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사설수필>
<칼럼> 벽골제·계화도·새만금 등 전북 간척사!
산내들바다
2025. 6. 18. 09:42
<전북지역 현재 해안선과 구 해안선 비교>
구 해안선- 방조제가 유력시 되는 김제 벽골제, 익산 황등제(호), 김제 만경 능제, 부안 고마제와 사산제 등 오랜 역사 이전부터 전혀 간척이나 방조제를 쌓지 않았을 때를 가정한 태고 적의 해안선
<전라북도 백제문화의 꽃, 전북해양문화- 곽장근 지음> 16p 스캔 사진
빨간 선은 간척사업을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한 현재 해안선이고,그 안쪽 검정 리아스식 해안선은 전혀 간척 등을 하지 않았을 때 지도로 추정된다.
고군산군도 신시도를 중심으로 직선으로 그은 선은 해당 지도에 새만금방조제를 그린 후, 스캔한 사진임.
김제 벽골제도 저수지가 아닌 백중사리 때의 최고 밀물을 고려한 방조제였던 것과 과거 호남평야 대부분도 바다였음을 보여준다.
현재 격포항 이전에 곰소항에서 여객선이 출발했듯, 더 오래 전에는 줄포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줄포항이 어항이었음을 보여준다.
위 지도 고부천 아래에 기록된 시제는 눌제를 잘못 적은 듯하다.
원평청이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바깥 북쪽(김제시 쪽)에서 동에서 서로 흘러 오랜 세월이 지나 물길이 바뀌었나 생각했는데 근년에 원평천 건너에서 수여거로 추정되는 개수로가 발굴됐다. 이로써 제방은 현 2.5km 보다 훨씬 긴 최소 3.8km다. 평야부에 3.8km 제방이 저수지 용도이겠는가. 해수를 막기 위한 방조제이겠는가?
------------------------------------------
<익산군청+ 황등요교 과거 호수일 때 지도>1872년 제작한 고지도
당시 익산군은 현재 금마 왕궁 춘포 삼기 팔봉동 정도가 행정구역
1872년 제작된 고지도, 오른 쪽 아래에 쌍릉이 있고, 왼쪽은 지금과 달리 요교 북쪽 깊숙이 호수였음을 알 수 있다.
원광대와 황등 중간 요교 남북쪽이 단순 저수지 제방이 아닌 (방조제)였음이 유력시 된다.
심지어 삼기면 삼기산 지척까지 호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안 동진과 김제 죽산 사이에 놓여진 동진대교에서 직선거리로 4km 상류에 있는 (김제 벽골제)도 단순 저수지 용도가 아닌 백중사리나 해일 때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방조제)다.
근년에 벽골제 발굴에서 드러난 '초낭'이나 '부엽토'가 층층이 쌓인 것도 하류 바닷물에 갯벌이 쉽게 녹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갯벌 유실을 막기 위한 새만금 방조제 '바닥보호공'과 유사한 연약지반 보호를 위한 초낭을 활용한 공법과 낙엽과 흙을 섞어 쌓는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제 벽골제는 '단군 이래 최초 간척사업'으로 평가될 수 있다.
-------------------------
==============
<김제부안 방조제 구축 및 간척사업 지도>
=================
<새만금 연도별 사진>
<칼럼> 벽골제·계화도·새만금 등 전북 간척사!
백제 비류왕 27년(330) 축조한 김제 ’벽골제碧骨堤’는 방조제다. 원평천·두월천 합류점 2km 하류 벽골제는 한국최초·최대 방조제 겸 저수지다. 단순 저수지가 아니다.
일제강점기 1925년 제방 중간을 파내 관개수로로 개축해 원형이 훼손됐다. 5개 수문 중 ‘경장거·중심거·장생거’ 외에 근년 벽골제 제1수문 ‘수여거(추정)’가 북쪽 제방과 1.3km 떨어진 김제시 방향에서 확인됐다. 제방은 2.5km에서 3.8km로 확대됐다.
완전 평야에 3.8km 저수지 제방을 설치했을까? 해수를 막는 방조제였다. 저수지라면 하류에 용수공급을 받을 농지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 바다나 갯벌이었다. 먼 훗날 일제가 간척했다.
특히 경사도 제로(o)에 가까운 호남평야 중심부로 3km 하류 죽산면 소재지 등 사방이 비슷하다. 지평선축제를 벌이는 원인이다. (백중)사리나 해일 등에 침수된 것으로 분석된다.
