 능선과 봉우리를 넘고 넘어 월명암을 거쳐 석양 무렵 직소폭포에 도착한 경험을 말했다.



    닭을 냉동시켜 가져갈 수도 없고 한 여름이라 냉동해도 바로 녹아 허리띠에 산 닭두 마리 다리를 새끼줄에 거꾸로 묶고 갈 수밖에 없었다당시 버스 안에서 닭 한 마리를 놓쳐 버스 속에서 닭을 잡느라 혼났다고 했더니 폭소가 터졌다.



    그 닭은 직소폭포에서 매운탕이 됐지만 요즘 닭을 산 채로 매달고 산을 타면 동물학대죄로 처벌이 확실하다.





    <실상사지>










    봉래구곡 물길을 따라 개설한 완만한 등산로도 30여 분이면 직소폭포에 도달한다.



    상전벽해다.



    6·25 토벌과정에서 소실된 변산에서 가장 큰 실상사터를 지났다.



    당시 좌익으로 몰려 총을 맞고 숨진 주지 스님은 10, 37.5kg 금바둑판을 묻어놓고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숨지기 직전, “금바둑판! 금바둑판!”을 뇌까리며 숨졌다고 한다.



    몇몇 경찰이 절터 주변을 헤집고 다녔으나 찾지 못했다.







    <과거 상수원>



    <광주에서 올라 온 김영선 친구와 베트남에서 변산유람을 위해 귀국한 신경식 친구>




    <일산(광호), 세종시(태환), 광주(영선), 베트남(경식), 서울(재윤), 당진(국환)>







    분옥담을 지나 과거 부안군 상수원이던 호수가 남쪽 관음봉(내소사 뒷 봉우리)을 배경으로 멋지게 위치했다.














    <옛날 선비들이 노닐던 봉래구곡 중심-너럭바위>



    <동초 김석곤 선생이 쓴 것으로 알려진 봉래구곡 글씨>






    호랑가시나무, 미선나무, 꽝꽝이나무등 천연기념물을 보며 오르다가 동초 김석곤 선생이 쓴 봉래구곡蓬萊九曲 글씨가 새겨진 너럭바위를 구경했다.



    매창과 허균, 고홍달 할아버지는 물론 강세황 등 무수한 선비가 노닐던 곳이다.








    <직소폭포>












    조금 더 오르니 직소폭포다.



     

     

    퇴계 이황이 쓴 실상사와 직연()폭포, 마천대 등 56자씩 쓴 7언 율시 중 두 번째 직연()폭포直淵()瀑布 시를 보자.




     

    白練橫飛翠障圍 흰 명주가 옆으로 날아 푸른 장벽을 둘렀고/


    劈開山骨減雲肥 산 바위가 쪼개져 구름이 살찌는 것을 덜었구나./


    漲時河落深舂地 넘칠 땐 은하수가 깊은 봄에 땅으로 떨어지고/


    急處雷奔下激磯 급한 곳은 천둥처럼 물가 돌을 내려치네/


    何許靈源連海窟 어디쯤에서 영원靈源이 바다 굴로 이어졌을까?/


    幾多餘沫散林霏 엄청난 남은 거품 수풀로 흩어진다/


    雄觀未遂罏峯勝 웅장한 향로봉 승경을 아직 구경 못했으니/


    且向玆山欲拂衣 또 이 산을 향해 옷소매를 털고 싶구려.“






    <변산면 도청리 샹그릴라 펜션 입구에서 기다리는 친구들>평택 재우와 제주도 세홍 부부







    <데이지꽃이 활짝 핀 샹그릴라





     

    직소폭포를 구경하고 해가 많이 남았으나 숙소인 샹그릴라 펜션으로 가자는 의견이 있어 오후 다섯 시 펜션에 도착했다.



    하얀 데이지 꽃이 지천인 펜션입구에 성남고 3학년1반 친구들, 환영한다는 플래카드와 함께 평택 심재우 부부와 제주에서 온 박세홍 부부가 머리 위로 사랑의 하트를 만들며 일행을 환영한다.



    미리 펜션에 도착한 못 말릴 친구들의 우정이라 버스 속 친구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짐을 풀고 일부가 해변 바비큐 파티를 준비하는 동안 주변을 돌아봤다.



