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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군 여행 자료
    충청세종백제 2006. 3. 1. 08:13

    2004 여행(2004. 8. 6-8.7)

     

    (홍성군)

    최영(崔瑩:1316-1388)  고려 말기의 명장이며 청빈한 충절의 표상이다. 무민공 최영장군은 1316년 최청의 현손인 사현두정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어린 영에게 "너는 앞으로 관리가 되어도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고, 황금 보기를 돌같이하라" 고 가르쳤다. 1352년 조일신난을 평정하여 호군에 이르며, 원나라의 요청으로 장사성의 난을 토벌하고 압록강에서 홍건적을 격퇴하는 등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고 요동정벌을 시도하였던 고려말의 명장이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에게 잡히어 고봉현(지금의 고양군)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73세를 일기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 내가 살아오면서 한 번이라도 사리사욕을 챙겼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요,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만 일해 왔다면 내 무덤에 풀이 단 한포기도 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과연 장군의 무덤에는 풀이 한 포기도 나지 않아 붉은 무덤이라고 불렀다.
    홍북면은 노은리에 조선왕조 세종의 사육신 중 한 분인 매죽헌 성삼문학사와 더불어, 대인리에 최영 장군 출생한 영지로서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성삼문(成三問:조선 세종) 창원인 성삼문의 자는 근보이고, 호는 매죽헌이다.
    1418년(태종 18년) 아버지 도총관 성승과 어머니 박씨의 장자로 홍북면 노은리 적동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해산할 때에 공중으로부터 "낳았느냐"라고 묻는 소리가 세번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삼문"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어려서부터 천자가 단정하고 총명하며 성품이 강직하더니 세종 무오년에 문과에 합격하고, 정묘년에는 중시에 장원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세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가 되어 신숙주등과 함께 어학과 음운을 연구하였고 사성을 연구함으로써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하였다.
    군에서는 최영, 성삼문 생가지 정비를 위해 부지매입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1944)
    고종16년(1879) 8월 29일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이라는 곳에서 청주한씨 서원군 한명보의 후손인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의 차남으로 출생한 선생은 어릴때 이름은 유천(裕天), 본명은 정옥(貞玉), 불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 (卍海, 혹은 萬海)라 한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26세에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하여 경악의 대가로 명승강사 가 되었다.
    1910년에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등을 반대 철폐하고 33세에 만주로 망명 하여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등의 지사들을 만나서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월에 최린과 상의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 할 것을 결의 하였으니 이것이 3.1 만세운동의 발단이 되었으며,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다.
    3.1운동 전후에 걸쳐 만년기 까지는 불교대전,불교 유신론,채근담강의, 님의침묵 등을 저작하고 유심지, 불교지를 발간하였다. 선생은 민족독립,불교유신,자유문학 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기고 1944년 6월29일(음 5월 9일)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별세하였다.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지에는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으며, 주변 정비사업을 계속 추진중에 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 왕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땅(지금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韓應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이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裕天)이었다.

     
    < 만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의 생가. >

    어린 유천은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여 9살리 되던 해에 《서상기 西廂記》와 《통감 通鑑》을 독파하고 《서경 書經》에도 능통할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이렇게 뛰어난 유천의 재능에 대하여 조용한 두메산골에서는 칭찬이 자자하게 퍼져 나갔다.그 무렵 개화파 주도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의 비극적 막을 내린 후일담이 충청도 땅에까지 퍼지더니, 박영효의 《건백서 건백서》가 올려지고, 자유민권사상이 대두되면서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아버지 한응준은 어린 유천을 불러놓고 세상 형편과 국내외 돌아가는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는 후에 선친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는 선친에게서 조석으로 좋은 말씀을 들었다. 선친은 서책을 읽다가 가끔 어린 나를 불러놓고 역사상 빛나는 의인결사의 언행을 가르쳐주시며 세상 형편, 국내외 정세를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셨다. 이런 말씀을 한 번 두 번 듣는 사이에 내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 나도 그 의인 결사와 같은 휼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이 글은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란 글의 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훗날의 만해 스님을 이해하는 데 선친의 가정교육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선친으로부터의 감화와 더불어 당시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도 만해로 하여금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에 눈떠가게 하였다.
    한편 국내 사정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외국 세력이 점차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는 일본, 청 러시아의 싸움터가 되었고 조정에서는 수구파와 개화파, 여기에 겹쳐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 등의 정권 싸움으로 백성들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 1984년 만해의 부친인 한응준의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역할을 설명하여 주는 교지이다. >