‘벽골제’는 방조제로 축조돼 제내堤內(제방 안쪽) 깊은 곳은 ‘조류지’ 형태 저수지로 활용되다가 매립 된 것으로 풀이된다. 일제는 간척 등 토지수탈에 나섰다. 식량이 부족한 일제는 땅값이 일본 1/10에 불과한 한반도에 대거 정착했다. 토지수탈은 호남평야에 집중됐다.
‘일제 간척지’는 하시모토가 1911년부터 간척한 김제 죽산면에 이어 광활·진봉·청하·만경, 익산 춘포·오산, 군산 대야·회현·옥구·옥서, 부안 동진 등이다. 군산항은 쌀 반출통로였다.
박정희 정부 ‘부안 계화간척’을 비롯해 산단·도심개발로 ‘군산 내초·오식·비응도’ 등 높은 갯벌은 대부분 간척을 끝냈다.
새만금과 계화도는 천양지차다. 1) 새만금 신시·가력갑문 상류 9-12km에 계화도 돈지·계화갑문이 있다. 밀물이 다가오면 갑문을 닫는다. 해수가 역류되기 때문이다.
바닷물이 새만금 보다 훨씬 늦게 들어와 일찍 빠지고, 땅도 높아 폭우에도 서해 방류에 문제없어 침수도 없다. 새만금은 일찍 들어와 늦게 빠지므로 갑문이 적으면 홍수 방류가 어렵다.
2) 계화도는 조류지 외에 썰물에 땅이 드러난다. 새만금은 대부분 드러나지 않아 깊은 곳은 수심 25m다. 농지·관광레저용지·수변도시는 상류이거나 높은 지역이다.
3) 계화도는 자체에 떨어지는 ‘강우량’ 밖에 없다. 새만금은 만경·동진강을 가둬 ‘호수 32배 유역면적’이 있다. 폭우가 댐·저수지 저장 외에는 새만금호로 쏟아진다.
해수유통 확대로 부지 침수를 걱정하나 내부 홍수로 마찬가지다. 해수냐, 담수냐 차이뿐이다. 성토는 필수다.
4) 계화도 앞에 깊은 ‘조류지’로 남은 지역 외에는 농지 등으로 활용된다. 새만금은 농지·산단·관광레저용지·수변도시도 있으나 전혀 경제성이 없다. 추가 예산도 엄청나다.
그간 새만금 예산 절반으로 육지에 보상 후 산단을 조성하고 절반은 토건업체에 나눠줬더라면 ‘국가·전북·업체·도민’ 모두에 이익이었다. 이외 지역 매립·성토는 정신 나갔다고 할 정도다.
5) 계화간척 때는 식량을 사올 달러가 없고, 당장 배고픔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식량이 남고 달러가 여유가 있을 때는 하지 말았어야 할 사업이다. 새만금은 말해 무엇 하리? 지금도 농지 ‘산단 전환이나 바다나 갯벌로 환원’이 모두에 이익이다.
6) 계화간척과 관련된 ‘섬진댐·동진강도수로·계화방조제·청호저수지·섬진댐 수몰민 거주지’ 등은 리어카 등 대부분 인력으로 추진했다. 돈을 벌었다는 도민이 엄청났다.
새만금은 토건업체가 중장비로 공사했다. 돈만 벌어갈 뿐 지역에 기업입주나 환원은커녕 봉사조차 없다. 새만금 35년에 돈 벌었다는 도민은 거의 없다.
7) 썰물에 드러나는 계화도와 달리 새만금은 최대 30억 톤 해수가 들어왔던 깊은 바다다.
8) 상해 포동(푸동)지구는 개발 전, 근교농업 지역으로 새만금처럼 깊은 바다가 아니었다. 벽골제 이상 높은 지역이 대부분이다. 방조제도 필요 없다. 포동지구와 새만금 비교는 엉터리다.
새만금은 ’1백년에 1백조‘를 투입해도 291㎢(8730만평) 토지 확보는 난망하다. 전북 국비로 토건업체 및 시행기관을 먹여 살리는 효과만 크다. 정부가 새만금 곳곳 ’내부 수심‘부터 파악해 ’중대결단(?)‘이 없으면 아득하다./편집국장 고재홍>