    용이 여의주를 문 듯, 태양을 삼킨 듯 한 사진 현장인 솔섬 등을 돌아보고 왔다.



    안식구들은 그네를 타는 등 동심으로 돌아갔고, 서서히 해가 저물었다.





    <해변에서 캠프파이어와 바비큐 파티를 준비 중인 친구들>


















    <33회 인물, 오인석 친구가 분위기를 잡고 있다>





    <멀리 평택에서 온 심재우 친구와 제주도에서 온 박세홍 친구가 용인 이종웅 친구가 준비한 삼겹살을 굽고 있다.>



























    <서서히 날이 어두어지고>







    <캠프파이어와 바비큐에 영상음악까지>











    <밤이 깊을 때까지 놀다가 버스 노래방으로 옮겨 몇 시간>





    세홍이와 재우가 능숙하게 삼겹살을 구워내고 술판이 벌어졌다.



    노래와 춤이 계속되다가 수자원공사 퇴직 후, 아라뱃길 홍보관장을 역임 중인 장다리 오인석의 오징어춤에 박수와 웃음이 쏟아졌다.



    버스 속 노래방에서도 한참을 놀다가 잠에 들었다.






    <05/19 아침>





    이순신- 전라좌수영 세트장>







     

    <궁항 이순신 세트장과 채석강까지 마실길>


     

    19일 아침, 궁항 해변가 불멸의 이순신전라좌수영 세트장을 구경하고 일부는 버스를 타고 채석강 군산식당으로 가고 10여 명은 마실길을 따라 채석강까지 걷기로 했다.







    <전라좌수영 세트장에서 채석강까지 마실길에서>





    <격포항 도착>









    <부안사람이 즐기는 풀치-갈치를 건조해 만듬>





    곳곳 해변가와 마실길에서 사진을 찍고 30여 분 걸으니 숲속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지 몰랐다.



    아래쪽으로 가자는 의견을 따라 내려왔더니 채석강 옆 격포항이다.



    서해훼리호 사건으로 유명한 위도로 가는 여객선 출발지다.



    작은 갈치를 말린 부안 특산물, ‘풀치등 사진을 찍으며 군산식당에 도착했다.



    조기백반을 시켰다가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먹으니 백합(대합, 생합)정식으로 바꾸었다.



    음식을 보니 바꾸기 잘했다는 생각이다.



    바지락죽, 바지락회무침, 뽕주, 백합구이와 정식, 풀치조림 등 부안특산품은 다 먹은 셈이다.



    좋은 안주로 아침부터 거나하게 술을 들었다.








    <군산식당 백합>



    <격포 수산물상가>





    소동파 적벽부에서 유래했다던 적벽강일대를 드라이브 했다.


    유비와 손권 연합군이 제갈량과 주유의 노력으로 조조 80만 대군을 화공으로 몰살시킨 '적벽대전'과 김삿갓(김병연, 1807-1863)이 죽은 전남 화순 '적벽 '등 중국과 한국에는 '적벽'이란 지명이 무수하다.








    <고사포 해수욕장>



    고사포해수욕장을 돌아본 후, 채석강으로 돌아왔다.






    <닭이봉>





    <채석강해수욕장과 대명리조트>





    여성해설사 안내를 들으며 첩첩바위가 책처럼 쌓인 채석강을 구경했다.



    전북기념물 제28호이며, 변산국립공원 채석강 중심 산인 닭이봉 남쪽은 격포항이고 북쪽은 채석강해수욕장이며 중간 닭이봉 해변가 1.5층암절벽과 바닷가가 변산팔경인 채석범주彩石帆舟 현장이다.



    해식동굴와 습곡, 공룡발자국 및 나무화석으로 유명하다.
























    <나무화석>




    <습곡>






















    이태백에 빠져 죽었다던 중국 채석강에서 따 왔다.



    경치에 반해 연인들이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는 낭설이 있으나 청춘남녀와 가족 등 탐방객이 사시사철 그치지 않는다.