    급기야는 1894년에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그 기세는 삽시간에 정읍, 태인, 김제, 전주를 함락했다. 전라도를 거의 손에 넣은 동학군은 충청도 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 충훈부도사 한응준의 재등용을 요청하는 교지를 내렸고, 청나라 군이 조정의 요청에 의하여 출병하자, 일본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리하여 청일전쟁은 이땅을 무대로 참화의 비극을 토해내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한학에 정진해 온 유천은 16세 되던 해에 서당의 훈장을 하고, 또 전정숙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여 세속적인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급박한 시대상황은 그에게 삶의 전환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16살의 유천도 동학란과 청일전쟁의 격동기에 이땅에 살면서, 민중과 함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그는 역사의 현실을 통감했고, 나아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야 하는 인생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덧없는 것이 아닌가. 밤낮 근근 살자 하다가 생명이 가면 무엇이 남는가. 명예인가, 부귀인가, 모두가 다 아쉬운 것이 아닌가. 결국 모든 것이 공(空)이 되고, 무색(無色)하고 무형(無形)한 것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그는 깊은 늪 속에서 길을 잃었다. 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회상하여 보았으나 회의의 늪에서 나오는 길은 오히려 더 막막하기만 했다.
    이렇게 유천이 회의의 늪에서 방황하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점점 어두운 먹구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으니, 갑오경장을 통해 수구세력으로서 귀족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귀족들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오백년의 조선 왕조는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혼란과 갈등은 드디어 을미사변(1895)이란 거센 소용돌이로 이어지고 나라는 온통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갔다. 그럴수록 유천의 심중에 일어나는 갈등과 회의도 커져만 갔다. 자고 나면 소란스러움은 더해갔고,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하는데, 그것은 도대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란 말인가? 그는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님의 沈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백야 김좌진 
     
    김좌진(金佐鎭:1889~1930)
    호는 백야요,고종 26년(1889) 음 11월 24일 갈산면 향산리에서 출생하였다.
    18세때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노예해방의 첫 기록을 남겼다. 15세가 되던 해는 대대로 살아오던 80칸이 넘는 집을 내놓고 작은 집으로 옮긴 다음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었는데, 이것은 우리 지방에서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첫 기록이다. 그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호흥학회라는 장학단체를 설립하여 지방의 유망한 청년들을 선발, 서울 유학을 시키기도 하였다. 20세 때에는 이봉창과 같이 서울에 고아원을 설립하여 무의무탁 고아들을 양육하는 한편, 한성신보의 이사로 취임하였고, 관철동 대관원자리에 이창 양행과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설립하였다.
    31세가 되던 해에 서백리아에 출전중이던 일본의 가납연대 3,000명을 화 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연대장 가납 이하 1,200명을 함몰시키고 천수백명 을 전상자로 만든 싸움이 저 유명한 1920년 10월 21에 있었던 청산리 작전 이다. 38세에는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하고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40세가 되던 해 군무서독변겸 북만군정서총사령, 한족총연합회 주석에 취 임하여 재만동포의 교육문제와 민생문제에 주력하는 한편,중국의 항일세력 과 연합전선을 결성하고 대일항전을 위하여 준비를 하던 중,1930년1월24일 하오 2시 중동 산시역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당원의 흉탄으로 일세의 풍운아 백야 김좌진 장군은 생의 장막을 내렸다.
    홍성군에서는 1991년부터 김좌진장군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했다. 