    <능가산 내소사>











    내소사 일주문에 4쪽의 싯구가 조각된
    편액이 걸려있다/해안(海眼)大宗師
    (1901-1974)의 깨닭음을 노래한 오도
    송(悟道頌)으로  은산철벽도 녹여버리
    는 大自由의 경지를 노래함
    (一中 金忠顯 書)





    鐸鳴鐘落又竹?(탁명종락우죽비)
    鳳飛銀山鐵壁外(봉비은산철벽외)
    若人問我喜消息(약인문아희소식)
    會僧堂裡滿鉢供(회승당리만발공)

    목탁소리 나자 종 울리고 또 죽비 소리에
    봉황은 은산 철벽 밖으로 날았도다
    만약 내게 기쁜 소식 있냐 물으면
    회승당 안에 만발공양이라 하리라




    *글중 봉황(鳳~法名이 鳳秀(봉수)
     였던 자신..












     

    <능가산 내소사와 곰소항, 개암사>


    곰소만을 바라보며 해변 드라이브를 즐기며 내소사蘇來寺에 도착했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부흥군을 처부수기 위해 인근에 상륙해 이 절을 찾아 시주한 것을 기념해 소래사였다가 내소사로 바꿨다는 말도 있으나 정확치 않다.



    전나무길을 따라 대웅보전과 내소사 동종 등에 대해 해설사 설명을 듣고 1천년 수령 느티나무와 절 뒤쪽 관음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꽃무릇











































































    일주문 앞에 와 젓갈 정식 등을 하면서 동동주와 소주 등을 마셨다.



    곰소항을 구경하려 했으나 주차장이 없어 지나쳤다.



    중학교 동창이 운영하는 젓갈집에서 일행이 젓갈 구입 후, 개암사로 향했다.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 은거지와 부안청자박물관을 지나쳐 아쉬웠다.



    서울까지 가려면 석정문학관에 다섯 시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의견 때문이다.
















    멀리 우금암을 배경으로 한 개암사를 구경했다.



    내소사와 함께 현존하는 부안 2대 사찰이다.



    우금암까지는 산행으로 30분이 걸리며 우금암성은 백제부흥운동 근거지인 주류산성으로 유명하나 충남 서천 설도 있어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여행 후 느낌과 아쉬웠던 점>


    일정이 촉박해 계화도간척단지와 고군산군도. 반계 은거지 및 부안청자박물관을 빠뜨릴 수밖에 없어 아쉬웠으나 수도권 친구 입장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마를 타고 변산유람을 한 강세황과 오지도 않고 변산유람기를 쓴 퇴계 이황등은 빼어난 필치로 변산을 극구 칭찬했다.



    여행이 극히 일부의 전유물이던 시절로, 해외는 꿈조차 꾸지 못하던 시절이다.






    반면 현재는 해외관광 연 2천만 시대다.



    지구촌을 이웃 마실 가듯 하는 친구들이 옛 선조와 같은 감흥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렵다.






    필자도 20166, 북유럽 4개국을 돌아보고 노르웨이에서 빙하가 녹은 4-5m 폭포 등 수백 개가 넘는 폭포를 구경하다 이틀도 안 돼 2-3m 폭포는 사진도 찍지 않는 등 관심이 사라진 경험을 했다.



    양귀비도 흔하면 양귀비가 아니다.”



    관광도 희소성의 원칙이 적용된다.



    "에스토니아 등 발틱 3국에 가면 여자들이 얼마나 예쁜지 김태희가 밭을 메더란다."는 말도 있다.



    여자마다 빼어난 미인이다.






    세계각국을 누빈 친구들 눈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처럼 내 나라, 내 음식, 우리 역사와 관광자원을 알지 못하고 외국 것만 쫓는 것은 주춧돌 없는 건물과 같다.



    국내여행을 충분히 한 후 아이들이 자존감과 판단력이 섰을 때 해외로 나가길 부탁하곤 한다.



    성남고 33회는 카톡만 180여 명이 들어올 정도로 단합심도 좋고 기타와 섹소폰, 골프, 탁구, 사이클, 산악회, 낚시회, 문화유산 답사반 등이 따로 있을 만큼 활동도 왕성하다.



    과거 회장단도 그랬지만 진동현 회장과 인경환 부회장, 안종익 총무(문과), 김세영 총무(이과) 등 33회 집행부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정성 있게 열성적으로 동기회를 이끌어 대한민국 최고의 고교 동창회라는 부러움을 사게 만들었다.



    성남고 모든 동문 선후배와 친구 및 가족 모두 건강과 행복이 계속되길 바란다./취재국장 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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