    김좌진장군 주요사적지
     
    백야 김좌진장군 생가 터
     소재지 충남 홍성군 홍성읍
    착수/완료 1979. 5. 8. ∼ 1983. 5. 31 
    총 사업비 10,100만원
    (국비 : 6,000만원, 도비 : 1,000만원)
    군비 800만원, 성금 및 기타 : 2,300만원) 
    시행 주최 김좌진장군동상건립 추진위원회 
    동상크기 높이 5.2m, 가로 3.3m 

    장군이 31세때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가납연대를 섬멸시킬때의 무장한 위용으로 독립군 대장의 늠름한 기상이며, 비둘기상, 청산리 작전도, 단장지통 시가 조형되어 있다. 
    장군의 우국시인 '단장지통' 을 기록하여 본다.
    " 적막한 달밤 칼머리에 바람은 찬데 칼끝의 찬서리는 고국생각 돋는구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일인고 더러운 세상 한 칼로 쓸어 버릴길 없다." 


     
    백야 김좌진장군 생가 터
     도지정 기념물 76호
    소재지 :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
     
    백야 김좌진 장군이 태어나 성장하였던 곳으로 생가터에는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백야 김좌진장군 주요사적지
    소재지 :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412-6
    이 비는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김좌진 장군의 치적을 적은 비이다. 이 비는 1949년 대한 청년단 홍성군단의 성금으로 건립하였으며, 홍성읍 오관리 남산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백야 김좌진장군 묘역
     대한 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장군의 유해를 안장한 묘역이다.
    1974년부터 보령시에서 장군묘역 성역화사업 추진, 업적과 독립정신을 후세에 계승코자, 청산리 대첩일을 추모 제향일로 정하고, 매년 10월22일 각계의 인사들이 모여 장군을 추모하고, 독립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가상체험관

    지정별 지방기념물
    지정번호 제 73호
    소재지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규 모 총길이 900M, 높이 3.5M
    지정일 1984년 5월 17일
    소유자 보령시장
    관리자 보령시

     
    김좌진장군 사적지 찾아가는길
    김좌진 장군 생가 터 관리사무소 연락처
    주 소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
    전 화 041-634-6952

     
    대원군척화비
     지정사항 : 문화재자료 163호
     명     칭 : 대원군척화비 (大院君斥和碑)
     소 재 지 : 충남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산5
     지 정 일 : 1984.05.17
     
    척화비란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더욱 그러한 의지를 굳혀,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경계하여야 한다는 의지를 국민에게 심어주고자 서울 및 전국의 중요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홍성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넓적한 자연암석 위에 비몸을 꽂아놓은 모습이다.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할 수 밖에 없고, 화친을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라는 강한 어투의 경고문구를 적어 놓았다.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일제히 세운 것으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면서 일제에 의해 대부분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다. 이 비는 충남 지방에 남아 있는 3기의 척화비 중 하나로, 급변하던 구한말 당시의 상황과 쇄국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A지구 방조제
     
     서부면 궁리 방조제는 84년도 현대그룹에서 농지조성을 위한 간척사업을 한 곳으로 거대한 담수호를 만들고 있으며 방조제의 연장은 간월도까지 6.5km, 높이 28m에 달하며 약 400ha의 농경지가 조성된다.
    하절기 담수호에서는 30cm이상되는 잉어낚시로 인파가 모여들고 겨울에는 여러종류의 철새서식지로서 철새연구장소로 유명하다. 인근에 궁리, 하리, 남당항 3개 관광지구에 많은 횟집이 있고, 천혜의 조건을 갖춘 앞바다는 윈드서핑 등 여름철 레저스포츠의 최적지로 각광 받고 있다.

    교통안내 서울-->천안(경부고속도로)-->홍성(국도 21호)-->갈산(국도 29호)-->군도614호에서 30km-->궁리(A지구)방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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